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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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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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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okim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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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4
정체 위기

 

 

 꿈은 이상이요, 비전(Vision)이며, 삶의 청사진이요, 목표이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의 얼굴에서 꿈을 읽을 수가 없다.

찰나주의의 척박한 히히덕거림은 있어도 꿈이 사라져가고 있다. 요철처럼 짜인 기계문명 속에 감격과 희열이 없고 피곤에 지친 몸을 내일의 작업을 위해 기계에 기름을 치듯 침대에 맡겨 휴식을 취한다. 


이러한 일상성 속에서 우리는 꿈을 잃어버리기 쉽다. 더욱이 미래학의 묵시처럼 보여주는 지구촌의 앞날, 각박해 가는 인심, 치솟는 물가고, 불안, 공포, 허무 지수는 점점 높아만 간다. 그러나 “내일 세상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외친 화란의 철인 스피노자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질문화 속에서 공통분모를 찾아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북미주에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고국을 떠나 이곳을 찾아나선 우리 교포들은 대개가 전문직에 종사하던 고급인력이었으나 언어와 제도가 다른 이곳에서의 적응도가 낮아 소수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육체와 시간으로 메워가는 사업에 손을 댄다. 그 일이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사업체들이다. 그런데 요즈음 이 생업장에 심한 어려움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불행한 일이다. 


사실 우리는 이민 삶 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정든 고향, 부모, 형제 그리고 같이 자라던 벗들, 이제 우리는 우리말 구사력마저 잃어가고 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자녀들이 소수이긴 하지만 그들이 가져야 할 꿈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문명은 고향을 떠나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든 고향, 내가 어려서 놀던 곳, 내 잔뼈가 거기서 굵어졌고 내 조상들이 묻혀 있는 고향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이 못 된다. 그런데 세계 도처에서 대도시 작업으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 몰아세운다.


더욱이 우리는 비좁은 땅에서의 아귀다툼보다는 보다 광활한 땅을 찾아, 우리와 우리 2세들을 보다 넓은 땅에 심어주고자 이민의 아픔과 개척자의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이국땅 북미주에 왔다.


이곳 북미주는 넓고, 산수 좋고, 공기 맑은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민생활은 고달프기만 하다. 게다가 갑자기 다른 문화권에 들어서면서 받는 문화적 충격, 특히 언어의 장벽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고급인력이라 자부하고 왔지만 이곳에서는 우리를 단순노동자로 인정하고 대부분의 교포들이 고국에서 상상도 못하던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생존의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성실과 인내로 이 새로운 삶의 현장에서 줄기차게 뻗어간다. 이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이민자들이 다 경험하는 “한계적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데 그때에 이민자들에게 오는 위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정체 위기(Identity Crisis)이다. 즉 “나는 누구인가”하는 자기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묻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새로운 문화가 탄생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캐나다에서는 복합문화(Multi Culturalism)가 발달한 것이다. 복합문화주의란 자국의 문화를 보존하면서 타문화와 대등한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종족복합사회를 형성하는 문화이다.


이 같은 복합주의의 생명은 다양성과 통일성과 조화이다. 각 종족간에는 상호 타문화를 존중하고 공통분모를 찾아 조화를 이루면서 복합문화를 이루어 가는 사회이다.  캐나다 남동부 온타리오 호수가 있는 토론토, 이 거대 도시는 캐나다를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나가는 아름다운 도시이며 산업과 경제 활동이 활발한 곳이다. 


산수 좋고 공기 맑은 이곳에는 숲과 호수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특히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명소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위도상으로 북쪽에 있는 캐나다 하면 추운 날씨를 연상하나 토론토는 예외이다. 온타리오 호수의 난류 영향으로 다른 지방에 비하여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다. 이곳에서 각국 인종이 모여 충돌 없이 복합문화를 유지하며 오순도순 살아간다.


