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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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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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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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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1
참 딱해요(상)

    
    

 아이들이 어릴 때이니 내 나이 30대 초반쯤이었으리라. 언제부터인가 시장엘 나가면 이리저리 돌아보곤 하는데 시장 사람들의 모습에서 진한 연민과 옛날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노상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겉모습이 꾀죄죄하니 지쳐 보이는데다가 딸만 다섯인가 한다는 시장통의 공주 엄마는 내 마음을 가장 아리게 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시장을 나가면 그 엄마가 으레 눈에 띄곤 하는데 나는 늘 저런 야채 정도 팔아서 저 아이들 공부시키며 살 수 있을까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아침에 장사를 나왔으니 식구들 아침은 어떻게 하고 아이들 도시락은 싸서 보낼 수가 있을까 시선이 머물곤 하였다. 


그러면 교복을 입은 딸들이 돈을 달라고 했는지 앞치마처럼 두른 누런 전대에서 돈을 꺼내 주며 밥은 먹었느냐, 도시락은 쌌느냐며 돈을 좀 아껴서 쓰라는 듯 그런 표정으로 보였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보며 오래 전의 아버지 모습이 느껴져 자꾸 마음이 쓰였다. 


 그 옛날 아버지가 서울로 와서 쌀가게를 하시며 물건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며 가슴이 아파왔던 때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우리 7남매 교육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작은 아버지의 잦은 사고로 해서 아버지는 홧김에 서울로 몽땅 올라오신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자리도 잡혔겠다 그런 소매상쯤은 하지 않아도 내로라하고 사셨던 양반이 크지도 않은 체구와 키에 가게 방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볼 때면 가슴이 쓸쓸하고 아파올 때가 있었다. 


 처음엔 가게를 하며 삼륜차까지 몇 대 가지고 했는데 아이들이 일곱이나 되니 학비 때문이었는지 차츰 차는 팔고 가게만 하다가 옆집의 방앗간이 이사를 가게 되면서 나중에는 가게와 방앗간을 같이 하시게 되었다. 


 처음엔 물건도 많이 쌓여 있곤 하였는데 내가 보기엔 해가 갈수록 가게가 빈약해 보였다. 난 이따금씩 쌀 한 가마 팔면 얼마나 남을까, 하루에 몇 가마 정도나 팔아야 우리 식구가 먹고 살 수 있으려나 가늠해 보곤 하였다. 


아침이면 언니부터 시작해서 동생들까지 학교에 가면서 돈을 타 가는 것을 보며 얼마나 남는데 저 돈을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어 난 슬그머니 그냥 나가곤 하던 때도 있었다. 


 그랬기에 결혼을 해서 살면서 동네의 그것도 노상에서 장사를 하는 아줌마에게서, 슈퍼를 하는 자그마한 키의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그들에게서 수시로 아버지의 고충을 유추해 보곤 했던 것이다. 


 그 후로 난 이따금씩 내가 저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뭐 없을까 고심하던 끝에 기도를 하면 되겠다 싶어 친정 엄마와 시어머님이 다니시는 성당에 가기로 작정하고 교리 반에 등록을 하였다. 


 처음엔 마귀가 시험을 한다더니 내게 해당이라도 된 듯 시작하고 몇 번 나갔는데 꼭 성당을 나갈 시간만 되면 일이 생겨 그것도 4주가 계속되다 보니 나중에는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 동네에서 나보다 몇 살이나 아래쯤 되는 새댁이 나를 보더니 “참 딱해요.”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나와 같이 교리를 시작했던 사람이었고 그때는 이미 그 여자는 영세를 받았을 때쯤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무슨 얘기냐고 물어 보지도 못하고, 난 어이가 없어 벙벙하니 듣기만 하고 있었는데 이따금 그 여자가 내게 했던 ‘참 딱해요.’하던 말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동네에서 지나며 우리 큰 딸아이 옷을 유심히 쳐다보기도, 아무 소리도 없이 목 뒤를 제치고 상표를 살며시 까보기도 하였다. 그녀가 보기에 아이의 옷이 예쁘게 보였던 모양이다. 몇 번 그런 일이 있어 얼굴만 기억할 뿐 말 한 번 나눠본 적도 없는, 자세히는 알 수 없는 동네의 새댁이었다. 


 난 처음 내 취지와는 달리 그들을 위해서 올바르게 기도 한 번 못해 보고 이따금 생각이 나면 ‘장사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며 마음속으로 염원할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딱한 일이 생긴 것이다. 집 앞 골목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닭 집이 새로 생겼다. 언젠가 누가 왜 이 닭 장사를 시작했느냐고 물으니 먹고 살려고 했다는 그 엄마의 얼굴이나 그때의 옷차림까지도 눈에 아른거린다.


 지금 생각해 보면 50대 초반, 중반쯤으로 보이는데 남편과 아들 둘은 가겟방에서 밥을 먹고 있었고, 앞에 두른 앞치마가 지저분했던 것은 닭을 잡다가, 손질하다가 수시로 손을 닦기 때문으로 보였다. 


 손님이 오면 닭장 안에 갇혀 있던 닭을 잡으려 손을 안으로 넣으면, 닭들은 서로 잡히지 않으려 좁은 닭장 안을 꼬꼬댁 소리를 질러대며 도망치듯 하던 닭을 용케도 한 마리 잡아, 칼로 푹 찔러서 뜨거운 물로 데쳐서 털을 뽑은 다음 토막을 원하면 툭툭 쳐서 내 주는 것이었다. 


