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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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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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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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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7
소리의 선택

 

 나는 어떤 소리에 이끌려 오늘 여기까지 왔는가, 한번 생각해 보고 싶은 계절이다. 그러나 생각이 막히고 가슴만 몹시 답답해 왔다. 왜 그럴까 ?


 구상 선생의 시문선(詩文選) ‘그 분이 홀로서 가듯’ 한 권의 책을 책장에서 뽑아 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삶의 보람을 찾고 있습니다... 나의 존재와 체험과 그 의문 속에서 오직 확연하다고 여겨지는 게 있다면 아주 진부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양심과 사랑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란 것입니다...’ 


 내 답답함 진원의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온다. 마음의 소리는 무어라 말하고 있는가. 마음은 볼 수도, 무게를 달 수도, 해부하여 보여줄 수도 없다. 그러나 마음은 생각의 기능이 있다. 생각의 기능이 양심의 소리로 표출되는가 아니면 어두움의 소리로 표출되느냐에 따라 가는 길이 플러스 인생을 사느냐, 마이너스 인생을 사느냐의 갈림길을 정해줄 것이다. 


 우리 동리에서 머지않은 곳에서 몇 해 전에 한인 젊은이들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피살자는 장래가 촉망되는 운동선수였고 뜻밖에도 존함을 일찍 들었던 분의 손자였다. 가해자의 부모나 피살자의 부모는 어떻게 살라고 이런 일을 저질러야 했던가. 개인적으로는 모르나 지인으로부터 들은 말로는 모두 열심히 이민자의 삶을 살고 계신 분들이란다. 그러나 가해자나 그의 부모는 죄인 된 심정으로, 피해자 부모는 가슴에 못이 박혀 있는 상태로 고통을 감내하며 일생을 살아갈 것이다. 


 죽이고 싶도록 칼을 들이댄 가해자의 마음속엔 어떤 소리의 지배를 받았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분노케 했으며 평소 그는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았었을까. 


 어떠한 소리의 선택에 따라 사는가에 인생은 결정된다는 말이 상식적인 표현으로 들릴지 모르나 상식적인 말임에는 틀림없다. 


 40여 년 전 내가 낯선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마치 마라톤 선수들이 출발 신호의 총성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마냥 긴장감과 도전의식으로 가득했다. 워낙 가난했던 모국을 뒤로 하고 떠나왔기에 잘 살아남기 위한 시발점에 서 있었다. 장거리 마라톤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으나 대부분 첫 번째 주자들은 현장을 뛰는 선수의 자리에서 물러나 있다.


 장성한 2세들이 마라톤 주자로 나서고 있다. 중간에서 합류한 사람들도 있다. 문화적인 차이와 1. 2 세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사고의 괴리는 바른 소리 소통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첫 번째 주자들은 참으로 열심히 끝까지 달려 올인한 결과 뿌리를 내렸다.


소리의 선택에 따라 우리들 삶의 현장은 평화를 추구하고 사랑을 펼치고 남을 배려하는 이타적 중심의 삶, 양심의 소리에 충실한 사람과, 이기적인 삶, 비양심적인 소리에 이끌려 살아온 삶의 모습이 다를 뿐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은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주후 2014년을 마감하고 2015번째를 가리키고 있다. 그 분은 홀로서 가셨지만 그 분은 사랑과 용서의 씨앗을 온 땅에 심어놓으셨다. 


 이른 새벽 아침 잔잔한 음악과 함께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 소리에 마음을 맞추어본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가슴 속이 따뜻해 온다. 주님 탄생 이유의 메시지를 그 분의 말씀의 소리를 따라 일생을 마쳤던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 우리들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오고 있다. 사랑과 평화가 내 가정에도, 내 이웃에게도 함께 하기를 비는 마음의 소리를 다시 듣는다. 

 

2015-01-16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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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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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7
‘불완전 함에도’

 

 살아갈수록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일이 자꾸만 줄어든다.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을 갈라놓는 것도, 누가 옳고 그르다고 단정짓는 것도 점점 그 폭이 줄어들고 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 때문이다. 다만 최선(Best)이냐 아니면 차선(Better)이냐, 또는 가장 나쁜것(Worst)이냐 아니면 좀 나쁜것(Worse)이냐라고 생각하게 될 경우가 더 많아질 뿐이다.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것이며 가장 쉬운 것은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내 눈의 대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 티만 본다고 경고함을 되새김질 해본다.
 나는 몇 년 전에 잊혀지지 않는 영화 한편을 보았다. 인근 영화관에서 니콜라스 스팍스(Nicholas Sparks)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The Last Song’ 이 그것이다. 


 미움과 사랑, 그리고 용서와 회복의 이야기가 가슴 찡하게 해준다. 부모의 이혼, 그로 인한 아이들의 상처, 특히 아버지를 증오하는 17살 난 딸과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을 위한 아버지의 처절한 사랑이 감동스럽게 다가온다. 


 피아니스트였고 교사였던 아버지는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딸에게 모자란 부모의 불완전성과 잘못을 저저를 수 있다는 부모의 약한 점을 이해시키려 노력한다. 그간 거칠게 아버지를 거부하던 딸은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이를 지켜보고 보호해주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조금씩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아버지는 음악이 부녀를 연결시켜 주는 최선의 공통점이라 여기고 딸을 위해 아름다운 피아노곡을 작곡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끝내 딸의 깊은 상처를 회복시키고 암으로 마지막을 맞는 그 자리에서 딸은 자기를 위해 작곡한 피아노곡을 연주하며 아버지께 용서해달라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기 생존이며 타인과의 인정 속에서의 공존이며 자기만족을 얻기 위한 충동적인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 여기엔 생식의 욕구도 있고 소속감의 욕구에서 사랑과 나눔과 협력을 구가한다. 


