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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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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의 칼럼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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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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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5
2018-09-16
아름다운 정리

 

 

십 오륙 년 전 일이다. 어느 선배 목사님이 한 번 만나자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 목사님은 해방 후 월남하신 분으로 우리 집안 내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조부님에 관해 말씀하였으며, 우리 아버지를 무척 좋아하셨다. 뿐만 아니라 늦게 목사가 된 나를 아껴주시며 사랑해 주셨다.


그런 분이기에 식당으로 모시고 가서 식사를 대접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릴 때 그 분이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내가 김 목사를 보자고 한 것은 그간 나도 모르게 김 목사에게 섭섭하게 했거나 잘못한 것이 있으면 다 잊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야.” 큰 형님 같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늘 보살피며 도와주시면서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 대답은 했지만 그 분에게 전혀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이 드신 분의 특유한 독선과 고집 때문에 내 입장이 난처해지고, 처신하기가 힘들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십이 넘어 언제 하나님께서 오라 할지 모르기에 행여라도 내게 상처를 입힌 일이 있다면 용서받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참으로 아름답게 생을 정리하는 용기 있는 분이라 생각했다. 그 만남이 있은 지 몇 달 후에 그는 양로원으로 들어가셨고, 몇 년을 거기서 지내시다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주 최근에 한 동료 목사님이 방법은 달랐지만 그 선배 목사님과 같이 내게 진심 어린 작별인사를 하고 생을 마감했다. 암으로 여러 해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왕성한 의욕을 보이던 그가 내게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감사 카드를 보내왔다.


“김 목사님 그리고 사모님, 그간 격조하였기에 잠시 제 근황을 알려드림과 동시에 몇 자 감사의 말씀을 올리려고 펜을 듭니다. 지난 5월 모국방문 후에 제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 키모로 들어갔지만 결과가 썩 좋지 않아 호흡곤란, 보행곤란, 흉막에 물이 차 매일 빼내야 하는 등 매우 어려운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상태에서 김 목사님과의 우정과 애환을 회고해 보고 짧은 지면이나마 감사와 온정에 대한 표현이 있어야겠다 싶어 이렇게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그 동안 너무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건강이 회복되기라도 하면 한 턱 쏘겠습니다. 거듭 감사 드리고 두 분 건강하시고 내내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그 편지를 읽으며 아내와 나는 그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내는 곧바로 찾아가자고 했지만 난 지금 상황에서 방문한다는 것은 그와 가족들을 괴롭히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편지를 썼다. 교단은 달랐지만 그와 나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여러 분야에서 함께 일하며 친분을 쌓았다. 본의 아니게 실수한 것이 있으면 잊어달라 하신 선배 목사님을 모시고 같은 봉사단체에서 일하기도 했고, 지금 온타리오 목사회 전신인 한인교역자회에서 함께 봉사하기도 했다.


주관이 뚜렷했고 강직했던 그와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되면 쉽게 물러서지 않았던 나와는 대립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우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큰 문제없이 함께 지낼 수 있었다.


편지에 함께 지내던 시절의 일들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속히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같이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노라 적었다. 그리고 그가 한 턱을 쏘면 나는 두 턱을 내겠다는 말로 편지를 끝냈다. 


그가 8월 18일에 보낸 편지를 받은 다음날 답신을 보냈는데 답장 아닌 그가 눈을 감았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8월 29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만 아니라 주위 분들에게 생의 이별을 고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누워있기도 힘든 상태에서 일어나 앉아 함께 지내던 사람들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생의 마지막 편지들을 쓰는 그의 모습을 머리에 그리며 나도 생을 정리하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진 운명”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해져 있는 그 운명의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생의 경계선 넘어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렇게 가버린 이들의 소식을 전해들은 이들을 “그 사람 죽었대.”라 말하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일상생활을 계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짐이 되어 무덤으로 가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닥 모를 때의 심연”이 우리 모두의 앞에 놓여 있으니까 말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의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아침 해가 떠오르면 살아질 수밖에 없는 안개와 같은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은 남기고 가는 것이 주어진 인생의 몫을 감당하는 길이라 믿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란 시간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말고 순간순간을 “마지막 수업”을 하는 학생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손해를 주는 일을 하지 말며, 옳고 정의로운 일이라면 앞장서서 실천하면서 말이다. 


성경은 이같이 살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구체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땅에 묻지 말고, 최대한으로 늘려서 활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최선을 다해 발휘하여 이웃과 사회에 유익을 끼쳐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들은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듯이 살아간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삶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우리에게 할당된 은사와 능력을 이웃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아울려 인생연극이란 연극이 막을 내릴 때까지 우리가 계속해야 할 연기는 어떤 면으로든 우리로 인해 상처받고, 피해보는 사람들이 없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미 그런 일을 행했다면 피해 받은 분들에게 사죄하고 용서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마음의 평화를 되찾으며 우리들의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뿐만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화목하며, 그들에게 관용과 긍휼을 베풀며,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우리들의 것처럼 여기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어야 할 줄 안다. 그래야만 남은 삶의 기간 동안 우리에게 위로 받고 힘을 얻어 새로운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날 테니까 말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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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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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0
예수님의 기적-수종병 걸린 사람을 고치시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려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의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하시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가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니라.”(눅 9:1-14)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기록이 일곱 번 나온다. 베데스다 못에서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요 5:1-9), 나면서 맹인 된 이를 보게 해주신(요 9:14) 날이 안식일이었으며, 마가복음에 기록된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날도(막 1:1-28) 안식일이었다. 


누가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을 네 번이나 기록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해주신 것이다(4:38). 그 다음에는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고(6:6), 세 번째로는 십팔 년간이나 꾸부러졌던 여인의 허리를 펴주셨다(13:13). 예수께서 안식일에 마지막으로 고치신 환자가 수종증 걸린 병자인데, 그 장소가 바리새인의 집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날 예수께서는 어느 바리새인 집에 초대되셨는데 집 주인은 바리새인의 지도자 중 하나로서 산헤드린 회원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가셨을 때 수종증 환자가 한 명 있었다. 수종증이란 고창병이라고도 하며, 체액이 신체조직의 특정부위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이다. 


유대인들은 이 병은 성적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여겼기 때문에 수종증에 걸리면 주위의 조롱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 환자가 어째서 저명한 바리새인 집에 들어와 있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으로 보건대 바리새인들이 계획적으로 그를 그곳에 오게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초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예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실 때부터 바리새인들이 그를 엿보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이 이미 여섯 번이나 예수님을 안식일을 범하는 죄인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안식일을 문제로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던 그들인지라 안식일에 예수님을 바리새인 집에 오시게 하고, 그 자리에 수종병 환자도 오게 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의 초대가 호의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고 계셨다. 그러기에 수종병 환자를 보는 순간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불행한 사람을 못 본 척 함으로서 바리새인들의 함정을 빠져나갈 의도는 전혀 없으셨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그들의 졸렬하고 교활한 계획을 무산시킬 선제공격을 가하셨다.