그런 장면을 지켜보며 난 너무 가슴도 떨리고 그 아줌마가 안쓰러워 보였다. 왜 닭 장사를 했느냐고 물어 봤던 엄마도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 나와 같은 심정이어서 그 엄마가 안 되어 보여 물어봤을 것 같다. 그야말로 닭고기는 먹을 수 없으리라 싶게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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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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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5
신용카드(하)


        

(지난 호에 이어)
 그런데 그 늘어만 가는 빚을 언제, 어떻게, 갚을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카드를 쓰면서 단순히 물건 구입을 위해서 썼는지 생활비가 부족해서 썼는지, 등등을 다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이따금 신문에도 보도가 되곤 하는 가계대출로 인한 빚이 늘어가며, 남편이 직장을 잃게 되면서 생활비로 카드를 쓰게 되었다는 얘기나 카드 사용으로 인한 신용 불량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를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며 편치 않은 마음이 되곤 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일단 생활수준, 형편을 올려놓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그대로 유지를 하려거나, 나도 모르게 예전의 씀씀이 그대로 하며 그 씀씀이가 줄어들지 않아 꼭 현금이 있어야 쓸 수 있었던 때와는 그 차이가 많이 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나야말로 지금도 그 씀씀이를 줄이지 못해 꼭 사고 싶은 물건,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엔 주저하는 마음이 없지도 않지만, 일단은 사고 본다. 그렇긴 해도 충동구매를 하거나, 낭비가 심한 편은 아니기에 그것은 어찌 보면 카드의 남용일 수도 있겠으나 카드를 활용함도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카드를 갖게 되면 필요 없이 돈을 쓰게 되어 낭비를 하거나 빚이 늘어난다면서 아예 카드조차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 같은 경우 남의 빚은 물론이요, 자기의 분수, 형편, 수입 한도 내에서 지출을 하게 되니 살림하면서 무리는 하지 않게 되긴 하겠지만 그런 사람들도 경제를 제대로 꾸려 간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즈음 같이 신용카드가 범람하는 시대에 살면서 신용카드 하나 둘쯤 없대서야 본인의 수입도 제대로 활용을 못하고 사는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돈이 필요해서 은행을 찾아갔단다. 그 사람은 그 동안 카드는 물론이요, 은행에서 돈 한 번 빌려 보지 않았기에 나 정도라면 은행에서 어느 만큼의 돈은 빌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음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그것은 그 동안 그 사람이 돈을 빌린 적도 없기에 그 사람의 신용 정도를 알 수 없어 은행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신용카드’ 말 그대로 상대를 믿고 돈을 빌려 주는 증서가 되는 것이다. 물건을 구입하면서 당장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고 한 달 후에, 필요하면 분할로도 가능하니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 경제력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니 그만큼 운신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 ‘서로 상부상조 한다’는 얘기가 여기에도 부합된다. 빌려 주는 쪽에서는 상대를 확실하게 믿을 수 있으니 의심하지 않고 돈을 빌려 주는 것이요, 쓰는 입장에서는 돈이 필요 할 때 구차하게 남에게 애기를 하지 않아도 얼마간의 이자만 내면 되니 이처럼 고마운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한국에서는 신용 카드를 활용하면서 살았다면, 이민 사회에 와서는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한 번 할 수 없던 이곳에서 필요 할 때 얼마나 요긴하게 잘 쓰고 있는지 모른다. 요긴하게 잘 쓰는 것을 넘어서서 카드가 없었다면 쓰지 않아도 되는 ‘카드빚’을 지고 있음도 시인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날 은행엘 갔다. 그런 일은 별로 없는데 창구에 있던 딸아이 또래의 필리핀에서 온 은행원 직원과 몇 마디 말이 오고 갔다. 나보고 한국엘 언제 다녀왔느냐고 묻기에 그 동안은 3,4년에 한 번은 나가게 되었으며, 이번에도 책 2권을 내기 위해 한국엘 가야 한다고 얘기를 했다. 내 얘기를 듣고 있던 그녀가 고객용 방으로 가자고 해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무슨 용지를 꺼내더니 나보고 지금 쓰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니 싸인을 하라고 하기에 나중에 딸과 같이 와서 하겠다고 했더니 그럴 필요가 없으며 더 좋은 것이니 지금 당장 싸인을 하라는 것이다. 난 그 싸인을 하라는 그 용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잘못될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이며, 집에 가서 딸아이에게 물어 봐서 아니다 싶으면 취소를 해도 되겠지 생각을 하며 그 자리에서 싸인을 하라는 곳에 싸인을 하고 돌아 왔다.


 그 즈음 난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었는데 내 통장을 보며 나와 얘기를 하는 짧은 순간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은행에 다녀 온 지 얼마 지나서 은행에서 무슨 체크가 오긴 했지만 잊고 있었다. 그 이후 은행을 갔어도 그 여직원은 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서 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기에 그 은행엔 다시 갈 수가 없었다. 그런 이후 1년도 넘은 어느 날 큰 딸아이가 방 정리를 하다가 그때 우편으로 온 체크를 들고 와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딸과 얘기를 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라인 어브 크레딧이란 체크로 카드보다 쓸 수 있는 한도액도 더 많았으며, 이자율도 낮았기에 그 동안 써왔던 비자 카드에 남아 있던 금액을 그 체크로 해서 갚고 보니 이자가 우선 좀 줄었다. 


 영어를 잘 알아듣지를 못했음에도 같은 이방인이기에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는 나를 그녀가 조금은 도울 수 있겠다 싶었는지 나중에 딸과 같이 오겠다는 내 얘기는 뒤로 한 채, 내가 먼저 묻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금방 해 줘서 그 즈음 그 체크를 얼마나 요긴하게 잘 쓰고 있었는지 이름도 모르는 그녀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같은 약이라도 잘 쓰면 보약이 될 수 있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될 수도 있듯 신용카드 또한 잘 쓰면 많은 경제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절제하지 않고 함부로 쓰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신용 불량자가 되기도 할 터이니 꼭 써야 할 곳, 절제를 해야 함이 참으로 절실하다 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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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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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6
신용카드(중)

                

(지난 호에 이어)
 남편이 내게 선심 쓰듯 하나 만들어 준 신용카드와 백화점 카드 하나로 내 수입, 즉 남편이 가져다 주는 생활비 한도 내에서 무리하지 않고, 마음 편하고 즐겁게 애용을 했었다. 


그것은 남편이 가져다 주는 고정된 월급은 한 달을 다 쓰고 나면 또 그만큼의 돈은 가져다 줄 것이란 확실한 수입, 보장된 수입, 고정된 수입이 있었기에 신용카드를 쓰고, 때에 따라서 긁어 댄다 싶어도 막말로 못 갚으면 아파트라도 팔아서 갚을 수 있는 확실한 재정이 있었으니 신용카드를 쓴다 해도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았었다. 


 남편이 준 신용카드로 처음 구입을 한 것이 모피 코트였다. 아무래도 고가품이다 싶으니 일시불로는 크게 부담이 되지만 얼마간의 수수료만 내면 6개월, 1년 분할로도 가능하기에 부담 없이 사게 되었다. 


