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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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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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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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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1
예수님의 비유-포도원 농부 비유


 

“또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있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로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마 21:33-46)

 

 

“두 아들 비유” 다음으로 마태복음에 나오는 “포도원 농부 비유”는 마가복음(12:1-12)과 누가복음(20:9-19)에도 기록되어 있다. 세 복음서에 모두 다 같이 나오는 이 비유는 표현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내용과 핵심은 같으며, 예수님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두고 한 비유라는 점도 세 복음서에 명시되어있다. 또한 이 비유는 당시 유대 사회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유대인들에게 잘 전달되고 이해되는 내용이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안에는 포도즙 틀을 들여놓고, 망대를 세우는 등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모든 조처를 취한 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먼 곳으로 떠난다. 당시에 흔히 있던 일이었다. 그 시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은 여러모로 불안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이 농장이나 집 또는 포도원을 그들 명의로 장만해 놓고는 세를 주고 장기간 여행을 하거나 아예 안전한 곳에 가 살면서 세만 받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는 현금이나 농장 소산물의 일정 양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경제가 일반적으로 침체된 시기였기에 그런 식으로 계약을 맺고 남의 농장이나 포도원을 경작하는 사람들을 구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의 경우 땅을 사서 포도나무를 심고 재배하여 포도를 수확하는데 필요한 제반 시설을 갖추는 데 드는 경비는 주인이 부담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4년 간 포도원을 운영하는 비용과 농부들의 생활비도 주인이 책임져야 했다. 


포도나무는 심은 지 5년이 되는 해부터 열매를 맺는 나무다. 따라서 새 포도원에서 포도를 수확하여 수입을 얻기 시작하려면 많은 자금을 계속하여 투자해야 했음은 물론 5년이란 세월을 끈기 있게 기다리는 인내심도 지녀야 했다.


5년이 흘러 포도가 열릴 때가 되자 주인은 세를 받기 위하여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보낸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농부들이 마땅히 내야 할 세를 내지 않고 주인을 대신해 온 사람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뜻밖의 사태에 놀란 주인은 더 많은 사람들을 보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엄연한 계약위반일 뿐 아니라 형사적으로 처벌받아 마땅한 범죄행위를 농부들이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포도원 주인은 법에 호소하여 농부들을 엄하게 처벌받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낸다. 아들이 가면 농부들이 생각을 달리하여 그들의 잘못을 사죄하고 세를 바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주인으로서는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자비와 관용을 농부들에게 베푼 것이다. 그러나 완악한 농부들은 주인의 넓은 아량과 관용에 감사하는 대신 상상 못할 만행을 저지른다.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여버린 것이다. 주인의 아들을 살해하면서 그들이 한 말은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 주인의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였다.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땅을 사서 포도나무를 심었고, 포도가 달릴 때까지 모든 경비를 지불하며 그들을 지원해준 주인의 배려와 인내를 또다시 배반함과 동시에 탐심에 사로잡혀 포도원 자체를 그들의 소유로 만들려는 천인공노할 죄악을 범한 것이다. 이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다.(사 5:1-2, 7)


포도원 경작을 맡은 농부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며, 주인의 명을 받들어 포도원에 갔다 봉변을 당하고 죽기까지 한 사람들은 선지자들이다. 주인의 아들이 예수님임은 명약관화하다. 이 비유를 들으며 사람들은 이 같은 사실을 즉석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선조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비유를 읽는 우리들도 이 비유를 들려주시던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진리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신뢰는 크기만 하다. 아담과 하와에게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며 이 세상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며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관리하는 전권을 주신 사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이 막대한 자본과 노력을 투입하여 이룬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일임하고 멀리 떠났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책임의 막중함과 우리를 향한 기대가 어떤 것인가를 들려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충족시켜드리지 못했다.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사명을 주시고 그것을 감당할 능력까지 주셨건만 우리들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에 바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몫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농부들이 주인이 모든 것을 준비해 주고 떠난 포도원에서 제대로 일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탓하거나 벌하지 않으시고 우리들이 제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아버지가 집 떠난 탕자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하지만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인내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인내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때가 되면 공의에 따라 우리를 심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자기 아들까지 죽인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제 때에 세를 낼 다른 농부들에게 맡기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반드시 오고야 말 심판의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할 인생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이 복되고 성공된 삶이다. 그런 축복받은 사람들의 대열에 서려면 공의의 하나님의 진로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에 오시면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고 배척하며 핍박하다 끝내 참혹한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알고 계셨다. 


죽을 줄 알면서도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동시에 그가 향하는 길이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로 뚫린 것을 알면서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맞아 파멸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행위는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처럼 악하고 큰 죄악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용서받지 못할 죄악을 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그 시신을 바위굴에 눕혔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어 그의 우편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며 역사를 주관하는 만왕의 왕으로 삼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고 완악한 무리들에 의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되어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다. 악인들이 아무리 머리를 맛 대고 악랄한 음모를 꾸미며 하나님의 뜻에 도전한다 해도 패배를 모르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결코 악인들의 사악한 계교가 이루어지게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비유를 끝내시면서 예수님은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님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깨어질 것이요, 그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라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과 충성을 바치는 대신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여 대항하는 자마다 비참한 패배자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될 것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넓은 사랑의 품에 안기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에 붙잡히느냐의 차이는 크기만 하다. 어느 것을 택하느냐는 우리들의 선택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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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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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9
예수님의 비유-두 아들 비유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하니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들 중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 21:28-32)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두 아들 비유”는 예수님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지적하기 위해 들려주신 세 비유 중(마 21:28-32, 33-46, 14:1-14) 첫 번째 것이다. 두 아들이 있는 사람이 어느 날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말만 했을 뿐 포도원에 가지 않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는데 둘째는 가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잠시 후 마음을 바꿔 포도원에 가서 열심히 일한다. 이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그를 둘러싼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에게 “두 아들 중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느냐?”고 묻는다. 그들이 입을 모아 둘째 아들이라 답하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 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말씀하신다.


간단하고 짧은 비유다. 하지만 이 비유 속에는 다른 어떤 비유들 못지않은 귀한 교훈과 깊은 진리가 숨겨져 있다. 그것을 찾아내려면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려 주셨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생애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일주일을 지내며 여러 가지 기적을 베풀고 많은 것들을 가르치셨다.

그 중 “두 아들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예수께서 하신 두 가지 중요한 일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것”과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대로(슥 9:9)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으로 들어가시니 각종 매매 행위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분노하신 예수님은 거기 있는 장사꾼들을 다 몰아내시고, 돈 바꿔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그런 후 “내 거룩한 성전을 너희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준엄하게 책망하셨다.


그 다음 날 이른 새벽 베다니에서 밤을 지내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다 시장하신 예수님은 길가에 서있는 무화과나무로 다가가셨다. 무화과로 시장기를 메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나무는 잎만이 무성했을 뿐 열매는 하나도 없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향해 “네가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하시자 나무가 곧 말라버렸다. 


이 두 사건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임과 동시에 경고였다.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며 쫓아낸 것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시장바닥으로 만든 그들을 향한 채찍이었으며,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한 것은 입술로만 여호와를 찬송하는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를 리 없는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이 더욱 강해짐과 동시에 예수님을 감시하는 그네들의 눈초리도 더 날카로워졌다. 때문에 그들은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에게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며, 또 누가 이 권위를 네게 주었느냐?”고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예수님은 “나도 너희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알려주겠다.”고 하신 후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라 물으신다. 


그들은 서로 상의한 후 모른다고 답한다.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째서 요한을 믿지 않느냐?”할 것이요,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믿는 백성들의 분노를 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도 너희의 질문에 답하지 않겠다.”라 말씀하신다. 시비를 걸어온 무리를 멀쑥하게 만드신 후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가 “두 아들 비유”다.


