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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훈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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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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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야베스의 기도(4)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 4:9-10)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 야베스는 곧이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키심을 요청한다: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세상은 악하다. 인간은 악하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악하다. 아무리 우리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아무리 인간이 좀더 나은 사회와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해도, 인간이나 인간이 함께 모여 사는 사회와 세상이 악한 것임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우리 개인과 모두의 죄와 잘못(이기심, 욕심, 교만함, 자만함, 시기, 질투, 미움, 원망, 음란함, 거짓 등...) 때문에 우리가 당하고 경험하는 아픔과 상처, 어려움과 문제, 고통과 환난, 실망과 좌절은 피할 길이 없고 끊임없다. 아무리 우리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해도, 우리의 삶이 아픔과 고통으로 물들었다면, 누구도 자신의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우리가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바라며 추구하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켜주심이 –우리 자신과 세상의 악과 죄로부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바로 이것을 야베스는 구한 것이다. 


 야베스를 생각해보자. 그의 이름은 ‘아픔과 고통을 가져오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 평생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부를 때마다 자신은 남에게 아픔과 고통을 가져오는 자라고 불렸다. 자기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가 얼마나 괴롭고 수치스럽고 죄책감에 시달렸을까? 상상해보라. 현대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볼때 그는 매우 낮은 자존감/자기 존중감의 사람이었기 쉽다. 어쩌면 그는 남을 아프고 괴롭게 하는 자신을 미워했을지 모른다. 그러한 자신의 삶을 원망했을지 모른다. 


 그가 혹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받고 누린다 해도, 자기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는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할 것이요, 내면의 아픔과 상처로 인해 자신이 겪는 심리 정신적 고통과 괴로움에서 부터 해방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픔과 고통중에 받는 복은 누리지 못할 것이요, 그런 삶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없기에 그는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지 않도록, 그의 죄악이 가져오는 고난과 환난을 경험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켜주심을 간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야베스는 그의 이름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다른 이름을 하나 더 달라고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계속 야베스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를 야베스(아픔과 고통을 가져오는 자여!) 라고 부를 것이다. 그럴때마다 그는 계속해서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면 그가 간구한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가 원한 것은 무엇일까? 


 야베스는 야베스다. 이름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이름의 저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의 이름으로 인해 받고 경험하던 상처로부터 치유되는 것이다. 더 이상 그의 이름이 그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건강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의 노력으로만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의 능력이 함께 역사할 때 온전한 치유가 가능하다. 그래서 야베스는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으로 인한 보호하심과 지켜주심을 구한 것이다.


 그의 기도를 달리 한번 생각해보면,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픔과 고통이 되지 않는 자가 되도록,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기를 간구한 것이다. 자신의 죄와 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에게 근심과 고통이 되지 않도록 간구한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이 어떤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역사하사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와 고통과 아픔이 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삶이 남에게 아픔과 고통을 가져올 수 있는 죄악인 삶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과 기쁨이 되는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악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해 달라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자.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구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하여 구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만한 기도를 드려야하지 않을까? 야베스의 기도가 기복적인 동기와 목적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가 됨을 기억하며 함께 ‘야베스의 기도’ 같은 기도를 드려보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 응답하시는 기도를 드려보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복을 누리고, 이웃에게는 그 복을 나누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삶이되기를 소망하며 2015년을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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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야베스의 기도(3)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 4:9-10)

 

