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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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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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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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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1
2023-01-26
공짜 점심은 없다(4)-생활양식에 필요한 에너지(1)

 

 

1인당 소비 에너지

인류학자들은 약 260만 년 전 석기시대에 인류가 수렵생활을 위해 하루 3천 칼로리의 육체 에너지가 필요했다고 가정한다. 생존을 위한 총 에너지 소비 양이다.

현대에 이르러 통계를 보면 1인당 국내인이 하루 사용하는 에너지는 육체운동에 필요한 하루 평균 2300 칼로리 외에 편한 문명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무려 2억3천9백만 칼로리를 소비하고 있다. 한국인은 1억5천9백만 칼로리. 이 통계는 국민 개인소득에 비례한다.

이 엄청난 에너지는 문명기기와 음식, 주거지, 의복, 교통, 통신, 여가활동 등 사회 생활하는 현대인의 모든 생활 양식에 필요한 상품 제조 및 서비스에 사용된다.

참고로 2021년 전 세계인의 에너지 소비량은 1천387억 톤의 원유 양과 같다고 추산한다.

 

온실 가스

인류는 천문학적인 에너지 소비를 하면서 지구의 기후변화에 의한 홍수, 가뭄, 사막화, 산불, 때아닌 고온도, 냉온도, 북극해 해빙, 산성비 등에 의한 재난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지구 환경 변화에 시선을 집중하고 원인을 찾게 되었다.

그들은 인류가 에너지 생산에 필요한 화석연료를 태울 때 나오는 탄산 가스를 포함한 온실 가스가 대기권에 퍼져 태양으로부터 들어온 적외선이 대기권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 적외선 열을 지구가 흡수하게 하여 지구 온난화의 재난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결국 문명생활 유지가 공짜 점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증기를 포함한 적당한 양의 온실 가스는 적외선 유출상태를 조정하여 지구온도를 섭씨 15도로 유지한다. 이 현상에 사용되는 온실가스 50%를 차지하는 수증기 및 구름은 잔재 기간이 일주일 정도 된다. 온실 가스가 없을 경우 지구는 영하 15 내지 20도로 냉동이 되어 현 생태계가 유지될 수 없게 된다.

산림의 자연 부패 같은 자연 현상으로 생성되는 탄산 가스는 인간이 만드는 양보다 몇 배 더 많게 통계를 잡지만 자연 도태 흡수 현상으로 온실가스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발표했다.

온실 가스는 화석연료 산화에서 생성되는 탄산가스 79%, 되삭임 하는 동물들로 나오는 트림과 방귀 또는 음식물 부패 등에서 나오는 메탄가스 11%, 비료생산 과정에서 생성되는 아산화 질소 7%, 냉동매로 사용되는 프레온 가스 3%로 합성 되어 있다. 대기권 내 메탄가스의 잔재기간 12년, 아산화 질소 110년에 비해 탄산가스는 300년 내지 1천년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공기의 탄산가스 양은 1832년 산업혁명 초기 284 PPM(0.0284%)에서 2022년 410 PPM(0.041%)가 되어 190년간 약 44% 증가했고, 2000년 이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공기 중에 차지하는 21% 산소, 78% 질소, 0.9% 알곤 가스에 비하면 미량이지만 탄산가스는 지구 온난화의 주역을 맡고 있다.

 

온실가스의 연 생산량

인간이 만드는 온실가스의 원천은 원자재 생산(시멘트, 철강, 플라스틱) 31%, 전기사용 27%, 농산물, 가축 19%, 교통수단(자동차, 비행기 선박) 16%, 냉난방 7%로 구성되어 있다.

교통수단은 승용차, SUV, 2륜차 47%, 대형 트럭 및 버스 30%, 선박 10%, 비행기 10%, 기타 3%로 구성되어 있다.

빌 게이츠는 그의 저서 ‘How To Avoid A Climate Disaster, 2021’에서 3백억 달러 이상의 자선단체 펀드를 이용하여 ‘51 billion to Zero’ 범 세계운동을 벌이고 있다.

현재 인간에 의한 전 세계 연간 탄소 배출량을 510억 톤으로 집계하고 장기적으로 0으로 줄이자는 운동이다.

그는 아프리카의 말라리아 에이즈 퇴치운동 후 온실가스 제거에 도전하고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하는 신자본주의자 이상형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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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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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9
공짜 점심은 없다(3)-물물교환

 


공짜 점심은 없다. (밀튼 프리드만)

 

신석기시대(BC 9000-6000)

인류는 고대 수렵시대를 거쳐 농경사회를 이루고 신석기 시대에는 식생활 개선 및 의류나 토기 등을 포함한 기본 생필품 소유를 위해 물물교환으로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경제 활동을 시작했다.

 

자원의 희소성으로 공급이 딸릴 때 인류는 선택을 해야 되고 그 중 하나가 무력 탈취였다. 무력탈취는 농경사회에 이루어진 부락 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부락이 통합되어 지역을 이루고 지역이 통합되어 국가의 형태를 갖추면서 국가간 침략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한 대가는 인명피해와 비극이었다.

 

경제적 이득을 위한 전쟁은 1만여 년이 지난 21세기에도 계속하고 미래도 마찬가지다. 단지 핵무기 사용 억지정책으로 물리적 전쟁보다는 무역 및 환율전쟁으로 인명피해를 줄이고 있다. 따라서 국가는 무역흑자를 만드는 기업을 육성하고 있다.

 

상대적인 자본주의 사상

자본주의 사상은 ‘공짜 점심은 없다’에 뿌리를 둔 물물교환에서 시작되었다.

자본주의 사상으로 평등한 기회와 자유를 보장 받은 국민은 각자 생산능력으로 개방된 시장경제를 통해 이익을 내고 그 이익으로 축적되는 재산권을 정부로부터 보호받는다.

 

자본주의 사상을 부여하는 국가의 부는 창조적인 개선과 혁신에 의한 상품이나 서비스로 역동하는 기업의 무역흑자에 의해 비례 된다. 그리고 환율의 힘을 키우게 한다.

