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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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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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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5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읽고(6)

  

▲이사벨라 비숍 여사 

 

 

 

(지난 호에 이어)


 3. 청 군대의 출동


비숍여사가 봉천에 도착한 후, 조선은 정부군이 동학군에게 몇 차례 패배하자 왕은 주저 끝에 청에 도움을 청했다. 청은 신속히 응답했다. 청의 위여귀 장군이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아산에 도착했고, 일도 한양과 제물포를 점령했다. (후에 위여귀 장군은 평양 수비를 하다가 도주한 죄로 체포되어 처형된다.)


선전포고가 있은 후, 일이 바다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어 청군은 만주를 통해 파병되었다. 길림, 치치하얼 등에서 모집된 군인이 봉천을 통해 남으로 갔다. 그들은 훈련이 안된 유목민 출신으로 행군 도중 돈을 지불도 하지 않고 여관을 차지해 무엇이든 약탈했다. 


10명마다 비단 깃발을 들고 있었으나 제대로 무장된 사람은 드물어, 시대에 뒤진 구식 소총이나 긴 화승총을 갖고 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단지 창을 들거나 막대기에 총검을 꽃아 들고 있었다.


이렇게 허술한 무장으로 무라다 소총(서양 소총을 개조해 일이 만든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대적한다는 것은 사실 자살행위였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군인들의 봉급은 일반 노동자의 월급보다 많았다. 이는 아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많은 청군이 죽자 군에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식량과 마초가 준비되지 않았고, 배고픈 군인들은 순식간에 말과 수송 노새를 훔쳐가 잡아 먹었다. 군인들이 허가 받은 강도나 다름 없었다.


그래도 그 가운데 훌륭한 장군이 있었는데 전사하였다. 일본군도 이를 알아 그가 적군이었음에도 추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좌보귀 장군은 5000명의 기병 여단장으로 기강이 잘 잡혀있어, 그를 존경하고 또한 두려워하였다.


전선 사태가 악화되자 도시에 있는 몸이 성한 거지와 실업자, 품팔이 인부를 모병하여 전투에 투입하였으나, 그들도 수송용 노새를 잡아먹고 하여 민간인들은 군인의 행패에 상점 문을 닿고, 산으로 피신하거나 했다.


민간인들은 일본의 점령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간절히 희망하기도 했다. 외국인으로 봉천에 더 이상 남아있는 것도 위험해 비숍 여사도 선전포고가 있은 후 20일 뒤에 봉천을 떠났다. 


4. 격전지 평양의 모습


 화창한 날씨가 평양으로 떠나는 나의 발길을 축복해 주었다. 첫 날의 여행은 작은 시골길, 좁은 계곡, 그리고 아름다운 계곡으로 계속 되었다. 마을의 규모는 작고, 인적은 드물었으며, 꿩이 너무 많아서 마부는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쫓아야 했으며, 물오리가 냇물에 가득했다.


길이 모두 잘 정돈된 것으로 미루어, 어느 고관이 지나가기로 되었던 것이 확실했다. 그 지방 주민들이 비가 내려서 생긴 구멍과 마차바퀴 자국을 메우고 있었다. 고관이 여행할 때면 지방의 모든 집에서는 남자 한 명이나 또는 대리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도중 서흥을 지났는데(평양 동남 100킬로미터 지점), 5000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길가 얕은 개울에는 둑을 따라 오물이 쌓여있는데, 어느 관리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 관리는 해악이 심해, 관청이 있는 마을은 차라리 관리가 없는 곳보다 더욱 쓸쓸해 보였다. 조선의 관리는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이다. 대부분 관리는 사교와 쾌락을 위해 한양에 살고 있으면서 그의 부하를 책임자로 그곳에 남겨놓는다.


재임기간도 짧아 그곳의 백성을 위하기보다 그들을 갈취하는데 더욱 관심이 있었다. 단조로운 시골길을 거쳐 우리는 황주에 도착했다(평양 남단 40킬로미터 지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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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71584
10273
2018-11-09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읽고(5)

 

 

(지난 호에 이어)


2. 청일전쟁의 전운과 제물포


비숍 여사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당시 조선 남부에서 시작된 동학란 소문, 그리고 청일전쟁 전야의 광경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그녀가 원산을 떠나 증기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하니, 일본 포함이 정박해있고 일본 군인 200여명이 언덕 위 불교 사원에 숙영하고 있었다.


다시 제물포에 도착해 보니 그곳은 부산과 달리 매우 흥분된 분위기였다. 거대한 일 전함 6척, 프랑스 배 2척, 중국 배 2 척, 러시아 배 1척이 외항에 늘어서 있었다. 일 수송선에서는 군인, 말 그리고 쌀과 전쟁 물자를 하역하고 인부들이 그것을 해변에 쌓고 있었다.


배에서 내린 여사는 그토록 활기 없던 항구가 바뀌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리에는 일본 군대의 행진소리가 울려 퍼지고, 모포나 마초를 실은 마차가 길을 메웠다. 거리마다 일본인 집은 모두 막사로 변해 군인으로 가득하고, 발코니에는 소총과 군장들이 번쩍였다. 


무기력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해 멍한 상태에 빠진 조선 사람들은 일 진영으로 변해버린 거리를 공허하게 응시하면서 길가에 축 늘어져 있었다.


일본군은 100마리의 말과 200명의 인부를 이용하여 일 영사관으로부터 한양으로 총알, 포탄을 수송하고 있었다. 마을의 보초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심문했다. 그들은 동학란 봉기로 재한 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그들의 목표를 은폐하고 있었다,


조선의 남쪽에서 일어난 반란은 관리의 수탈에 격분한 농민들의 반란이었으나 처음부터 그 명분이 뚜렷하여 그 지도자는 모반자라기보다 차라리 무장 개혁자라 부르고 싶었다.