거기 모여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고 직선적으로 물으셨던 것이다. 이 돌직구 질문에 예수님의 적들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옳다고 하면 안식일 준수에 관한 그들의 입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고, 그르다고 하면 율법이 인정하는 것을 그들이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와 똑같은 일이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일어난다.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군지 말하라.”고 요구하자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반문하신다.


그때도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하늘로부터라고 하면 요한을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사람들로부터 왔다고 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는 군중들에게 돌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침묵하자 예수님은 수종병 환자를 고쳐 보내시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를 주시하는 그들에게 “너희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고 해서 구해내지 않겠느냐?” 물으신다. 


가축이 안식일에 웅덩이나 뚜껑 없는 우물에 빠져 허덕여도 구해내는 것을 율법이 허용한다면 병마로 신음하는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완악할 대로 완악해져 있는 바리새인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충고와 귀한 가르침에는 귀를 막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걸었지만 그들이 앉을 자리에 관해서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앞을 다투어 상석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주최 측에서 별도로 좌석을 배정해 주지 않는 한 먼저 간 사람이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그날 초대받은 사람들은 편한 자세로 앉아 주인이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까지 정성 들여 준비한 음식을 먹으려고 좋은 자리를 찾아 앉은 것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상석에 앉지 말고 뒷자리에 앉으라. 특석에 앉았다가 더 귀한 손님이 와서 말석으로 밀려나게 되면 부끄럽게 되지만 뒷자리에 있다가 앞자리가 비어 그리로 옮기게 되면 사람들 앞에서 영광이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께서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일러주시면서 “높아지기를 원한다면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하늘나라의 법칙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동포사회의 각종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항상 제일 앞에 마련된 귀빈석을 찾아 앉는 인사들을 보게 된다. 행사가 시작된 후에 도착해서도 당당하게 사람들 틈을 헤집고 앞자리로 향하는 이들도 있고, 심지어는 행사가 시작되어 연사가 말을 하는 데도 단상에 빈자리가 있으면 올라가 앉는 사람도 보았다.


그런 이들을 보면 무언가 불편하다가도 누구나 인정하는 이 사회의 지도자지만 뒤에 조용히 앉아계신 분들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동경하고 그 자리에 오르기를 원한다. 거기가 영광의 자리이기에 그 자리를 차지해야만 성취감을 느끼며 그의 인생에 박수를 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마감되는 날 하나님께서는 누가 높은 자리에 앉아 많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살았느냐가 아닌 누가 낮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섬기며 살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산 인생을 평가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초대받은 바리새인들에게 이처럼 귀한 진리를 일러주신 예수께서는 그를 초대한 이에게 사람을 청할 때는 그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이들을 택할 것이 아니라 그가 도울 수 있는 불우한 사람들을 청하라고 말씀하신다.


철저한 계산에 의해 손해 안 볼 사람들만을 만나면 그와 똑같은 마음을 지닌 그들로부터 피해를 보거나 낭패를 당할 확률이 많다. 하지만 가진 것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며,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표시하면 그들에게서 직접 받을 것은 없을지 몰라도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주시는”(잠 19:17)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보상을 받을 것임을 예수님은 일러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거물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되시어 거기 있는 수종증 환자를 고쳐주신 것은 안식일을 범한다고 그를 고발하려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안식일을 지키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낮은 자가 높은 자”라는 사실을 들려주셨고, 그들을 초대한 사람에게는 그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청할 것이 아니라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청해서 대접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날 그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귀한 가르침은 우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갈 때 우리들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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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1
예수님의 기적-귀신 들린 벙어리를 고치시다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하되,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하더라.” (마 9:32-34)

 

여기 수록된 예수께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기적은 12장에 기록된(22-24)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것과 같은 것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두 기적은 같은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 당시 유대지방에는 많은 종류의 병자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비슷한 증세를 가진 병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오는 각종 병자들을 다 고쳐주신 예수님은 여러 명의 맹인, 벙어리, 절름발이들을 고쳐주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유사한 병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낳게 해주었기 때문에 마태복음 9장과 12장에 나오는 벙어리가 동일 인물이라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9장의 귀신 들린 사람은 말만 못했지만 12장의 벙어리는 눈까지 먼 것을 보면 둘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


예수님께서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는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 후 밖으로 나오시자 사람들이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날 때부터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아니면 두 가지 장애를 다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은 말만 못했으며, 그렇게 된 까닭은 악령에게 사로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는 여러 가지 질병들이 악귀들과 연관되어 있었기에 이 경우도 그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괴롭히던 귀신을 쫓아내신다. 어떤 방법을 쓰셨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는 순간 그는 즉시 말하기 시작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들이 벙어리가 말을 시작하는 것을 보며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여 하는 말에 주위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라든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은 본 적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놀라면서 감탄한 이유는 예수님에 의해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임과 동시에 그들이 기다리던 진정한 메시아가 출현한 것을 인정해서인 까닭이다. 


그들은 초인간적이며 초자연적인 권능을 지니신 예수님 이야말로 “맹인을 보게 하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절름발이를 뛰게 하며, 벙어리를 말하게 할뿐 아니라 광야에서 물이 솟구치게 하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메마른 땅에 샘물이 솟게 하며, 이리가 살던 곳에 갈대와 풀이 자라게 하실 메시아”(사 35:5-7) 이심을 믿게 된 것이다.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몰아낸 행위 하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사랑과 권능으로 충만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인식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보여준 사역을 통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을 직접 보고 체험함으로 그가 누구신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전령이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령이었다. 하나님의 전령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선포하셨다. 아울러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확실하게 안내해 주셨다. 천국이 가까워 왔음을 알림과 동시에 그 곳으로 향할 수 있는 정확한 이정표가 되어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성 문을 향해 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가르치시며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다 고쳐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 아닌 행위로 보여주신 것이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께서는 하늘의 진리를 전파하며 가르치신 것보다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 낙망하고 좌절한 무리들을 위로하며 일으켜 주시는 일을 더 많이 하셨다. 기독교의 교리를 사랑의 실천을 통해 가르치신 것이다. 


제사장들은 제사의 중요성을 그 형식과 방법에 중점을 두어 가르치며 백성들을 지배했으며, 서기관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본분임을 강조하였고, 바리새인들은 자기네의 의를 본받아 사는 것이 참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행하는 믿음”을 지녀야 하며,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려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흩어져 방황하며 고생하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며 돌보셨다.”(마 9:36) 


예수님이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그도 함께 느낀다는 것을 보여주시며, 불치의 병으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의 구덩이에서 허덕이는 그들이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의 슬픈 사연을 알게 되면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예수님이 나인 성 입구에서 장례 행렬과 마주쳤을 때 그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아들의 관을 뒤따르는 과부의 기막힌 슬픔을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녀에게 가까이 가셔서 “울지 말라.” 위로 하시고, 그녀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그 여인의 눈물을 닦아주신 것이다.(눅 7:11-17)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신 분도 예수님이시다(마 15:32-39). 인간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 당하여 외롭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나병 환자를 보았을 때도 예수님은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어 그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하셨다(막 1:40-45).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이 살 길을 열어주어야 할 유대의 위정자들은 그들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을 지니고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까지 민중들이 힘겹게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네들이 지닌 종교적 권위를 무기 삼아 백성들을 억압하며 그들의 짐을 더욱 무겁게 했던 것이다. 


