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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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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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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1
[3.1절100주년 기념 안보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11)

 

(지난 호에 이어)
조선은 이를 기초로 왕도정치를 추구하고, 삼강오륜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을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도덕적 수양과 왕도로 사회 안정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이상국가). 


이에는 인간은 탐욕스럽고, 정치는 부패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고로 도덕적으로 교육된 인간이 도덕정치(왕도)를 실천함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이룩할 수 있으며, 또한 지배층의 부패를 예방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6세기, 개혁의 이념적 근거인 성리학을 좀더 학문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논쟁이 야기되고, 17세기, 이 논쟁이 다른 논리(학파)를 배타시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상적인 학문이 현실에서 이상하게 굴곡하는 우를 범했다. 이 논쟁이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당파를 만들고, 이상적인 학문인 성리학은 현실에서 당파싸움의 도구가 되었다.


결국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논쟁으로 전락한다. "왕과 왕비의 상에 몇 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하는 논쟁(예송 논쟁)이 피 튀기는 정쟁이 되고, 18세기 더욱 심하게 되면서 조선 말기로 이어진다. 딱한 일이다.


이로서 정치-사회 개혁의 이념적 지주였던 성리학은 조선 말기 그 긍정적 기능을 상실하고, 조선 실패의 원인을 자임한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교사상 체계인 성리학은 농본주의적 중세사회의 학문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농업의 발전뿐 아니라 상공업이 발전되면서 사회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고, 이에 맞는 다른 사상이 필요했다.


성리학은 그 시대적 사명을 다했으나, 조선의 사대부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온 서구가 조총, 대포를 앞세워 문을 두들일 때, 조선의 사대부는 "공자왈, 맹자왈" 하며 익힌 사상으로 이를 대하고자 하니...


모택동도 중국의 후진성이 유교에서 기인했다고 봐 공자사당을 모두 부시는 등(홍위병), 과거의 전통과 결별을 선언했다. 


 다) 조선의 성리학


성리학은 유교에 철학적 세계관을 부여, 심성 수양의 도리로 확립된 학풍으로,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 했다 해서 일명 주자학 이라고도 칭한다. 성리학은 자연과 인간 사회에는 그 속에 본성적인 질서가 있다고 보았다.


즉, 자연이나 인간사회나 모두 위계질서를 갖고 있어, 동물 세계에서도 모두 똑같은 동물이 아니라 각기 다르듯, 인간 속에서도 이와 같이 모든 게 다 같지 아니하고, 그리하여 그 속의 인간은 각자의 계층적 지위에 합당한 직분을 성실히 수행함이 인간 각자의 도덕적 의무라 했다.


이러한 성리학의 사고가 고려 말 신진 사대부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고, 이것이 조선 왕조 초기 개혁적 성격을 띄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적절하고 필요한 논리가 되어, 그 필요로 인해 조선의 주요 통치 이념이 된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의 저자 이언모리스는 “공부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그 시대의 통치에 필요한 이론을 찾아낸다” 했는데, 조선이 그러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15세기부터 16세기 중엽, 세조 이래, 공신 세력이 가문의 힘을 이용, 부를 확대해 가자, 이로 인해 땅을 잃은 양민이 노비로 전락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더하여 지배층의 비리와 탐학으로 농민은 과중한 조세부담을 지게 되고, 지방 사족(사림파, 지방의 중소 지주)들은 이러한 불안한 사회를 보고 이를 적극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사정 속에 15세기 후반부터 사림파의 중앙 진출이 활발해지고, 이들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주장, 삼강오륜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을 기본으로 지배층의 도덕적 수양과 이를 통한 사회적 안정을 구현하려 하였다.


또, 사림파는 향촌질서 구현에도 고민하였는데, 이것이 향약 보급운동이다(이는 별도로 소개한다).


16세기 들어 성리학은 학문적 연구와 논쟁을 거쳐, 이를 조선의 독자적 사상체계로 발전시켰다. 도덕과 그 실천을 중시하는 기풍에 사우(교우) 관계를 중시하는 흐름이 가미돼 학파가 형성되었다.


17세기 이후 이러한 사우-학파의 연결이 정치적 상황과 충돌할 때, 자기 학파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당파로 변질되고, 18세기 들어, 이상적 국가의 추구로 시작된 성리학은 당파싸움의 도구로 전락하여, 조선 실패의 단초가 된다.


더욱이 성리학이 시대적 유용성을 다해가는 상황으로, 17세기 후반부터, 조선사회에서 나타나는 농업, 상공업의 발전으로, 14~16세기와는 사뭇 다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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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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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5
[3.1절100주년 기념 안보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10)

 

(지난 호에 이어)
‘조선은 왜 실패했나’를 생각하면 1800년 이후, 격동의 100년을 조선에서는 10대의 소년이 통치했다는 점을 말하기도 한다. 또는, 유교가 문제였다고도 한다.


유교는 간단히 언급할 수 없는 문제다. 조선은 유독 유교적 문화가 깊었는데, 이것이 망국의 원인이 된 연유는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신분차별, 양반제도 역시 유교적 통치이념에서 파생된 것이다. 자연과 인간사회에는 본질적 질서가 있는데, 하늘과 땅이 있듯, 가정에는 부모-자식 같이, 국가에는 넘을 수 없는 계층질서가 있다고 유교는 본다. 근본적으로 차별적이다.