조선의 대신과 수령들은 나라의 복지에는 전연 무관심한 채 오직 자신의 재산을 모으는 데만 주력했고, 그들의 탐욕을 제어할 길이 없었다. 지난날 관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과거는 이미 뇌물, 흥정, 매관매직으로 대체되었고, 지방으로 발령받은 관리들은 그냥 한양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아첨하고, 혼란 시에는 도망갔다'', 수 없이 많은 소문 가운데 왕이 동학란을 진압하기 위해 한 장군에게 300명을 주어 보냈는데, 동학군과 전투하면서 300명 모두 동학군에 투항하고 장군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홍계훈 장군의 황룡촌 패전을 의미하는 듯하다.


일본은 3개월 동안 6000명을 상륙시켰고, 한양 남산에 대궐과 수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를 점령했다. 또한 제물포와 한양에 있는 일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극동의 정치를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일은 이미 정확한 조선 지도를 만들었고, 조선 내 강의 깊이와 폭을 측정했으며, 3개월 동안 조선의 쌀을 사들였고, 중국 군대의 형편에 대해 중국인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한양에 일 군이 나타나자 중 영사관의 30명 부인들은 황급히 중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탔고, 곧이어 800명의 중국인 남자들이 제물포를 떠났다.


중국인 거류지에서의 공포는 대단해서, 평시 침착하고 상황판단이 빠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평소 잘 따르던 중국인 하인은 이를 꽉 물고 영어로 ''나는 죽게 됐어, 나는 죽게 뙜어''라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제물포에서 잊을 수 없는 그날 저녁 부영사가 찾아와 조선을 떠나야만 한다고 충고했다. 그의 진지한 표정으로 볼 때, 충고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영국인 동료 2명과 함께 일본 기선 하고마루를 타고 발해만으로 향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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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71507
10273
2018-11-02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읽고(4)-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지난 호에 이어)

 

라. 원산의 인상


금강산을 지나 원산에 이르니, 시내에 들어서면서 많은 변화가 보인다.


우선 전신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약 1만5000명이 살고 있는 원산은 조선의 발전하는 도시였으나 시내는 여기에서도 퀴퀴한 냄새가 난다.


이곳에는 가장 깨끗한 주택가로, 조선에서 가장 매력적인 일본인 정착촌이 있다. 잘 다듬어진 길과 깨끗한 부두, 일본 영사관, 일본 상선, 우편선 회사, 평판 좋은 일본 은행, 깨끗한 세관, 유럽 물품을 좋은 가격에 제공하는 상점, 유럽식 복장의 선생이 지도하는 학교, 우아한 여성들이 일본 거류지의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지난번 전쟁(청일 전쟁)에서 피해를 보지도 않았으며, 차분하고 평화롭게 발전하고 있으며 조선사람이나 외국인과의 마찰도 없다. 원산과 한양 사이에는 통신이 가능하며 주로 일본 유선회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저자에게 원산은 꽤 매혹적이었던 것 같다. 비숍 여사는 바닷가 흰 모래 밭을 보면서 장차 좋은 휴양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마. 떠돌며 본 인상


한강변 어느 비가비라는 마을에는 ''양반의 노비가 비가비를 지날 때, 그가 만일 공손하고 태도가 좋으면 무사할 것 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곤장을 맞게 될 것이다.'' 라는 문구가 큰 글씨로 새겨진 푯말이 하나 있었다.


참 희한한 주장을 하는 문구였다. 조선의 악담 중에는 양반이라는 특권 계급에 대한 것이 많이 있다. 양반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생계를 위해 직접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내의 삯 바느질이나, 빨래 삯으로 먹고 사는 한이 있어도 담배대조차 자신이 들고 다녀서는 안 된다. 양반이 여행을 할 때면 관습에 따라 종자를 대동한다. 이런 양반의 종자(노비)조차 마을 사람을 못살게 굴며, 닭이나 계란들을 대가 없이 가져간다.


바가비 마을의 푯말이 이런 풍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한 번은 내가 한강 가에서 사공에게 삯을 지불하고 있는데, 양반의 머슴이 돈 한푼 내지 않고 기와를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 배를 징발하고 있었다. 나의 조선어 통역이 이 배는 외국인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징발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해주고, 머슴을 무마 시키기 위해 돈 몇 푼을 주었다.


 상인이나 농부가 돈이 생겼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양반은 빌려달라고 하고, 떼일 것을 걱정하고 거절하면, 양반집에 감금되어 곤장을 맞는다. 그래도 마을 입구에는 관리의 송덕비가 많이 있는데,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것은 아닌듯하다.


 조선에는 보통 여인숙과 여관이 있다. 여인숙은 앞 마당에 여물통이 있어 당나귀나 말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점을 빼고는 길가에 흔히 보는 오두막이나 다를 바 없다.


읍이나 큰 마을에는 여관이 있는데, 대개 지저분한 뜰에, 돼지, 닭, 개, 황소, 조랑말, 식객, 나그네 짐 등으로 복잡하고, 한쪽 켠에는 마구간, 여물통이 있다. 그 옆에는 밀을 담은 가마솥에 여물을 쑤고 있는데, 이 불기로 밥도 짓고 방을 덥히고 있어, 방이 꽤나 뜨겁다.


방은 진흙 바닥에 갈대 멍석이 깔려있고, 그 위에 베개로 쓰이는 나무 토막들이 놓여있다. 이 방에는 마부, 나그네, 하인, 식객 등이 와글거리고 있다.


조선 관리나 양반은 부근 마을의 관리나 양반의 환대를 받아 여관에 올 일이 없고, 농부들은 조금만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도 자기집을 개방하기 때문에 일본같이 여관 업이 전문직업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식사는 밥, 계란, 국, 국수, 해초, 밀가루 반죽 류 조선 진미가 제공되었다. 차는 제공되지 않았다. 봄철이면 개고기도 흔히 제공되었다.


하루 밤에 세끼를 먹고 200- 300량을 지불했다. 하루 낮 동안을 쉬고, 100량을 지불하니 여관 주인이 만족해 했다. 시골길 여인숙에서는 밤에 호랑이가 두려우니 방 문을 열지 말 것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여행하며 다니는 시골 길은 대개 사람들이 여러 번 다녀 자연적으로 생긴 오솔길뿐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길은 거의 없다. 많은 개천에는 다리가 없고, 있다 해도 대부분은 나뭇가지에 뗏장을 덮은 것에 불과하여 7월 장마에 쓸려 내려가 보통 10월까지는 복구되지 않는다.