우리는 이 땅에 늦게 도착한 주인이다. 그러나 여러 종족과 협력하여 공동체 속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나갈 때 내 조국에 대해서도 공헌하는 일이며 세계평화에 대하여 기여하는 길이 될 것이다. (2018.11)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nghokim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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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8
만남은 삶의 원리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했듯이 인간 삶의 본질을 살펴본다면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인생을 통해서 여러 대상을 여러 곳에서 만난다. 잠시 여행 중에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일생을 같이하는 경우, 일정한 기간 동안 만났다 헤어지는 스승과 학우, 기다렸다 만나는 기쁨과 보람, 선택과 자유가 없이 숙명적으로 만나는 혈연 관계, 이렇듯 만남은 다양하다.


 넓은 의미에서 역사도 만남이다. 민족과 민족의 만남, 문화와 문화의 만남 이것이 곧 세계역사이다. 이와 같이 인간 삶이란 서로 만나서 자기의 존재를 남에게 열어 보이고 교류함으로써 참다운 삶의 의의와 가치를 찾아볼 수 있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특성은 만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만남이란 인간 삶의 법칙이요 자연의 법칙이요 우주의 법칙이며, 따라서 창조주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지난 날을 회고해 본다면 정말 많이도 만나고 많이도 헤어졌다. 그런데 그 만남과 이별이 거의 모두가 운명적이다. 내가 만나고 싶어서 만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두가 저절로 만나진 사람들이며 또 이제는 내 곁을 떠난 모든 사람들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곁을 떠났고, 십 년 이십 년 또는 그 이상 아득한 세월이 흐른 것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다시 낙엽의 계절이 오고, 다시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오고… 이렇게 계절도 만나고 헤어지며, 역사도 만나고 헤어지며 우리가 태어나는 정든 고향도 만나고 헤어진다. 과거를 회상해 본다면 누구나 그립고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그만큼 이별이 많았다는 뜻이다.


 옛날 고향친구, 돌아가신 부모, 형제, 고향의 모교 또는 고향집… 그 모든 것이 사람에 따라서는 이미 모두 영원한 이별이 되어 있다. 이렇게 이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만남이 많았다는 뜻이 된다.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이별도 많은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 그 사람, 그 일들이 모두 그립고, 그 이별이 서럽다는 것은 그 만남들이 그만큼 기쁨이었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길거리에서나 고속도로에서 또는 쇼핑 마켓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렇지만, 그 같은 군중 속의 만남은 만남이 아니다. 온갖 불편한 경쟁 상대 중의 한 사람일 뿐 기억에는 거의 남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와 달리 우리들의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 만남이 있다. 


그리고 만남은 반드시 기쁨의 기억으로서의 만남은 아니다. 더러는 우리를 너무나도 슬프게 하는 만남이 있다. 친구가 있으면 배반자도 있고, 자선가가 있으면 도둑도 있고, 애인이 있으면 라이벌도 있다. 친구는 물론이요, 그 같은 역사와 그 같은 환경 조건의 만남이란 거의 모두가 운명적이다. 그리고 그 운명적인 만남이 바로 우리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지만, 이 말은 결코 모든 것이 우리의 의사에 반해서 수동적으로 결정된다는 뜻은 아니다.


 불행한 환경은 우리를 좌절시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우리에게 야망을 키워주고 강한 의지를 키워주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 될 수도 있다. 모든 만남은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을 더욱 살찌게 하는 것이다. 불행한 역사만이 아니라 좋은 친구, 사랑하는 연인 등 기쁨으로 충만 될 수 있는 모든 만남이 그렇다.