그 질서 속에 각자는 자기의 신분을 지킴이, 인간도리라 생각했다. 이에서 신분제도가 싹튼다. 양반과 일반인(양민), 또는 중인, 노비는 각자의 신분질서 속에 작자의 역할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백성에게는 엄히 다루어도 양반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설령 죄가 되어도, 양반은 자기 노비를 시켜 벌을 대신 받도록 했다. 양반은 굶어도 손에 흙을 묻히지 아니했다.


아마도 유교적 문화가 조선 망국의 제 1원인인 듯하다. 여기까지는 익히 알려진 설명이다.


다음 질문은 조선이 왜 이토록 유교를 숭상했는가(?) 이다. "사상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러면 다시 질문은 "그 필요가 왜 거기서 발생했는가(?)"이다. 이에 대한 답이 지리(지리정치)이다. 이상이 이언모리스가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순서대로 들여다 보자.


1) 어린 왕이 문제였나(?)


지덕체를 모두 갖춘 임금, 정조가 왕위 25년, 1800년에 승하한다. 이어 순조가 11세에 왕에 오르고, 어린 왕을 보필하고자 했던 조치가 뜻과는 달리 조선 말기 외척의 세도정치 시작으로 흐른다. 정조는 죽기 전 어린 아들을 걱정해, 당시 유력한 인물, 김조순에게 뒷일을 부탁한다.


김조순은 김상헌의 후예로, 김상헌은 병자호란 중 청과 주전론을 외치며 친명배청을 외처, 당시 정치중심에 떠올랐고, 이후 그의 후대가 계속 정치의 중심에서 붕당정치를 이끌고 있었다.


정조는 이런 유력 가문에 의지, 어린 왕의 왕권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당정권은 부패하는 속성이 있는지, 이들은 파벌을 만들고, 집결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왕은 이를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또, 왕은 이런 가문의 협조가 필요, 혼인관계(왕비)를 맺으니 이로서 세도정치는 더욱 공고해졌다. 순조 이후, 헌종, 철종,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고, 이런 상황에서, 조선 실패는 시작되었다.


2) 유교(성리학 또는 주자학)가 문제였나(?)


가) 중국의 세계관


중국은 오래 전부터, 자기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있고, 왕(천자)은 하늘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다는, 중국이 세계중심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송 대에 이르러, 중국 외각에 위치한 타국은 오랑캐로, 또 그보다 멀리는 금수로 보는 화이론이 전개되었다.


이 생각이 명으로 이어진다. 조선은 중국에 가까이 위치했고, 당시 송의 문화는 세계적이어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세계관이 조선에 유입된다. 명이 오랑캐 청에 망하자, 조선은 명이 갖고 있던 중화문화의 계승을 자청(소중화), 중국보다 더 유교에 집중한다.


이 때에 서구문물과 접촉이 발생한다. 당연히 서구는 금수다. 16세기 서양 선교사가 천문학을 소개하고, 하늘의 이변, 일식, 월식을 예측하는 등 지구는 둥글다는 신지식을 소개한다.


지구가 둥글다면 위치상 세계중심국이 있을 수가 없고, 그들이 갖고 온 지도에는, 중국은 좀 크긴 해도 중심에 위치해 있지도 않아, 중국의 기존 믿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면 중화사상은 허구가 아닌가?


나) 성리학


성리학은 송 대에 유학사상을 발전시켜, 송, 명 대에 유교의 주류학문이 됐고, 조선은 이를 받아드리고 발전시켜, 조선의 주류 통치사상이 됐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가 처음 성리학을 수용, 이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조선 왕조의 통치이념이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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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9
[3.1절 100주년 안보 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9)-하멜 표류기(2)

 

 

 

(지난 호에 이어)


귀족들은 기생이나 다른 동반자를 데리고 절에 자주 놀러 옵니다. 사원은 숲이 우거진 산속에 위치해있어 경치가 아름답고, 또 절 건물은 그 나라에서 가장 잘 지은 건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원에서 중들은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절 이라기보다 갈보집, 선술집 같이 보입니다.


 5) 여행과 접대


나그네들이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는 여관 같은 곳이 없습니다. 길을 가다 날이 저물게 되면, 양반집 이외에는 아무 집이나 들어가, 자기가 먹을 만큼 쌀을 내놓습니다. 그러면 집 주인이 그 쌀로 밥을 지어 반찬과 함께 나그네를 대접합니다.
서울로 가는 큰 길에는 관리나 평민이나 함께 묵어갈 수 있는 주막집들이 있습니다.


