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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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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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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베르사유 궁전(2) - 분향(糞香)의 열매(Chateau de Versailles)

 

파리에서 약 20km 떨어져 있는 베르사유는 원래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50년 동안 막대한 비용을 들여 원래 습지였던 이 땅의 자연 조건을 완전히 바꾸어서 숲을 만들고, 분수를 만들기 위해 몇 개의 강줄기를 바꾸고, 거대한 펌프를 만들어 센 강의 물을 150m나 길어다 부었다고 한다. 


또한 궁전의 상판에서 천장의 못 하나까지 모두 장식을 할 정도로 하늘 아래 가장 화려하게 베르사유 궁전이 세워지고 난 후, 1682년부터 1789년까지 100년 가까이 프랑스의 정치적 수도이자 부와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1682년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왕궁이 옮겨온 이래 매일 수백 명의 귀족들이 모여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이것은 루이 14세에게 언제 반기를 들지 모르는 귀족들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나약하게 만들려는 전략이었다지만, 결국에는 이 과소비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혁명의 격변기 속에서, 보불전쟁과 1,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도 화려한 위용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베르사유의 그 화려함의 극치가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불러 감히 파괴할 수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베르사유는 어쩜 지구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행복한 건물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왕실 소성당(Chapelle Royale) 


망사르가 설계한 성당으로, 높은 천장에는 삼위일체 이야기, 예수의 부활과 재림 등 성서를 모티브로 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루이 15, 16, 18세와 샤를 10세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있었으며, 1770년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도 거행되었다.

 

 

 

 

 

 

헤라클레스의 방(Salon d’Hercule) 


궁전의 북쪽 날개에서 중앙으로 연결되는 부분에 위치한 이 방은 궁전의 방 중에서 가장 크다. 정면에 보이는 벽난로 위에는 베로네즈(Véronèse)의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예수님’ 대형 회화가 있고, 천장은 르 무안(François Le Moyne)이 1733~1736년에 그린 천장화 ‘헤라클레스 예찬’으로 장식되어 있다.

 

 

 

 

왕의 침실(Chambre de Roi) 


1701년 루이 14세는 자신의 방을 성의 동서 쪽, 즉 거울의 갤러리 뒤쪽인 동시에 궁전의 정면에 해당하는 장소인 이 방으로 옮겼다. 1715년에는 루이 14세가 이 방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1789년에는 루이 16세와 왕비가 이 방의 정면 발코니에 나와 성난 혁명군들에게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침대는 얼마나 높은 지, 오르려면 사다리가 필요할 지경이다.

 

 

 

 

 

 전쟁의 방(Salon de la Guerre) 


거울의 갤러리 북쪽에 있는 방으로, 루이 14세의 용맹스러운 기마상 부조를 비롯하여 프랑스가 승리한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있다.

 


  

 

 

거울의 갤러리(La galerie des Glaces)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총 길이 73m, 폭 10.50m에 달하며 17개의 창문과 578개의 거울이 있는 방이다. 1678~1684년에 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서쪽 회랑 전체를 차지한 이 홀에서는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천장에는 르 브룅(Le brun)이 루이 14세의 생애를 그린 천장화가 있고, 크리스털 샹들리에, 황금 촛대, 화병 등의 장식품도 당시의 최고급품으로 놓여 있다. 


이 방의 북쪽 끝에는 전쟁의 방이 있고, 남쪽 끝에는 평화의 방이 있다. 1870~1871년 보불 전쟁 후 승전한 프로이센이 이 방에서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언했으며, 1919년 6월 28일에는 이 방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어 공식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을 종결 지었다.

 

 

 

 

 

풍요의 방


풍요의 방 천장에는 르네 앙투안느 우아스가 그린 천장화가 화사하게 내려다 보고 있다. 그림 속의 천사들이 들고 있는 그릇들은 그 당시 궁전에서 사용되던 그릇들이라고 한다. 그림의 중앙에는 여신이 금화가 가득 든 단지를 기우려 지상으로 돈벼락을 내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나에게 금화가 쏟아지고 있는 모양새다. 싫어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렇게 왕의 너그러움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며 찬양하였다고 한다.

 

 

 

 

봐도 봐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수많은 그림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 누구는 방이 1000개가 있다고 하고, 누구는 방이 2,000개라고 하나 어디서도 정확한 방의 수를 찾아 내지는 못하였지만 하여튼 엄청 호화롭고 큰 궁전이기에 방마다 다 사연이 있을 터이니 언제 다 섭렵을 하겠는가? 지면제약도 있으니 돈벼락을 맞은 이 정도에서 베르사유를 떠나기로 하자.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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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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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0
베르사유 궁전(Chateau de Versailles) 분향(糞香)으로 핀 꽃

 

유사 이래 가장 화려한 궁전으로 꼽히는 베르사유 궁! 지나 온 영국 궁전은 비교하기가 좀 민망스럽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쇤브른 궁전도 이를 모방하였으나 능가하지를 못하였고, 루이14세의 손자로 스페인의 왕이 된 페리페 5세(Felipe Ⅴ)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지은 스페인 왕궁도 여기에는 한참 못 미치고 보니 여기에 비교할 만한 궁전이 유럽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 것 같다.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IV)는 신하인 재무장관 푸케(Nicolas Foucquet)의 보 르 비콩트(Vaux-le-Vicomte) 성을 둘러보고 온 후 그 어마어마한 화려함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보 르 비콩트의 건축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을 불러 유사 이래 가장 화려한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을 하게 된다. (그 후 푸케는 안전하였을까?)