한양으로 향하는 중요 대로 조차도 다리가 허술하여, 마부는 말보다 앞서 시험 삼아 건넘으로 다리가 말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한다. 


여행 중 어느 잔치 자리에서 기생이 부르는 시조를 들었는데, 서울에 살고 있는 헐버트 목사가 적어 주었다.

 

 

 오래 전 그대와 나
 손 잡고 맹서 했노라
 입술이 마르고 마음이 슬플 때면
 아무리 향기로운 술 일지라도
 슬픔과 목마름을 풀지 못 했나니
 모두가 흘러간 옛일 이로다

 이제 인생의 황혼 길에 접어들어
 삶의 쇠퇴는 시작 되나니
 어두운 여생인들 얼마나 남았으랴
 오로지 죽지 않는 술 잔을 벗삼아
 영원히 더럽혀진 사원을 슬퍼할지니
 젊은 날의 맹서가 사라진 그곳이여…

 아니다, 아니노라
 사념이여 물러가라
 즐거운 주연은 다시 내 영혼을 일깨우리니
 선인이여 잡으시라 이 한잔 술을
 독주를 파는 곳이 어드메더뇨
 저 건너 도원이 게 아니더냐
 행운이 그대에게 있을지니
 나 그대 위해 거문고를 타노라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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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71428
10273
2018-10-30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읽고(3)-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지난 호에 이어)


다. 한양의 첫 인상


제물포로부터 한양의 강나루인 마포까지는 56마일로 배편을 이용하여 올라갈 수 있으나, 저자는 한양주제 영국 총 영사 대리인 가드너 씨의 주선으로 6명이 메는 가마를 타고 갔다.


당시, 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길은 잘 보이지도 않고, 초목이 우거진 곳도 있고, 때로는 깊은 구덩이가 있어 돌아가야 하는 등 황폐해 있었다.


낮은 산 근처에는 과수로 둘러싸인 마을, 언덕에는 소나무로 둘러싸인 무덤이 많았다. 사람 모습의 장승도 많았으나 시골의 일반 형태는 헐벗고 단조로웠다. 마포에 이르자 상품을 실은 황소, 갓을 쓰고 흰옷을 입은 통행인이 꽤 많았다.


거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우리는 도시의 거름을 잔뜩 싣고 시골까지 나르는 나룻배와 우연히 마주쳤고, 한강 모레사장에는 한양의 봄 청소를 하느라, 마포로부터 한양까지의 도로에 무수한 황소가 도시의 하수도 쓰레기를 적재한 광주리를 운반하는 것을 보았다.


당시 한양 판윤(지금의 서울시장. 정2품)은 환경과 위생의 개선을 위해 괄목할 만한 과업을 수행했다. 25만의 인구를 가진 한양으로 산더미 같은 나뭇가지(땔감)를 나르는 황소가 거의 하루 종일 길을 메우고 있었다.


그 혼잡한 군중 속에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거리를 배회하는 남성들이 많이 보였다. 한양 내부로 들어가니 내가 북경을 보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가장 불결한 도시인양 생각됐던, 지독한 냄새로 도무지 한 나라의 수도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2층 집을 짓는 것이 관례상 금지되어 있어, 25만의 주민은 주로 바닥에서 생활하고 있다. 꾸불꾸불한 도로는 대부분 짐을 실은 황소 두 마리가 지나 가기도 힘들고, 각 가정에서 버린 오물로 가득한 하수도로 길은 그나마도 좁아졌다.


이미 다른 곳에서 본 바와 같이 수도 한양에서도 악취 나는 하수도가 벌거벗은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었다. 작은 좌판상점이 모두 합해 6달러 정도의 상품을 놓고 장사하고 있었다. 진열품이 매우 적어 모든 상품이 손에 닿을 만한 곳에 있다.


짧고 긴 담뱃대, 사발 그릇, 유약을 바른 그릇, 밥그릇, 일제 딱성냥, 물감, 담배 쌈지, 돈주머니, 두루마리 기름 종이, 장식 술, 비단 끈, 잣, 쌀, 기장, 수수, 완두콩, 짚신, 모자, 삿갓, 면포를 팔고 있다.


북경로를 따라 서대문을 지나 남산에 이르니, 비탈길 위에 단순하고 검소한 흰 목조 건물인 일본공사관이 보이고, 그 아래로 찻집, 극장과 일본인 복지에 필요한 시설을 갖춘 일인 거류지에 약 5000명이 살고 있다.


조선의 모든 거리와 비교해 청결하고 고상하고 검소한 여인들과 깃이 달린 옷을 입고 게다를 신은 남자들이 돌아다니는 상점과 집의 거리가 보였다. 조선은 오래 전부터 일인에 대한 증오심이 강했기 때문에 군인, 헌병, 착검한 장교들이 보였다.


중국인 거류지도 다른 거류지와 다르지 않았다. 외국인들은 중국 상점에서 많은 것을 구입하며, 조선 사람들도 이곳에서 약간의 거래를 한다. 


한양의 광경 중 하나는 개천이다. 넓고 양쪽으로 담장이 쳐있으며 복개되지 않은 이 개천을 따라 검게 썩은 물이 악취를 풍기며 흐르고 있다.


한 때는 자갈이 깔려있던 개천에는 퇴비와 쓰레기가 떠올라 개천을 온통 덥고 있다. 이 악취 나는 물가에서 통에 물을 길어와 옷을 빨래하는 여인들이 있다. 여인들은 불결한 한강이나 성 밖에 있는 시냇물에서 세탁을 한다.


한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그 산들은 거의 벌거숭이였다.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넓은 거리가 있고, 이 길에서 옆으로 벗어나 남대문에 이른다.


큰 중앙로에서 왕궁까지 60야드 넓이의 도로가 있는데, 이 도로가 장애물이 없는 유일한 길로 양편이 노점 거리로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이른 3월에 이곳을 보았는데, 한 거리는 지난해 내린 눈으로 여전히 길이 막혀 있었다.