 6) 교육


양반이나 잘 사는 사람들은 자식의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쓰며, 어릴 때부터 선생을 두어 글 공부를 시킵니다. 그 어린이들은 하루 종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글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옛 성현들이 어떻게 하여 지위나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듣고 자랍니다. 이렇게 하여 과거에 합격하면 왕으로부터 합격증서를 받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증서입니다.
이 합격증 때문에 젊은 양반이 거지가 되어버리는 수도 많은데, 이유는 내야 할 기부금과 잔치비용이 많이 들어 재산을 날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많은 투자를 하고, 또 합격을 해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합격했다는 사실 만으로 보람을 느낍니다.
종(노비)들은 이와 달리 자기 자식을 거의 돌보지 않는데, 이는 자식이 일 할만한 나이가 되면 주인이 데려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7) 민족성


조선인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믿을만한 사람들이 되지 못합니다. 남을 속여 먹으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생각합니다.
한편 그들은 착하고, 남의 말을 곧이 듣기 잘합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들에게 우리말을 믿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약한 백성입니다. 나의 친구 벨테프레(하멜보다 26년 먼저 이 땅에 표류되어 결혼하고 정착한 최초의 서양인, 화란인)가 말하기를 타르타르인(?)이 얼음을 건너와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적과 싸워 죽는 것보다 산으로 도망해서 목매달아 죽는 병사가 더 많았다고 들려 주었습니다.
일본으로 가던 영국, 포르투갈, 화란 배가 해안에 표류하면 그 배를 나포하려 시도하지만, 나포는커녕 오히려 상대방에 격퇴당해 돌아오기가 일쑤입니다. 그들은 피를 싫어해 누군가 전투에서 쓰러지면 곧 달아나고 맙니다.
(400년 전이라 하지만 나라가 이래서야… 임진왜란 직후여서 정신 차릴 때도 됐는데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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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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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1
[3.1절 100주년 안보 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8)-하멜 표류기(1)


 
1653년(조선 17대 효종), 대만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스페르베르호는 제주도 인근에서 좌초, 선원 64명중 36명이 살아남아 조선에서 13년을 머문다. 하멜은 1666년 조선을 탈출, 본국 네덜란드로 돌아간다.


그는 보험금을 청구하고, 그간의 급료를 청구하기 위해 조선 견문을 정리 했는데, 이것이 하멜 표류기이다. 17세기 유럽에서 발간된 최초의 조선 관련자료가 되어 이후 유럽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책이 됐다.


필자는 이 책에서 외국인에 비친 조선 백성의 진솔한 모습을 보고 싶었으나, 그런 내용은 별로 없다. 아마도 그가 여행가로 조선에 온 것도 아니고, 고생스러웠던 기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멜은 1600년대 조선을 어떻게 보았는지,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조선의 관리


사또는 임기가 1년 입니다. 그 밖의 관리들은 임기가 3년이지만, 과실을 저지르고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파면되는 관리가 많습니다. 국왕은 국정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항상 정탐군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사형을 받거나 종신 유배를 당하는 관리들이 많습니다.


 2) 형벌


국왕이나 국가에 배신하고 기타 중죄를 범한 자는 매우 혹독한 벌을 받습니다. 범죄자의 전 가족이 몰살되고, 살던 집은 헐리며, 그 터에는 다시는 집을 지을 수 없게 됩니다. 그의 재산과 종들은 전부 몰수되던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이런 일이 우리가 있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국왕은(효종) 자기 형수(소현 세자 비)가 바느질 솜씨가 좋은 것을 알고 옷을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국왕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옷 속에 부적을 집어 넣었습니다.


왕은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왠지 평안을 찾을 수가 없어 옷을 뜯어 조사해보니, 그 속에서 부적이 나왔습니다. 왕은 형수를 동판을 깐 방에 가두고, 불을 때서 타 죽게 했습니다.


어느 고관이(황해 감사 김형욱) 이에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렸지만 그는 곤장 120대를 맞고 참수 당했습니다(대개 곤장 100대면 죽는다).

 

하멜 자신도 잠시 조선군에 근무했는데, 당시 자기 부담으로 총알 50발과 거기에 쓸 화약을 소지해야 하는데, 화약을 충분히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곤장을 5대 맞는 벌을 받았습니다.


남편을 죽인 여인은 길가에 어깨까지 파묻고, 그 옆에 나무톱을 두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녀가 죽을 때까지 목을 톱질합니다. 주인을 죽인 종은 고문을 해서 죽이고, 이에 반해 주인은 사소한 구실로도 자기 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여자가 간통을 한 경우, 남편이 아내를 죽여도 무죄가 됩니다. 유부녀와 간통을 했거나 달아난 사람은 그 여인과 함께 마을로 끌고 와, 옷을 발가벗기거나, 또는 속옷만 입힌 채, 얼굴에 회칠을 하고, 두 사람의 귀를 뚫어 엮고, 법의 집행자는 "간통한 년 놈이요" 하고 소리지르며 온 마을을 끌고 돌아다니다가, 곤장 50-60대를 때립니다.


 3) 세금


국왕에게 세금을 제때에 내지 못한 사람은 밀린 세금을 다 낼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한 달에 두세 차례씩 정강이 뼈를 맞습니다. 그가 죽으면 그의 일가친척이 밀린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국왕은 결코 자기 수입을 못 받는 법이 없습니다.


보통 죄는 볼기나 종아리를 때리는데, 가볍게 말 한번 잘못해도 그런 벌을 받기 때문에 백성들은 매 맞는 것을 별로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4) 종교


이 나라에는 사찰이 굉장히 많은데, 모두 경치 좋은 산 속에 있습니다. 어떤 사찰에는 5, 6백 명이나 되는 중들이 살고 있고, 그 사찰이 다스리는 종이 3, 4천명 되는 곳도 있습니다.


