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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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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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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2
윈저 성(Windsor Castle)

 

 

 

템즈강 남단을 수호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 런던 타워라면 윈저 성은 북방을 지키기 위한 성이었다. 그 당시 런던에서 템즈강을 따라 배를 타고 윈저로 들어오는 길이 마치 “Wind Shore (꼬불꼬불한 물가) 같다”고 해서 '윈저'라고 불리우기 시작한 지역에 지은, 방이 1000개나 되는 천년 고성이다. 

 

 

 


유럽 도처에 산재한 많은 성들 중에서 오늘날까지 사람이 살고 있는 성 중에서 제일 크다. 런던에서 약 35km 정도 떨어져 있는 윈저 성은 1087년 정복왕 윌리엄이 성채에 기거하기 위해 목조 요새를 세우면서 시작된 후 헨리 2세때 석조로 개축 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된 것은 19세기 초 조지 4세 때였다.

 

 

 


대부분의 유년기를 이곳에서 보낸 영국 국왕, 에리자베스 2세는 요즈음도 주말과 휴가기간에는 이 곳에서 보낼 정도로 왕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템즈 강변 언덕 위 가파른 경사지에 세워진 윈저 성으로 들어가려면 삼거리에 서 있는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Queen Victoria Statue)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뒤로 담장을 따라 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입장료를 내고 일반에게 공개하는 곳 만을 관람하기 위한 긴 줄이다. 

 

 

 


성 안으로 들어가면 잘 가꾸어진 정원과 오래된, 그러나 화려하고 장엄한 내부 치장을 볼 수 있지만 사진을 못 찍게 하기에, 대개는 이 줄 옆으로 난 윈저 시의 뒷길을 따라 아담한 동네의 정취를 맛보며 롱 워크(Long Walk)와 만나는 지점에서 끝없이 뻗은 롱 워크를 보곤, 뒤돌아서 윈저 성을 본 후 도시의 중심가를 걸어 템즈강까지 성곽을 끼고 걸어 내려가 다리를 건너 유명한 이튼 칼레지를 보는 것이 윈저 성 관광코스다. 

 

 

 


 이번 여행에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12년 전의 여행 때엔 시간이 좋아 하루에 한번씩 있는 Beef Eater, 즉 왕의 호위병들의 교대식 모습을 흥겹게 볼 수 있었다.

 

 

 


머리에 쓴 검은 모자는 후에 캐나다에서 안 일이지만 캐나다산 검은 곰의 털로 만든 모자로서 그 하나의 가격이 당시 자그마치 $1,300씩이나 한다고 했다. 가격이 비싼 만큼 수명도 길어 한 40년 쓸 수가 있다는데 남이 쓰던 모자를 쓸 수도 없고 해서 매년 만드는 예산이 엄청나 모조 털로 대체를 하는 토의를 의회에서 할 정도였으니 그 모자가 대단하기는 대단한 모양이다. 

 

 

 


이번에 들은 이야기로는 모자를 인조 털로 대체 하였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써야 하는 모자가 몰골이 너무 처량해져서 다시 곰 털로 바꾸었단다. 요즈음에는 얼마나 하려나…


그런 대단한 모자를 쓰고 있는 대단한 사람들의 이름이 Beef Eater들이다. 오래 전, 오랜 전쟁으로 재정이 바닥이 나서 (장미 전쟁이라고도 일컫는 100년 동안의 전란) 왕의 호위무사에게 줄 월급이 업자 돈 대신 소고기를 주기 시작한 데에서 기인하였다고 하니…


소금을 주면서 병사를 기르던 그 옛날의 로마시대나, 소고기를 주면서 왕권을 보호하려는 영국이나, 그 권력을 쥔 사람들의 한결 같은 권력에의 욕심은 권력을 잡아보지 못한 나 같은 범인이 알기에는 너무나도 묘연한 그 어떤 것인 모양이다. 


오랜 가십 속에 이혼을 하고, 세인의 입방아 속에 프랑스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어 비극으로 끝난 다이애나의 결혼 생활이었지만 그 시작은 세계의 모든 선남선녀들이 동경하던 동화 속의 결혼식이었다. 


마차를 타고 롱 워크(Long Walk)를 나서며 행복에 겨워하던 모습이 참으로 잘 가꾸어진 그 길에 오버랩 되는 상념! “행복이란 무엇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한 사람은 비명 횡사하여 죽었는데 남은 찰스 황태자는 새 부인을 얻어 지금도 잘 살고 있고…. 


하긴 2018년이면, 66년간이라는 역사상 최장기 왕위 대기 기간을 인내로 기다리는 불운의 왕자인지, 아님 행운의 왕자인지 조차도 모르겠으니 말이다. 행복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그리 먼 편은 아니지만 성벽을 끼고 언덕을 내려가 템즈강변에 이르면 다리 건너에 영국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 이튼 칼리지가 있다. 무려 600년 전에 세워진 학교로 지금까지 총 19명의 영국총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어떤 환경에 세워진 학교인가?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그 곳까지 다녀 오도록 허락을 하지 않는다. 영국을 떠날 때가 되었으니, 이튼 칼리지의 독특한 교훈을 들으며 윈저를 뒤로 하였다.

 


1. 남의 약점을 이용하지 마라.
2. 비굴하지 않은 사람이 되라.
3. 약자를 깔보지 마라.
4. 항상 상대방을 배려하라.
5. 잘난 체 하지 마라.
6. 다만, 공적인 일에는 용기 있게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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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7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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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5
템즈강(Thames River) 유람

 

코츠월즈(Cotswold)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영국 남부의 6개 주를 지나며, 수도 런던 바로 아래 틸베리에서 북해로 흘러 드는 장장 346km나 되는 템즈강. 경사조차 심하지 않아 천천히 천리길을 구불구불 돌아 북해로 흘러 들어가는 템즈강은 그 길이의 반이 조금 못 미치는 하류에서부터 145km 가 되는 구간까지 매일 두번씩 조수간만의 차이로 수면이 오르내리다 보니 어디까지가 강물이고 어디서부터가 북해의 찬 바닷물인지 가늠하기조차 힘든 강이다. 