이 셋의 거리에는 눈처럼 하얀 도포의 행렬이 있었다. 셋의 넓은 거리를 오가는 갓 쓰고 도포 입은 사람들은 대개가 목적 없이 다니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부분 젊은 양반인데, 양반어른의 걸음거리를 흉내 내면서 큰 거리를 돌아다니는 이들은, 관직을 열망하며 한양에서 무엇인가 잡아 보려고 한양으로 몰려든 사람들이다.
한양이 곧 조선이라 할 수 있는데, 모든 공직의 임용, 그리고 채용의 유일한 통로인 과거가 여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에는 여론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와 비슷한 국민 감정의 분위기는 오직 이곳에서만 나타나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 원치도 않았던 서구문명과의 접촉에서 오는 최초의 긴장을 느끼면서, 깊은 잠에서 깨어나 반쯤 부신 눈을 비비며, 자신을 돌보아야 하는 개화기 불안정한 분위기가 한양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조선에서 상업이라고는 행상 정도였지만, 그나마도 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모든 사업 역시 한양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인지 모든 조선 사람들의 마음은 서울에 가있어 지방관리들은 한양에 별도의 집을 가지고 있고, 일년의 대부분은 한양에서 지낸다.


그 기간 동안 지방의 자기 업무는 부관에게 맡긴다. 지방지주도 임대료를 받으면서 농민을 쥐어 짜내며 부재지주로 서울한양에 거주한다.


좀 가진 게 있는 사람들이나, 어디 기댈 곳이 있는 사람들은 일년에 한 두 번씩 서울에 올라온다. 이제 변화의 시동이 꿈틀대는 격변의 시기에, 그래도 한양은 조선 사람들에게 살만한 곳이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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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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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3
2018-10-21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읽고(2)-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지난 호에 이어)
청일전쟁 이후 상수도 시설도 가구당 100냥의 부담으로 건설되어 수돗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어느 모로나 부산의 거주지는 일본식이어서 5000명의 일본인 거주자 외에도 8000명의 일 어부가 유동인구로 거주하고 있었다.


조선어를 거의 영어처럼 말하는 영국인 우나씨의 안내를 받아 구 부산(조선인 거주구역(?))을 방문했다. 그날은 장날이었다. 거기서 본 부산 모습은 처참했다. 


나중에야 나는 그것이 조선마을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점을 알았다. 좁고 더러운 거리에는 진흙을 발라 창문도 없이 울타리를 세운 오두막집, 밀집지붕, 그리고 깊은 처마, 마당으로부터 2피트 높이의 굴뚝이 솟아 있었고, 바깥에는 고체, 액체 쓰레기가 담겨있는 하수구가 있다. 더러운 개와 벌거벗은 채 눈병과 때가 많은 어린애들이 두껍게 쌓인 먼지와 진흙 속에 뒹굴면서 심한 악취에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을과 작은 도시에는 상점이 사실상 없고 사람들은 생산품의 판매나 교환뿐만 아니라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5일장에서 얻는다. 좁고 먼지투성인 거리를 따라 상품들이 멍석 위에 널려있었고, 더러운 흰 면 옷을 입은 남자나 늙은 여자가 그것을 지키고 있다. 손님을 부르는 소리가 높이 울려 퍼지고, 그곳의 상품 구매자나 상인이나 모두 가난하다는 인상을 준다.


거친 무명, 실 타래, 짚신, 나무 빗, 담뱃대, 쌈지, 건어물, 해초, 허리띠, 거칠거나 부드러운 종이, 검은색 보리 엿이 멍석 위에 놓인 품목들이다. 이 혼잡한 장거리를 지나 원주민이 살고 있는 구역에서, 이 부패하고 더러운 마을을 찾아 온 3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아가씨를 발견했다(선교사). 


그들은 좁은 진흙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데, 방의 천정이 너무 낮아 한 명은 똑바로 설 수가 없었다. 그래도 착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의료선교사였는데, 내가 1년이 지나 다시 방문했을 때도 여전히 오두막집에서 행복해 보였다. 대게 그들은 조선 풍으로, 조선 음식을 먹고 생활하고 있었다.
 나. 제물포(인천)

 

 다시 히고마루를 타고 3일을 항해하여 한양 입구인 제물포에 정박했다. 사실 대부분의 정박지 처럼 제물포도 항구라 말할 수가 없었다. 간만의 차가 심해 물이 빠지면 개펄이 펼쳐지고, 모래톱 사이 좁은 통로로 항해가 가능했다.


부산에서처럼 일본인 도선사가 배에 올라와 정박지를 정해주는 등 선장에게 이것 저것 지시했다. 정박지에서 바라보니 초라한 집들이 옹기 종기 모여있었다.


영국 부영사 윌킨스씨의 마중을 받고 그의 집에 손님방이 없는 터라 어느 중국 여관에 머물렀다. 이 여관주인은 친절하고, 손님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 어느 정도 사업에 성공하고 있었다.


여관이 있는 거류지는 멋있는 관청과 상인조합사무실이 있고, 상점이 열을 지어 있어, 꽤 번창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리는 폭죽과 북, 징 소리로 시끄러웠다. 이곳에서 중국인은 교역에서 분명 일인을 앞지르고 있고, 외국인 고객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일인을 증오하는 조선인들은 주로 중국인을 상대했다.


부둣가에는 많은 쌀자루 더미가 쌓여있는데, 수출로 쌀값이 오르자 주민들의 불만이 커가고 있지만, 일본의 앞잡이는 전국을 샅샅이 뒤져 쌀을 사왔다. 이는 전쟁을 위한 군량미로 비축되고 있는데, 조선인은 이를 모르고 있다. 그래도 쌀의 호황으로 제물포는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사람들은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가의 일인 거류지 밖에서 살고 있다. 자투리 땅마다 채소를 심은 토담집이 늘어서있고, 지저분한 골목에는 몹시 더러운 아이들이 떼지어 앉아 그들의 무기력한 아버지를 본받고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는 관아가 있다. 형벌의 방법은 벼슬아치들이 죄인을 잔인하게 채찍질하고, 죽도록 때리는 것이다. 죄인들의 부르짖음이 영국 선교관까지 들려온다.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거의 모든 관아가 악의 소굴로 되어있다.


