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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안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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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사관학교졸(1967)
1990년 이민, 캐나다 한의학교졸(침술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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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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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3
2018-07-12
공심(公心), 사심(私心)

 

 약 반세기 전, 내가 근무하고 있던 APD-81함(amphibious, patrol, destroyer)이 미국 독립 200주년 해상 관함식(parade)에 참가하게 되었다. 즐거운 일이다. 당시 70년대에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절인데, 미국에 가게 됐으니.


그런데 문제는, 배만 가는 게 아니라 의장대, 군악대, 참모 등 행사요원이 동승함으로 이들의 침실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즉, 얼마간 배 승조원이 미국 방문을 포기하고, 자기가 자던 침대를 비워주어야 했다.


 이 배는 일반 구축함을 해상 대간첩 상황에 대응코자 약간 개조해서, 해병 1개 소대를 싣고 다니게 되어있다. 함미의 포를 제거하고, 해병 50명이 탑승할 공간과 고속 주정 2대가 실려있었다.


예를 들어, 도망가던 간첩선이 섬으로 상륙해 숨어버리면(60, 70년대에는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해병이 상륙해 추적하는 것이다.


고속 간첩선은 전투함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공군이 출격하니, 바다 위에서 도주해봤자 공군의 쉬운 표적이 됐다. 파란 바닷물 위에 길게 흰 물줄기를 뒤로 뽑으며 도망가는 간첩선은 하늘에서 볼 때, 간첩선 식별을 오히려 도와주어 쉬운 표적이 됐다. 그래서 섬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한 달여의 대양횡단과 행사준비에 모두들 부산했다. 태평양 가운데에서 기관이 고장 나면 안 되는 일이니, 엔진 정비에서부터, 승조원의 흰 복장 준비까지.


이런 일이야 각 부서장 책임하에 진행됐으나, 주로 수병의 양보를 받아야 하는 하선 인원 선정은 부(함)장의 업무가 되었다.


기관부는 태평양 횡단 항해를 하니 인원을 줄일 수 없고, 작전부는 해상 경계가 아니니 좀 줄이고, 포술부가 주 타깃이 됐다. 기념행사니 포를 쏠 일이 없어 거의 모든 수병이 하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참가자와 하선자의 선정에 적용할 무슨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선의의 협조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다. 막무가내 버티면 할 수가 없는데, 그런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에겐 6주간의 장기 휴가보다 미국 구경이 당연히 더 좋았기 때문이다. 탓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부장이 해결해야 하는 업무가 됐다. ''나도 내린다''고 배수진을 치고, 맨투맨 양보를 구했다.


승조원들은 ‘부장이 내린다니, 그저 하는 소리려니’ 했으나, 협조해 주었다. 하선 인원 선정도 끝나고, 행사요원 침실 배치까지 대강 끝나자, 나는 약속대로 배에서 내렸다.
이렇게 해서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해상 퍼레이드 참가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이 글은 필자의 군생활 경험담이다. 내 자랑 하고자 쓴 글이 아니다. 모두들 거부하고 나서려 하지 않을 때, 이를 앞장서는 것은 말같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꽉 막힌 일을 쉽게 풀게 한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런 게 ‘희생’ 아닐까(?). 필자는 이를 공심이라 생각한다. 배에서 부(함)장은 세컨드 맨이다. 난들 가기 싫었겠나(?), ''내가 왜 내려'' 한들 누가 뭐라겠나(?)
부장이 먼저 미국 방문을 포기하자, 수병들도 따라주었다. 공심과 사심, 때로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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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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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5
어찌할 것인가? 한-북-미 대화

  

 서론


조선 초기 600만 정도의 인구가 16세기 조선 중기에 이르러 1000만을 넘었다. 강가에 살던 주민이 새로운 농토를 찾아 내륙으로 들어가 화전 등으로 산지를 개간, 농토를 늘리고, 씨를 뿌리는 농사법이 모내기식으로 개량되면서 생산성이 높아지자, 인구도 늘고, 점차 여러 생활상품의 수요가 발생했다(소금, 옷감, 철제 농기구).


이에, 가진 것을 사고-파는 초기 시장이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 정조 때에는 인구가 1700만이 되었는데, 전국에 약 1000개의 시장이 형성되어(5일장), 경제활동이 움트기 시작했다.


당시, 가진 것 없고,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이 살 길을 찾아 모여드는 곳이 광산이었는데, 성천 사금광의 경우, 바가지 하나와 땅 파는 호미 하나만 있으면, 하루 종일 앉아, 좁쌀 같은 금 조각을 골라내는데, 하루 서너 알을 채취해 예닐곱 푼쯤을 받으면, 이는 농사짓는 일보다 이익이 컸다.


어쩌다 재수가 좋아 돈을 벌기도 하고, 운수가 대통할 때는 삽 시간에 부자가 되기도 했다. 18세기 말 정조는 금광개발을 막고, 이들을 엄하게 다스려, 광부를 농촌으로 되돌아가게 하였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농촌인구 이탈, 금의 해외 유출 방지).


당시 매장량에 따라 한곳에 수백, 수천 명의 광산 노동자가 몰려들었다 한다. 결국 ''백성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아, 큰 이익이 있는 한, 매일같이 매를 쳐서 금하더라도 그 형세를 걷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은 시초부터 억상정책을 유지하고 있었고, 소위 백성이 농사나 지을 일이지 돈을 모아 부자가 되면 다른 일을 도모하게 되고 이로서 양반을 중심으로 한 억압적 신분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삶에 돈 되는 일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조선은 국가 정책에 어긋나는 백성의 경제활동을 허가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북한을 생각해보면, 장마당이 500개에 이르고 있다 하니, 조선 정조의 시대상황과 비슷하지 아니한가(?) 생각된다. 

 

 본론


북이 미와 회담을 앞두고 몽니를 부리고 있다. 악의 축이었던 북이 이성적으로 스마트한, 예의도 바른, 또 솔직한 김으로 변신에 성공하고, 이에 미가 군사력 사용 카드를 접자, 발목잡기를 시작한 격이다. 예견할 수 없었던 일은 아니나 뒤통수를 한방 맞은 건 사실인 듯하다.