누구든 중이 되고 싶으면 중이 되고,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들은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때로는 머슴보다 별로 나을 게 없습니다. 그러나 지위가 높은 중은 존경을 받는데 주로 그들의 학식 때문입니다. 그들 중 국왕의 승려(왕사. 국사)라 불리는 중도 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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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8
[3.1절 100주년 기념]조선은 왜 실패하였나(6)

 


이집트나 그 외 다른 가난한 나라의 빈곤에 대해 대부분 학자나 평론가는 그 주요 이유를 지리적 위치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 사막이고, 강우량이 부족하여 토양과 기후가 농업에 부적합하고, 이들의 문화적 속성이 경제발전과 번영을 저해하는 이슬람적 신념을 갖고 있는 탓이라 한다. 또는 지배층이 나라번영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해 그릇된 정책을 시행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런 학자들은 백성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 배만 부르면 된다는 소수 권력층이 이집트를 다스려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1981-2011년 재임)은 개인 재산이 700억 달러에 달한다.


과거 몇 번 혁명이 있었으나 바뀐 것이 없다. 여러 의견이 있으나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권력을 소수층이 독점하고 제멋대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다른 나라의 빈곤을 설명하는 보편적 이론이다.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제도이다. 정치와 경제제도의 상호 작용으로 한 국가의 빈부가 결정된다. 관료가 부패하면 반드시 망한다.

 

 

(지난 호에 이어)


스탈린과 공산당 정치국이 마음을 바꾸면, 이전 계획이 뒤집어지고 무시된다. 현실이 그러니 고스프란은 의사 결정을 하기 꺼렸다. 


더욱이 잘못된 결과가 나오면 결정에 참여한 자는 총살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책임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1937년 인구조사를 했다. 결과 1억 6200만이었다. 스탈린이 기대한 1억 8천만에 한참 모자랐다. 3년 전에 발표한 1억6800만에도 못 미쳤다. 그 동안 숙청과 기아 탓이었다. 스탈린은 인구조사담당자들을 시베리아로 보냈다.


2년 후 다시 조사를 했다. 이번에는 스탈린의 의도를 알아채고, "자세히 알고 보니 1억7000만 이었다"고 발표했다. 스탈린도 소비에트 경제에서 인민이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30년대부터, 소련 노동자도 목표 생산량이 달성되면 상여금을 받았다. 꽤 많은 상여금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목표생산량은 당연히 지난해 생산량을 기준으로 작성된 탓에 상여금을 받기 위해서는 목표생산량이 매년 상향되어야 하고, 계속 더 많이 만들어 내야 하기에 고달프게 됐다.


1940년대에 접어들자 지도자들은 이런 잘못된 인센티브제도를 알게 되었다. 당근뿐 아니라 채찍도 함께 써야 한다고 결정했다. 법을 만들어 열심히 일하지 않는 노동자는 모조리 범죄자로 취급했다.


새로 만든 법은 허락 없이 작업장을 20분 이상 비운 자나, 무단결근자는 25% 감봉, 또는 6개월 강제노동이다. 그 결과 1940년부터 1955년 사이에 성인 3분의1이, 그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그 중 25만이 총살, 1500만이 감옥, 250만이 시베리아로 갔다. (매년 농땡이로 감옥 가는 인구가 100만). 


그래도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결국 1987년 고르바초프가 이런 착취적 제도를 벗어 던지자 공산당은 흔들렸고, 소련은 와해됐다.


 북한 이야기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났다. 1950년 북한은 남한을 침공했다. 황평원이 동생과 헤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형은 가까스로 인민군 징용을 피할 수 이었고 이후 남한에서 약사로 일 했다. 의사인 동생은 북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50년 만에 이산가족 행사에서 둘은 만났다. 동생은 북 공군에서 일하고 있었다. 북에서는 괜찮은 직업이다. 동생은 잘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형의 눈에는 삐쩍 마른 모습이었다.


형은 북쪽에서 나온 가족들이 돈을 부탁한다는 말을 들은바 있어 동생에게 돈을 주려 했다. 동생은 "가져가봐야, 그 돈 내놓으라 할 테니, 그냥 넣어두라"고 했다. 동생이 낡은 외투를 입고 있어 “그 외투를 벋고 이걸 입고 가라” 했으나, 동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 여기 오려고 정부에서 빌린 것이다"


독자도 아는 바, 남북간 경제격차가 크다. 1945년 두 정부가 판이한 경제운용 방식을 택하면서 운명이 갈렸다. 오늘날(2019년 신년사) 이들이 경제개발에 매진 하겠다는데…?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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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2
3.1절 100주년 기념-조선은 왜 실패하였나(5)

 

(지난 호에 이어)


우즈베키스탄 이야기


면화는 우즈베키스탄 수출의 45%를 차지하는 제일 중요한 작물이다. 소련 공산정권하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의 모든 농가가 국영농장에 속했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국영 농장은 모두 와해되고 농지는 분배되었다. 그렇다고 농민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초대 대통령 카리모프가 당선되었다. 신 정부는 농민이 어떤 작물을 생산하고 얼마에 팔 수 있는지 가격을 정했다. 면화는 값비싼 수출품이었지만 농민은 세계시장에 판매한 가격의 일부만 가질 수 있었다. 나머지는 정부 몫이다.


