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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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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의 칼럼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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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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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예수님의 기적-18년간 불구이던 여인을 고치시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가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눅 13:10-21)

 

 

회당은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자주 찾던 곳이다. 별다른 제재 없이 가셔서 가르치시며,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예수님은 회당 출입을 자제하셨고, 여기 기록된 것을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회당에서의 사역은 복음서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방문이 된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 중에 18년 동안 귀신 들려 허리가 꼬부라져 전혀 펴지 못하는 여인이 있었다. 


불구자 치고 인간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사회에서 격리 당하거나 소외당하며 살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여인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으리라. 허리를 펴지 못하여 정상인의 절반 정도 키밖에 되지 못하는 외형을 지닌 것은 여자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육신의 고통과 더불어 그 보다 몇 배나 심한 심적 아픔을 지닌 채 18년 이란 세월을 지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여인은 낙망하지 않고 언젠가는 그녀의 인생에도 광명한 새날이 밝아올 것을 믿으며 살아왔다고 생각된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회당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녀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열심히 회당에 나온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가 악령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게 해주실 것을 확신한 까닭이다. 


그 여인이 그런 믿음의 소유자였음은 예수께서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이라 하신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믿음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5:4-5)고 외쳤다. 형식적이며 가식적인 예배를 드리면서 제물을 바치지 말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해야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며 보람된 삶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전한 것이다.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딸”이라 인정한 이 여인은 비록 사탄에게 사로잡혀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지만 그녀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빛과 소망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리란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사람들의 멸시와 냉대의 눈초리를 마다하고 회당에 나와 하나님의 손길이 그녀에게 미칠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회당에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보기흉한 몰골을 지닌 장애인이 왜 집에 있지 않고 회당에 나왔느냐고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녀 옆에 앉기를 꺼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상에서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그녀를 보는 순간 그녀를 부르신다. 그녀가 어떤 인생행로를 걸어왔는지를 알았음은 물론 그녀의 마음에 간직한 간절한 소망까지도 들여다보시고, 그녀를 부르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에게 나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품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까닭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는 순간처럼 기쁘고, 감격스럽고, 의미 있는 시간은 없다. 예수님의 부름에 응하여 그 앞에 엎드리는 사람마다 변화하여 새로운 인생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해를 분기점으로 “주전”과 “주후”로 나누어진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 역사의 흐름은 그 방향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이후에 역사의 흐름이 달라진 까닭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역사가 형성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애벌레가 탈바꿈하여 화려한 나비가 되듯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하며, 이처럼 주안에서 피조물 된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는 것이다.


여자로서 결정적인 신체적 결함을 지녔기에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살 수 없었던 여인을 부르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였다. 그런 후 그녀에게 안수하시자 그녀를 둘러쌓던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햇빛 찬란한 세상이 그녀 앞에 펼쳐진다. 꼬부라져 도무지 펼 수 없었던 허리가 펴지면서 그녀가 완전히 정상적인 여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눈물과 한숨 속에 평생을 어둠 가운데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한 귀중한 생명이 삶의 가치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귀한 역사가 일어난 후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그녀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이나 그녀의 곁에서 위로하고 격려해준 배우자나 가족들이나 친지들에게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 놀라운 사랑의 권능을 행사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를 찬양한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회당장은 그 여인이 병마로부터 해방되자 분노하여 “일할 수 있는 날이 6일이나 있는데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한다. 예수님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회중을 향해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것이 안식일을 범한 행위라며 억지를 부린 것을 보면 회당장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 안 했을지도 모른다. 


회당장의 말을 듣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가 안식일에 외양간에 있는 소나 나귀를 풀어 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어있던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라도 매인 것에서 풀어줘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이다. 예수께서는 전에도 그가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것을 문제 삼는 이들에게 “안식일에 너희들의 양이나 소가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그때 그들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안식일이라도 양이나 소가 구덩이에 빠지면 구해내는 것은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시며 안식일에 외양간에 매여 있는 소를 풀어내어 물을 먹일 수 있다면 오랜 세월 사탄의 사슬에 묶여 고통 당하던 아브라함의 딸을 사탄의 사슬로부터 풀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예수님이 말씀에 회당장과 그를 지시하는 사람들은 낯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철두철미 형식과 외형과 격식에 기초를 둔 사회조직과 체제에 억매여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런 사회체제위에 쌓아올린 그들의 권위와 기득권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예수님을 경계하며 미워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제거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선한 일”을 안식일을 범하는 죄로 단정하여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시도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도나 규율 보다는 인간을 중요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안식일이라도 하나님의 자비와 권능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돌보셨다. 따라서 18년이란 긴 세월을 불구의 몸으로 극심한 고통과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에 힙 입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회당에 나온 여인을 보는 순간 예수님은 그녀를 불렀고, 그녀에게 안수함으로 그녀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셨다.


우리들 중 그 여자처럼 허리가 꼬부라진 사람은 별로 없을지 몰라도 많은 이들의 마음이 꼬여지고 삐뚤어져 있다. 예수께서 고쳐주신 그 여자보다 더 중하고 심각한 병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무서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허다한 사실은 예수님의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녀보다 더 갈급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야 할 줄 안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시며 사탄에게 지배 받는 우리의 병든 마음을 고쳐주실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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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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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예수님의 기적-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다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하니, 바리새인들이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하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22-32)

 

 

여기 기록된 예수님이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기적은 마태가 그의 복음서 9장 32절부터 34절에서 들려주는 귀신 들린 벙어리를 낮게 해주신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두 기적을 보는 목격자들의 생각은 같아 보이면서도 상당히 다르다. 특히 예수님이 그들을 고쳐주신 후 하신 말씀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마태는 이 기적을 예수께서 “사람들이 데리고 온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다.”고 아주 간단하게 들려주고 있다. 그 까닭은 그는 이 기적 자체에 초점을 맞추려 한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벙어리이며, 맹인이던 사람이 말하고 보게 되자 모두들 놀라지만 전에 벙어리의 입이 열렸을 때 나타난 반응과는(9:33) 다른 점이 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기적”이라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했지만 이번에는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겠느냐?”며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망언까지 뱉어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최대의 모독이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예수께서 가르치시며 선포하신 것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들을 전해 들었으며, 직접 목격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사렛 목수 출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소망인 메시아로 받아드리거나, 그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이 사탄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천인공노할 논리를 펼친 것이다. 