 인간은 역사 속에 살고 사회 속에 산다. 그것은 무수한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만남이 없다면 인간의 삶 자체가 끝나버린다. 만남이란 바로 삶을 위한 방법이요, 기회이며 불행한 만남조차도 그런 뜻에 창조적으로 수용할 의지와 슬기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만남은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원리이다. 그래서 동양철학에는 하늘과 땅의 만남에서 만물이 생성되는 원리가 있다. 결국 인생이란 만남과 이별의 역사라고, 마치 파도가 밀려와서 철썩거리다가 썰물이 되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또 밀려오고 사라져 가듯이 만남과 이별의 수 없는 반복이 인생인 것이다.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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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okim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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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3
나의 이웃 빌(Bill)

 
 

 사람은 누구나가 “제 잘난 멋”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하는 데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남에게 혐오감을 줄 뿐 아니라,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도 많은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그것은 참다운 자애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다운 자애심이란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밖에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중히 생각하는 그만큼 이웃에 대해서도 존중하고, 그 사람이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는 그만큼,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인격을 존중하는 것을 뜻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의 일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있다. 아무도 자기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무인도에 가서 혼자서 살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인식해야 한다. 그 소중함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자애심이다.


 내가 소중한 인간인 것처럼 이웃도 역시 소중한 사람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이웃도 이웃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특히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모여 사는 캐나다의 복합문화 사회에서는 각 종족간에 상호 타문화를 존중하고 공통분모를 찾아 조화를 이루어 가는 사회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소수이긴 하지만 이렇게도 살기가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우리집 건너 편에는 50년 대에 그리스의 북부 지방 마케도니아(Macedonia)에서 이주해 온 빌(Bill)이 살고 있다. 만나면 그는 연세도 들고 아는 것이 많아 우리 동네 터주대감답게 입담이 좋아 옛이야기 끝간 데를 모르거니와 이야기뿐 아니라 우리 동네 아무개네 집 내력까지 뚜르르 꿰고 있다. 


인종이 다르고 성이 다르고 사는 형편이 달라도 어느 집에는 몇 사람이 살고 있으며, 아들 딸이 몇이며, 무엇을 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건강상태는 물론이려니와 언제 이곳으로 이사해 온 것까지 그 집의 내력을 줄줄 외운다. 이런 소리에는 어떤 감정의 억양도 들어 있지 않다. 무정해서 인가? 아니다. 정에 정을 더한 세월을 오래 산 체념이 만든 평상심인 것이다.


 그는 특별한 취미나 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러니 집을 가꾸는 일밖에 다른 소일거리가 없고 동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제일 먼저 알게 된다. 나같은 보통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번 깎는 잔디를 그는 이틀에 한번씩 깎으니 일주일에 세 번 깎는 셈이다. 정원수와 꽃밭은 매일 관리하여 잘 정돈되어 있고, 낙엽이 잔디 위에 떨어지면 곧바로 치워버려 깨끗하기로 소문이 나있다.


 그런 Bill에게도 고민거리가 하나 있다. 다름아닌 그의 집 이웃에 중국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이웃과 오고 가는 말이 없으며 길거리에서 서로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잔디밭을 가꾸지도 않으며 깎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가로수의 낙엽이 쌓여도 치우지 않으며 바람이 불면 낙엽이 모두 자기집으로 몰려온다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예의나 존경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로 들린다. 만날 때마다 그는 이웃에 대한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는 경험을 통해 중국인의 성격을 조금은 알고 있기에 이해한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이 60만이 넘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몇몇 사람 때문에 무더기로 중국인들이 욕을 듣는 것일 게다. 중국식당에는 어디가나 비좁은 공간에서 인산인해 가운데 각축하는 중국인의 모습이다. 그만큼 중국사람들이 많다는 뜻일 게다. 


14억이 넘는 인구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다 보니 “나만 살고 보자”는 본능적인 이기심이 발동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고질병처럼 굳어진 그들의 무질서 속에서 꽤 오래 생활한 사람들이다. 아무래도 사람 수가 많다보니 시끄럽고, 무례하고, 추태를 보이는 것은 다른 나라 사람을 볼 확률에 비해 높은 편이다.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중국인들에게 까닭 모를 측은지심이 솟아난다. 어느 누가 말했던가 사람들은 무질서를 즐겨야 중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요즘 세상은 너무나도 인정이 메마르고 있다. 서로 돕고 사는 삶, 서로 봉사해 주는 삶,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절감할 때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서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70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에서 지금 여기에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인연이겠는가.