조선사람들은 외국인 거류지에서 짐꾼으로 일하며, 지게로 엄청난 무게의 짐을 나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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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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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1)-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서론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조선여행을 마치며 이렇게 썼다.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의 운명을 놓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조선을 떠나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 처음 조선에 대해 내가 느꼈던 혐오감은 애정에 가까운 관심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전의 어떤 여행보다도 친밀한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 무척 아쉽다.


 나는 눈이 오는 날, 조선의 가장 아름다운 겨울 아침의 푸른 대기 속에서 서울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 다음날 조그만 증기선인 하이에닉(Hyenic) 호를 타고 강한 북풍을 가르며 상해를 향해 떠났다. 배가 증기를 뿜으며 서서히 나아갈 때 나부끼는 조선 깃발이 내게 묘한 흥미와 의문을 주었다.''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한국에서 유명한 조선말기 여행기다. 그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많은 여행기를 남겼지만 특히 1894∼97년 사이에 4차례 조선을 방문하고 1898년에 이 책을 출간했다. 조선의 풍경, 생활상, 사람들에 대해 서구인의 눈으로 보고 듣고 느낀 소회를 기록했다. 


그는 영국 지리학회의 최초 여성회원일 만큼 학구적이어서 조선의 현실과 그 뒤에 숨겨진 역사를 보려고 애썼다. 더럽고, 냄새 나고, 덮개 없는 하수구에 오물이 널려있는 부산의 첫 인상이 그 후 한양, 송도, 평양, 원산을 거치며 별 다름없이 이어지지만,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아름다운 산천, 허물어진 관아, 산속에 쓰러져가는 사찰, 퇴색된 궁전, 쇠락한 지난 문명의 잔영을 본다.


 저자는 아마도 이에 안타까운 연민의 정을 느꼈는지 모른다. 조선 땅을 밟으며, 처음 느꼈던 혐오감이 애정으로 바뀌면서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저자는 조선에 대해 기묘한 흥미와 애정을 느꼈다고 쓰고 있다.


 내년에 3.1절 100주년을 맞아 지난 날을 되새겨본다. 왜, 조선은 실패하였는지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본론


 당시 63세의 영국 여행가는 부유한 성공회 신부인 아버지의 유산이 있어 널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조선에 온 이유는 아마도 동양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일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가는 길에 조선을 들리게 된다. 


1894년2월, 시모노세기에서 부산에 첫 발을 디디고, 영국인으로 처음 조선을 여행한 비숍 여사가 본 조선의 인상기를 쓴다. 다시 배를 타고 제물포, 한양, 그리고 나룻배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 단양을 거쳐 금강산, 원산으로, 다시 배를 타고 우라디보스독을 거쳐, 두만강 훈춘에서 만주로 들어간다.


 필자는 만주,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내의 비참한 조선인들과는 달리 척박한 환경에서도 오히려 유복하고 활기찬 생활을 하는 조선 이주민을 본다. ''아! 수탈만 없다면, 이들도 유복하고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구나''하며, 게으르고 무감각하고 더럽다는 첫인상과는 다른 새로운 조선인을 본다.


 그리고 다시 대동강을 따라 (진)남포까지 내려간다. 한양에서는 왕, 왕비, 황태자를 4번이나 알현하고 청일전쟁 중의 일본, 청나라 군인 모습도 본다. 민비 시해도 가까이에서 접하여 역사책에 없는 이야기도 전해준다.


시내 여행시는 조랑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고, 장거리는 조랑말을 타고 영국 영사관 직원, 영어를 하는 조선인 통역, 마부 그리고 짐을 실은 나귀와 함께 여행했다. 험한 길을 가다가 팔이 부러지는 사고도 당하고, 야간에는 호랑이, 늑대가 무서워 외출을 삼갔다.


 1. 조선의 첫 인상


 가. 부산


1894년 1월 나가사기에서 히고마루를 타고 15시간 항해 후 부산에 닿았다. 선창에서 본 갈색의 민둥산이 강렬하게 첫인상으로 남았다. 부산에 닻을 내리며 만난 사람은 조선 사람이 아니라 일본사람이었다. 배의 정박을 도운 사람도, 부두에 점등하는 사람도 일본사람이었다. 세관원은 영국인이었다. 그는 조선의 관세세입 업무를 돕기 위해 중국세관에서 파견한 인물이었다.


 부산은 1883년 외국무역에 개방되었고, 그때부터 부산은 현저하게 발전되었다. 그 해 외국인은 1500명이었으나, 1897년에는 5500명이 되었다.


부산의 외국인 거주지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고, 시내는 일본인 상점과 더불어 각종의 영국식, 일본식 건물과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꽤 좋아 보이는 일본풍의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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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공심(公心), 사심(私心)

 

 약 반세기 전, 내가 근무하고 있던 APD-81함(amphibious, patrol, destroyer)이 미국 독립 200주년 해상 관함식(parade)에 참가하게 되었다. 즐거운 일이다. 당시 70년대에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절인데, 미국에 가게 됐으니.


그런데 문제는, 배만 가는 게 아니라 의장대, 군악대, 참모 등 행사요원이 동승함으로 이들의 침실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즉, 얼마간 배 승조원이 미국 방문을 포기하고, 자기가 자던 침대를 비워주어야 했다.


 이 배는 일반 구축함을 해상 대간첩 상황에 대응코자 약간 개조해서, 해병 1개 소대를 싣고 다니게 되어있다. 함미의 포를 제거하고, 해병 50명이 탑승할 공간과 고속 주정 2대가 실려있었다.


예를 들어, 도망가던 간첩선이 섬으로 상륙해 숨어버리면(60, 70년대에는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해병이 상륙해 추적하는 것이다.