이런 혼란과 암흑의 시기에 그 모습을 드러낸 예수님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서민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사역을 지켜보며 위로 받으며 희망을 가지기 시작한 그들이었기에 예수께서 악귀를 쫓아내시고 벙어리의 말문을 여시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며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출현했음을 인식한다는 반응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똑같은 것을 목격한 바리새인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예수님이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들것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서기관들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다. (마 9:3)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했다(마 9:11). 이번에는 악령에 의해 벙어리 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의 권능을 사탄의 힘에 의한 것이라 단정하는 엄청난 죄를 범한 것이다. 어째서 유대의 종교 지도자란 그들이 이처럼 무지하고 악랄한 발언을 한 것일까?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 임무라 믿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네가 만든 율법준수세칙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것을 말하고, 행하면 죄로 간주했다. 그러기에 모든 면에서 그들과 달리 새롭고 혁신적인 예수님은 그들에겐 죄인인 동시에 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의로운 그들과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을 그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그들을 가리켜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위선자로 여기며, “독사의 자식”이라 부르는 예수님을 극도로 증오하였던 것이다. 그네들이 예수께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행위가 “사탄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 결론지은 까닭은 이런 사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랄한 의도를 지닌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아무런 반격도 가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그에게 주어진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길을 가셨을 뿐이다.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은 이 같은 예수님의 자세를 본받지 않으면 안 된다. 


사탄은 예수님께 충성하기로 결단한 십자군의 정병들을 예측할 수 없는 갖가지 교묘하고 악독한 방법으로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탄의 도전을 받을 때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갈 6:9)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전 15:58)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약속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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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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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예수님의 기적-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시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하시니라.(막 8:22-26)

 

예수님은 데가볼리 광야에서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후 몇 곳을 경유하여 벳새다에 당도하신다. 벳새다는 빌립과 안드레와 베드로의 출신지로서 요단 강 동편 갈릴리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예수님이 그곳에 오시자 사람들이 맹인 한 명을 데리고 와서 그에게 안수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맹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신다. 예수께서는 데가볼리서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실 때도 사람들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셨다.(막 7:33)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이 두 기적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고쳐주셨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렇게 하신 까닭은 다르다. 데가볼리에서는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 세우게 되면 그가 난처해질 수도 있고, 군중들이 예수님을 단지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지닌 분으로만 인식할 수도 있겠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벳새다에서 예수님이 맹인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신 것은 그곳 주민들에게 그의 권능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며 그가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다. 벳새다 사람들은 그 정도가 더 심해서 예수님의 권능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믿지 않았을뿐더러 주님을 배척하기까지 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으며”(막 6:5), “화 있을 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라고까지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런 불신앙의 사람들 앞에서 그의 권능을 행하고 싶지 않으셨던 예수님은 맹인을 데리고 마을을 벗어나 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신다.


예수께서 침으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의 입을 연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침에 병을 고치는 효능이 있다고 믿고 있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낫는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이 방법을 여러 번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예수께서 침을 뱉어 병자를 고치신 것에 무언가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 이들은 예수께서 권능을 행하실 때 사용하는 방법은 그의 선택이지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맹인의 눈에 손을 대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신 것은 의사가 개안수술을 받은 환자의 눈에서 붕대를 풀면서 “뭐가 좀 보입니까?”라 묻은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질문이었다. “물체를 볼 수 있느냐?”의 여부가 아닌 “무엇을 볼 수 있느냐?”를 물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 깊은 물음에 맹인은 “네, 사람들이 보이긴 합니다만 나무가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라 답한다. 이 말을 들으면 그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나무처럼 보인다는 대답은 그가 사람과 나무를 전에 본 적이 있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언제부터 보지 못하였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이 나무처럼 인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눈을 뜨기는 했어도 사물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체의 모든 기관들이 하나 같이 귀하지만 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올바로 보아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고, 제대로 판단해야 바르고 보람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밝은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그가 원하는 것만 보았기에 비참하게 살다 가버린 사람 중의 하나가 롯이다. 롯은 아버지 하란이 세상을 일찍 떠난 후부터 그를 친자식처럼 돌보아준 삼촌 아브라함이 서로의 양떼를 잘 돌보기 위해 갈라설 것을 제의하며 그가 갈 곳을 먼저 선택하라고 하자 요단강 동편을 택한다. 그 지역에 가축을 키우는데 필수조건인 물이 풍부하고 풀이 많이 자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롯이 본 것은 요단 동쪽에 펼쳐진 넓고 푸른 초원이었지 그 너머에 있는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창 13:13)

 

그 결과 롯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 그곳을 무사히 빠져 나오기는 하지만 두 딸과 근친상간의 부끄러운 죄를 범하게 되고, 그들의 자손이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했으며, 오늘 날까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중동위기의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구한말 흥선 대원군의 짧은 안목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가 실시한 쇄국정책은 조선 왕조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국권을 일본에게 박탈당하는 민족의 비극까지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못 본 척 하거나 필요한 것들만 골라서 보는 안목의 소유자들은 실패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와 같은 시야를 지닌 인물이 지도자가 되면 그가 속한 단체나 사회나 국가가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올바로 볼 수 없다면 차라리 보지 못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눈 뜬 맹인이 보기는 하되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두 번째로 안수하신다. 그때까지 예수께서 행하신 권능으로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단번에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맹인이 즉시 앞을 보게 되었고,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그 자리에서 듣고 말하게 되었으며, 중풍병자나 나병환자가 단번에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죽었던 회당장의 딸과 무덤에 누웠던 나사로까지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면서 살아났다. 그런데 어째서 벳새다 맹인에게는 예수님이 두 번씩이나 안수를 해야만 했을까? 그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인간도 하늘의 깊고 오묘한 진리를 단번에 다 깨달을 수는 없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영생을 누리며 사는 복된 신분으로 변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천국의 비밀을 낱낱이 알게 되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는 믿음과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지경에 이르려면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진리 가운데 매일매일 자라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 그 사람의 눈에 두 번째로 손을 대신 것은 보기는 보되 사람을 나무로 잘못 보는 그의 눈이 올바로 보고 바르게 깨닫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이셨다. 예수님의 권능의 손길이 그의 눈에 두 번째로 닫는 순간 그는 사물을 똑똑하고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 벳새다 맹인이 처음 가졌던 불완전한 시력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판단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아닌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바라보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나 처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우리가 갖고 싶은 것들만을 획득하려는 것이 우리의 시야일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안목을 지니고 있는 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도 없고, 따라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능력도 배양할 수 없다. 