이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약속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만 행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인류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다. 아브라함을 인류 최초의 선교사로 임명한 후 그와 그의 후손 이삭과 야곱을 이 땅의 나그네가 되게 하여 이 민족 저 민족, 이 나라 저 나라로 방황하게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을 인도하며 보호하셨다. 그들이 400년 간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소멸하기는커녕 크게 번성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갈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애굽의 추격 군을 수장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하여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다. 고기를 원하는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보내주시고, 하늘 양식 만나를 내려주셨으며, 반석에서 물을 내어 그들에게 마시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삶의 지침인 율법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광야를 횡단하면서, 또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투 중에도 우상숭배, 음행,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반항 그리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등 온갖 죄악을 저질렀다. 그들이 범한 그 많은 죄악들은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인한 것이었다. 전능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그들의 언약을 깨어버린 것이다.


그들의 후예인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 자부했으며, 사람들 앞에서 가장 경건하고 성결하게 사는 것처럼 자신들을 철저하게 위장했다. 성스러운 모습으로 성전을 드나들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룩하게 기도했으며, 사람들이 모인 곳을 찾아 다니며 구제행위를 연출함과 동시에 그들이 금식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요즘 유행하는 “위장 쇼”를 자연스럽게 펼치며 사는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너희들은 하나님의 진로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마 3:7)라 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쳐 “겉은 깨끗하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찬 잔과 대접이며”,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한 회칠한 무덤 같은 존재들이라”(마 23:25-27) 말씀하셨다.


둘째 아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죄악 된 삶을 살던 세리와 창녀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죄의 길을 걸으며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네들은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의 음성을 듣고 그들의 죄를 자백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는 율법이 무엇인지 조차 모른 채 살던 사람들이 허다했다. 그들도 요단강가에 서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세례 요한에게 나와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 발하는 광야의 소리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선포하시는 천국복음까지도 배척했다. 


그들이 두 아들 중 나중에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 둘째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고 하자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들에게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리라.”하신 까닭이 여기 있는 것이다.


둘째 아들이 결국은 아버지의 말에 따라 포도원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또한 아버지를 완전히 기쁘게 해드린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포도원으로 향했어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두 아들 비유”를 통하여 입으로는 순종하겠다고 서약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불순종을 지적하여 꾸짖는 한편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이들에게 하늘 문은 열린다는 사실을 일러주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아들 비유”는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이 깊이 생각하고 받아드려야 할 중대한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 날 우리들 주위에는 우후죽순처럼 교회가 세워져서 “주여, 주여”를 연발하는 교인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돈독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신도들이 늘어만 간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금과 은”을 지닌 교회는 늘어가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새벽마다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성도들은 많기만 하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도 허다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며, 그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삶을 불태우는 이들은 귀하기만 한 것이 오늘날의 실정인 것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외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기만 했던 그 옛날 이스라엘의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으며, 표리부동하면서도 가장 의로운 듯 행세하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과 같은 “교회 다니는 성도”들이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며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약 1:22)이 되어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는 그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우리들 되어야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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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포도원 품꾼 비유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에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하니 들어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 일시에도 나가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 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하니, 제 십 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 하였거늘 그들은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함으로 네가 약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16)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 중의 하나인 “포도원 품꾼 비유”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익숙했던 포도원 경작에 관한 것이 그 내용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포도를 따는 달인 9월 어느 날 한 포도원 주인이 아침부터 장터에 나가 그때 일당인 한 데나리온씩을 주기로 하고 품꾼들을 고용한다. 


그때가 아침 6시였는데 9시에 또 장터에 나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주겠다.”(Whatever is right.)고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낸다. 12시와 3시에도 같은 방식으로 품꾼들을 얻었고, 하루 일과가 끝나는 한 시간 전인 5시에도 장터에 가서 그때까지 서성대는 이들에게 “어찌하여 종일 놀고만 있느냐?”고 묻자 그들은 “우리를 부르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라 대답한다. 그 말을 듣고 주인은 “지금이라도 내 포도원에 들어가라.”며 그들을 고용한다.


그날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을 구하기 위해 네 번이나 장터를 오가야 했다. 아침에 필요한 품꾼들을 다 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필요하면 보충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랬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어쨌든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을 모으러 네 번이나 장터를 찾았다. 장터에선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가 행해지는 곳이다. 


하지만 그 당시 유대지방에서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모여드는 곳이 장터이기도 했다. 때문에 장터에는 언제나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는 특수한 기술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아무 일이나 시키는 대로 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저녁 6시가 되자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일한 사람들을 전부 모아 품삯을 주라고 지시한다. 품꾼들의 일당은 당일에 지불 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청지기는 주인이 분부한대로 5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들부터 품삯을 주기 시작한다. 


그런데 한 시간밖에 일을 안 한 그들에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씩이 지불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품삯을 받은 그들의 기쁨은 컸으며, 그들은 진심으로 주인의 관대함에 감사했다. 다른 품꾼들도 놀람과 동시에 그들에게도 시간당 한 데나리온씩을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씩만이 지불되었다. 


9시와 12시에 시작한 이들을 좀 서운하기는 했지만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는 더 받았기에 불평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새벽부터 시작한 품꾼들은 주인에게 항의한다. 종일 뜨거운 햇빛을 견디며 일했는데 마지막에 와서 잠깐 일한 이들과 같은 대우를 하느냐면서 말이다. 그들의 주장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앞장 선 품꾼에게 말한다.


“친구여, 나는 네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지 않았느냐? 그러니 네 몫을 가지고 가라.”라고 말이다. 불편한 심기로 돌아서는 그에게 주인은 한마디 더 한다. “나중 온 사람을 너와 같이 대하는 것이 내 뜻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하느냐? 내가 관대한 것을 너는 악하게 보느냐?”라고.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 중 “가장 위대하면서 영광스러운 비유”중의 하나로 알려진 “포도원 품꾼 비유”가 우리들에게 말해주는 교훈과 진리는 크기만 하다. 우선 이 비유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자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베드로의 말대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이지 예수님을 섬긴 기간이 길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에게 더 큰 특권과 영광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보다 나중 예수님을 따른 이들에게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구원이란 선물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악한 일만을 행하며 살던 흉악한 강도가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어가면서 옆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하자 예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즉석에서 그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만의 것이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족속들로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종과 민족에 관계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드리는 모든 이들을 그의 자녀로 삼아주신다. 포도원 주인이 온 종일 일한 사람이나 마지막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같은 액수의 일당을 주었듯이 말이다. 


이것은 교회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할 충고이며 경고이기도 하다.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교회의 기득권 투쟁이 그친 적이 없었고, 교회에서 텃세를 부리려는 추세는 날로 심해지는 것 같다. 


창립멤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나오기 시작했기에, 또는 헌금을 많이 내며 여러 분야에서 봉사한다는 이유들을 내세우며 교회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이들은 기억해야 할 줄 안다. 교회는 오래 다니며 헌금 많이 바치고 열심을 낸다고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인정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포도원 품꾼 비유”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높고 넓고 깊으면서도 한없이 자상한 것임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날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들을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이들이었다. 사반세기 전 중국 심양 장터에서 각종 연장을 손에 들고 장에 온 사람들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말하며 일거리를 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본적이 있다.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타인 장터에서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던 것 같다. 


포도원 주인을 그처럼 절박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해 한 번이면 될 것을 네 차례나 장터에 나갔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구하는 자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시다.


이 비유가 들려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는 하늘나라의 경제원칙은 세상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기업인들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윤을 얻기 원하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 인건비를 줄이고자 한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품꾼을 여유 있게 불렀으며, 나중 부른 이들에게도 하루 품삯을 지불했다. 경제원칙에도 어긋나고, 그 자신이 큰 손해를 입는 어리석은 행위였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서 그는 하늘나라의 경제원칙이 어떠한 가를 보여준 것이다. 