북이 폐쇄, 독재, 억압 체제에서 한국만큼 성공한 보통나라로 된다는 것은 (미의 언급), 체제의 ''확 바꿈''이다. 삶의 모든 형태를 바꾸는 변혁이 정상들의 합의만으로 단시간 내에 이루어지리라 바라는 것은 무리다.


비록, 이번만은 북 정상이 진정성을 갖고 있었다 해도, 핵 보유를 헌법에 명시하고, 북을 지키는 최후의 보검이라 강조해 왔는데… 불현듯 ''위협이 없으면, 갖고 있을 필요 없다''하니, 이 논리의 반전을 적어도 핵으로 세뇌된 수십만 그의 인민들을 설득시켜야 한다. 어린 왕자 하나의 카리스마로는 안된다.


2500만중 당, 군 핵심인구 500만. 몇 명의 불평세력이라면 잡아다 처리하면 되겠지만, 그 중 10%만 웅성웅성, 수근수근 하면, 이들 50만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간 표현대로 핵을 버리고, 보통국가가 되려면 혁명적 사고체제의 변화, 혁명을 치러야 한다. 왕, 왕후의 목을 쳤던 영, 불 명예, 시민 혁명이 괜한 일이 아니다. 즉, 북의 핵보유를 신봉하는 일부 집단의 요구를 수용, 완전한 비핵화에서 한발 물러서 충분한 비핵화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은 어떤가? 여러 가지 군사옵션이 검토되었지만 결국 군사력이 아닌 외교, 경제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선택을 이미 했다. 미국도 사실상 실현하기 어렵고, 검증도 힘든 완전 비핵화에서 한발 비켜 충분한 비핵화 수준에서 ''다 했다'' 선언하고, 손 털고 일어나지 않을까(?).


미 정상은 노벨상 이야기에 함박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어, 이미 미끼를 문 상태여서, 군사옵션 이야기는 물 건너 갔고, 타협으로 마무리 해야 할 판이다.

 

 결론


그러면 한국은? 잘 아시는 바, 토론토 시내 경찰차에는 ''Deeds speak''라는 글이 쓰여있다. ''행동을 보고 평가 하세요'' -도둑질 하는 자는 도둑일 테고, 거짓말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일 테고-


그간 수십 년간 북의 행태(Deeds)를 보아오지 않았나. 별, 험한 소리 다하다가, 어느 날 몇 시간 대화하고, 악마가 천사가 되어, 남한 국민의 마음에 80%의 신뢰감을 심어 주었다 한다(참으로, 맘씨 좋은 분들 이시다).


그간 분명했던 것은 북은 필요에 따라 약속하고, 필요에 따라 파기하고, 상대방은 그에 따라 일희일비했다. 탓할 일도 아니고, 처음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실일까(?)했다. 시대상황이 그러하다. 더 이상 깡패국가로 낙후한 최빈국 국가로 남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씨도, 이번에는 약속을 지킬까(?) 했으나, 앞서 말한 내부문제가 있다. 그래서 몽니가 나왔다. 미도 이를 알 것이다. 세상사가 다 그러하듯 ''끝나야, 끝나는 것이다''. 시작 초기 약속만으로 믿을 수 없음은 많은 사례가 역사에 기록돼있다.


별로 점잖을 것 같지 않은 이 게임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결국 남한국민이 답해야 한다. 다 함께 생각하여 봅시다. 흙탕물에서 연꽃을 일구는 심정으로, ''한강의 기적에 이어, 동방의 기적을 향해''.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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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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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조선 후기 100년과 민비 시해(하)

  

(지난 호에 이어)
이때, 청 상인의 조선 내 경제활동을 돕기 위해 ‘조중상인 수륙무역장정’을 합의하는데, 합의문 중 “이번에 정한 장정은 중국이 '속국'을 우대하는 뜻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이것이 빌미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청의 증가되는 간섭에서 탈피코자, 미국(1882), 러시아(1884)와도 조약을 맺는다. 아는 바와 같이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청의 지원으로 진압되자 일은 조에서 청 세력의 강화를 인식하고 군비증강에 나선다.


10년 군비증강을 앞당겨 완수하고 청과 일전을 탐하고 있던 중 동학란이 일어난다. 군란과 정변에 이어 또 한번 고종은 외세에 의존해 화를 자초한다. 청이 조의 요청에 의해 3000명의 군사를 파견하자, 일은 자국민의 보호를 명분으로 1만4000명을 파견한다.  


그간 청에 밀렸던 열세를 만회하고, 차제에 만주침공의 빌미를 잡기 위함이었다. 일은 서해 풍도에서 고승호를 격침시킴으로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파죽지세로 일이 평양을 거쳐 산동반도 려순을 점령한다(1895).


당시 서구는 청이 승전하리라 생각했다. 함정 수(청 87척, 일 52척), 육군병력(청 60만, 일 25만)도 청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어느 기자의 말대로 “짱꼴라 군대는 멀리서 대포 소리만 들려도 도망가고, 칼을 빼는 모습만 보아도 항복을 하는 종이호랑이” 였다.


그럼, 어째서 조선에는 강하고, 일에는 약한가? 답은 원래 짱꼴라는 약한 자에게는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약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만족했다. 일이 만주와 중국을 점령해 러시아의 남진을 막을 것이기에, 그러나 러는 곤란했다. 부동항을 향해 계속 남진해야 하는데 일이 걸림돌이 되고, 1891년 착공된 시베리아 대륙횡단 철도가 완공되기까지는 해결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의 려순만 점령은 용인할 수 없어 ''반환하라''고 하니(러, 불, 독 3국 간섭) 일이 승복한다. 


피 흘려 점령한 요충지, 려순을 반납하는 것을 본 민비는 아시아의 강자는 러시아라 생각하고, 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에 의존코자 한다. 또 한번 반복되는 외세의존이다. 힘이 없으니, 때마다 외세의존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미 말한 대로, 그간의 친일내각을 친러, 친미내각으로 교체한다. 일은 칼잡이를 모으고, 1895년 10월 8일, 건청궁 민비 침소에 침입한다.