 하나님께서 사람 (아담과 하와)을 만드신 후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들에게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라는 명을 주셨다. 사람에게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사람은 로보트나 기계가 아니다. 사람은 지정의를 가진 생명체로 만들어졌다. 곧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며 의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을 갖고 있다. 문제는,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 자녀들을 사랑해도, 그들을 24시간 지켜줄 수 없고, 그들의 안전도 건강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 삶속에서 일어나는 재앙을 막을 힘이 없고, 다가오는 미래를 알 수 있는 지식이 없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하고 과학의 진보가 있어도, 우리가 알지 못하고 치료하지 못하는 질병 앞에서 우리는 무능함을 느끼고, 이해할 수 없는 수 많은 일들을 바라보며 인간의 무지함을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이 사실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야베스의 ‘나를 도우사’ 라는 말은 그가 ‘무엇인가를 한다/하려고 한다’ 라는 뜻을 의미하고 있다. 야베스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야베스가 하는 또는 하려고 하는 일이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이 틀림없다. 하나님이 뜻하시고,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데, 그 일이 당연히 잘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이 같은 생각을 갖고 일을 추진할지라도 많은 일들이 결국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왜 그럴까?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데 동참한 우리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혼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지 않으시고 꼭 우리와 함께 그 뜻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질 때 기뻐하신다. 매우 기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아시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신다. 전능하시고, 우주 만물과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절대로 이루어 드릴 수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동참하여 쓰이기를 갈망하는 자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성경이 이렇게 증거하지 않는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시 127: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삶 속에서 이루어 가고자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가운데,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뢰하고, 우리의 믿음이 자라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계획이다. 


 야베스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를 갈망했지만, 그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 자체가 긍정적이고 소망적인 이름이 아니지 않은가? 평생 수없이 많이 “고통/아픔을 가져오는 자”라고 불리움을 받았던 야베스가 자신에 대해 무능함과 부족함을 느꼈을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의 손으로 도와주실 때에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어 드릴 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고 예측 못한다. 우리의 업적과 능력을 의지하다 실수하고 실족할 때도 많다. 우리의 부주의로 일을 망칠 때도 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지 않은가? 경험이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우리의 경험조차도 도움이 되지 못할 때도 수없이 많다. 때로는 우리의 자만이 낭패를 불러오기도 한다. 결국 우리도 야베스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나님이여, 실패하지 않고 실족하지 않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온전히 이루어 갈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자하면 방해하는 일들이 생기게 된다. 그 방해하는 세력을 우리의 힘으로는 막기가 힘들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세력을 물리치실 수 있다.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과 싸울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역대하 20:15).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그 일들은 놀라운 것들이요, 우리의 힘만으로는 결코 이루어 드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셔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단, 야베스가 갈망했던 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고, 자신의 개인적인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었음을 기억해야한다. 


 그가 구한 복은 세상적인 물질과 부와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었음을 기억해야한다. 우리도 하나님을 도우심을 간구할 때, 우리가 진정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를 확인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도우사” 라는 기도를 드리기에 합당한 것을 구하는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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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6
교회와 목사: 목사의 역할(1)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 11-16)


 교회의 여러 가지 직책과 직분 중에서 목사라는 직책은 중요하다. 특히 제도적이고, 목회가 목사들의 독점사역이 되고 있는 현대 교회에서 목사의 비중은 매우 크다. 소위 소명 받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름을 받은 자들만이 목사가 되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야하는 목사는 성도들의 존경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성도들은 목사의 목회방침에 순종하며 따르려고 한다. 좋은 일이다. 어느 사회, 단체, 조직을 막론하고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고는 온전히 세워질 수 없다. 


 믿음의 공동체요 하나의 조직으로서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목사라는 지도자의 인도아래 개인으로서와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세워지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성장이란 꼭 수적인 증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믿음이 자랄 것을 말씀하시며, 성숙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4:11-13, 15)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to the fullness of Christ) 성숙해지기를 원하신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이 이웃과 사회와 나라에 덕이 되고 기쁨이 되는 성숙한 성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말이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 성숙해지는 것은 특별한 한 사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결과인 것이다. 


 에베소서의 말씀을 설명한다면 이렇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역으로 생각해보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감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온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다’라는 것은 신앙인의 믿음의 고백과 삶의 모습의 일치 또는 일관성’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은 다시 말하면, 믿음의 삶의 궁극적 목표라 하겠다. ‘예수를 닮아간다’ 또는 ‘성숙해진다’라는 것도 같은 의미가 되겠지만,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어보는 것이 더욱 좋겠다. 