어느 분이 이 비유에 대하여 말하면서 “천국의 경제학은 효율성 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시 한다.”라 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 아닐 수 없다. 하늘나라의 상급이 철두철미 능력이나 실적에 의해 결정된다면 큰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나 복음을 널리 전한 전도자들에게 제일 큰 상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상벌기준은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에게 많은 것을 주는 것”(마 25:23)이라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이 비유의 핵심을 우리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우리가 천국의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원칙과 공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 때문임을 말해주는데 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하는 요한과 야고보에게 예수님은 “내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다.”(마 20:23) 하신 것으로부터 이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좋은 것들을 주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라 노래한 다윗을 본받아 하나님의 측량 할 수 없는 사랑과 축복과 은혜를 우리 것으로 만들며 살아가는 우리들 되어야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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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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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4
예수님의 비유-장터 아이들 비유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6-19)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다른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도다.’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 7:31-35)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세례 요한은 그 사명을 누구보다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마 11:11)고 평하셨다.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제일 복된 사명을 가장 성공적으로 완수한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칭찬을 받는 요한이지만 헤롯 왕에 의해 투옥되어 있을 때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 묻게 한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답하지 않으신다. “가서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입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 하라”가 예수님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옥에 갇히기는 했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하늘진리를 가르치시고 선포하시며, 갖가지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신다는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출현할 때 일어날 일들 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오신 구세주라는 사실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제자들을 보내 “당신이 그 사람입니까?”라 묻게 한 것은 “내가 그로다.”란 예수님의 직선적인 답변을 듣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앞으로 그가 예수님을 위해 해야 할 또 다른 일이 없는가를 알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가 메시아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심으로 그가 누구신가를 요한에게 전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가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런 후 들려주신 비유가 ‘장터 아이들의 비유’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지방에 어린이 공원이나 놀이터가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러기에 아이들은 장터를 그들의 놀이터로 자주 이용하였던 것 같다. 부모를 따라 장보러 왔다 자기들끼리 모여 놀 수도 있었고, 어른들이 있는 곳에서 노는 것이 안전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들이 즐기던 놀이 중에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가 있었다. 아마도 그 당시 유대인들의 기쁨의 상징이던 혼인잔치와 엄숙하게 거행되던 장례예식을 눈여겨보던 아이들이었기에 그들 나름대로 결혼식과 장례식을 흉내 내며 놀았다고 생각된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 행세를 하는 소꿉장난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날 장터에 모였던 아이들이 결혼식 놀이를 할 때 피리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할 아이들이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피리 불던 아이들이 불기를 그치고 슬피 우는 흉내를 내었다. 결혼식 놀이를 장례식 놀이로 바꾼 것이다. 그래도 함께 놀던 아이들은 가슴을 치지 않았다. 장례식 놀이가 시작되었어도 울어야 할 아이들이 잠잠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란 질문 형태로 피리소리가 들려도 움직이지 않고, 곡하는 소리가 나도 울기는커녕 우는 시늉조차 하지 않아 놀이 자체가 깨져버린 사실을 들려주셨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광야에서의 세례 요한의 외침과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차가운 반응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세대’는 일반적으로 ‘표적을 요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 12“39),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마 17:17),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막8:18), 다시 말해 ‘죄악의 세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비유에 명시된 ‘이 세대’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시대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믿어진다. 


예수님의 전령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마 3:2)고 외치며 그리스도가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 했지만 사람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큰 무리가 그 음성을 선지자의 것으로 알고 그에게 몰려들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출현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직접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받으라.”(막 1:15)하셨어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세례 요한의 광야의 소리를 의미하는 슬픈 음악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요지부동이었고,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기쁜 노래가 들려와도 그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백성들만이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에 무관심하며 냉대의 눈초리를 보였던 것은 아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 종교지도자들 또한 요한과 예수님에게 비판적이고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례 요한을 ‘귀신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다. 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와 야생 꿀을 주식으로 삼으며 속세와 절연하고 금욕생활을 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심지어는 죄인들과도 자리를 같이하여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무절제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려 오셨기에 그의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과 함께 웃고 운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들 속으로 파고 든 예수님을 그들과 같은 부류로 여겼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무지하여 그런 엄청난 과오를 범할지라도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정체를 바로 파악했어야 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제사장들은 백성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선량한 민중들을 선동하여 자기네 권위에 도전하는 겁 없고 당돌한 젊은이로, 요한은 돌연히 광야에서 뛰어나와 선지자 행세를 하려는 악령에 사로잡힌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어째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까닭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 둘 다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네야 말로 진정 의로운 사람들이라 믿고 그렇게 행세하며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로를 피하라 하더냐?”라 질책했고, 예수님 역시 그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셨다. 그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드리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와 그 시대를 이끌어 가던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를 예수님은 ‘장터 아이들의 비유’를 통해 들려주신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만을 바라는 소망을 지녔던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현실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생의 목포로 삼았다. 가난에 허덕이고, 정치적으로 억압당하며, 특권계층의 학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세례 요한이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라.”라고 한 호소는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그들은 요한이 그 뒤에 오실 예수님이 메시아라 한 말을 무시해 버렸다. 한 마디로 그들은 회개에 관심도 없었고, 회개할 의도도 없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천국복음을 선포하셨어도 그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백성들도 종교 지도자들도 모두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회개를 통한 구원을 원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그가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하신 벳새다와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을 보시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으리라.”(마 11:23)하신 것은 ‘장터 아이들의 비유’의 설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그의 전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지적해 주셨다. 비유를 마치시면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으리라.”하신 말씀이 귀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그 말씀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제일 축복된 사명인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일을 가장 충실하고 완벽하게 완수한 세례 요한의 삶과 하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인류구원의 사명을 이루신 예수님의 생애가 진리를 밝히며 최후 승리를 가져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닦아 놓은 길을 통해 오신 예수께서 하늘나라로 연결되는 도로를 건설하셔서 그리로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문을 열어놓으셨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어떻게 그 길로 들어설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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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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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예수님의 비유-배은망덕한 신하 비유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들을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3:21_35)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라는 두 속성을 지니고 계시기에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들이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란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변하지 않지만 사랑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로 인해 인간들은 죄 사함을 받고 천성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시며, 인간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베드로도 이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주여,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 물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베드로는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라고 자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버린 것이다. 그 당시 랍비들은 다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세 번까지는 용서해 주라고 가르쳤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세 번의 두 배에다 한 번을 더 보태서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라 말씀드린 것이다. 예수께서 넓은 아량을 가졌다고 칭찬해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예수님의 답변은 베드로를 실망시키고 부끄럽게 했음에 틀림없다. 예수님은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답하셨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490번을 용서하라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용서의 횟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용서의 정신’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어서 들려주시는 ‘배은망덕한 신하 비유’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유는 “하늘나라는 그 종들과 결산을 하려는 어떤 임금과 같다.”로 시작된다. 결산이 시작되면서 만 달란트를 빚진 신하가 임금 앞에 선다. 만 달란트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게 큰 액수다. 역사가 죠세프스에 의하면 그때 헤롯 왕이 통치하던 유대의 일 년 예산이 900 달란트였다. 


여기 근거하면 그 신하가 임금에게 진 빚은 유대왕국의 11년 예산과 같은 엄청난 금액이며, 오늘 날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는 돈이었다. 이처럼 막대한 돈을 그 신하가 무슨 목적으로 임금에게서 빌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능력으로는 갚을 수 없는 큰 규모의 빚이었다.


임금이 신하에게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팔아 빚을 갚으라고 하자 그는 반드시 갚겠으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애원한다. 임금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매달린 것이다.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임금은 빚 전액을 면제해 주었다. 