그 같은 그들의 기상천외의 주장은 지혜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예수님을 대항하기 위한 악의에 찬 모함이나 궤변으로만 간주하여 넘길 수 없는 근본적인 죄악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탄의 하수인으로 취급한 행위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정면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는 완악하고, 강퍅한 그들이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 것인가를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그의 능력이 사탄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사탄의 왕국은 심한 내분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사탄의 왕인 바알세불이 예수님에게 능력을 부여하여 그의 부하인 귀신들을 쫓아냈다면 그 나라는 망하기 직전에 이르렀다는 것이 예수님의 지적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예수께서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낸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모순된 자가당착적인 것인가를 지적하신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에는 악령을 몰아내고, 저주에 묶인 사람들을 풀어주는 우리나라의 무당과 같은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솔로몬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귀신을 축출하는 비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요세푸스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악령을 몰아내어 영육 간에 정상적인 인간의 기능을 상실한 사람들이 건전한 몸과 마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능력을 부여했다고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유대인들 중에 귀신을 몰아내는 사람들이 있었음은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예수님은 “내가 사탄의 동업자가 되어 귀신을 몰아냈다면 너희 조상들도 사탄과 연합하여 악령을 쫓아내었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그들이 침묵하자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그들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친 것이 악령의 힘 아닌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면 악의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동트기 시작했음을 일러주신 것이다.


 그가 하신 말씀의 의미를 그들이 확실히 깨닫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려면 그 강자를 결박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신다. 이는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를 끝낸 그에게 사탄이 찾아와 인류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시려는 그의 발길을 잡으려 시도했을 때 그를 물리치고 “사탄아 물러가라.” 호통하신 순간에 사탄은 이미 결박 당했음을 상기시키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 후 계속하여 예수님에게 다가와 그를 괴롭히는 악의 세력은 사탄의 잔당일 뿐인 것이다.


그는 사탄의 힘 아닌 하나님의 권능으로 일하심을 밝히신 후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이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말씀하신다. 그를 따르려면 중립지대에 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세상에는 중간지점에 서는 사람들이 많기만 하다. 이쪽저쪽을 넘보며 상황을 살피다 유리한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현명한 처세술이요, 삶의 지혜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을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좁은 길과 넓은 길”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세상”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믿는 자의 권리이며 의무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그를 따르는 자들의 유일한 선택임을 일러주신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으니 그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을 거역하는 죄악이며, 어째서 그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은 주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내린 성령과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성도들이 세상 끝까지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성령의 기능은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에게 전달하며, 그것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권위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심은 물론 그것을 말하고, 가르치신 것을 행하셨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들에게 알려주시며, 그것을 말하고, 행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오묘한 비밀을 깨달아 믿기 시작하는 백성들과는 달리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도, 깨닫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를 배척하며 사탄과 연합한 악의 세력으로까지 몰아부친 것이다. 성령을 거역한 죄악이었다. 


성령에 대항한 죄는 어째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해 성령의 뜻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구원의 필수적 요건인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옳고 선한 것을 따르며 사랑할 줄 모르고, 잘못되고 악한 것을 사랑하며 추구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사탄의 세력으로까지 단정하는 무서운 죄악을 범한 바리새인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도 몰랐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짓고도 회개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의 대상에서 스스로를 배제시켰다.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모두 죄성을 지니고 태어났기에 그 누구도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죄의 값인 사망에서 면죄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린 영원한 낙원을 되찾을 수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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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4
예수님의 기적-귀신 들린 벙어리를 고치시다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하되,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하더라.”(마 9:32-34)

 

 

여기 수록된 예수께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기적은 12장에 기록된(22-24)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것과 같은 것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두 기적은 같은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 당시 유대지방에는 많은 종류의 병자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비슷한 증세를 가진 병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오는 각종 병자들을 다 고쳐주신 예수님은 여러 명의 맹인, 벙어리, 절름발이들을 고쳐주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유사한 병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낳게 해주었기 때문에 마태복음 9장과 12장에 나오는 벙어리가 동일 인물이라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9장의 귀신 들린 사람은 말만 못했지만 12장의 벙어리는 눈까지 먼 것을 보면 둘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


예수님이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는 사람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 후 밖으로 나오시자 사람들이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날 때부터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아니면 두 가지 장애를 다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은 말만 못했으며, 그렇게 된 까닭은 악령에게 사로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는 여러 가지 질병들이 악귀들과 연관되어 있었기에 이 경우도 그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괴롭히던 귀신을 쫓아내신다. 어떤 방법을 쓰셨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는 순간 그는 즉시 말하기 시작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들이 벙어리가 말을 시작하는 것을 보며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며 하는 말에 주위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라든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은 본 적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놀라면서 감탄한 이유는 예수님에 의해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임과 동시에 그들이 기다리던 진정한 메시아가 출현한 것을 인정해서인 까닭이다. 그들은 초인간적이며 초자연적인 권능을 지니신 예수님이야말로 “맹인을 보게 하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절름발이를 뛰게 하며, 벙어리를 말하게 할뿐 아니라 광야에서 물이 솟구치게 하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메마른 땅에 샘물이 솟게 하며, 이리가 살던 곳에 갈대와 풀이 자라게 하실 메시아(사 35:5-7)” 이심을 믿게 된 것이다.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몰아낸 행위 하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사랑과 권능으로 충만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인식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보여준 사역을 통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을 직접 보고, 체험함으로 그가 누구신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전령이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령이었다. 하나님의 전령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선포하셨다. 아울러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확실하게 안내해 주셨다. 천국이 가까워왔음을 알림과 동시에 그 곳으로 향할 수 있는 정확한 이정표가 되어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성문을 향해 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가르치시며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고쳐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 아닌 행위로 보여주신 것이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께서는 하늘의 진리를 전파하며 가르치신 것보다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 낙망하고 좌절한 무리들을 위로하며 일으켜 주시는 일을 더 많이 하셨다. 기독교의 교리를 사랑의 실천을 통해 가르치신 것이다. 


제사장들은 제사의 중요성을 그 형식과 방범에 중점을 둬 백성들을 지배했으며, 서기관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본분임을 강조하였고, 바리새인들은 자기네의 의를 본받아 사는 것이 참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행하는 믿음’을 지녀야 하며,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려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흩어져 방황하며 고생하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셨다.


예수님이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그도 함께 느낀다는 것을 보여주시며, 불치의 병으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의 구덩이에서 허덕이는 그들이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의 슬픈 사연을 알게 되면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예수님이 나인 성 입구에서 장례행렬과 마주쳤을 때 그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아들의 관을 뒤따르는 과부의 기막힌 슬픔을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가가 “울지 말라.” 위로 하시고, 그녀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그 여인의 눈물을 닦아주신 것이다(눅 7:11-17).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신 분도 예수님이시다(마 15:32-39). 


인간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 당하여 외롭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나병 환자를 보았을 때도 예수님은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어 그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하셨다(막 1:40-45).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이 살 길을 열어주어야 할 유대의 위정자들은 그들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을 지니고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까지 민중들이 힘겹게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네들이 지닌 종교적 권위를 무기 삼아 백성들을 억압하며 그들의 짐을 더욱 무겁게 했던 것이다. 