 이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져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란 한 개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을 포함한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만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고 성숙해 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이런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바로 ‘봉사의 일,’ 더 정확하게는 ‘목회’ 또는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어떻게 성장, 성숙해 가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힘들어 할 때에는 격려 받고, 슬플 때에는 위로받고, 모를 때에는 가르침을 받고, 아플 때에는 치유기도를 받고, 갈등할 때에는 상담을 받는 등 여러 가지의 목회적 사역을 통해서이지 않은가? ‘봉사’란 이런 목회적인 차원에서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지 교회 내에서 단순한 봉사차원에서의 일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누구를 통해서인가? 누가 이런 사역들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바로 ‘온전하게’된 자들에 의해서이다. ‘온전하다’는 말은 표준새번역에는 ‘준비시켜’로 영어로는 ‘to equip’으로 번역되었다. ‘to equip’이라는 단어는 ‘어떤 일 또는 목적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드는/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성도의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지도록 도와주는 일은 목회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자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역을 위해 ‘준비된 자들’ 또는 ‘준비되어야 할 자들이란 과연 누구인가? 성경은 그들이 바로 ‘성도들’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음 호에 계속)201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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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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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예수님의 사역: 치유사역(2)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 9”35)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 10:1)

 

 치유된다는 것은 ‘건강한/온전한 상태로 회복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건강이란 무엇인가? 세계보건기구는 건강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건강이란 단지 아프거나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온전한 참살이 (well-being)이다.” (“A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


 건강이란, 단지 질병에 걸리거나 허약하지 않은 상태만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양호한 상태로서 기능이 충분히 발회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의 건강의 개념은 무엇일까? 구약은 치유보다 건강에 대해 더 많이 가르친다. 건강과 가장 가까운 말은 샬롬 (shalom)으로 250번 이상 사용되었고, 그 뜻은 완전한, 온전한 조화로운 상태, 평화 상태, 번영, 의로움 등이다.


 구약의 질병의 개념은 “아프게 되다” “현기증을 일으키다” (hala-동사), 육체의 질병 또는 물리적 요인으로 인해 병들게 됨 (holi-명사), 그리고 질병으로 인한 고통 (makob), 허약함 (mahaleh), 상처 (mahaluy) 이다. 그리고 구약의 치유의 개념은 “치료하다, 수선하다, 화평케하다, 정상으로 회복하다” (rapa-동사), “상처의 치유 및 회복, 보구” (aruka-명사), 그리고 “치료, 재난의 치유, 건강 혹은 유익” (marpe) 이다. 


 신약은 건강보다 치유에 대해 더 많이 가르친다. 신약에서의 질병의 개념은 “병이 들어 힘이 없는 상태” (astheneo), “계속적인 이로 인해 지치게 되는 것” (kamno), “정신적인 질병” (noseo), “나쁜 병이나 악령을 가지고 있는 상태” (kakos), 그리고 “마음의 병” (malakia)이다. 신약에서 “치유”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therapeuo’ (동사)/’therapia’ (명사)로 “병든 자를 치유하기 위하여 돌보아 주는 것”이란 의미이다. 그 외에도 ‘hugiano’ (강건하다, 안전하다, 건전하다), ‘iaomai’ (육체적 치유), 그리고 ‘sozo/soteria’ (질병과 그것의 영향으로 부터 구원, 깨어진 관계의 회복, 전인적 치유)가 있다.


