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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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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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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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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5
예수님의 비유-씨 뿌리는 자의 비유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려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음으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하시니라.”(마 13: 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께서 들려주신 비유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 모두가 이 말씀 속에 감추어진 진리와 교훈을 다 이해하여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간단하고 쉽게 쓰여졌기에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기는 하지만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의미를 깨달았을 정도로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나타내기 원하신 진리는 중대하고도 심오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천국의 비밀에 관한 첫 번째인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해주는 가를 올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이것을 들려주신 까닭부터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 계신 것이 알려지자 큰 무리가 몰려든다. 그러자 예수님은 해변에 있는 배 위에 올라 앉으신다. 배 위에 앉으신 예수님 앞 해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운집했고, 그들 뒤에는 팔레스타인의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때마침 농부 한 명이 씨를 뿌리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 유대지방의 농부들은 긴 밭이랑을 따라 걸어가며 손으로 씨를 뿌리거나 씨앗을 가득 담은 자루 밑에 작은 구멍을 내어 어깨에 메고 가며 씨가 밭에 떨어지도록 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 장면을 볼 수 있는 상황을 만든 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이 그들 눈앞에 펼쳐진 세상과 다가오는 하늘나라를 연결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몰려든 군중들이 그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면서 천국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농부가 땀 흘리며 정성 들여 뿌리는 씨앗들이 다 뿌리내리고 자라나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말씀을 듣는 사람 전부가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서 천국으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길가에 떨어진 씨들은 뿌리조차 내리기 전에 새들의 먹이가 되어버리듯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사탄이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빼앗아가 버린다. 교회에 다녀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지 못하고 귀로만 듣는 듯 마는 등 하거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의도가 전혀 없는 성도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흙이 깊지 않은 돌밭에 떨어진 씨들은 싹이 나오기는 하나 뿌리를 내릴 수 없어서 해가 뜨면 말라버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마음이 즐겁고 뜨거워져서 앞으로는 보람된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지만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전처럼 세상에 동화되는 성도들이 싹은 나지만 결실을 맺기는커녕 자라나지도 못하고 말라버리는 돌밭에 뿌려진 씨앗에 견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들은 싹트고 자라나기 시작하지만 주위의 억센 가시떨기들로 인해 열매를 맺기까지 성장할 수가 없다. 가시밭에 뿌리내린 씨앗 같은 사람들은 주일마다 예배를 들이며, 교회를 위한 봉사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지만 기도생활과 말씀묵상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는 신앙생활과는 먼 거리에 있는 성도들이다. 세상을 향한 미련과 관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예수님은 이런 성도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이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에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말씀하셨고(마 13:22), 사도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들려주고 있다.


좋은 땅에 떨어져 땅 속 깊이 뿌리 내리는 씨앗으로부터만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 드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늘 묵상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만이 옥토에 떨어져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거두는 씨앗처럼 탐스러운 인생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보람되고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다.


이처럼 이 비유는 “씨를 뿌리는 사람”아닌 “씨가 뿌려지는 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이 비유가 복음증거 자체보다 복음을 어떻게 받아드리느냐에 더 중점을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복음의 근원은 예수님이시고, 복음의 씨를 뿌리시는 분도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뿌려지는 복음의 씨의 품질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떨어지는 토양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은 엄청나게 다르다. 


떨어지는 즉시 새들에게 먹혀버리기도 하고, 싹이 나기는 하나 떠오르는 햇빛에 말라버리기도 하며, 조금 자라나 환경에 따라 더 이상 크지 못하고 죽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좋은 땅에 떨어지는 씨앗만이 풍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받아드린 복음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인생을 살아가려면 옥토와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이 옥토와 같은 것인가? 옥토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마 13:23), “말씀을 받아들여”(막 4:20), “말씀대로 사는”(눅 8:15)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길가에 떨어진 씨나, 돌밭에 뿌려진 씨, 또는 가시덤불 속에 자리잡은 씨를 닮은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다. 옥토 같은 마음은 노력한다고 형성되는 것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것처럼 말이다.(엡 2:8)


하나님의 은혜로 옥토가 된 마음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이들은 어떤 인생의 풍랑이 몰아쳐도 견디어 낼 뿐 아니라 많은 주위 사람들이 정의롭고 선한 인생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게 인도하는 역할을 잘 감당해 낼 수 있다. 


수십 년 전에 받은 군사훈련 중에 생환훈련(Survival Training)이란 것이 있었다. 적진을 벗어나 아군진지로 귀환하는 법을 익히는 이 훈련을 받으며 캄캄한 밤 깊은 산 속에서 발휘하는 반딧불의 위력이 얼마나 큰 가를 체험할 수 있었다. 작고 희미하기 짝이 없는 반딧불이 한밤중 본대를 찾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칠흑 같은 밤을 대낮처럼 밝히는 조명탄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옥토 같은 마음에 뿌려진 복음의 씨가 싹트고 자라나 열매 맺은 성도들의 불빛이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광명한 빛으로 물들일 수 있음은 명확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농부가 뿌리는 씨 중 25%만이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이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이 사실 속에는 두 가지 귀중한 진리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복음전선에서 싸우는 전도자들은 그들이 뿌리는 복음의 씨가 전부 싹트고 자라나 열매 맺지 못한다고 좌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옥토 같은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되기도 하지만 전리의 말씀을 외면하거나 배척하며 죄악의 길을 계속하여 걸어가는 이들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밝혀졌듯이 뿌려진 씨앗의 사분의 일만이 결실을 맺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신 예수께서 산 위에서 하신 설교도 받아드린 사람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며 외면하고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등장한다.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미지의 땅 깊숙이 들어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외쳐대다 결실을 거두지 못하면 “내 할 일은 다 했다.”며 미련 없이 복음증거의 사역을 중단해도 좋은가가 그것이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네 명 중 하나만이 복음을 받아드렸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깨달아야 할 또 하나의 교훈이다. 


선포되는 복음에 대한 반응이 아무리 미약하고 부정적이더라도 복음증거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비유가 들려주는 핵심 요소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하여 그의 뜻을 백성들에게 제대로 전하지 않는 선지자들에게 그 책임을 엄하게 물으시겠다고 경고하셨다(켈 33;1-6).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달리며 모든 민족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라.” 분부하시고 그들 곁을 떠나셨다. 


그로부터 2,0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온 세상이 복음화되지는 않았지만 세계인구의 35% 이상이 믿는 자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이는 “귀 있는 자”가 되어 옥토 같은 마음에 복음을 받아드린 열두 명의 결사대원들이 죽기까지 생명의 복음을 외쳐댄 결과인 것이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우리 속에 심어져서 싹트고 자라 맺은 열매를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주며 하늘나라를 향해 전진하는 복음전파의 용장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훈련시킨 열두 명이 수행한 인류구원의 사명을 우리를 통해 완성하기를 원하시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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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4
예수님의 비유-생베 조각은 낡은 옷에 붙이지 않는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존되느니라.”(마 9: 14-17)

 

 

예수님은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목공소에서 일하시며 인류구원의 사역을 준비한 분이시다. 그가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교육학을 공부했다는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육자였다. 때와 장소와 대상에 따라 가장 적절한 방법과 내용으로 하늘나라의 진리를 선포하시며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설교를 하시거나 가르치시면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다. 비유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사용하셔서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익숙한 구체적 사실이나 사물에 비교하며 이해시키신 것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복음을 배척하며 복음증거를 방해하는 무리들에게는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천국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기도 하셨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그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 묻자 예수께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다.”(마 13:11)고 들려주신 것으로부터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생베 조각은 새 옷에 붙이지 아니하며,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넣지 않는다는 비유의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우리는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어째서 금식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답변하시면서 들려주신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와 금식과 구제를 그들이 행하여야 할 세 가지 의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회당이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큰 길 가에서 기도했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금식했으며, 구제도 회장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불러 모은 후에 하곤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듣기 위한 의도적이고 위선적인 행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은밀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구제하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의 가식적인 금식을 의로운 것으로 믿었기에 “우리들은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예수님에게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어째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책임을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합류했냐는 점이다. 