 농민에게 별 소득이 안 되니 애써 면화를 재배하는 농가가 없었다. 정부는 모든 농가 농지의 35%를 면화 재배에 활용할 것을 강제하였다. 소련 붕괴 당시만해도 면화 수확에 농기구 콤바인이 이용됐는데, 신 정부 하에서는 농민이 열심히 일 할 의욕이 없어져, 농기구를 정비하지도, 새 농기구를 구입하지도 않았다.


수확에 차질이 생겼다. 정부는 새 농기구 구입보다 값싼 해결책을 내놓았다. 면화 수확기 9월이 되면 전국의 학교마다 수확량을 배정한다. 수확기 2달 동안 가까운 농장에 배정된 학생들은 걷거나 버스를 타고 일터로 나간다. 도심지에서 온 아이나 멀리 사는 아이는 농가 창고에서 잔다. 점심도 각자 준비한다. 


2006년 국제가격은 킬로당 1.4 달러였다. 아이들이 하루 종일 일하고 3센트를 받는다. 봄이 되면 면화 밭 김을 매고, 옮겨심기 위해 다시 동원된다. 75% 정도를 학생이 수확한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당연히 이런 어린이 노역으로 혜택을 보는 것은 대통령과 그 측근이다. 이걸 바꾸고 싶지 않은 거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1991년 당선 후 다른 정치세력을 탄압하고 보안군을 앞세워 자유언론을 모두 억압해 버리고, 투표를 통해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다시 2000년에 7년으로 바꾸고 90% 득표로 재선됐다.


카리모프 정권하에 우즈베키스탄은 가난에 찌들어있다. 평균 국민소득이 1000 달러 정도. 이런 현실은 오래 전에 잊혀진 과거의 유물 같지만 21세기에 들어서도 독재자 일가와 그의 가신 체제하에 신음하는 나라가 많다.

 

구 소련의 해체로 독립은 됐으나, 신 정부를 이어받은 사람은 구 체제의 사람들이어서 옛 버릇은 그대로 답습된다. 안타깝게도 이를 대신할 준비된 대안세력이 없어 반복되고 있다.


 소련 이야기


스탈린과 그의 뒤를 이은 지도자들의 정책이 얼마간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지 몰라도 지속 가능한 방식은 아니었다. 착취적 제도는 두 가지 이유로 벽에 부딪힌다. 경제적 인센티브 결여와 신진 엘리트 층의 반발이다.


고스프란(gosplan. 국가계획위원회)은 소비에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담당했는데, 현실을 보자. 장기적 안목으로 합리적 투자를 한다는 멋진 목표는 있었지만, 우선 계획이 걸핏하면 수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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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0
3.1절 100주년 안보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4)

 

(지난 호에 이어)
그 동안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본 1885년대의 조선, 민초의 삶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국내외 학자의 관찰도 참조했다. 이쯤이면, 이 연재의 본뜻을 밝힐 때가 된듯하다.


여러 석학의 조선, 그리고 타국의 성공, 실패담을 다시 살펴보며, 이로부터 우리는 "조선은 왜 실패했나"의 가설을 도출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실패했구나" 하는 이해를 지금부터 10여 회에 걸쳐 쓸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 대한민국은?"이 핵심이다.


즉, 과거의 성찰로부터 가설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 가설을 다른 사례로 입증하면, 가설은 곧 이론이 된다. 그 이론으로 "지금"을 보고, 더하여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본 연재의 제목은 "조선은 왜 실패하였나"에서 "지금 대한민국은 잘하고 있는가"가 될 터이다.


베니스의 흥망


이탈리아의 동쪽, 아드리아해의 북단에 있는 수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도시, 베니스는 중세기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에 속했다. 베니스는 810년 독립했는데, 당시 로마제국 몰락 후 유럽경제가 회복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무역이 확대되어, 이 기회를 십분 활용, 부유해질 수 있었다.


경제가 확장되면서 인구도, 1050년 4만5천 면에서 1200년에는 50% 증가했고 1330년에 다시 50% 증가해 11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규모는 파리와 견줄만했고, 런던에 비하면 세배가 되는 크기였다.


베니스가 이런 경제적 성공에 이를 수 있었던 토대는 코멘다(commenda)라는 무역거래를 위한 계약제도였다(합자회사). 이는 두 명의 파트너가 참가하여 한 명은 베니스에 머물러있고, 다른 한 명은 항해를 떠나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자가 자본을 대고, 떠나는 자가 물품을 운반하는 것이다.


돈이 없는 젊은이라면 물건을 싣고 항해를 함으로서 무역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또, 돈을 벌면 당연히 신분상승도 됐다. 머물러 있는 자가 100% 돈을 대면, 이윤의 75%를 챙겼다. 반면 머물러 있는 자가 67% 돈을 대면 50%를 챙겼다.


이렇게 해서 젊은 신흥부자 가문이 등장할 여지가 생기고, 이에 따라 정치체제 역시 영향을 받게 되어 한층 개방적으로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베니스의 수장도 베니스를 다스리는 종신적 민회(general assembly)에서 선출했다.