그 다음에 그 카드로 작은 딸 자모가 강북에서 보석상을 하고 있었는데 시내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디자인도 마음에 들어 이따금 가게 되면 패물 하나씩을 구입하게 되었으니, 나야말로 카드 덕을 톡톡하게 보고 활용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 이민사회, 캐나다에 와서 내가 쓰고 있었던 비자카드라는 것은 쓸 때의 마음이나 쓰고 돌아설 때의 마음은 묵직한 무게로 다가올 때가 있었다. 캐나다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아 둘째 동서와 백화점을 가게 되었다. 난 그 때도 물건을 사면서 현금 대신에 카드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둘째 동서야말로 캐나다에 나보다 거의 7, 8년 먼저 와서 살았는데 신용카드 하나 없이 살고 있었다. 한국이나 이 사회에서나 여자가 직장을 가지고 있는 경우엔 굳이 남편 손을 빌지 않더라도 신용카드 하나 둘쯤 소지하는 것이야 극히 당연하고 정상이라 볼 수 있지만, 직장이 없는 경우엔 남편이 신경을 써 주지 않으면 카드를 얻기가 그렇게 용이하지 만도 않다. 


 둘째 동서야말로 집에서 살림만 하다 보니 게다가 아주버님께서 별로 신경을 쓰시지 않았기에 그 흔한 신용카드 하나도 없음에 나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후 어느 날 작은 아주버님을 뵙게 되었을 때 동서가 아직도 신용카드가 없는데 하나 해주시지 그러느냐고 했더니 카드가 무슨 소용이며 카드가 있어야 돈만 더 쓰게 된다는 얘기에 두 번도 카드 건에 대해서는 거론을 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둘째 동서도 신용카드 하나 둘쯤이야 소지하고 있겠지만 소위 남편이란 사람이 아내가 돈을 필요 이상으로 더 쓰게 될까 봐 그런 배려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사실들을 몰랐을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남편이 아내에게 그런 인심도 쓸 줄 모른다는 남편의 저의를 간파하게 되면 그 이상의 애정은 가지 않게 된다.


 가정 형편, 경제적인 사정은 상세하게 밝히지 않아도 아내들도 그런 것쯤이야 알고도 남고, 살림하는 여자가 자기의 형편, 분수 이상 신용카드를 써댈 여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아내에게 신용카드 하나쯤 선사하는 것은 그것을 쓰지 않고 갖고 다니기만 해도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는 것인데, 그런 배려도 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그것을 기대하는 만큼 마음도 멀어지게 된다. 


 캐나다에 와서 처음 얼마 동안은 한국에서 쓰던 마스터 카드를 가지고 쓰다가 몇 년 지나 큰 딸아이가 하나 만들어준 비자 카드와 기름 넣을 때 쓰는 기름 카드만 있으면 현금을 소지하지 않아도 물건을 구입할 때나 기름을 넣을 때나 카드 하나로 대용하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카드 사용 액수가 누적이 되면서부터 그 이상으로 마음이 짓눌렸다. 곰곰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처럼 부동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가져다 주는 생활비 외에 남편의 주머니까지 엿볼 수 있는 형편도 아니어서 카드를 쓴다 함은 ‘빚’이 점점 늘어간다는 중압감에 시달릴 때가 있었다. 


 돈이라는 것, 지출을 한다는 것은, 수입이 전제가 되었을 때, 갚을 것을 예상해서 쓰게 되어 있는 것이지, 수입은 적은데 쓸 곳은 생기고 어쩔 수 없어 신용카드를 쓰게 되니 그래서 마음은 마냥 짓눌렸다. 


 신용카드가 생기기 이전엔 외상이라고는 져본 적이 없다. 아니 돌이켜보면 결혼해서 몇 년 되지 않아 동네 식품점에서 두부인지 파를 한 단 외상으로 사고는 밤새 마음이 불편해서 뒤척인 적이 있었다. 그 돈이야 그 다음날 바로 갚았지만 그때야말로 새댁이 동네 식품점에 가서 외상을 한다 함은 마냥 초라하고 주눅들어 견딜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만큼 외상이라 하면 해서도 안 되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는데, 이건 식품비가 아닌 무엇이든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조그마한 카드 한 장이면 못할 것이 없으니 현대판 ‘도깨비 방망이’가 아닐 수 없다. 


 카드 별로 사용할 수 있는 한도 액수도 높은 것이 많아 현금이 필요한 경우 남에게 구차하게 얘기하지 않아도 만사형통으로 해결해 주고 있으니 그 편리함이야 말해서 무엇 할까마는, 엄밀히 따지고 보면 카드를 쓰는 그 행위 모두가 ‘빚’을 지는 것임에도 수중에 돈이 없어도, 또한 한꺼번에 그 빚을 다 갚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과 맹점 때문에 카드 빚이 늘어가기 십상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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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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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2
신용카드(상)

          

 우리사회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70년대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닐 때였는지 그 후였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어느 고등학교 친구가 동창 중 누가 신세계에서 신용카드라는 상품의 회원권을 판매하는데 그 세일즈 우먼으로 일한다고 했다. 


 그녀는 대학 진학은 하지 못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가끔은 반에서 1, 2등을 하며 노력파에 억척스러운 면도 있는 아이였다. 그 당시만 해도 여자들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경우는 능력이 뛰어나거나, 가정 형편 때문이거나,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면 그저 대학을 나왔다 해도 좋은 신랑감 만나서 결혼하는 것을 제일로 꼽던 시절이었다.


 그런 사고에 젖어 있던 내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신용카드'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듣기는 했어도 이해가 빨리 되지를 않았다.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여고 동창생의 사회 진출은 조금은 극성스러운 여자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얼마 지나 남편이 신세계에 근무하고 있던 대학 친구가, 그 신용카드라는 것을 갖고 있으면서 또 직원에게는 몇 프로의 할인 혜택에 무이자로 삼 개월까지는 요금을 분할로도 가능하다고 해서, 그 친구 신용카드로 신세계에서 옷을 한 벌 사 입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 즈음 조금 지나 남편도 ‘신용카드’라는 것을 갖고 다니면서 현금 대신 카드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엔 카드가 발급되어 사용하는 것이 카드 가맹점이 미처 뒤따르지 못할 만큼 카드 사용을 만능으로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랬기에 어떤 때는 밖에 나가 현금 대신 카드를 내어 밀면 “우리 업소는 아직 카드를 받지 못하는데요.”하는 소리를 이따금 듣기도 하는 것이었다. 