예수님의 전령인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그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한 하나님의 종이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간다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도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기쁨으로 충만하다며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니라.”며 조용히 사라져간 세례 요한이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스승을 따르던 무리가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을 보며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광야에서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으며 지낸 요한처럼 그들도 금식에 익숙할뿐더러 당시 바리새인들이 하던 것 같이 일주에 두 번씩 금식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 같이 정기적으로 금식하지 않으니 그 까닭을 알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유를 알고 싶어서 보다는 책임을 묻는 것 같은 그들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대답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신랑은 그 자신을 가리키며, 혼인집 손님들은 그의 제자들을 의미한다.


그때 유대사회에서는 혼인잔치처럼 즐거운 행사는 없었다. 신랑 신부의 가족들과 친척들은 물론 친지들이 모두 모여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며, 며칠을 먹고 마시며 즐거워한 것이 당시 유대의 풍습이었다. 


신랑과 신부도 식이 끝나면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머물며 축하객들을 접대하며 함께 즐겼다. 이처럼 당사자들은 물론 온 동네가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한 행사가 혼인이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신랑인 그와 함께 있는 기쁨에 취해 있는데 슬퍼하며 금식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떠난 후에는 그의 제자들도 슬픔 속에 금식하며 고난 받을 것 임도 암시해 주신다. 


그의 제자들이 그네들처럼 금식하지 않는 것은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일러주신 후 예수님은 “생베 조각은 낡은 옷에 붙이지 아니하며,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이 두 비유는 낡은 율법주의와 유대교에 젖어 예수님의 복음을 외면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책망이며 경고였다. 


새 천 조각으로 낡은 옷을 기우면 그 옷이 젖게 될 때 새로 댄 천이 수축되면서 낡은 천을 잡아당겨 옷 자체가 찢어지게 된다. 이 비유에 명시 된 “생베 조각”은 예수님의 새로운 교훈과 가르침을 의미하고, “낡은 옷”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율법을 가리킨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삶의 지침이기 때문에 율법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의 신념이요 믿음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 엄격한 율법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입고 있는 그 낡고 잘못 지어진 율법의 옷을 벗기고 복음의 진리로 만들어진 새 옷을 입히기 위해 오신 분이다. 탕자가 제 정신이 들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 입혔다. 죄로 얼룩진 낡은 옷을 입고서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올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이 가장 의롭고 옳다고 자신만만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했다. 그들이 입은 낡은 율법의 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이 주시는 천국의 제복 입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처럼 무지하고 오만한 그들에게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옷이 못 입게 되어버린다.”고 일러주신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심으로 율법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다.


옛날에는 병이 없었기에 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포도주를 담아 보관했다. 그런데 포도주가 발효되고 숙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스로 팽창되는 가죽부대는 원상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늘어 날대로 늘어난 가죽부대는 새 포도주에서 생기는 가스로 터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생겨나는 새로운 사상과 수많은 변화를 받아드리려면 우리 생각의 틀부터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를 이끌어 가는 창조적 소수가 자신의 성공철학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는 나머지 새로운 도전에 과거의 방식으로만 대응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여 역사진보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간다.”라 말한 바 있다.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보는 이 역사학자의 말은 믿는 자들이 예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라 하신 깊은 뜻을 이해하고 깨달아 삶 속에서 올바로 적용하는데 큰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


교회에서 오르간이나 피아노 이외의 악기가 연주되기 힘들었고,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하면 바람직한 성도의 자세가 아니라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이 “새 부대”로 변화하여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고, 상한 심령들을 치유하며,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열심히 모여 복음성가를 부르며 주안의 기쁨을 누리며 믿음이 성장하는 학생들에게 엄숙하고 경건해야 할 교회의 분위기를 어지럽힌다며 교회 출입을 금지하다 문을 닫고만 교회도 있었다. 낡은 부대가 터져버린 서글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시는 역사적이며 시대적인 사명으로 받아드려 수행해야 할 줄 믿는다. 온갖 종류의 새 술이 쏟아져 나와 믿는 자들의 믿음을 흔들며, 국가의 번영과 발전을 저해하며 그 운명까지도 위협하고 있는 때가 지금이니까 말이다. 예수님 안에서 기쁨과 소망을 지니고 굳건한 믿음 위에 서서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우리들 되어야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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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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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8
예수님의 기적-153마리의 고기를 잡게 하시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니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 21:1-14)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체포 당하신 예수님은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신 후 신성모독죄, 민중선동죄,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어 로마총독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된다. 빌라도는 심문을 하면서 예수님은 고소자들이 주장하는 어떤 범법도 저지르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민중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다. 


무죄이면서도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은 6시간 동안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대의 모욕과 고통을 당하신 후 “다 이루었다.”고 그에게 주어진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셨음을 선포하신다. 그런 후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 기도하시고 운명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신 것이 아니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다시 사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세상에 머무시면서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셨다. 그 중 한 번이 베드로, 도마, 나다니엘, 요한과 야고보 등 일곱 제자들이 디베랴 호수에 고기 잡으러 갔을 때였다. 그 날 그들이 어째서 그곳에 갔는가에 대하여 성경이 말해주는 바는 없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부터 몇 가지 이유를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우선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어수선하고 혼란해진 분위기에 시달리노라 피곤해진 그들이 갈릴리 호수(디베랴는 갈릴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에 나가 심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예수께서 장사된 지 삼일 후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천사가 “예수께서 살아나셔서 갈릴리로 가셨으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하라.”(막 16:6-7)한 말을 들은 그들이기에 그리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유보다는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제자들이 그들의 생활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호수를 찾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여겨진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고기 잡으러 가겠다.”는 베드로를 따라 다른 여섯의 제자들도 디베랴 호수로 가서 배에 올랐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그들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새벽이 되도록 허탕을 친 그들이 피곤에 지쳐 있을 때 예수께서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고기를 좀 잡았느냐?” 물으신다.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이신 줄도 모르고 “하나도 잡지 못했습니다.”라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 말씀하신다. 밤새껏 허탕만 친 후였기에 그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하라는 대로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졌다. 그랬더니 그물 가득히 고기들이 걸려들어 펄떡거렸다. 이를 본 요한이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자 하신 이가 예수님이라고 베드로에게 말한다.


요한이 해변에 서 계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확신한 것은 공생애 초기에 예수께서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는 그들에게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지게 하여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던 일을(눅 5:1-11) 생각해 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한의 말을 들은 베드로는 벗어놓았던 겉옷을 걸치고 물로 뛰어든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해변으로 헤엄쳐가는 그를 보며 무덤이 비었다는 여자들의 말을 듣고 단숨에 달려가 그 보다 먼저 도달했으나 밖에서 머뭇거리는 요한을 제쳐놓고 바위동굴로 뛰어들던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은 사색형, 베드로는 행동형 제자임이 다시 한 번 들어난 것이다. 