시리아 왕이 선지자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그가 있는 도단 성에 포위하자, 이를 알게 된 사환이 혼비백산하여 엘리사에게 그 사실을 고한다. 그러나 엘리사의 기도로 눈이 열린 사환은 시리아 군보다 몇 배나 많은 불말과 불수레가 엘리사를 보호하는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한다(열하 6:14-17).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시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놀라운 계획과 축복을 볼 수 있게 된다.


두 번 안수를 받고 그 사람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자 예수님은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이르신다. 예수님은 어째서 그런 분부를 하셨을까? 마을로 가지 말라 하신 첫 번째 이유는 그의 권능을 믿지 않고, 그를 배척하는 벳새다 사람들에게 그가 행하신 기적을 알리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맹인이 벳새다의 암흑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예수님은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 누우신 아기 예수께 경배한 동방의 박사들에게 그들이 왔던 길 아닌 다른 길로 되돌아가게 하신 것처럼(마 2:1-11), 예수님은 눈 뜬 맹인이 어둠이 없는 광명한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무죄 방면 하시면서 예수께서 그녀에게 “가서 다시는 죄의 길을 가지 말라.”(요 8:11)하신 사실이 이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전 우리는 모두 벳새다의 맹인 같은 존재였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 그 암흑의 세계를 벗어나 광명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계는 아직도 희미하고 불안전하기만 하다. 우리의 불완전한 시력을 완전하게 해달라고 계속하여 기도해야 할 줄 안다.


나만을 보지 말고 이웃들을 보살피며,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며, 육안으로 볼 없는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런 눈을 가져야만 “현재의 고난”넘어 존재하는 “찬란한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며 힘차게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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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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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3
73회 광복절 기념식을 마치고

 
 
지난 8월 15일 오전 11시, 토론토 한인회관에서 제73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있었다. 이 뜻 깊은 기념식에 애국지사기념사업회(캐나다)가 세 가지 순서를 담당했다. 


첫째, 조국의 광복과 관련된 동영상 상연. 둘째, 애국지사들을 소재로 한 문예작품 공모 입상자들에 대한 시상. 셋째, 최근 출판기념회를 가진 ‘애국지사들의 이야기.2’를 동포사회에 소개하는 것 등이었다.


이 같은 순서들을 기념식순에 포함하여 기념식을 진행하니 광복절 기념식 전체가 퍽 짜임새 있게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참석하신 모든 분들의 표정에서 광복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아 흐뭇한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애국지사기념사업과 광복절 기념식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사업회는 1910년 경술국치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투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우리 후손들이 그 분들을 닮은 삶을 살아갈 자세를 확립하자는 취지로 발족된 단체다. 


한편 광복절 기념식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흘린 고귀한 순국의 피가 거름이 된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되새기는 행사다. 이와 같은 현실적 배경은 사업회가 기념식을 보다 엄숙하고 성대하게 거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광복절 기념행사가 의례적인 연중행사로만 끝나지 않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여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믿는다. 


삼일절이나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할 때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명절인 성탄절과 부활절을 기념하여 드리는 예배를 생각하곤 한다. 많은 교인들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마음 속 깊이 모셔드리고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아름답고 귀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오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려하던 성탄장식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일상생활이 시작되면 사람들의 가슴 속에 아기 예수가 누울 곳이 없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부활절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실히 믿는 성도들의 삶은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할 수밖에 없다. 현재 당하는 고난과 고통과 환난과 시련이 아무리 클지라도 장차 나타날 찬란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원히 사는 특권이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네.”를 소리 높여 부르며 죽음을 정복하는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절 예배 단상에 노였던 백합화가 치워지면서 현실적인 삶의 문제들로 인해 진통하며, 부활신앙까지 잃어버리는 성도들까지 생기게 된다.


  광복절 기념식에서 옷깃을 바로잡고 순국순열들을 위한 묵념을 드리고, 나라와 겨레를 살리기 위하여 가족과 자신의 인생을 버린 독립투사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슴에 새기며 그들처럼 살겠다는 결의를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결심이 작심삼일 되어 사라져버리고 광복의 의미와는 거리가 먼 자신만을 위한 삶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광복절이나 삼일절 기념식에서 느끼게 되는 역사의식이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명감 또는 책임감은 일상생활에서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지금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서 독립투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업을 접고 위기에 봉착한 조국의 안보와 침체된 경제를 부흥시키며 혼란된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에 나설 처지에 있지는 않다. 꼭 그렇게 해야만 애국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을 한탄하며 일제와 투쟁한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지니고 살려면 적어도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지금 잘못된 역사관과 국가관을 지닌 무리들에게 현혹 당하는 조국의 선량한 국민들의 귀와 눈을 열어주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언제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 국가의 안보는 날로 위태로워지고, 세계정상을 향해 발돋움 하던 경제성장은 멈추었고, 민심은 날마다 불안해지는 가운데 국론마저 양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며, 진실과 정의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부끄럽고 한심하고 안타까운 현상이 당당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슬픈 현실을 보면서도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며 침묵하거나. 뒷전에서 불만만 토로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일 뿐 아니라 민족적 죄악을 범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진실이란 포장지로 교묘하게 싸여진 상자 속에 들어있는 거짓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말해 줄 의무와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애국하는 길이요, 위태로운 지경에 놓인 조국을 살리는 길인 것이다.


광복의 의미를 살리며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민족애를 본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또 다른 일은 생활 속에서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업회에서 매년 실시하는 애국지사들에 관한 문예작품 공모에 응모한 작품 중 한 구절을 소개한다. 


“저는 지금 캐나다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많은 단골손님들이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그들의 요구에 맞추어 물건을 장만하고, 부지런하고 깔끔한 한국인의 특성을 심어주는 것 역시 애국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크고 거창한 일을 해야만 애국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열정적인 연설이나 시국강연을 통해 나라사랑을 외치는 것이 애국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착각일 뿐이다. ‘애국’이란 단어조차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그 뜻을 설명해 주고, 애국지사들이 흘린 피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들려주며, 이곳에서 태어난 2세들에게 태극기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가르쳐주며 그리는 법을 알려주는 것도 생활을 통한 애국행위인 것이다.