 차츰 카드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그 이전엔 지갑에 돈을 두둑하게 넣어 가지고 다녀야 여유가 있어 보이던 사람들이 이젠 현금 대신에 신용 카드만 한 개, 차츰 몇 개씩 넣어가지고 다니는 것이 그 사람의 재정적인 능력을 은근히 과시하는 '명물'이 되기 시작했다. 


 신용카드가 점차 일반화되어 가면서 신용카드 한 두 개쯤 없는 사람은 그야말로 시대감각이 뒤떨어지거나, 말 그대로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 십상이었다. 


  남편이 신용카드를 하나 갖고 있으면서 나도 하나 해줄까 하고 언뜻 비치더니, 신용카드를 만들어 줌으로 해서 내게 보이지 않는 어깨에 힘을 실어주고 싶지 않았는지, 쓸데없이 돈이나 더 쓰겠다 싶었는지, 내게 신용카드의 매력이나 위력은 안겨주고 싶지 않았는지, 내 기억으로는 남편이 신용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하고도 몇 년이 지난 다음 신용카드를 선물로 받았다. 


 결혼을 해서 신용카드 하나 없이 살다가 강남으로 이사를 해서 88년도쯤에 백화점 카드를 하나 갖게 되었다. 아파트 옆에 있던 뉴코아 백화점 신용카드 발급 창구를 찾아갔더니 개인에겐 재산세 납부 증명서와 주민등록 등본만 있으면 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대부분 남편의 직장과 직장 내에서의 직급 등으로 미루어 신용카드가 발급되곤 하는 것 같았는데, 나 같은 경우는 남편이 자영업을 하고 있어 재산세 납부 증명서는 재정 상태가 가늠이 되는 것이어서 그쪽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제출하고 백화점 신용카드를 하나 취득하게 되었다. 


아마 그 즈음 남편에게서도 마스터 카드 하나를 선사 받아 뉴코아 백화점이 아닌 곳에서는 마스터 카드를 쓰게 되니 현찰은 거의 쓰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 즈음엔 이미 카드도 실버니 골드니 일반회원이니 하는 식으로 구별이 되기 시작해서 물건을 구입한 후 카드만 내어 밀어도 이미 상대의 신분이나 재정 상태가 짐작이 가는 터여서 종업원도 그 카드 여하에 따라 상대에게 대하는 태도부터가 달라진다. 


 우리네 속담에 ‘외상은 남의 소도 잡아먹는다.’더니 아닌 게 아니라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물건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지 난 그때부터 그런 습성이 생긴 것 같다. 


 카드를 사용하기 그 이전엔 어림도 없었을 터인데 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한 후로는 현찰, 즉 현금을 낼 때는 ‘아깝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카드를 쓰고 난 후 카드 대금을 지불하는 돈은 으레 내는 것인 줄 알고 아까운 마음이 덜 드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떤 사람은 나중에 카드 대금을 내는 것은 딴 돈 들어가는 것 같아 더 아까워 가급적이면 카드를 쓰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는데 ‘외상 심리’가 내겐 더 작용을 하는지 현금보다는 신용 카드를 더 애용하곤 한다. 


 그 즈음엔 다시 카드 발급하는 회사도 많아져 지갑을 열면 은근히 여러 개의 카드가 ‘나보란’듯이 꽂혀 있어야 과시하는데 힘을 실어주기까지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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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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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8
싸인(하)

 
                 
  

(지난 호에 이어)
그래서 그 다음엔 영어 학교를 다닐 때 이번이 기회이다 싶어 영어 선생님께 싸인 좀 멋지게 해보고 싶은데 내 이름자 가지고 어떻게 써볼 수 있겠나 여쭤 보았건만 선생님께 별다른 소득도 보지 못하고 이젠 하나의 일관된 싸인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또 싸인이란 말 대신에 이니셜로 쓰라는 얘기가 있다. 이니셜은 영문자에서 앞 뒤 한자씩으로 간단하게 써넣는 것으로 정착을 하였으나 난 그 싸인이란 것을 한국에서 쓰기 시작해서 꽤 여러 해를 거듭해서 하나의 싸인을 제대로 만들어 내었으니 그냥 쓰기만 하면 되는 싸인도 이렇게 시행착오를 하였는데, 그 싸인은 곧 나의 이름이요, 나 자신 일터이니 신용카드를 쓰고 난 후나 은행에서 쓰는 싸인이 아닌 내 이름자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싸인이 되어야겠다 싶으니 다시 또 싸인을 만들어 내었던 과정만큼이나 묵직하게 자리잡아 온다. 


 예전부터 남의 빚보증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고 얘기할 만큼 ‘빚보증’이란 말 그대로 남의 돈을 빌려 쓰는 일에 보증을 서면서 만약 상대가 그 돈을 갚지 못했을 경우엔 그 빚을 대신 갚아준다는 서명이나 다를 바 없다. 애초부터 빚보증을 부탁하는 사람에게 그 짐을 지우려는 것이야 당연히 아니지만 더러는 남의 빚보증을 잘못 서게 됨으로 해서 아닌 게 아니라 팔자가, 운명이 달라지는 경우도 더러는 있으니 오죽해야 남의 빚보증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는 극언까지 나왔을까 싶다. 


남에게 빚보증을 부탁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면 어쨌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어려움을 극복해 보고자 방법을 강구하다 보니 그런 와중에 남에게 어려운, 해서는 안 되는 부탁도 하게 되는 것인데 빚보증을 부탁하는 사람만큼이나 부탁 받은 사람도 답변을 해주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하고 보니 친척 중에 딸 둘과 장애자 아들과 같이 사는 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분이 직장을 꾸준하게 다니는 것 같은데 가세가 무척 곤궁한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꽤 오래 전에 빚보증을 잘못 서게 되어 그때까지 그 빚을 갚느라 여유가 없다고 했다. 


난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와 성씨가 같기도 했는데 거의 10년도 넘는 세월 동안 내가 한 푼도 써보지 못하고 그 빚으로 인해 가세가 필수도 없었건만, 그로 인해 원망이나 찌그러지고 뒤틀린 심사가 느껴지지 않아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분이다.