 인간은 움직이는 능력 이상으로 자유롭기를 원한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욕구들 간의 계속적인 갈등과 과정인지 모른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불완전한 자기 모습 속에서 끝없이 고뇌하고 방황한다.


 나의 화두를 ‘불완전 함에도’란 제목으로 시작한 것도 모자란 것을 모지란 것에 그치지 않고 그로 인해 오는 공해를 최소화 시키며 이를 승화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고뇌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만이 간직한 나의 멘토(mentor)가 있음을 행복하게 여긴다. 


 이런 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는 스승을 생각한다. 끊임없이 자기성찰의 여과과정을 거치며 정제된 인품이 아름답게 표출되는 인격과 만나면서 왜소한 인격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에겐 철저하게 자신의 불완전성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너그럽게 인생을 껴안는 겸허함이 있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를 보완하려는 슬기로움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겉보다 내실을 가꾸는 침묵을 더 사랑하고 있다. 


 그는 온전치 못한 철저한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기에 모자란 사람과 같이 아주 천천히 걸어가며 대화와 존경심을 잃지 않고 불완전함 속에서도 더불어 온전함을 추구하는 그 효율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모습이 나에게 표본으로 다가오나 뒤뚱거리며 따라가는 데도 숨이 차다. 그럼에도 단상(斷想)을 나누고 싶음은 사랑과 나눔의 속성이 나의 DNA 속에도 들어있는 덕분이겠단 생각을 한다. 


 나 개인의 가슴앓이가 ‘당신’ ‘우리’로 확대되어 나의 화두가 보편적인 고민으로 불완전한 자신을 심각하게 진단해보는 기회로 삼을 길벗들이 그립다. 

 

2014-11-14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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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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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2
삶의 질감(質感)

 

 

 나는 음악, 영화, 문학 등 예술에 관하여 잘 모른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는 알고 있다. 때론 자주 듣고 보고 읽기 때문에 좋아지기도 하고, 환경이 나로 하여금 이를 가능케 해 주기도 한다. 예술은 지적인 활동이기도 하지만 이를 승화시키는 것은 감성의 터치가 있는 곳에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도보로 30분 내외로 갈 수 있는 우리 동네엔 토론토예술센터도 있고 시네플렉스 영화관이 있는 쉐퍼드 센터도 있다. The Metropolitan Opera 안내 책자엔 Cineplex 극장에서 오페라나 발레 등의 무대공연을 HD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도록 잡지에 소개되고 있다. 


 무대에 올려진 라이브 작품을 관람하기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비싼 입장료와 공연장을 찾아갈만큼 여유로움도 없기에 비교적 저렴한 티켓과 우리 집에서 남편과 함께 운동 삼아 걸어갈 수 있는 적격의 장소로 기회 있을 때마다 찾아 나서곤 한다. 


 한겨울 토요일 오후 몇몇의 글벗과 함께 독일이 낳은 불멸의 작가 괴테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파우스트를 무대에 올린 작품을 영상으로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당일 표 구입이 가능할 거라 여겨 30분 전에 박스오피스로 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사진이다. 운 좋게도 친구의 표와 함께 두 장 구입에 성공했다. 4시간짜리다. 중간 중간 휴식시간이 있으나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음악, 무용, 연극, 회화가 총동원된 종합예술인 오페라는 수준 높은 예술로 결코 일반대중은 다가가기 어려운 장르란 부담과 편견이 있다.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1년 전 부터인가, 인근 극장에서 이미 무대에 올려졌던 음악회나 발레 또는 오페라를 영상으로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파우스트도 이중 한 작품이나 가장 인상적이고 감명 깊이 몰입되었던 오페라였다. 


 만일 이를 라이브 오페라로 감상했더라면 난해하여 부담스러웠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장엄한 TV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눈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들어왔다. 프랑스어로 불려졌던 파우스트 줄거리가 노래와 함께 영문 자막이 올라와 있어 그 흐름을 따라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주인공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트와 내기를 하며 펼쳐지는 장엄한 인생 이야기 자체였다. 


 인간의 목소리는 악기 중에 최상의 것이라 했다. 오페라의 매력 중 하나는 작품을 소화시키는 성악가들의 가창력과 연기다. 배경 음악 오케스트라 연주 역시 마음을 빼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이날 파우스트를 감상하기 위해 찾아온 관객의 대부분은 백인 노인들이었다. 유럽문화와 옷에 익숙해 있는 서양 노인들의 고상한 취미와 품위 있는 매너는 수백 년을 거쳐 오는 동안 몸에 배어 있나 보다. 모두 우아해 보였다. 그들의 삶의 넉넉한(?) 질감은 은퇴 이후 생활의 여유로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자존감(respect)이 생기려면 의식주는 최소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장 절실히 느낀 정치가는 트루도 수상을 제일로 꼽는다 했다. 40대 초반, 정치 입문에 나서기 전 퀘벡 분리주의를 옹호했던 그가 동남아 일대를 여행하면서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 한다. 후진국일수록 자기들끼리 더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자존감의 전제는 최소한 국가에서 의식주는 감당해 주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고 귀환했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를 옹호하는 인권변호사로 나섰고 이로 인해서 퀘벡이 캐나다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분리주의자에서 연방주의(Federalism)자로 탈바꿈한 동기가 되었다 한다. 