자본주의 사상은 해당국가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다. 또한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으로 계속 변화한다.

 

‘우리의 적은 가난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잘 살아 보세’라는 신이 내린 숙명적 구호로 민족 중흥을 위해 경제적 DNA를 부여 받은 한국민은 세계 유일무이한 새마을 운동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현 세기에 전자, 자동차, 조선, 원자력, 건축, 방위산업 등등의 굵직한 사업으로 세계시장을 종횡무진하며 신자본주의 사상을 리드하고 있다.

 

프리드먼 독트린(A Friedman Doctrine, 1970)

시카고 대학 통화정책 학부 담당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은 1950년 이후 통화정책의 선구자로 닉슨을 거쳐 레이건 정부의 성공적인 통화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통화정책은 1789년 알렉산더 해밀턴의 중앙은행제도를 체계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여 받았고 ‘공짜 점심은 없다’를 경제원칙에 지향하는 원로로 알려졌다.

그는 1970년대에 정부의 최소간섭으로 ‘기업이 주주를 위해 자유 시장경쟁에서 이익을 극대화 하는 것이 기업체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논문을 뉴욕 타임스에 게재하고 논문제목을 프리드먼 독트린이라고 소개했다.

 

이 영향을 받은 공기업들의 CEO들은 자신들의 직장을 보존하기 위해 1980년 이후 장기계획보다는 3개월의 단기이익을 보여주기 위한 경영전략을 세웠다. 때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내야 하기 때문에 직원, 수요자와 공급처를 포함한 공동체와 분쟁을 일으키고 환경유지에 역행을 하여 정치문제로 비화시키게 되어 그의 독트린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다행히 2019년 애플, 제이 피 모건, 제네랄 모터스, 시스코를 포함한 미국의 대기업 CEO들은 그들로 이루어진 기업 원탁회(The Business Round Table, BRT, 1972)를 통해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을 다음과 같이 재정의 했다.

 

‘기업정신은 기업과 관여된 그룹과의 이해관계가 본질적 요소가 되어야 하고 기업은 종업원, 주주를 포함한 기업체, 공동체 그리고 국가 번영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공짜 점심은 없다’를 주주(Stockholders) 이윤배당에 중점을 둘 경우 프리드먼 독트린이 되지만 이해관계자(Stakeholders)들을 위한 번영에 중점을 둔다면 기업가들의 배려가 된다.

 

빌 게이츠, 워렌 버핏을 포함한 대부분의 미국 100대 부호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생 모은 재산의 90%를 여러 가지 형태로 사회에 보시하고 있다. 결국 ‘공짜 점심은 없다’는 구절은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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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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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1
2023-01-12
공짜점심은 없다(2)-불경의 해석

 

 

반야심경 (般若心經)

수많은 불교경전들의 핵심을 260개의 한자로 요약한 반야심경은 우주의 실체가 공(空)함을 깨닫게 하여 마음으로 일어나는 고난을 극복하고 지혜를 터득하라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다는 사실을 다음 두 구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직역하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공하기에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고 줄어들지 않는다.

이 구절은 자연과학에서 에너지는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는 열역학 제1법칙과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화학방정식의 질량불변의 법칙과 맥락을 같이한다.

에너지는 물리학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운동에너지, 전기에너지, 화학에너지, 핵에너지 등 여러 가지 형태를 갖고 있다.

질량불변의 법칙은 수소 분자 2개와 산소분자 하나가 화학반응으로 물이 될 때 반응 전 2 개의 수소분자와 한 개의 산소분자가 합한 질량은 반응 후 생성되는 물의 질량과 같다는 예로 설명될 수 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是空 空卽是色)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기에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다. 여기서 공은 에너지, 색은 물질 질량으로 정의된다.

물질의 근본인 원자는 전자가 핵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리고 핵과 전자 사이는 진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몸은 자연 물질로 이루어져 꽉 찬 것 같지만 분자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을 양자역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에너지를 일으키는 진공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학적으로 우리의 몸은 텅 비어 있다는 결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응용하여 질량불변의 법칙과 에너지보존법칙에서 정의된 질량과 에너지 동등성을 표시하는 획기적인 교환방정식 (E=MC2)을 발표했다. 이 방정식에서 에너지(E)는 질량(M) 곱하기 빛 속도(C)의 자승이 된다. 이 공식에 의하면 1그램의 질량은 TNT 2만톤의 폭발력과 같은 위력을 가진 에너지가 된다.

이 공식을 응용하여 인간은 원자력 발전과 원자탄 등을 개발하게 되었다.

인류가 142만년 전 불을 사용하여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을 제1의 에너지 혁명이라 한다면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핵에너지 개발은 제 2의 에너지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일본의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1907-1981)는 불교의 8정도설을 풀어 중간자를 발표하여 1949년 일본인으로서 첫 번째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상 물리현상들이 불경의 구절들과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된 일부 물리학자들은 현재 불경을 공부하며 새로운 영역의 물리법칙을 찾아 연구하고 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공짜 점심은 없다는 표현은 또한 불교의 근본사상인 인과응보가 된다. 즉 행위의 선악에 대한 결과를 윤회를 통해 반드시 받는다는 개념으로 사필귀정, 자승자박, 자업자득 등으로도 표현한다. 더 쉽게 표현하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또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이 현상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평등사상이 되어 선행으로 모두 잘 살자는 불교적 사회계약론의 원천이 되고 있다. 여기서 불교의 평등사상과 사회계약론은 공짜 점심을 좋아하게 만드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사상이 아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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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yoo
유동환
102340
10311
2023-01-05
공짜점심은 없다(1)-손실 리더

 

 

공짜점심(TANSTAAL)

19세기 미합중국 서부개척 시절 새로운 지역에 세워진 어느 호텔 아래층 입구 홀에 차린 술집(Saloon Bar)에서 술을 주문하는 고객에게 점심을 무료로 제공했다.