그 분은 약주를 워낙 좋아하셨는데 착하고 바른 심성 덕분인지 소아마비 자식, 소아마비 동생이건만 식구들 모두 그 동생을 끔찍이도 위하고 남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내보이며 살았던 그 가족의 성품이 더 인상적이어서 타고난 심성, 바탕이 고운 모양이라며 가슴에 새기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젠 신용카드라는 것이 나오고 보니 어찌 보면 남에게 꺼내기 어려워 망설여지고 힘들었던 그런 요인들이 좀은 수월해졌다 싶기도 해서 내가 물건을 외상으로 사고 내가 갚겠다는 싸인을 하고, 현금으로 인출해서 쓰고 하다 보니 ‘카드빚’은 점차 늘어나고 있건만 남에게 부탁을, 남에게 어려운 얘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니, 심적인 부담이 그만큼 적기에 본인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카드빚이 늘어가기가 십상이다.


 이를테면 내가 쓰는 빚을 내가 써주는 그 싸인이라는 것으로 해서 늘어만 가게 되었으니 남의 빚보증을 서는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내가 그 자신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때로는 카드를 쓰고 싸인을 하고 돌아서며 내가 지금 이것을 카드로 꼭 써야만 했는가 하고 살펴보게 됨은 그나마 ‘카드빚’을 좀 줄이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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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싸인(상)

 
                  

 싸인이라는 말이 있기 전에는 으레 도장이 쓰이곤 하였다. 도장이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쓰이는 것 말고는 학교에서 성적표나 과제물, 숙제 같은 데에 부모님 도장 받아 오도록 하는 것이 우리 학교 다닐 때의 일이었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는 부모님이 시골에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 목도장을 하나 가지고 있다가 필요하면 쓰곤 하였다. 부모님과 떨어져 있는 아이들 말고도 아버지 목도장을 가지고 있었던 아이들도 더러는 있었을 것이다. 


 인감도장은 본인 아니면 파기 힘들어도 도장 파는 곳에 가면 목도장쯤은 이름만 알면 도장 하나 파는 것쯤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우리 세대는 그렇게 해서 학창 시절이 지났는데 언제부터인지 아이들 숙제 끝에 부모님 ‘싸인’ 받아 오도록 되어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도장 대신 싸인이었다. 


 처음엔 ‘싸인’이란 말이 생소해서 이름을 써넣어야 하는지, 아니면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암호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하는지 어리둥절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작은 아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일기장인지 숙제 물에 싸인을 받아 오라고 했다며 딸아이가 내 앞에 갖다 내미는 거였다. 그래서 어떤 날은 한문으로 이름을 써넣기도, 어떤 때는 영어로 써보며 몇 번 거듭하는 동안에도 나름대로의 확실한 싸인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이가 하는 말이 선생님이 “너는 집에 엄마 아버지 삼촌 이모 등 그렇게 많은 식구가 사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다음엔 아이의 과제물에 싸인을 요구했던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봐주었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어쨌든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 아니 내 싸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 되겠는데 워낙 잘 쓰는 글씨인지라 어떻게 그 싸인을 좀 멋지게 써 볼 것인가 하는 것이 다시 내게 숙제거리가 되고 말았었다. 


 아마 그 즈음에 백화점 신용카드를 하나 갖게 되었는데 그 카드 뒷면에 또 본인의 싸인을 써넣어야 했다. 그래서 다시 또 싸인을 영어로 써야 하는지, 한글로 내 이름을 써야 하는지 순간 멈칫거려 졌었다. 카드 뒷면에는 영어로 내 이름자를 써넣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백화점 점원에게 싸인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렇게나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점원에게 물었던 것은, 내가 싸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기도 했지만 백화점에서 요구하는 그런 형식이 따로 있는가 해서 물어 보게 되었다. 


 그 전에 아이 공책에나 써넣던 싸인이 다시 또 백화점에서 신용카드를 쓰고 난 다음엔 영수증에 으레 본인이 싸인을 해야 했다. 몇 번 어설픈 싸인을 거듭하는 동안 내 영문으로 된 싸인을 이제야 정착해서 쓰게 되었지만 그 싸인 이야말로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지만, 도장을 쓸 때와는 달리 싸인을 보면 이미 그 사람의 학력쯤이나 필체를 일별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싸인이 만연되기 시작한 것이 그 신용카드를 쓰기 시작하고가 아닌가 짐작된다. 그 전엔 이미 도장이 대신 했던 것을 도장은 남의 것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지,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한 후엔 영수증에 싸인을 해야 하기에 본인 아니면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더러는 가족의 것을 빌려 쓰거나 도난 당한 것을 남이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싸인이란 것이 몇 번 어설픈 손놀림 끝에 겨우 익숙해졌는가 싶었을 때 도장이 없는, 순전히 ‘싸인’만 쓰는 서양 사회에 와서 처음 은행에 가서 한국 직원이 서류를 내어 밀며 “여기 싸인 좀 하세요.”하던 그 순간에 다시 또 싸인? 하고 당황했던 적이 있다. 그 순간 다시 또 영어로, 한문으로, 우리말로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얼마만큼은 부끄럽고 어설프기도 했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하세요.”하는 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여직원 말대로 한문이든 영어든 한글이든 내가 알아볼 수 있으며, 또 그 싸인으로 일관해야 하는 거였다. 아이의 숙제 장에서처럼 이렇게도 저렇게도 써보는 것이 아닌, 일관성 있게 하나로 통일해서 싸인을 하는 것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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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3
감정의 너울(하)

 

(지난 호에 이어)
아이가 자다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할머니 얼굴을 완전히 익히지도 못한 상태에서 몇 주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나를 낯설어 하며 엄마한테 안기던 손녀딸이 얼마나 서운하던지, 난 그만 가야겠다며 딸아이에게 더 자라고 하며 휑하니 딸네 집을 나섰다. 


 어느덧 돌을 지나 20개월 가까이 되다보니 엄마 아빠 소리는 물론이요 나에겐 “할미할미”하며 두 팔 벌려 안겨온다. 어떤 날은 유모차에 무표정하게 그냥 앉아있기도, 어떤 날은 할미하며 자그똥자그똥 걸어오기도 한다. 


 할머니를 모르는 아이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땐 내 마음도 무덤덤해지고, 할미할미하며 팔을 벌려 아장걸음으로 다가오는 아이를 볼 때면 마음은 어느 사이 포근해져 “서진아, 어서 오라”며 덥석 안게 된다. 