이런 혼란과 암흑의 시기에 그 모습을 드러낸 예수님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서민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던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사역을 지켜보며 위로 받으며 희망을 가지기 시작한 그들이었기에 예수께서 악귀를 쫓아내시고 벙어리의 말문을 여시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며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출현했음을 인식한다는 반응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똑같은 것을 목격한 바리새인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예수님이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들것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서기관들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다(마 9:3).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했다(마 9:11). 이번에는 악령에 의해 벙어리 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예수님의 권능을 사탄의 힘에 의한 것이라 단정하는 엄청난 죄를 범한 것이다. 어째서 유대의 종교 지도자란 그들이 이처럼 무지하고 악랄한 발언을 한 것일까?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준수가 하나님 백성의 기본 임무라 믿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네가 만든 율법준수 세칙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것을 말하고, 행하면 죄로 간주했다. 그러기에 모든 면에서 그들과 달리 새롭고 혁신적인 예수님은 그들에겐 죄인인 동시에 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들과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그들을 가리켜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위선자로 여기며, ‘독사의 자식’이라 부르는 예수님을 극도로 증오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행위가 ‘사탄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 결론 지은 까닭은 이런 사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랄한 의도를 지닌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아무런 반격도 가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그에게 주어진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길을 가셨을 뿐이다.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은 이 같은 예수님의 자세를 본받지 않으면 안 된다. 사탄은 예수님께 충성하기로 결단한 십자군의 장병들을 예측할 수 없는 갖가지 교묘하고 악독한 방법으로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탄의 도전을 받을 때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 (갈 6:9)”는 말씀이다. 


우리가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전 15:58)”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약속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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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66552
9195
2018-06-22
조국의 안정과 평화를 기원하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괴군은 삼팔선을 넘어 불법 남침을 감행해왔다. 북괴가 도발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노라고 큰 소리 치면서도 그들과 맞설 준비가 없었던 우리군은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어주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유엔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기울기만 해서 낙동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 나라의 운명은 글자 그대로 풍전등화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9월 28일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그 기쁨과 감격의 날을 맞이하기까지 우리들이 당한 고통과 아픔, 공포와 두려움은 공산치하에서 살아보지 않은 이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난 여덟 살이었다. 6월 27일 밤 점점 크게 귓전을 때리는 대포소리를 들으며 우리가족은 피난 짐을 싸 들고 집을 나섰다. 한강이 가까워지면서 피난행렬이 멈추어 지고, 다리가 끊어진 사실이 알려지자 아버지와 큰형만 어떻게 해서든지 강을 건너보겠다며 떠나갔고,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틀 후 동네 제일 높은 곳에 있던 나무 많은 우리 집에 들이닥친 인민군들이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그들 중 하나가 내 가슴에 장총을 들이대고 “네 애비가 어디 있느냐?”고 소리치며 나를 노려보던 그 살기 어린 눈빛을 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7월 16일에 미군이 용산 지역의 괴뢰군 군사시설을 폭격할 때 가슴에 파편을 맞아 인사불성이 된 둘째 형과 할머니를 신촌 고모 집에 남겨 놓고 우리는 덕소 근처에 있는 산골 마을로 피난을 갔다. 대추나무와 밤나무가 유난히 많았던 그 곳에서 우리는 70여 일 동안 굶주림을 참으며, 언제 붉은 완장을 차고 장총을 든 무리가 몰려와서 우리를 잡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한없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지내야 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와 큰형으로 인한 걱정과 어린 우리들에게 호박죽이나 옥수수라도 먹여야 하는 어머니의 고통스럽고 무거운 마음을 어린 나도 그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는 미군함정에서 쏘아대는 대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어둡기만 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나도 북괴군의 대포소리를 들을 때는 무섭고 떨렸는데, 미군의 함포사격소리를 들으면서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나중 알게 된 사실이지만 폭격에 파편을 맞은 둘째 형을 돌보며 신촌 고모 집에 계시던 할머니는 집 주위에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 우리는 죽어도 좋으니 미군이 대포를 더 많이 쏘아 잔인무도한 공산군들을 몰아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어린 아이였던 나도 공산치하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겠다는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해방군임을 자처한 공산군은 잔인하고, 악랄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패주하는 괴뢰군을 추격하여 삼팔선을 돌파하고 평양을 점령한 후 압록강을 향해 진군했다. 민족의 염원이던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누가 예상했으랴! 개미떼같이 많은 중공군들이 꽹과리를 두드려대며 국경을 넘어와 북진하는 유엔군의 앞을 막아 설 것을. 


승승장구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폭설과 혹한 속에서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공군을 맞이해 악전고투하며 작전상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1951년 1월 4일에 서울을 또다시 그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남으로 뚫린 모든 길들은 피난민들로 메워졌다. 말로는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고 제법 설득력 있게 떠들어 댔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이 자행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직접 체험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가다가 죽더라도 그네들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피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었으며, 화물열차 지붕에 올라타고 가다 떨어져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부지기 수였다. 남쪽의 큰 도시들 특히 부산은 이 같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모여든 피난민들로 발붙일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서러운 피난생활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빨갱이 공산당이 물러가고 우리의 소원인 통일의 그날이 올 것을 굳게 믿었다. 


나도 부산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월요일마다 초량동 산기슭에 전교생이 모여 조회를 할 때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서 나라를 지키자.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란 ‘우리의 소원’을 목청껏 외쳐대며 수류탄을 뽑아 들고 육중한 소련제 탱크에 뛰어오르던 용감한 국군 용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백두산을 오르는 장면을 그리곤 했다. 


그러나 민족의 숙원인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1953년 7월 27일 오후 12시 3분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됨으로 3년 간 한반도에 울려 퍼지던 전쟁의 포화는 멎었다. 


그로부터 6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한국전쟁이 안겨준 엄청난 피해와 씻기 힘든 아픔과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섰다. 4.19 학생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5.16 군사혁명으로 합법적인 민정이 군사정권으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기를 견디며 우리는 하나로 뭉쳐 대한민국을 잘사는 나라로 만들었다.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들던 우리들이 해외여행을 이웃집 가듯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부강해진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같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 동안 백두산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통일의 날을 기다리던 숱한 실향민들이 한을 품은 채 눈을 감았고, 통일을 갈망하는 범국민적 염원도 식어가기 시작했음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북한정권은 휴전 이래 적화통일의 꿈을 저버린 적이 없다. 그들은 남한을 흡수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빈틈없이 그리고 꾸준하게 추진해 왔다.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미북회담은 북한이 그간 공들여 써온 각본을 연출단계로 접어들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인 것 같다. 


그 회담을 예의 주시한 외교와 안보 전문가들이 그런 결론에 도달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핵무기를 개발하여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세기의 독재자로 낙인 찍힌 김정은이 미국 대통령과 당당히 마주서서 악수를 나누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김정은은 그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입지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북한의 즉각적인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포기”를 이끌어 내기 위한 자리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엉뚱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핵을 개발조차 하지 않은 대한민국에도 비핵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비핵화를 한다는 언급은 찾아볼 수도 없다. 