 그동안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의 보람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긴 세월 지나놓고 보니 그나마도 결과적으로는 남을 돕는다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었다는 자각이 생긴다. 삶의 질감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곳을 가꾸며 사는 사람들, 문화 예술은 바로 우리 속내를 보다 알차게 해주는 내용이라는 것을 깨달아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문명과 문화 수준의 격차가 적은 나라, 균형 잡힌 나라 백성은 그래서 더 행복한지 모른다.


 가난에 허덕이던 모국을 뒤로 하고 캐나다 이민 길에 오른 것은 1970년대 초엽이다. 정착에 필요한 영어를 배우는 동안 일용할 양식을 캐나다 국가에서 책임지어 주었던 것도 트루도 수상 집권 시절이었다. 그러나 빵 문제가 해결되니 정신적인 빈곤이 기습해 왔었다. 


 우리 모두는 참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은퇴 이후 삶의 질을 높이며 그 질감(質感)을 의식하며 살고 싶은 여유로움도 따지고 보면 의식주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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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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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5
더 피아니스트(The Pianist)

 

 

 사전에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 제목에 끌려 친구 Y와 함께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열리는 장면마다 전쟁물이다. 아 잘못 왔구나! 처참한 것이나 살상을 일삼는 전쟁영화나 조폭(組暴)물은 끔찍한 생각이 들어 언제부터인가 외면하고 싶은 심리적 반응이다. 더욱이 나치 정권하의 학살 장면은 이젠 피하고 싶었다. 연륜 탓인가, 영화 감상 취향도 변해가고 있다. 


 나는 4.19세대다. 어릴 때 6.25 전쟁을 경험했다. 한국전쟁이 세상에서 제일 참혹한 전쟁인줄 착각하며 살아왔던 세대다. 그러나 영화 장면 진행에 따라 나로 하여금 삼매경에 들어가게 하였다.

 

 토론토 시내 북쪽 한 공원에 Holocaust 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다. 내가 사는 집에서 그리 머지 않은 곳이기에 가끔 그곳을 방문한다. <피아니스트>의 장면들이 클로스업 되어 유태인들의 마음을 읽어본다.

 

 1939년 9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독일군의 첫 번째 공격 타겟이다. 폴란드의 삼백 오십만 중 삼십육만이 폴란드계 유태인이다. 폴란드가 독일 경찰과 게쉬타포에 점령당한 후 그들의 고난은 시작된다. 1939년 12월 그들은 Arm Band를 착용하도록 명령받는다. 독일군의 잔인하고도 무차별한 살생은 실로 처절하다. 단지 유태인이라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기아에 허덕여야 하고 거리를 마음대로 걷는 자유도, 심지어는 공원의 벤치에 앉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36만 명의 폴란드계 유태인은 1945년 전쟁 말기 겨우 20여 명밖에 살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1979년 영화 Tess로 최우수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고 <The Pianist>를 제작 감독한 Roman Polanski는 그 자신이 어릴 때 Holocaust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언젠가는 이 끔찍한 폴란드 역사의 한 Chapter를 자서전적이 아닌, 그러면서도 사실적인 배경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폴란드의 자랑스런 피아니스트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Wladyslaw Szpilman)의 메모아(Memoirs) 중 첫번 Chapter를 읽은 후 다음의 영화 제목은 <The Pianist>로 정할 것을 결심한다. 스필만 배역을 유럽 영국 등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실패, 마침내 미국에서 에드리언 브로디를 발견한다. 폴란스키는 스필만의 외모적 흡사함보다는 이미지를 부상시키는데 더 관심을 두었으며 에드리언 브로디는 스필만 역을 기막히게 소화시킨다.폴란스키는 비록 기억하기에도 끔찍한 일이나 Szpilman의 생애를 통하여 희망에 찬 긍정적인 면을 본 것이다. 감독 자신이 Krakow Ghetto 바르샤의 폭격에서 살아 남았기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영화 속에서 재현해 보기를 원했다.


 스필만은 그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많은 순간을 지나 이때의 체험을 수기로 썼으며 전쟁 직후에 쓰여졌기에 진솔(Genuine)하고도 생생한 스토리로 가득 찼다. 저자가 현실을 냉정하리만치 사실적이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에서 기술한 것은 진정 놀라운 일이었기에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시간 30분동안 상영되는 이 영화는 주인공 피아니스트의 처절한 삶과 죽음의 갈림길의 연속이었다. 가슴을 조리며 지켜 볼 수밖에 없는 장면들, 몸서리 치면서도 그와 나는 일체가 되어 한걸음 한걸음 그의 뒤를 쫓아갔다. 


 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거의 기아 상태에 있는 주인공은 전쟁 말기에 독일 장교에 노출되고 만다. 영락없이 총살감이었다. 독일 장교는 주인공과 대화 중 그가 피아니스트란 말을 듣고 피아노 한곡 연주를 부탁한다. 그리곤 폐허가 다 된 부서진 건물 안에 댕그머니 놓여 있는 피아노 방으로 그를 안내한다.

비록 피골에 상접된 그의 모습이나 신들린 사람처럼 두 손은 건반 위에서 춤을 춘다. 지상에서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모르는 그 순간 스필만은 온 영혼을 손끝에 실려 몰아지경에까지 들어간 듯 싶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독일 장교는 그를 살려줄 것을 결심한다. 이 극한 상황에서의 연주는 승화된 인간 모습 그대로였다.