일급 살인혐의로 기소되어 법정에 선 죄수에게 무죄가 선고된 것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놀라운 혜택을 입은 신하는 기뻐 날뛰며 궁궐을 떠난다. 그런데 대궐 문을 나서면서 신하는 그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난다. 그 순간 그는 그 사람의 목을 붙잡고 빚을 갚으라고 윽박지른다.


가련한 채무자는 그 앞에 엎드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한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에게서 받은 크나큰 혜택은 깨끗이 잊어버린 듯이 일언지하에 채무자의 간청을 묵살하고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린다. 


여기서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가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만 달란트를 신하가 갚기에는 너무도 큰 돈 이었다. 그러나 백 데나리온은 일반 서민의 100일 벌이에 해당하는 큰돈이기는 했지만 만 달란트의 오십만 분의 일 밖에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 신하는 이처럼 그가 탕감 받은 만 달란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적은 액수의 빚을 진 사람의 딱한 사정을 외면하고 가련한 사람을 감옥에 보낸 것이다. 이를 본 신하의 동료들은 분개하여 이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임금도 진노하여 그 신하를 다시 불러 그의 매정함을 꾸짖고 만 달란트를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투옥시키라고 명한다. 


이 비유에는 용서를 몇 번까지 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이나 암시는 없다. 어떻게 용서를 할 것인가에 관해서만 말해 줄 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려운 이웃에게 돈을 빌려주면 이자를 받지 말 것은 물론 빚 독촉을 하지 말며, 옷을 저당 잡았을 때도 자기 전에 옷을 돌려보내라고 하셨다.(출 22:25_27) 


뿐만 아니라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으로 정하고 그 해에는 모든 채무를 면제하고 노예들까지 해방시키도록 하셨다.(레 25: 8-10)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자비와 정의’는 병행되어야 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 달란트 빚을 면제받은 신하가 그에게서 백 데나리온 빌려간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조차 안하고 엄격하게 법을 집행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문제의 신하를 불러 ‘악한 자’라 질책하며 탕감해 주었던 빚을 다 갚으라고 명한 것이다.


‘배은망덕한 신하 비유’는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그와 같이 하실 것이라.”로 끝난다. 이 끝맺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가 어떤 것인지 또 우리가 어째서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 가를 깨달을 수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지닌”(렘 17:9) 것이 인간이다. 


이런 인간의 죄악상을 사도 바울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이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3_18)라 들려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며, 우리를 그의 사랑의 품 안에 안아주신다.(시 103: 8,14)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여호와께서는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하시며,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하실 것이라.”(사 1:18)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발로 밟으시고, 깊은 바다에 던지셔서”(미 7:19)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분”(사 43:25)이시다.


임금이 그의 신하가 진 만 달란트 빚을 면제해 주는 자비를 베푼 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보내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뜻한다. 


이제 그 놀라운 자비를 입은 우리가 할 일은 구원받은 기쁨을 우리만이 누릴 것이 아니라 아직도 죄의 빚을 갚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우리의 빚을 대신 갚아 주신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우리를 섭섭하게 하고, 억울하게 하며, 우리에게 부당하고 잘못된 일을 행하는 이웃에게 당하는 대로 갚으며, 때로는 그 이상으로 그들을 괴롭힌다면 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고도 그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옥에 가둔 배은망덕한 신하 같이 사람들에게 지탄 받고,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비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별설교를 하시면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하신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예수께서 일러주신 진정한 용서의 정신을 지니고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배은망덕한 신하 비유’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로 끝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줄 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느니라.”(야 2:13)는 예수님의 사랑의 권고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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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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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0
예수님의 비유-그물 비유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골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7-50)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일곱 개의 비유 중 마지막 것인 “그물 비유”는 세 번째인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둘 다 최후의 심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는 추수 때까지 둘이 함께 자라지만 “그물 비유”에서는 잡은 고기 중 좋은 것과 못된 것을 즉석에서 가려낸다. 


세 번째 비유에서는 농부와 일꾼들과 추수꾼 등 여러 명이 등장하며, 일이 진행되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마지막 비유는 어부들이 그물을 던져 잡은 고기들을 물 가로 끌어내는 과정만을 간략하게 들려준다. 


“가라지 비유”에서는 농부가 좋은 씨를 뿌린 후에 원수가 밤중에 몰래 가라지를 뿌렸지만 “그물 비유”에선 팔 고기와 못 팔 고기를 한 번에 잡은 것도 서로 다른 점이다.


예수님이 “그물 비유”를 들려주실 때 제자들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그리고 흥미롭게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대부분이 어부 출신인 제자들에게는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열심히 그물을 던지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하신 일도 생각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들의 전 재산인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기억과 온갖 고기들이 팔딱대는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려 팔 수 없는 고기들을 바다로 다시 던지던 일도 떠올랐을 것이고 말이다.


그때 어부들이 그물에서 나쁜 고기를 가려내는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너무 작아서 먹지 못할 것들과 독성이 있는 고기들은 당연히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부들이 팔 고기와 못 팔 것을 구분하는 자장 중요한 기준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느냐 여부였다.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먹어서는 안 될 물고기들이 명시되어 있는데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으면 가증한 것”(레 11:10)이라 되어있다. 따라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으면 팔 수 없는 고기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물에 들어왔지만 못된 것들은 버린다고 하신 까닭은 심판 날에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드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가 그물 속의 고기들을 분류해 내었듯이 마지막 심판 때도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을 갈라내신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물 비유”에는 두 가지 핵심이 내포되어 있다. 첫 번째 핵심은 어부가 던진 그물에 고기들이 들어가는 것처럼 예수님의 복음의 그물에 들어가야만 구원으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불길이 꺼져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모든 것을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의인과 악인을 가르신다는 것이다. 


어부는 좋은 고기만을 잡을 목적으로 그물을 던지지 않는다. 상품가치가 있는 고기만을 잡는 그물이 별도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당시 갈릴리 어부들이 정방형의 그물을 던지고 노 저어 나가면 그 근방에 있던 모든 고기들 즉 유대인들이 먹을 수 있는 것도, 너무 작거나 독성이 있어서 팔 수 없는 것들도 함께 걸려들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말해 주는 교훈과 진리는 참으로 귀한 것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5“15)는 것이었다. 지역적으로는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인종적으로는 세상 모든 족속에게 미쳐야 하는 것이 복음인 것이다. 


때문에 교회는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드려야 한다. 교회는 재능이나 특별한 은사를 지닌 사람들, 고학력 소유자, 재력이 풍부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 또는 믿음과 주를 향한 충성심이 강한 성도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아무도 교회에 들어올 자격자와 무자격자를 공정하고 정확하게 판정할 수도 없다. 예수님이 ”너희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마 7:1-5) 하신 것을 기억할진대 우리 중 누구도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비난하고 판단하며 정죄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함께 자라던 알곡과 가라지가 가려지고, 한 그물 안에 있던 고기들이 팔려갈 것과 버려질 것으로 분류되듯이 함께 주를 섬기던 성도들이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되는 때가 반드시 오게 된다.


누구나 복음을 듣고 받아드릴 수 있으며, 교회를 섬길 수 있지만 모두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며”(마 22:37),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며”(요 13:34), “하나님께 전적인 충성을 바치며”(고전 4:1-2) 사는 것은 아니다. 


구약시대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살았던 것처럼”(사 29:13; 마 15:8), 입으로는 “주여, 주여”를 연발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기만 한 세상이다(마 7:21-23). 이와 같이 표면적으로는 같아 보이는 성도들이 최후의 날에는 서로 다시 못 볼 길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그물 비유”는 말해주고 있다.