물론 회담 당사자들은 그런 세부적인 사항들은 향후 결정될 것이라 말하겠지만 유치한 말장난일 뿐이다. 때문에 이번 회담결과를 놓고 “연약한 여자가 폭력배에게 당하듯이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완전히 당한 미국외교의 치욕”이란 평가와 더불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미국의 항복문서”라는 극단의 비평까지 등장한 것이다. 


나는 이런 평가나 비평의 옳고 그름을 논할 식견이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 못지않기에 이번 회담에서 논의되고 합의된 사항들을 보며 슬픔과 분노를 참을 수 없노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뜻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을 공산화시키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인물이다. 트럼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한 사업가이며,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일이라면 못할 것이 없는 현실주의자 이다. 어째서 이 같은 두 사람이 서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합의한 결의로 인해 내 조국의 운명이 좌우되어야 하느냐가 내가 분노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만년의 고난과 고통의 역사를 통해 숱한 외침을 받으면서도 지켜온 우리 대한민국이다. 우리민족의 혼을 말살시키기 위해 일제가 36년 간 온갖 악랄하고 비열한 수법을 동원했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동화되지 않고 민족의 정기를 지켰을 뿐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그들과 싸워 광복의 기틀까지 마련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로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조국을 붉은 이리떼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뒤 따르는 전우들이 넘어야 할 또 다른 시체가 되면서 싸웠다. 


광주의 어느 산골짜기에서 시인 모윤숙이 발견한 스물다섯 젊은 소위의 시신은 그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오만이 넘는 미국 병사들도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본 일도 없는 사람들이 사는 한국에 와서 이름 모를 이국의 산과 들에서 숨져갔다. 


이렇게 지켜낸 조국 대한민국이 트럼프와 김정은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를 치켜 주며 서명한 한 장 종이 때문에 경제성장에 영향을 받으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 받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우리 모두 정신 차리고 현실을 직시하며 현 시점에서 “내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때이다.


믿는 자들이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우리민족을 사용하셔서 그의 원대한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대한민국을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호해 주시며, 그의 역사 운영의 선두주자로 세우실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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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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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예수님의 기적-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좋으냐?’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한탄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들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 하니라.”(막 3:1-6)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당을 많이 이용하셨다. 유대인들이 사는 곳마다 있는 회당에는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회당장의 허락을 얻어 자유롭게 말씀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감시하기 위하여 회당을 찾기 시작하자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안식일에도 바리새인들이 앞자리에 앉아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날 그들이 예수님의 동태를 더 주의 깊게 살핀 것은 모인 사람들 중에 손 마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주시면 안식일을 범했다는 구실로 그를 고발하려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던 것이다.


형식과 외형을 중시하며 전통에 매달리는 바리새인들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 9:11)는 예수님과는 여러 면에서 대립했는데, 안식일에 관한 문제도 그 중 하나였다. 그날 회당에 들어오시기 전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느냐?”는 질책성 질문을 했었다. 


그때 예수님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먹은 사실을 상기 시키면서(삼상 21:1-6) 제사장이 성전에서 제사에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는 성전보다 크시며 “안식일의 주인”이라 말씀하신다. 안식일에 제사장이 성전에서 제사준비를 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처럼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이라도 옳고 선한 일을 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하시는 일들을 율법을 어기는 행위로 간주하려는 생각을 버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강퍅해진 마음으로 회당에 들어와 예수님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 외의 문서에 의하면 회당에 앉아있던 손 마른 사람은 돌을 다듬던 석공이었다고 한다. 마태와 마가는 그의 “한쪽 손”이 말렸다고 기록했지만 의사인 누가는 “오른 손이 마른 사람”이라 명시하고 있다. 석공이 오른 손을 못 쓰게 되면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무용한 인간이 된 그는 유용한 인간의 대열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에게 손을 고쳐달라 간청하지 않고 잠잠한 것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염려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선한 생각과는 달리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그를 고쳐주시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만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는 삶과 죽음의 문제처럼 중요했다. 실루키드 제국의 유대교 핍박에 항거하여 제사장 유다 맥가버가 주전 160년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실루키드 왕 안티오쿠스는 반란군을 안식일에 공격하였다. 광야 동굴에 은신해 있던 맥가버의 군사들은 그들의 공격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죽어갔다. 안식일에 무기를 들고 싸우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국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성 밖에 토산을 쌓았다. 고대전투에서 견고한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흔히 사용하는 전략이었다. 이에 반해 성을 수비하는 편에서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토산을 쌓지 못하도록 하곤 했다. 그러나 폼페이 장군이 안식일에 토산을 쌓아 올리기 시작하자 성안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회당의 특별석을 차지하고 있는 목적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신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흐르던 침묵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깨어진다. 그들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라 물어온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반응은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신 후 “사람이 양보다 더 귀함으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마 12:11-12)고 답변하신 것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와는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읽으시고 손 마른 사람을 회당 한 가운데 나와 서게 하신 후 주위를 둘러보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신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도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꺼낼 것인지를 물으신 것과 같은 취지의 것이었다. 그리고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동물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것은 허용되고 있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침묵하는 그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으로 인해 탄식하며 노하셨다. 손 마른 사람에 대해서는 추호의 관심도 없이 오직 예수님을 책잡을 기회만을 노리는 그들의 악한 마음에 의로운 분노와 슬픔을 느끼신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명하신다. 그를 고쳐주신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주문에 응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아시면서도 말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꼭 그날 그의 손을 고치셔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놔두면 생명이 위험한 것도 아니고, 하루 더 지난다고 상태가 악화되는 병도 아니었기에 안식일이 지난 그 다음날 고쳐주시는 것이 모든 면에서 원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네들의 완악하고 그릇된 생각과 행동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인간은 결코 안식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당장 생명을 잃을 위험은 없을 지라도 필요 없이 고통을 받아서도 안 되며, 율법을 지키고 예배를 위한 형식과 절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자비와 사랑임을 그들에게 선포하기를 예수님은 원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을 회당 한 가운데 서게 하시고 “네 손을 내밀라.”하신 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보낸 공개 도전장이기도 했다. 그에겐 생명인 오른 손의 기능을 상실한 석공에게는 잃었던 생명을 되찾아 주겠다는 엄숙한 선언이었고, 손 마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마비된 손을 내미는 불가능한 일을 단행하자 그의 손은 완전히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며, 예수님이 보실 때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일이 행해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은 결코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그를 고치기 위해 하신 일은 그를 일어나게 하여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신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신 행위로부터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란 결론을 내려놓고 그를 주시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 범법자로 몰아 죽일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표적수사”를 하기로 결정하면 사실여부와는 관계없이 결정된 표적을 정당화 내지는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정치적인 입장이나 종교적인 신념이 상반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하나로 뭉친 것이다. 참으로 슬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류구원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단합한 그들이기 때문이다.