보통 때에도 약 7m의 조수 간만의 차이가 런던지방에서 일어나지만 홍수로 인해 상류의 호우가 강어귀로 쏟아지고 강한 조수가 바다에서 밀려와 종종 런던 중심부의 제방 도로를 침수하는 위험이 생기자 런던 시당국은 강하류에 방벽 건설을 시작해 1982년에 완공했고, 하구에는 템스 베리어를 설치하여 만조 때 철문을 닫아 수위를 조절할 수 있게 하였다. 


결국145km의 거리를 흐르는 동안의 낙차가 겨우 7m 정도라니 거의 평지에 고인 듯이 흐르는 강이다. 그래서인지 누런 강물이 참 더럽게 보인다. 그러나1717년 여름, 조지 1세를 위해 헨델이 헌정한 <수상음악>을 템즈 강 연회에서 초연하였듯이 템즈강은 영국의 역사와 함께 아직도 천천히 흐르고 있기에 오늘의 “나” 역시 그 강 선착장에서 런던 타워를 바라보며 유람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런던 시내의 많은 관광지와 유적지들을 좌우에 잘 보여주며 흐르고 있으니까.

 


 

 

 

런던 타워(Tower of London)


강변의 런던 타워는 1066년, 윌리엄 1세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강변에 지은 견고한 요새 중 하나다. 


템즈강 물결 따라 그 역사의 시간들은 다 흘러 갔지만 아직까지 정사와 야사, 그리고 문학작품으로 남은 역사를 보면 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점도 치고, 또 해양 대국으로서의 기초도 세우던 그리니치 천문대를 요새 안에 설립하기도 하였었고, 한 쪽에서는 정치라는 이름의 권력 투쟁과 사랑이란 이름의 욕망을 위한 피 튀기는 모략과 살인 등 인간사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모든 영욕의 자취를 감춘 채 요즈음도 많은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는 전쟁 박물관이다.


1483년 12세 때 즉위한 에드워드 5세가 불과 2달여의 재위기간 끝에 동생과 함께 요즈음에는 블러디 타워(Bloody Tower)라고 불리는 감옥에 유폐되었다가 리처드3세에 의해 암살된 뒤, 1674년에 가서야 런던 타워에서 두 형제의 뼈로 추정되는 유골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1536년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앤 불린(Anne Boleyn)이 간통죄로 처형된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1544년 레이디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는 부모의 야심과 술수로 여왕이 되었지만, 반역 혐의를 받아 딱 9일 동안 여왕 권좌에 앉았다가 처형장으로 끌려갔으며, 뒤를 이어 헨리8세의 친자식인 메리(Mary)가 등극하여 수많은 정적들과 개신교도들을 죽이어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역사에 남기며 오늘까지도 뭇 사람들이 파티때마다 즐겨 마시는 핏빛 칵테일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녀를 이어 마지막으로 남은 헨리 8세의 핏줄인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라 엘리자베스 1세가 된다. 피의 역사를 보며 죽음에서 모면한 그녀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현명하고 신중한 처신, 그리고 뛰어난 통치력으로 영국의 영광을 이끈 영명한 군주,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기록되었다.


다 열거를 하자면 엄청 긴 영욕의 피 냄새 나는 영국의 역사이지만, 현재 런던 타워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갖춘 성의 모습과 이중 성벽 사이와 지하에는 전쟁 당시의 각종 무기, 고문 도구들을 볼 수 있는 전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왕실의 보물관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530캐럿의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왕관, 의복 등 영국 왕실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진짜 다이아가 전시 되었을까? 사족으로 영국의 왕실에서만 이렇게 피 터지는 역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니 오해가 없기를…)

 


 

 

 

웨스트민스터궁(Palace of Westminster)과 빅 벤(Big Ben)


웨스트민스터궁은 1529년 대화재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왕의 정궁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공공시설의 상당수가 웨스트민스터 인근에 세워지게 되었다.


에드워드 1세가 1295년 궁전 안에서 최초의 잉글랜드 의회인 모범의회를 연 이후 의사당의 전신인 추밀원을 설치하여 자연스레 영국의 국회의사당(Houses of Parliament)이 되어 현재에도 상하원의 의회와 재판소로 이용하고 있다. 약1100개의 방과 100여 개의 계단, 그리고 4.8km에 이르는 복도가 있는 거대한 건물이다.


웨스트민스터궁 북쪽 끝에 있는 높이 106m의 시계탑의 4면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가 달려 있고, 그 안에 달린 큰 종(鐘)은 매 시간 런던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1858년에 세워질 때, 공식 제정된 명칭을 채택하지 않았기에 건설 책임자였던 벤저민 홀 경의 거구에서 유래한 '빅 벤'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다가, 201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여 '엘리자베스 타워’(Elizabeth Tower)라는 공식 명칭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에게는 빅 벤이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불린다. 


앞으로 2021년까지는 시계탑의 보수 공사로 인해 종을 울리지 않을 예정이란다. 비록 에밀레 종처럼 깊은 여운은 없지만 마침 여행 중에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런던 아이(London Eye)


1999년, 21세기의 개막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 브리티시 항공에서 135m 높이의 런던 아이를 세웠다.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관람차로 처음에는 5년만 운행하려 했으나 사람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으면서 영구적인 운행을 허가 받았다.


역학적으로 보면 위태로울 만큼 경사진 축에 매달린 자전거바퀴 같은 동그란 휠에는 32개의 캡슐이 달려 있는데, 1개의 캡슐에 최대 25명까지 탑승할 수 있으며 한 바퀴 도는 데 30분이 소요된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면 반경 40km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 게다가 노을이 지는 해질녘이면 아름다운 런던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는 낭만적인 장소로 사랑받고 있어 이제는 런던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자리잡은 명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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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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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5
영국 박물관(3) -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 그리스관

 
 
신들의 나라 그리스에는 모시는 신들이 많아서인지 곳곳에 참으로 신전도 많다. 그 많은 신전을 지으며 또 신들의 모양을 조각하려니 건축과 조각의 기술은 당연히 발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스의 옛 도시들마다 그 도시의 높은 산 정상에 신전을 지어 놓고는 이를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고 부른다. 아크로폴리스의 대명사가 된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이 아직도 그 위용을 자랑하며 오밀조밀한 아테네 시의 붉은 지붕 너머로 파랗게 출렁이는 지중해를 바라보고 서 있다.