호텔주인은 짠 음식을 제공하여 고객들이 공짜로 먹은 음식으로 술에 갈증을 느끼게 하여 계속 술 주문을 받고 이익을 올렸다. 그 당시 설사를 일으키는 우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고객들이 공짜 점심으로 많은 술값을 지불하게 되었다는 데서 결국 공짜 점심은 없다는 표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영어로 There ain’t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TANSTAAFL) 또는 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TINSTAAFL)라고 표현한다.

 

이 현상을 경제학의 제로 섬 게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공짜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는 표현은 경영학은 물론, 종교, 과학, 경제, 문화, 정치, 사상, 정보 등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이해관계에 해당된다.

 

손실 리더(LOSS LEADER)

경영학에서 고객유치로 세일을 올리기 위해 가격손실을 감수하며 판매하는 상품을 손실 리더라고 한다. 공짜점심은 고전적인 손실 리더로 알려졌고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예를 들 수 있다.

 

도어 크래쉬 세일(DOOR CRASH SALE)

최근까지 가장 잘 알려진 예가 캐나다 박싱데이 도어 크래쉬 세일이다. 티비나 전자제품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제품들을 파격적인 낮은 가격으로 세일을 하여 고객들을 유치한다. 구매자들이 새벽은 물론 심한 경우 밤새 줄을 서서 기다리게 하여 공급량이 제한된 상품을 판매한다.

판매사는 고객이 필요한 부속 부품값을 올리고 다음 박싱데이까지 고객들이 구매할 필요한 제품을 판매하여 1년간 이익을 내는 통계를 잡고 손실 리더가격과 공급량을 계산한다.

 

투 포 완 세일 (TWO FOR ONE SALE)

패스트 푸드사들은 경쟁력을 키워 고객들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정기적으로 피자 또는 햄버거 2개를 하나 가격에 판매한다. 피자나 햄버거는 정기적으로 먹어야 되기 때문에 비 세일 가격기간이라도 고객들이 찾아온다. 판매사는 1년간 세일기간에 발생하는 손실을 경비로 책정하며 정기적인 세일가격을 결정하고 이익을 낸다.

 

월 마트 세일(WALLMART SALE)

월마트는 매일 손실 리더 가격(EVERYDAY LOW SALE PRICE)을 표시하는 표지판을 매장 천장에 매달아 고객들이 붐비게 하고 세일을 올려 박리다매로 이익을 내고 있다. 주로 기본 식료품인 빵이나 우유를 원가 이하로 판매하여 다른 그로서리를 구매하게 유도하기도 하지만 패키지로도 가격을 책정한다. 예를 들어 햄버거, 햄버거빵, 양파와 토마토를 돌아가며 저렴하게 가격을 책정하여 고개들이 햄버거에 필요한 비 세일 상품을 정상 가격으로 구입하게 한다.

 

코스트코 핫 도그(COSTCO HOT DOG)

코스트코 매장 간이식당에서 인플레와 관계없이 핫 도그와 드링크를 1달러 50센트에 원가 이하로 판매한다. 고객들이 어린이들까지 데려와 식사를 하고 쇼핑을 즐기게 한다. 따라온 어린이들이 그냥 나갈 리가 없다. 조그만 장난감이나 캔디 등을 사달라고 조르는 구매심리를 이용하여 핫도그에서 본 손실을 메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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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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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2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제임스 뷰캐넌(3)

 

 

라저 브룩 태니의 흉상 철거(2022)

미 헌정상 최악의 판결을 낸지 165년이 지난 2022년 12월 15일 미 의회는 1857년 드레드 스캇 판결(지난주 칼럼 참조)의 주인공 라저 브룩 태니 전 대법원장의 흉상을 의사당 전시실에서 45일 내에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태니의 흉상자리에는 1967년부터 1991년까지 최초로 흑인 미연방 대법관을 지낸 써굿 마샬(1908-1993)의 흉상을 2년 안에 세우기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관들이 흑인 조오지 플로이드를 무릎으로 숨막혀 죽게 한 끔찍한 사건 이후 흑인들의 항의(Black Lives Matter)로 여론을 받은 미국 각처에서는 노예제도를 고수하고 미 남북전쟁을 일으킨 남부연합의 인종차별 주의자 100여명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철거했다.

아직까지 인종차별 대통령들은 철거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트럼프가 그의 범죄로 형사판결을 받게 된다면 미래에 거의 신성시되다시피 하는 전직 대통령 대우가 바뀔 수도 있다고 본다.

 

1858년 중간선거(1858)

뷰캐넌은 캔서스 지역을 노예허가 지역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여러가지 편법을 썼지만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또한 캔서스 지역의 노예제도를 주민들의 결정에 맡기자는 스티븐 더글라스 상원의 북부 민주당파와 의회의 승인을 받고 노예주로 승격시키자는 뷰캐넌의 남부민주당 파로 민주당이 분열되었다

이 분열로 득을 본 공화당은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하게 되어 뷰캐넌의 법안 청원을 계속 기각시킬 수 있었고, 1860년 대선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16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국제정책(1857-1860)

뷰캐넌은 취임 후 멕시코와 쿠바를 영입하려 했으나 미 하원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그는 알라스카 지역을 구입하여 몰몬교단을 이주시키려 했으나 가격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

뷰캐넌은 1850년에 영국과 서명한 클레턴-불워 조약을 1859년부터 1860년까지 수정하여 영국이 혼듀라스와 니카라구아를 미국의 보호지역으로 넘기게 하고 미국의 동의 없이 영국이 중남미 지역을 통제하거나 간섭을 못하게 했다. 뷰캐넌은 대서양 연안을 통제하는 막강한 미 해군력의 과시로 영국의 동의를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연방탈퇴(1860-1861)

1860년 11월 6일 링컨이 미합중국 16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남부 노예주들은 연방탈퇴 준비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에 압력을 받은 뷰캐넌은 12월 10일 의회에서 연방정부는 남부주들의 연방탈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연설을 하며 북부가 남부의 노예제도를 간섭하기 때문에 연방탈퇴를 야기한다고 북을 비난하여 남과 북의 양쪽 모두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연방탈퇴보다 노예주와 반노예주가 평화적인 협상타협으로 도망자 노예법을 강화해야 된다고 비현실적인 연설을 하여 12월 20일 사우스 캐럴리나주가 연방탈퇴를 감행했다.