오른 손의 기능을 상실한 순간부터 석공은 캄캄한 암흑 속에서 몸부림 쳐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앞에 나와 “네 손을 내밀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름으로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빛의 세상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도 예수님 앞에 엎드리면 정결한 몸과 마음을 지닐 수 있다. 아무리 연약하고 미약한 사람도 예수님에게 손을 내밀면 누구보다 굳세고 강하게 변화하여 놀라운 힘과 용기를 발휘하며 주께 충성하는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다. 예수님 안에서 쓸모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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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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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3
예수님의 기적-갈릴리에서 두 맹인을 고치시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 오며 소릴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하니 이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하셨으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마 9:27-31)

 

 

병원에 가보면 세상에 이처럼 아픈 사람들이 많은가 의심될 정도로 환자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게 된다. 병의 종류도 많기만 해서 한참 설명을 들어야 인체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어 발병하는 것인지 짐작만이라도 할 수 있는 병들이 수없이 많다. 예수님 당시에도 오늘 날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숱한 병자들이 있었다. 성경에 명시된 것들만도 맹인, 벙어리, 귀머거리, 절름발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 중풍, 혈루증, 열병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앞 못 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시각 장애자는 지금도 많지만 2,000여 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별나게 많았던 원인 중의 하나는 중동지방의 뜨거운 태양빛 밑에서 사람들이 눈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오늘 날처럼 검은 안경을 쓰고 태양의 직사광선을 피했더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시력을 상실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 된다. 


위생시설이 거의 없었고, 사람들의 위생관념이 부족했던 것도 앞 못 보는 이들이 많이 생긴 까닭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런 저런 까닭으로 눈이 먼 사람들은 보기를 갈망했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암흑 가운데 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광명한 빛의 세계로 인도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그의 집에서 나오시자 여전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갑자기 그들 중에서 맹인 두 명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 외친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실 때 악귀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 부르며 그에게 항거했었다(막 1:24; 눅 4:34). 그런데 맹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비록 육신의 눈이 멀어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는 영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메시아가 출현하면 일어날 현상을 이사야 선지자는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사람이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라.”(사 35:5-6)고 예언하였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는 몰라도 맹인들은 이 예언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광명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시리라 확실하게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마태의 집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 묻자 예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1-12)하신 말씀을 전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맹인인 그들을 고쳐주기 위해 오신 의사라는 확실한 믿음이 생겼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사명은 각종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문제들, 특별히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자들이 진 무겁고 괴로운 짐을 대신 저주는 것이 메시아의 역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귀신 들린 그녀의 딸을 고쳐 달라 간청한 사실에서도 나타나 있다. (마 15:21-28)


맹인들이나 가나안 여인과는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유대의 민족주의자들로서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누렸던 영화를 되찾게 해 줄 민족적 영웅이었다. 예수님은 그를 그런 메시아로 인정하여 앞장세우려는 사람들을 경계했으며, 그런 무리가 몰려들 때마다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시곤 하셨다. 


두 맹인도 예수님을 그와 같은 메시아로 여기고 그 앞에 나왔다고 생각하는 성경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견해가 옳다고 보기는 힘들다. 맹인들의 관심사는 이스라엘의 해방이나 번영보다는 그들이 눈을 뜨는 것이었으며, 예수님을 정치적 지도자 아닌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줄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결사적으로 외치며 따라오는 두 맹인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신 채 집안으로 들어가신다. 그 집이 누구의 집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계셨던 마태의 집이라(마 9:9-10) 말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예수께서 집안으로 들어가시자 맹인들도 따라 들어온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간절한 호소와 맞먹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서슴없이 “주님, 우리는 확실히 믿습니다.”라 대답한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들의 믿음대로 되라.” 말씀하신다.


그들이 어둠의 세계를 벗어나 밝은 세상으로 들어서는 기적의 첫 단계는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신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낙망과 좌절이 희망과 소망으로 변화하고, 캄캄한 밤이 지나고 밝은 새벽이 찾아오며,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으로 바뀌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자 어둡기만 하던 그들의 눈앞에 찬란한 세계가 펼쳐진다. 그들의 어떤 ‘믿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런 기적을 행하게 하셨을까? 


우선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그러기에 그들 두 맹인은 손에 손을 잡고 예수님을 뒤쫓아 갔던 것이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인데도 두 맹인이 손을 마주 잡자 그들에게 믿음의 눈이 열려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눈을 뜨고도 예수님을 찾아 나서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기만 한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름답고 굳건한 두 믿음의 용사의 예수님을 향한 행진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집안까지 들어간 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르겠다는 그들의 확고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그들은 즉시 “주여, 그렀습니다.”라 대답한다. 이 같은 두 맹인의 믿음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그녀의 혈루증은 고쳐진다고 확신했던 여인의 믿음처럼 장하고 귀한 것이었다. 밝아진 눈으로 사방을 보며 기뻐하는 맹인들에게 예수님은 자기가 한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하신다. 어째서 그런 분부를 하셨을까?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칭찬 들으며, 존경받아 명성이 높아지면 성공한 인생을 사는 길이라 믿는다. 그러기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도 그것을 확대하고 미화하여 알림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를 원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세상의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면 마음이 불편해져서 때로는 그들의 명성에 흠집을 내려고 없는 일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불법으로 기소하여 빌라도의 법정에 넘긴 것도 예수님을 향한 민중들의 인기와 지지도가 높아지는데 대한 질투와 시기가 크게 작용한 것처럼 말이다. (마 27:17-18) 


예수님은 세상이 그를 어떻게 보느냐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가 메시아라는 소문이 잘못 퍼지면 사람들이 그를 죽여서 그의 뜻을 이루시는 구세주 아닌 싸워서 이겨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통치로부터 건져내는 그네들이 원하는 메시아로 인정될까 염려하셨다.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예수께서 맹인들을 사람들이 없는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신 까닭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가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분부에도 불구하고 눈뜬 두 사람은 그곳을 떠나는 즉시 “예수께서 우리를 보게 해주셨다.”고 가는 곳마다 외쳤다. 예수께서 고쳐주신 열 명의 나병환자 중 아홉 명이 감사하다는 인사조차 없이 떠나버린 것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현상이다.(눅 17:11-19)


그때나 지금이나 두 눈을 뜨고도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영안이 먼 사람들이 많기만 하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온 두 맹인은 육신의 눈은 감겨있었지만 영의 눈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아보았으며, 그의 권능의 손길에 의해 영육 간에 밝아진 눈을 지니는 축복된 사람들이 되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깨닫고 그의 전능하신 손에 그들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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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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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5
예수님의 기적-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시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그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시니, 제자들이 여쭈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편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25-34)

 

예수님이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신 기적은 예수께서 병들어 죽게 된 딸을 살려달라는 회당장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났다. 그때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 속에 12년간 혈루증으로 고통 당하던 여인이 있었다. 혈루증이란 “자궁의 만성 하혈증으로 자궁 안에 종기가 생기거나 어떤 이상이 생겨 불규칙적으로 피가 흐르는 증세”를 말한다. 