BC 447년 공사가 시작되어 건물 자체는 BC 438년에 완성된, 요즈음 보아도 엄청난 크기의 흰 대리석으로 지은 직사각형의 파르테논 신전은 2,500년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많은 예술작품들이 부셔지고, 파괴되고, 뜯겨 나가고, 도난 당하여 이제 기본 골격만 남았지만 그 오랜 세월의 풍화 작용에도 많이 마모되지 않은 채 아직도 기본구조는 원상태로 남아 있어, 오늘날의 건축가들조차 그 옛날의 건축기술과 조형미에 감탄하고 있다.


 엘긴 마블이 영국 박물관에 있게 된 동기도 한번쯤은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과연 무엇이 옳은지….


1687년 9월 26일 파르테논 신전 안에 쌓아 놓은 오스만 투르크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폭발하면서 신전과 그 조각물이 크게 훼손된 채 방치 되고 있었다. 


1799~1803까지 오스만 투르크제국(현재의 터키)의 영국대사를 지낸 토머스 부르스 7세, 엘긴 경이 아테네에 부임하여 보니 방치된 채 쌓여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부서진 돌 덩어리들을 집 짓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가져다가 사용하며 훼손하고 있었다.


돌 덩어리 이라지만 이게 어디 그냥 돌 덩어리 이겠는가? 미술과 고대유물의 애호가인 엘긴경은 이러한 유물들이 점령군인 터키인의 무관심으로 파괴되는 현상을 보고, 미술가들을 동원하여 중요한 조각품과 건축 조각을 후손을 위해 측정, 스케치, 복제할 수 있도록 허가해줄 것을 오스만 투르크제국 정부에 요청했다.


오랜 협상 끝에 1802년,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그곳에 있는 옛날의 비석들과 돌 조각들을 운반할 수 있는 권한도 함께 부여 받아, 쓸만한 돌들을 골라 내고, 또 파르테논 벽에 남은 일부 조각을 떼어내어 7만 파운드라는 엄청난 자비를 들여 1802~12년 사이에 영국으로 가져갔다.  


정작 거금을 들여서 영국에 갖고 왔으나 정치를 하는 높으신 분들 반응은 시큰둥하였단다. 그래서 자신의 저택에 10년간이나 소장하고 있을 때 프랑스에서 많은 금액을 제시하며 사겠다고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막말로 본전의 반도 안 되는 3만5천 파운드에 영국 왕실에 팔아 오늘까지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물건의 현재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앞으로는 어디에서 보게 될까?  1962년, 그리스의 영화배우이자 여성 정치가인 멜리나 메르쿠리가 영국을 방문하던 중 대영박물관에서 엘긴 마블들을 본 후 ‘그리스로 반환 운동’에 앞장 서면서 그리스 정부는 끈질기게 엘긴 마블의 환수를 요구하고 있다. 


요즈음에는 “우리도 이제는 보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서 엘긴 마블이 돌아오면 전시해 놓을 박물관도 미리 지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2018년에도 그리스 총리가 또 다시 요구하고 있지만… 옛날 한국 법정에서 내린 웃픈(웃기지만 슬픈) 판결이 퍼뜩 떠오른다. “법은 지킬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지켜준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제일인 대영박물관은 주로 인류의 역사, 인간 삶의 발자취를 그 시대의 유물을 중심으로 전개하여 나가는 역사의 기록이라고 한다면, 루브르 박물관과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고대의 조각품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그림들로 인간이 누려 왔던 문화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이 세 박물관을 둘러본다면 결국 발굴 가능한 인류 최초의 생활양상에서부터 그 시대의 문화 생활까지를 가늠하며 지나온 역사를 관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유명한 영국 박물관 안에 한국관이 있다. 2000년 11월 기와를 얹은 한옥의 한 부분을 개방하며 한국관이 신설되었는데, 구석기 유물부터 청자•백자 등 조선 후기 미술품 2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빌딩 전체에 냉방장치가 안 된 이 큰 박물관 안에 오직 자그마한 한국관만이 여름철이면 시원한 냉방장치가 돌아 간다. 비록 전시품들은 다른 전시품들과 견주어 볼 때 초라하지만 시원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들려가게 하는데… 보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부끄러운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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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8
영국 박물관(2)-아시리아 유물

 


  
오늘의 이라크(Iraq) 중심부를 비스듬히 흐르고 있는 두 개의 큰 강, 유프라테스(Euphrates)와 티그리스(Tigris) 사이의 지역을 우리는 ‘메소포타미아’(강 사이의 땅)라고 부르며, 이 지역에서 우리들의 지식으로는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일어났다고 배우고 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 인도, 중국과 함께 고대문명의 발상지라고 정의하는 것은 이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창조론에서 말하는 에덴동산도 이 지역이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이 지역의 땅 속에 기름이 무진장 매장되어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은 비록 사막 이어도 그 옛날에는 수목이 울창한 낙원이었을 가능성을 과학적으로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울러 오늘날도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리도록 싸움이 그치지 않는 지역인데, 그 전시된 유물들을 보아도,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역사들을 보아도, 그 옛날에도 이곳에선 싸움이 그치지를 않았으니 누구나가 다 탐내는 비옥한 땅이요 번성한 도시들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가 보다.


근래(2015년)에 와서 이슬람 테러세력인 SISI들이 이라크의 옛 영화의 기록들을 다 지워 버린다면서 BC 2,000 경의 유물들을 파괴하고 부수어 세계인들의 분노를 산 적이 있다. 그들이 부숴버린 유적들이 바로 니므롯(Nimrud) 이 건설한 궁전의 일부분과 그 신전들이었다. 