뷰캐넌은 제퍼슨 데이비스와 사우스 캐럴리나 대표들을 만나고 도망자 노예법을 강화하는 헌법수정을 상정하겠다고 연방탈퇴 방지에 노력을 가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1861년 1월 초에 6개의 노예제도주가 연방탈퇴에 가담했다.

당황한 뷰캐넌은 사우스 캐럴리나주 섬터 연방요새에 250명의 연방보급군을 보냈으나 연방 해군의 지원사격을 보내지 않아 연방보급군은 사우스 캐럴리나주 의용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3월 3일 뷰캐넌은 섬터 요새를 수비하는 앤더슨으로부터 보급이 떨어졌다는 전보를 받고 3월 4일 링컨 신임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후 대통령직을 마감했다.

 

은퇴생활(1861-1867)

1861년 4월 12일 남북전쟁이 유발하자 뷰캐넌은 링컨의 연방정책을 지원했고 전쟁을 도발한 남부연합을 처벌해야 된다고 정치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인 펜실바니아 주민들에게 의용군에 가입하여 연방정부를 위해 참전하라고 동기를 부여했다.

그는 남북양쪽의 신랄한 공격대상이 되어 생명위협도 받고 이로 인한 우울증으로 괴로운 독신 은퇴생활을 영위했다.

 

사망(1868)

1866년에 뷰캐넌은 자서전을 출판하고 끊임없는 정치적 변명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다가 1868년 5월 감기에 걸려 고생했고 1868년 6월 1일 기관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77세의 나이로 사망한 뷰캐넌은 랭카스터 우드워드 힐 묘지에 안장되었다.

 

Doughface

역사학자들은 뷰캐넌과 피어스를 미 남북전쟁을 일으키게 한 장본인들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북부 민주당에 본적을 두고 남부 노예주에 굽실거리는 정책으로 남부가 연방 탈퇴할 시간과 힘을 키워주었다. 역사학자들은 그들이 카리스마 부족으로 줏대가 없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및 결정을 못하고 비겁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하여 밀가루 반죽 같은 얼굴을 가졌다고 비유한다.

They have doughfaces. 뷰캐넌은 연방의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도 가난하고 군사력이 거의 없는 남부의 반란을 무력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그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주어야만 연방탈퇴를 방지할 수 있고 평화적인 통합으로 연방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로 인해 약 120만명의 희생자를 낸 미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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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101777
10311
2022-12-15
세계 속의 미합중국 제15대 대통령-제임스 뷰캐넌(2)

 

 

이루지 못한 결혼(1819)

1818년 27세의 뷰캐넌은 랭카스터 무도회에서 철강부호로 알려진 라버트 콜맨의 22세 된 딸 앤 캐럴린을 소개받았다. 1796년 10월 18일 펜실바니아주 랭카스터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앤은 수줍어하였고 둘은 첫눈에 반해 1919년 약혼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주 만나야 할 때에 뷰캐넌은 1819년 공황으로 바빠지는 변호사업으로 몇 주에 한번 만나게 되어 주위 사람들은 뷰캐넌이 다른 여자들과 만난다느니 뷰캐넌은 진정한 사랑보다 앤의 재산에 관심이 있다느니 하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민감한 앤은 뷰캐넌에게 편지로 뜬소문 소식을 알리고 다툼 끝에 앤은 파혼하고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 친척집으로 갔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12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했다. 임종을 지켜보던 챕맨 의사는 히스테릭한 쇼크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앤은 아편이 들어간 처방약 섭취로 사망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앤의 죽음을 슬퍼하며 뷰캐넌은 ‘세상에 오직 하나인 나의 사랑이 나를 버리고 떠나니 세상이 나를 버렸네, 나의 행복은 영원히 앤과 함께 무덤에서 지내리’라는 애타는 심정을 표현했다.

 

앤 부친은 뷰캐넌의 앤 장례식 참석을 거부했다. 콜맨가족은 뷰캐넌 때문에 앤이 죽었다고 비난하였고 뷰캐넌은 그 후 앤을 그리워하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나 말 많은 미국 정계에서는 그가 윌리엄 루퍼스 킹 전 부통령과 동생연애를 했다느니, 무성애로 섹스에 감각이 없다느니, 포크스 대통령 미망인과 밀애를 했다느니 등등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퍼졌다.

 

대통령 취임식(1857)

1857년 3월 4일 독신으로 취임식에 선서한 뷰캐넌은 대통령 1임을 약속하고 미의회가 노예제도에 대한 입법을 삼가하게 하고 연방에 등록된 노예주와 반 노예주를 제외한 여러 지역은 노예제도를 지방 자치제 결정권으로 위임했다.

 

그리고 피어스 전직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도망자노예법을 시행하는 것은 미 헌법에 의한 개인 재산보호법에 따라 흑인노예를 가축과 같은 개인 재산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강조했다.

취임 후 백악관 예우접대는 고아로 자란 해리엣 레인 질녀에게 위임했다.

 

드레드 스캇 소송 케이스(1846-1857)

1799년경에 버지니아주에서 노예로 태어난 드레드 스캇은 1830년 미저리주 세인트 루이스에서 잔 에머슨 군의관에게 팔렸고 1836년 에머슨을 따라 위스칸슨 지역으로 이주하여 헤리엣 라빈슨과 결혼한 후 지역법에 의해 자유인이 되었다.

 

1843년 에머슨이 사망한 후 딸까지 둔 스캇 가족은 에머슨의 부인 이렌 에머슨 미망인의 노예취급을 받고 미망인은 스캇의 노임을 착취했다. 스캇은 돈을 주고 자신의 노예신분을 획득하려 했으나 미망인은 허락하지 않았다.