“그물 비유”에 등장하는 어부들은 고기들을 잡으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작업은 하지 않는다. 갖가지 고기들이 날뛰는 그물을 끌고 육지까지 온 후에 그물을 열고 팔 것과 버릴 것을 고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대로 행한 성도들과 행함이 없는 믿음을 지니고 교회를 드나든 신도들을 구분하는 역할은 복음증거자 아닌 천사들에게 맡겨진다. 


아무리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기도한 전도자도 마지막 심판 날에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천국행 비자를 발급받을 성도들을 골라내는 일은 천사들의 몫이며, 그들의 비자에 최종적으로 서명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구원은 철두철미 “개인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배우자 중 하나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부부가 함께 천국시민이 될 수는 없다. 이 원칙은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친척과 친지 사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가 구원에 이르는 대원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관 이시라는 사실은 우리가 받는 위로의 근원이요, 우리의 최대의 소망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혼탁한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고통과 슬픔 속에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만 산다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 “착하고 충성된 자”라 부르시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소망과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의 힘이야 말로 우리가 모든 난관을 극복하며 천성을 향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환란과 핍박과 이 사회 속에서 우리가 당해야 하는 부당한 대우와 억울함은 많고 크기만 한다. 


 우리들만이 그런 것을 느끼고 체험한 것은 아니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그의 삼촌이 아버지를 독살하고 그의 어머니를 아내로 삼고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살아야 하느냐? 죽어야 하느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동시에 온갖 부정과 갖가지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은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무지하고 난폭한 사람들의 횡포, 압제자들의 참기 힘든 악행, 정의를 외면하는 법 집행자들, 권력의 자리에 있는 이들의 오만과 소인배들의 불손함을 보고 느끼며 햄릿은 날카로운 비수를 그의 가슴에 꽂고 싶은 충동까지 느끼게 된다. 만약 햄릿이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불굴의 명작 “햄릿”은 다르게 써졌을 지도 모른다. 


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웃으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지만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채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형을 내릴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뜻있는 사람들 특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지금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국가의 안보가 심히 위태로워 졌고, 온 국민이 피와 땀으로 일으키고 지켜온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크게 위협받고 있으며, 언제 붉은 마수가 한반도를 덮을지 모르는 형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단결하여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한국을 더욱 안정되고 번영된 나라로 만드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 줄 믿는다. 


그러나 그들의 불의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나라를 사지로 몰고 가는 소수의 위정자들은 하나님의 진로의 채찍을 피할 길 없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천인공노할 민족적 죄악을 깨닫고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하나 되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일들을 행한 잘못을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께 충성하는 십자군의 정병들이 되어 선한 싸움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 조국이 위기에서 벗어나고, 우리들 자신들도 최후의 심판 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비참하고 슬픈 운명을 맞이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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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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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새해를 맞이하며

 

 

 


 
겨울 나그네가 되고 싶었다. 나그네가 되어 지난 열두 달을 되돌아보며 새해에 할 일들을 정리해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배낭을 둘러메고 관광버스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했다. 창밖에는 잔뜩 흐린 날씨가 눈발을 휘날리고 있었고, 고속도로에는 자신들만의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달리는 차량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 차량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속도를 생각했다.


반백하고도 20년이 넘는 세월이 아쉽게도 너무나 빨리 흘러갔다. 그 세월 속에서도 속도를 내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있는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젠 먼 옛날이 돼버린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많은 기억들이 차창으로 투영되었다. 그 중에서 대구에서 목격했던 한 장면이 클로즈업되었다. 


1.4후퇴로 남으로 향하던 피난길에 대구의 친척집에 머물던 때였다. 어느 날, 친척 형이 빈 사과상자 위에 과일과 과자 등을 팔고 있는 노점 옆에 서 있을 때였다. 흑인병사 두 명이 놀랍게도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그 가사는 이러했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조선왕조 오백년 양양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 


처음에는 미국군인들이 우리말로 노래하는 것이 너무도 신기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나이가 어린 탓에 가사의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었다. 형의 설명을 듣고 남의 나라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주는 그들에게 놀라움과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나의 심정에 그들은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이슬처럼 죽겠노라”고 더 큰 목소리를 내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차창에 비친 동영상은 그날 ‘충정가’를 부르며 어깨동무하고 멀어져 가던 그들의 뒷모습에서 멈춰버렸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나라는 그들과 같이 큰 목소리가 아닌 마음으로만 ‘충정가’를 부르는 애국시민들이 너무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6.25전쟁은 북괴가 대한민국을 공산화시키기 위해 치밀한 계획과 준비 끝에 발발한 전쟁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유엔군이 즉각적으로 참전할 수 있었던 당시 국제정세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보다는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겠다는 대한 남아들의 조국애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공산침략군을 몰아내겠다는 범국민적 의지와 결단이 북괴의 야욕을 막을 수 있었다. 


실제로 국군장병들은 모두 시인 모윤숙이 광주에서 만난 스물다섯의 소위가 되어 싸웠다.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 숲을 달리며 이순신, 나폴레옹, 시이저같이 싸웠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충정가의 한 소절처럼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이슬처럼 죽겠노라”며 싸우다 죽었다.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기 위해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하고 앞장서서 적진을 향해 돌진한 장군도 있었다. 


이와 같은 뜨겁고도 강한 민족적 열망은 마침내 붉은 이리떼들을 3.8이북으로 몰아냈다. 그리고 전 국민이 하나로 뭉쳐 우리나라를 세계가 인정하고 감탄하는 군사대국, 경제대국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자랑스럽게 변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지금 분열되고 있어서 참으로 가슴 아프다. 


한국전쟁 당시 “내가 왜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야 하나?”며 군복무를 기피한 젊은이들보다, 나라가 어찌되든 자기들만 살겠다고 몇 년 먹을 식량과 물을 실은 배를 타고 부산항을 빠져나가려던 썩어빠진 특권층들보다 더 뻔뻔한 세력들이 좀비처럼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종식된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려면 북한을 끌어안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수용하며 받아드리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주장과 “그렇게 하는 것은 한 번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의 체제 속으로 우리를 끌어드리려는 적에게 백기 투항하는 행위”라며 반발하는 세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디 그뿐인가. 북한은 전 세계를 향해 비핵화를 약속한 적이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도 “그들을 비핵화 시키기 위한 유엔제재를 완화시키는 것이 우리민족이 하나 되는 길”이라는 이들과 “그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속여 가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악한 의도를 실현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견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한반도의 문제는 “우리민족끼리 해결해야지 다른 어떤 외부세력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국제정세를 외면함으로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면서 남북 간에 평화를 이루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못할뿐더러 지극히 위험하다.”는 견해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이 같은 양극화로 인해 월남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한반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길이 진정한 애국의 길이며, 국가와 민족의 백년대계를 위하는 길인지를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할 줄 안다. 그 길을 찾기 위해서는 역사의 가르침과 선조들의 삶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35대 미국 대통령 케네디가 취임사에서 “조국이 여러분을 향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를 물으십시오.”라고 호소한 것 같이, 우리는 무엇이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길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특히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투사들이 어떻게 일제에 맞서 항거했나를 살펴보면 현 시점에서 우리가 조국을 위해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 1932년 1월 8일 동경에서 일본 천황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 그리고 1932년 홍구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행사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세 분의 애국지사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반만년의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본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젊은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겼다. 


이 세 분의 애국지사들은 “이 몸이 죽어 나라가 산다면 이슬같이 죽겠노라.”는 각오로 일제와 맞섰고,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으로 대한독립의 초석이 되었다. 그 외에도 강우규 의사, 나석주 의사,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그들의 목숨을 조국 광복의 제단에 바쳤다. 