고속 간첩선은 전투함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공군이 출격하니, 바다 위에서 도주해봤자 공군의 쉬운 표적이 됐다. 파란 바닷물 위에 길게 흰 물줄기를 뒤로 뽑으며 도망가는 간첩선은 하늘에서 볼 때, 간첩선 식별을 오히려 도와주어 쉬운 표적이 됐다. 그래서 섬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한 달여의 대양횡단과 행사준비에 모두들 부산했다. 태평양 가운데에서 기관이 고장 나면 안 되는 일이니, 엔진 정비에서부터, 승조원의 흰 복장 준비까지.


이런 일이야 각 부서장 책임하에 진행됐으나, 주로 수병의 양보를 받아야 하는 하선 인원 선정은 부(함)장의 업무가 되었다.


기관부는 태평양 횡단 항해를 하니 인원을 줄일 수 없고, 작전부는 해상 경계가 아니니 좀 줄이고, 포술부가 주 타깃이 됐다. 기념행사니 포를 쏠 일이 없어 거의 모든 수병이 하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참가자와 하선자의 선정에 적용할 무슨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선의의 협조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다. 막무가내 버티면 할 수가 없는데, 그런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에겐 6주간의 장기 휴가보다 미국 구경이 당연히 더 좋았기 때문이다. 탓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부장이 해결해야 하는 업무가 됐다. ''나도 내린다''고 배수진을 치고, 맨투맨 양보를 구했다.


승조원들은 ‘부장이 내린다니, 그저 하는 소리려니’ 했으나, 협조해 주었다. 하선 인원 선정도 끝나고, 행사요원 침실 배치까지 대강 끝나자, 나는 약속대로 배에서 내렸다.
이렇게 해서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해상 퍼레이드 참가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이 글은 필자의 군생활 경험담이다. 내 자랑 하고자 쓴 글이 아니다. 모두들 거부하고 나서려 하지 않을 때, 이를 앞장서는 것은 말같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꽉 막힌 일을 쉽게 풀게 한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런 게 ‘희생’ 아닐까(?). 필자는 이를 공심이라 생각한다. 배에서 부(함)장은 세컨드 맨이다. 난들 가기 싫었겠나(?), ''내가 왜 내려'' 한들 누가 뭐라겠나(?)
부장이 먼저 미국 방문을 포기하자, 수병들도 따라주었다. 공심과 사심, 때로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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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5
어찌할 것인가? 한-북-미 대화

  

 서론


조선 초기 600만 정도의 인구가 16세기 조선 중기에 이르러 1000만을 넘었다. 강가에 살던 주민이 새로운 농토를 찾아 내륙으로 들어가 화전 등으로 산지를 개간, 농토를 늘리고, 씨를 뿌리는 농사법이 모내기식으로 개량되면서 생산성이 높아지자, 인구도 늘고, 점차 여러 생활상품의 수요가 발생했다(소금, 옷감, 철제 농기구).


이에, 가진 것을 사고-파는 초기 시장이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 정조 때에는 인구가 1700만이 되었는데, 전국에 약 1000개의 시장이 형성되어(5일장), 경제활동이 움트기 시작했다.


당시, 가진 것 없고,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이 살 길을 찾아 모여드는 곳이 광산이었는데, 성천 사금광의 경우, 바가지 하나와 땅 파는 호미 하나만 있으면, 하루 종일 앉아, 좁쌀 같은 금 조각을 골라내는데, 하루 서너 알을 채취해 예닐곱 푼쯤을 받으면, 이는 농사짓는 일보다 이익이 컸다.


어쩌다 재수가 좋아 돈을 벌기도 하고, 운수가 대통할 때는 삽 시간에 부자가 되기도 했다. 18세기 말 정조는 금광개발을 막고, 이들을 엄하게 다스려, 광부를 농촌으로 되돌아가게 하였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농촌인구 이탈, 금의 해외 유출 방지).


당시 매장량에 따라 한곳에 수백, 수천 명의 광산 노동자가 몰려들었다 한다. 결국 ''백성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아, 큰 이익이 있는 한, 매일같이 매를 쳐서 금하더라도 그 형세를 걷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은 시초부터 억상정책을 유지하고 있었고, 소위 백성이 농사나 지을 일이지 돈을 모아 부자가 되면 다른 일을 도모하게 되고 이로서 양반을 중심으로 한 억압적 신분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삶에 돈 되는 일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조선은 국가 정책에 어긋나는 백성의 경제활동을 허가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북한을 생각해보면, 장마당이 500개에 이르고 있다 하니, 조선 정조의 시대상황과 비슷하지 아니한가(?) 생각된다. 

 

 본론


북이 미와 회담을 앞두고 몽니를 부리고 있다. 악의 축이었던 북이 이성적으로 스마트한, 예의도 바른, 또 솔직한 김으로 변신에 성공하고, 이에 미가 군사력 사용 카드를 접자, 발목잡기를 시작한 격이다. 예견할 수 없었던 일은 아니나 뒤통수를 한방 맞은 건 사실인 듯하다.


북이 폐쇄, 독재, 억압 체제에서 한국만큼 성공한 보통나라로 된다는 것은 (미의 언급), 체제의 ''확 바꿈''이다. 삶의 모든 형태를 바꾸는 변혁이 정상들의 합의만으로 단시간 내에 이루어지리라 바라는 것은 무리다.


비록, 이번만은 북 정상이 진정성을 갖고 있었다 해도, 핵 보유를 헌법에 명시하고, 북을 지키는 최후의 보검이라 강조해 왔는데… 불현듯 ''위협이 없으면, 갖고 있을 필요 없다''하니, 이 논리의 반전을 적어도 핵으로 세뇌된 수십만 그의 인민들을 설득시켜야 한다. 어린 왕자 하나의 카리스마로는 안된다.