 

1846년 스캇은 세인트 루이스 법원에 이렌 에머슨을 고소하여 자유를 얻으려고 했으나 패소했고, 1847년 미저리주 대법원까지 갔으나 5년이 지나면서 1852년 패소했다.

1853년 스캇은 연방법원에 항소를 계속하여 1856년 연방대법원까지 판결이 올라갔다.

 

1857년 취임식을 바로 앞에 둔 뷰캐넌은 잔 캐트런과 라버트 쿠퍼 대법원 판사들에게 압력을 가해 취임식 이틀 후 1857년 3월 6일 라저 태니 대법원장이 이끄는 연방 대법원은 노예는 자유인이라도 미국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대법원의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없다며 7대2로 스캇 가족에게 노예유지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 헌정사상 가장 수치적이고 최악의 대법원 판결로 알려진 역사적 희생이 되었다.

 

반 인륜적인 드레드 스캇 판결의 부당함을 느낀 에이브러햄 링컨은 1858년 9월 일리노이 연설에서 미래의 판결은 국민이 결정할 것이라고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대법원 판결을 예상했다.

 

1957년 공황(1857-1861)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1848-1855)로 미 서부개척이 활성화되어 금과 호환성 있는 지폐가 남발되고 철도사업이 절정에 이르렀으나 금이 고갈되면서 은행들이 긴장을 하게 되었다.

 

1857년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드레드 스캇 판결을 결정한 태니 대법원장이 미저리 협정이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36.5도 이북의 반 노예주들의 서부개척이 움츠러들고 철도회사 주식이 폭락하면서 뱅크런으로 이어져 140개의 주 은행들이 문을 닫고 5000개의 사업체들이 파산을 하여 실업률이 올라가 미국은 공황을 맞게 되었다.

 

공황 소식은 1844년 새뮤얼 모스 전보에 의해 미 전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1859년 공황이 평준화되면서 뷰캐넌은 주은행들이 지폐보다 금전이나 은전 거래하기를 종용하고 금화와 지폐를 3:1의 가치비율로 정해 지폐 남발을 방지했다.

 

1861년까지 공황의 여파가 지속되면서 공업경영의 타격을 받은 북부와 농업으로 타격을 덜 받은 남부와 적대의 골이 깊어졌다.

 

유타 분쟁(1857-1858)

1857년 5월 뷰캐넌은 유타 지역에 몰몬교라고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와 일반 개척자들과의 분쟁을 진압할 목적으로 무장한 미 육군 탐험대를 보냈다. 몰몬교단은 브리겜 영 전 주지사가 이끌고 있었다.

 

1857년 9월 몰몬교단은 새로 영입되는 개척자들 중 몰몬교의 초대지도자를 살해했다는 루머를 듣고 대량 살상을 감행했고 미군은 이에 따라 몰몬교단에 공격을 시작했다.

 

몰몬 교단은 무장을 하고 솔트 레이크 호수에 대치하며 전면적인 전투를 피하고 미군의 보급망을 차단했다.

 

미 육군은 월동준비가 되지 않아 일단 후퇴를 하고 이듬해 1858년 뷰캐넌은 평화적인 타협을 통해 대량 학살한 주범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주지사를 유타 지역에 보내 통치하게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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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8
세계 속의 미합중국 제15대 대통령-제임스 뷰캐넌(1)

 

 

영어이름: James Buchanan

출생: 1791년 4월 23일, 펜실바니아주 코브 갭

사망: 1868년 6월 1일 77세, 펜실바니아주 랭카스터

부친: 제임스 뷰캐넌 시니어, 펜실바니아 부호

특성: 평생 독신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15대, 1857년 3월 4일- 1861년 3월 4일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트럼프(44/44) 제외하고 최악의 미 대통령 43/44

소속정당: 연방당(1814-1824), 민주공화당(1824-1828), 민주당(1828-1868)

임기 중 인구증가: 2,929만명에서 3,221만명

       GDP 증가: $41억8천만에서 $46억4천300만 

       1인당 GDP 증가: $1,427에서 $1,441

업적: 미 해군력 과시로 영국 중남미 점거 방지

인용구: 옳다고 해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장기간(1791-1814)

제임스 뷰캐넌은 1791년 4월 23일 펜실바니아주 코브 갭 통나무집에서 부친 제임스 시니어 뷰캐넌(1761-1821)과 모친 엘리자베스 스피어(1767-1833) 사이의 11자녀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제임스가 태어난 해 부친은 머세스버그에 자리잡은 농장으로 이사를 하고 농업, 상업, 부동산 투자로 성공하여 부호가 되었다.

제임스는 1809년 디킨슨 대학을 졸업하고 랭카스터에서 제임스 홉킨스 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 연수를 받고 1812년 펜실바니아주 변호사자격증을 획득했다.

그는 유능한 변호사가 되어 1821년 그의 연 수입은 1만 1천달러가 되었다. 그 당시 평균 하루 노임 수당이 90센트였다. 365일 노동을 해도 노임은 연 330불도 안되었다.

 

군복무 및 정치입문(1814-1815)

뷰캐넌은 1812년 전쟁이 발발한지 2년 후에 펜실바니아 의용군 사병으로 입대하여 소총부대원으로 볼티모어 수비작전에 참전했다. 그는 미 대통령 중 유일한 사병의 경력을 갖고 있다.    

동년 뷰캐넌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연방당원으로 펜실바니아 주의원에 당선되어 연방은행제도와 고관세 정책을 지지했다.

 

중견정치인(1815-1857)

1820년 뷰캐넌은 펜실바니아주 대표로 미 연방하원에 입성하였다. 1824년 연방당이 와해되면서 뷰캐넌은 민주공화당 대선후보인 앤드루 잭슨을 지지하였다. 1828년에도 뷰캐넌은 잭슨을 지지하여 잭슨이 대선에 압도적인 승리하면서 창당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1832년 재선에 당선된 잭슨은 뷰캐넌에게 주러시아 미대사직을 부탁했다. 처음엔 망설이다 수락을 한 뷰캐넌은 18개월간 러시아에 머물면서 불어도 익히고 외교능력을 과시하여 러시아와 무역 및 해양관계에 대한 조약을 맺었다.