 피아니스트는 장교에게 고맙다고 한다. 그 때 이 장교는 “Thank to God. Not me"이 한마디를 던지고 그는 자리를 떠난다. 이래서 폴란드의 자랑스런 피아니스트 스필만은 살아 남은 20여명 중의 하나로 명감독 로만 폴란스키에 의하여 우리 앞에 재현되었다.


 나는 이 영화가 역사적인 사실에 충실하였다는 폴란스키의 말을 믿는다. 그리고 이 역사 의식이 강한 유태민족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 속에서 숭고한 휴메니즘을 다시 발견할 수 있어서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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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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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9
생명의 대화

 

 

 

 스크린을 가득 채운 두 눈동자를 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인간의 고뇌를 모두 이야기해주는 그런 눈동자였다. 영화 <World Trade Center>는 이렇게 막을 연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관의 참사 현장이 실감있게 재현되고 있다. 처음 장면에서 끝맺음까지 손에 땀을 쥐며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 장면에 이르자 목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감동과 분노를 억제치 못하고 눈물이 볼을 적시고 말았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 했다. 더욱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 감동은 더하다.

 

 아침 일찍 출근한 뉴욕 시민들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한다. 경찰관들은 상관으로부터 당일의 업무지시를 받고 출동하던 중 엄청난 사건에 접하게 된다. 경찰도 소방대원도 사건현장으로 달려간다. 현장은 글자 그대로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원자폭탄에 맞은 것처럼 무너져 내려가고 있다. 빌딩이 붕괴되면서 아침에 출근한 수천 명 사람들의 생명이 희생되는 순간이다. 이 때 4명의 구조대원 중 경찰관 두 명이 콘크리트 더미에 깔리고 두 명은 죽는다. 살아 숨쉬는 그들의 이름은 윌리엄 히메노와 죤 메너풀이다. 


 어느 교회 안에서 목사와 젊은이의 대화 장면이 나온다. 그 젊은이는 자기가 해야 할 미션(Mission)이 무엇인지 안다. 이미 모든 구조대원은 철수하고 있는데 그는 순교자적인 자세로 혼자 뚜벅뚜벅 처참하게 깨진 콘크리트 조각을 헤치며 아직도 구출해야 할 사람이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목숨 건 탐색전에 들어간다. 밝은 손전등을 켜들고 단 한사람이라도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거란 그 믿음은 결국 두 경찰관의 위치를 파악한다. 


 한편 콘크리트 무덤에 깔려 꼼짝 못하는 죤과 윌 두 경찰관은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명을 지켜준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쇠파이프를 흔들며 목을 축이려는 안타까운 시도. 누군가가 이 소리를 들었으면 하는 소망, 갈증이 극에 달하여 죽음 직전에 물병을 든 예수와의 만남으로 다시 소생하는 윌. 의식은 점점 멀어지나 가족과의 환상적인 대화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죤. 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 이런 장면들이 어우러져 생명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다. 


 목숨을 내건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행동으로 표출되는가. 이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은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가. 절대 절망의 상황에 놓여있는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여기에 초점을 두고 나는 영화의 흐름을 따라갔다. 윌이 죽음의 12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죤이 그 긴 22시간을 견디며 생명이 꺼지지 않은 것도 가족에 대한 끈질긴 사랑과 하나님께 향한 신앙이었다.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은 구조된 두 경찰관의 구조사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인간 드라마다. 인종간의 차별도 없다. 구조작업엔 계산된 어떤 영웅심도 없다. 마지막 죤이 들것에 실려 구조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는 살아난 마지막 사람에게 쏠려있다. 형용할 수 없는 침묵! 생명의 대화만 오갔다. 


 아! 이것이 바로 인간 사랑의 극치였구나. 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을 보는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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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58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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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2
밀리언 달러 베이비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만난 것은 2월 말 어느날 눈이 제법 쏟아지던 오후였다. 명화(名畵)를 찾아가는 내 마음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싶어서인가? 스쿠터를 타고 앞서가는 남편의 뒤를 따라가며 그냥 자문해본다.


 낡은 체육관에서 권투하는 장면으로 스크린은 열린다. 후랭키 역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스크랩 역을 맡은 모건 프리먼이 나온다. 친근감이 가는 얼굴들이다. 이들이 운영하는 낡고 허름한  체육관에 매기(힐러리 스웽크)라는 여자 복서 지망생이 찾아온다. 후랭키는 나이 든 복서 트레이너이고 스크랩은 은퇴 복서다. 남자 천지인 이 체육관에 갑자기 나타난 매기에게 “30 넘은 여자가 발레리나를 꿈꾸지 않는 것처럼 31세 된 여자가 복싱선수 되고 싶다는 꿈도 접어야 한다.“며 냉정하게 그를 돌려 보낸다. 그러나 매기는 집요하게 매일 체육관에 나와 홀로 연습하곤 한다. 이런 매기를 스크랩은 격려해주며 포기하지 말라 한다. 후랭키는 드디어 자기 트레이너가 되어 달라고 졸라대는 그녀의 강한 의지와 노력에 손을 들고 만다.