민비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세련된 친절, 따뜻한 배려 등 공사 부부의 개인적 친절을 곧 러 정부의 뜻이라 믿었던 듯했다(?). 그리고 조선보호국화정책에 정면 도전했던 것이다. 


친일 김홍집 내각을 친미, 친러 중심으로 교체한다. 이로서 일은 민비 제거를 결행키로 한다. 일은 천왕의 측근인 이노우에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는지, 민비 시해 37일전에 미우라로 일 공사를 대체한다.


8일 새벽, 40여명의 자객과 함께 사건의 위장용으로 동원된 대원군과 조선 훈련대가 경복궁에 들어선 시각은 5시15분.  6시10분경 대원군을 근정전에 내려놓고, 한 무리는 왕의 거처로, 다른 무리는 건청궁으로 달려가 민비와 3명의 궁녀를 살해한다.


자객들은 궁녀와 왕태자 이척을 통해 민비의 시신을 확인한다. 완전히 죽지 않은 민비를 마당으로 끌어내어 이불을 덥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른다.


사건 후, 미우라 공사는 ''이는 대원군과 훈련대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일은 전연 무관하다''고 강변했으나, 일 정부는 열흘 뒤 공사 이하 자객 40여명을 소환, 재판에 회부한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무혐의 처리된다.

 

 결론


이것이 누구의 말 같이 ''조선의 못난 개항'', ''바보 같은 왕과 그의 측근들''의 이야기이다. 도무지, 아침 6시부터 10시경까지 장안의 궁전에 침입한 40명의 폭도들이 왕비를 칼로 찌르고, 죽이고, 불사르는 동안 덤벼든 조선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니… 옛날 이야기 하자는 게 아니다. 지금은 과연 다른가? 


(알림) 매달 첫째 주 수요일 낮12시-오후 3시에 갤러리아 슈퍼마켓 문화교실에서 인문학 강의가 있습니다. 강사는 문종명, 한호림, 손영호, 알랙스 김, 천하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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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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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1
조선 후기 100년과 민비 시해(상)

 

서론


세계의 황제가 되고자 했던 나폴레옹은 유럽의 정복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영국을 고사 시키고자, 대륙봉쇄령을 명한다. 그러나 경제적 유대가 깊었던 러시아가 이를 어기고 영과 무역을 계속하자, 나폴레옹은 러 원정에 나선다.


그의 60만 대군이 모스크바의 동장군에 대패하고(1812), 그 후, 영, 프로이센 연합군에 완패한 후(1815. 워터루), 나폴레옹이 사라진 세계는 바야흐로 영, 러의 무대가 된다.


러시아가 은둔의 나라 조선의 민비 시해에 연루된 사연은 오로지 한반도가 갖는 지정학적 의미 때문이다. 즉, 러의 대륙진출 꿈은 독일에 막히고, 해양진출의 꿈은 영국에 막힌 상황인데, 특히나 대륙국가인 러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가 필요했다.


1860년, 아편전쟁의 중재 대가로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당 받은 러시아가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러는 조선 역사에 발을 내디딘다. 러의 남진을 저지하고 있던 영은 청이 이를 막아주기를 바랐으나, 청일전쟁을 보고 청에 실망해 그 역할을 일이 대신해 주기를 바란다. 아시아에서 일은 제1의 육, 해군을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청의 심한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던 차에, 청일전쟁으로 일이 점령한 산동반도(려순항) 반환을 이끌어낸 러의 힘을 보고 보호를 부탁하려 한다.


고종은 러 황제,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그의 측근 민영환을 보내 이를 타진한다. 러는 이왕에 부동항 획득의 꿈이 있어, 조의 지정학적 가치에 유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러시아의 중심부에서 너무 먼 거리에 있는 관계로 군사력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관여는 불가하여, 외교상 크게 실망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외형상 우의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나 조선 주재 러공사 내외는 고종, 민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민비로 하여금 이를 오해케 했다. 이로서 민비는 러를 믿어도 좋다고 생각 했는지(?), 당시의 친일 내각을 친러, 친미 내각으로 교체한다.


일로서는 무심할 수 없는 사태다. 일찍이 조선을 거쳐 만주로 진출하고자 하던 차에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면 큰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은 민비를 친러정책의 핵심인물로 보고, 조-러의 연결고리인 민비를 제거코자 한다. 이것이 민비 시해이다. 

 

 본론


1800년, 조의 23대왕 순조가 10세에 왕위에 오른다. 이어서 헌종이 8세, 철종이 19세, 고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른다. 이렇게 100년 동안 어린 소년을 왕이라 앉혀놓고, 그의 외척들이 준비도 개념도 없이 국정을 담당한다.


조선 후기 100년(1800-1907), 통한의 역사는 이렇게 정도를 외면하고 농간으로 국정을 이끌어 나가려던 위정자에 의해 결국 망한다. 1849년, 강화도에서 농부생활을 하던 젊은이가 졸지에 가마 타고 한양에 입성해 왕좌에 오르니, 그가 철종이다. 


당시 청은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근대화 서구의 의미를 경험하고 있었고, 일은 명치유신의 시기로 근대화에 맹진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은 12살 어린 왕을 대신해 그의 아버지 대원군이 집정한다.


대원군도 각종 국정의 병폐를 모르는 바 아니어서, 그로서는 개혁에 노력하고 있었으나, 이미 지난 시대의 인물이었다. 격변의 19세기 시대정신에 부응할 수가 없었다.
천운도 따르지 않는지, 1882년부터 3년 터울로 연속 흉년이 들더니만, 92년부터는 연이어 가뭄이 찾아왔다. 이로 인한 굶주림은 돌림병(콜레라)을 불러와, 1876년 대흉년 후, 1878년 경상도 어느 곳에서는 인구3만 명이 4천명으로 줄었다.