 살펴본 것 같이, 성경에서의 치유는 단순한 육체적 치유만이 아니라 전인적 치유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한 병든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치유받은 사람을 다시 사회로 복귀시켜 그의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사회적, 인간관계적 그리고 정신적으로까지 회복시켜 주셨음을 가르치고 있다. 예로, 문둥병에 걸려 사회로 부터 고립된 사람을 고쳐주신 후, 제사장에게로 가서 확인받고 다시 가족과 사회로 돌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분만 치유를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치유하라고 분부하셨다. 성경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 10:1, 7-8) 


 예수님의 분부하심이 12제자들에게만 국한된 명령과 사역일까? 아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졌던 복음전파 사역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 하셨던 사역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어진 동일한 사역이라면, 제자들에게 명하셨던 치유하는 사역도 똑같이 우리의 사역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이 치유사역은 소위 신유 혹은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몇몇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활발하게 행하여야 할 사역이다. 


 바야흐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제자들 시대보다 훨씬 가까이 왔다. 혹 우리가 사는 날에 오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의 기간은 짧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우리는 열심히 치유사역을 해야되지 않겠는가? 치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고, 복음이 증거되고, 고침받은 사람들의 기쁨과 감사가 넘치지 않겠는가? 이제 교회는 소극적이 되지말자.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는데 적극적이 되자. 복음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전파하자. Not only with words, but also with power!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역하기를 원하면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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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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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2
예수님의 사역: 치유사역(1)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태복음 9: 35)

 

 현대인의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는 건강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건강하기를 원한다. 건강하게 살다가 나이들어 기력의 쇠태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한다. 그동안 의학과 의술의 발전과 발달이 옛날에는 고칠 수 없었던 많은 병들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고, 수명도 많이 길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질병으로 인해 큰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의학이 발달된 현시대나, 의술이 부족했던 2천 년 전이나 똑같이 인간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의학의 발전도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있다. 과연 질병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치료받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을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많은 일/사역 중에 대표적인 세가지 사역은 가르치는 것, 복음을 전파하는 것, 그리고 치유하는 것이다. 그 많은 사역 중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것과 구원의 도를 전하는 것은 절대적이다. 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세번째 사역은 치유인가? 그것도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out of need: 필요에 의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그것도 풍성하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치유해주셨다. 어떤 종류의 병이든, 어떤 이유와 문제로 병에 걸렸던 상관없이 고쳐주셨다. 건강은 삶의 질과 행복의 도를 높여준다. 그래서 건강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치유를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복음 전파하심과 연관하여 생각하면, 우리는 치유사역이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선포하실 때 말과 행함으로 하셨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선포하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과 창조주이신 전능자 하나님을 행함으로 입증해주셨다.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은 한번 허공을 진동시키고 사라져버리는 무의미한 일이다. 말한 것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면 그 말한 것은 신빈성도 없고 진실함도 없게 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신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요 1:1). 예수님은 로고스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심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행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말씀하시고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신 다든지, 이루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들은 신빈성이 없게되고, 믿을 수가 없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과 이사, 그리고 치유는 단순히 일시적 사건으로 끝나버리는 일들이 아니다. 치유는 단순히 병이 낫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치유하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시고, 이 현상을 목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증거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치유하심의 사건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관심과 초점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시선과 삶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역사가 있게 하시기 위함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치유의 역사가 정말 좋은 소식임을 알게된다. 그렇다면 치유사역은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역과 복음전하는 사역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치유하는 사역은 찾아보기 어렵거나 매우 소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치유는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단지 치유의 도구로 쓰이고 있을 뿐이다. 교회에서 치유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치유사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치유 받고, 그 사건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성숙함을 이루어 가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진정 사모하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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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5
예수님의 사역: 복음전파(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개역개정판)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요한일서 4:14)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4-15)

 