 때로는 상처를 싸매주고, 때로는 무섭고 냉혹한 트레이너로, 때로는 용기를 주면서 후랭키와 매기 사이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가족의 정을 일깨워 부녀와 같은 관계로 발전할 뿐 아니라 승승장구 타이틀 매치에 나간다. 챔피언에 등극하는 마지막 시합경기에서 매기가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열광적인 함성이 쏟아지는 가운데 두 손을 번쩍 들고 자신의 코너로 돌아오는데 뒤통수에 갑자기 상대의 주먹이 날아온다. 그리고 매기는 후랭키가 내미는 의자 모서리에 쓰러지면서 치명상을 입는다. 이후 매기는 의식은 말짱한데 전신마비 환자가 되고 만다. 결국 다리에 욕창이 생겨 절단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영화를 감상하며 보는 나의 초점은 권투선수로 성공한 매기가 아니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매기는 팁 몇 불로 근근이 살아가며 한 맺힌 자신의 정체성을 권투에서 찾으려 발버둥치는 의지력을 보여준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부단히 노력하는 매기에게서 선수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후원해주는 스크랩 같은 후원자와 단 1년 6개월 만에 세계챔피언에 도전할 실력을 길러주고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지도해주는 후랭키와의 관계 발전을 눈여겨 보았다.

 

 후랭키는 딸에게 버림받은 아픈 가슴을 안고, 매기는 불우한 가정 속에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가족에게 이용만 당하는 한을 안고 살고 있다. 이 두 사람 사이는 서로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사랑, 한가지 목표를 향한 그 강한 집중력을 통하여 깊은 상처들이 치유 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후랭키로 인해 생의 최고의 순간을 맛보았고 그 최고의 순간에 머물고 싶어 하는 매기, 이런 순간을 깨닫게 해준 후랭크에게 안락사 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매기. 그러나 후랭키는 이를 거절하면서도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매기가 혀를 깨물고 자살을 시도하게 되자 매기의 소원이 무엇인가 더욱 더 선명히  알게 된다. 후랭키는 매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심각한 고민 끝에 한밤중 매기의 병실을 찾아간다.


 그는 매기에게 윌리엄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호수섬 ’을 읽어 준다.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호숫가에 철석이는 납은 물결소리 들리나니/한길 위에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위에 서 있을 때면/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혼신을 다한 기도송처럼 들린다. 매기가 진정 안식하기를 바라면서 그는 마침내 산소호흡기를 뗀다. 후랭키의 시 낭송을 들으며 눈을 감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보이고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기막힌 인간 드라마였다. 안락사를 부추긴다는 비난은 어쩔 수 없겠지만...


 아카데미 주요상을 휩쓸었던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가난했던 매기가 백만 달러 짜리 거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후랭키와의 지순한 부녀간 사랑으로 발전한 그 관계가 백만 달러 짜리였구나! 이 깨달음이 차가운 눈발이 솜털 되어 가슴속을 따습게 해준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에는 가끔 신비한 만남이 찾아와 우리를 인정해주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가르쳐준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큰 가능성이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고... 우리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어디까지 왔을까?. 우리도 그 누군가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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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gmin
민혜기
58104
10295
2014-12-16
매년 이때가 되면

 

 

 

 12월이 되면 은근히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 금년에도 또 올 것인가. 지난해에 배달되었던 크리스마스 정령이 담겨진 꽃바구니가 눈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두 개의 흰 양초가  꽂혀 있고  흰색과 초록 영롱한 빨간색의 조화로 차라리 눈이 부셨다. 이젠 고만하겠거니 하는 나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한해도 거름이 없다. 그 분과의 인연 이후 네 번의 주소가 바뀌었음에도 용케도 주소를 추적하여 성탄절 한 주를 앞둔 그 시기면 J씨는 꽃으로 대신 우리 집을 찾아주곤 한다. 1년에 한번 만나 뵙기도 어려울 만큼 바쁘게 살고 있는 그 분의 심성이 우리를 감동시켜주고 있다. 


 남편의 주례로 80년대 중반, 결혼의 예식을 올린 J씨는 그간 삶의 모습을 이 꽃 속에 모두 담아 결혼생활의 리포트 카드를 보내주고 있는 듯싶어 반갑고 고마운 것이야 말할 수 없으나 이젠 송구스럽다. 그러나 따뜻한 마음 오순도순 세 자녀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잘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번번히 읽을 수 있는 흐뭇함을 감추기 어렵다. 남편이 결혼 주례자로서의 자격 상실도 이젠 20년이 넘는다. 교통사고 후유증은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을 영위 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 분으로부터 남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접할 때마다 우리도 그 분들의 관심 속에 들어 있다는 고마움은 해가 바뀔 무렵에 받는 더 할 수 없이 값진 최대의 선물이다. 


 좋은 만남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관계유지의 윤활류(潤滑油)가 되고 있다. 좋은 관계의 비밀은 무엇일까. 관심이요, 사랑이라 한다면 교과서적인 정답이라 하겠지만 역시 관심에서 출발한다는 이 이치는 인생을 한참 살아가다 보니 절로 깨달아지더라. 가족간의 무관심은 가정을 사막화하고 있다. 우정도 이웃과의 관계도 무관심의 아성 속에 들어오면 그건 말짱 꽝이 되고 만다. 나는 그래서 우리가 J씨의 관심 속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좋은 만남의 유지는 그만큼 한 값을 치르지 않고는 어렵다. 세상이 다 내관심 속에 들어올 수는 없다. 유엔사무총장이나 세상을 지배하는 정치가들이나 인류애에 헌신하는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곤 말이다. 