 이러한 피폐한 민생의 어려움을 돌보아야 할 위정자들의 본분은 무엇이었는지, 이들의 사리사욕, 가렴주구는 민생을 고달프게 해 민심을 이반케 했다. 이로서 국정의 근간은 무너지고, 조선은 군인 봉급도 주지 못하는 실정에 이르러 군의 반란이 터졌다(임오군란). 


대원군 10년, 19세기 시대상황을 모르는 채 나름의 개혁을 주도해 나가던 대원군이 하야하고, 20대 고종이 친정을 시작할 때(1873) 자의반 타의반 일과 개국에 합의한다(강화도 조약).


이로서 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식 별기군이 창설됐으나(1881), 오히려 이로 인해 군란이 발생하고, 이의 진압에 청이 지원한 후, 조는 청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과 한국 사이에 속국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그 즈음이다. 당시 주일 청 공사가 일의 대만정복(1875), 오키나와 합병(1879)을 보면서 느낀 바가 있어, 청의 실세 이홍장에게 조의 식민지화를 건의한다. 이에 굳이 그럴 것 없이, 실질적으로 속국화하면 된다, 하며 그의 부하 원세개를 파견한다.


이로서 청은 외교, 내정, 인사 등 모든 국정을 간섭하는 상황에 이른다. 고종도 이를 반기지는 않았으나 청에 의탁, 정권을 유지할 뜻이 있어 이를 견뎌내고 있던 참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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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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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1
한국현대사를 읽다가(3)-흥미로운 50, 60년대 이야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를 읽고 있는데, 도중 흥미로운 50년, 60년대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이야기1


 며칠 전 지인과 갤러리아 슈퍼마켓 식당에서 ‘부대찌개’를 먹었는데, 찌그러진 양재기에 나온 음식 모양이 50년대 후반, 미군부대 근처, 천막식당에서 먹던 꿀꿀이 죽을 생각나게 했다. 가난하던 시절, 햄, 소시지 때로는 베이컨 조각이 들어간 잡탕찌개였는데, 당시로는 맛이 최고였다.
다음은 소설가 안정효씨 이야기인데, 꿀꿀이죽의 탄생신화를 알려주는 글인가 한다.


 ''아버지는 미군기지에서 목수로 일 하셨고…, 어머니는 부근 삼거리 교차로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셨다. 나는 날마다 집에서 좀 떨어진 쓰레기장으로 가곤 했다. 왜냐하면 내가 쓰레기더미 속에서 고기조각을 발견하는 날이면 가족이 고깃국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운이 좋아, 오렌지나, 초콜릿 조각, 젤리 사탕도 주울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직도 살이 많이 붙어있는 닭다리 한 무더기를 발견했다. 어머니는 닭 뼈와 닭다리에 보리를 넣고, 귀한 쌀도 약간 보태어 맛있는 국을 끓이셨다.


이렇게 많은 닭다리를 어디서 발견했느냐고 아버지가 물으셨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부엌에서 양동이를 꺼내오더니, 내게 쓰레기장 가는 길을 알려달라 하셨다”

 

 이야기2


 한일 국교정상화를 하고, 60년대 후반 일본인들이 한국을 찾기 시작했다. 다음은 당시 어느 일본 영화감독, 오오시마 나기사가 몇 달간 한국을 돌아보고 쓴 글이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가 일본과 조화로운 관계를 발전시켜 주었으면 하는 진지한 욕망을 표현했다. 남한의 작은 어촌을 방문했을 때, 내가 20년 만에 처음 만난 일본인이라 하면서, 나를 보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증오심을 느끼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증오와 비애를 느끼지만, 한편 향수도 느낀다고 대답하였다. (중략)


나는 그와 같은 사람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지만, 아이들의 경우는 느낌이 좀 달랐다. 나는 마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차간에서, 내게 기대어 잠든, 내 옆자리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을 테고…, 그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가까운 두 국민이 진지한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날이 올 건가? 이 아이와 내 아들이 자라, 서로 죽이려 하기보다 서로 도울 수 있을까?''

 

 이야기3


꼭, 정확하다 할 수는 없지만 우리 보통사람들이 가끔씩 눈살 찌프리던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50년대 대다수 국회의원들의 일상은 다음과 같았다 한다.


''국회의원이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는 동안, 그의 운전사는 전쟁 잉여물자인 검은색 지프차의 시동을 걸고, 차 지붕의 먼지를 털고, 의자에 덥힌 하얀 시트를 반듯하게 펴놓는다.


그들은 곧 진지한 잡담을 좀 나누기 위해, 차를 타고 부근 다방으로 향하는데, 여러 시중 꾼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가운데 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한다. 한 두 시간 차를 마시며 주요 소문을 들은 후, 국회의사당을 향해 출발하지만, 다른 곳이 아니라 당 동료들이 집권당의 터무니 없는 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농성을 벌이는 당 대변인 사무실로 가는 것이다.


기자들한테 짧은 논평을 하고 참모진이 대기하는 가운데 자기 사무실로 어슬렁 어슬렁 들어가, 굽실거리며 아부하는 집단에게 약간의 자선을 베풀고 사무를 좀 보고 나면, 동료들과 함께 다소 은밀한 일식집에서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 된다.


거기서 기생들이, 나리의 주둥이가 나불대지 않는 드문 순간을 포착해, 젓가락으로 회를 집어 나리의 입안에 떨어뜨린다.


오후3시경, 측근들과 함께 차를 몰고, 입법부에 들어가서 아침나절의 일상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태양은 이내 산 너머로 기울고, 이제 불고기와 소주, 그리고 환대하는 기생들을 찾아, 축제의 거리 명동으로 향할 시간이 된다. 


아니면 미 대사관에서 파티가 있을 수 있는데, 운전사가 나리의 ‘일시적 아내’를 물색하러 가고는 한다. 촌스런 마누라와는 달리 영어도 잘하고 외교관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ㅇㅇ여자대학의 아리따운 여대생을 물색하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신랄한 풍자처럼 들릴지 몰라도, 내가 이 경우를 한 두 번 목격한 것도 아니다(현대사 저자)

 

 이야기 4 - 다소 먹먹한 이야기


대령들의 작전개시는 61년 5월16일 자정. 국무총리 장면은 미 대사관 건너편 반도호텔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새벽 2시, 그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서울 카르멜 수녀원으로 도망쳤다. 