 

 

 


건축가 르 보(Le Vau), 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 실내 장식가 르 브룅(Charles Le Brun), 조경가 르 노트르(Andre Le Notre) 등이 참여해 50년 동안 막대한 비용을 들여 궁전을 지었는데…. 


72년 3개월 18일이라는 긴 세월 동안 태양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면서 유럽의 군주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었을 정도이니 돈이 문제였겠는가? 결국에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지만….

 

 

 

 


워낙 화려하다 보니 유명하여 졌고, 유명하다 보니 다녀간 사람들도 많고, 또 그 내용도 잘 알려졌기에 오늘은 베르사유 궁전에 얽힌 하이힐 이야기를 좀 하기로 하자.


유명한 의사들마다 좀 천박스러운 이야기 같지만 “사람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야 건강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여기에 토를 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16세기 프랑스에서 화장실은 혐오스럽고 더러운 곳으로 생각하여 신성한 궁전에는 화장실을 만들지 않았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루브르 궁에도 화장실이 없었단다.

베르사유로 궁을 옮긴 것도 루브르 주변의 독한 분뇨 악취 때문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궁전을 설계한 건축가가 궁전을 사용할 왕을 골탕 먹이기 위한 꼼수로 “화장실은 혐오스러운 곳이기에 궁전 안에는 안 짓는 것이 좋다”는 풍문을 퍼뜨려서였는지, 아니면 왕이 냄새 나는 화장실을 궁전 안에 짓지 말라고 명령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필수적인 생리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곳인 화장실을 그 넓은 베르사유 궁전 안에 지어놓지를 않았다. 그러면서도 매일 성대한 잔치를 하였으니….

 

 

 

 


그러면 어떻게 참을 수 없는 생리를 처리했을까? 궁전에 사는 왕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은 개인용 변기(요강)를 사용하도록 했는데, 용변을 보고 창 밖으로 오물을 던졌다. 그러니 궁전 밖 주변은 온통 용변으로 냄새가 진동했고, 비가 오면 질퍽거리다가 씻겨 땅으로 스며드는 게 그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러니 궁중의 남녀 귀족들은 곳곳의 오물을 밟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하이힐이었다. 17세기에 하이힐을 본격적으로 신은 사람들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루이 14세의 하이힐 신은 모습을 과시하는 그림이 12년 전에는 베르사유에 걸려 있었었는데, 요즈음에는 루브르에 걸려 있다. 아마도 그림은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다.

 

 

 

 


오물을 피해 다녀야 하는 것은 여인네들도 마찬가지였기에 여자들도 하이힐을 신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높은 힐을 신고 걷는 데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단다.(나는 안 신어 봐서 모르겠는데…) 


여성들은 이 기술을 익히기 위해 방에서 몇 시간이고 연습을 해야 했단다. 당시 인기 있었던 시(詩)에는 ‘무도회에 갈 때는 프랑스제 구두를 신으세요. 쓰러질 듯 넘어질 듯 걷는 모습, 이게 요사이 유행이랍니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였단다.


그런데…. 인체 구조상 굽 높은 신을 신거나, 중국의 전족처럼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만들어 뒤뚱거리며 걷게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괄약근의 운동이 된단다. 이 결과를 또 남자들이 좋아하고…. 여기에 숨은 욕망이 있어 요즈음에도 발의 변형을 감내하면서도 여성들은 불편한 하이힐을 신는 모양이다. 


프랑스 말에 뚜알(toile)은 사람이 어깨에 두르고 다니는 ‘망토’를 가리킨단다. 18세기까지 프랑스에는 공중 화장실은 물론 저택에도 화장실이 없는 집들이 많았기에 길을 가다가 갑자기 볼 일이 급해진 사람은 큰 소리로 ‘뚜알(toile)’ 하면 커다란 망토를 입은 사람이 재빨리 나타나 양동이를 꺼내 놓고 망토로 가림 막을 쳐주면 급한 사람은 용변을 보고… 물론 공짜가 아니지.


유럽에서 화장실 사용료를 받는 것은 아마도 이때부터 생긴 관습이었나 보다. 신기한 것은 프랑스 어로 부향율(향수의 원액 비율) 5~7%의 향수를 Eau de Toilette 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 향수가 발달한 이유 역시 노상 방뇨로 생긴 심한 악취 때문이라고 하니 결국 망토나 향수가 다 화장실과 불가분의 관계인가 보다.


망토를 뜻하는 프랑스어 toile이 ‘배변’을 의미하는 말인 toilette(뚜알레뜨)로, 여기에서 요즈음의 화장실을 뜻하는 Toilet 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모양이다.


농경민족인 한국에서는 거름으로 사용하는 지혜도 있었고, 이태리는 그 옛날 기원 전부터 수세식 변소가 있었는데…. 유럽을 휩쓸며 인구를 감소시킨 페스트의 유행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았으리라.


중세 유럽에서 사람들이 볼일을 보고 그것을 창 밖으로 던져버릴 때 그 창문 아래, 길을 가던 사람이 오물을 뒤집어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금 오물을 던지려 하고 있으니 조심하십시오"라고 경고 한 뒤에 밖으로 던졌단다. 


남자들도 커다란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은 혹시라도 실수로 오물세례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단다! 너무 지저분한 이야기가 길어졌나? 분뇨 냄새 속에 화려하게 치장한 베르사유 궁 안으로 들어가 보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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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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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5
몽마르트 언덕(3)-화가들의 언덕

 

 

성당 왼편 길을 따라 가게들이 즐비한 골목길을 돌면 그림 전시장처럼 그림으로 곽 찬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이 나온다. 