우리는 이분들처럼 지금 위기에 처한 조국을 살리기 위해서 죽을 각오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라를 위한 일을 할을 때 어떤 형태로든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사나 상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또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원하고 계획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목적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본의 아니게 국익에 위반되는 일을 행하기 쉽다. 확보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또는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나라의 장래와 후손들에게 미칠 나쁜 영향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시 받은 대로 실시하는 것은 결코 애국하는 길은 아니다. 


반대로 국익을 해치며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일이라면 상부의 명령이더라도 불이익을 당할 각오를 하고 거부하는 것이 옳은 일이요, 진정한 애국정신의 발로라 믿는다. 냉정하게 또 객관적으로 멀리 보며 무엇을 택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것인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민주국가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남과 북이 힘을 합해 세계평화에 기여함과 동시에 우리나라를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과제다. 하지만 이 중대한 사명은 우리민족이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뭉쳐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이아가라에 도착했다. 나이아가라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장엄하다. 새해에는 아무리 쏟아내도 마르지 않는 나이아가라 폭포수처럼 우리 민족이 모두 애국의 물 한 줄기가 되어 혼란과 불안을 쏟아냈으면 한다. 그리하여 내 조국을 안전하고,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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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5
예수님의 비유-감취인 보화와 진주 비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취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4-46)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관한 비유가 일곱 개 나타나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고, 그 다음이 “알곡과 가라지 비유”이다. 이 두 비유에 관하여는 예수님이 그 의미를 직접 설명해 주신다. 


이어서 들려주시는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처음 두 비유에 비해 상당히 짧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고 미약하게 시작하여 한없이 크고 화려하게 성장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가 “감취인 보화”와 “진주” 비유인데, 둘 다 합해도 3절 밖에 안 되게 짧다. 내용도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말해주는 점에서는 같으나 각기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감취인 보화” 비유는 천국을 밭에 감추어진 보화에 비교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개인의 재산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보관할 수 있는 제도와 기관들이 있으나 그때는 그렇지 못했다. 금융기관이나 은행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국가가 개인의 소유까지 책임지고 보살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평생을 모은 재산을 일시에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금은보화와 귀한 것들은 땅 속에 묻어두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이 각자가 재산을 안전하고 지키고 보관할 수 있는 길이었던 것이다.


특별히 팔레스타인 지역 주민들은 이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역사상 팔레스타인 지방처럼 많은 전쟁이 일어났던 곳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물을 땅에 묻은 이들이 그 장소를 혼자만 알고 있다 죽은 경우 보물은 영원히 묻혀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가끔 그 보물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우연히 그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었다. 오래된 집이나 방앗간, 또는 벼락 맞은 고목나무 구멍에서 아이들이 값비싼 보화를 발견하는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 사실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 유대사람들에게 “감취인 보화”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땅을 파다 엄청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보화를 꺼내지 않고 흙으로 다시 덮는다. 그 당시 전통적인 유대 법은 찾는 자가 소유권을 갖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있는 땅이나 건물이 그의 소유여야 물건의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것을 알고 있었던 그 사람은 보물이 묻힌 땅을 사기 위해 전 재산을 판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서둘러 재산을 처분하는 것을 보며 의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많은 보화가 감추어진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들기 위해 그런다는 분명한 까닭이 있었다. 


이처럼 진정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소유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해야 함을 이 비유가 말해주는 것이다.


그 다음 나오는 “진주” 비유도 2절 밖에 안 되는 짧은 것이다. 한 진주장사가 세상에서 제일 귀한 진주를 발견하고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 샀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구약시대에는 진주의 가치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가 태동하는 1세기에 들어서면서 진주를 소유해야만 부자라고 인정될 정도로 귀한 보석으로 인정받은 것이 진주였다. 


예수님 당시 홍해에서 얻을 수 있는 진주는 질이 별로 좋지 않아서 좋은 진주를 원하는 이들은 페르시아 만이나 인도까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가곤 했다. 


진주 비유에 등장하는 상인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좋은 진주를 찾아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곳을 다니던 그가 마침내 한 곳에서 마음에 드는 진주를 찾는데 성공한다. 발견한 진주가 그가 그때까지 본 것 중 가장 좋은 것임을 확인한 진주장사는 그것을 사기 위해 자기 소유를 모두 처분한다. 보화가 있는 밭을 사기 위해 전 재산을 판 사람처럼 말이다.


진주장사가 그의 모든 소유를 처분하는 것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무척 놀라고 의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땅을 산 사람도, 진주를 매입한 상인도 그들이 하는 일이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하여 내린 중대한 결정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결단은 지혜롭고, 현명하고, 용감하고, 올바른 결심이었다.


이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이 두 비유가 들려주는 교훈을 정리하면 그 첫 번째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결코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땅 속에서 보화를 찾은 사람은 그냥 그곳을 지나다 보물을 보게 된 것이 아니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땀 흘리며 열심히 땅을 파다 삽에 딱딱한 것이 부딪치기에 더 깊이 판 결과 보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크고 좋은 진주를 손에 넣은 상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는 제일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여러 곳을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진주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수고의 땀을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정한 행복이나 참된 만족 나아가서 보람된 인생의 열매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리리라.”(마 7:7)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를 분명히 해주고 있다.


불굴의 인내와 피나는 노력의 결과 원하는 바가 눈앞에 다가오면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만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두 비유가 말해주는 또 다른 교훈이다. 보화를 찾은 이도, 진주를 발견한 상인도 그것들을 그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동안 축적한 모든 재산을 미련 없이 처분했다. 그 단호하고 지혜로운 결단이 그들에게 천국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준 것이다. 


여기서 “두 토끼를 쫓는 자는 한 마리도 못 잡는다.”란 격언이 뜻하는 바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유대인 관리가 영생에 이르는 길을 묻자 예수께서 “네가 지금까지 모든 율법을 지켰나니 한 가지 못한 일 즉 네게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하신다. 


그 말을 듣고 큰 부자였던 그는 슬픈 기색으로 자리를 떠나간다(눅 18:18-23).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재물 모두를 원했기에 하나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선택 자체를 못하거나 잘못하면 평생을 추구하던 인생의 목표도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땅 속에 숨겨졌던 보화가 무엇이었는지, 상인이 찾은 진주가 얼마나 크고 좋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보물과 진주 둘 다 그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들 이었음은 틀림없다. 그것들을 얻기 위해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소유 전부를 투자하는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과감한 선택을 보며 하늘나라를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서는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포기할 수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천국이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이레노스와 어거스틴이 땅 밑에 숨겨졌던 보화와 상인이 찾은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한 까닭이 여기 있다고 본다. 


두 교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에 근거했기 때문이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었던 어부들과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받던 세리 출신 그리고 보잘것없는 주변인간들로 구성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천국의 열두 진주 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위해 그들의 삶 전체를 희생하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믿는 자들을 가장 악랄하게 탄압하고 억압한 초대교회 최대의 적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핍박하고 말살시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인생의 사명이라 믿었다. 그러기에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벗어난 성도들까지 잡아 죽이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난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쳐오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괴롭히느냐?”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는 기독교 박멸운동에 매진하던 그의 과거를 청산하고 예수님께 그의 삶을 바치기로 결단한다. 


그 결과 그가 믿는 자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던 몇 배의 핍박을 받으며 복음증거에 앞장섰으며, “나는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내게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합니다. 내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입니다.”(빌 3:7-9)라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도로서 누구보다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한 충성된 사도가 되었다. 열두 제자들과 사도 바울 그리고 순교의 피를 흘리며 복음전선에서 싸운 수많은 믿음의 용장들은 모두 하늘나라를 얻기 위하여 하나뿐인 목숨을 버렸다.