새벽 3시, 육군총장이 미 사령관에게 미군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해 달라고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총리는 아침에 미 대사관에 전화, 몸은 여전히 숨긴 채 매그루더 사령관이 상황을 장악하기를 요구한다.


다음날도 총리는 여전히 몸을 숨기고(그는 3일만에 수녀원을 나와, 내각 총 사퇴를 발표. 66년 지병으로 사망(68세)한다.

 

 결론적으로 역사는 반복한다. 역사의 음미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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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7
한국 현대사’(브루스 커밍스)를 읽다가(2)

 워싱턴 정가의 경악-한국전에 핵무기 검토

 


 

 서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압록강까지 진격한 한-미군은, 12월 성탄절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맥아더는 이런 생각에 하와이에서 겨울 방한복을 잔뜩 싣고 오는 수송선을 되돌려 보낸다.
그러나 미 정보기관들의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란 예측이 빗나가고, 중-북 연합군이 북쪽을 완전히 재탈환하자 워싱턴 정가는 경악한다. 워싱턴 고위층들은 미국의 모든 무기를 사용해서 이 패배를 역전시키려 했다.
당연히 핵 사용이 검토된다. 오늘도 북핵 문제가 주요 뉴스인데… 당시의 상황을 복기해보자. 

 

 본론


1950년 12월9일, 트루먼은 ''나는 재임 중 평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제 3차대전이 임박한 형국이다.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지만, 우리에게 닥친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며,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원자탄 사용을 고려 중임을 암시했다.
이에 놀란 영국수상 에틀리가 워싱턴으로 달려가, ''한국전에서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문서로 요구했으나, 거절당한다.


에틀리는 그런 무기는 더욱 필사적인 조치가 정당화 될 때만 사용해야지, ''미국이 북한 같은 나라를 상대로 싸우면서, 핵을 사용한다는 것은 당치않은 일'' 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적절하게 잘 배치된 스파이 덕분에 세상을 움직이는 두 거물의 회담 내용을 읽은 스탈린은 전 지구적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스탈린은 이를 회피하고 싶어했고, 차라리 미국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도록 내버려두자는 쪽이었다.


이와 달리 중은 전쟁을 치를 태세였지만, 3차 대전을 시작하겠다기보다 단지 한반도 중간까지만 밀고 내려가겠다는 생각이었다.
트루먼이 핵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한 11월30일, 미 전략공군사령부는 폭격기 부대를 ‘극동으로 출격시킬 준비’를 명령한다. 12월 24일, 맥아더는 26기의 핵폭탄이 필요하다는 목록을 제출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열흘이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계획이 있다. 중국이 한반도로 진입하는 만주의 통로를 따라 핵폭탄을 투하하고, 50만에 달하는 대만의 장개석 군대를 압록강에 투입하고, 전방에는 서해에서 동해에 이르기까지 방사선 코발트를 뿌리면, 적어도 60년 동안은 북에서 한국을 육상으로 침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미국은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시킨 51년 4월 초순, 핵 사용에 가장 접근해 있었다. 맥아더를 해임한 것은 알려진 대로 단순히 그의 불복종 때문이 아니라, 워싱턴에서 핵 사용명령을 내릴 경우, 현장에 믿을 만한 지휘관이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이미 13개 비행사단을 한반도 인근에 배치시켰고, 중국도 신규병력을 국경에 집결시킨 후였다. 3월 말경 미 공군은 오키나와 카데나 공군기지의 원자탄 탑재요원이 대기태세에 들어갔다고 보고했다.


원자탄은 조립되지 않은 채 그곳으로 운반되어 조립되는데, 사용 직전 원자핵만 추가하면 되었다.


4월5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만약 중국의 신규병력이 전투에 투입되거나, 만주의 소련 폭격기가 출격할 경우, 만주기지를 즉각 원폭 투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트루먼의 서명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 후 상황에서 다행(불행?)히 핵무기를 운반할 제9폭격대는 괌에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고, 오키나와 공군기지의 핵 탑재장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중과 소가 전쟁을 확대하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었고, 맥아더 해임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원자탄 사용은 추진되지 않았다. 
이로서 아시아에서 두 번째 원자탄 투하는 이뤄지지 않았다.

 

 결론


반세기, 분단의 긴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북의 핵으로 남북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있다. 부디 남과 북이 이를 슬기롭게 해결해 민족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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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1
‘한국 현대사’를 읽다가

 

 

 소개


 
‘한국 현대사’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젊은 시절 한국에 평화봉사단으로 일한 인연이 있어 ‘'한국 전쟁의 기원’을 쓰기도 했다. 한국현대사의 일제 말 부분을 읽던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또는 우리 기억에 그리 멀지 않은 애잔한 이야기가 있어, 식민지 시절에 재능 있는 조선인들에게 있을 수 있었던, 또는 보통의 조선인에게 있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야기1) 조선인 최초 판사


일본정부의 조선인 최초 판사가 된 이찬영은 판사 생활 10년째 조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그 경험이 너무 괴로워 사직하고, 엿장수가 되어 3년간 시골을 떠돌아 다니다가 금강산에서 승려가 되었다(당시 39세. 부인과 2남1녀의 가정을 두고). 훗날 효봉스님이라는 법명으로 당대 유명한 선승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1966년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야기2) 위안부 할머니


김복동은 부유한 지주 집안의 6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문맹이었던 어머니는 1941년 동네 이장과 일본 군복을 입고 온 조선인에게 설득 당해 딸을 공장에서 3년간 일하도록 동의했다.


김복동은 비슷한 방법으로 모집된 20여명의 여자와 함께 타이완으로 갔다. 다시 중국 광동으로 갔다. 거기서 군의관이 검진을 한다며 그녀의 옷을 벗겻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처녀는 수치스러웠다.