테르트르란 말은 ‘언덕의 꼭대기’라는 뜻인데, 실제로 이 광장은 몽마르트르의 작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광장으로 한때 이곳은 처형 장소였지만 19세기 파리시가 파리 외곽으로 분류한 후 술에 대한 주세부과가 없어지자 선술집들이 생기며 화가들이 이곳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요즈음엔, 상업화해 가는 풍토에 환멸을 느낀, 좀 잘 나가는 예술가들은 파리 시내, 몽빠르나스 지역으로 이주하고 지금은 좀 덜 나가는 예술가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돈벌이하는 카페와 선물가게 등으로 포위된 채 그림을 그리고 있어, 거저 옛 이야기 속에 그 분위기만을 상상해 보아야만 하나 보다.


그래도 아직까지 이곳을 화가들의 언덕으로 부르고 있다. 아직은 무명의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며 관광객들에게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광장 주변은 관광객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과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의자에 앉아 포즈를 잡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걷게 만들고 있으니까.


이곳에 모인 화가들 역시 거의 다 예술협회에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회화 작품도 만날 수 있고, 기념이 될 만한 초상화를 그려갈 수도 있다는데… 그 그림이 빛을 보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까?


인상주의의 ‘마네’, ‘모네’, ‘드가’, ‘피사로’, ‘르느와르’, ‘반 고호’, 고갱’, 세잔느’, 쇠라’, 입체주의의 ‘피카소’, ‘조르쥬 브라크’ 등은 요즈음에는 감히 그들의 그림을 넘볼 생각을 못하도록 거장들이 되었지만 그네들이 이 언덕을 오르내리며 그림을 그릴 때에는 하루의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도록 가난한 화가들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니 방값이 싼 이 언덕 꼭대기로 모여들 수 밖에….


그 중에서도 ‘에밀 구도 광장(La Place Emile Goudeau)’ 에 위치한 ‘세탁선(Le Bateau Lavoir)’ 은 버려진 선술집을 개조하여 가난한 화가들에게 방을 빌려 주어 작업을 할 수 있게 한 곳으로 유명하다. 


입체파의 주요 인물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그 당시 파리의 환락가인 몽마르트에서 술집, 매음굴, 뮤직홀 등을 풍자적 화풍으로 그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뚤루즈 로트랙’을 찬양하며 1904년에 ‘세탁선(Le Bateau Lavoir)’ 에 정착하는데…


빈대와 바퀴벌레가 뒤끓고 수도 꼭지가 하나밖에 없는 열악한 조건의 건물, 빈곤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곳에서, 피카소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친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단다. 


절친한 친구인 ‘카사헤마스’가 실연당하여 1901년에 자살함으로써,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우울함을 청색 빛으로 표현하던 ‘청색 시대’의 작품 세계에서, 운명의 연인인 ‘올리비에’와의 사랑 덕분에 ‘장밋빛 시대’로 피카소의 작품 세계가 넘어가고, 파리 입성 7년 만에 입체파의 시작을 알리는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을 이곳에서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아비뇽은 프랑스의 아비뇽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매춘거리 이름이란다. 그럼…? 모델 없이…? 미술사가들에게 맡기기로 하자.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제목도 실은 후에 앙드레 살몽이 정한 것으로 피카소는 원제를 더 직설적으로 <철학적 홍등가>라고 붙였었단다.)


이 곳을 거쳐간 화가들 중에 ‘큐비스트(입체파)’의 양대 산맥인 ‘조르쥬 브라크’는 너무 가난한 나머지 침대가 하나 놓인 방에서 낮과 밤에 서로 교대로 침대를 이용하였단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겨났나 보다. “화가들은 죽은 다음 에야 돈을 버는 직업이다” 라는….


가난한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서 생계를 유지하는 곳이라는 몽마르트의 이야기는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된 듯 하지만, 아직도 반열에 들지 못한 수많은 화가들이 허기와 싸우고 있는 곳 또한 몽마르트 언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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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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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8
몽마르트 언덕(2) 예수성심(사크레쾨르) 성당

 

 

 

언덕 위에 서 있는 사크레쾨르 대성당(Sacred Heart Basilica of Montmartre Sacre-Coeur)을 우리 말로 하면 ‘예수성심 성당’이라고 한다. 파리의 다른 성당들과는 다르게 하얀색의 높은 돔이 비잔틴 양식의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성당이다. 

 

 

 


성당 외관이 은은하게 빛나는 이유는 건축 당시 사용된 트래버틴석(Travertine 물에 녹아 있는 탄산칼슘이 가라 앉아 생긴 석회암. 대리석의 일종으로 이태리산이 유명하다.) 때문이다. 비가 내려 돌이 젖으면 방해석이 표출되고, 이로 인해 하얀 외관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이란다.

 

 

 


들어서면 천장을 덮고 있는 ‘영광의 그리스도’(Christ in Glory)라는 이름의 황금빛 모자이크가 눈길을 잡아 끈다. 뤽-올리비에 메르송의 작품으로 전체 면적이 475제곱미터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수님 형상의 모자이크화다.


1870년 보불전쟁의 패배와 1871년 파리 코뮌 내란으로 상처받은 파리는 이것이 영적, 도덕적 타락에 대한 징벌이라고 간주하여 이를 속죄하고 침체된 국민 사기를 고양할 목적으로 성당을 건립하기로 하고 가톨릭교도들이 모금한 기부금으로 1876년부터 건축하여 40여년만인 1919년에 헌정되었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계급에 의한 자치 민주 정부라 평가되는 파리 코뮌의 생성과 몰락 과정에서 약 6만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낸 보불전쟁은 어떤 전쟁이었을까? 

 

일명 독•불전쟁이라고도 한다. 