이런 정치, 경제 제도는 서로 상승효과를 내며, 베니스는 무역으로 해상강국의 위세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 일까? 지구는 둥글기 때문일까? 좋았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그간 베니스의 번영을 가져다 주던 제도가 어느 순간 문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베니스는 첫 발을 잘못 디뎠다. (지금 생각하니 창조적 파괴를 했어야 했는데…)


오랜 번영 속에 갈등이 커졌다. 즉, 신흥부자가 계속 생겨나자, 이들이 기존권력에의 도전세력이 됐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평의회(great council)는 신흥세력을 막아 버리고 싶어했고, 그 방법으로 1년 임기의 대평의회 임기를 변경, 집안에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대평의회 의원을 지냈을 경우 그 자손은 자동으로 의원이 되었다(1206년). 다시 1297년에, 지난 4년간 의원이었던 이는 자동으로 다시 의원이 되었다.


이렇게 되니, 의원은 소수 귀족이 독식하는 세습제가 되었다. 신흥 귀족도 가만있지 않았고, 소위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대평의회는 의원정원을 늘려, 반발이 심한 정적을 달랬다. 결국 의원은 450명에서 1500명으로 늘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남은 것은 탄압밖에 없는 듯했다. 새로운 귀족의 탄생을 막기 위해 코멘다 제도를 금지시키고, 무역을 정부가 장악해 국유화하고, 개인무역에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1314년).


이로서, 베니스의 번영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1500년에 이르러 경제는 몰락에 이르렀다. 인구도 줄었다. 오늘날 베니스의 경제라고는 관광업뿐이다. 왜 그랬을까? 정치제도가 길을 잘못 들면 경제 역시 잘못되고, 국가는 실패의 길로 가게 된다.


 이집트의 가난


이집트인의 소득수준은 미국시민의 12%에 불과하고, 기대 수명도 10년은 짧다. 인구 20%가 극심한 빈곤층에 속한다. 사실 북한, 시에라리온, 짐바브웨 등과 비교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카이로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24세의 젊은이는 타흐리드 광장에서 시위를 하며,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우리는 정부의 부정부패와 탄압, 형편없는 교육으로 신음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썩어빠진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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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5
3.1절 100 주년 안보 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3)

 

 

 (지난 호에 이어)
이런 제도하에서, 경제성장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소위 개혁을 한다면 기존세력의 이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를 바꾸려면 이에 저항할 수 있는 대항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세력이 길러지질 않았다.


포르투갈이 문자를 소개한 후 기존 엘리트층은 글을 읽게 되었지만 왕은 백성에게 글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1960년 콩고가 독립했을 때도 이런 빈곤의 형태는 되풀이 되었다. 오랜 세월 이런 착취적 제도가 남아있는 것은 정치권력이 소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옆 나라 보츠와나


1895년(조선의 한반도 주변에서는 청일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9월, 정기 원양 여객선 케슬호가 영국 프리모스항에 정박했다. 보츠와나에서 온 추장 일행 세 명이 배에서 내려 런던으로 향했다.


이들은 긴박한 사명을 띠고 영국을 찾았다. 백인 우월주의, 인종주의자인 세실로즈 총독으로부터 자신들의 부족을 구해야 했다. 세실로즈는 케이프타운 식민지의 총리를 역임한 영국의 정치인이자 기업가였다. 아프리카 침탈과 식민지화에 책임이 있는 대표적인 제국주의자 중 한 사람이다.


사실 보츠와나는 1885년 이후 영국 보호령 이었으나 그 동안은 다른 유럽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고 여겨 별로 싫은 기색이 없었다. 영국 또한 이들을 본격적인 식민지로 해 보았자 얻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1889년 세실로즈가 식민지 팽창을 시작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보츠와나 추장들은 자기 땅이 세실로즈 손에 떨어지면 수탈과 재앙의 연속일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무력으로는 이길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맞설 각오는 되어 있었다. 추장들은 덜 나쁜 쪽을 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로즈의 밥이 되느니 영국의 통치를 강화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당시 식민장관 쳄버린을 찾은 것이다. 


이들은 런던 선교회의 주선으로 런던에 갈 수 있었다. 운도 좋았다. 쳄버린은 이들의 고충에 공감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철도를 건설키로 했다. 11월 6일 추장과 쳄버린은 통역을 통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쳄버린: 추장들은 땅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가 준수할 법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지도를 봅시다. 우리는 철도에 사용할 토지만 갖고, 그 이상은 손 대지 않겠습니다.


추장: 우리는 수상이 땅을 차지한다면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쳄버린: 내가 파견하는 이들은 꼭 필요한 땅만 차지할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보상도 하겠습니다.


추장; 우리는 이 일에 공정하게 대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쳄버린; 여러분의 뜻을 존중해 드릴 것입니다.

 


당시 보츠와나는 영국의 마그나칼타와 유사한 정치제도를 갖고 있었다. 크그틀라라는 부족협의회가 있어, 집단의사 결정 제도를 통해 부족의 모든 정책을 다루었다. 회의에서는 세금, 법령 등을 다루며, 부족 원의 불만을 토론할 기회도 있고, 추장의 바램이 기각되기도 했다. 


추장자리도 세습이 아니라, 재능과 능력을 증명한 자라면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왕은 인민의 축복으로 왕이 된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대로 지켜졌다.


오늘날 보츠와나는 아프리카에서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됐다. 2017년 기준 1만6,000달러로, 옆 나라 콩고의 500달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높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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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4
[3.1절 100 주년 안보 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2)

 

 

 (지난 호에 이어)
영국의 비숍 여사는 조선 후기,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당시의 개항 항구, 주요 도시를 방문하며 조선 백성의 삶을 기록했다. 그 후 100년, 국내외 역사학자는 비숍이 보았던 모습을 역사학자의 눈으로 다시 정리했다.