1853년에 Austen Henry Layard 와 건축 역사학자인 James Fergusson 이 발굴하며 상상도를 그려 놓았던 그 아름다운 궁전들이 있었던 사막. SISI가 생기기 오래 전에 그곳을 지배했던 영국이 유물들을 가져와 이곳 영국박물관에 전시하게 된 것이다.


니므롯은 누구일까? 구약성경 창세기 10장에 자세히 기술한 족보에 의하면 그는 노아의 홍수 후에 살아남은 노아의 세 아들 중 둘째 함의 아들인 구스의 아들이니, 노아의 증손자로 8절에는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다.” 라고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성경이 허구가 아닌 것을 대영박물관이 증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어떤 성서학자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니므롯이 개인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고대 민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긴 ‘삼국 유사’나 ‘삼국 사기’도 사람의 관심과 당시의 정치적 성향으로 ‘아’ 다르고 ‘어’ 다르게 되었듯이, 읽는 사람에 따라서 믿고 싶은 관점이 다를 테니까…. 


 하나 성경은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니므롯의 후손이 블레셋을 낳아 블레셋 사람들이 되었고, 노아의 맏아들 셈의 후예들 가운데 다윗이 태어나 훗날 ‘다윗과 골리앗(불레셋 사람이다.)’의 유명한 싸움이 있었으니 결국 집안 싸움의 시조가 되고 만 셈이다. 


그 집안 싸움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엄청 긴 악연의 역사다. 참고로 아시리아의 히브리음은 앗수르이며, 그리이스 음은 앗시리아인데 성경에는 앗시리아의 국민들과 나라 이름과 영토까지 일컬어 앗수르라고 불렀다(창 10:22; 대상 1:17; 왕하 15:19; 16:7-8; 대하 28:16-21; 느 9:32; 시 83:8; 사 7:17; 렘 2:18; 겔 16:28; 호 5:13). (장인수 박사, 역사 탐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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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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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1
영국 박물관 (British Museum) (1) - 이집트 유물

 

 

세계 3대 박물관을 꼽으라면 대부분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은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3번째에 대해서는 약간 주저하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 혹은 학자에 따라서 바티칸의 바티칸 미술관이나 미국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라고 한다. 


또는 저 멀리 동토의 땅, 러시아에 있는 신비한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중국 본토에서 밀려나 대만에 자리 잡은 동양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만박물관이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3번째는 보는 사람들의 결정에 맡기어 놓고 오늘은 영국 박물관을 보기로 하자.


우리가 흔히 대영 박물관(Great British Museum)이라고 불러왔지만 요즈음에는 이름 그대로 영국 박물관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영국이 세상에서 더 이상 Great Britain 이 아닌 모양이다.


이곳은 박물관인 동시에 도서관으로서 창립되었다는 점도 세계의 다른 박물관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칼 막스의 자본론이 쓰여진 곳도 바로 이 도서관이었다니까. 1973년 이 박물관의 도서관은 다른 몇몇 주요기관들의 장서를 합하여 영국도서관으로 창설된 후 유스턴(Euston Road)에 새로 건물을 지어서 1997년에 이사를 하였다는데, 나는 2006년에 이 곳에서 책으로 가득 찬 도서관을 보았는데 어찌된 일일까? 2017년인 현재에는 내부 수리 때문인지 막아 놓아서 옛 도서관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또 한가지 이 박물관의 특징은 분명 영국 박물관인데 정작 영국 물건은 별로 없는 박물관이란 점이다. 한때 ‘해가 지지 않았던 나라’답게 세계 각국을 점령하며 그 나라의 문화재를 들고 와 전시하기에 ‘대도(大盜)박물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지만, 인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유물들을 문화 대혁명이나 탈레반 같은 반도들에 의한 파괴를 피해 수백 년간 안전하게 보존해왔다는 점에서 옹호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요즈음에도 그리스와 이집트,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자기들 문화재를 훔쳐가 전시한 것이라며 ‘정치 문제화’하며 돌려 달라고 한다. 실제로 성화에 못 이겨 돌려주거나 배상금을 지불한 경우도 있지만, 아직까지 대부분 반환을 거부하면서 버티고 있다. 다 돌려주면 전시할 게 없어 지니까! 


그 대신 다른 박물관처럼 비싼 입장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국제 박물관법에 의거해 전시작 중 자국의 예술품이 일정 비율을 넘지 못하면 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입구에 기부함을 놓아 관람객들이 자발적으로 후원금을 낼 수 있게 하고 있다. 과연 얼마나 기부할까?  


그래서일까 모든 관광회사들이 이곳을 경유하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이 많다. 이집트•아시리아•바빌로니아•인도•그리스•로마•중국 등 각국 각 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독특한 방법으로 전시하고 있다. 


주목하여 둘러보아야 할 전시물로는 영원불멸의 삶을 꿈꾸었던 이집트인들의 유물, 그리고 구약 성경을 읽으며 전설처럼 생각 키웠던 현세의 삶에 충실했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역사적인 삶의 자취들이다.


결국 3대 문명의 발상지 유적들이 다 한자리에 모인 곳에 서구 문화의 뿌리인 그리스의 유물까지 합하여졌으니 둘러보는 물건들이 인간 삶의 옛 자취요, 읽고 들리는 이야기들이 2000년, 3000년 전의 역사적 증거들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긴~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타임머신의 현장이다.


나일 강변에서 생겨난 이집트의 유산들이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는 듯, 람세스 2세(Colossal bust of Ramesses II)의 흉상이 방문객들을 내려다 보는 이집트 전시실로 들어 서면 작은 돌이 유리관 안에 전시되어 있다. 


고등학교 때 서양사 시간에 배운 유명한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이다. 길이 114㎝, 폭 72㎝인 자그마한, 다듬어지지 않은 검은 현무암인 로제타석은 오랜 세월 모래 속에 묻힌 채로 있다가 1799년 8월 알렉산드리아 북동쪽 약 56㎞ 지점의 로제타(라쉬드) 마을 부근에서 부샤르라는 이름을 가진 나폴레옹 원정대원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1801년 프랑스가 영국과 터키 연합군에 패해 이집트를 포기한 뒤 이 돌은 영국인의 손에 들어가 지금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루브르에 있었을지도 모를 돌이 이곳에 있도록 돌의 팔자도 바뀐 모양이다. 결국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물건은 보존할 능력이 있는 나라나 개인이 할 수 있다는 대의명분이 입증된 돌이기도 한 것 같다. 그래서 초입에 전시한 것일까?