용감하고 현명한 선택이요, 가장 지혜로운 투자였다. 그들과 같은 원칙과 정신으로 선택하고 투자하며 사는 우리들 되어야 할 줄 안다. 그래야만 영원하고 찬란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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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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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잊을 수 없는 성탄절

 

 

해마다 12월이 되면 몸과 마음이 바빠져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섣달에 들어서면 꼭 집어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픈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또 다시 일 년이란 세월이 돌아올 수 없는 과거 속으로 묻혀버리고 인생의 종착역이 한 걸음 더 다가왔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성탄절이 끼어있는 12월은 기쁜 달이기도 하다. 성탄의 의미 자체가 크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축적된 성탄절의 추억들을 뒤돌아 보노라면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길이 헛되지만은 않았음을 느끼게 되면서 남은 삶의 여정을 그려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탄절에 관한 나의 추억은 5살 때부터 시작된다. 그 해 성탄전야에 교회에서 돌아오신 할머니는 내일 새벽 성가대원들이 오면 대접할 것이라며 큰 솥에 팥죽을 쑤기 시작하셨다.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온다는 말에 흥분되기도 하고, 맛있는 팥죽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이 오면 꼭 깨워달라고 할머니에게 부탁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할머니가 깨우기도 전에 난 문밖에서 들려오는 찬송소리를 듣고 일어나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호롱불을 밝혀 든 사람들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성가가 끝나자 할머니는 그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준비한 팥죽을 대접했다. 뜨거운 팥죽 한 그릇씩을 먹고 나가는 그들에게 할머니는 다니면서 먹으라고 깨엿을 한 보자기 싸주셨다.


성탄절에 관한 나의 첫 기억은 이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맞이한 성탄절은 참으로 쓸쓸하고 서글펐다. 1.4후퇴 때 대구로 피난 간 우리는 먼 친척이 경영하는 여관 2층에 임시로 거처를 정했다. 우리가 거기 있는 것을 안 친척들이 하나 둘 모여들다 보니 4평밖에 안 되는 방에 20여 명이 앉아서 밤을 지내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찾아온 성탄절이었으니 누구의 마음도 기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촌 형이 아무도 모르게 내 손에 쥐어준 카라멜 한 갑은 꽁꽁 언 내 마음을 조금은 녹여주었다. 


다음 해 크리스마스는 마산 동 남편에 위치한 작은 포구 가포에서 맞았다. 어느 날 주린 배를 안고 밀려드는 푸른 파도와 그 위를 나는 물새들을 서글프고 처량하게 바라보며 바닷가에 서있는데 물탱크 몇 대가 올라오더니 그 안에서 미군들이 나와 해변에 둘러 앉아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깡통을 따서 맛있게 먹는 그들을 보다 나도 모르게 그네들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때 통조림을 열심히 먹던 한 병사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말없이 일어나 내게로 와서 나를 물탱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탱크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며 한쪽에 수북이 쌓인 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병사는 상자 하나를 열고 큰 깡통 하나를 꺼내 따주었다. 손짓으로 먹으라고 하면서. 씹을 사이도 없이 넘어가던 통조림 고기, 과자, 잼, 가루우유 등의 달콤하고 감미로운 맛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날 이후 난 매일 아침저녁으로 한 달 후에 다가올 성탄절 아침에 씨 레이숀 상자들을 가득 실은 물탱크 한 대를 선물로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혀를 찼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대로 해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공산치하를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는 그 많던 재산을 다 남겨놓고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오셔서 지금 휴전선 근처에 있는 금촌에 정미소 하나를 구입하셨다. 난 어머니가 막내인 동생을 출산하신 후 오래 입원해 계시는 동안 내 어머니가 되어주신 할머니와 그곳에 가서 며칠씩 지내곤 하였다. 


어느 날 멍석을 깔고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다 할머니에게 물었다. “나 아주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데 하나님에게 달라고 하면 주실까?”라고. 


“물론이지. 하나님은 네가 달라는 것을 다 주신단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즉시 일어나 앉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지금 사는 집은 너무 오래되고 사람들이 많아서 싫어요. 예쁘고 나무 많은 집에서 살고 싶어요. 그리고 아주 멋있고 좋은 권총도 하나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짧고도 간단한 기도였다. 그러나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의 기도이기도 했다.


그 기도를 한 며칠 후 할머니와 나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역에서 기다리던 둘째 형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낡고 어둠침침하고 친척들이 많이 드나들어서 어수선하여 정이 안 가던 집이 아니었다. 우리가 도달한 곳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2가 27번지 “언덕 위의 나무 많은 집”이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금촌에 있는 동안 감나무, 잣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등 각종 과일나무들과 진달래, 무궁화, 개나리 등이 잘 어울리게 심어진 정원과 서구식 응접실을 포함하여 방이 8개나 있는 빨간 벽돌집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그 녹색의 장원 속의 집으로 들어섰을 때 둘째 형이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뚜껑을 얼고 보니 속에는 내 또래 아이들이 갖고 노는 것과는 상대도 안 되게 멋진 검은 색의 최신형 장난감 권총이 들어 있었다. 며칠 전 금촌의 캄캄한 밤하늘 아래서 권총과 집을 달라고 한 5살 난 소년의 기도는 이처럼 완전하게 응답된 것이다.


이런 체험이 있는 나였기에 통조림을 가득 실은 물탱크를 성탄선물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월 24일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우고 25일 새벽에 살며시 일어나 해변으로 뛰어나갔다. 바닷가 어딘가에 물탱크가 있을 것을 확신하면서. 그러나 넓은 바닷가는 텅 비어 있었고, 차디찬 겨울파도만이 몰려들고 있었다. 


난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날 꼭 안아주었다. 할머니였다. “내 새끼야, 이 새벽에 왜 여기서 울고 있니?” (할머니는 언제나 날 “내 새끼”라 부르셨다). 나는 울먹이며 그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했다. 내 말을 들은 할머니는 날 더 꼭 안아주시며 “하나님이 네게 물탱크보다 더 좋은 선물을 주실 테니 들어가 기다리자.”고 말씀하셨다.


그날 오후 늦게 미군 트럭 하나가 좁을 시골 길에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 집 쪽으로 달려왔다. 놀랍게도 그 트럭은 우리 집 돌담 앞에 멈추어 섰다. 더 놀라운 것은 아버지와 미군병사 두 명이 트럭에서 내린 것이다. 군인들은 트럭 뒤에 쳐진 휘장을 걷어 올리고 씨 례이손 상자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우리가 세든 집 마루에 쌓은 상자들은 수십 개가 넘었다. 


할 일을 마친 그들은 아버지와 악수를 나누더니 차에 타기 전에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말했다. 트럭이 떠난 후 아버지는 그들이 내가 귀엽게 생겼다고 하며, 즐거운 성탄절을 지내라고 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를 가포에 남겨놓고 무엇이든 일할 것을 찾기 위해 서울 쪽으로 가던 아버지는 오산에서 미군부대 앞을 지나게 되었단다. 미군 보초들이 더 이상 북으로 가면 위험하다고 하자 아버지가 영어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 신호상대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수준급의 영어를 구사하셨다.) 그가 서울 쪽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자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를 부대장에게 데리고 갔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부대장은 통역이 없어 곤란을 겪고 있는데 당분간 자기를 도와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아버지는 그 부대에 머물며 통역을 담당하셨다. 


정식으로 통역장교가 부임해오자 부대장은 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그에게 필요한 건 마산에서 굶주리는 가족들을 먹일 식량이라고 하자 부대장은 작은 트럭 한 대에 씨 레이숀을 가득 실어 병사들을 시켜 거기서 수백 키로나 떨어진 가포까지 가져다 준 것이다. 


그 트럭이 우리 집에 도착한 날이 그 해 성탄절 오후였고, 권총과 집을 달라는 5살 소년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은 그로부터 4년 후 씨 레이손을 실은 물탱크를 원하는 그 아이의 간구를 씨 레이숀을 실은 트럭으로 바꾸어 응답해 주신 것이다.