 공자는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시키기 위해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고 했다. Bill의 이웃은 항상 자신의 행복과 안일만을 생각하고, 이웃도 같은 인간으로서 안일과 행복을 원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얕은 마음으로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내가 존경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이웃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존경하면 언젠가는 그들도 깨달을 것이다.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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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okim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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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5
가을이 가고 겨울이

  

 

 

 

 새벽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비가 내린다. 아니 밤새 내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며칠째 끝이 없이 내리더니 오후에는 눈과 바람으로 바뀌었다. 철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주위 풍경들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세월의 때가 끼어 무디어진 감성들이 깨어나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풍요로웠던 생명들을 떠나 보내고 난 뒤의 텅 비어버린 들녘,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은 허허롭기 그지없고 길가에 서있는 나목들은 안쓰러울 만큼 남루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지금 메마른 땅 위에 모든 것들 위로 새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빗물과 눈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는 순리를 거스르는 법이 없다. 가을의 끝자락인 지금은 계절의 순환에 따라 겨울이 올 준비가 시작되고 있는 때이다. 눈이 내리는 중에도 아내는 서둘러서 텃밭에 마늘을 심고 얼지 않게 마른 풀로 덮었다. 비가 오다가 눈이 되기도 하고 눈이 다시 비로 변하는 11월은 늦가을과 초겨울이 만나는 그 언저리 어디쯤이다. 가을의 끝이기도 하지만 입동 절기가 든 초겨울이 시작하는 달이다.


기러기와 철새들이 날아오고 또 날아가는 계절, 초록이 바래버린 덤불에서 작은 열매들이 마지막 햇볕을 즐기고 있을 때, 새들은 높이 날아 멀리 길을 떠난다. 떠나는 것이 어디 철새들만이겠는가. 11월이 되면 마음이 먼저 길을 떠난다.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연례행사처럼 따뜻한 남쪽 나라로 겨울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여름내 분별 없이 늘어놓았던 헛된 약속들은 모두 낙엽과 함께 떨어져 버리고 감정의 겉치레들도 하나씩 떨어 버리고 연민과 미련 같은 것조차 조용히 떨어 버리고, 그리고 조금씩 가벼워져야 한다.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하얀 갈대의 저 가벼운 몸짓처럼, 구름이 가벼워지고 그 위를 날아가는 철새들의 깃털이 가벼워지고 그리고 우리도 가벼워진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들판이나 숲 속을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온 길을 뒤돌아본다고 하는데, 자신의 가는 속도에 맞추어 영혼이 따라오는지 살피기 위해서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매일 정신 없이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일상생활을 뒤돌아보자. 계절이 송년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모두들 분주하게 세상을 살고 있지만 이제는 여유를 누리며 살며시 영혼의 빛깔에 다가서 보자.


가로수 길에 떨어진 낙엽들은 갈색 톤의 수채화를 그려놓은 것 같다. 발에 밟힌 잎들은 아무렇게나 흩어져있어도 보기에 추하지 않다. 이 무렵이 되면 시간의 속도감을 실감하게 되니 나이 든 사람들을 서글픈 감상에 젖게도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심리적 쇠락 감은 영혼이나 육신의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 따라 함께 흘러가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 세상의 무엇이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우주의 질서와 섭리다. 그렇다면 빠른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애상적인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여기까지 살아오는 동안 개인이나 사회에 흠집 내는 어떠한 범죄에도 휩쓸리지 않아 평탄하고도 상스럽지 않은 일생을 보내게 된 것에 감사한다.


11월은 초겨울의 을씨년스러움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적당하게 따뜻한 거실에 앉아 내외간이 주고받는 은근한 이야기로 열기를 나누기도 한다. 추수 끝난 빈 밭에 초겨울의 무서리가 내리고 가로수의 잎들이 삭풍에 떨어져 땅에 굴러 쓸쓸함을 느끼게 될지라도 앙상한 빈 가지에 반짝이는 햇살이 있어 좋다.