베드로는 헤엄을 쳐서, 다른 제자들은 배를 타고 고기들이 가득한 그물을 끌고 육지에 도달해 보니 숯불이 피어 있는데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있었다. 그 옆에 서 계시던 예수께서 다가오는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하신다. 말씀에 응해 베드로가 호수에 잠겨있는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려 보니 그 속의 고기는 153 마리나 되었지만 그물은 찢어지지 않고 있었다. 


밤이 새도록 애써도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던 고기가 예수님의 말씀하신 곳에 그물을 던졌더니 153 마리나 잡힌 것도, 그 많은 고기들이 요동을 치는데도 그물이 터지지 않은 것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기적이 일어난 과정은 간단하다.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명하셨고, 제자들이 그 말씀대로 했더니 엄청나게 많은 고기들이 잡혔고, 그물을 빠져나가려는 고기들의 필사적인 시도에도 그물은 끄떡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무조건의 순종이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 기적임이 또다시 입증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잡힌 고기 수가 153 마리라고 명시된 까닭이 무엇이며, 그 고기들이 서로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데도 어떻게 그물이 찢어지지 않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잡은 고기를 공평하게 나누기 위해 세어보았더니 153 마리였다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숫자를 다른 식으로 받아드리는 이들도 있다. 


그 당시 알려진 물고기 종류가 153종 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고기들이 그물에 걸렸으니 생명의 복음은 세상 모든 민족과 인종을 모두 받아드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복음의 그물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도 견딜 수 있게 튼튼하다는 뜻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 


이 같은 해석은 조반 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복음증거의 사명을 부여하시는 것과도 연관된다. 예수께서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자신 있게 “저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 답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명하시고, 똑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여 물으신다. 베드로도 같은 답변을 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세 번째로 같은 것을 물으시자 베드로는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이미 두 번이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씀 드렸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답변이 참된 것인 줄 아시면서도 또 물으시니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자기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을 부인한 것 때문에 주께서 그를 믿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더욱 진실된 마음으로 “저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라 아뢴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내 양을 먹이라.” 분부하신 후 “네가 젊었을 때에는 네 마음대로 살았지만 지금부터는 네가 원하지 않는 인생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라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십자가 정병들의 선두에 서서 달리다 순교하게 될 것을 일러주신 것이다. 이 사실을 가리켜 예수님이 그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그에 대한 충성을 맹서시킨 후 베드로를 복음전선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신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님은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말씀하셨다. 그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라.”(눅 5:10) 하신 분도 예수님이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이 던지는 그물에 153 마리나 되는 고기를 들어오게 하시면서도 그물은 찢어지지 않게 하셨다. 그런 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명령하셨다.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어부들의 앞장을 서라고 명하신 것이다. 아울러 그들이 던지는 복음의 그물에는 세상의 모든 민족과 인종들이 들어올 것이라고 알려주신 것이다.


디베랴 호수에서 이 엄숙한 사명을 부여 받은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할 때까지 뒤돌아보지 않고 전진했다. 우리들도 예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복음의 그물을 주께서 명하시는 곳에 던져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며 우리의 인생길을 달려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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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71514
9195
2018-11-03
참전용사 위로행사를 마치고


 

 

 


애국지사기념사업회는 지난 9월 29일 포트 에리(Fort Erie)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가졌다. 작년부터 계획하고 있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실행하지 못하다 금년에는 꼭 해야겠다는 각오로 광복절 행사가 끝난 후부터 준비에 착수했다.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온타리오 주에 거주하는 참전용사 전원을 초청대상으로 삼고 일을 시작하고 보니 우리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 싸운 용사들 중 지금 생존해있는 이들은 젊은 분이(?) 90세에 가까웠고, 그 보다 더 연세 드신 분들은 거동조차 불편하여 집안에 계시거나, 양로원에 입주하셨거나, 병원에 입원해 계신 실정이었다. 


그런 분들에게 초청장을 보낸다면 과연 몇 분이나 오실 수 있겠느냐는 현실적인 문제점에 부딪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써니브룩(Sunny Brook) 병원 특수병동에 입원해 있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위해 동포사회 몇 단체가 매년하고 있는 위문행사에 사업회 임원들이 참석하는 것으로 우리 계획을 변경할까 생각하다가 “그들이 우리 초청에 응하기 힘든 형편에 있다면 우리가 찾아가면 되지 않겠는가?”란 생각이 영감처럼(?) 떠올랐다. 


즉시 1951년 4월 23일 가평전투에서 싸웠고, 현재 포트 에리에 거주하는 크라이슬러씨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취지를 설명했다. 지난 2월에 가졌던 인터뷰에서 가평전투에 관해 자세히 말해주었고, 그 내용이 실린 ‘애국지사들의 이야기.2’ 출판기념회에도 참석하였던 그는 나이아가라 지역 참전용사들의 연례모임이 8월에 있었지만 한 번 더 모이도록 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은 급속도로 진행되어서 9월 29일에 그의 집 뒤뜰에서 행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부부 동반하여 28명의 참전용사들이 참석할 것이란 전갈을 보내왔다. 그는 참전용사들이 한국의 고전무용을 감상하며,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 민요를 듣고, 태권도나 유도 시범을 볼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말도 전했다. 몇 군데 연락을 해보았지만 우선 시간이 촉박하고, 행사장소가 토론토에서 먼 관계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준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내년에 이 행사를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정보를 얻은 것은 큰 소득이었다. 동시에 사업회가 참전용사들을 위한 행사를 한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권천학 시인이 그녀가 참전용사들을 위해 쓴 보은의 시 ‘들 꽃으로 피는 사랑의 혼’(The Spirit of Love that Blooms as a Wild Flower)을 낭독하겠다고 제의해 온 것은 기쁘고 반가운 일이었다.


9월 29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밖에서 행사를 하기엔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좋은 날씨였다. 토요일이었지만 일찍 떠난 탓에 교통도 복잡하지 않아서 한적한 농촌 길을 상쾌한 기분으로 달려서 시골냄새가 물씬 풍기는 크리이슬러씨 집에 도착했다. 


초가을의 정취를 듬뿍 느끼며 벌판처럼 넓은 그의 집 후원에 서있는 큰 나무에 태극기와 캐나다 국기를 나란히 달고, 그 앞에 피크닉 테이블들을 모아 놓고 야외용 마이크 장치까지 끝내자 함께 간 이사 한 분이 그 집 정원에서 땄다며 먹음직스러운 포도송이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것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싱싱하고 달았다. 오랜만에 무공해 포도를 즐기는 동안 참전용사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캐나다 국기와 태극기에 대한 경례에 이어 ‘오, 캐나다’와 ‘애국가’를 부른 뒤 한국전에서 전사한 용사들을 위한 묵념을 드렸다. 그런 다음 멀고 먼 한반도까지 와서 불법 남침한 북괴군과 싸워 우리나라의 위기를 해소해준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곧바로 점심식사를 하며 친교를 나누었다. 


한식과 양식을 넉넉하게 준비해 갔기에 모두들 푸짐한 음식을 마음껏 들며 즐거워했으며, 김승관 이사가 불어주는 그들 귀에 익은 ‘Oh! Susanna’, ‘Beautiful Dreamer’, ‘Old Black Joe’ 등의 하모니카 독주를 들으며 그들은 흥겨워했다. 