쓰인  내용인즉 기원전 196년에 만들어진 멤파스의 신관이 선포한 일상적인 법령을 세 가지 언어로 새긴 것이지만 내용보다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해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어 수많은 고대 기록들을 독해하게 되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돌이 되었다. 역사의 수수께끼를 열어 주는 열쇠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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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4
런던 ? 영국의 수도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우리가 흔히 United Kingdom 혹은 U.K.라고 부르는 영국의 공식 이름이다. 영국 해협과 북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 대륙과 떨어져 있지만 영국의 Dover와 프랑스 Calais 사이의 해협은 불과 34km밖에 되지 않아 맑은 날에는 서로 바라볼 수가 있는 거리이기에 유럽 대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나라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섞였으면서도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한 때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식민지를 가졌었는가 하면 세상을 뒤흔든 산업혁명의 시발점이기도 한 섬 나라인 것이다. 


또한 오늘날에는 전 세계 수많은 국가에서 주요 언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공식 언어로서뿐만 아니라 제2언어로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영어(英語, English language)는 잉글랜드에서 기원한 서 게르만 어군 언어란다. 


1995년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해저 지하 터널인 ‘채널 터널’이 개통되어 유로스타도 다니고 있으니 이제는 섬이라고 부르기에도 어폐가 있게 된 셈이다. 


유럽이면서도 유럽이 아닌 섬이 되어 고대 로마제국의 침략이 남긴 자취에서부터 대영제국이 되어 세계를 침략하면서 가져온 수많은 문물들로 번영하던 흔적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부터 서 유럽의 대가리(大街里)여행을 시작하여 본다.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


런던을 찾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제일 먼저 찾아오는 곳이 버킹엄 궁전이다. 1703년 버킹엄 공작이었던 존 셰필드(John Sheffield)에 의해서 지어진 대저택이었지만 1762년 조지 3세가 왕비와 아이들을 위해서 구입했고, 조지 4세가 개축을 시작했지만 궁전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다.


그 후 1837년 당시 18세였던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이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버킹엄 궁전으로 집무실과 런던 공식 거주지를 이전해 오면서 빅토리아 여왕 이후의 역대 왕들의 거주지와 집무실이 되었다. 


현재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Elizabeth Alexandra Mary)이 사용하고 있는 영국을 대표하는 궁전이다. 하얀색 벽이 유럽의 다른 궁전들에 비해 화려하진 않지만 궁전 내부는 굉장히 호화스럽고 화려하다.


원래 궁전은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았으나, 1992년 윈저 성에 화재가 나자 그 복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여름에 잠시 스테이드 룸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단다. 

 

 

 

 

 

 

 


 

 

 

버킹엄 궁 앞으로는 쎈트 제임스공원(St. James’s Park)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터 역할을 하고 궁 뒤에 자리한 초록 공원(Green Park)과 Wellington Arch를 지나면 가두 연설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언론 자유의 중심지'며,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진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로 유명한 하이드 공원(Hyde park) 이 된다. 


원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소유였으나 1536년 헨리 3세가 이곳을 몰수한 이후부터 왕실 사냥터로 사용하다가, 1637년 제임스 1세 때 일반인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열린 공원으로 공개되었다. 


하지만 처음엔 싸움터와 강도들의 집결지가 되어 안전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변해 버리자, 윌리엄 3세가 300개에 달하는 전구를 달도록 지시하였다. 이후 밤에도 환한 공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런던 시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1851년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이었던 앨버트 공이 이곳에서 제1회 박람회를 열었으며 그를 기념하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앨버트 기념비가 하이드 파크의 랜드마크로 자리잡고 있다. 유럽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영국식 정원의 대표적인 본보기가 바로 이곳 하이드 파크라 할 수 있는데, 배를 타거나 수영도 즐길 수 있는 서펜타인 호수와 롱 워터를 사이에 두고 켄싱턴 가든과 하이드 파크로 나뉘며, 하이드 파크의 면적만 해도 142만m2 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원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서쪽에 있는 대사원’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성공회 성당으로 11세기 참회왕 에드워드가 노르만 양식으로 착공하기 시작했다. 이후 12세기 헨리 3세에 의해 개축해 18세기에 들어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참회왕 에드워드가 죽은 후 정복왕 윌리엄 대공이 왕위를 빼앗아 대관식을 치룬 이래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에드워드 5세, 8세를 제외한 영국의 모든 왕과 지금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까지 대관식을 거행한 장소다. 


대관식뿐만 아니라 왕실의 결혼식과 장례식 또한 이곳에서 치러진다. 1981년 7월 29일,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세기적인 결혼식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올렸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난 다이애나 왕세자비 장례식은 이곳에서 치러졌다.


계승 순위 서열 1위이지만, 2018년이면 66년간 역사상 최장기 왕위 대기 기간을 인내로 기다리는 찰스 왕세자의 맏아들 윌리엄 왕자는 현재 영국 왕위 계승 순위 서열 2위로 2011년 4월 11일 케이트 미들턴과 이 곳에서 30년 만에 또 다른 세기의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조카들이 태어남으로 계승 순위 서열 6위로 밀려난 둘째 아들 해리왕자와 메건 마클의 결혼식은 윈저궁의 왕실 예배당인 세인트 조지 채플에서 거행되었다. 아마도 왕실의 예법에 어떤 규정이 있는 모양이다. 이름은 비슷하여도 요즈음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는 웨스트민스터 궁하고는 완전히 다른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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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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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8
유럽 대가리(2)-해양대국 영국의 탄생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기거하는 버킹엄 궁전 앞 마당을 가득 메운 관광객들 틈에 앉아 잠시 다리를 쉬면서 “해양대국 영국”을 탄생시킨 “영국과 결혼한 엘리자베스 1세”에 얽힌 옛 이야기들을 되뇌어 본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해양 대국 영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세상은 땅 끝에서 바다로 진출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며 얻은 금은 보화와 노예로 재미를 보자 더 많은 식민지를 찾기 위해 바다에서, 바다 너머 새로 찾은 땅에서 서로 땅 뺏기를 하며 싸움 그칠 날이 없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카톨릭 국가인 두 나라의 싸움이 오죽 심하였으면 로마 교황이 나서서 교황 자오선을 그어 주며 중재를 하였을까? 스페인은 저 쪽, 포르투갈은 이 쪽 하며….