그 후 마산에서 부산으로 거기서 또 서울로 그리고 캐나다로 삶의 거처를 옭기며 산 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성탄절에 얽힌 추억들은 많기만 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합친 것보다 의미 있고, 그러기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미군들을 통해 씨 레이숀 상자들을 보내주신 1951년 12월 25일이다. 


그날 난 하나님 뜻에 어긋나지 않는 믿음의 기도는 그의 시간에 그의 방법으로 반듯이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되었고, 늦게 시작한 내 목회의 지침이 되었다. 간증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나 홀로 간직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권총과 집과 씨 레이숀을 주신 후에도 내가 인생의 갈림길에서 드린 간절한 기도를 여러 번 들어주셨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잊을 수 없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 사람들마다 가슴 속에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진정한 의미를 느끼고 깨달으며 그로 인해 그들이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한 인생의 경주를 달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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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김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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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5
예수님의 비유-누룩 비유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에 갔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눅 13:20-21)

 

누룩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타나 있는 비유로서 겨자씨 비유 바로 다음에 나온다.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들 두 비유는 “겨자씨”와 “누룩”이란 단어만 다를 뿐 그 내용과 의미는 거의 비슷하다. 그러기에 이 두 비유를 하나로 묶어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설교를 할 때도 둘을 한 번에 다루기도 한다.


그러나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천국이 작고 미약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놀라운 성장과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해주는 점에 있어서는 일맥상통하지만 하늘나라의 시작과 그 성장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들려주고 있다.


마태가 기록한 누룩 비유는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가 전부다. 그러나 이 짧은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여자가 수북이 쌓인 밀가루 속에 작은 누룩 덩어리를 넣고 반죽하는 모습과 그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장면을 선명하게 머리에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누룩의 일상생활에서의 필요성과 그 효능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소량의 누룩이 엄청난 양의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과 끝이 비교조차 할 수 없이 큰 차이가 나게 성장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여인이 반죽한 밀가루 서 말은 50 파운드에 해당된다. 이처럼 많은 양의 밀가루에 작은 누룩 덩어리 하나를 넣어 반죽하면 100여 명이 먹을 수 있는 빵을 구울 수 있게 부풀어 오른다. 


뿐만 아니라 누룩을 넣어 반죽하여 빵을 구우면 구멍이 숭숭 뚫리고 부드러워서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먹는 누룩 없이 구운 건조하고 딱딱한 빵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맛이 좋다. 하지만 성경에는 누룩을 좋지 못한 효능을 내거나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기록한 대목들도 여러 군데 있다. 


예수께서 “삼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마 16:6)라 하신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그들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언행에 현혹되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사도 바울이 “적은 누룩이 온 땅에 퍼지느니라.”(갈 5:9)한 것은 그 당시 만연하던 유대주의의 그릇된 교훈과 사상에 물들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놀랍게 성장하게 하는 누룩의 효능을 통하여 천국을 우리들의 마음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을 가르치고 계시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천국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크고 영화롭게 성장함을 말해주는데, 전자가 외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외적인 성장과 병행하여 일어나는 내적인 성장에 관하여 말해준다. 


복음의 씨앗이 그 마음에 심어져 뿌리내리는 사람마다 새롭게 변화한다. 예수님이 선포하기 시작한 천국복음은 세찬 세파에 묻혀 소멸되는 듯싶었다. 작은 누룩 덩어리가 밀가루 반죽에 섞여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전하는 천국의 진리는 서서히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복음이란 누룩이 완악한 마음으로 그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마음대로 행하던 사람들이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음란한 사람, 우상을 섬기며 간음하는 이들, 탐색하거나 남색 하는 자들, 도적질하며 탐욕이 가득한 사람들, 술 취하고, 욕설을 일삼으며 남의 소유를 착취하던 무리들이 그들 안에 들어온 복음이란 누룩으로 인해 거룩하고 의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전 6: 9-11) 


이처럼 복음은 육에 속한 사람을 영의 사람으로 바꾸는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쓸모 없는 인간을 유용한 인간으로, 나약하고 비겁한 자를 강하고 용기 있는 자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신기한 힘을 지니고 있다. 


복음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역사운영에 동역자가 된 사람들을 말하면서 여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그들이 이방인이나 노예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다. 여자들이 주어진 인간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남자들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으며 살았던 그 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해주는 사실이다.


구약시대를 살펴보면 미리암, 훌다, 데보라 등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여자들이 남성들의 종속물과 같은 존재로 무조건의 복종과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던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예수님의 복음은 억눌리고 짓밟힌 여인들의 인격과 인권을 회복시켜 주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힘없고, 연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인간의 대열에 끼지 조차 못하고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가련한 존재들 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들의 삶 속에 넣어주신 복음의 누룩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누리고 행하며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 날에는 노약자들을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때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위한 특별한 정책이 없었음은 물론 의지할 곳 없는 그네들을 천대하고 박대하며 유통기간이 지난 상품이나 쓸모 없는 폐기물 정도로 취급했다. 기독교는 그런 그들에게 자존감을 일깨워주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을 지니고 살게 해주었다. 


어린이들을 향한 사회의 시선도 냉대와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그들을 위한 사회나 국가의 배려 같은 것을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특히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시점에 유대사회에는 이혼풍조가 만연했다. 여자들이 몇 번을 재혼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쉽게 맺어지고 부담 없이 헤어지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애정이나 사랑 같은 것은 받아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오늘 날의 문명사회에서는 어린이들은 가정의 보배요, 희망이다. 사회적으로도 어린이들에 관한 관심과 배려는 크기만 하고, 국가적으로도 그들을 위한 특혜를 늘려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공식적인 집계에 어린이와 여자를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당시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어떠했나를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셨으며,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시며 천국의 비밀까지 들려주셨다. 더 나가가서 예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어린이 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에게 나오는 이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며, 어두운 세상을 새로운 세계로 개조하는 신기한 힘을 지니고 있다. 누룩 비유에는 천국이 이같이 형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이 은밀한 가운데 진행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작은 누룩 덩어리 하나가 밀가루 반죽에 섞이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고, 따라서 그것이 어떻게 반죽을 부풀게 하는 지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확실히 느끼며 보는 가운데 확장된다는 사실도 이 비유에 포함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할 때 거기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향해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행 17:6)이라 외쳤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깨닫게 하려고 3차에 걸쳐 3만 키로 이상을 다니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했다. 예수께서 배척당하시고, 핍박 받으시다 십자기에 처형된 것도 조용하고 은밀하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으시고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한 기득권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이었다. 


복음은 소리 없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말씀선포와 행위를 통해 전파되는 것이다.


누룩 비유의 핵심은 작기만 한 누룩 덩어리가 엄청난 양의 밀가루 반죽을 크게 부풀게 하듯이 들릴 듯 말 듯 전해지기 시작한 예수님의 복음은 그것을 받아드리는 이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며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 자라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하늘나라의 성장은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게 조용히 이루어지기도 하고, 온 세상이 알게 요란스럽게 일어나기도 한다. 이 사실을 윌리엄 바클리(William Barclay)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들려준다.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능력, 성령님의 역사는 세차게 흘러내리는 강물과 같다. 그런데 굽이치며 흐르는 강 바닥 밑에서도 보이지 않게 흐르는 또 다른 물줄기가 있다. 누룩 비유는 하늘나라는 강 밑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흐르는 물줄기에 의해 형성되기도 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보고 듣는 가운데에 힘차게 흐르는 강물로 인해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복음이라 이름하는 누룩이 스며든 우리들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형성되어 점차로 커지고 있다. 그 나라가 속히 완성되어 우리 모두 거기서 평안을 누리며 살며,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에 관해 말해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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