2500만중 당, 군 핵심인구 500만. 몇 명의 불평세력이라면 잡아다 처리하면 되겠지만, 그 중 10%만 웅성웅성, 수근수근 하면, 이들 50만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간 표현대로 핵을 버리고, 보통국가가 되려면 혁명적 사고체제의 변화, 혁명을 치러야 한다. 왕, 왕후의 목을 쳤던 영, 불 명예, 시민 혁명이 괜한 일이 아니다. 즉, 북의 핵보유를 신봉하는 일부 집단의 요구를 수용, 완전한 비핵화에서 한발 물러서 충분한 비핵화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은 어떤가? 여러 가지 군사옵션이 검토되었지만 결국 군사력이 아닌 외교, 경제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선택을 이미 했다. 미국도 사실상 실현하기 어렵고, 검증도 힘든 완전 비핵화에서 한발 비켜 충분한 비핵화 수준에서 ''다 했다'' 선언하고, 손 털고 일어나지 않을까(?).


미 정상은 노벨상 이야기에 함박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어, 이미 미끼를 문 상태여서, 군사옵션 이야기는 물 건너 갔고, 타협으로 마무리 해야 할 판이다.

 

 결론


그러면 한국은? 잘 아시는 바, 토론토 시내 경찰차에는 ''Deeds speak''라는 글이 쓰여있다. ''행동을 보고 평가 하세요'' -도둑질 하는 자는 도둑일 테고, 거짓말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일 테고-


그간 수십 년간 북의 행태(Deeds)를 보아오지 않았나. 별, 험한 소리 다하다가, 어느 날 몇 시간 대화하고, 악마가 천사가 되어, 남한 국민의 마음에 80%의 신뢰감을 심어 주었다 한다(참으로, 맘씨 좋은 분들 이시다).


그간 분명했던 것은 북은 필요에 따라 약속하고, 필요에 따라 파기하고, 상대방은 그에 따라 일희일비했다. 탓할 일도 아니고, 처음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실일까(?)했다. 시대상황이 그러하다. 더 이상 깡패국가로 낙후한 최빈국 국가로 남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씨도, 이번에는 약속을 지킬까(?) 했으나, 앞서 말한 내부문제가 있다. 그래서 몽니가 나왔다. 미도 이를 알 것이다. 세상사가 다 그러하듯 ''끝나야, 끝나는 것이다''. 시작 초기 약속만으로 믿을 수 없음은 많은 사례가 역사에 기록돼있다.


별로 점잖을 것 같지 않은 이 게임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결국 남한국민이 답해야 한다. 다 함께 생각하여 봅시다. 흙탕물에서 연꽃을 일구는 심정으로, ''한강의 기적에 이어, 동방의 기적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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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조선 후기 100년과 민비 시해(하)

  

(지난 호에 이어)
이때, 청 상인의 조선 내 경제활동을 돕기 위해 ‘조중상인 수륙무역장정’을 합의하는데, 합의문 중 “이번에 정한 장정은 중국이 '속국'을 우대하는 뜻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이것이 빌미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청의 증가되는 간섭에서 탈피코자, 미국(1882), 러시아(1884)와도 조약을 맺는다. 아는 바와 같이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청의 지원으로 진압되자 일은 조에서 청 세력의 강화를 인식하고 군비증강에 나선다.


10년 군비증강을 앞당겨 완수하고 청과 일전을 탐하고 있던 중 동학란이 일어난다. 군란과 정변에 이어 또 한번 고종은 외세에 의존해 화를 자초한다. 청이 조의 요청에 의해 3000명의 군사를 파견하자, 일은 자국민의 보호를 명분으로 1만4000명을 파견한다.  


그간 청에 밀렸던 열세를 만회하고, 차제에 만주침공의 빌미를 잡기 위함이었다. 일은 서해 풍도에서 고승호를 격침시킴으로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파죽지세로 일이 평양을 거쳐 산동반도 려순을 점령한다(1895).


당시 서구는 청이 승전하리라 생각했다. 함정 수(청 87척, 일 52척), 육군병력(청 60만, 일 25만)도 청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어느 기자의 말대로 “짱꼴라 군대는 멀리서 대포 소리만 들려도 도망가고, 칼을 빼는 모습만 보아도 항복을 하는 종이호랑이” 였다.


그럼, 어째서 조선에는 강하고, 일에는 약한가? 답은 원래 짱꼴라는 약한 자에게는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약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만족했다. 일이 만주와 중국을 점령해 러시아의 남진을 막을 것이기에, 그러나 러는 곤란했다. 부동항을 향해 계속 남진해야 하는데 일이 걸림돌이 되고, 1891년 착공된 시베리아 대륙횡단 철도가 완공되기까지는 해결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의 려순만 점령은 용인할 수 없어 ''반환하라''고 하니(러, 불, 독 3국 간섭) 일이 승복한다. 


피 흘려 점령한 요충지, 려순을 반납하는 것을 본 민비는 아시아의 강자는 러시아라 생각하고, 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에 의존코자 한다. 또 한번 반복되는 외세의존이다. 힘이 없으니, 때마다 외세의존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미 말한 대로, 그간의 친일내각을 친러, 친미내각으로 교체한다. 일은 칼잡이를 모으고, 1895년 10월 8일, 건청궁 민비 침소에 침입한다.


민비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세련된 친절, 따뜻한 배려 등 공사 부부의 개인적 친절을 곧 러 정부의 뜻이라 믿었던 듯했다(?). 그리고 조선보호국화정책에 정면 도전했던 것이다. 


친일 김홍집 내각을 친미, 친러 중심으로 교체한다. 이로서 일은 민비 제거를 결행키로 한다. 일은 천왕의 측근인 이노우에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는지, 민비 시해 37일전에 미우라로 일 공사를 대체한다.


8일 새벽, 40여명의 자객과 함께 사건의 위장용으로 동원된 대원군과 조선 훈련대가 경복궁에 들어선 시각은 5시15분.  6시10분경 대원군을 근정전에 내려놓고, 한 무리는 왕의 거처로, 다른 무리는 건청궁으로 달려가 민비와 3명의 궁녀를 살해한다.


자객들은 궁녀와 왕태자 이척을 통해 민비의 시신을 확인한다. 완전히 죽지 않은 민비를 마당으로 끌어내어 이불을 덥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른다.