 3.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에 대해 평생을 공부하고 경험해도 우리는 온전히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과 관련하여 아직 전도 대상자들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누구라고 소개를 해야할까?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과 열정이 있기에 우리는 여러가지 말로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복음을 전한다. 특히 그들이 듣고 싶거나 아니면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듣기 좋은 말들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아픈 사람인 경우, 예수 믿으면 병도 다 낫는다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는, 예수 믿으면 복을 받게 되어 풍족하게 살게된다는 식의 말로 접근하는 경우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병을 치유하시며, 고난과 고통 중에도 함께 하시며, 감당케 하시고 인도하신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적으로 모든 크리스천들이 다 부유하게 살지 못하고, 모든 병이 낫지 않으며, 환난과 고통가운데 죽는 자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틀린 것인가? 아니다. 분명 하나님은 복을 주시며, 치유하시며,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에 말씀하실 때, 그 성경말씀의 문맥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 그 말씀이 쓰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쨌든,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말 그대로 (듣기) 좋은 소식을 전해주고 싶은 충동이 있다.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은 다 아신다. 건강도 필요하고, 물질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하고, 보호받음도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있는 의사를 보내주신 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 수 있는 해결책을 가진 경제학자를 주시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뛰어난 정치가나 장군을 보내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시고 또한 그들의 주이시다. 


 이 구원자 예수를 증거할 때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크리스천들이 전한 핵심 주제와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었다.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우리에게는 부활의 생명이 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으셨더라면 기독교는 의미가 없다. 영원한, 새로운 생명과 삶이 없는데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초대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는데, 지금 이 부활의 메시지가 오늘날 전도 현장에서 얼마나 선포되고 있는가? 예수님이 누구 또는 무엇으로 소개되어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시요, 인류의 구원자이시요 또한 모든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시는, 아니 되셔야만 하는 분이심을 우리는 확실히, 당당하게 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복음이다. 참 복음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만난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만이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갈 수 있다. 복음을 전하자. 예수를 전하자.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우리는 예수님을 인류의 구원자로 소개하며 전할 책임만이 있다. 구원받게 하는 의무는 없다. 


 한 영혼을 예수께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좋은 도구가 되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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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6
예수님의 사역: 복음전파(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3: 10-11,18,) 

 

 2. 인간의 모습: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을 하고 인간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이나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던 창조주 하나님 앞에선 인간의 참모습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타락한 모습이다. 타락한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에는 죄가 자리잡고 있다. 비록 좋은 의도를 갖고 계획하며 뜻을 품는다 해도, 인간의 본질적 모습은 타락 그 자체이다. 하나님을 버린 인간이 죄 속에 갇힘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어지고 말았다. 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계획과 노력 앞에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우리가 기억하고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참 모습에 대한 이해이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려는 선한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누구든지 자신의 죄악된 참 모습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온전한 죄사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듣기 좋은 말을 해주고, 예수 믿으면 문제 해결도 받고 (세상적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식의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온다면, 그들이 과연 구주되시는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든 언제나 확실히 깨닫고 인식해야 하는 절대적인 사실이다. 이 사실을 잊고 살아갈 때에, 죄에 대한 인식이 없으므로 우리는 쉽게 죄를 범하고 살아가게 된다.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는 (거룩하고 의로운 삶에 관련하여)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 없이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죄와 죄악된 인간의 모습에 대해 더욱 심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할 때 인간의 죄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다짜고짜로 “당신은 죄인이다”라는 식의 접근 방법이 때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매우 효과적일 수도 있겠으나, 일반적으로는 지혜롭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이 온전히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자신이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을 갖거나 불쾌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들도 죄에 대한 말을 듣는 것을 거북해하고 싫어하는데,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렇다고 죄의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고는 구원의 메세지가 온전해 질 수 없는데 말이다. 