참석하신 분들은 크리이슬러씨를 비롯해 부부동반으로 오신 분들도 있었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남편처럼 의지하고 산다는 듬직한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오신 미망인도 있었고, 함께 올 자식조차 없어서 홀로 오신 분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는 가보기는커녕 들어보지도 못한 동방의 작은 나라 Korea를 붉은 이리떼들의 침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한국전에 참전한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싸웠을 때의 나이는 17세에서 21세였다. 그처럼 젊은 나이에 남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사실은 그들이 알고 했던, 모르고 했던, 엄청난 희생정신과 놀라운 인류애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그 날 행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1967년 6월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 아랍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제3차 중동전쟁 때 일어났던 일이다. 이 전쟁이 일어난 다음 날 미국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이던 두 학생이 동시에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한 명은 이스라엘 학생으로서 군에 입대하여 중동전에 참전하기 위해 급히 귀국했고, 다른 한 명은 이집트 유학생으로 본국에서 징집영장이 날아올까 두려워 잠적해 버린 것으로 드러났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아랍연합군보다 우수한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국방장관 모세 다얀은 군사작전에 탁월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전쟁 발발 6일 만에 아랍연합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병사들 모두가 조국을 위해 미국에서 공부하다 귀국하여 총을 든 학생과 같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날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 같은 이스라엘 청년들과 크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나라를 지키고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 반대가 아닌가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젊은 층이나 지식인들은 ‘국가의 이익과 번영이 우선’이라 믿고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내가 우선’ 주의가 득세하지 않나 하는 염려를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들이 국민의 기본의무 중 하나인 군복무를 그들의 찬란한 미래에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에 빠져있다고 여겨질 때가 많다. 그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국토방위의 의무에 충실해야만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괴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의 안보가 유지되면서 국력이 성장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과거 3년이던 군복부기간이 이미 21개월로 단축되었고, 머지않아 3개월이 더 줄어들어 18개월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18개월 간 군에 적을 두었다 민간인으로 돌아가는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가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군복무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는 청년들이 늘어가고, 그런 젊은 층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책이 계속적으로 실시된다면 대한민국의 안보가 위태로워질 것은 명약관화하다. 


68년 전 북괴가 남침을 단행했을 때 국군은 그들을 맞이해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조국애에 불타는 국군용사들은 수류탄을 뽑아 들고 적의 탱크에 기어올라 폭파되는 탱크와 더불어 산화했다. 까까머리의 어린 학생들도 나라를 붉은 악마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학도병에 입대하여 겨우 방아쇠 당기는 법만 배운 후 막강한 화력을 지닌 괴뢰군과 싸우다 꽃다운 나이에 호국의 영령들이 되었다. 


그런 젊은이들의 피 끓는 민족애와 조국애가 원동력이 되어 대한민국은 공산화 되지 않았을 뿐더러 군사대국으로 성장했고, 경제적으로도 세계의 선두대열에 서는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의 실정은 어떠한가? 경제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군사력은 강화되기는커녕 현재 갖추고 있는 능력도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든 조건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날로 약화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조국의 안보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시점에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된 이래 한시도 적화통일의 꿈을 버린 적 없는 북괴가 남침을 감행할 때 일어날 일은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16개국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 주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에서도 사업회 위로행사에 참석한 당시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을 위시해 25,000 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한반도에 와서 싸우다 1,200여 명이 부상당하고, 516명이 전사했다.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그들의 꿈을 이루어줄 미국유학도 포기하고 입대하여 6일 만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한의 젊은이들이 지닌 안보의식과 국토방위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네들의 국가관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역사의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조국의 안보는 지극히 위태로워질 것이고, 반만년의 역사 속에서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횐 옷 입은 우리 민족이 살아오며 지켜온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이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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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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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2
예수님의 기적-말고의 잘린 귀를 고치시다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 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쭈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 지라.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눅 22:47-53)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사복음서는 그 쓰여진 시기가 조금씩 다르다. 어디에 중점을 두어 예수님의 삶을 묘사했는가도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라는데 초점을 맞추었고, 마가는 섬기는 자로서의 예수님을 그렸으며, 누가는 인간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 그의 복음서를 기술했다. 이에 반해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들은 정확하게 일치하지도 않으며, 어떤 복음서에는 있으나 다른 복음서에는 아예 없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 잡히시는 장면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복음서 마다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 사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났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 근처의 감람산에 있는 동산으로서 예수께서 자주 가셔서 기도하던 곳이었다. 예수님은 나귀등에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참으로 많은 일을 하시며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장사치들에 의해 장터로 변한 것에 분노하여 그들을 내쫓으셨으며, 그에게 오는 많은 병자들도 고쳐주셨다. 아울러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 21:33-46), 혼인잔치 비유(마 22:1-14)를 비롯한 여러 비유들을 통해 종교지도자들의 무능함과 나태함과 완악함과 그들의 죄악 된 생활을 지적하시며 회개를 촉구함과 동시에 하늘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셨다. 


이 기간 동안 예수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여”로 시작하여 그들의 의를 가장한 위선의 생활을 지적하며 신랄하게 책망하신 것은(마 23:1-39) 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온갖 거짓된 행실을 일삼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경고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끝까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본분을 다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더불어 마지막으로 만찬을 가지신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믿는 자의 세계에선 “섬기는 자가”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몸소 보여주셨으며(요 13:1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다(요 13:34).


그런 후 그가 떠난다는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말씀하시며 그가 떠나면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실 것을 일러주신 후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 이름을 밝히시지는 않았지만 제자들 중 누군가가 그를 배반할 것이라 말씀하신 것도 이때였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예수께서 향하신 곳이 겟세마네 동산이었다.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고 동산 안으로 들어가시며 나머지 제자들은 동산입구에서 기다리게 하셨다. 그러나 함께 들어간 세 제자들마저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고난의 잔을 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달라고 땀방울이 피처럼 되어 흘러내리도록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동안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어 예수님을 더욱 슬프고 고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란 승리의 기도를 하실 수 있었다. 이 기도를 마치셨을 때 유다를 앞장세운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부하들이 등불과 횃불을 밝혀 들고 칼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동산 안으로 몰려왔다. 


4월 중순인 유월절에는 보름달이 떠있어서 동산 안은 대낮 같이 밝았는데도 그들이 횃불과 등불을 들고 온 것은 숲 속이나 구석진 곳에 숨어있을 예수님을 찾아내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순순히 체포 당하지 않으시고 반항을 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난의 잔을 마시기로 결단하고 계셨기에 기세 등등한 그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 유다는 “선생님, 안녕하십니까?”라 인사하며 다가가서 입을 맞춘다. 그 당시 제자가 존경하는 스승에게 하던 외적인 표현이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유다는 가증스럽게도 사랑과 존경의 상징인 입맞춤을 예수님을 배반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 유다를 바라보며 예수님은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배반하느냐?”물으신다. 


그러자 함께 있던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라 물었고, 그들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만 칼을 사용한 제자가 베드로이며, 귀가 잘린 대제사장 종의 이름이 말고라는 사실은 누가복음에만 나타나있다. 