  이역 땅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동포들이 선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로 뭉치는 일 역시 훌륭한 애국심의 발로라 믿는다. 지난 선거에서 조성준, 조성훈 한인이 온타리오 주의원으로 당선된 것은 한민족의 캐나다 이민사에 새로운 장을 연 획기적이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조성훈 의원이 당선된 윌로우데일 선거구에서 한인 유권자의 30%만이 투표했다는 통계를 보고 쓸쓸해지는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30%나 투표에 참여했다.”며 긍정적으로 받아드릴 수도 있었지만 “동포투표율이 100%에 육박했다.”는 보도가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란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로서 살 수 있는 길은 많기만 한다. 이번 광복절 기념식을 통하여 동포들의 마음에 73년 전 해방을 맞이했을 때 3천만 동포들의 가슴마다 넘쳐 흘렸던 감격과 기쁨이 찾아 들고, 그 환희와 희망을 간직하고 모두가 작은 애국지사들이 되어 이 땅 위에 한민족의 얼을 심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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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3
예수님의 기적-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는 지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마 15:32-39)

 

오병이어의 기적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만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수록되어 있다. 이 사실은 두 기적은 같은 것인데 목격한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서 다소 다르게 기록한 것이라는 주석가들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 어렵게 만든다. 


두 기적이 같은 것이었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한 마태와 마가가 예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별도로 취급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동시에 자세히 살펴보면 두 기적은 떡 몇 덩어리로 수천 명을 먹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같은 것일 수는 없다는 근거가 한둘이 아니다. 


우선 때와 장소가 다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시기는 봄이다. 예수님이 오천이나 되는 사람들을 “푸른 잔디(grass) 위에 앉게 하셨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마 14:19; 막 6:39; 요 6:10). 그러나 광야에서 사천 명을 먹이실 때는 예수께서 무리를 “땅(ground)에 앉게 하셨다.”(마 15:35; 막 8:6)


이 같은 사실은 봄에 파랗게 돋아난 잔디가 뜨거운 여름 햇빛에 말라 땅이 들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두 기적은 봄과 여름에 별도로 행해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 장소도 다르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데가볼리에서 일어났다. 데가볼리는 갈릴리 호수 동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역으로 유대인들 보다는 이방인들이 더 많이 살았다. 예수께서 이곳에 가셔서 앉은뱅이, 절뚝발이, 맹인, 벙어리 등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놀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마 15:31)


유대인 아닌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다. 두 기적이 별개의 것이라는 근거는 또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남은 떡 부스러기를 담은 광주리는 유대인들이 음식을 담는데 사용하던 작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천 명을 먹이고 남은 조각들을 거둔 광주리는 이방인들이 쓰던 것으로 유대인들 것보다 엄청나게 큰 것이어서 사람까지도 들어갈 수 있었다. 다메석에서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로부터 바울을 탈출시킬 때 그를 태워 성 밑으로 내린 광주리가 바로 그것이었다.(행 9:25) 


이와 같이 오병이어의 기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칠병이삼어의 기적을 살펴봄에 있어 데가볼리 광야에 사천이나 되는 무리가 모여든 까닭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갈릴리 호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그네들도 소문을 통해 예수님에 관해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누구를 통해 예수님에 관해 들었을까이다. 


예수께서는 데가볼리 지방에 속하는 거라사인에 가셔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 있다(마 8:28-34; 막 1:1-20). 그때 거라사인 주민들은 예수님에게 그곳을 떠나가라고 요청했었다. 예수님의 권능을 보며 그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이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요청에 따라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실 때 병 고침을 받은 당사자는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집에 돌아가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겨 행하신 큰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라.”(막 5:19)고 분부하셨다. 


악귀로부터 해방된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가 직접 체험한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권능을 그 지방 사람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영원한 생수”와 “진정과 신령의 예배”에 관해 들은 사마리아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외친 것처럼 말이다.(요 4:1-30) 


이 같은 사실을 생각하면 예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거라사인의 귀신 들렸던 사람의 증언을 듣고 그곳에 모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추측이 아닐 수 없다. 


그 사실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귀중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만난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권능과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며, 얼마나 큰 축복과 은총을 내려주셨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들의 인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세상 끝까지 내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드는 믿는 자의 사명인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와는 달리 칠병이삼어의 기적 때는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야 한다고 나선 분은 예수님 자신이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이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얼마나 크면서도 자상하며, 예수님은 인간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잘 아실뿐 아니라 그 필요를 충족시켜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어떻게 저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라 했을 때 예수님은 참으로 가슴 아프셨을 것이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주께서 어떤 권능의 소유자 이신가를 직접 보고 들은 그들이었다. 몇 달 전에 빈들에서 예수께서 기도하고 떼어주시는 떡과 물고기를 오천의 무리에게 나누어준 것이 그들이었으며, 그들이 먹고 남은 떡 부스러기를 열두 광주리에 담은 것도 그들이었다. 


그런데 때와 장소는 다르지만 그때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이 배고픈 사람들을 그대로 보낼 수 없다고 하시는데 제자들이 허허벌판인 여기서 무슨 수로 저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냐고 반문한 것이다.


그를 실망시키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물으신다.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How many loaves do you have?) 이 짧은 질문 속에 숨겨진 의미는 깊고 크기만 하다. 무엇보다 이 물음을 통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을 꾸짖고 계시다. 


“지난 번 오천의 무리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 너희들은 어린 소년이 갖고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게 가져오지 않았느냐? 그때 내가 그것으로 어떤 권능을 보였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여기서는 저 무리를 먹일 방법이 없다고 내게 말하는 것이냐?”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알고 싶으셨던 것은 그들이 떡을 몇 개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었다. 예수께서 원하신 것은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을 가지고 오라는 명령이요, 그러면 그것으로 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떡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예수님은 그의 일을 하심에 있어 그들이 가진 것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의 권능을 믿는 믿음을 지니고 있기를 원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떡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있다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것들을 가져오게 한 후, 기도하시고 떡과 생선을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신다. 일곱 개의 떡 덩어리와 두어 마리의 작은 물고기가 예수님에 의해 사천 명이 만족하게 먹고도 남은 조각이 큰 광주리 일곱을 채우는 잔칫집 음식으로 변한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사천 명의 주린 배를 채우신 기적은 행해진 때와 장소는 다르지만 그 과정은 동일하다. 뿐만 아니라 이들 두 기적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창조의 능력 또한 같은 것이다.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우리가 특별히 기억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어야겠다고 말한 분은 제자들 아닌 예수님이셨다는 사실이다. 배고픈 사람들을 그대로 보낼 수 없으셨던 예수님은 오늘 날에도 우리들이 힘들고 어려운 하루하루를 살며, 지치고 괴로워서 쓰러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을 파탄시킬 일이 앞을 가로 막을 때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더불어 그 문제를 예수님께 아뢰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크신 자비와 권능의 손길이 우리를 수렁 속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가 떡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느냐?”하신 질문이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각종 인생의 홍해 앞에서 두려워 떠는 우리들에게 묻고 계신다. “너희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든 그것들을 들고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어주시며, 우리의 잔을 채워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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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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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예수님의 기적-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막 7:31-37)

 

 

마가복음에만 수록된 예수께서 데가볼리 지방에서 귀 먹고 말 더듬은 사람을 고치신 기적은 주께서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가나인 여인의 딸에게서 악귀를 쫓아내신 후 갈릴리로 돌아와서 일어난 일이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신”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어째서 그런 경로를 통해 돌아오셨을까 하는 점이다. 두로는 갈릴리에서 북으로 50킬로미터 지점에 있었고, 거기서 30킬로미터 더 북쪽에 시돈이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두로에서 시돈까지 가실 필요 없이 바로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셨으면 갈릴리까지 빨리 오실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로에서 30키로 북쪽에 있는 시돈까지 가셨다. 남쪽으로 다시 내려와 데가볼리를 지나 갈릴리까지 오신 것이다. 50 킬로미터만 남으로 내려오면 될 것을 북으로 30 킬로미터를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셨으니 50 킬로미터면 될 여행길이 110 킬로미터로 늘어난 것이다. 