 

 

 

 


1870∼1871년에 걸쳐서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에 있었던 전쟁으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도전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비스마르크의 정략과 몰드케의 전략에 의하여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이 나며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제정은 몰락하고, 프로이센은 1871년 도이칠란트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던 전쟁이다.

 

 

 


1870년 9월 2일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 3세를 포함한 10만4,000 명의 포로를 잡으니 이 비보를 접한 파리에서는 공화제 국방정부가 조직되고 내무장관 강베타는 파리를 끝까지 사수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독일군은 진격하여 파리를 포위하자 프랑스인들은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9월 말에 이르러 스트라스부르, 10월 말 메츠 요새에 이어 파리도 1871년 1월 28일 마침내 성문을 열고 1871년 2월 베르사유에서 평화협정을 하게 되었다.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국민의회를 소집한 왕당파 의원들은 프로이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왕정복고를 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2월 8일 프랑스 전역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왕당파는 60퍼센트가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보르도에 임시정부를 구성한 후 2월 26일 알자스와 로렌의 할양,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 독일군의 파리 입성을 조건으로 하는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애초에 휴전조약을 결사 반대했던 파리 민중들은 강화조약에 따라 3월 18일 독일군이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 행진을 할 때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단다. 이를 본 임시 정부는 그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우려하여 지난 겨울 파리가 독일에 포위되었을 때 국민방위군에게 나누어 주었던 대포를 회수하려 하였다. 그러자 파리 민중들은 3월 13일 파리 코뮌(Paris Commune)을 만들어 정부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코뮌의 중앙위원회는 극단적인 평등주의를 주장한 자코뱅파에다가 사회주의자들인 프루동파, 폭력혁명을 주장한 블랑키파 등으로 구성이 되어 갈등이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민중 주도의 여러 정책을 시행에 옮기자 이를 파리 코뮌의 성공으로 본 민중들이 프랑스 곳곳에서 임시 정부에 저항했으나 5월 21일 스파이들에 의해 열린 생클루 성문을 통해 독일군의 후원을 받는 정부군이 파리 시내로 진입하자 역부족이었다.


정부군은 이후 일주일 동안 잔학한 학살극을 연출하면서 파리코뮌을 파괴했으니. 이 전투에서 파리 코뮌군 2만 명이 사망한 반면 정부군은 고작 700여 명이 전사하였단다. 

 

 

 


이후 코뮌에 대한 박해는 더욱 거세져 3만 8,000명이 체포되고 7,000명 이상이 추방당하며 막을 내렸던 일이 사건의 전말이다.


파리 코뮌은 고작 두 달여 동안 지속되고 종료되었지만 노동자 계급이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으니 이런 이유로 코뮌이 존재하던 동안 유럽 전역의 지배 계급은 극도의 불안감을 표출한 반면 노동자들은 이상적인 희망에 휩싸여 있었다. 

 

 

 


어찌 보면 이조 말엽의 동학혁명이나 갑신정변의 역사와 너무나도 닮지 않았나?


성당 앞 층계에 앉아 파리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경관이 일품이기에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이 곳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사람들로 붐비는 좁고 경사진 골목길을 한참 올라와야 한다.


성당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또 많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지만 요즈음에는 후니쿨라가 생겨서 노인네들의 발 품을 많이 절약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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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몽마르트 언덕(Montmartre)(1) 순교자의 언덕

 

 

 

파리를 방문하는 거의 모든 방문객들이 한번씩은 다녀 가는 몽마르트 언덕.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해발고도 129m의 낮은 언덕이다! 


언덕 위에는 프랑스에서는 좀 이색적인 비잔틴 양식으로 1876~1910년 사이에 지어진 성당이 하늘 높이 솟아있고, 교회 옆으로 난 골목길 끝에 있는 작은 광장에서는 많은 화가들이 캔버스를 앞에 세워 놓고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야외 전시장이자 작업장이 있다. 

 

 

 

 


파리 시에서는 시 외곽으로 설정하여 세금 부담도 별로 지우지 않았던 19세기. 살아 생전에는 그림을 팔아 삶을 영위하기가 무척 힘들었던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들어 주린 배를 움켜쥐고 허기진 발걸음으로 힘겹게 언덕을 올랐다. 


하늘에 조금은 더 가까워졌기에 그 소원이 조금은 더 빨리 상달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소원을 간구한 후, 후미진 골목에 화구를 펼쳐놓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꿈과 환상의 절규가 조금씩 형상을 이루어 갔다. 

 

 

 


캔버스 위로 노을이 질 즈음, 언덕 아래로 내려 오면 다리를 번쩍 번쩍 들어올리며 유혹하는 무희들의 빠른 캉캉 비트가 무대 바닥의 먼지들을 흩날릴 때, 짙게 바른 무랑루즈의 붉은 풍차는 환락의 바람을 일으키고, 더욱 짖게 내린 뒷골목의 어둠 속으로 흐느적거리며 흐르는 윤락의 배설이 이루어지던 곳이 바로 몽마르트 지역이다.


 로마가 이 지역을 다스리던 시대에는 반기를 든 사람이나 로마 법으로 볼 때 죄인인 사람들을 언덕 높은 곳에서 처형을 하였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며 두려움을 느꼈을 테니까. 


그 때 이 지역을 라틴어로 몽머르티스(화성의 언덕: Mons martis: Mount of mars)라고 부른 데에서 오늘의 몽마르트라는 이름이 기원하였다는 설이 있다. 옛날부터 화성이라는 별에 붉은 기가 도는 봄철이면 군인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전쟁터로 대오를 맞추어 출전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군인들의 행진을 march라고하였고, 이런 march가 자주 일어나는 3월을 March라고 영어로 명명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 이런 이름의 유래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인 것 같다.