 

 

 

 


먼 바다를 나가다 보니 자연 스페인은 해군이 강성해지며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무적함대를 가질 수가 있었다.

 

 

 

 


피레네 산맥 (Pyrenees) 너머 유럽 대륙에서는 교황청의 타락으로 종교개혁의 싹이 자라 로마 교황청의 힘이 약화되는가 하면 과학과 예술과 학문의 발달로 오히려 옛날로 돌아가자는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나며 사람들의 인식이 절대군주제에서 점차로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스페인이 무적함대를 이끌고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변방의 작은 섬나라에 불과한 영국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재위, 1558~1603)가 “영국의 국왕을 영국 국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하는 수장령을 부활시켜 영국 국교회를 다시 확립하며 가톨릭을 억압하자, 후일 May Flower호를 타고 신세계를 향해 탈출(1620년)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지만, 국내적으로는 종교적인 통일을 통해 국내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및 스페인과 복잡한 외교 게임을 벌여야만 했던 여왕은 최대 강국 스페인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스파이작전을 사용하는가 하면 국고를 늘리기 위하여 캐리비안 해역에서 암약하던 해적들을 양지로 불러 내었던 것이다.

 

 

 

 


이 때에 등장한 인물이 프란시스 월싱엄(Francis Walsingham)과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Sir Francis Drake)였다. 두 사람 다 프란시스란 이름을 가진 것은 어떤 우연이었을까?


남보다 앞선 정보력이 정치와 삶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터득한 프란시스 월싱엄은 엘리자베스 1세가 수상으로 임명하자 마자 여왕의 신변보호와 해외 주요국가의 정보수집을 관장하는 비밀첩보대를 창시하여 당시까지의 어설픈 정보수집을 버리고 해외에 광범위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요원들에게 암호작성과 해독법 등 본격정보기술을 가르쳐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첩보기관을 만들었다. 

 

 

 

 


여기서 얻은 정보력으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와의 암투에서 승리하여 카톨릭을 신봉하는 메리 여왕을 참수하자,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영국을 지도에서 말살하자며 전의를 불태워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 당시 국가를 지킬 만한 육군도 없었고, 해군도 없었던 영국이기에 스페인과 교황청에 심어 놓은 스파이들의 정보를 이용하여 이들이 교묘히 퍼트린 거짓 소문으로 스페인 함대의 출정 일을 변경시키는 동시에 캐리비안에서 맹위를 떨치던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경이라는 백작 칭호와 부사령관의 직책을 주어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맞서게 하였다. 


수시로 들어오는 정보로 이들의 항로를 빤히 드려다 볼 수 있었던 드레이크의 해적들은 비록 적은 수의 작은 함선들이었지만 1588년 칼레(Calais) 해전에서 수많은 무적함대를 제압하며 영국의 황금기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칼레 해전은 조선의 한산도대첩(1592년)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 중의 하나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는 해전이다. 


그 때 만든 정보기관은 꾸준히 진화, 발전하여 현재는 M15 와 M16이라 불리고 있고, 그 때부터 체계를 이루며 강성하여진 해적의 무리들은 영국의 해군이 되어 막강한 세를 과시하며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세워 아시아 진출의 바탕을 마련하고, 북아메리카에도 식민지를 설립하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이다.


5대양을 넘나들며 식민지를 넓혀 가던 나라들마다 안전한 항로를 위하여 자기 나라를 중심으로 자오선을 만들어서 사용하던 중 세계적인 표준을 만들자는 합의를 하게 되었다. 1884년 워싱턴 D. C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Royal Greenwich Observatory)의 트랜싯 중앙을 지나는 자오선을 경도 0의 본초자오선으로 결정했다.


이 시절의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해양 강국으로 군림할 때 이었으니 어느 나라가 함부로 토를 달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세계의 동쪽과 서쪽을 결정하는 본초 자오선은 템즈 강변의 런던 타워에서 그 당시에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불빛공해가 없었던 그리니치에 새로 지은 그리니치 천문대 안에 줄 그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1935년부터 이 자오선을 기준으로 하는 그리니치 시(時)가 세계 시로서 국제적 시간 계산에 쓰이게 되었다.


남의 정보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훔쳐 오기도 하고, 때로는 거짓정보를 흘려 상대방을 교란하기도 하는가 하면, 남의 재물을 약탈하며 노예장사도 서슴지 않았던 해적을 작위까지 주어 해군제독으로 발탁해 조그마한 섬나라 영국을 국제적인 대국으로 만들어 놓은 엘리자베스 1세의 정치적인 선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왜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일까?


오늘의 정객들은 국가보다도 자신들의 눈 앞의 이익을 위해서는 엘리자베스보다도 더한 방법을 부끄럼 없이 사용하고 있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공한 스파이는 이름이 없다. 조용히 연금 받고 살든지 이름 없이 죽임을 당하며, 서민인 우리는 모른다. 오직 실패한 스파이만이 이름이 밝혀져 교도소에 가거나 사형을 당하며, 서민인 우리도 다 알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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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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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5
전병선 유럽 대가리(1)-미국으로 시집 간 런던 브리지?