 세례요한이 잡히고 난 후에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하실 때 이렇게 선포하시지 않으셨던가: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서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4: 17). 여기서 ‘회개하라’는 단어는 ‘돌아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회개하라’는 것은 지은 죄를 고백하라는 단순한 의미보다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던 것에서 돌아서서 바른 길고 행하라는 것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죄의 삶을 의미한다. 죄의 삶은 인간의 죄의 속성에서 출발한다.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이는 돌아서는 것이 불가능하다.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나의 삶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는데, 내가 왜 돌아서야 할까? 그럴 이유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생각하고 있듯이 죄의 문제가 결코 쉬운 주제가 아니다. 쉽게 다룰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이 없다. 다만 바라기는, 교회가 죄의 문제를 좀더 깊이, 심각하게, 그리고 복음을 전할 때 도움이 될 수 있게 practically 다룰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는 식이 아니라 죄의 속성과 모습 그리고 결과가 무엇인지 믿는 자들이 먼저 분명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 복음의 가치가 더해질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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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9
예수님의 사역(3): 복음전파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17절, 표준새번역개정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딱 한가지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구원이라 함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인간이 왜 믿어야 하는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고 가르치셨다. 이것을 예수님의 복음전파하심이라 말한다. 예수님이 전하셨던 복음의 내용들과 관련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몇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있음을 알게된다. 하나님의 존재, 인간의 모습, 예수님의 실체, 그리고 믿음의 내용들이다. 함께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존재: 인종과 나라/지역을 초월하여 인간은 자기보다 힘이 더 큰 신적인 존재를 인식했다. 그 신이 과연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지식은 없었지만 분명 인간보다 능한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못했다. 후에 철학적 이론을 따라 세상을 창조한 하나의 신을 인정하되, 그 신은 세상과 별도로 존재하며, 세상을 창조한 후에는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인격적 주재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신론이 생겼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막연한 능력있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 분의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무어라 생각하고 믿던지 상관없이 살아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믿음에 관하여 증거하시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이란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그 분을 찾고자 할때 “반드시 그(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한다. 이 구절을 영어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he must believe that HE IS.” 곧,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 미래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이란 말이다. 천년전에 그때에도 현재의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현재의 하나님이시며, 천년 후에도 현재의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계속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히 13:8). 바로 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란 존재를 어떻게 알고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 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로마서 1장 20-21절). 


 어느 인간이 자기는 낳아주신 부모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모가 없었다면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인간을 만들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결코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 인간이 하나님을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하나님과 그의 관계가 깨지게 되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진리, 곧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관계의 원리를 깨는 것이 죄이다.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진 것이다. 그러나 영원토록 살아계시며 인간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창조의 법칙을 따라 인간이 살아감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복을 풍성히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부르시는 것이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복음 전파는 이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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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2
예수님의 사역(2)

 

 


 신앙생활을 적어도 일년 이상 한 성도들은 믿음의 삶과 성장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크리스쳔의 믿음과 삶에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 듣고, 개인적으로 읽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더욱 필요하고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통해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받으며, 삶이 변하게 된 간증들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여호와의 교훈과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게 느껴진 경험들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요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영혼의 생명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 더욱 유익하고 은혜로운 배움이 되기 위해서 기억하고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 몇가지 살펴보자.


1.경외하는 자세로(with fear of the LORD): 우리가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공부시간에 강의하는 사람이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저자이시며 주인이시다. 비록 사람과 사람의 말을 통해 우리가 듣고 배우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금도 말씀하시고 계시는 그 모든 내용들을 정리하며 듣고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나라의 대통령이나 세상의 높은 사람이 나에게 말할때도 우리는 예의와 경외를 표하는데, 하물며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진지하게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최소한 지켜야 할 예의이다.


2.순종하는 마음으로(with obedient heart):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알려진 비유가 기록되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 율법자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빠트리려고 예수님께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고 반문하신다. 율법사들답게 그들은 옳은 답을 말한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라고 하시며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의 요지가 무엇인가? 바리새인들의 대답의 요지는(현대 신앙인들, 종교인들) ‘우리가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의 요지는 ‘아는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궁긍적 이유와 목표는 배움과 깨달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운대로 행하는 데 있다. 행하지 않는 지식은 무용할뿐 아니라 사람으로 교만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행함으로 연결되어 열매를 맺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행하기 위해 배워야 한다. 