 나같이 소시민적인 민초들에게 있어서의 인간관계는 이웃이 중요하다. 가족이 있다. 친구가 있다. 인연을 맺고 살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 가꾸고 더불어 사는 곳에서 삶의 멋을 누린다.


 12월은 어쩌면 그간 소홀히 했던 친지들과 관계 회복의 달로 정해도 좋을 듯싶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평안한 마음에서 바라는 따뜻한 한통의 전화도 좋다. 전자메일은 육필로 쓴 한통의 카드보다는 못하겠지만 소원했던 관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줌엔 틀림없다. 나도 며칠 전 5년 동안 소식 몰라 궁금해 했던 밴쿠버 K시인의 전자메일 한편이 우리들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었다. 잃었던 친구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고국에서 산 세월보다 이곳에 정착하여 산 세월이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고국의 평생친구 몇몇은 모국에 대한 애정을 더하게 해준다. 서로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소통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해관계 얽힘 없이 순수한 마음의 나눔 친구를 소망한다. 그러나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음을 알고 있다. 순수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신뢰와 관심 속에 쌓여지는 관계의 질을 높이고 싶어 한다. 


 한해를 마감하는 물리적인 시점에서 내 관심의 초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한번쯤 점검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생각하며 바라며 소망하며 보내고 맞이하는 마음 속에 관심의 초점은 나름대로 정립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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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gmin
민혜기
58103
10295
2014-12-11
‘Another Year’가 말해주는 것

 

 폭설경보가 내렸던 한겨울, 걸어서 30분 거리의 영화관을 찾아 나섰다. 60대 이후의 삶의 모습에 초점을 두고 만들었다는 영화 ‘Another Year’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지하철 대신 도보를 택한 것은 바람 없이 내리는 소담한 눈에 매료되어서였다. 눈이 발목까지 푹푹 들어가지만 마치 솜털을 밟고 지나가는 느낌이 오히려 포근했다. 겨울에 눈이 없다면 칼바람 혹한이 얼마나 삭막하고 재미없을까. 답답했던 가슴 속이 조금씩 뚫어지기 시작한다. 


 그 큰 영화관엔 나와 두 노부부만이 관객의 전부다. 


 강한 영국 발음에 우리의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화적인 갭 때문에 내 실력으론 이 이야기 속에서 가슴을 울리는 감동도 손에 땀을 흘리게 하는 기복의 스릴도 못 느꼈다. 재미로 따지면 별로였다. 그러나 63회 칸느영화제에서도 호평을 받았고 좋은 영화로 추천될만큼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영화의 진가를 다시 알고 싶었다. 며칠 후 토요일 친구들과 함께 다시 그 영화를 봤다. 


 관객은 훨씬 많았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훨씬 이해가 되면서 두 시간이 넘도록 이어지는 영화흐름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어둡고 우울한 한 중년 여인이 흑인 간호사의 진료를 받으며 주고받는 대화로 이 영화의 서막은 열리고 있다. 환자는 불면증에 시달림을 호소하고 있다. 병원 카운슬러 상담을 받으라 권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카운슬러 제리는 이 여인과 상담을 해주고 같은 병원의 리셉셔니스트로 일하고 있는 메리와도 대화를 나눈다. 메리는 주인공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은퇴를 눈앞에 둔 행복한 노부부 제리와 톰,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 풍경이 채소밭에서 심고 가꾸고 거두는 장면들과 대비되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 속엔 외롭고 소외당하고 사랑받기 원하는 사람, 인생을 잘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잘못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진하게 나온다. 노부부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언제나 그들을 환영하며 차를 나누고 식사도 하며 그들 있는 모습대로 받아들인다.


 그 중에서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알코올 중독자요 몇 번인가 결혼실패자로 자기혐오감에 빠진 64세 난 메리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절박한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는 노부부의 애정 어린 돌봄이 남다르기만 하다. 


 그러나 잘 생기고 멋진 노부부의 30난 아들을 메리가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노부부는 그녀를 동정은 하면서도 경계하게 된다. 불가능한 메리의 구애 모습은 인간 바닥에 깔린 사랑에 대한 갈구다. 거절당한 메리는 더욱 망가지고 더욱 외로움에 몸조차 가누기 어려운 모습으로 노부부 집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다. 거기서 아내를 잃은지 며칠 안 되는 제리의 남편 톰의 형을 만난다. 처음엔 메리에게 냉담했던 톰의 형도 끊임없이 말을 거는 그녀에게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노부부는 아들과 그의 애인 네명이 행복하게 웃고 떠들며 즐거운 저녁 식탁에 메리와 톰의 형도 함께 한다. 그들은 말한 마디 없이 다만 그 분위기를 바라만 보고 있다. 그러나 간간히 서로 바라보는 이 두 사람의 시선 속에서 연민의 눈빛 교류가 있음이 감지되었다. 메리의 불행하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은 표정, 그러나 무엇인가 시사하는 의미있는 표정이 클로즈업 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 가운데 일어나는 비극적인 불행한 삶의 단면들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인생의 늦가을을 맞이했거나 겨울 인생을 사는 우리들 삶 속에서 한때 경험할 수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이 영화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해해주고 이해받고 더불어 산다는 것, 작은 친절, 작은 관심, 작은 사랑으로 한사람의 영혼을 터치하여 새 삶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가슴에 담아왔다. 


 폭설 속 혼자 영화관을 찾았던 그날 이미 어두워진 눈길을 걸어 귀가하는 호젓함 가운데서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 때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소리가 울렸다. 