 

 

우리가 어렸을 때 동요로 부르던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를 소개 하면서 따라 오는 멋지게 생긴 다리, 우린 그 그림이나 사진이 ‘런던 브리지’ 인줄 알고 있었지. 우리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어린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다리가 미국의 한 독지가에게로 시집을 온다니 얼마나 흥분들 하였었을까? 그런데 막상 시집 온 다리는 평범한 모양의 돌다리가 아닌가? 처음에는 모두들 실망을 하였었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물건들이 자연 경관을 빼고는 하나도 없는 미국이기에 요즈음에는 오히려 애리조나 주의 귀한 관광자원이 되어 효자 노릇을 하니 ‘맹진사댁 경사’가 불모지 사막 위에서 이루어진 모양새다.

 

 

 

 


유서 깊은 ‘런던 다리’는 기원전 1세기에 영국을 침공한 로마군에 의해 템즈 강에 건설된 첫 번째 다리였다. 그러나 이 다리는 얼마 가지 않아 무너졌고, 뒤이어 색슨족이 세운 목조 다리도 홍수로 떠내려갔다. 


1176년에 이르러 런던 브리지는 돌다리로 건설되었다. 이 다리는 1750년까지 템스 강에 있는 유일한 다리로, 다리 위에는 집과 상점들이 2층, 3층으로 올라가 있었는데 남쪽에서 7번째 교각에는 상판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어 부분적으로 도개교 역할을 하기도 했단다.

 

 

 

 


런던타워와 가까워 왕궁 경호를 위해 야간에는 통행이 금지되곤 했으며 때로는 처형된 죄수들의 목이 창에 찔린 채 내걸리기도 했단다. 화강암으로 지은 다리였지만 기반이 튼튼하지 못해 홍수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 (런던 다리가 무너진다네, 무너진다네, 무너진다네…)라는 유명한 아이들의 노래가 탄생하게 된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한국의 영도다리처럼 배가 지날 때면 다리가 들렸다 내려오는 도개교였기 때문에 올렸던 다리가 내려온다는 노래였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런던 브리지는 1799년에 이르러 무너질 걱정을 안 해도 될 만큼 튼튼한 화강암 다리가 구상되어 1825년 착공돼 1831년 개통된다. 


폭 10.67m, 길이 306m에 무게 13만 톤의 위용을 자랑하는 다리였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면서 늘어난 자동차 통행량 때문에 다리의 침하가 시작되어 고민하던 시 당국은 새로운 다리를 짓기 위하여 옛 다리를 팔아 재원을 조달하기로 하고 1967년 런던 브리지를 경매에 내놓게 된 것이다.


광고가 나가자 미국 미조리주 출신의 기업가 로버트 맥컬럭(McCulloch:1911~1977)가 경매에 뛰어 들었다. '맥컬럭 동력톱'(McCulloch Chainsaw)사의 소유주이자 항공사, 정유회사, 부동산개발회사 등을 소유한 그는 콜로라도 강물을 막아 만든 하바수 호수(Lake Havasu) 호반 지역 14㎢를 구입해 여러 사업을 벌이고 있던 차였다. 


1940년대까지 미 공군의 비상착륙기지로 활용되던 이 사막 땅의 부동산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영국, 프랑스 등 유럽풍 마을을 지어 디즈니랜드에 버금가는 명소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 그는 런던 브리지가 그 단초 역할을 할 명물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항간에는 이 사람이 동요책에 그려진 멋진 다리를 상상하며 경매에 뛰어 들었으나 일단 낙찰을 하고 영국에 와보니 막상 자기에게 팔린 다리는 멋진 Tower Bridge 가 아니라 평범한 돌 다리였기에 후회막급 하였었다는 설이 나 돌기도 하였었으나, 246만 달러나 투자한 경매에서 이런 착각을 하였다고 믿기에는 무리가 있는 항간의 낭설인 것 같다.


하여튼 다리를 낙찰 받은 맥컬럭은 런던 브리지의 화강암 석물 하나하나에 일련번호를 적은 뒤 분해한 후 바다를 건너와 코로라도 강물을 막아 인공 호수가 된 애리조나 주의 레이크 하바수 시티(Lake Havasu City) 근방의 사막 땅 위에 런던 브리지를 조립하여 세운 뒤 교각 아래 땅을 파 폭 300m, 길이 1.6㎞ 운하를 만들어 코로라도 강물이 런던 브리지 밑을 흐르게 하였다.


드디어 1971년 10월 10일 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환호 속에 런던 브리지 재조립 개통식이 열렸다. 이 역사적인 개통식에는 런던시장도 참석했단다.


운송과 조립에 들어간 비용만도 런던 다리 구입비의 3배 가까운 700만 달러를 지출하노라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형국이었지만, 미국인들에게도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구 5만 명의 작은 휴양도시가 근래에는 런던 브리지를 필두로 맑은 호수, 아름다운 호반을 자랑하는 휴양지로 연간 75만 명의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덕분에 맥컬럭의 부동산 가치도 엄청 상승되었겠지.


“꿈은 꾸는 사람만이 이룰 수 있다.”는 명언은 이런 경우에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애리조나의 런던 브리지 위에는 미국 성조기와 영국 국기, 그리고 애리조나 주 깃발이 나란히 나부끼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런던에서 볼 수 없게 된 런런 브리지를 머리 속에 그려 보며, 새로 만들어져서 기능면에서는 우수하여 졌지만 미관으로는 너무 밋밋한 새 런던 브리지를 바라보며 앞으로 전개될 유럽 대가리를 상상해 본다.


 2017년 6월, 템즈 강가에서 1973년에 완공된 새로운 런던 브리지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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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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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2
일본, 유모토 간코 온천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루리코지를 나와서 유모토 간코 호텔로 가는 길에 보이는 농촌 풍경이 평화롭기만 하다. 가끔씩 수증기가 피어 오르는 숲을 지나는데 저런 곳이 뜨거운 온천물이 스며 나오며 김이 나는 것이란다.

 

 

 

 


한참을 야산 사이로 오르니 나타나는 깨끗하고 큰 호텔, 유모토 간코 호텔 겸 온천장이다. 버스가 정문에 서니 기모노를 입은 여인과 양복으로 정장한 중후한 초로의 신사가 우리를 맞이하여 방으로 인도를 한다.