 

미국에 돌아온 뷰캐넌은 펜실바니아 대표 미연방상원에 입성하여 3선에 당선되었고 잭슨의 민주당 정책을 따라 연방은행 재설립을 반대하였다.

민주당에 소속되면서 뷰캐넌은 정치사상을 180도 바꾸고 노예제도에 언급을 피하고 서부개척에 필요한 노예제도는 주정부 관할로 위임해야 된다고 주장하여 남부의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844년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선후보로 지명 받으려 했으나 제임스 포크에게 밀려 탈락되었다.

1845년부터 1849년까지 뷰캐넌은 포크내각의 국무장관직을 수락하여 오레건 협약과 구아달루프 조약을 맺어 포크의 미 합중국 영토확장을 도왔다.

 

 1848년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참가했으나 루이스 캐스에게 참패 당했다. 그 후 정계를 떠나 랑캐스터로 돌아와 프랭클린 마샬 칼리지 대학장을 지내며 조용히 1852년 대선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1852년 6월 1일부터 5일까지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뷰캐넌은 다수의 표를 유지했으나 2/3의 지지를 받지 못해 계속적인 지명투표로 이어지다 프랭클린 피어스에게 양보하였다.

뷰캐넌은 피어스 14대 대통령의 제의로 1853년부터 3년간 주영국 미대사직을 맡고 클래런든 영국 외무장관을 만나 영국의 중남미 진출을 방지하는 압력을 불어넣었다.

 

1854년 뷰캐넌은 자신은 반대했지만 피어스의 지시에 의해 재정난에 허덕이는 스페인에게 쿠바 매도요청을 했다. 만일 스페인이 거절하면 다른 수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오스텐드 메니페스트 요구서는 스페인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고 미국 내에서 특히 북부지역의 비난을 받게 되어 쿠바매입 계획은 무산되었다.

 

1856년 대선(1856)

1856년 6월 2일부터 6일까지 신시내티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선후보지명을 위해 참가한 뷰캐넌은 인기를 잃은 피어스 14대 대통령과 스티븐 더글라스, 루이스 캐스를 누르고 17번째 지명투표에서 296표의 만장일치로 잔 브레킨리지 러닝 메이트와 함께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1856년 대선 유세에서 뷰캐넌은 모르쇄당의 밀라드 필모어 13대 전 대통령과 공화당의 잔 프레만트 대선후보들과 경선을 했다. 뷰캐넌은 주로 편지를 사용하여 유세를 했다. 그는 공화당이 노예문제로 지역감정을 일으켜 남과 북을 가른다고 비난하며 자신은 남북통합을 위한 평화적인 연방정책을 세운다는 선거유세를 강조했다.

 

1856년 11월 4일 대선결과에서 뷰캐넌은 296개의 선거인단 중 174표로 45%의 선거인 지지를 받아 114표로 33.1 %의 지지를 받은 프레만트를 누르고 15대 대통령이 되었다.

 

뷰캐넌은 현실성이 없는 평화통일과 비슷한 평화통합 구호로 당선되었다. 피어스의 실책으로 미연방은 이미 남과 북이 분열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평화와 통합 합성어를 만들어 평화를 선호하는 민심을 얻어 당선되었고 미국을 피바다로 만든 남북전쟁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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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1
세계 속의 미합중국 14대 대통령-프랭클린 피어스(3)

 

 

 

미 합중국 횡단 철도

피어스는 연방정부의 인프라 정책을 반대하는 민주당 정책을 따르지 않고 1853년 제퍼슨 데이비스(1808-1889) 국방장관을 임명하여 미래 합중국 철도망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지형측정의 임무를 맡겼다. 데이비스는 미군 공병대를 동원하여 지형측정도를 만들었고 제임스 게스든 철도사업가를 피어스에게 소개하여 남부철도횡단 철도에 필요한 토지를 멕시코로부터 구입하게 하였다.

 

피어스로부터 멕시코 대사임명을 받은 게스든은 1853년 12월 30일 멕시코 시에서 안토니오 샌타나 멕시코 대통령과 회담을 하여 아리조나주 서남부와 뉴 멕시코 남부의 76,000 평방 KM의 토지를 1천5백만 달러에 구입하는 토지구입 요청서를 냈으나 회담진행 중 미 의회는 구매가격 5백만 달러를 줄여 1천만 달러의 예산을 책정했다.

 

미국과 멕시코전쟁으로 재정난을 겪고 있던 샌타나는 1854년 6월 8일 책정된 토지를 1천만달러로 매도하는 게스든 구입협약에 서명하였다.

후에 미국 철도의 아버지 찰스 크로커(1822-1888)는 1869년 유니온 패시픽 철도회사와 센트럴 패시픽 철도회사의 철도를 연결하여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연결하는 첫 번째 미합중국 횡단 철도를 완공했고, 남부 패시픽 철도회사를 구입하여 1883년 뉴오얼린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두 번째로 횡단철도를 완공했다.

 

동서남북을 잇는 횡단철도가 거미줄같이 연결되면서 19세기를 넘어 20세기에 미합중국 경제가 대 약진하였다.

피어스의 철도사업계획은 후에 경제대국으로 패권을 잡게 된 미합중국 경제개발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풍부한 자원을 찾아 사람이 모이면 잠용같은 사업가들이 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기본조건이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1차 대전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건설한 독일의 아우토반이 2차 대전 이후 폐허에서 1948년 독일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키게 하였다. 1964년 독일 방문 시 독일 고속도로를 통찰하고 감명을 크게 받은 박정희 경제국부가 1970년 2년 5개월 만에 완공한 경부고속도로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게 했다. 중국도 한국을 모방하여 전국에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경제를 크게 일으키고 있다.

 


페리원정(1853-1854)

1852년 11월 필모어 전 대통령이 시행한 페리원정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향하여 피어스는 일본과 국교 및 통상조약을 맺었다.