또 하나의 다른 유래인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설이 있다. 프랑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절인 주후272년, 프랑스 초대 주교인 ‘생 드니(Saint Denis)’ 신부가 카톨릭을 전파하다가, 부주교 두 명과 함께 순교한 곳이 이 언덕이란다. 그 자리에 12세기에 베네딕트파의 수녀원이 건립되며 순교자의 언덕이라고 불리게 되었단다. 


Mont(언덕) + Martre(순교자), 즉 순교자의 언덕을 뜻하는 몽마르트 언덕으로 말이다. 두 가지 유래가 다 공감을 하게 만들기는 하는데, 막상 이 곳에서 처형을 당한 ‘생 드니’ 신부는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약 6 킬로미터를 북쪽으로 걸어가서 죽었단다. 요즈음, 유로스타가 정거하는 파리 북역(Gare du Nord) 근방의 ‘생 드니’ 역 부근으로. 그 당시에는 시체를 버리는 곳이었단다.


1144년, 그 자리에 당시 수도원 원장이었던 수제 신부(Suger C 1081-1151)가 ‘생 드니 성당’(Basilique de Saint-Denis) 을 건축한 후 각 지역의 수도원장들을 초청하여 봉헌미사를 드렸는데, 그 때 참석하였던 모든 신부들이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각 지역에 성당을 지을 때 그 모형을 차용하였는데 이것이 ‘고딕양식’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 후 생 드니 성당은 프랑스의 왕과 왕비들이 묻히는 곳이 되어, 프랑스 혁명 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도 이 곳에 묻혔다. 왜 생 드니 신부는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그 먼 길을 걸어 갔을까?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이 길을 가는 동안에도 계속 강론을 하였단다. 믿기 어렵지만 기적이란 우리의 지혜나 지식으로 이해되는 일이 아니기에 믿음으로 믿는 것이 기적이니까 믿기로 하자. 


런던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의 북역으로 가는 동안 창 밖으로 많은 난민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이 한참을 계속되었다. 이 지역에 북 아프리카계의 이민자들이 모여 살면서 파리에서 가장 가난하고 지저분한 우범지역이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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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3
콩코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피로 피운 꽃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하거나 의사 소통을 위해서, 혹은 휴식을 위해서 모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을 광장이라고 한다. 그래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한 장소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며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바람을 잡기도 하고, 또 바람을 맞기도 하는 곳 또한 광장이다.

 

 

 

 


콩코드광장 역시 1755년, 앙제 자끄 가브리엘에 의해 설계될 때에는 이 광장에 루이 15세의 기마상을 설치하여 왕정의 위엄을 기리기 위한 목적이었기에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기마상은 철거되고, 이름도 ‘혁명 광장’으로 고쳐지며, 1793년 1월 21일에는 루이 16세가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10월 16일에는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마저 기요틴(guillotine)에 참수된 혁명의 형장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혁명을 주도했던 공포 정치의 주역, 로베스 피에르와 공포정치의 완화를 요구하며 대립을 이루었던 조르주 당통도 결국은 이 곳에서 생을 마감하며 1,300명 이상의 사람들의 목이 잘려 나간 후, 혁명이 마무리 되어 가던 1795년에는 화합, 일치라는 뜻의 ‘콩코드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1830년에 가서야 콩코드(Concorde)가 공식 이름이 된 것이다. 


지나간 어두운 역사를 넘어 평화화 화합으로 나가자는 프랑스의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한다. 

 

 


 

 

 


 

 

 

 

 


바다의 분수대와 강의 분수대


광장 중앙의 오벨리스크를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프랑스의 8개 도시를 상징하는 조각상으로 꾸며진 두개의 분수대가 있다. 콩코드 다리 방향(오벨리스크 남서쪽)으로 있는 분수대를 바다의 분수(Fontaine des Mers) 그리고 오벨리스크 북동쪽에 있는 분수를 강의 분수(Fountain des Fleuves) 라고 부른다.

 

 

 

 


지금은 시원한 물을 뿜어내지만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바로 이 바다의 분수 자리에서 1,300여명의 목이 기요틴이라는 단두대에 의해 잘려 나가면서 시뻘건 피를 뿜어 냈었다. 그래서인가? 우리 말로 피의 바다(?)

 

 

 

 

 


오벨리스크(Luxor Obelisk)


광장의 중심에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불리는 커다란 탑이 서 있다. 원래 이집트 테베(Thebes, 현재의 룩소르)에 있던 것으로, 기원전 1260년 경, 람세스 2세에 의해서 람세스 신전 앞 좌우에 두 개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 중의 하나다.


1829년 이집트의 총독이자 군사령관이었던 알바니아 출신의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하였다. 대가로 프랑스는 대형 철제 시계를 이집트에 선물로 주었다는데… 10년도 못 가서 고철이 되었단다. 대가가 엉뚱한 사람한테 가서일까?


오벨리스크 하단에는 프랑스로의 운송 과정이 묘사되어 있는데, 4년의 운송 기간이 걸렸단다. 원래 소형 피라미드 모습의 최상단 부분에는 금박이 입혀 있었으나 아시리아인의 침입과 페르시아인의 점령 과정에서 분실되었는데, 이곳으로 옮겨 온 후 프랑스측은 이집트 전문학자들의 연구와 패션업체인 이브 생 로랑의 자금 지원을 받아 없어진 금박 모자의 복원작업을 벌였다. 1998년 5월 14일 복원이 완료되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이전보다 2m 가량 높아졌다.