 그런데 가끔은 엄마한테 떼를 쓰며 운다. 아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아이는 엄마를 보챈다. 그럴 때면 나 같다면 소리라도 지르고 한 대 때려주기도 하겠건만, 딸아이는 “노노” 하며 아이를 달래곤 한다. 


 그 순간 난 아이가 더 이상 예쁘지 않다. 제발 어서 빨리 울음을 그치고 떼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순간 또 스치는 얘기가 있다. 우리 딸도 내게 그런 순간이 있었던지 친정엄마가 아무리 “손녀딸이지만 에미를 귀찮게 해서 밉다”고 하던 말이 떠오른다. 나와 엄마의 감정상태가 비슷했겠지 싶은 생각을 해본다. 


 요즈음 우리 나이가 친구들을 만나면 손주들 자랑이 늘어져 돈을 내놓고 하라고 한단다. 흔히 얘기하기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무슨 짓을 해도 예쁘기만 하다고 하니, 그들 감정이 풍부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것인지, 내가 예민한 것인지 가늠이 안 된다. 인간의 감정은 아이나 어른이나 ‘예쁜 짓’을 할 때 내 마음도 다가가고 좋아지는 것이지, 미운 짓을 할 땐 가던 마음도 멈추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느 날 그렇게 집에 와서 있다가 내가 가게에 나갈 시간이 되어 현관을 나서니 할미를 부르며 쫄랑쫄랑 쫓아 나와도 그래도 할머니가 저를 두고 가는 줄 알고 나중에는 ‘아앙’하고 우는 것이었다. 딸아이 말로는 이내 그쳤다고 하는데 아이의 그럴 때 마음 상태와 나의 마음은 어떠했나 살펴보기도 한다.


 아이가 ‘아앙’하고 울던 모습이 떠올라 아이의 여린 가슴에 작은 생채기라도 나지 않았으려나 어루만져 주고 싶기도 해서 작정하고 나가서 아이의 여름옷을 몇 벌 사서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런 감정의 기복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큰딸이 내게 말하기를, 손녀딸이 제 아빠한테 “아빠 안 좋아 고고”하며 엄마한테 안기곤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 아빠가 서운해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내외가 고민이라고 까지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사위한테 아이가 그렇게 말을 하니 얼마나 서운하냐고 하며, 아빠가 서진이를 얼마나 예뻐하고 잘해 주는데 아이가 왜 그럴까 궁금해서 물어 봤더니, 얼마 전에 고집을 부리기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더니 아이로서는 못내 마음에 맺혔던 모양이라고 한다.


 아이는 어느 사이 27개월이 되었는데 감정표현을 확실하게 한다. 밖에 나갈 때면 꼭 입고 싶은 옷만 고집을 해서 벌써부터 옷 입히는 것이 신경 쓰인다고 한다. 아이를 보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그렇다면 버릇만 그 어린 나이에 굳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지능이나 감성, 심리적인 정서도 아울러 키워지며 여물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난 학교 들어가기 전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나도 분명 그 나이를 거쳐 왔건만 역시 내 감정상태를 알 수 있긴 하지만, 과연 내 마음상태를 얼마나 표현 할 수 있을까. 그러니 그 어린 아이의 감정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인간의 감정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된다. 기쁨, 슬픔, 시샘, 증오 등. 부디 우리 손녀는 감정은 풍부하되, 감정의 변화가 아주 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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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감정의 너울(상)

 

 머리가 좋다, 감성, 감정이 풍부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감성,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이름일까 생각해 본다. 보통 IQ니 EQ를 테스트하면 숫자로 나오니 그대로 믿는다. 그런데 대개는 본인의 EQ는 몰라도 IQ는 알고 있지 않나 싶다. 


 지금 기억으로는 중학교 때도 지능검사라는 것을 한 것 같긴 한데 내 지능지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고등학교 진학을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때도 그 검사를 했던 것 같다. 


 단체로 하기는 했지만 그 자료는 선생님만 알고 보관하고 계실뿐 학생들에게도 다 알도록 해 주셨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랬기에 내 지능지수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고 2학년 때였는지 우리 반 아이 중에 다른 교실에 가서 청소를 하던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교실선생님 사물함에 보관되어 있던 반 아이들 지능검사 보관 철에서 우리 반 아이들 것을 훔쳐보았던 모양이다. 그 결과 암암리에 누가 IQ가 얼마래, 누구는 몇이고 떠들다보니 나도 어떤 아이의 IQ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친구가 몇 된다. 


 그것을 선생님 몰래 봤다는 애가, 내가 다른 아이보다 높게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나와 친한 친구에게 얘기 했었던 것 같다. 마침 우리 둘 사이를 시샘하다가 이때다 싶었는지 그 사실을 알게 된 친구는 그래서 내게서 멀어진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하고 있다. 나와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는 멀어졌는데 그들 둘 사이가 좋아졌었는지는 모르겠다. 


 난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다보면 그 광경부터 우선 아른거린다. 그 숫자가 더 높게 나온 아이와 나와의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 애들이 나보다 공부를 더 잘하지는 못했다는 거다. 그렇다면 머리가 좋은지, 나쁜지, 숫자를 가지고 아예 단정을 지어버리니 그런 선입견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고 사는 것일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난 그렇지 않아도 서울 아이들과 시골 아이들의 IQ차이는 타고 나는 것도 있겠지만,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문화’에서도 많은 차이가 나지 않을까 싶었기에 그런 점에서도 시골 사람보다도 도시 사람이고자 싶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런 기억 때문에도 난 첫딸을 낳고 기르면서 어떻게 하면 아이의 IQ를 높여볼까 나름 고심에 젖기도 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책 읽어주는 것, 수리능력 테스트 같은 것을 익혀주려 신경을 쓰기도 했다. 


 그런 영향도 없지 않았는지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해서 성적표를 받아 왔는데 그때 아이의 IQ가 성적표에 기재되어 있었다. 아이는 그즈음 동네 아이들보다 점수가 더 높게 나와 엄마인 나보다 지능지수가 높으니 공부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겠지 조금은 안도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큰딸의 지능지수는 알고 있는 것에 비해 작은 딸은 그런 정보가 전혀 없어 때론 궁금해지기도 했는데, 딸아이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아이가 머리도 명석하고 감정이 풍부하며, 아주 자랑스러운 딸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아 지능지수도 그렇고 감성지수도 괜찮은가 생각해 보곤 한다. 