 

 

 

 


다다미가 깔린 전통적인 일본식 방안에는 작은 상이 가운데 차려져 있었다. 앙증맞은 일본 과자 몇 개가 일본 칠기 그릇에 담겨 있고, 서녘으로 넘어가려 산등성이에 걸린 태양빛이 환히 들어오는 방은 정갈하였다. 


가이드의 안내 대로 벽장을 보니 전통 유가타가 곱게 개여져 있었다. 우리는 그저 일본 복장이면 다 기모노인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기모노가 아니라 일종의 가운인 것 같다. 집사람의 등 뒤에 담요가 없으니까. ㅎㅎㅎ

 

 

 

 


유가타로 갈아 입고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니 이 또한 커다란 다다미 방에 개 다리 소반 같은 작은 상이 두 줄로 놓여있었다. 그리곤 그 가운데로 두 명의 여인이 진짜로 담요가 달린 기모노를 입고는 일본 정식을 서브하여 준다.


참으로 다양한 음식이 조금씩 조금씩 나오는 것이, 내게는 난생 처음 받아 보는 일본 상이었다. 소위 가이세키 요리(작은 그릇에 순차적으로 조금씩 담겨 나오는 일본의 연회식 코스요리)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종잇장처럼 얇은 복어 회도 처음으로 먹어 보았다. 저녁 후 한참을 쉰 후에 온천장으로 갔다. 이곳은 남탕과 여탕이 나누어져 있단다. 그 대신 매일 남탕과 여탕이 바뀐단다. 음양의 조화를 위해서. 그래서 습관적으로 들어갔다가는 얼굴을 가리고 황급히 돌아 나와야 한단다. 


실내 탕은 한국에서 본 대중탕과 비슷하지만 훨씬 컸고, 벽에는 온천수가 나오는 샤워가 여럿 달려 있었다. 문을 열고 야외 노천탕으로 가니 자그마한 연못처럼 바위로 주위를 두른 탕 속의 물 역시 들어가 앉거나 누워있기에 딱 좋은 온도였다.


바위에 기대어 눕자, 보이는 어두운 하늘에 영롱한 달! 마치 신선 놀음하는 것처럼 기분이 좋은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이 밤이 가지 않았으면… 그럼 집에도 못 돌아 가겠지?


달을 바라 보며 지난 며칠의 여정을 회상해 보았다. 52년 전에 온 식구가 캐나다로 이민 하면서 아버님의 옛 친구들을 만나기 위하여 잠시 들려 본 동경 이후 처음으로 조금 넓게 둘러 본 일본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캐나다, 그리고 그 동안 돌아 다녔던 세계의 여러 곳들을 비교해 보았다. 


참 많이 다른 것도 같고 비슷한 것도 같고… 이 모두가 다 좋은 여행길이었던 것만은 틀림없기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1541년 땅 끝을 떠나 바다 끝으로 와서 일본을 개항시킨 포르투갈이란 나라는 과연 어디에 있는 어떤 나라였을까? 이제 Dark Age, 즉 암흑시대라고 불리던 중세의 유럽으로 바다를 건너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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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65531
10275
2018-04-13
일본 야마구치, 루리코지 5층탑

 

 

야마구치현의 상징과도 같은 루리코지(瑠璃光寺)의 오층탑은 목조로 지어진 일본에서 10번째로 오래된 탑으로, 야마구치의 옛 문화인 오우치 문화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문학을 좋아한 오우치 가문의 25대 요시히로가 1399년 오에이 전란에서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다. 그러나 다시 패권을 잡은 그의 동생 모리하루가 요시히로의 넋을 달래기 위해 1442년경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오우치 요시히로는 일본 열도에서 세력이 남북조로 나뉘어지던 시대에 무로마치 막부의 무장이자 슈고 다이묘였다. 슈고 다이묘란 군사, 정치, 경제적 권리를 획득하여 한 지역을 지배하는 권한을 가진 무로마치 막부의 지방장관을 말하는 직책이었다.

 

 

 

 


오우치 가문은 스스로를 백제 왕족의 후손이라 밝히면서, 임성태자(백제 성명왕의 셋째 아들)가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와 타타라(多多良)라는 성씨로 개명하고 이 후 오우치(大?), 토요타(豊田) 등으로 성을 바꾸며 자손들이 번성하였단다. 

 

 

 

 


2009년에는 오우치 가문의 후손이 임성태자의 45세손이라고 하며 백제 무열왕릉을 참배하였고, 당시 100만 엔을 부여군에 기부도 하였다. 결국 일본에는 한국의 DNA가 무척 많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비록 세월의 흐름 속에 그 지방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그 지방색으로 진화되기도 하였겠지만….

 

 

 

 


이번의 일본 여행은 결국 일본의 뿌리는 한국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었고, 그래서 우리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혈연관계의 나라가 아닌가 생각하였다. 아무리 임진왜란의 피해와 일제 침략 36년이, 그리고 정신대로 끌려 갔던 많은 한국의 여성들이 있었더라도 말이다.

 

 

 

 


이 또한 살아남기 위한, 혹은 자신의 영달을 위한 한국인들이 앞장서서 저지른 일들이었었다는게 많이 밝혀지지 않았는가! 비록 부끄러운 역사이었지만 있었던 일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역사가 햇볕을 등지고 어둠 속에서 왜곡되다 보면 그건 이야기꺼리 야사 밖에 더 되겠는가! 그래서였을까? 그 침략의 세월 동안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에 비해 엄청 대우를 받지 않았던가? 물론 침략자들의 편의에 의한 대우이기는 하였겠지만….

 

 

 

 


류리코지 오층 목탑 주변은 코오잔 공원으로 불리며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100선에 들었단다.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처마의 선과 모습이 백제시대의 우리나라 건축양식과 많이 흡사하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중기의 뛰어난 건축으로 간사이지방 나라현의 호류지 절, 교토의 다이고지의 오층탑과 더불어 일본 3대 명탑 중의 하나다. 야간에는 1년 내내 일몰에서 23시까지 조명을 비추어 계절별로 피는 주위의 아름다운 꽃들과 함께 그 자태를 드러내는 일본의 국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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