 “당신 지금 어디있어?” 


 “나 눈길 걷고 있어요. 20분 후면 집에 도착할거야”


 남편의 전화다. 아, 나도 혼자가 아니구나.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친구와 더불어 두 번째 영화관 행보도 따지고 보면 영화 자체보다 함께 한다는 즐거움이 더 컸던 게다. 우리도 겨울을 걷고 있는데 산다는 것이 별거 아니라고 그저 사랑하고 아껴주고 염려해주며 같이 한길을 걸어 갈 수 있는 동반자가 있으면 그게 곧 행복이라구 나에게 타이르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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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58102
10295
2014-12-04
나이가라 언더 레이크

 

 

 화창한 5월의 신록은 마음까지 싱그럽게 해주고 있다. Niagara-On-The-Lake 아름다운 작은 마을, 일곱 명의 글벗들이 소설가 K의 뜰에 모였다. 갈비, 상추, 풋고추 쌈장에 천사들도 질투할만큼 혀끝은 춤을 추고 위는 기뻐하며 몸 구석구석 피도 되고 살도 되어 심장을 뛰게 만들고 있다. 흐드러지게 핀 각색 꽃나무들의 화색은 연초록과 어울려 우리를 거리로 유혹한다. 산책길이 더 할 수없이 아름다웠다. 파릇파릇 잔디 너머로 잔잔한 호수 물결이 비단결만큼이나 곱고 푸르다. 잔잔한 호반 위 오리들의 행진도 여유롭게 보인다.


 K가 이곳에 정착하기 전 나이아가라 언더 레이크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찾아갔던 우리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던 관광의 거리로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19세기 영국풍이 물씬 풍기는 거리를 거닐며 백년이 넘었다는 호텔도 기웃거려 보고 옷가게도 들러 행여 명품 세일하는 것은 없을까, 숙녀티를 내며 드나들어도 봤고 좀더 멋을 낸다면 여름철 아이스크림 깍지 손에 끼워 어린애처럼 달콤한 부드러움을 즐기는 정도였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말이다. 반나절 거리구경에 그쳤던 곳인데 K가 이곳에 정착한 후부터 그토록 멀게만 느껴졌던 나이아가라 언더 레이크가 이웃처럼 다가와 훈훈한 정에 끌려 1년에 몇 차례 만남의 나들이를 하고 있다.   


 그녀는 나의 문학선배다. 연륜으로 따지자면 그녀의 큰언니뻘은 되고도 남는데 이미 모국에서 소설가로 인정받은 그녀의 문학세계를 나는 따를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작가정신을 사랑하고 지적인 통찰력 앞에선 그녀도 나도 약한 공통분모 때문에 지성인들의 평전이 자주 우리의 화두에 오르곤 한다. 마음도 나누고 생활도 나눈다. 소통에 막힘이 없어 우리는 서로를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때론 하룻밤을 지새며, 아니면 몇 시간이고 지칠 줄 모르고 우리는 공원 숲 호숫가 또는 계절과 상관없이 우리들의 발길이 닿는데까지 걷고 이야기하고 우리들의 화제는 끝이 없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K부부는 우리 부부를 초청해서 네사람만의 정겨운 시간을 보냈던 그 시간 주고받았던 성탄의 정표가 아직도 가슴 밑바닥에 훈훈하게 남아있다. K와 그녀의 남편 짐 힐스 목사님은 우리를 위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으니 내 생애에서 이런 호강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그 어디에 있겠는가. 


 Yonge/Finch에서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거리, 편리한 교통수단은 더 할 수 없이 내 발길을 자주 돌리게 하는 그녀가 사는 나이아가라 언더 레이크, 친구가 좋아 찾아가는 곳인가 아니면 타운의 매력 때문에 나의 방랑벽을 자극한 행보인가.   


 호숫가를 지나 우리 글벗들의 발길은 어느 사이 ‘The Romance Collection Gallery 앞 층계에 다다르자 마치 자석에 끌려가듯 돌층계를 딛고 올라가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의 포트릿이 눈길을 끈다. 여류화가 Trisha Romance 상반신 모습이 참 정아하고 아름답다. 그녀의 미술작품들이 담겨져 있는 화첩을 넘기며 곁에 있는 그림도 감상하는 동안 잔잔히 들리는 음악에 취하고 말았다. 화가가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이 담겨져 있다는 한 장의 CD를 보는 순간 20불짜리 지폐 한 장과 맞바꾸어 예쁜 백에 넣었다. 여류화가의 영혼을 깨워 붓 끝에서 그림이 피어나게 만든 음악 모음, Trisha Romance가 이 음악을 들으며 작품을 제작했다는 그 영감이 내 속에서도 글 기적을 만들어 내는 기운이 솟았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토론토의 글벗들은 겨울 어느 날 다시 K와 함께 뭉치자는 후일을 약속하는데 넉넉함을 보였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깊은 겨울이면 더욱 좋겠지. 여럿이어도, 단 둘이만이라도 정갈스런 맛을 낼 줄 아는 분위기가 있는 K. 그런 K가 나이아가라 언더 레이크에 살고 있다는 것이 더 할 수 없는 행운이다.