특별히 시돈에서 하실 일이 있었다면 이해가 되지만 그렇지도 않았기에 예수께서 왜 먼 길을 택하여 돌아오셨는지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까지 가신 이유 중의 하나는 그를 적대시하며 괴롭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그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삼아 로마정권에 대항하려는 민족주의자들을 떠나 조용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경에서 하신 일은 귀신 들린 가나인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것이었다.


그가 전파하는 천국복음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 중대한 목적을 달성하신 후 예수께서 시돈으로 올라가신 것은 사람들로부터 떠나 그의 앞에 놓인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며, 제자들에게도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을 주지시키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특별히 계획하신 이 여행은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것이었다. 어느 주석가의 말처럼 6개월까지는 걸리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몇 달은 사람들에게 시달림 받지 않고 제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에게 주어진 사명과 하늘의 진리를 가르치신 것으로 생각된다.


마가가 기록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마 8:31)라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이 기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은 깊은 영적 교통의 시간을 가졌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 있는 여행의 종착지인 갈릴리 호수에 도달하신 예수님은 데가볼리 지방으로 가신다. 이 지역은 열 개의 희랍 도시들이 산재한 곳으로 유대인들도 살았지만 많은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예수께서 이곳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데리고 와서 그에게 안수하여 달라고 간청한다. 그들이 듣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 시대가 오면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라(사 35:5)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반벙어리를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한 사실로부터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들은 이웃을 보살피며 도와주기 원하는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간절한 청을 들은 예수님은 그 반벙어리를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신다. 세상에는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 하나하나를 각기 형편과 처지에 맞추어 대해 주시며, 그들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온유하고 자상한 분이 예수님 이심을 깨닫게 해주는 장면이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면 보지 못하는 것보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더 힘든 법이다. 눈에 보이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귀 먹고, 말 못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닫힌 그의 귀와 말문을 열게 해주신 것이다.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지니시고 하늘보좌에 앉아계시던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 분이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낮고 천한 인간들과 함께 지내시며, 그들의 무거운 짐을 져주실 뿐더러 그들을 괴롭히는 온갖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데가볼리의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고쳐주시는 모습을 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치유하기 위해 그의 두 귀에 손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다. 그 당시 사람들은 침 속에 독소를 제거하며 불치의 병을 낳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믿었다. 예수님이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실 때도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한 것도 이 같은 연유에서다. (요 9:6-7)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 하신 것은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드린 기도는 단 한 문장으로서 “에바다”였는데, 그것은 아람어로서 “열리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농민들에게는 그들이 말하는 아람어를 사용하셨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달리다굼”(소녀여, 일어나라)하신 것도 아람어였다.


예수께서 “열리라.” 말씀하시자 닫혔던 귀가 열리고, 굳었던 혀가 풀리면서 귀머거리와 반벙어리였던 사람이 듣고, 말하는 정상인이 되었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하신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당부하신다. 예수께서 그런 분부를 하신 까닭은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 아닌 “신유의 은사를 받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될 것을 염려해서였다.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권능을 널리 널리 퍼뜨린다.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설교는 미사어구를 동원한 유식하고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하게 “예수 믿는 사람”의 향기를 풍기며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이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빨리 그리고 멀리 전달되어 방황하는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귀머거리와 반벙어리를 고치시자 사람들은 “굉장한 일이다. 못 듣는 사람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말하게 하다니!“라며 감탄한다. 이 같은 그들의 반응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불치의 병으로 신음하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으며,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한 번도 예수님 앞에 머리 숙이지 않았음은 물론 예수님이 놀라운 권능을 지니셨음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수께서 귀신의 힘을 빌려 병을 고친다며 사탄의 하수인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회당에 들어와 앉아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범법자로 몰아 고발하려고까지 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 이처럼 예수님을 배척하자 예수께서는 복음을 이방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두로와 시돈까지 가셨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권능 앞에 무릎 꿇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하신 일에 대해 감탄하며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라 한 말 속에는 깊은 진리가 포함되어있다. 정작 말을 하는 그네들은 그 의미를 몰랐겠지만 “그가 모든 일을 잘하였도다.”란 말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31)하신 것과 같은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불완전한 사람을 “완전한 인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무”에서 “유”를 창출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보시기에 좋게”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완전한 조화와 질서 가운데 창조된 세상을 혼란하고 무질서하며 난잡한 곳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죄로 인해 마땅히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해야만 하는 말을 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우리들의 귀와 입을 열어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본래의 자태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굳게 닫힌 우리의 마음과 눈과 귀와 입을 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며 천성을 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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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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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0
예수님의 기적-게네사렛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다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느니라.”(마 14: 34-36)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느니라.”(막 6:53-56)


예수께서 게네사렛 자방에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실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는 더 간단하게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옷자락을 만진 사람들은 모두 나았다.”라고 만 적혀있다. 때문에 게네사렛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권능은 중요하지도 않고, 특별한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게네사렛에서 일어난 일은 예수께서 행하신 다른 모든 기적들처럼 그가 누구신가를 나타내심과 동시에 인간을 향한 그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짧게 기록된 이 기적 속에는 다른 기적들로부터는 찾아볼 수 없는 심오한 의미와 중대한 인생의 교훈까지 담겨있다. 


게네사렛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지명으로서 갈릴리 호수 서북편에 위치한 평원지대다. 넓지는 않지만 땅이 비옥하고 천연조건도 좋아서 여러 종류의 과일들 특히 포도와 무화과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보통 한 지역에서 종류가 다른 과일나무들을 같이 재배하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 이 곳에서는 갖가지 과일들을 동시에 수확할 수 있는 자연적인 특성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점을 지적하면서 요세푸스는 “게네사렛은 여러 과일들과 곡식을 재배하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두루 갖춘 축복받은 지역”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게네사렛 지방에는 그 면적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며, 갈릴리 지역의 다른 곳들에 비해 서민들이 살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예수께서 그 곳에 도착하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에워싼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까닭이 다른 곳에서의 경우와 조금 다르다. 예수님이 그 땅에 발을 디디시자 그들을 알아보거나, 그에 관해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셨다고 각처에 다니며 알려서 각종 불치의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온 것이다.