김복동은 한 위안소로 갔다. 군인들을 상대했다. 저항하면 때리고, 음식을 주지 않았다. 하루 15명, 주말에는 50명. 군인들은 모두 콘돔과 전표를 들고 왔다. 그녀는 전표를 모았다가 일본 관리에게 넘겨 주었다. 위안부들은 일본이 승리하면 돈을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여러 '구락부'에서 온 50여명의 여자와 함께, 수라바야의 제 16 육군병원의 간호보조원으로 배치됐다. 
거기서 1년 이상 생활하다가 고향에 와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다른 가족들이 모두 일본으로 가버리는 통에 혼자 남아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 중에 위안부로 일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쟁 때 만났던 그녀의 친구들 중 몇 명은 아직도 생계수단으로 매춘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3) 원폭 생존자


유준승은 4명의 가족과 함께, 한 농부의 초가집 부엌 옆 작은 온돌방에서 살고 있었다. 1917년 정읍에서 태어난 그는 1944년 징용되어 해군공병작전에 투입 되었다.
1945년 8월6일 오전 8시, 히로시마 역 근처에서 유씨가 자기 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을 때, 눈을 멀게 하는 뜨거운 섬광이 그를 휩쌌다. 그는 역 뒤의 후쯔바 산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산 자락에 도착해 그날 밤 반쯤 무너진 농가에서 지냈다.
그리고 다음날 구조 트럭에 의해 쿠레에 있는 해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기름에 적신 거즈를 얼굴에 덥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화상을 입은 자리에 구더기들이 슬었다. 
1950년경, 그는 피를 토하고 혈변을 누기 시작했다. 몇 년 후 그의 아내는 동수라는 아이를 낳았는데 하체는 전혀 발육되지 않았다, 또 다른 아이는 하체가 똑 같이 작았지만, 머리는 보통 아이보다 두 배나 컸다. 이 아이는 3개월 후 죽었다.
유씨는 채소장사로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1968년경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1972년 그는 55세 이었음에도 유령처럼 여위고, 밀랍처럼 하얀 얼굴로 초가집 부엌 옆 작은 방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1분 간격으로 오는 통증에, 그때마다 사지가 비틀려서 고통을 참기 위해 다문 이를 갈았다. 유씨는 몇 달 후 죽었다.
 아들 동수는 사춘기기 되자 3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그는 미쳐서 1년이 못되어 죽었다.

 

 이야기4) 조선 시인


이원록은 일본지배에 저항하다 17번 투옥되고, 1944년 베이징 일본 헌병대 지하 감옥에서 기다리던 해방을 보지 못하고 40세에 생을 마친다. 수인번호가 264여서 필명이 ‘이육사’ 이다.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가슴 아픈 나라 잃은 백성의 이야기이다. 미 군정시, 하지 초청으로 서재필이 왔다. 그는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피신해 최초의 한인 미국 의사가 됐다. 그가 귀국해 첫발을 디디면서 모여든 신문기자에게 “비누 한 장 못 만드는 나라에서…”라고 한다. 나라 없는 슬픔, 가난한 서러움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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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1
국가는 왜 실패하나(15)-고종, 민비 그리고 김옥균(하)

 

(지난 호에 이어)


김옥균, 혁명을 꿈꾸다


임오군란 후, 청은 조선을 속국(식민지)으로 삼으려 하지는 않았다 해도, 왕의 아버지를 납치하는 등 종주권을 강화하고 내정간섭을 더해갔다. 그러나 고종과 민씨 정권은 다른 열강과의 세력균형을 위해 청의 종주권 강화를 감내하고, 친청 수구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우선 청을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대원군과 함께, 주위의 쇄국파가 물러나자 그 빈자리를 민씨 일족이 차지, 조정은 민씨 일색이 되었다.


이들은 당시 민씨 집안에 양자로 들어온 민영익이 중심이 되어 영향력을 키우며 김옥균 등 개화파를 견제하고 있었다. 1883년, 청과 종주국 관계에 있던 월남에 프랑스가 침입하자, 월남을 돕고자 조선에 주둔한 청군이 대부분 철수한다.


김옥균은 정변의 기회기 다가오고 있다고 판단한다. 때마침(1884), 개화파 인사 홍영식이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온 후 우편제도를 건의하여 우정국이 창설되고, 그 해 12월 4일 우정국 개국 기념식이 예정되었다.


김옥균은 이때를 거사일로 정하고, 이를 고종에게 알린다. 고종은 “'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치를 경의 지모에 맞기겠다”고 화답한다.


 김옥균은 개화파를 중심으로 100여명을 행동대원으로 동원하고, 고종을 설득해 정변을 승인 받고, 청의 방해는 일이 막는다는 3책을 일본 공사 다케조와 밀약하고, 정변을 추진한다.


 미숙한 정변


당일, 국내외 인사 18명이 참석한 공식 일정이 끝나고, 저녁 축하연이 시작될 때, 각본은 대궐에 불을 지르면 이에 대신들이 대궐로 갈 테고, 이때 매복한 자객이 이들을 죽이기로 하였으나, 예정된 방화가 실패하자 우정국 옆 민가에 불을 질렀다. 이에 놀란 민영익이 무슨 일인가 밖으로 뛰어나갔으나 자객의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돌아오자, 누구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옥균이 고종에 달려가 “청군이 반란을 일으켜 창덕궁으로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어서 피신 하십시오”하고 고종과 민비를 경비가 용이한 경운궁으로 안내했다(납치?). 


 “이제 할 수 없습니다, 일군에 경호를 의뢰하겠습니다” 김옥균은 ‘일본공사래호아’(일본공사는 와서 나를 호위하라)라고 쓴 후, 고종의 서명을 받아 일 공사에게 병력을 요청하고, 우정국으로 돌아가, 대신들에게 “'국왕이 경운궁에 있으며, 모든 신하는 그리로 들라는 어명이 내렸다” 했다. 신하들이 도착하자 숨어있던 자객들이 이들을 살해한다(11명).


다음날 아침(12월 5일) 김옥균은 고종의 재가를 얻어 신내각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 때쯤 민비는 속은 것을 알고, 경기감사 심문택을 시켜 청에 구출을 요청하고,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다.