베드로가 내려친 칼에 말고의 귀가 떨어져 나가자 예수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가 내게 주신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 18:11)라 말씀하신다. 이 부분이 공관복음에는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마태는 “네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라 기록했고, 누가는 “이것까지 참으라.” 하신 후 말고의 귀를 낫게 하셨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예수께서 칼을 휘두른 베드로를 책망하셨다는 점에 있어서는 사복음서의 기록이 일치한다. 베드로가 한 일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한 충정의 발로였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원하신 바가 아니었다. 


베드로를 나무라신 후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들을 보내주실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한 성경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 26:53)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사명은 무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주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를 구하려 한 베드로를 꾸짖으신 후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제자리에 붙여주신다. 이 사실을 짧고 간단하게 기록한 제자는 의사인 누가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행하신 다른 기적들과 비교할 수도 없어 보이는 이 기적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크기만 하다. 무엇보다 말고의 귀를 고쳐주심으로 예수님은 그가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친구시며, 길 잃고 험한 산골짜기를 방황하는 양 한 마리를 찾아 다니시는 선한 목자이심을 보여주셨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몰라도 말고는 그 집의 종에 불과했다. 주인의 명령대로 행동하다 그의 말 한마디면 언제라도 죽어야 하는 물건과도 같은 존재가 그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말고가 귀를 잃고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신음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가신 것이다. 그리고 자비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시며 땅에 떨어진 그의 귀를 집어 붙여주신 것이다. 종의 신분이었던 말고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으로 대해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말할지 모른다. 잃었던 귀를 되찾은 말고는 그의 상전인 대제사장 집으로 돌아가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위선과 불의를 떡 먹듯이 행하며 사는 주인을 섬기며 살았을 것이라고. 그 주장을 반박할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이름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의 기록인 성경에 들어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말고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의 손에 의해 몸과 마음이 새로워진 후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새로운 인생길을 걸었기 때문이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는 말고와 같은 처지가 아닌가 여겨진다. 온갖 사유로 인해 상처받고,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배반당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아 세상에서 홀로된 외로움과 슬픔과 아픔 속에서 진통하며 지내는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홀로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피 흘리며 고통 당하는 말고의 떨어져나간 귀를 고쳐주시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곁에 계실 뿐만 아니라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시며 “네 아픔과 슬픔이 무엇이냐? 네가 절망과 낙망의 수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서 내미시는 손을 잡고, 그의 품에 안기어 우리의 문제를 아뢰면 우리에겐 새로운 인생의 장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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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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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예수님의 기적-무화과나무를 말리시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18-22)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가셨다. 그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당당하게 밝히시기 위함이었다(사 62:11; 스 9:9). 


성내 백성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 외치며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영접했다.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증오와 질투는 더욱 커졌다. 거기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돈을 바꿔주며,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을 다 몰아내시자 그를 죽이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은 더욱 굳어졌다. 이를 잘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태연하게 그에게 몰려오는 맹인들과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다. 그리고는 그를 극도로 미워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피하여 베다니로 가신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키로 정도 떨어진 작은 촌락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주께서 죽은 지 나흘 만에 무덤에서 살려내신 그들의 오빠 나사로가 살던 곳이다. 거기서 하루 밤을 지내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중 예수님은 길가에 있는 한 무화과나무로 다가가신다. 조반을 드시지 않으셔서 시장기를 느끼셨던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감람나무, 포도나무와 더불어 유대인들의 삶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무다. 무화과나무의 무성한 잎들은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것이 그 나무의 특징이요 생명이었다. 사사시대에 그리심 산 속의 나무들이 무화과나무에게 그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하자 무화과나무가 “내가 어떻게 달고 맛있는 과일 맺는 일을 버리고 너희를 다스리겠느냐?”며(삿 9:12) 거절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무화과나무는 일 년에 두 번 열매를 맺는다. 첫 열매는 4월에 꽃이 피면서 달리기 시작하는데 이 열매들은 작고 써서 먹을 수 없다. 6월이 되면 꽃이 만발하고 잎이 무성해지며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리게 된다. 그런데 무화과나무가 마른 사건은 4월에 일어났다.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4월 15일이었던 유월절이 되기 며칠 전이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열매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셨으나 “무화과 철이 아니어서 잎사귀뿐이었다.”(막 11:3)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열매가 없을 수밖에 없는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한 예수님의 처사는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공의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들이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데 무화과나무의 경우에는 파괴적인 행위였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품성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또 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저주가 끝나자마자 무성하던 무화과나무 잎들이 말랐다고 되어있지만,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11;14)하신 그 다음 날 나무가 “뿌리째 말랐다.”(11;20)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사건인데도 일어난 때가 “즉시”와 “그 다음 날”로 다르게 기록된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는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다는 점도 문제로 대두된다. 이런 점들 때문에 무화과나무 사건은 많은 논란을 일으켜왔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소멸시킨 목적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에게 경고를 주시며, 그들을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모든 의문은 해소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시어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감사와 찬양으로 영접하고 그의 충성된 일꾼이 되어 그를 섬겨야 했다.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선택한 민족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멸시하고 증오하며 핍박하다 끝내는 십자가형에 처하는 천인공노할 죄악을 범한다.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그들이 그 같은 용서받기 힘든 죄를 저지르기 며칠 전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구세주를 죽이려는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준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철저하게 배반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세의 율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들 나름대로의 율법을 수없이 만들어 그것들을 지켜야만 생명의 길을 가는 것처럼 행동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제사를 드리고 예식을 행하는데 시간과 정성을 아낌없이 바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그들의 사랑과 그의 뜻에 따르는 무조건의 순종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마음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을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는 말씀 속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 민족은 잎만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았기에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말리신 것은 그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형벌이 어떨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만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하나님을 슬프게 한 사람들이 많기만 하기 때문이다.


오늘 날에도 마찬가지다. 세계인구의 35 퍼센트가 기독교 신자라는 통계가 나와 있는데도 세상은 날로 혼돈과 죄악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은 잎사귀만 푸르른 무화과나무 같은 믿는 자들이 허다하다는 증거인 까닭이다.


무화과나무가 마르는 것을 보고 놀란 제자들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 묻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니라.”들려 주신다. 동문서답 같은 말씀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적인 믿음의 기도를 통해 앞을 막아서는 환란과 핍박을 이겨내며 열매 맺는 인생을 살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믿고 간구하면 산이라도 바다에 던져지는 기적이 일어나듯이 믿는 자의 삶 속에서 불가능은 사라진다고 말씀하셨지만 성경 어디에도 기도의 응답으로 산이 옮겨졌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 산이라도 옮길 수 있는 믿음의 기도에 관해 한 번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변화 산에서 내려오셔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신 후 그가 산 위에 있는 동안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앞에 놓고 속수무책이었던 제자들에게 “만약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다.”(마 17:20)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높은 산이 믿음의 기도가 응답되어 바다 속으로 들어간 일은 역사상 없었음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 것인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극도로 힘든 일을 당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것처럼 어렵다.”란 말을 하곤 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받은 줄로 믿고 간구하는 기도는 산까지도 움직이게 한다고 하신 것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일깨워 주신 것이다. 


그렇다. 믿음의 기도 앞에 우리를 저지할 방해요소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아무리 간절한 기도도 우리가 간구하는 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는 그대로 응답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변형되어 또는 응답되지 않음으로 응답되는 기도의 응답도 많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인간의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의 잔을 가능하면 마시고 싶지 않으셨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 26:39)라 기도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피하고 싶으셨던 그 잔을 거두시는 대신 마시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 아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심으로 예수님이 수행해야 할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게 하신 것이다.