하나 남은 오벨리스크는 아직도 이집트 룩소르 사원 앞에 홀로 남아 있다.

 

 

 ▲이집트 룩소르 앞에 하나 남은 탑

 

 


그랑드 루(큰 바퀴)


1999년 새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높이 60m의 놀이기구를 세워 2000년 말에 철거하기로 한 후 광장 주변의 문화재들과 안 어울린다는 비난을 많이 받아오면서도 아직까지 서 있다. 결국 돈이 되는 조형물 이어서인지 이제는 오히려 콩코드의 명물이라고 까지 이야기를 하지만 런던 템즈강의 런던 아이에 비하면 많이 초라한 구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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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0
신 개선문(Grande Arche de la Defense)-승리의 꽃(3)

 

 

 

튈르리의 “카루젤 개선문”에서부터 샹젤리제의 “승리의 개선문”을 지나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곳에 라 데팡스(신도시:La Deffnse)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 개선문(Grande Arche de la Defense)이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대통령 때인1983년에 짓기 시작하였다.


1958년부터 프랑스 정부는 파리 외곽에 신도시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 지역 이름을 la Defense(우리 말로 하면 국방? 혹은 방어라는 뜻이다)라고 지으며 파리의 미래형도시를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적인 시간의 바탕 위에 오래 된 도시이자 수도 없이 많은 아름다운 건축물과 고적을 가지고 있는 파리는 더 이상 개발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이상 도시로서의 꿈”을 더 이상 실현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도시 계획 자체가 수도 없이 고쳐지며 보완되던 중,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건축물 설계를 위하여 “개선문의 20세기 버전”을 주제로 국제공모전을 벌였는데 36개국 471개의 작품 중 덴마크 건축가 스프레클레센(Johan Otto Von Spreckelse)이 뽑혔다. 


스프레클레센은 “개선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군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문이라면 신 개선문은 미래와 인류애를 상징하기 위해 세운 것”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1987년 그가 죽은 뒤에는 프랑스 건축가 폴 앙드뢰가 이어 받아 1989년 완성시킨 합작품이다.


무게가 30만 톤이나 되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가운데에는 1ha에 달하는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데, 안쪽 공간은 개선문의 크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한다. 승리의 개선문을 뚝 떼서 신 개선문 안에 넣으면 딱 들어맞는 단다.


다른 이야기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그대로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공간이라고 한다. 계산 상으로의 이야기일 뿐 넣어 본 사람이 있겠는가?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역사의 축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획일적인 국가주의를 싫어하는 프랑스 국민들을 위해 개선문과 정확하게 직선을 맞추지 않고 6~7도 비틀어 건설했다고 한다.


우리 말로는 “신 개선문”이라고 부르지만 프랑스 말로 지어진 이름을 직역하면 “라 데팡스의 거대한 문(Grande Arche de la Defense)” 혹은 “방어를 위한 큰 문” 정도가 될 것 같다.

 

 

 

 


그러니 건축가의 말 대로 앞의 2개의 문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문인 셈이다. 두 개의 문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군인들을 환영하며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문인데 비해 세 번째 문은 미래와 인류애를 위해서 방어라는 이름을 가진 신 도시에 세워진 거대한 문이라고 하면서도 결국 방어할 수 있는 아무 조치가 없는 텅 빈 공간이니 무엇으로 어떻게 방어를 하겠다는 계획일까? 이들의 숨은 뜻을 알고 싶다.


과연 요즈음의 세상에서도 인류애를 위해서 무방비가 최상의 방비가 될 수 있을까? 나만 모르는 어떤 비밀이 그 큰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사용된 30만 톤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이 문 주변으로는 온통 정부 청사들이 몰려 있고, 많은 공기업 및 국제 기구 등이 들어가 있는 현대식 건물들로 이루어져, 건축물 자체만으로도 “라 데팡스”의 또 다른 볼거리이며, 광장에 설치된 현대 미술가들의 조각상들 또한 볼거리이다.

 

 

 

 


중앙의 공간에는 강철 와이어와 유리를 이용한 전망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정상까지 올라가 볼 수 있다. 정상에는 카페와 전망대가 있는데, 정상에 오르면 파리 시의 도시 계획의 기본 축인 그랑 닥스(Grand Axe)를 볼 수 있고 샹젤리제의 개선문, 튈르리의 카루젤 개선문과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다. 


제일 작은 카루젤 개선문에서 시작해서 상제리제 거리를 따라 서북쪽으로 직진하면 만나는 조금 더 큰 승리의 개선문(Arc de Triomphe)을 지나 챨스 드골 대로를 따라 계속 직진하여 만나는 엄청 큰 빈 공간을 가진 신 개선문(Grande Arche de la Defense)이 일직선 상에 지어져 있으니 이 직선이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려는 그 뜻은 과연 무엇일까?


살아남은 자들이 만들어 놓은 승리의 기록 속에 남은 죽은 자들의 이야기? 결국은 다 허공으로 산산이 부서진 그 이름들이여… 그래서 앞으로는 더 이상 전쟁으로 땅을 빼앗는 일은 없기를 바라는 인류애의 마음으로 신 개선문을 “방위를 위한 거대한 아취”라고 이름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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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남극 빙하를 가다(7)-조영연

 

 

 

 

● 펭귄의 짝 짓기와 짝을 잃었을 때


펭귄은 새끼에서 자라서 5년쯤 되면 짝 짓기를 시작한다. 짝 짓기는 수놈보다 암놈이 더 많기 때문에 암놈이 수놈들을 유인한다. 그러다가 마음이 맞으면 춤을 추고 짝 짓기를 한다. 눈과 어름 밖에 없는 영하 50도의 극심한 추위를 이기면서 남극에서 살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펭귄이 짝 짓기를 하여 알을 낳는 시기는 보통 50여일 정도 걸린다. 낳은 알은 수놈이 부화될 때까지 발등 위에 놓고 부화시킨다. 그러나 때론 암놈이 수놈에게 알을 넘겨줄 때, 실수로 눈 바닥에 구를 경우가 있다. 그래서 불과 1, 2분이면 알이 얼어버릴 경우도 있다. 암놈은 알을 낳고 바다에 나가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알이 부화될 쯤에 돌아온다. 