해질 무렵 청군이 도착, 잠시 교전이 있었으나 타협, 궐 밖은 청군이, 궐 안은 일군이 지키기로 한다.


12월 6일, 고종의 재가를 얻어 혁신강령이 내려지려는 순간, 청군(1500명)이 일군(150명)을 공격하니 “1개 중대면 청군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던 일 공사의 장담은 허언이 되고 일은 퇴각한다. 밤 사이 청 장수 원세개는 일 병력 규모를 파악하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 했겠지!


김옥균도 함께 퇴각, 인천을 거쳐 도일하니 이로서 3일 천하는 막을 내렸다. 너무 쉽게 일을 믿은 탓이다. 밀약은 무슨!

 

결론


 무엇보다, 정변 당시 백성의 지지가 없었을 뿐 아니라, 백성의 깊은 유교사상이 근대화에 역행하고 있었다. 백성이 보기에 일은 항시 개혁을 해야 한다고 했고, 김옥균이 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김옥균 일당은 왕권에 도전하는 무뢰한으로 인식됐다.


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사후보복에 적극 나선 것은 군중과 수구파였다. 분노한 군중은 김옥균의 집, 일 공사관을 방화하고 관련자를 색출한다. (이때 죽은 일인 38명).


김옥균의 부, 모, 형제, 부인, 딸이 모두 옥사 혹은 자살한다. 1년 동안 500여명이 연좌제로 잡혀 살해된다. 


 일에 피신한 김옥균은 어려운 망명생활 10년째, 이홍장에게서 “동양의 장례를 논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고, 청으로 향하나 동행한 고종의 밀사 홍종우에게 살해된다.


 1894년 4월27일 김옥균의 유해가 강화도 양화진에 도착한다. 일본 시사신보 기사를 보자. ‘시신은 조각조각 떼어져, 팔도에 보내어 저잣거리에 내다 걸게하고, 목은 양화진 형장에 효수해 놓았다. 이는 민비와 민영익이 10년을 벼르다 벌인 복수극이었으리라’


 ‘대역부도옥균’이라는 걸개와 함께, 양화진에 있던 그의 머리는 그를 따르던 일인이 훔쳐, 도교의 어느 신사에 묻혔다 한다(?)


 자객 홍종우가 오자, 고종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그를 맞이한다. 김옥균의 묘는 충남 아산에 있다.


갑신정변은 여러 시각으로 평할 수 있겠으나, 직접적인 실패 원인은 민비의 청군지원요청을 막지 못한 고종의 유약함이다. 고종이 이것만은 목숨 걸고 막았어야 했다. 거사 5일전에 보고받고, 이에 화답을 했다면 자신도 결심을 했어야 한다. 국운이 이성계에서 시작되고, 고종에서 끝나는 형국이다.


 김옥균도 고종을 진정한 동지로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 왕에 허위 보고하고, 협박하여 정변을 성공시킬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종의 리더십 부재, 백성의 전 근대성, 김옥균의 미숙이라는 3박자가 맞아 떨어져, 조선 최초 개항 후(1873. 강화도 조약) 10년, 조선 근대화의 기회는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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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6
국가는 왜 실패하나(14)-고종, 민비 그리고 김옥균(상)

 서론

한 개인은 산속에 들어가 땅을 일구며, 조용히 은둔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조선이 그러했다. 왜 그랬을까?


 시대 상황

1392년, 이성계가 세운 조선 왕조는 500년 역사 중 후반기에 들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당파 싸움인 4대 사화(1498-1545: 무오, 갑자, 기묘, 을사 사화)가 1세기 동안 이어지며 나라를 찢어 놓더니, 외침을 불러들여16 세기 임진왜란(1592-1598), 17세기 병자호란(1636-1637)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혼란에 더하여 조선의 곡창, 전라도에 연이은 가뭄이 들어(1876~1888), 백성의 먹는 문제가 어려워졌다.


당연히 조세수입이 떨어진 조정은, 이미 고달파진 백성의 어깨에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해야 했고, 이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수탈이 되어 반란이 끝이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동학란으로 확대된다(1890).


 불운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데, 19세기 내내 10대의 어린 소년이 왕위에 오른다. 23대 순조가 10살에, 24대 헌종이 8세에, 25대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19세에, 26대 고종은 마당에서 연 날리기를 하다가 가마를 타고 궁에 들어와 12세에 왕이 되니, 국운이 다하였는가 조선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전 근대성 유교 의식

 '공자왈, 맹자왈’ 의 유교 정신 세계는 중국에서 발현됐으나, 이것이 한반도에 유입된 후 중국에서보다 조선에서 더욱 발전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일찍이 왕과 신하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인륜, 도덕으로 충과 효를 강조해 왔고, 이는 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통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절대군주 체제하에 흔들 수 없는 원리로 발전됐다.


이의 위반은 강상죄라 하여 엄히 다스렸을 뿐 아니라, 일찍이 신라의 화랑 5계, 고구려의 5경을 거쳐 면면히 내려와 충, 효 사상은 백성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국가가 순조로이 유능한 성군 밑에 운용될 때 이는 미덕이 될 수 있으나, 나라가 위태롭고 쇠락할 때는 허망한 사상이고, 가난을 해결하는 데는 전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더욱, 민생이 상하를 막론하고 핍박해질 때, 유교에 내재된 신분차별의식은 상위 신분의 수탈을 정당화 해주고, 이로 인한 하위신분 백성의 배고픔은 당연시 되었다.

양반들은 노동을 멸시하여 천한 것들이나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굶어 죽을 망정 노동은 피했다. 백성이 자기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생각해 수탈했고, 수탈에 지친 백성은 아무리 뼈빠지게 일을 해도 어차피 빼앗길 것이니 일할 의욕을 상실한다.