피곤하고 지친, 가난에 찌든 조선 백성의 민낯. 이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선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설명하기 전에 지구의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던, 당시의 착취당하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몇 곳 더 방문해보자.


향신료와 인종 학살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군도는 정향, 메이스, 육두구 등 값진 향신료의 세계 유일 산지로, 서양이 대양항해시대에 접어들어 세계 구석구석으로 부를 찾아 떠돌던 시절,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들 향신료는 오래된 고기에 뿌려 놓으면 마치 신선한 고기 맛이 나고, 신선한 고기에 뿌리면 고급향기가 난다 하여 대양을 오가던 상선에서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귀한 물건이었다.


16세기, 포르투갈 상인이 동남아 작은 섬에 이를 사러 왔다. 이전에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통제하에 있던 싱가포르 근처 몰카항이 향신료 거래지역 이었고, 여기서 서아시아 무역로를 거쳐 유럽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1498년, 포르투갈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거쳐 인도에 닿았고, 이어 유럽인은 향료산지로 직접 향하는 무역로를 개척했다. 포르투갈은 곧바로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는 작전에 착수했고, 1511년 몰라카의 향료시장을 장악했다.


몰라카를 손에 쥔 포르투갈은 노른자라 할만한 향신료무역을 독점하려 들었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를 탐내는 적들이 만만치 않았다. 향료 산지로 향하는 직항로가 알려지고 점차 이 지역을 넘나드는 유럽인이 증가했고, 네덜란드가 이 대열에 합류한다. 


네덜란드 역시 이 돈 되는 향료무역을 독점하고 싶어, 1600년 현지 암몬왕을 설득(지금의 인도네시아), 독점권을 갖는 협정을 맺는다. 그리고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 온갖 수단으로 경쟁자를 몰아낸다.


이 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처럼 군대를 보유하고, 전쟁을 치르고, 외국 땅을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암몬 왕국의 향신료 생산을 늘리기 위해 각 가구의 생산량을 할당하고, 향료나무를 더 심게 하고, 강제노역을 강화했다.


원주민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었으며, 네덜란드인은 이로서 돈을 거머쥐었다. 네덜란드는 내친김에 옆의 섬, 반다제도 역시 손에 넣으려 들었다, 메이스와 육두구는 이곳에서만 자라는데, 이를 독점하려는 것이다. 이번에는 더 효과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당시 총독인 얀 피터루스존은 함대를 동원, 반다제도 주민 거의 모두를 학살했다(1만5000명). 지도자와 주민을 모두 죽이고 향료생산 노하우를 보존하는데 필요한 기술자만 소수 살렸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노예를 사들여 향신료를 독점 재배했다.


이런 유럽인의 모습에 놀라 주위의 작은 섬 원주민은 나무를 자르고 향료재배를 포기했다. 자바섬에 있는 바텐섬 주민은 유럽인의 침범이 두려워 후추나무를 죄다 잘라버렸다. 도시는 몰락했고, 인구도 줄었다. 해안지대 주민은 내륙 깊숙이 숨어들었다. 그렇다고 안전하지도 않았다.


18세기 말엽이 되자 거의 모든 지역이 유럽의 식민지가 되었다. 마치 정글의 동물세계와 같았던 18세기 동남아의 모습이다.


 아프리카의 콩고


15, 16세기 콩고를 찾았던 포르투갈, 네덜란드 인들은 콩고의 비참한 빈곤을 보았다. 콩고에는 당시 문자는 고사하고 농기구인 쟁기도, 수송용 수레바퀴도 없었다.


농민들이 이런 기술을 이용하여 쥐꼬리만큼이라도 잉여생산을 하면 왕과 관리가 죄다 빼앗아갔기 때문에 아예 사용을 꺼려하고 있었다. 착취적 경제제도에서 비롯된 기이한 현상이다. 콩고 백성의 재산과 인권을 위협하는 것이 바로 콩고정부였다.


이런 제도하에 소수 정치권력은 막대한 부를 누릴 수 있었다. 17세기 중반 콩고 정부는 이런 제도를 지키기 위해 왕은 5000명의 상비군에 500명의 정예 소총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막강한 군사력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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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1
3.1절100주년 안보 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1)

 

 