달고 맛있는 열매가 풍성하게 달린 듯이 푸른 잎만을 자랑하던 무화과나무가 말랐듯이 입으로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며 위선과 기만으로 주님께 충성하는 척하는 이들은 파멸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슬픈 종말을 맞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의 기도로, 다가오는 환란과 시련과 박해와 아픔을 극복하며 나가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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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7
예수님의 기적-물고기 입에서 은화를 꺼내시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마 17:22-27)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 제일 많은 것이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치신 것이다. 나병을 비롯한 각종 질병을 고쳐주셨으며, 귀신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을 악령에게서 해방시켜 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의 육체적 질병이나 정신적 질환만을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고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심으로 그는 자연을 지배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며, 오병이어와 칠병이삼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심으로 그가 곧 창조주시며 생명의 주인 이시라는 사실도 나타내 주셨다.


이런 기적들과 비교해 보면 물고기 입에서 은전을 꺼내는 것은 기적이라기보다는 동화 속의 이야기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바다에서 잡은 고기 입에서 돈을 끄집어 낸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일 뿐 아니라, 깊은 신학적 의미까지 지니고 있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성전세에 관한 것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은 정착하는 곳마다 회당을 세우고 거기 모여 예배를 드림과 동시에 서로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곤 했다. 그러나 각종 민족적 의식을 행하며 제사를 드린 곳은 하나뿐인 예루살렘 성전에서였다. 이 성전을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조석으로 제사를 드릴 때마다 일 년 된 양을 제물로 바쳐야 했고, 포도주와 밀가루와 기름도 있어야 했다. 거기다 매일 태워야 하는 향과 최고급 천으로 만들어야 하는 성전휘장과 제사장들의 예복을 준비하는데 들어가는 경비 또한 엄청났다. 이십 세 이상 유대인들은 이 막대한 예산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성전세를 매년 반 세겔(장년 남자의 이틀 분 임금)씩 납부해야 했다. 성전관리자에게 성전세 미납자의 재산을 억류하는 권한까지 주어질 정도로 엄격하게 징수된 성전세는 출애굽시대부터 제도화 된 것이다.(출 30:11-16)


예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성전세를 받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성전세를 안 바치느냐?”고 묻는다. 부정형으로 물은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성전세를 안 바치는 것을 확인하여 문제 삼으려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던 것 같다. 베드로는 망설이지 않고 “물론 바치십니다.”라 대답한다. 조금이라도 예수님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하려는 베드로의 진심이 배어있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베드로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것이 잘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신 듯이 예수께서 물으신다. “시몬아, 세상 임금들이 세금을 자기 아들들에게서 받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서냐?”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입니다.”라 대답한다.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와 제자들은 성전세를 면제받을 수 있지만 합동하여 선을 이루기 위하여 납부하시겠다고 밝히신 것이다.


고대시대에서는 세금은 점령당한 나라 백성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임금의 가족들은 세금징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위한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다고 문제될 것은 없었다. 성전에서 일하는 랍비나 제사장들도 성전세를 내지 않았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성전세를 바치실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성전세를 바치라고 베드로에게 분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고 있던 로마정부에도 세금을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성전세 문제 이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묻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마 22:11)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그들의 의도를 무산시킨 지혜로운 답변이셨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네들의 간교한 계교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기에 국민은 정부에 복종해야 하며, 국가의 정책에 순응하고 협력해야 함은 물론 납세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롬 13:1-7)


예수께서 그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적되었기에 성전세를 면죄 받아 마땅하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로마정부에게도 납세의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고 하신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첫째로 믿는 자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직분을 충실히 감당하며 살아야 하지만(마 5:13-16),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과 화평해야 하는 의무도 지니고 있다(롬 12:18; 히 12:14). 이 둘을 다 감당하려면 하나님의 뜻에 본질적으로 위반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주어진 권리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믿는 자들이 철두철미 교리와 원칙으로 무장하고 천국복음을 외쳐대며 그들의 입장과 권리를 내세우는 것보다는 불신자들과 어울려 그들을 사랑과 인내로 대하며 그네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를 심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고 확장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랑과 열성으로 전달하면서도 전략적으로 행동해야만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제일 잘 이해하고 복음을 증거 하는데 활용한 전도자가 사도 바울인 것은 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의 과정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바다에 나가 낚시를 던져 제일 먼저 물리는 고기의 입에서 은화를 꺼내라고 일러주신다. 간단하고 쉬운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기적처럼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도 드물다.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기들 중 한 마리가 입에 은화를 물고 있다가 베드로의 낚시에 걸릴 확률은 수백 억 분의 일도 안 된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낚시를 무는 고기 입에서 성전세 낼 돈을 꺼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바다에 사는 고기 한 마리 한 마리의 움직임을 알고 계신다. 물고기뿐만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들과 산과 들의 짐승들의 소재까지도 알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우리를 보호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세상이 주는 근심과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며, 예수님의 눈을 피해 죄악의 길을 걸을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물고기 입에서 돈을 꺼내 성전세를 바치게 하는 이 기적은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 같으면서도 깊은 진리와 교훈을 들려준다. 그런데 이 기적이 실제로 행해졌다는 기록은 복음서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기록에 없다고 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행하신 대부분의 기적들은 그가 하신 말씀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가 물고기 입에서 세금 낼 돈을 꺼낸 이 기적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마태는 어째서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이 기적의 목적은 예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 아닌 기적을 통해 믿는 자들이 세상에 살면서 지켜야 할 중대한 원칙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기적 자체를 조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지 않아도 좋을 성전세를 납부하라 하심으로 믿는 자들도 그들이 통치자들의 통치에 순응하며, 사회제도와 체제를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는 성전세를 납부할 돈을 고기를 잡아 그 속에서 찾으라고 알려주셨다. 


이 대목을 해석하면서 그의 권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신 적이 없는 예수께서 그와 베드로의 성전세를 고기 입에서 꺼내는 기적을 행하신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는 견해를 표명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은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 자신을 위해 물고기를 잡아 돈을 꺼내는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세상나라의 시민으로 살면서 필요한 물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는 사실을. 


어부출신인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잡아 그 속에서 은전을 꺼내게 하신 것은 믿는 자들은 각자의 업에 충실해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또 가장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지침이요 가르침이신 것이다. 


수고의 땀을 흘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인간사회의 기본원칙은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세상을 살아가는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우리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힘써 일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며, 세상나라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행하며 살 수 있는 힘과 용기와 능력을 부여해 주실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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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예수님의 기적-여리고에서 맹인을 고치시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다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 하라’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 46-52)

 

 

예수님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리고에 들렀다 떠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나섰다. 초막절, 오순절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삼대 명절 중의 하나인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서 24키로 내에 거주하는 열두 살 이상의 남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길에 나와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격려하며 전송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예수님 일행처럼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과 그들을 보내는 인파로 여리고 주변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같이 많은 사람들이 들끓는 틈에 바디매오라 이름 하는 맹인이 앉아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맹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나 성문 앞에서 구걸을 해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주위가 어수선해 지면서 “나사렛 예수가 오신다.”란 소리가 들리자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 소리친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들에 관해 들어서 알고 있었던 바디매오는 그가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믿고 소리 높여 예수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 중 아무도 그 가련한 맹인을 주님께 데려가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다. 