3.가르침을 받을만 해야함(be teachable):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열매를 맺는 땅과 맺지 못하는 땅에 대해 가르치신다. 여기서 우리는 ‘씨’를 복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진리의 말씀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많이 해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심령/마음)들이 있다. 왜 그럴까? 배우는 내용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더 잘 안다고 교만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시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일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가르침을 받을만 하지 못하면 유익함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가르침을 받을만한 겸손함으로 말씀을 배워야 한다.


4.열린 마음으로(be open-minded): 열린 마음이란 아무 것이나 다 용납한다든지, 무엇이든 다 받아들인다는 자세가 아니라, 나의 생각과 믿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다시 한번 신중하고 심각하게 검토해 보겠다는 자세이다. 더 나아가서, 나의 믿음이나 생각, 가치관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꾸어 가고 새로워지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많이 배움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이유는 바뀌지 않는데 있다. 생각이 바뀌지 않고, 가치관이 바뀌지 않고 잘못된 인식이 바뀌지 않는 것이다. 바뀌지 않으면 변화가 없다. 변화가 없다는 말은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성숙한 사람, 성숙한 크리스쳔이 되기 위해서는 영적 성장이 있어야 한다. 영적성장은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 그리고 변화는 바뀌어질 때만 생긴다. 잘못된 우리의 생각, 가치관, 믿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배움이다. 성숙하기를 원하는가? 그래서 복의 사람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배움에서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배움을 행함으로 연결하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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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5
예수님의 사역(1)

예수님의 사역(1)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태복음 9: 35)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은 너무 많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그런데 그 많은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한다면 우리는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가르치심(teaching), 복음전파(evangelism), 그리고 치유(healing).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들을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사역의 본으로 삼을 수가 있다. 한 가지씩 다시 한번 살펴보자.


 *가르침(Teaching): 지난 20-30년 동안 한국교회는 성경공부 붐이 있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을 매우 많이 강조하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크리스챤으로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먼저 배움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성경을 읽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설교를 듣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한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많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짧은 시간 안에 정리하여 전한다는 것은 절대 무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읽다 보면 또다른 많은 진리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음으로 배우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우선,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읽는 성경 어떤 부분의 배경을 비롯하여, 성경이 한글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고대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이해도 필요할 때도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신학적 지식(knowledge of the biblical theology)이 있어야한다. 성경해석과 관련된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성경을 무리 없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갖기 위해 정식으로 그리고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 성도로서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목사가 필요한 것이다.  


 목사는 신학교에서 신학과 목회에 필요한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리고 얻은 지식들을 성도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통해서 성도들의 신앙과 믿음의 성숙을 도와주는 것이다. (목회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겠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성경을 배우기를 원하고 적극적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면 족한 줄로 알지만,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총괄적으로 그리고 성서신학적으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영혼의 생명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게 되면, 잘못된 믿음을 갖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 깨달음, 지식위에 기도와 봉사와 사역이 있어야 좋은 결과들을 얻게 된다. 말씀에 대한 지식없이 기도나 봉사만 많이하는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한 믿음을 갖고있는 것을 필자는 너무 많이 본다. 기도도 중요하고, 봉사와 사역도 필요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말씀위에서 이루어져야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경은 교회가 세워지는 것과 관련하여 갈라디아서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갈 2: 20-21)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당연히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가 (개인으로서의 교회와 공동체로서의 교회로) 든든히 세워지려면, 달리 표현GK면 믿음이 바르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공부가 모든 문제의 해결도 아니고, 교회 사역의 전부여서도 안 되지만, 말씀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없이는 건강한 믿음을 갖기 어렵고, 건강한 영적성숙을 기대할 수 없다. 


 성경말씀을 많이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말씀을 이해하지 말라.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자. 하나님의 말씀 배우기를 사모하기 바라며...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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