 


켄서스-네브라스카 법(1854)

피어스의 대륙횡단 철도 계획은 켄서스 네브라스카 미 서부지역을 연결시키는 수천 개의 농장을 개발하고 캘리포니아 금광개발로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위도 36도 30분 이북을 차지하고 있어 1850년 미저리협약에 의해 반 노예지역으로 협정되었다. 노예를 수용해야 하는 남부농장주들에게는 관심 밖의 지역이었다.

 

남부농장주들의 농토개발 관심을 이끌기 위해 스티븐 더글라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켄서스와 네브라스카 지역에서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노예제도를 결정하게 하는 켄서스-네브라스카법을 상정하여 1854년 5월 30일 피어스의 서명으로 실효되었다.

이로 인해 켄서스지역은 남부의 노예제도와 북부의 반 노예제도를 주장하는 주민들의 무장 충돌로 인해 피로 물들어 피흘리는 켄서스(Bleeding Kensas)가 되었다.

 

이 법을 반대하는 위그당원들과 반 노예제도를 선호하는 북부 민주당원들은 1854년 3월 2일 공화당을 창당하여 반 노예제도 및 노예해방에 앞섰다. 이 법은 곧 발발하게 될 남북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1856년 대선 경선(1856)

1856년 6월 1일부터 6일간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피어스는 자신이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켄서스-네브라스카법 통과와 도망자 노예법 시행으로 북부 민주당의 인기를 잃어 그의 추측을 벗어나게 만들었다.

첫날 경선에서 122표로 135표를 받은 뷰케난에게 밀리다가 더글라스 후보가 뷰케넌을 지지하면서 피어스는 16번째 경선에서 탈락되고 17번째 뷰케넌이 296표의 만장 일치로 지명되어 1856년 11월 4일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은퇴(1857-1868)

피어스는 1857년 3월 4일 백악관을 떠난 후 뉴 햄프셔주 포츠머스로 이사하여 부동산에 투자를 하고 부인과 3년간 유럽여행을 즐겼다.

186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피어스는 당내 통합을 강조했으나 민주당 분열로 에이브러햄 링컨 공화당 후보가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피어스는 링컨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미 연방은 전쟁대신 남부의 노예제도를 수용하여 노예제도 2원제를 유지해야 된다는 비현실적인 정치이념을 갖고 있었다.

1863년 12월 2일 허약한 부인 제인이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막내아들 사망 후 슬픔의 그늘로 살았던 제인은 콩코드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망(1869)

독신이 된 피어스는 폭주로 외로움을 달래고 끝내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부인을 따라 미국성공회로 개신하고 세례를 받았다. 정치에 계속 관심을 갖고 앤드루 잔슨 17대 대통령의 전쟁복구사업을 지지했다.

1869년 여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피어스는 1869년 10월 8일 콩코드 자택에서64세의 나이에 간경화증으로 사망했다. 율리시스 그랜트 18대 대통령은 피어스 장례식을 국장으로 예우하고 그의 시신은 부인 묘 옆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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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1
2022-11-24
종이 냄새를 나뭇잎 향기로

 

8년 전 둘째 아들이 프랑스에서 선물을 보내왔다. 상자를 열어보니 킨들 전자책 단말기(KINDLE E-READER)였다. 곧 아들이 단말기에 책 7천 권을 저장할 수 있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그렇지 않아도 책방에 가서 책을 골라 크레딧 카드로 결제한 후 플라스틱백에 넣고 집에와 책을 꺼내 겉 표지를 눈과 손끝으로 음미하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종이 소리와 종이 냄새에 익숙해진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아 지인이 전자책을 권고해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망설이고 있었다.

 

마침 잘됐다 하고 아마존 킨들 웹에 들어가서 찾던 책을 다운로드하고 놀랬다. 가격이 종이 책 반값 정도 밖에 안되었다. 종이 책 가격의 70%에서 10% 정도로 전자 책을 읽을 수 있고, 읽은 책은 단말기에 저장되어 아무 때나 어디에서든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말기를 분실해도 새 단말기로 저장된 도서를 찾아 읽을 수 있다. 시간이 가면서 전자 책의 좋은 점에 익숙하게 되었다. 중요 대목에 밑줄을 그을 수 있고, 단말기를 두 번 누르면 중요 대목은 물론 다른 독자들의 중요 대목들도 일목요연하게 참고할 수 있다. 그리고 친지들에게 이메일로 대목 구절을 보낼 수도 있다. 운전 중이나 바쁠 때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모르는 단어를 누르면 사전으로 들어가 아무 때나 찾아볼 수 있는 독자의 영어사전을 만들어 주고, 해독하기 어려운 구절은 쉬운 말로 풀어준다. 영어가정교사 역할을 하는 단말기로 필자의 구독력을 향상시킨다.

 

화면의 밝기 조정으로 환한 공간이나 전등이 필요 없고, 활자체와 크기를 조절할 수 있어 눈을 즐겁게 하며, 서너 시간을 계속 읽어도 눈에 피로를 느끼지 않아 좋다.

 

또한 2 킬로그램이나 되는 1000 페이지의 종이 책 내용을 200그램 정도되는 단말기 또는 셀폰으로 여행 중 비행기안에서 또는 환자를 무진장 기다리게 하는 의사 사무실에서도 편하게 볼 수 있다.

 

전자 책에 익숙해지자 종이신문을 접어두고 전자신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따라서 새벽에 기다리던 신문이 배달되어 문밖 시멘트 바닥에 탁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마시며 허리 굽혀 잉크냄새와 조화된 종이냄새를 맡으며 묵직한 종이신문을 들고 들어와 잉크로 얼룩지는 손가락으로 1면부터 읽어 나가는 습관이 바꿔져, 일어나면 커피를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전자신문을 보게 된다. 전자신문 가격은 종이신문의 5분의 1도 안 된다.