 뚝 떨어진 타운에서 외롭고 그리움마져도 속으로 새기며 살아야 할 그녀에게 우리 글벗들은 그대가 그곳에 있어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윤택한가. 우리들의 숨통을 뚫어놓을 벗이 기다리고 있다니 이 얼마나 즐거운일인가. 이 말에 감동받은 K. 아무데도 가지 않고 든든히 베이스캠프를 지키고 있을 테니 벗들이여 잊지 말고 발길 녹슬지 않게 자주 찾아나주오. 금년의 5월은 이래서 눈발 날리는 11월의 첫눈 속에도 밝은 햇살 되어 내 가슴 속을 따뜻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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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58101
10295
2014-11-20
숨 고를 수 있어서

 

 남편의 끙끙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침이 시작된다. 시계를 보면 어김없이 새벽 5시 반이다. 반신장애로 살아온 그이나 그의 자립심은 아내인 나에게 한 번도 옷 좀 입혀줘, 양말 좀 신켜줘, 하는 도움을 거의 요청해본 일이 없다. 우리가 각방을 쓴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그러나 내 귀는 항상 그이의 침실을 향해 열려 있다. 마치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언제나 달려갈 보초병과 같다고 할까. 


 집 근처 팀호튼 커피숍에 무슨 사인(sign)할 일이 있는 사람 마냥 폭설이 내리거나 비가 쏟아지지 않는 한 출근하다시피 한다. 오래 전 목회할 때 새벽기도회의 습관이 잠재해 있다가 되살아나서 그런가. 이 습관은 10년도 넘게 지속되고 있다. 그 바람에 나도 아침형 생활습관이 몸에 배고 말았다. 


 배달된 신문들을 들고 화장실로 간다. 신문 구석구석을 훑어본 다음, 따끈한 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참으로 기분이 좋다. 이러노라 한 시간 정도 소모하며 즐기다 보면 밖에 나갔던 남편은 커피 한잔과 베이글도 종종 아내를 위해 들고 온다.


 이젠 루틴화된 시간표에 따라 일주일에 4일은 1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의 버라이어티 빌리지(Variety Village) 장애인운동센터에 간다. 유치원 보내는 엄마 같은 심정으로 도시락을 싸고 간식과 신문을 챙겨 장애인용 스쿠터 바구니에 담아 보내고 나면 나만의 하루도 시작된다. 그런데 참 고맙게도 가기 싫다거나 지루하단 불평하는 소리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금요일엔 장애인공동체, 주일이면 교회에 출석한다. 운전 못하는 바보 아내를 둔 덕분에 함께 나갈 때도 교통수단은 장애인 전용 버스다. 당신의 행동반경 능력의 한계를 스스로 깨닫고 따라주는 남편이 고맙다. 


 사교엔 빵점인 그이다. 대화를 시도하나 단답형 대화는 더이상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이어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함께 사는 우리에겐 대화가 없어도 좋다. 한 집안에서 서로의 숨소리만 들어도 공존의 안심함이 있어 편안하다. 단순한 그의 움직임은 때론 어린아이같이 순진무구하나 그것이 답답함이 아니고 사랑스런 몸짓으로 내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린 50대에 정상적인 삶의 괴도에서 이탈되고 말았다. 이탈된 궤도이나 또다른 길을 만들어가며 살아온 지 20년째다. 그는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야 했지만 나는 그로 인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고 있다. 손목 잡혀 온 아이들이 중년에 이르자 이젠 엄마 아빠의 보호자 역할을 할만큼 철이 들었다. 


 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귀한 친구도 만났다. 이민목회 20여년 동안, 진정한 신앙동지이며 우정의 결정체를 생산해낸 그 열매가 C씨에게서 맺어졌다. 그래서 그이도 나도 외롭지 않다. 한 주에 한번씩은 풍성한 밥상을 준비하는 재미가 있다. 정기적으로 방문해주는 우리들의 친구와 함께함이 기쁨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이가 장애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누릴 수 없는 행복이다. 


 목회현장을 떠나야 하는 아픔, 이민가정 문제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갈파한 그가 만학이나 가족상담 전문가로서의 대학원 과정 이수 중 고속도로에서 트럭과의 충돌 사고는 그이를 반신장애자로 만들어 놓았다. 일생을 통하여 쌓아놓았던 노력이 와르르 무너지는 꿈, 철저히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의 긴박한 상황에서 어둡고 긴 터널을 거쳐 오는 동안 형벌처럼 다가왔던 그 두려움은 마침내 빛을 향해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들 하나님의 손길이 지켜주고 있었다. 


 그이를 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는 사람 같다. 내가 더 이상 그이의 간병사로 자격상실 판정되면 스스로 장기요양원으로 가겠다는 심중을 때때로 토로한다. 내 건강을 챙기고 그이의 건강관리에 힘을 기울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생활패턴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이가 사경을 헤맬 때도, 반신을 못 쓰게 되어 요양원을 찾아야 할 각오를 해야했었을 때도, 이건 절대 불가하다는 나의 결심은 내 에너지의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여 그이의 회복을 위한 사투(死鬪)도 마지않았던 것이다. 


 지적인 기능은 점점 쇠퇴해가는 그이나 나에게 열려있는 남편의 가슴은 따뜻하기만 하다.마음껏 날을 수 있도록 숨고를 기회를 주고 있다. 그의 아내로서도, 내 이름 석자 달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줌이 그지없이 고맙다. 


 남편은 내가 정신적으로 깨어있게 하는 이유인지 모른다. 장거리 경주를 제대로 완주하려면 중간 중간 물도 마셔야 하고 숨도 고르며 달려야 끝까지 골인 할 수 있다. 평생 간병사 역할을 해야 할 장애인 가족은 마치 장거리경주 선수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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