알에서 부화까지는 보통 4개월이 걸리는데 새끼가 부화될 때까지 먹지도 못하고 수놈은 알을 품고 산다. 이로 인하여 수놈은 몸무게가 반으로 준다. 알에서 새끼가 부화되면 수놈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먹이를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토하여 새끼에게 준다. 이때에 바다에 나갔던 암놈은 많은 영양분을 섭취하고 돌아와서 수놈과 교대를 한다. 그러나 때론 천적에게 먹히게 되면 새끼는 굶어 죽는 경우도 있다. 


영양분을 섭취하고 돌아 온 암놈은 새끼를 발 위에 놓고, 섭취한 영양분을 새끼에게 공급하여 준다. 수놈은 다시 바다에 나가서 많은 영양분을 섭취하고 돌아온다. 


돌아와서는 자기의 옛날 부인을 찾는다. 그러나 찾다가 못 찾으면 다른 짝을 찾아 다시 짝 짓기를 한다. 그러나 펭귄은 정조관념이 강하다. 보통 집에서 한 쌍이 산다. 


 펭귄의 종류는 주로 머리형태나 크기에서 차이가 나는데, 몸길이가 40㎝ 정도인 쇠 펭귄에서 거의 120㎝에 달하는 황제펭귄까지 있다. 지역에 따라 종류가 다르나 남극에 있는 펭귄은 6종류 정도다. 1)황제 펭귄, 2)킹 펭귄, 3)젠트 펭귄, 4)더큰 펭귄, 5)마카로니 펭귄, 6)아게니 펭귄 등이다. 


펭귄의 천적은 폭등고래와 물개다. 펭귄의 날개는 퇴화해서 날 수는 없으나 물 속에서 헤엄칠 때에는 유용하게 쓰인다. 남극 등 추운 지방에 사는 펭귄들은 지방이 발달하며 체구가 크고, 온대나 열대 지역에 사는 펭귄들은 체구가 작다. 대부분 등은 검은 색이고 배는 흰색이다.
< 참고: 펭귄에 대한 Video를 보면 더 많은 상식을 얻을 수 있다. 제목은 ‘남극의 눈물’(www.dailymotion.com/video/x2agtam)이며 1부에서 4부까지 있다. >  


● 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


우리가 탑승한 유람선은 밤새 낫쏘 베이(Nassau Bay)를 지나 케이프 혼(Cape Horn)에 도착하였다. 케이프 혼의 곳곳을 둘러보고, 날씨가 허락하면 조디악 보트를 타고 소수의 몇몇 탐험가들만 알고 있는 장소들을 가볼 수도 있다. 케이프 혼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다시 크루즈에 올라 드레이크 해협(Drake Passage)을 건너간다.


● 케이프 혼 & 푸에르토 윌리엄스


 Ushuaia에서 출발하여 남극으로 향하는 대부분의 크루즈들은 케이프 혼을 지나지만, 케이프 혼에 상륙할 확률은 굉장히 희박하다고 한다. 기상 조건에 따라 상륙을 할 수도 있고, 상륙을 못할 경우도 많다. 


케이프 혼에 상륙하면, 보통 곶(串)의 동쪽에 관광객들을 내리는데 해안가로부터 110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곶의 고지대에 다다르게 된다. 우리 일행은 곶에 도착하여 기념 촬영을 하였다. 


곶이란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모양을 한 육지를 말한다. 케이프 혼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에 있는 곶으로, 칠레의 티에라 델 푸에고 제도에 위치한다. 


푸에르토 윌리엄스는 남극과 가장 가까운 칠레의 최남단에 있는 마을로 눈 덮인 산과 바다가 정겹게 펼쳐지는 곳이다. 이 두 곳은 남극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 남극을 가는 이들에게 관문 노릇을 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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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승리의 개선문(Arc de Triomphe)-승리의 꽃(2)

 

 

카르젤 궁 앞에 세운 개선문이 너무 작다고 더 크고 화려한 개선문을 지으라는 명령을 한 후에도 나폴레옹은 또 여러 전쟁에 나가며 국토를 넓히던 중,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 모스코바를 바로 눈 앞에 두고도 소련의 혹한을 못 이겨 후퇴하며 맞은 처절한 패배와, 1813년 제 6차 “대프랑스동맹”에 마저 패하여 엘바섬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1년이 채 안되어 다시 권력을 잡았으나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하여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니, 승리의 개선문은 공사가 중단된 채 흉물로 거리 한 가운데 서 있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진 후, 혁명 세력들 간의 불화와 정치 미숙으로 인한 사회의 불안은 다시 부르봉왕조에 의한 왕정복고(王政復古, 1814∼1848)를 불러오게 하였고, 나폴레옹은 유배지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지만 혼란 속에 지친 국민들 사이에서는 나폴레옹 시절의 추억이 살아나고 있었다. 