내가 앉아있는 거실 유리창 밖에 석양이 붉게 물든다. 이 자리에 앉아 나는 책을 읽기도 하지만 차를 마시면서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 때가 많다. 햇살을 받으면서 해야 할 무슨 다급한 일이 있으랴. 거실 유리문으로 저녁노을이 밀려오고 따끈한 차 한 잔의 정취가 향기롭다. 


“11월은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고, 서로 찡그리며 사는 이 세상 혼자서도 웃음 짓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꽃잎이 피고 지고 또 피고, 사랑이 오고 가고 또 오고, 사람이 살고 지고 또 살고, 또 계절도 오고 가고--- 가없는 세상이다. 앙상한 가지마다 바람이 이는 겨울이 오기 전에, 삼라만상이 툭툭 떨어지는 이 가을날, 내 마음에는 그렇게 가을은 가고 겨울이 한 발 두 발 다가서고 있다.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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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okim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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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0
인생의 사계절

 


 한 인간의 생애는 나이에 따라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로 비유되고 있지만 나는 다음 네 가지로 구분하고 싶다. 꿈꾸는 시대, 방황하는 시대, 정착하는 시대, 그리고 누구나 비켜갈 수 없는 노년기의 추억하는 시대로. 


 우리는 어린 시절을 꿈 속에서 보낸다. 유년기나 소년기나 그들이 보는 이 세상은 온갖 아름답고 신비한 것으로만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아무런 의혹과 불신이 없이 모든 사람의 말을 순진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자연 현상을 신비한 눈초리로 관망하는 순수한 유년기 소년들에게는 고민이 없다. 슬퍼도 기뻐도 그들이 잃지않고 있는 것은 꿈이다. 신비한 세계 속에서 그들은 마치 저 먼 창공의 별들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현실이 아닌 꿈에 가득차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꿈 속에서만 살아가던 인간은 청년기에 들어서면 그들의 젊은 혈기가 꿈만 꾸고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소년 시절의 그 많은 꿈들을 현실 속에서 찾으려고 부모들이 말리더라도 짐을 꾸리고 너 나 할 것 없이 사바세계로 출범하는 것이다. 


그들의 목표가 어디인지는 그들 자신도 확실히 모른다. 다만 조각배에 돛을 달고 푸른 대양으로 대담하게 떠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그 청춘이 다 가도록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방랑객이 되어 그들의 젊음을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청춘기도 오래가지 않는다. 그들은 머지않아 방랑의 여정을 마치고 방랑 속에서 스스로 찾은 고향에 정착하게 된다. 그 고향을 찾았을 때가 되면 그들은 이미 사십대의 장년기에 들어선 것이다. 비로소 자기 작업이 세상에 자랑할 수 있는 창조적 활동에 이바지하며 한 인간으로서 성숙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청년기의 남녀들은 설익은 과일처럼 어설픈 것이 그들의 매력이지만, 사십대는 이제 모든 것이 정리되고 성숙했다는 점에 그 인간의 매력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 이러한 정착의 시절이 지나가면 다음에는 추억으로 사는 시절이 온다. 노년기가 바로 그것이다. 노년기에 들어서면 살아온 경험으로 가장 많이 인생을 알기 때문에 가장 많이 행복을 독점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이미 육체가 제대로의 구실을 못하며 게을러지고 행동을 거부한다. 그래서 이 시절에 스스로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은 추억 뿐이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늙으면 추억으로 산다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한 인간의 전 생애를 꿈의 시대, 방랑의 시대, 정착의 시대, 그리고 추억의 시대로 나눌 때 소위 인생의 가장 큰 멋이란 과연 어느 때 찾아보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행복의 의미를 파악하고 또 그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시기는 어느 때일까?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찾는다. 이와같이 행복의 기준이 물질적 풍요와 고통 없는 쾌락, 그리고 세상의 명예를 얻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온순하고 착하게 사는 것은 멍청한 일이고, 자비롭고 의로운 삶은 이기적 세상의 희생양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오랜 방황 속에서 추구해 나가는 참된 행복은 슬프지 않고 괴롭지 않다는 평온한 상태의 그 이상의 것, 그런 상태의 실감있는 기쁨을 우리는 찾고 있는 것이다. 참된 행복이란 우리에게 사색의 능력이 발달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행복이란 삶의 보람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 같은 보람은 인생에 대한 판단력에서만 얻어지는 게 아닌가? 그리하여 그 삶의 보람 속에서 생명의 희열, 생명의 약동, 생명의 찬미를 의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청춘기 이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인생이란 참된 행복을 겨우 알만큼 되었을 때면 이젠 아쉬움만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딱한 동물, 그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행복을 쫓다마는 미수범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중에서 아주 열심히 창조적인 작업에 나서고 아주 열심히 누군가를 사랑해 보고, 또 아주 열심히 사색해 나가는 몇몇 사람만이 이 미수범을 면할 것이다.