 난 평소에 마음의 변화가 심하다 생각지 않았건만 손녀딸을 보며 새삼 지능지수나 감성, 감정의 폭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말 그대로 한두 살 된 아이일 뿐인데 그 아이의 작은 행동에도 내 감정의 변화가 생긴다. 게다가 첫 손녀이니 무조건 예쁘기도, 귀여워하면 되었지 할머니가 되어 애만도 못한 감정에 휘둘리지만 남편이나 딸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손녀딸의 돌잔치를 한국에 가서 하고 돌아왔다. 도착한 그날이었는지 아이들이 먼 길을 다녀왔으니 궁금하기도, 또 보고 싶어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딸아이는 침대에서 아이와 자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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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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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2
추억으로 먹지요

 
 

 이민을 온지 3년 만에 서울에 나갔다.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그 동안 물가가 많이 올랐다고 입을 모으는 것을 보았기에 우선 궁금한 것이 찬거리였다. 서울에 도착해 그 다음날인가 신설동엘 갈 일이 있었다. 내 눈에 뜨인 것은 리어카에 실려있는 자반고등어를 비롯해서 오이, 풋고추, 솎음배추 등이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가격을 물어보니 내가 떠나기 전 가격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캐나다에선 쉽게 만날 수 없는 뱃자반을 우선 한 손 사고 나머지도 주세요, 해서 검은 봉지에 줄레줄레 들고 보니 그 봉지를 들고 볼일을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반가워서 잔뜩 산 것까지는 좋은데 도리 없이 다 포기하고 택시를 타고 친정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똑 같은 음식인데 서울과는 다른 맛인 듯하다. 가장 생각이 많이 나는 것은 자반고등어와 꽁치였다. 하긴 어디 그뿐인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봄이면 딸기를 위시해서 여름이면 은천참외라고 하는 금싸라기 참외나 무주구천동에서 왔다는 산 수박, 껍질이 술술 벗겨지는 백도의 맛이나, 신고 배, 가을이면 으레 선을 보이는 햇밤, 노랗고 굵직하니 먹음직스럽게 생긴 단감, 아닌 게 아니라 단감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 이곳에서도 단감을 보면 으레 친구의 얼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곤 한다. 


겨울이면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땅콩이나 군고구마의 맛이나 붕어빵, 지난번엔 서울을 나갔더니 예전에 먹던 술빵이라는 밀가루로 반죽을 해서 넓적하게 생긴 빵이 옛날의 추억과 같이 너무 먹음직스러워 하나 사먹어 보았더니 맛은 별로 없었으나 그 또한 추억을 되살리며 먹을 만하지 싶었다. 


 우리는 살면서 음식에 얽힌 추억이나 맛 또한 잊을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음식이란 먹어보지 않던 새로운 음식보다도, 그 동안 입에 맞고 익숙해진 것을 찾기가 십상이어서 옛날 맛,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던 그 맛을 찾을 때도, 그 맛의 추억에 잠길 때도 많다. 


 난 지금도 서울엘 가면 재래시장을 둘러보기를 좋아하는데 시장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면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가장 친근감 있게 느껴진다. 시장을 구경하다 보면 적은 돈 가지고 고향의 맛을 십분 즐길 수 있는 것이 있어 사기도 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 처음 몇 년은 캐나다 슈퍼마켓에서는 볼 수 없었던 빨래비누나 물건 살 때 사은품으로 주는 것이 눈에 띄면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곤 했다. 


 그때 서울을 나갔다가 캐나다에 들어와서도 쓸 수 있고 고향의 맛에 젖기도 하겠지 싶어 아닌 게 아니라 빨래 비누를 몇 장 사 가지고 들어갔다. 친정 올케가 보더니 그곳엔 빨래 비누도 없느냐고 조금은 실망스럽고, 그렇게 살려고 이민을 갔더란 말이냐는 한심한 표정을 짓더니, 캐나다 들어갈 때 가지고 가라면서 말 그대로 빨래비누 한 보따리를 사온 것을 보고는, 내 이런 심중을 다 설명할 수도 없어 나야말로 조금은 언짢기도 한심한 생각까지 들기도 한 적이 있다. 


 이민을 와서 살며 재래시장이 못 견디게 그리워질 때가 있다. 가게마다 수북하게 쌓아 놓은 풋고추, 멸치, 풍성한 열무 단, 고구마 줄거리,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순대나 옥수수, 갖가지 떡을 해놓고 파는 떡집 등. 어쩌면 난 한국의 그런 맛, 그런 것들에 목말라 다시 가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밀려 올 때도 있다.


 명절 때, 여름 피서가 끝나갈 8월 말경부터 마음에선 이미 추석 맞을 준비에 들어가곤 한다. 그 즈음이 일 년 중 내가 가장 즐기는 시기이기도 하기에 그 순간을 놓칠세라 마음껏 만끽하며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추억이 있다. 결혼해서 몇 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살림에 익숙하지 않은 솜씨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한껏 떠올리며 거의 2주 전에 경동시장을 들러서 추석에 필요한 몇 가지 재료와 까지 않은 도라지를 사다가 깊어가는 가을 밤 그것을 까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 해 따라 송편을 만들 것이라며 떡쌀을 준비해 놓기도, 빈대떡까지 부치느라 추석을 즐기는 마음이 아니고 일에 지쳐 나중에는 빈대떡을 부치며 몇 번을 물러앉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후로는 빈대떡은 부치되 송편은 사는 식으로 몸이 많이 부대끼지 않으면서 추석을 즐길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오곤 하였다. 


 내가 집에서 추석을 준비하고 즐기는 것 외에도 추석이면 ‘명절 대이동’이라고 할 만큼 국민 대다수가 고향을 찾아, 가족을 찾아, 손에는 선물꾸러미 보따리들을 들고 오가는 그들을 지켜보는 것만도 일 년 중 가장 즐기는 풍경이었다. 이곳에 이민 와서 살며 그런 맛, 그런 풍경을 감상할 수 없고 느껴볼 수 없어 추석 때가 가까워 오면 가슴 저리는 향수에 젖기도, 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애절하게 그리워지는 그런 심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서울에 살며 고기보다도 생선을 그 중에도 자반고등어와 꽁치를 그릴에 지글지글 구워 따끈하게 먹었던 기억에 캐나다에서 이따금 시도를 해봐도 서울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어서 아쉬워할 때가 많다. 