 

 

 

 


루이 필립 1세(Louis-Philippe I)는 군중들을 달래기 위하여 개선문 공사를 재개하여 1836년에야 겨우 완성되었다.  이렇게 다시 만들어진 개선문이 바로 우리가 흔히 “파리의 개선문”이라고 부르는 ‘아르끄 드 뜨리옹쁘’(Arc de Triomphe), 즉 승리의 개선문이다.


결국 나폴레옹 1세는 자신이 치른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자신이 만들기 시작한 이 개선문을 살아 생전에 통과하지 못하고, 1821년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에서 죽은 후에 그 곳에 묻혀 있다가 1840년에 가서야 그의 유해가 개선문 아래를 지나 앵발리드 돔 교회 아래에 매장되었으니 이런 걸 두고 인생 무상이라 하였던가?  

 

 

 

 


그러나 이 정도만 해도 1830년경부터 어수선한 정치상황 속에 국민들 사이에 나폴레옹의 신화가 다시 살아났기에 엄청 예우를 받은 장례 행진이 될 수가 있었다.


프랑스의 정치적 격변기에 깊숙이 개입한 대 문호 빅토르 위고(1802.2.26-1885.5.22)가 1885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프랑스 제3공화국은 혁명과 공화주의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그를 국부로 기려, 개선문에 빈소를 세우며 국장으로 치렀다. 그래서 죽어서 개선문을 통과한 사람은 아직까지 이 두 사람뿐이라고 한다.

 

 

 

 


2차대전의 영웅으로 칭송하는 드골 장군은 살아서 이 문을 통과 하였고, 그래서인지 개선문이 있는 광장을 샤를 드골 에투알 광장(La Place Charles de Gaulle Etoile)이라고 부른다.  에투알은 별이라는 뜻으로 하늘에서 보면 12개의 대로가 개선문으로부터 뻗어있는 모습이 마치 별빛처럼 보인다고…. 


그 대로 중 하나가 카루젤 개선문에서부터 시작되는 샹젤리제 거리이고, 승리의 개선문을 통과하여 곧게 이어지는 길이 샤를 드골 대로가 되며 신 개선문에 이른다. 


승리의 개선문 안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참전용사들을 위한 무덤이 있어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며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령들을 기리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 11시에 종전을 선언하였기에 매년 11월 11일 무명 용사의 묘비 앞에서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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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3
카루젤(Carrousel) 개선문-승리의 꽃(1)

 

 

 

인간이 살아가면서 “삶이 두려워 정부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근저에는 인간의 역사는 죽이고 죽는 전쟁의 역사였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여 주는 일일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정부 형태의 결집된 힘이 혼자보다는 안전하니까!


정부와 정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엄청 많은 죽음 후에 이긴 자도 없고, 진 자도 없는 휴전이 가끔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긴 자와 진 자로 결말을 맺는다. 

 

 

 


그래서 이긴 자는 죽인 자가 되고, 진 자는 죽은 자가 된다. 항상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인 자는 기록을 한다. 이 기록이 우리가 배우는 역사일 것이다. 그 역사에 기록된 죽은 자에 대한 기록은 죽인 자들의 관점에서 본, 그리고 죽인 자들의 승리를 더욱 돋보이려 왜곡된 기록으로 남아 있기에 그 행간을 보며 유추하는 것이 그 당시를 살지 못한 채 오늘에 그 당시를 가늠해보려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가끔은 죽은 자들의 기록도 있겠지만 그 또한 죽은 자들이 죽인 자들일 때 쓰여진 기록일 터이니 그래서 역사는 돌고 도는 모양이다.

 

 

 

 


돌고 도는 역사 속에 옛날부터 위정자들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군사를 환영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비나 개선문을 세운다. 그래야 다음 전쟁에도 국민들이 용기를 가지고 참전할 테니까…


많은 정변 속에서도, 침략하면 승리하던 막강한 세력을 유지해 온 로마 시대에는 36개의 개선문이 세워졌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이태리 로마에는 2000년 전에 세워진 개선문이 3개나 남아있어 후대에 세워지는 대부분의 개선문의 모범이 되었다.

 

 

 

 


파리에도 3개의 개선문이 일직선 상에 나란히 서 있다. 지금은 불타 없어진 튈르리궁전 정원의 끝자락과 루브르 궁의 사이에 있는 카루젤 개선문이 제일 먼저 지어진 개선문이다.


근대 유럽에서 로마제국 이후 최대의 영토 확장을 한 나폴레옹이 출현하며 프랑스의 지도를 잠시나마 바꾸어 놓았을 때, 이기고 돌아온 그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을 것이다. 

 

 

 

 


나폴레옹 1세가 오스테를리츠 전투를 비롯한 전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806년에 카루젤(Carrousel) 개선문을 세웠다.


2년에 걸쳐 세워진 이 개선문은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는데, 하얗고 빨간 8개의 대리석 기둥 위에는 나폴레옹 군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개선문이 세워질 당시에는 문 위에 나폴레옹이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에서 가져온 4마리 청동말이 장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4마리의 청동말은 나폴레옹 실각 후 1815년에 다시 베네치아로 반환하고, 지금은 청동말을 이끄는 승리의 여신과 황금색의 두 여신상이 장식되어 있다. 


격변의 시기에 루이18세가 집권하자 왕정복고의 상징적 장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왕정 복고는 잠시였지만 아직 동상은 건재하여 마차를 탄 여신이 서있는 모습을 본다.


전쟁에서 돌아오는 길에 개선행진을 하며 완성된 개선문을 본 나폴레옹은 규모가 너무 작다고 다시 건축하라는 명을 내려, 건축가 장 프랑수아 살그랑(Jean-Francois Chalgrin)의 설계로 높이가 50m, 폭이 약 45m의 개선문을 샹젤리제 거리에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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