 행복이란 반드시 어느 항구를 찾아가 봐도 흔적을 찾지 못하는 환상은 아니다. 참된 행복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찾는 자에게는 행복은 반드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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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okim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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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4
2018-11-09
현대인의 불안

  

 현대인은 너무나 바쁜 가운데서 살아간다. 복잡한 현대문명은 시간마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해준다. 이 같은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재빨리 포착하고 또 받아들이지 않으면 낙오되고 만다. 그러므로 잠시도 방심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긴장과 노력 속에서 기계처럼 돌아간다. 이와 같은 현대인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인식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옛날과 달리 모든 것이 과학화 되고 편리한 세상이라 인스턴트 식품으로 식욕을 해결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이 편리하게 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쉽고 편안하게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가 있게 된 탓인지 현대병의 하나가 “게으름 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드러누운 채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요행과 우연에 기대하는 불노소득을 바라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이 시대의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은 물질의 풍요와 생활의 편리라 하겠다. 우리는 옛사람들이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을 물질적 풍요 중에 삶을 즐긴다. 또한 이것은 오늘을 사는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며 모든 가치의 최종 규준처럼 되어있다.


 오늘의 이런 인간생활에 결정적 구실을 한 것은 역시 과학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엄격한 법칙의 학문인 물리학과 수학이라 하겠다. 때문에 그런 학문들의 결실중에 사는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운 줄로 착각하지만 기실은 산지사방으로 엄격히 제약된 사회 속에 살며 숨가쁘게 돌아가는 거대한 공장의 톱니바퀴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런 사회는 필연적으로 힘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이며 기능의 사회이고 능률 향상의 사회이다. 즉 정신적인 것, 윤리적인 것들은 철저한 물량적 계산 앞에 퇴색되거나 그것에 완전히 환원돼버린다.


 기술은 인간생활에 놀라운 변혁을 이루어주었으며 윤택한 생활을 갖다 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고도의 기술개발은 인간생활에 많은 편익을 주나 동시에 수없이 많은 공해를 유발하며 더 나아가 전 인류 말살과 대자연 파괴에로 인간을 몰아간다. 


이와 같이 위대한 인간두뇌는 놀라운 기계문명을 창출하고 수많은 인간들이 기계의 파수꾼 노릇을 하거나 그 망령에 움직이는 예속물이 되었다. 빈틈없이 짜여진 조직에 예속된 인간은 소외감에 시달리며 항시 도태의 위기에 서게 된다. 그러기에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이 사회, 기술시대의 인간은 불안하다. 


즉 현대인은 근본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급기야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생명과 대량학살을 위시하여 의식주의 인간생활 전반에 걸쳐 공해와 자연의 파멸문제를 야기시켰다. 따라서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달 앞에서 한편으로는 인간의 미래에 큰 희망을 가지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큰 위기와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이 욕망을 조정하는 것을 절제라고 하는데 인간은 그 자제력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된다. 오늘 우리 사회는 소유를 늘리는데 집착하고 있다. 많은 것이 선이고 풍부가 곧 행복이라고 하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벼락부자를 꿈꾸며 복권을 사고 어떤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욕심의 풍선을 무제한 팽창시킨다. 진정 터질 순간이 임박함을 느끼지 못하는 눈먼 장님들이다.