 잠시, 영국 여행가 버드비숍이 본조선의 모습 ‘조선과 그 이웃들’(1897)을 보자. 그가 처음 부산에 도착했을 때, “좁고 더러운 거리에는 나무 가지에 진흙을 발라 만든 야트막한 오두막집이 늘어서 있었고, 집 밖에는 쓰레기가 차있는 도랑이 있고…”


“서울이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한 나라 수도 치고 비천함을 이루 말할 길이 없다…. 대부분 성읍에서는 한국인이 하루 반 이상을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기나긴 휴식 시간에 문턱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바닥에 누워 잠을 잔다. 이 때, 집 앞 뚜껑 없는 하수구에는 하도 냄새가 역겨워… 그들은 관리의 수탈에 완전히 마비되었다. 관아의 요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극심한 가난상태로 스스로 전락하는 것뿐임을 잘 알고 있어,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조선은 그 시절에 그러했다. 도시의 좁은 길이 넓혀지고, 하수구가 복개된 것은 1914년 도시계획 이후였다.


 고종의 지도력

22세에 아버지 대원군에 이어 친정을 시작한(1873) 고종은, 내심 개화 쪽에 기울어져 있었으나, 주위의 쇄국 파와 민비 척신들의 반대 속에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

강화도조약 5년 후인 1882년 2월, 고종은 옆 나라에서 근대화를 한다는데 좀 보고 와야겠다 싶어, 남도에 암행어사로 갔다 오라고 박정양에게 밀지를 내린다. 원래 암행어사는 밀지를 받으면 집에도 알리지 않고 즉시 떠나는데, “밀지를 집에 가서 읽어보라”하더니, 그게 아니고 “'일본에 가서 보고오라, 급하지 않으니 며칠 준비해서 다녀오라”였다.


부산에 내려오니, 김옥균 외 개화파 관료 11명이 같은 식으로 와있었다. 일본배를 빌려 타고 일본에 건너가 소위 근대화 현장을 살피고 있는데, 이것이 일본 신문에 실렸고, 조선 조정에 알려졌다.

“도대체, 그들을 왜 보냈습니까?” 개국을 반대하는 수구파가 고종에 대들었다. “허… 내가 보낸 게 아니라니까 그 양반들이 유람을 간 게지!'' 이렇게 해서 비밀리에 시작한 첫 해외시찰단이 신사유람단이라는 멋진(?) 이름을 갖게 된다.


고종은 내심 근대화를 생각하며 시작한 사업이었으나, 지원금을 더는 보낼 수가 없어 이들은 4개월 만에 귀국한다. 지원금이 떨어져 거지꼴이었다고 한다. 군주가 소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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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3
국가는 왜 실패하나(13)-무적함대(하)

 

 (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영국 하워드 사령관은 드레이크가 부사령관으로서 예하 함대를 인솔해야 하는 임무를 이탈, 예하 함정이 부사령관의 위치를 몰라 진형이 분산되는 혼선이 잦자 해임시킨다.


덕분에 일찍 런던에 입항한 드레이크는 당시 넉넉지 못한 재정에 동원된 많은 선박에 지불할 사용료가 없어 걱정하는 여왕의 고민을 해결해주어, 여왕의 신임을 듬뿍 받게 된다. 나포된 배는 스페인 해군 봉급 운반선이었다.


시도니아 경이 이끄는 무적함대가 칼레항에 도착, 닻을 내리고 파르마 공작 예하의 지상군을 기다리게 된다.


마침 강한 바람이 스페인 함대 쪽으로 불고 있어, 하워드 제독은 야음을 틈타 화공을 계획한다. 8척의 배에 기름과 가연물질을 가득 실어 불을 붙인 후 스페인 함대 속으로 돌진시킨다.


 당시 함선은 나무 선체의 방수를 위해 송진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불에 취약했다. 스페인 함대는 불꽃이 튈까 봐 황급히 닻줄을 끊고 회피한다. 이로서 화재의 위험은 피했으나 함대의 진형이 흐트러졌다.


다음날 동이 트자 영 함대가 흩어진 스페인 함대를 공격, 3척을 격침시킨다. 그 다음날 스페인 함대는 진열을 정비하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영은 맹렬한 태풍 때문에 공격을 멈추고 기다렸다.


무적함대는 탄약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초승달 대형을 유지, 적을 맞이하여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스페인 함대는 바람과 해류로 계속 해안 쪽으로 밀려, 좌초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더욱이 닻이 없는 함선들은 잠시도 편히 안전 위치를 지키기가 불가했다.


이런 조건 속에 마치 모든 것이 이렇게 끝날 것 같았는데 돌연 바람 방향이 바뀌어, 함대는 북으로 밀리면서 탁 트인 바다에 이르게 되었다. 시도니아 공작은 칼레로 돌아가 지상군을 기다리자니 이미 항구는 영 함대에 봉쇄되었고, 배는 여전히 북으로 밀려가는 상황에 도리가 없다고 판단, 임무를 포기하고 귀국하기로 결정한다.


영 해군도 탄약이 떨어져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해전은 이렇게 끝났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침몰된 배는 많지 않았으나, 많은 손상을 입은 함대로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식량도 부족했고, 물통이 샜기 때문에 물도 귀한 상태였다.


더욱이 아일랜드 북서 연안을 돌면서, 심한 태풍을 만났는데, 이 태풍이 2주간 계속되어 피폐한 배에 피해가 계속 되었다. 그간 전투에서 살아남은 23척의 배가 해안에 좌초되고 침몰된다.


출항 4개월 만에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는 리스본을 떠난 전함 60척 중 반이 사라진 후였다. 이로서 무적함대는 사라지고, 해상통제권을 장악한 영은 제1 강국으로 성장한다.

 

 결론


무적함대가 사라지는 세계사의 전환에서, 해전의 결과는 드레이크보다 태풍의 위력에 의해 결정되었으나, 우리의 주의를 끄는 점은 역사의 순간에 여왕이 보여준 지도력이다.


조선에도 이순신이 있었고, 신라에는 장보고가 있었으나 이들은 감옥에 보내지거나 살해된다. 중국 명나라도 6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인도양을 지나 아프리카 연안까지 원정했던 정화가 있었으나, 그가 죽자 어인 일인지 명은 스스로 함대를 파괴한다.


영국은 해적 드레이크를 키워, 일등국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점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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