사건 후, 미우라 공사는 ''이는 대원군과 훈련대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일은 전연 무관하다''고 강변했으나, 일 정부는 열흘 뒤 공사 이하 자객 40여명을 소환, 재판에 회부한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무혐의 처리된다.

 

 결론


이것이 누구의 말 같이 ''조선의 못난 개항'', ''바보 같은 왕과 그의 측근들''의 이야기이다. 도무지, 아침 6시부터 10시경까지 장안의 궁전에 침입한 40명의 폭도들이 왕비를 칼로 찌르고, 죽이고, 불사르는 동안 덤벼든 조선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니… 옛날 이야기 하자는 게 아니다. 지금은 과연 다른가? 


(알림) 매달 첫째 주 수요일 낮12시-오후 3시에 갤러리아 슈퍼마켓 문화교실에서 인문학 강의가 있습니다. 강사는 문종명, 한호림, 손영호, 알랙스 김, 천하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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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1
조선 후기 100년과 민비 시해(상)

 

서론


세계의 황제가 되고자 했던 나폴레옹은 유럽의 정복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영국을 고사 시키고자, 대륙봉쇄령을 명한다. 그러나 경제적 유대가 깊었던 러시아가 이를 어기고 영과 무역을 계속하자, 나폴레옹은 러 원정에 나선다.


그의 60만 대군이 모스크바의 동장군에 대패하고(1812), 그 후, 영, 프로이센 연합군에 완패한 후(1815. 워터루), 나폴레옹이 사라진 세계는 바야흐로 영, 러의 무대가 된다.


러시아가 은둔의 나라 조선의 민비 시해에 연루된 사연은 오로지 한반도가 갖는 지정학적 의미 때문이다. 즉, 러의 대륙진출 꿈은 독일에 막히고, 해양진출의 꿈은 영국에 막힌 상황인데, 특히나 대륙국가인 러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가 필요했다.


1860년, 아편전쟁의 중재 대가로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당 받은 러시아가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러는 조선 역사에 발을 내디딘다. 러의 남진을 저지하고 있던 영은 청이 이를 막아주기를 바랐으나, 청일전쟁을 보고 청에 실망해 그 역할을 일이 대신해 주기를 바란다. 아시아에서 일은 제1의 육, 해군을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청의 심한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던 차에, 청일전쟁으로 일이 점령한 산동반도(려순항) 반환을 이끌어낸 러의 힘을 보고 보호를 부탁하려 한다.


고종은 러 황제,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그의 측근 민영환을 보내 이를 타진한다. 러는 이왕에 부동항 획득의 꿈이 있어, 조의 지정학적 가치에 유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러시아의 중심부에서 너무 먼 거리에 있는 관계로 군사력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관여는 불가하여, 외교상 크게 실망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외형상 우의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나 조선 주재 러공사 내외는 고종, 민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민비로 하여금 이를 오해케 했다. 이로서 민비는 러를 믿어도 좋다고 생각 했는지(?), 당시의 친일 내각을 친러, 친미 내각으로 교체한다.


일로서는 무심할 수 없는 사태다. 일찍이 조선을 거쳐 만주로 진출하고자 하던 차에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면 큰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은 민비를 친러정책의 핵심인물로 보고, 조-러의 연결고리인 민비를 제거코자 한다. 이것이 민비 시해이다. 

 

 본론


1800년, 조의 23대왕 순조가 10세에 왕위에 오른다. 이어서 헌종이 8세, 철종이 19세, 고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른다. 이렇게 100년 동안 어린 소년을 왕이라 앉혀놓고, 그의 외척들이 준비도 개념도 없이 국정을 담당한다.


조선 후기 100년(1800-1907), 통한의 역사는 이렇게 정도를 외면하고 농간으로 국정을 이끌어 나가려던 위정자에 의해 결국 망한다. 1849년, 강화도에서 농부생활을 하던 젊은이가 졸지에 가마 타고 한양에 입성해 왕좌에 오르니, 그가 철종이다. 


당시 청은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근대화 서구의 의미를 경험하고 있었고, 일은 명치유신의 시기로 근대화에 맹진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은 12살 어린 왕을 대신해 그의 아버지 대원군이 집정한다.


대원군도 각종 국정의 병폐를 모르는 바 아니어서, 그로서는 개혁에 노력하고 있었으나, 이미 지난 시대의 인물이었다. 격변의 19세기 시대정신에 부응할 수가 없었다.
천운도 따르지 않는지, 1882년부터 3년 터울로 연속 흉년이 들더니만, 92년부터는 연이어 가뭄이 찾아왔다. 이로 인한 굶주림은 돌림병(콜레라)을 불러와, 1876년 대흉년 후, 1878년 경상도 어느 곳에서는 인구3만 명이 4천명으로 줄었다.


 이러한 피폐한 민생의 어려움을 돌보아야 할 위정자들의 본분은 무엇이었는지, 이들의 사리사욕, 가렴주구는 민생을 고달프게 해 민심을 이반케 했다. 이로서 국정의 근간은 무너지고, 조선은 군인 봉급도 주지 못하는 실정에 이르러 군의 반란이 터졌다(임오군란). 


대원군 10년, 19세기 시대상황을 모르는 채 나름의 개혁을 주도해 나가던 대원군이 하야하고, 20대 고종이 친정을 시작할 때(1873) 자의반 타의반 일과 개국에 합의한다(강화도 조약).


이로서 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식 별기군이 창설됐으나(1881), 오히려 이로 인해 군란이 발생하고, 이의 진압에 청이 지원한 후, 조는 청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과 한국 사이에 속국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그 즈음이다. 당시 주일 청 공사가 일의 대만정복(1875), 오키나와 합병(1879)을 보면서 느낀 바가 있어, 청의 실세 이홍장에게 조의 식민지화를 건의한다. 이에 굳이 그럴 것 없이, 실질적으로 속국화하면 된다, 하며 그의 부하 원세개를 파견한다.


이로서 청은 외교, 내정, 인사 등 모든 국정을 간섭하는 상황에 이른다. 고종도 이를 반기지는 않았으나 청에 의탁, 정권을 유지할 뜻이 있어 이를 견뎌내고 있던 참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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