 인간은 주어진 생을 보다 나은 생으로, 오늘보다 내일을, 지금보다 앞날을 꿈꾸며 사는 이상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절대로 무한하지 않다. 길거나 짧거나 한정되어 있다. 시간은 가는 것이지 오는 것이 아니다. 강물처럼 한번 흘러가버리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돈이나 물건은 아까워하면서도 시간은 아까워할 줄을 모른다. 시간이란 우리들 목숨의 한 토막 아닌가.


 명경지수라는 말이 있다. 거울과 같은 물이란 말이다. 자신의 얼굴을 비쳐볼 수 있는 물이니 얼마나 맑고 잔잔한 물이겠는가. 이 명경지수에 나 자신의 얼굴을 비쳐보고, 내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잃어버린 나”를 되찾고, 나 자신에 대해 금강석처럼 여문 신념을 가져야 하리라고 본다. 그래야만이 인정미에 메마르고 굶주린 오늘 기술시대의 이기적인 현대인의 불안 속에서 나 자신을 살리고 당당한 걸음으로 불꽃 튀기는 생존 경쟁 사회에서 남보다 한걸음 앞서 달리겠다는 삶의 의지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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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okim
김종호
71431
9204
2018-11-08
아름다운 하루

 
 

 상쾌한 아침이다. 이른 아침의 기류는 약간 차게 느껴진다. 라디오에서 젊었을 때 즐겨 불렀던 이브몽땅이 부른 가을노래 ‘고엽’(The Fallen Leaves)이 경음악으로 흘러 나온다. 너무나 오래 전에 즐겨 부르고 듣던 노래다.

 

 

 오! 기억해 주기 바라오
 우리의 행복했던 나날들을 
 그 시절의 인생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웠고
 태양은 더 뜨겁게 우리를 비추었다오
 무수한 고엽이 나뒹굴고 있다오
 당신이 알고 있듯이 나도 알고 있다오
 추억도 그리움도 그 고엽과 같다는 것을
 북풍은 그 고엽마저 차가운 망각의 밤으로 쓸어가 버린다오

 


    
노래 가사에서 보듯이 가을에 대한 정서가 어찌 그들만의 느낌이었을까?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인가, 마음으로 듣는 것인가. 스르르 눈이 감기며 사색의 한 자락을 계절 속에 녹여간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본래의 마음을 잃어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자연의 소리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귀속엔 순수한 자연음을 멀리하고, 복잡한 기교음만을 즐겨 들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한 노인의 눈에 비치는 뒤뜰의 풍경은 구석마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너무도 아름답고 축복에 찬 계절의 그림이 아닌가? 찬 바람 부는 계절이 다가오면 나뭇잎은 누렇게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검고 칙칙한 암녹색보다는 훨씬 다채롭고 아름다운 빛깔의 계절이 되는 것이다. 가을이 이미 우리 곁에 왔다는 증거다.


 주일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재촉하는 아내의 계속되는 목소리에 아침 잠에서 깨어났다. 밖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해가 내리쬐지 않고 구름이 낮게 깔린 흐린 날씨는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이슬 같은 비가 와서 그런지, 거리는 아주 깨끗하게 보인다.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이 귀찮아 자동차 트렁크 속에 있지만 그냥 갔다. 나는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을 꽤 귀찮게 생각한다. 그리고 우산을 들고 다닐 기회도 그리 많지 않지만 들고 다니다 보면 잘 잃어 버린다. 늙어 가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건망증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외출할 때면 두 번 세 번 부엌, 전기를 확인하고 차고 문이 닫혔는지 여러 번 되돌아와 재확인 하곤 한다.


 고속도로에서 운전할 때는 젊은 운전자들의 난폭한 버릇도 문제이지만 나이 때문인지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성당 주차장이 모자라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주차 장소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바짝 긴장을 하고 성당에 도착해서 안전하게 주차가 끝나면 커피가 마시고 싶어진다.