그 당시에는 유출병이라 알려졌으며, 부정하고 불경하게 여겨져 이 병에 걸린 여인은 예배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레 15:19-31). 


따라서 군중들 틈에 끼어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슬프고 외롭게 살 수밖에 없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중풍병자와 달리 마음대로 다니며 활동할 수 있으면서도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못하며 사람들의 멸시와 경멸의 눈길을 피해 숨어 사는 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혈루증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들을 찾아 다니며 치료를 받느라고 온갖 고초를 다 겪었고, 가진 재산도 다 써버렸으나 낫기는커녕 오히려 병은 악화되었다. 그 시대에 혈루증을 고치기 위해 약초를 먹거나 여러 가지 미신적인 방법을 포함한 11가지나 되는 치료법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효과 여부를 떠나 받기 힘든 치료방법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 다니며 좋다는 것은 모두 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마가는 의사들을 조롱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하지만 의사였던 누가의 복음서에는 그녀의 병이 더 악화되었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았지만 병이 더 깊어지기만 하자 삶을 포기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그 여인은 예수님에 관해서 듣게 된다. 어떤 병이든 고칠 수 있는 권능을 지니신 예수님이 멀지 않은 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예수님 앞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혈루증을 앓고 있기에 예수님에게 접근하여 고쳐달라고 간청할 수 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엄격히 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과 섞이는 것조차 그녀에겐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쉽사리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는 악조건을 기회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그 여인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만진 것이다.


그 당시 유대 남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뒤편 네 모서리에 장식이 달린 겉옷을 입었다(민 15:37-41). 여인이 만진 예수님의 옷자락은 그 네 개의 장식 중 하나였다. 


얼핏 보면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 같지만 그녀가 그렇게 한데는 중대한 까닭이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 여자가, 그것도 이방여자가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녀는 가이사라 빌립보 출신의 이방여인이었다고 한다.) 남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예수님의 뒤에서 그의 옷을 만진 것은 그렇게만 해도 그녀의 인생을 파탄시키는 혈루증이 깨끗이 나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일은 더더욱 없는 그녀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인의 믿음은 즉시로 열매를 맺어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순간 오랜 세월 그녀를 괴롭혀 온 혈루증은 깨끗하게 치유된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그에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느끼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물으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를 지니신 분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권능을 행사하셔서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하지만 혈루증 앓는 여인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그 권능을 행사하시기 전에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순간 예수님의 권능이 행사되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느끼신 것이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혼잡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 반문했지만 예수님은 누가 그랬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신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권능에 힘입어 혈루증을 고치려 했던 여인은 자신이 한 일을 숨길 수 없음을 깨닫고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것을 고백한다. 예수님은 그녀를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으시고 사랑이 가득 담긴 자비로운 음성으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 말씀하신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여자를 ‘딸’이라 부르신 것은 여기뿐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예수님이 그녀의 믿음을 얼마나 귀하고 장하게 여기셨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이어서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신 것은 그녀의 혈루증이 완치된 것은 오로지 그녀의 믿음 때문임을 확인시켜 주심과 동시에 그녀의 영혼도 깨끗해졌음을 일러주신 것이다. 들것에 실려 지붕에 뚫은 구멍을 통해 밑으로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심으로 그를 영육 간에 새롭게 해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여인도 육신을 온전케 해주심과 동시에 영혼까지 구원하시는 은총을 내려주신 것이다.


더 나가가서 이 여인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까지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받는다. 모두가 천금보다 귀한 그녀의 믿음이 가져온 결과였다.


12년 이란 긴 세월 동안 세상을 원망하고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며 살아야 한 여인에게 새로운 인생의 막이 열린 기적은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났다. 그것도 많은 무리가 서로 밀고 밀리는 와중에서 말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평안히 가라.”고 축복하시는 장면에서 우리는 혼잡한 세상이나 주위에 운집한 수많은 군중들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존귀하신 예수님이 낮고 천하며 불치의 병으로 고통 받는 한 여인에게 그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시는 장면만을 목도하게 될 뿐이다. 


 그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그와 같이 대해주시기 때문이다. 세상이 낮고 비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멸시와 경멸과 천대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신분이나 능력에 관계없이 우리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셔서 보살펴 주시며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어떤 문제를 지녔을지라도 예수님의 품에 안기면 누구든지 참된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1912년 4월 15일 새벽에 호화찬란한 세계 최대의 여객선 타이탄익 호가 빙산에 부딪쳐 대서양 깊은 물속에 가라앉았다. 1,6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엄청난 해상사고이며 세기의 비극이었다. 


이 사건을 보도한 뉴욕의 신문 중 ‘The American’은 기사의 초점을 타이탄익 호의 침몰로 사망한 백만장자 John Astor에 맞추었다. 1,600여 명의 승객들도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간단하게 기사의 끝 부분에 언급되었을 뿐이었다. 그 신문은 숱한 인명과 천문학적 숫자의 재산 그리고 화려하고 큰 여객선의 손실보다 한 백만장자의 죽음에 더 큰 비중과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처럼 귀중한 것은 없으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방황하는 한 영혼이 그에게 돌아오는 것을 무엇보다 기뻐하시며, 창가에 기대시어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떠날 때 일어나며, 우리가 예수님에게 돌아올 때 그 모든 문제들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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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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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6
동포사회의 힘을 보일 때다-하나로 뭉쳐 조성훈을 주 의회로 보내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초등학교 4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말이다. 선생님께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지만 내게는 그 말의 뜻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스스로 돕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가 확실하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에서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란 문장을 보고는 부산 초량동 산비탈의 천막교실에서 깨닫지 못하고 지나쳤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의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노력하지 않고 원하는 것만 구하는 사람 아닌 최선을 다하면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최선을 다함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이들을 수없이 보았고,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하며 간구할 때 그 기도가 응답된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 여러 번 체험 할 수 있었다. 목사가 된 후 그 경험들을 토대로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가 무엇이든, 우리에게 할당된 달란트가 얼마이든 그것들을 최대로 활용하며 살아야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고 설교하곤 했다.