 1. 조경달(근대 조선과 일본 저자)이 본 조선


 조선 왕조의 건국이념은 유교적 민본주의였다.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한 정치를 주장했다. 왕도정치로 자애심이 넘치는 군주에 의한 덕치로 이상국가를 지향한다 했다. 고로, 조선의 정치문화는 전통적인 유교적 민본주의, 즉 인군만민의 정치문화였다.
유교적 민본주의 정치문화가 사대부뿐만 아니라 민중 세계까지 널리 침투해 있어, 민란, 농민전쟁조차도 민중의 항거는 유교적 민본주의 질서에서 벋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와 사뭇 다른 모습이어서, 특히 아전의 예를 보면 백성과 매일 접촉하는 하급관리로, 이들은 가가호호의 세금을 걷고, 행정실무를 담당하며, 지방관아의 유지비, 경비 등, 때로는 외부 고관이 왔을 때는 이의 접대 등 모든 관아의 치다꺼리를 하면서도 봉급이 없었다.
이들은 일을 하면서도 이를 양반에 대한 의무로 생각해 보수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비리가 시작됐다. (일본의 경우 이런 일은 봉급을 받는 하급 무사가 담당했다.)
조선 왕조는 8도로 된 행정구역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밑에 350개의 읍(또는 군, 현이라는 다른 명칭)이 있고, 다시 그 밑에 면, 동, 리라는 말단 행정 편재로 짜여있었다.
도에는 관찰사(감사)가 파견되어 읍을 감독하고, 읍에는 수령이 파견되어 행정, 사법, 징세 등의 업무를 보았다.
 한편, 19세기 들어 정조가 갑자기 죽자(1800년), 11살의 순조가 즉위한다. 정조는 당시의 세도가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아 왕권에 안정을 기하고자 했으나, 세상은 뜻과 달리 흘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불러온다.
순조의 뒤를 이어, 8세에 왕위에 오른 헌종도 같은 생각에 풍양 조씨를 왕비로 불러들였으나 같은 일이 반복되고, 이는 19세에 왕이 된 철종까지 이어진다. (다음 고종시 대원군이 이를 시정하려 해보지만…)
수령의 권력은 끼리끼리 증대되고, 이들은 지방의 아전, 양반과 결탁, 백성의 피를 빤다 (비숍은 이를 흡혈귀라 했다).
이런 상태에서 위생에는 관심 쓸 여력도 없어 콜레라, 장티푸스, 천연두가 창궐 1820, 1860년에는 수십만이 사망한다.

 


 2. 브루스 커밍스(한국 현대사 저자)가 본 조선


가. 양반과 상놈의 세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양반에 속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다양해서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나, 17세기 말에는 인구의10% 내외가 자신을 양반이라 생각했고, 19세기에 이르러 더 많은 숫자가 자신을 양반이라 주장했다.
조선 왕조에서 문과에 급제한(500년 기간 중 1만4,600명) 사람을 조사하면 그들의 40%가 21개 가문에서 배출됐는데, 우선 이들이 양반 가문이다.
조선의 전통적인 신분체계는 양반 외에 백성 대다수인 농민과 소수의 하급서리(아전), 상인, 그리고 천민계급으로 최하층 세습집단인 백정, 걸인, 갖바치(가죽신 제조업자)가 있었다.
상인은 천민보다는 높은 신분이지만, 소위 유교 엘리트들은 상업활동에 눈살을 찌푸렸고, 그 결과 억상정책이 기조였다.
조선은 농본주의를 주창했다 하나 말뿐으로, 양반들을 먹여 살리고, 각종 힘든 일은 도맡아, 그들의 삶은 특히 조선후기에 고달팠다. 농민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수확량의 반을 지주에 바치고, 또한 국가 부의 원천이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잡세를 부담해야만 했다.
1462년 한양에만 20만 명의 노비가 있었고, 1663년 한양 인구의 75%가 노비였다 한다. 아마 전 인구의 30% 정도가 노비였을 것이다. 노비에는 두종류가 있었으니 하나는 국가 소유의 관노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으로 사고 팔리는 사노이다.
노비의 가격은 국가가 정했다. 1398년, 태조 당시 노비 3명이면 좋은 말 1마리를 살수 있었다. 노비들의 생활 여건은 가난한 소작농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지위는 엄격히 세습되어 성종 때 어느 부자 노비가 자신의 아들 4명을 면천시키기 위해 쌀 3000석을 정부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양반은 사실상 아무것도 국가에 내는 것이 없고 군역, 노역에서도 면제됐다.


나. 조선의 쇠퇴기


16세기 초 사화, 16세기 말 일본침략, 17세기 만주의 침략 등으로 조선은 심하게 쇠약해졌다. 이어 19세기 들어 전염병이 돌아 수십만이 죽고 굶주린 이가 시신을 먹는 일도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만주족에 축출되어, 북방 야만족이 중국을 다스리게 되니, 조선은 스스로 성리학의 최후 수호자라는 생각이 생겨 유교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이는 당파 싸움을 더욱 격하게 해, 조선의 쇠퇴를 앞당겼다.


다. 조선의 상업


1960년대가 아니더라도, 1860년대에 조선을 여행한 사람치고 조선을 상업국가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한국 현대사의 저자인 커밍스가 1967년 평화봉사단원으로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은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상업적이 아닌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막상 한국에 와서 서울의 북적거리는 시장을 보고,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몹시 애를 먹었다.
사실, 서울에는 시장이 언제나 있었다. 종로라고 하는 대로를 따라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 가게들은 국가의 면허를 받아 운영했으며, 보부상이라는 순회행상들이 등짐이나 손수레에 물건을 싣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고, 도붓장수가 커다란 쇠 가위를 찰각거리며 노래, 타령, 호객소리를 흥겹게 하며 장사를 했다.
그러나 조선의 관리들은 거의 언제나 간섭하며 상업의 싹을 잘라버리고는 했다. 졸부가 흥성하고, 농민이나 노비가 돈을 벌면 제 분수를 잊어 다스리기 어려워지고, 양반질서에 구멍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결국 20세기 후반, 양반 계층이 몰락하고, 국가의 간섭이 줄어들면서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 후 100년, 게으르고 무감각하기만 했던 조선인이 매사 ‘빨리 빨리’하는 국민이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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