불쌍한 중풍병자를 들것에 눕혀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사람들이나(마 9:1-8),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나올 수 있도록 도운 것(마 12: 20-28)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이 눈 뜨기를 원하는 가련한 맹인을 동정하기는커녕 그가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막은 것은 잘못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 같은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데는 그들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다. 그 당시 성지순례를 가는 사람들은 같은 마을에 살거나 친한 친구들이 함께 어울려 가곤 했다. 


그런데 오늘 날과는 달리 그들은 길을 가면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니라 랍비들의 말을 들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기네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전으로 향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때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도 그들이 선택하는 랍비들의 말을 들으며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좌우와 앞뒤로 에워싸고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리에서 구걸하는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께서 오시는 방향을 향해 그를 도와달라고 소리 높여 외쳐댔으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떠들지 말고 잠잠 하라.”며 화를 낸 것이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사람들의 말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더욱 소리를 높여 “다윗의 자손이여,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 계속하여 외쳐댔다. 


그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확실히 알고 있었던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성한 사람들처럼 자유로이 예수님을 찾아가 만날 수 없는 그에게는 예수께서 그의 앞을 지나시는 그때가 눈을 뜰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사람들의 나무람 같은 건 들은 척도 안하고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은 것이다. 많은 것 같지만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뱉어버린 말은 주어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놓쳐버린 기회가 다시 온다는 보장은 없다.


사도 바울이 철학의 도시 아덴에서 복음을 선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대신 후에 기회가 있으면 “네 말을 다시 듣겠다.”(행 17:32)며 발길을 돌렸다. 그때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룬” 그들은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외면한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들이었다.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영원히 암흑의 세계에 머물러야 한다고 확신한 바디매오는 결사적으로 예수님을 불렀고, 예수께서는 그런 그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를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 앞으로 나간다. 앞을 못 보는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민첩한 행동이었다. 이 점을 지적하며 바디매오는 맹인 행세를 하며 구걸하던 걸인이었거나, 시력이 약했던 사람이라며,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맹인이 성한 사람처럼 빠른 동작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 빛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음을 의미한다. 우리들도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순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할 줄 안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원하시는 그릇이 되어 그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망설이며 하던 일 끝내고 하겠다는 것은 주님의 동역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증거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 또는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서” 그리하겠다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말씀하셨다.(눅 9:57-62)


구걸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뛰어 그의 앞으로 나온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 그렇게 물으신 것은 눈 뜨기를 갈망하는 그의 소원을 그에게서 직접 듣고, 그가 예수께서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바디매오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라 답한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소원을 회상하곤 한다. 


김구 선생은 그의 자서전 백범 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나의 소원은 대한독립입니다.”라 대답할 것이다. 두 번째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셔도 “우리나라의 독립입니다.”라 대답할 것이며, 세 번째 소원을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입니다.”라 대답할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물으시면 주저하지 않고 아뢸 수 있는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소원을 가슴 속에 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해서 그의 뜻대로 역사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가 원하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라고 바디매오가 아뢰자 예수님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라 말씀하셨고, 그의 앞에는 광명한 세상이 전개되었다. 눈 뜨기를 바라는 애타는 소망과 그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는 믿음을 소유했던 바디매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그가 받을 수 있는 인생 최대의 선물을 받은 바디매오가 보인 반응은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이었다. 예수님의 권능과 사랑으로 나병으로부터 해방된 열 명 중 자기들의 길을 가버린 아홉과 달리 그는 예수님의 길을 따른 것이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가서 유월절을 지킨 후 평범한 서민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눈 뜬 후 바디매오의 삶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지만 그가 보게 된 후에 자기의 길을 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정상적인 눈을 지니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캄캄한 곳에서 비참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만 보며, 인간으로서 행하여야 할 것들을 보면서도 못 본 척 눈을 감거나, 이웃의 슬픔과 불행과 아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시야를 지닌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말씀하셨다.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줄 안다. 우리가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시야를 지녔다면 즉시 예수님 앞에 나아가 “주님, 바로 보게 해 주십시오.”라 간구해야 하겠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맡겨진 인생의 사명을 완수하며 후회 없이 살다 예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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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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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4
예수님의 기적-나병환자 열 명을 고치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질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11-19)

 

 

예수님이 나병환자 열 명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중에 일어난 일이다. 그때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 그를 죽이기로 작정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피해 예루살렘 동북쪽에 위치한 에브라임에 계시다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이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역에 있는 한 마을을 지나실 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멀리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 소리친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나병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제사장에게서 나병에 걸렸다고 진단받아 “부정하다”는 판정을 받으면 진영이나 마을에서 쫓겨나 그 외각에서 살아야 했다. 또한 그 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전염성이 크며, 유전성도 강한 것으로 믿었다. 


뿐만 아니라 나병에 대한 치료법이나 약이 전혀 없었기에 일단 나병환자로 판별되면 인간사회로부터 축출되어 그들만의 집단을 이루어 외롭고 괴로운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그런 집단의 하나였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며, 눈 먼 자를 보게 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려고”(눅 4:18) 세상에 오신 분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사명은 세상에서 소외되고 분리되어 인간의 대열에서 탈락된 채 살아 숨쉬는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깨달아 기쁨과 소망을 지니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그를 찾는 숱한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신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에게 잃어버린 인생을 찾아주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의 나병환자에 대한 연민의 정은 유별나게 컸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어 떠나 보내면서 “병든 자를 고치며,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마 10:8) 명하신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이런 예수님이시기에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다가갈 수도 없는 나병환자들이 멀리서 “도와 달라” 간청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명하신 것이다. 그때 유대사회에서는 나병 증세가 있든지 나병이 치유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진단을 받도록 되어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 명하신 것은 나병이 떠나갔으니 판정관인 제사장들에게서 그 사실을 확인 받으라는 뜻이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기에 멀리서 그들의 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도 못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소연 하였을 뿐인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아시고 그들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은 나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이 같은 은혜를 축복으로 받아드리기 위해선 예수님의 권능을 믿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이 있어야 했다. 


나병환자들의 입장에서는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병이 나았다는 확인을 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몸에 손조차 대지 않으시고 병이 완치된 것을 확인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에게 가다가 그들 스스로가 피부가 깨끗해진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은 언제나 약속을 동반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약속을 어길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사람들에겐 예수께서 하신 약속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한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께 중풍으로 고통 당하는 그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자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 말씀하신다. 하지만 백부장은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라 아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 8:13)라 말씀하셨고, 그 순간에 하인의 병은 완치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많은 예 중의 하나다. 

 

제사장들을 찾아가다 나병이 깨끗이 떠나간 것을 발견한 그들의 놀라움과 기쁨은 참으로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처럼 큰 환희와 소망을 안겨준 예수님의 은혜에 그들 모두가 감사한 것은 아니었다. 오직 한 명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했다.”는 것이 누가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한 명이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기만 하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믿었으며, 그들을 멸시하며 경멸했다.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을 증오했다. 그들은 서로 상종하기조차 꺼렸으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지나서는 여행도 하지 않았다. 일찍이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신 것이(요 4:3-4) 혁신적인 결단이었던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열 명으로 구성된 나병환자 집단 속에 적어도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이 있었던 사실은 특이할 만하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한 곳에 어울려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함께 살았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홍수가 나서 낮은 곳이 물에 잠기면 모든 동물들이 함께 높은 곳으로 피신한다. 그런데 거기 오른 맹수들은 약한 동물들을 해치지 않고 물이 빠질 때가지 함께 지낸다고 한다. 버림받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고, 약육강식이 생존을 위한 최우선 순위인 동물의 세계에서도 위기가 닥치면 서로 뭉쳐서 사는데, 인류가 하나 되어 하나님 안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솔로몬이 들려주는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전 12:13). 사도 바울이 말해주는 인생의 목적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고전 10:31).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함을 알려주는 말씀들이다. 