지금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이 땅 위에 이루고자 하시는 원대한 계획을 실현시켜 드릴 수 있는 시점에 서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민족보다 그를 사랑하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우리 민족을 사용하여 서구인들의 가슴 속에서 날로 식어가며 꺼져가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되살리며, 사랑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기 위해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다.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생소한 이역 땅에서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수고의 땀을 흘리게 함으로서 여기 정착한 어떤 다른 민족보다 튼튼한 삶의 터전을 이룰 수 있게 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그 터전에서 성장한 우리 2세들이 주류사회 각 분야에 파고들어 이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해주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우리 동포들이 이곳에서 확보하고 쌓아 올린 인적자원과 물적 기반을 하나로 묶고 활용하여 이 사회의 제도와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인들도 배출시켜 주셨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민족적이며 시대적인 사명감에 불타는 젊은 조성훈으로 하여금 정계에 입문하여 그들과 힘을 합해 동포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성장시키며, 이 나라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셨다. 동포사회의 유망주 조성훈이 윌로우데일 선거구에서 보수당 후보로 출마하며 선거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동포사회 각계각층에서 그가 당선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고 있으며,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그를 주 의회로 보내기 위해 온갖 힘들고 귀찮은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도맡아 하고 있다. 여러 분야의 동포 지도자들도 이 일을 위해 수고하는 이들을 독려하고 격려하며, 그들 자신들도 열성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이처럼 동포사회 전체가 하나 되어 유능한 젊은 정치인을 이 나라 정계에 진출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을 보며 흐뭇하고 든든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이 같은 동포들의 열렬하고 뜨거운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주 의회에 도전하는 조성훈의 자태 또한 씩씩하고 늠름하며 믿음직스럽기만 하다. 사적인 자리나 공식석상에서의 언행이 적절하고 예의 바를 뿐 아니라 분위기를 바람직하게 형성하는 자세와 재치가 엿보이고, 상대를 배려하고 높이며 감동시키는 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눈여겨보면 그는 때와 장소에 따라 상황을 민첩하고 정확하게 판단하여 적합하게 처신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직 정계에 발을 디딘 것도 아닌데 예기치 못한 사태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예리하면서도 성숙한 정치 감각을 발휘하여 효율적이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을 보면, 그는 한인사회와 주류사회의 교량 역할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며 동포들의 권익을 증진시키고, 이 사회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인재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조성훈을 주 의회에 입성시키기 위해 동포들이 발 벗고 나서서 일하는 모습은 참으로 바람직하고 고무적이다. 이제 우리들의 노력과 수고가 결실을 맺을 날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그날 동포사회의 자랑이요 희망인 조성훈이 승리의 테이프를 끊고 퀸스 팍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 하나가 남아있다. 


6월 7일 윌로우데일에 거주하는 동포들 모두가 빠짐없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그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들은 각자 자리를 지키며, 맡겨진 일만을 성실히 수행함으로 조성훈을 주 의회로 보내기 위한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 모두가 같은 일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6월 7일 투표장에 나가 귀중한 참정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윌로우데일의 유권자 8만 여명 가운데서 5만이 투표한다고 가정하면 2만 9천 표 이상을 확보해야 당선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인 투표자는 7,300 명이다. 수학적으로 따지면 당선에 필요한 2만 9천의 사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나 우리 동포들의 7,300 표가 조성훈에게 던져지면 그의 당선은 보장된다고 믿는다. 


우리들이 우리의 몫을 다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동포들이 던지는 7,300표는 우리가 하나로 뭉쳐서 “스스로를 돕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돕는 자의 편에 서시는 분이신 까닭이다.


그 옛날 홍해가 갈라진 것은 모세의 지팡이 때문이 아니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지팡이로 홍해를 내려치자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이 홍해를 가르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모진 핍박을 이겨내고,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하며 3차에 걸쳐 3만 킬로미터 이상을 복음의 횃불을 들고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닌 인내와 용기 그리고 탁월한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외치며 믿음의 경주를 달릴 때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이 되어 주신 것이다.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해 주셨고,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 땅 위에 그의 뜻을 펼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조성훈에게 던지는 7,300 표 위에 그가 주 의회에 입성하는데 필요하고도 남을 많은 표를 더해주실 줄 확실히 믿는다.


2018년 6월 7일 우리들이 조성훈에게 던지는 소중한 한 표는 캐나다의 한인 이민사에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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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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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5
예수님의 기적-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시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도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하거늘, 이에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막 5:21-24)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다 크게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막 5:35-43)

 

 

예수님이 거라사인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실 때 돼지 2,000 마리가 호수로 들어가 몰사한 일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그곳을 떠나달라고 요청한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거기를 떠나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갈릴리 호수 서편 해안에 도달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때 야이로라 이름 하는 회당장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절하며 그의 어린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오셔서 살려달라고 간절히 청한다.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회당장은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장로들 중에서 선출되는 회당장은 예배 시에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배가 그의 책임 하에 진행되었기에 기도자와 성경봉독자 그리고 강론할 사람을 정하는 것은 그의 임무였다. 예배를 관장할 뿐만 아니라 건물관리는 물론 행정업무를 포함한 회당운영을 총괄하는 그였기에 회당장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회당장이 나사렛 목수 출신 예수님께 머리 숙인 까닭은 그의 외동딸이 병들어 위독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돈과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야이로는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 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자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고(막 1:21-28), 중풍으로 고생하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마 8:5-13)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딸을 살리기 위한 최후의 시도로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다.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사회에서 인정받는 회당장의 신분으로서 떠돌이 설교자 같은 예수님에게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는 체면과 자존심을 모두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힘들었을 또 다른 중대한 이유는 그는 예수님을 감시하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주목하는 예수님의 회당에서의 동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는 것도 회당장의 임무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열두 살 된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시점에서 그에게는 더 이상 이것저것을 따져가며 결정할 여유가 없었다. 


때문에 야이로는 요주의 인물이지만 불치의 병을 치유하는 신통력을 가진 예수라는 젊은이 앞에 머리 숙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이고서 말이다.


야이로를 마주한 예수님은 “평소에 나를 멸시하고 적대시 하더니 일이 급하게 되니 안면몰수하고 날 찾아왔구나.”라며 냉정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신다. 야이로의 본심을 들여다보고 계시며, 그의 믿음은 “집까지 오실 것 없이 말씀만 해주시면 제 하인이 나을 것을 믿습니다.”한 백부장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의 사랑과 권능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한 영혼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의 집으로 발길을 옮기시는 예수님의 뒤를 제자들과 군중들이 뒤따랐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 오랫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만진다. 그 순간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느끼신 예수님이 누가 그의 몸을 만졌는지 알기 위해 주위를 들러 보시자 겁에 질린 여인이 자기가 한 일을 주님께 고한다.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이 가라.”말씀하신다. 


그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이미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한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이르신다. 예수께서 처음으로 야이로에게 하신 말씀이시다. 그러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야이로의 집으로 들어가신다.


집안에서는 이미 장례절차가 시작되고 있었다. 더운 날씨로 시신이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때로는 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바위동굴에 집어넣을 정도로 유대인들은 신속하게 장례식을 거행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장례를 위해 반드시 하는 세 가지가 있었다. 우선 그들은 옷을 찢어서 입었으며, 아무리 가난하더라고 피리 부는 사람들을 고용했고, 장례를 위하여 전문적으로 울어주는 사람들을 불렀다. 