향기로운 꽃나무에 꽃이 피면 원근각처에서 벌과 나비들이 날아들 듯이 사랑과 권능의 예수님이 그곳에 오셨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 지방 구석구석에서 신음하던 병자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든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의 향기가 풍겨나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아름다운 환경에 둘러 쌓였으며, 비옥한 토양에서 풍족한 곡식과 과일들을 거둘 수 있는 게네사렛 땅에도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행복과 평안은 풍요로운 물질과 평화롭고 안정된 외적 환경에서만 오는 것이 아닌 것임을 말해준다.


안락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구비된 가운데 부족함 없이 살아도 무서운 병마로부터 해방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마음의 걱정과 근심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게네사렛 각처에서 고통 받던 환자들을 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게네사렛에서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기만 하셨지, 그들에게 가르치시거나 설교를 하지는 않으셨다. 견디기 힘든 육신의 고통과 심한 정신적 갈등을 지낸 그들에게 말씀 아닌 행동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일깨워주시며, 그의 사랑을 깨닫도록 해주신 것이다. 가르침과 말씀선포의 중요성은 크기만 하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말씀만의 증거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듣는 이들을 실망시킬 뿐이다. 


성수주일을 강조하면서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주일에 가게 문을 닫으면 결국은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축복을 받는다고 열정적으로 설교하던 분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자신은 주일에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그의 부인은 가게를 열고 일을 했다. 얼마 못가 그가 사역하던 교회도, 운영하던 가게도 문을 닫고 만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전도하는 이들의 열성은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들의 삶 속엔 “예수 믿는 사람의 향내”가 풍겨나지 않는다면 그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며, 주위의 비난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시는 대신 그들의 병을 치유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며 그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게 해주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방법이 다른 곳에서와는 좀 달랐다. 병자들이 간구하는 대로 그의 옷자락을 만지도록 허락하셔서 그들의 병을 낫게 해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마지막 설교를 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은 물론 나보다 큰일도 할 수 있다.”(요 14:12)고 말씀하셨다. 그 후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이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자 사람들이 병든 자들을 거리에 메고 나와 침대와 담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랐다.(행 5:12)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행한 이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어떤 병이라도 퇴치되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님에 의해 나음을 입는 게네사렛의 숱한 병자들이 보인 반응에 대해 아무 것도 성경에 기록된 것이 없다. 열병에 시달리던 베드로 장모는 병이 낫자 즉시로 그녀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고(마 8:14-15), 18년 간 허리를 펴지 못하던 여인도 예수님의 안수를 받고 정상인이 되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눅 13:12-13) 


하지만 게네사렛에서는 병이 나은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이다.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자 더 이상 예수님에게서 얻을 것이 없다고 여겨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이 같이 서글픈 일은 오늘날 매일매일 우리들 주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성취되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산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공통된 기도제목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것이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들어주시는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들을 심한 박해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대신 그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옵소서.”(행 4:29)라고 간구한 것처럼 말이다. 


기도의 초점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아닌 우리가 원하는 것”에 맞추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를 위한 기도가 성취되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밀어내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밀려나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고 슬픈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 없는 우리들의 삶은 어떤 결실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인으로서의 의무는 행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는 것도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이다. 어떤 면으로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에 감사와 헌신으로 보답하지 않는 것은 저속하고 부끄러운 죄악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범하는 죄가 “필요한 때만 하나님을 찾는 기회주의적인 행위”임을 인식한다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자명해진다.


우리들을 태운 인생의 뗏목의 널판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면 겁에 질려 울부짖지 말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의 몸에 손만 대면 나의 인생은 새로워진다는 믿음을 지니고 예수님께 다가왔던 혈루증 앓던 여인과 같은 자세로 말이다. 


예수께서 사랑과 권능의 손길을 내밀어 침몰하는 우리들이 탄 뗏목을 붙잡아 주시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항로를 정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살아야 할 인생을 살 수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 인생의 항해를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사도 바울이 들려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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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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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예수님의 기적-18년간 불구이던 여인을 고치시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가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눅 13:10-21)

 

 

회당은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자주 찾던 곳이다. 별다른 제재 없이 가셔서 가르치시며,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예수님은 회당 출입을 자제하셨고, 여기 기록된 것을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회당에서의 사역은 복음서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방문이 된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 중에 18년 동안 귀신 들려 허리가 꼬부라져 전혀 펴지 못하는 여인이 있었다. 


불구자 치고 인간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사회에서 격리 당하거나 소외당하며 살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여인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으리라. 허리를 펴지 못하여 정상인의 절반 정도 키밖에 되지 못하는 외형을 지닌 것은 여자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육신의 고통과 더불어 그 보다 몇 배나 심한 심적 아픔을 지닌 채 18년 이란 세월을 지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여인은 낙망하지 않고 언젠가는 그녀의 인생에도 광명한 새날이 밝아올 것을 믿으며 살아왔다고 생각된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회당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녀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열심히 회당에 나온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가 악령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게 해주실 것을 확신한 까닭이다. 


그 여인이 그런 믿음의 소유자였음은 예수께서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이라 하신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믿음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5:4-5)고 외쳤다. 형식적이며 가식적인 예배를 드리면서 제물을 바치지 말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해야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며 보람된 삶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전한 것이다.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딸”이라 인정한 이 여인은 비록 사탄에게 사로잡혀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지만 그녀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빛과 소망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리란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사람들의 멸시와 냉대의 눈초리를 마다하고 회당에 나와 하나님의 손길이 그녀에게 미칠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회당에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보기흉한 몰골을 지닌 장애인이 왜 집에 있지 않고 회당에 나왔느냐고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녀 옆에 앉기를 꺼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상에서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그녀를 보는 순간 그녀를 부르신다. 그녀가 어떤 인생행로를 걸어왔는지를 알았음은 물론 그녀의 마음에 간직한 간절한 소망까지도 들여다보시고, 그녀를 부르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에게 나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품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까닭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는 순간처럼 기쁘고, 감격스럽고, 의미 있는 시간은 없다. 예수님의 부름에 응하여 그 앞에 엎드리는 사람마다 변화하여 새로운 인생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해를 분기점으로 “주전”과 “주후”로 나누어진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 역사의 흐름은 그 방향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이후에 역사의 흐름이 달라진 까닭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역사가 형성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애벌레가 탈바꿈하여 화려한 나비가 되듯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하며, 이처럼 주안에서 피조물 된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는 것이다.