 

점차 시간이 가면서 전자신문의 좋은 점에 다정해졌다. 전자신문은 위에 상기한 전자 책의 모든 장점은 물론 번역판도 볼 수 있고, 기사를 프린트할 수도 있고, 6개월 전까지 발행된 신문을 참고할 수도 있다. 가격이 싸다는 것은 에너지를 덜 쓰게 되어 지구를 보호한다는 뜻이 된다.

 

평생 익숙해진 종이 냄새와 소리를 숲에 보내 자연을 보호하게 하고, 대가로 나뭇잎의 향기를 맡게 해주는 전자신문사에 감사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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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100990
10311
2022-11-17
세계 속의 미합중국 14대 대통령-프랭클린 피어스(2)

 

1852년 대선(1852)

1848년 고향으로 돌아온 피어스는 변호사 사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뉴 햄프셔 민주당 당원들은 피어스를 1852년 민주당 대선후보에 추천했다.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계속적인 추천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1852년 6월 1일부터 5일까지 볼티모어에서 열리는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선후보로 조용히 등록했다.

 

민주당은 노예문제로 후보자들의 지지자들이 분열되어 더글라스, 케스, 마시, 뷰캐넌, 휴스턴, 벤튼 같은 기라성 후보들이 경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10년간 부인의 요구로 정계를 떠났던 피어스는 서부 노예주 팽창과 도망자 노예법 실행을 강조하여 시선을 끌었다.

 

6월 3일 첫 번째 경선에서 288표 중 케스가 116 뷰케넌이 93표로 리드했지만 과반수 표를 얻지 못해 계속 34번이나 경선을 치르면서 지명자를 선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38번째 경선에서 펜실바니아주 출신 뷰캐넌이 다른 소수 후보자를 몰아 한 표도 얻지 못한 피어슨을 지지하게 되어 피어스는 몰표를 받게 되었고 승승장구로 49번째 경선에서 282개의 지지표를 받고 윌리엄 킹을 러닝메이트로 민주당 대선 후보에 지명되었다.

 

얼떨결에 다크호스로 대선후보에 오른 피어스의 소식은 고향에 있는 제인에게 알려졌고, 제인은 남편의 약속 배반에 충격을 받아 약한 몸으로 혼절하였다.

 

위그당은 스캇 장군과 그레함을 러닝 메이트로 지명했지만 심한 당내 분열로 위그당을 지지했던 투표자들의 계속적인 이탈이 시작되었다.

이를 좌시한 피어스는 민주당 지지표를 단합하기 위해 일체 유세를 하지 않고 말로 무덤을 파는 스캇의 공격적인 유세를 관찰하였다.

 

1882년 11월 2일 선거결과에서 피어스는 296개의 선거인단 중 254개의 표를 받고 300만명의 투표자 중 50.9%의 지지를 받아 미 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멕시코전쟁터에서 피어스의 상관이었던 스캇은 42개의 선거인단표를 받고 44.1%의 지지율로 패배하였다. 

 

피어스 가족의 비극(1853)

대통령에 당선된 피어스는 부인 제인과 11살 아들 벤자민과 함께 매사추세츠주 앤도버에 거주하는 제인의 형부인 잔 에이킨스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1853년 1월 6일 기차로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콩코드에 도착하면 3월 4일 대통령 취임식에 맞추어 워싱턴 DC로 이사를 할 예정이었다.

 

1시15분 기차가 시속 40Km의 속도로 앤도버에서 5Km 지점을 지날 때 철도에 놓여있는 돌에 부딪쳐 꽁꽁 얼어붙은 차축이 충격을 받고 쪼개지면서 피어스 가족이 탄 승객 칸이 탈선을 하여 20피트 거리의 비탈진 강둑으로 성냥갑 같이 뒹굴러 떨어졌다.

 

아들 벤자민은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객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벤자민은 기차가 구르는 충격으로 떨어진 각목에 머리를 맞아 즉사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피어스는 달려가 목뼈가 부러지고 목살이 피범벅이 된 아들을 붙잡고 울부짖는 부인과 함께 하늘이 깜깜하게 내려앉는 충격을 감수해야 했다. 승객 60명 중 많은 부상자 외에 사망자는 벤자민 1명뿐이었다.

 

벤자민 시신은 에이킨스 집으로 후송되어 12명의 학급친구들이 달려와 운구를 들고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콩코드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제인은 영특하고 착한 아들의 오싹한 마지막 광경이 악몽으로 떠올라 비통에 허덕이며 장례식과 안장식에 참여를 하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하다가 현실에 부딪치면 남편의 대통령 당선으로 신이 벌을 내렸다고, 위로 해주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정신이 나면서 제인은 아들에게 엄마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장문의 편지를 올렸다. 이로 인해 열차사고에서 소생한 피어스 부부는 몇 년 사이로 사망한 두 아들을 포함하여 아들 3을 모두 잃어버리는 비통함을 우울증으로 평생 간직해야 했다.

 

피어스는 제인과 함께 아들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면서 노예해방 반대, 노예주 증가, 노예가 도망가다 잡혀 린치는 물론 살아서 맹견에게 갈기갈기 찢어 죽게도 하는 도망자 노예법을 시행하여 역사학자들은 피어스를 미 대통령 44명중 40번째 순위로 그의 업적을 평가한다.

소생한 승객들은 철도회사를 고소했지만 제인은 집단고소에 불참했다.

 

대통령 취임식(1853)

1853년 3월 4일 14대 대통령 취임식에 비극을 맞은 피어스 신임 대통령을 위로하기 위해 사상 초유로 2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 피어스는 법전서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다. 잔 쿠인지 애덤스 이후 2번째로 성경대신 법전서를 선택했다. 그는 원문 없이 기억으로 취임연설을 하며 미국의 남북통합으로 국내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미국의 이득을 위한 국제관계를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군중에게 ‘국민 여러분은 약점투성이인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강점으로 저의 임무를 완수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끝을 맺어 위문 온 군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제인은 선서식은 물론 향후 2년간 모든 백악관 행사에 불참했고, 백악관에서 은둔생활로 자신의 비통함을 달랬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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