 어디 그뿐이랴. 피서 철에 각 휴게소에서 먹는 김밥, 우동, 호두과자, 커피나 아이스크림까지. 강원도 지방을 가면 이따금 운 좋게 걸리는 따끈따끈한 찰옥수수 맛은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향수 가운데 하나다. 


 꽤 오래 전 미국을 여행하며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무언가 분위기도 즐기면서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으려나 찾아보았지만 그나마 후렌치 후라이가 제일 입맛에 맞았다. 왜 그 때는 커피 맛도 서울에서 마시는 것만큼 맛이 나지 않는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뉴욕에 갔을 때 꽤나 큰 한국 슈퍼가 있어 이것저것 구경하며 확실히 캐나다보다 교민이 많아 좋구나 싶어 신문도 사 가지고 와서는 오랫동안 버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슈퍼 옆의 간이식당에서 호떡과 뻥튀기도 팔고 있었다. 그래서 반 봉지씩 사가지고 차에 타며 역시 뉴욕은 한국 맛이 더 나는 것 같아 좋다며 호떡은 금세 하나씩 먹어 치우고는, 뻥튀기는 아이들이 잘 먹지 않아 나 혼자 앞자리에 앉아 아작아작 먹고 있었다. 


그러자 그렇게 맛이 있느냐며 남편과 아이들이 묻기에, “이게 무슨 맛이 있어 먹나요? 그냥 추억으로 먹고 재미로 먹지요”하며 그 한 봉지가 개수로도 꽤나 많았는데 며칠을 두고 차에 타기만 하면 하나씩 입에 물었다. 그러면서 그 동안 여행을 다니며 즐겁고 재미있었던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이번 여행 중에 얻은 꽤나 크고 좋은 수확이었다며 만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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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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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4
삼순이의 산기에서 출산까지(하)


 
   

(지난 호에 이어)
그 순간까지도 삼순이가 새끼를 낳으려고 하는 것이란 생각은 못하고 다시 또 빨래할 것에만 신경이 쓰였다. 


침대 이불이 젖어 마른 쪽으로 접어가며 다시 자다 보니 이번엔 이불에 뭐 ‘파란 것’이 묻어 있었다. 다시 또 잠결에 뭘 토해 놓았나, 하며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삼순이가 ‘양수’가 터졌을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양수라 하면 으레 ‘벌건 피’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불에 묻은 ‘퍼런 피’가 양수라고는 잠결이라 더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또 그 잠결에 보니 방바닥에 뭐 이상한 게 하나 떨어져 있었다. 조금 있다가 삼순이가 그 옆에 떨어져 있는 푸르딩한 것을 먹어 치우기에, 그 사이 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아 놓고 다 먹어 치우고 저것 한 마리만 남았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다시 또 무서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삼순이가 낮에 남편이 열심히 만들어 준 ‘종이 상자 집’ 이를테면 ‘산실청’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순간 또 동물들은 새끼를 낳을 때 사람이 옆에 있으면 낳지를 않는다는 말이 떠올라 실눈을 뜨고 삼순이를 쳐다보니 삼순이의 '반짝'하는 눈과 마주쳤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눈빛은 마치도 ‘엄마 나 새끼를 낳으려고 하는가 봐 그런데 나 무섭고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엄마는 내가 이렇게 새끼를 낳으려고 하는데 잠만 자는 거야’ 하는 것 같기도, ‘엄마, 쳐다보지 말고 있어’, 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난 그때까지도 졸리기도 했지만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삼순이를 주시할 만큼 담대하지 못했다. 


 그 순간 작은 딸이 일어나서 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그래서 마침 잘 됐다 싶어 딸아이를 불렀다. 잠결에 방을 들어서는 딸아이에게 ‘저것 좀 보라’고 했더니 작은 딸이 자고 있던 큰딸에게 달려가서 얘기를 하니 큰 딸이 내 방으로 달려오고 난 큰 딸아이 침대에 가서 누웠다. 그만큼 졸리기도 하고 삼순이가 새끼 낳는 것을 보는 것이 무서웠고, 두 딸들이 알아서 하겠지 편하게 잠이나 더 자고 싶었다. 


 조금 지나 큰 딸이 위생 장갑을 낀 양손으로 새끼 한 마리를 들고 와서 내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도 그 새끼를 보고는 다시 또 잠이 들었다. 왜 한 마리냐고 겁이 나서 물었더니 한 마리 낳고 30, 40분 간격으로 또 낳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삼순이가 그 사이 새끼들을 다 먹어 치운 것이 아닐까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삼순이가 새끼를 낳기 시작하면서 2시간 이상을 자고 일어났는가 보다. 삼순이가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니 삼순이는 힘이 다 빠진 듯 누워 있고 딸들 둘이 위생 장갑을 끼고 마치 산파가 하듯 새끼들을 받아내고 있었다. 


 새끼 다섯 마리가 눈도 뜨지 못하고 어미젖을 찾기도, 그냥 누워 있기도 하였다. 어느 사이 카메라까지 갖다 놓고 삼순이의 출산과정을 찍고 있었다. 


 “새끼가 여섯 마리라더니 다섯 마리네”하고 걱정스레 물으니 이제 한 마리를 더 낳을 것이라며 큰 딸이 새끼 받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힘이 다 빠진 듯한 삼순이가 새끼를 또 낳을 수 있을까 염려가 되어 지켜보고 있었더니, 몇 번 힘을 주는 듯 하더니 새끼 한 마리가 머리를 내밀고 나오니 딸아이가 정성스레 받아 안았다.


 삼순이가 새끼를 다섯 마리까지 낳을 동안 난 잠만 자고 있었으니 작은 딸이 몇 번을 “엄마는 엄마 맞아”하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를 몰아 부친다. 난 새끼들을 받아 내기는커녕 낳는 것을 한 마리만 보았을 뿐이니 작은 딸의 비난은 당연한 거였다. 


 삼순이 새끼 여섯 마리는 두 딸들이 마치도 산파가 하듯 위생 장갑을 끼고 앉아 거침없이 받아냈다. 어디 그뿐인가. 엄마인 나보다 딸들이 더 낫네 싶을 때가 많으니 늘 든든하고 의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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