여자로서 결정적인 신체적 결함을 지녔기에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살 수 없었던 여인을 부르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였다. 그런 후 그녀에게 안수하시자 그녀를 둘러쌓던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햇빛 찬란한 세상이 그녀 앞에 펼쳐진다. 꼬부라져 도무지 펼 수 없었던 허리가 펴지면서 그녀가 완전히 정상적인 여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눈물과 한숨 속에 평생을 어둠 가운데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한 귀중한 생명이 삶의 가치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귀한 역사가 일어난 후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그녀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이나 그녀의 곁에서 위로하고 격려해준 배우자나 가족들이나 친지들에게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 놀라운 사랑의 권능을 행사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를 찬양한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회당장은 그 여인이 병마로부터 해방되자 분노하여 “일할 수 있는 날이 6일이나 있는데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한다. 예수님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회중을 향해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것이 안식일을 범한 행위라며 억지를 부린 것을 보면 회당장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 안 했을지도 모른다. 


회당장의 말을 듣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가 안식일에 외양간에 있는 소나 나귀를 풀어 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어있던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라도 매인 것에서 풀어줘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이다. 예수께서는 전에도 그가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것을 문제 삼는 이들에게 “안식일에 너희들의 양이나 소가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그때 그들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안식일이라도 양이나 소가 구덩이에 빠지면 구해내는 것은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시며 안식일에 외양간에 매여 있는 소를 풀어내어 물을 먹일 수 있다면 오랜 세월 사탄의 사슬에 묶여 고통 당하던 아브라함의 딸을 사탄의 사슬로부터 풀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예수님이 말씀에 회당장과 그를 지시하는 사람들은 낯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철두철미 형식과 외형과 격식에 기초를 둔 사회조직과 체제에 억매여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런 사회체제위에 쌓아올린 그들의 권위와 기득권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예수님을 경계하며 미워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제거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선한 일”을 안식일을 범하는 죄로 단정하여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시도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도나 규율 보다는 인간을 중요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안식일이라도 하나님의 자비와 권능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돌보셨다. 따라서 18년이란 긴 세월을 불구의 몸으로 극심한 고통과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에 힙 입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회당에 나온 여인을 보는 순간 예수님은 그녀를 불렀고, 그녀에게 안수함으로 그녀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셨다.


우리들 중 그 여자처럼 허리가 꼬부라진 사람은 별로 없을지 몰라도 많은 이들의 마음이 꼬여지고 삐뚤어져 있다. 예수께서 고쳐주신 그 여자보다 더 중하고 심각한 병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무서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허다한 사실은 예수님의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녀보다 더 갈급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야 할 줄 안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시며 사탄에게 지배 받는 우리의 병든 마음을 고쳐주실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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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예수님의 기적-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다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하니, 바리새인들이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하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22-32)

 

 

여기 기록된 예수님이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기적은 마태가 그의 복음서 9장 32절부터 34절에서 들려주는 귀신 들린 벙어리를 낮게 해주신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두 기적을 보는 목격자들의 생각은 같아 보이면서도 상당히 다르다. 특히 예수님이 그들을 고쳐주신 후 하신 말씀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마태는 이 기적을 예수께서 “사람들이 데리고 온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다.”고 아주 간단하게 들려주고 있다. 그 까닭은 그는 이 기적 자체에 초점을 맞추려 한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벙어리이며, 맹인이던 사람이 말하고 보게 되자 모두들 놀라지만 전에 벙어리의 입이 열렸을 때 나타난 반응과는(9:33) 다른 점이 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기적”이라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했지만 이번에는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겠느냐?”며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망언까지 뱉어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최대의 모독이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예수께서 가르치시며 선포하신 것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들을 전해 들었으며, 직접 목격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사렛 목수 출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소망인 메시아로 받아드리거나, 그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이 사탄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천인공노할 논리를 펼친 것이다. 


그 같은 그들의 기상천외의 주장은 지혜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예수님을 대항하기 위한 악의에 찬 모함이나 궤변으로만 간주하여 넘길 수 없는 근본적인 죄악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탄의 하수인으로 취급한 행위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정면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는 완악하고, 강퍅한 그들이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 것인가를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그의 능력이 사탄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사탄의 왕국은 심한 내분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사탄의 왕인 바알세불이 예수님에게 능력을 부여하여 그의 부하인 귀신들을 쫓아냈다면 그 나라는 망하기 직전에 이르렀다는 것이 예수님의 지적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예수께서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낸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모순된 자가당착적인 것인가를 지적하신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에는 악령을 몰아내고, 저주에 묶인 사람들을 풀어주는 우리나라의 무당과 같은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솔로몬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귀신을 축출하는 비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요세푸스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악령을 몰아내어 영육 간에 정상적인 인간의 기능을 상실한 사람들이 건전한 몸과 마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능력을 부여했다고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유대인들 중에 귀신을 몰아내는 사람들이 있었음은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예수님은 “내가 사탄의 동업자가 되어 귀신을 몰아냈다면 너희 조상들도 사탄과 연합하여 악령을 쫓아내었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그들이 침묵하자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그들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친 것이 악령의 힘 아닌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면 악의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동트기 시작했음을 일러주신 것이다.


 그가 하신 말씀의 의미를 그들이 확실히 깨닫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려면 그 강자를 결박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신다. 이는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를 끝낸 그에게 사탄이 찾아와 인류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시려는 그의 발길을 잡으려 시도했을 때 그를 물리치고 “사탄아 물러가라.” 호통하신 순간에 사탄은 이미 결박 당했음을 상기시키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 후 계속하여 예수님에게 다가와 그를 괴롭히는 악의 세력은 사탄의 잔당일 뿐인 것이다.


그는 사탄의 힘 아닌 하나님의 권능으로 일하심을 밝히신 후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이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말씀하신다. 그를 따르려면 중립지대에 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세상에는 중간지점에 서는 사람들이 많기만 하다. 이쪽저쪽을 넘보며 상황을 살피다 유리한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현명한 처세술이요, 삶의 지혜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을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좁은 길과 넓은 길”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세상”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믿는 자의 권리이며 의무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그를 따르는 자들의 유일한 선택임을 일러주신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으니 그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을 거역하는 죄악이며, 어째서 그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은 주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내린 성령과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성도들이 세상 끝까지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성령의 기능은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에게 전달하며, 그것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권위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심은 물론 그것을 말하고, 가르치신 것을 행하셨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들에게 알려주시며, 그것을 말하고, 행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오묘한 비밀을 깨달아 믿기 시작하는 백성들과는 달리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도, 깨닫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를 배척하며 사탄과 연합한 악의 세력으로까지 몰아부친 것이다. 성령을 거역한 죄악이었다. 


성령에 대항한 죄는 어째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해 성령의 뜻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구원의 필수적 요건인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옳고 선한 것을 따르며 사랑할 줄 모르고, 잘못되고 악한 것을 사랑하며 추구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사탄의 세력으로까지 단정하는 무서운 죄악을 범한 바리새인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도 몰랐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짓고도 회개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의 대상에서 스스로를 배제시켰다.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모두 죄성을 지니고 태어났기에 그 누구도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죄의 값인 사망에서 면죄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린 영원한 낙원을 되찾을 수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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