예수님이 세 제자와 야이로의 집에 들어섰을 때 고용된 사람들이 피리를 불고, 문상객들은 거기 맞추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불렀고, 장례식 때 직업적으로 우는 이들의 울음소리로 집안이 시끄러웠던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어째서 이처럼 소란을 피우느냐?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며 그들을 꾸짖으셨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근거하며 “아이는 잠들어 있었거나 혼수상태에 빠졌었을 뿐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아이를 살린 것이 아니라 깨운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피리불고 노래하며, 방성대곡하던 사람들이 “아이가 잔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은 것은 아이가 죽었음을 그들이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다.”(눅 8:55)는 누가의 증언 또한 소녀는 분명히 죽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이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신 것은 회당장의 딸은 죽었지만 그가 살리시겠다는 뜻을 밝히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비웃는 사람들을 다 밖으로 내보내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와 소녀의 부모만을 데리고 그녀의 시신이 놓인 방으로 들어가신다. 예수께서 그들 다섯 외에 다른 사람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엄숙한 장면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죽은 소녀의 손을 잡은 예수님은 “달리다굼”이라 말씀하신다. “달리다굼”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사용되던 아랍어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란 의미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은 죽은 소녀가 살아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예수님이 명하시자 죽었던 소녀가 벌떡 일어나 걸어 다닌다. 그 광경을 목격한 다섯 증인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 예수께서는 두 가지를 명하신다. 하나는 회당장의 딸이 살아난 사실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녀에게 음식을 먹게 하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소녀를 살리신 것을 말하지 말라 하신 것은 그가 행하신 권능이 그를 비웃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한 번에 펴져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바라고 원하신 것은 그의 가르침과 그가 행하시는 기적들로 인해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것을 알게 되는 것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온갖 노력을 경주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죽음은 인간 최대의 적이며, 죽음의 막강한 권세 앞에 인간은 한없이 미약한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 앞에서 죽음의 권세는 인간이 죽음 앞에서 무력한 것보다 더 무력하다는 사실이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는 회당장 야이로에게 예수께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하신 것은 우리 모두를 향해 하신 말씀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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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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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5
예수님의 기적-중풍병자를 고치시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음으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하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하더라.“(막 2:1-12)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며, 모든 병과 악한 것들을 고치시던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몰려왔다. 그곳은 베드로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집안은 물론 입구까지 막혀버리게 사람들이 모여든 까닭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혜택을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다른 목적으로 그곳에 온 사람들도 있었느니 예수님의 동태를 살피러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들이었다. 모인 사람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때 중풍병자 네 사람이 누운 침상을 들고 왔다. 발 부칠 틈도 없이 모여든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은 침상을 들고 지붕위로 올라간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집 지붕은 평편했고, 집 벽에 붙은 층계를 타고 지붕위로 올라가게 되어있었다. 그 층계로 지붕에 오른 그들은 진흙과 건초를 섞어 만든 지붕을 뚫고 병자가 누운 침상을 예수님이 앉아계신 밑으로 내려 보냈다. 그들의 행동은 거기 있던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들었지만 아무도 불평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그들을 지켜보신 예수님도 그네들이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지붕에 올라가 구멍을 내고 병자가 누운 침상을 내려 보낸데 관해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들의 믿음만을 칭찬하셨다. 어째서 일까?


우선 그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오기만 하면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실히 믿었다. 예수님은 어떤 병마도 물리칠 수 있는 권능의 소유자이시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에게 접근할 수 없게 되자 남의 지붕을 헐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들이 그 같은 모험까지 하면서 예수님께 데리고 온 병자는 예수께서 “작은 자”라고 부르신 것으로 보아 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젊은이를 침상에 눕혀 예수님 앞으로 나온 네 사람의 정성과 사랑과 용기는 믿는 자 모두가 본받아야 할 귀중한 자질과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앞길이 창창한 청년이 정상인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고, 예수님은 반듯이 그를 고쳐주신다는 믿음으로 충만했기에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내기까지 한 것은 진정한 사랑과 용기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일이야 말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한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같은 그들의 진정한 믿음을 보셨기에 그들의 무례한 행동을 꾸짖기는커녕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여,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병 고침을 받고자 예수님 앞에 나온 병자를 실망시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그가 듣고 싶은 말은 “네 믿음이 너를 온전케 하였다.”란 말씀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병마와 죄의 연관성에 관하여 다시 한 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인들은 심한 병에 걸리거나 뜻밖의 재앙을 만나면 지은 죄로 인해서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물었을 때 예수님은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함”이라 답변하심으로 모든 병이 다 죄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중풍병자의 경우도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말씀하신 후에 그가 걷게 된 사실로 보아 그가 중풍병자가 된 까닭은 그의 죄로 인함이었음은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고 여겨진다. 그렇지 않을 지라도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그의 죄가 사함 받았다.”고 밝히신 것은 인간에게 찾아오는 슬픔과 고난의 근본원인은 죄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체념상태로 누워있는 중풍병자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신 후 그의 “죄가 사해 졌음”을 선언하시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현장을 포착했다고 믿은 것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신 예수께서 물으신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과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란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말이다. 


둘 다 말하기는 힘들지 않다. 그러나 어느 것을 말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누구에게든 “죄 사함을 받았다.”라 말하면 그 사람이 죄 사함을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 누구나 그렇게 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런 말을 한다는 건 그들 스스로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며, 그에 대한 형벌은 죽음인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들에겐 중풍을 치유할 권능이 없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막 11:30) 물으셨을 때 그들이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잠잠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며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왔노라.”하시고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명하신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전신이 마비되어 들것에 실려 온 병자가 그가 누운 상을 들고 집으로 갈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명하신 것은 그 자리에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데 내가 이 중풍병자에게 죄를 한다고 하니 너희들이 내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너희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임도 나는 알고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고 벌떡 일어남으로 몸과 마음이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보여주겠다.”


예수님의 명령을 듣는 순간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그가 누었던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확인해야 할 줄 안다. 첫째는 들것에 실려 온 중풍병자는 예수께서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말씀하신 순간 영육 간에 새롭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유대 전역을 다니시며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신 까닭은 유대 지방에 병자들이 하나도 없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유대 땅 구석구석을 몸소 찾아다니시며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심과 동시에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고통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들며, 낭패와 실망과 좌절이 소망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느끼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그는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이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함이셨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불철주야로 상한 심령들을 온전케 하시며 온갖 문제로 인해 진통하는 육신들이 새로워지는 권능을 행사하신 것이다.


침상에 누워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던 중풍병자가 그의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크게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들의 매말아 가는 영혼이 새로워지고 연약해 지는 육신에 힘찬 활력이 솟아나는 것은 놀랍고 신기한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이런 기적의 역사는 언제든지 일어나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운데 그의 영광이 높이 들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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