따라서 예수님 앞에 엎드린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에게는 사람대접조차 받지 못했지만 예수님에게는 인정받은 삶을 사는 축복된 신분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 복 받은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님은 함께 고침 받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은혜를 모르는 그들에 대한 분노나 꾸지람 아닌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찬양해야 하는 인간의 사명을 모르는 그들에 대한 염려와 실망의 표현 이었다. 


우리에게 오늘이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어버리고 사는 우리들도 병 고침을 받은 후 각자의 길을 가버린 아홉 나병환자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우리들은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그를 배반하는 인간들이 그에게 돌아오기를 문기대어 기다리시지만 심판의 날이 임하면 아무도 그의 공의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그 앞에 엎드린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하신다. 


이미 나병이 완치된 그에게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신 것은 그는 건전한 육신을 지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았음을 일러주신 것이다. 병이 낫고도 예수님에게로 돌아오지 않고 세상을 향해 걸어간 아홉은 그들을 버렸던 사람들과 다시 어울려 살게 되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한 그네들에게 천하보다 귀한 영혼의 축복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드리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으며, 지금까지 보호하시며 인도해주신 예수님에게 전적으로 또 계속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이며 사명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를 영원한 파멸의 길에서 건져내어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감사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동방의 의인 욥은 그에게 찾아온 재앙의 근본 원인이 죄의 대가라는 세 친구의 공격에 맞서 그의 무죄함과 의로움을 역설하지만 그를 인생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사탄의 저주로부터 풀려나지 못한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에게 감사하기 시작하자 그를 둘러쌓던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한 세상이 찾아왔으며, 전보다 더 큰 축복이 임하였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사람들에겐 감사할 조건이 날마다 늘어나며,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감사하는 삶이 곧 구원받은 사람들의 인생이라는 사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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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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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6
아름다운 정리

 

 

십 오륙 년 전 일이다. 어느 선배 목사님이 한 번 만나자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 목사님은 해방 후 월남하신 분으로 우리 집안 내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조부님에 관해 말씀하였으며, 우리 아버지를 무척 좋아하셨다. 뿐만 아니라 늦게 목사가 된 나를 아껴주시며 사랑해 주셨다.


그런 분이기에 식당으로 모시고 가서 식사를 대접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릴 때 그 분이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내가 김 목사를 보자고 한 것은 그간 나도 모르게 김 목사에게 섭섭하게 했거나 잘못한 것이 있으면 다 잊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야.” 큰 형님 같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늘 보살피며 도와주시면서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 대답은 했지만 그 분에게 전혀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이 드신 분의 특유한 독선과 고집 때문에 내 입장이 난처해지고, 처신하기가 힘들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십이 넘어 언제 하나님께서 오라 할지 모르기에 행여라도 내게 상처를 입힌 일이 있다면 용서받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참으로 아름답게 생을 정리하는 용기 있는 분이라 생각했다. 그 만남이 있은 지 몇 달 후에 그는 양로원으로 들어가셨고, 몇 년을 거기서 지내시다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주 최근에 한 동료 목사님이 방법은 달랐지만 그 선배 목사님과 같이 내게 진심 어린 작별인사를 하고 생을 마감했다. 암으로 여러 해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왕성한 의욕을 보이던 그가 내게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감사 카드를 보내왔다.


“김 목사님 그리고 사모님, 그간 격조하였기에 잠시 제 근황을 알려드림과 동시에 몇 자 감사의 말씀을 올리려고 펜을 듭니다. 지난 5월 모국방문 후에 제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 키모로 들어갔지만 결과가 썩 좋지 않아 호흡곤란, 보행곤란, 흉막에 물이 차 매일 빼내야 하는 등 매우 어려운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상태에서 김 목사님과의 우정과 애환을 회고해 보고 짧은 지면이나마 감사와 온정에 대한 표현이 있어야겠다 싶어 이렇게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그 동안 너무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건강이 회복되기라도 하면 한 턱 쏘겠습니다. 거듭 감사 드리고 두 분 건강하시고 내내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그 편지를 읽으며 아내와 나는 그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내는 곧바로 찾아가자고 했지만 난 지금 상황에서 방문한다는 것은 그와 가족들을 괴롭히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편지를 썼다. 교단은 달랐지만 그와 나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여러 분야에서 함께 일하며 친분을 쌓았다. 본의 아니게 실수한 것이 있으면 잊어달라 하신 선배 목사님을 모시고 같은 봉사단체에서 일하기도 했고, 지금 온타리오 목사회 전신인 한인교역자회에서 함께 봉사하기도 했다.


주관이 뚜렷했고 강직했던 그와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되면 쉽게 물러서지 않았던 나와는 대립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우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큰 문제없이 함께 지낼 수 있었다.


편지에 함께 지내던 시절의 일들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속히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같이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노라 적었다. 그리고 그가 한 턱을 쏘면 나는 두 턱을 내겠다는 말로 편지를 끝냈다. 


그가 8월 18일에 보낸 편지를 받은 다음날 답신을 보냈는데 답장 아닌 그가 눈을 감았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8월 29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만 아니라 주위 분들에게 생의 이별을 고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누워있기도 힘든 상태에서 일어나 앉아 함께 지내던 사람들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생의 마지막 편지들을 쓰는 그의 모습을 머리에 그리며 나도 생을 정리하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진 운명”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해져 있는 그 운명의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생의 경계선 넘어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렇게 가버린 이들의 소식을 전해들은 이들을 “그 사람 죽었대.”라 말하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일상생활을 계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짐이 되어 무덤으로 가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닥 모를 때의 심연”이 우리 모두의 앞에 놓여 있으니까 말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의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아침 해가 떠오르면 살아질 수밖에 없는 안개와 같은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은 남기고 가는 것이 주어진 인생의 몫을 감당하는 길이라 믿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란 시간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말고 순간순간을 “마지막 수업”을 하는 학생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손해를 주는 일을 하지 말며, 옳고 정의로운 일이라면 앞장서서 실천하면서 말이다. 


성경은 이같이 살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구체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땅에 묻지 말고, 최대한으로 늘려서 활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최선을 다해 발휘하여 이웃과 사회에 유익을 끼쳐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들은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듯이 살아간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삶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우리에게 할당된 은사와 능력을 이웃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아울려 인생연극이란 연극이 막을 내릴 때까지 우리가 계속해야 할 연기는 어떤 면으로든 우리로 인해 상처받고, 피해보는 사람들이 없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미 그런 일을 행했다면 피해 받은 분들에게 사죄하고 용서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마음의 평화를 되찾으며 우리들의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뿐만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화목하며, 그들에게 관용과 긍휼을 베풀며,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우리들의 것처럼 여기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어야 할 줄 안다. 그래야만 남은 삶의 기간 동안 우리에게 위로 받고 힘을 얻어 새로운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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