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친교실에서 풍겨 나오는 커피향 때문이다. 커피란 참 묘한 맛이 있다. 술과 담배처럼 일반 음식물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맛이다.


 미사 시간이 될 때까지 친교실에는 커피를 즐기기도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자질구레한 소식에서부터 고국의 정치, 경제 얘기로 모두가 유명한 정치인, 검사, 판사도 되고, 대통령이 되어 시국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저마다 갖고 있는 이야기는 천차만별이지만 공유하는 감정은 비슷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느끼는 즐거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느끼는 슬픔 같은 감정은 우리 모두 겪어봤으므로 짐작할 수 있다. 반면 헤아리기 힘든 감정도 있다. 현명한 삶이란 스스로 인내하고 생각하며 사는 삶일 게다.


 참맛 칼국수 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꽤나 오랜만에 가보는 조용한 한국식당이다. 4가정이 모여 식사를 했는데 이곳에서의 대화는 친교실 분위기와는 전혀 달리 가족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특히 아들, 딸들의 성장과정과 성공담의 즐거운 이야기들이었다. 


점심 식사에 함께 했던 Mr. Lee의 딸은 5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왔다고 했는데, 지금은 23살의 공주로 변해서 부모를 닮아 훤칠한 키에 미인이기도 하지만, 그 유창한 한국말로 노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어른들끼리 만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젊은이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 


모든 만남은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을 살찌게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좋은 친구, 사랑하는 연인 등 기쁨으로 충만될 수 있는 모든 만남이 그렇다. 즐거운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식사 후에 다시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슬비는 심술궂게 오후 골프 약속을 못 지키게 만들었다. 속이 후련했다. 시원한 가을 낮이었다.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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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okim
김종호
71506
9204
2018-11-02
그리움의 계절, 가을

 

 

 가을이다. 선선하다는 아침 저녁의 체감온도가 어느 사이 쌀쌀하다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여름에는 보이지 않던 기러기 떼가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그 많은 기러기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무리 지어 어디론가 날아갈 비행연습이 한창이다. 이렇게 가을이 불러온 풍광은 선물 같기만 하다.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우리집 뒤뜰에는 꽃밭도 있지만 작은 텃밭이 있다. 그래서 해마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때쯤에, 여름 동안 가꾸어 온 채소, 고추 등을 갈무리 한다. 금년에는 제법 빨간 고추도 우리가 먹을 만큼 달려, 지금 가을의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잎은 벌써 누렇게 변색되어 가고 있다. 지난 봄 텃밭에 모종해서 가꾼 고추며 가지, 토마토 포기에도 이제 까실한 가을이 물들어 있고, 누릇누릇 쇠가는 호박넝쿨의 늙은 호박이 무거운 몸을 가누고 있는 모습에도 이제 완연히 가을의 그늘이 서려 있다.


 동남아 지역의 무서운 태풍, 지진 그리고 서인도 제도 근처에서 시작해서 북미로 불어오는 힘찬 허리케인 등 지구촌의 기상이변에 위기를 느낄 만큼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어 걱정스러움 속에서도 가을이 열렸다. 맑은 하늘과 신선한 바람이 조화로운 이 가을에 낙엽이 수놓은 원색의 거리를 걷는 기분을 짧게나마 느낄 수 있는 가을이라는 계절은 분명 우리들 삶에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푸르고 푸르는 쪽빛하늘과 붉디붉은 단풍과 산들바람의 희롱에 따라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의 원색 물결들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또 있다. 바로 낙엽이다. 늦가을의 광활한 푸른 하늘 아래 바람에 밀려 다니는 낙엽들은 색색이 계절을 수놓아 간다. 지구의 한 구석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는 낙엽을 보고 있으면 아련히 먼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그리운 사람들, 그러나 이젠 모두 사라지고 행방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결국 인생이란 만남과 헤어짐의 역사라고, 마치 파도가 밀려와서 철썩거리다가 썰물이 되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또 밀려오고 사라져 가듯이 만남과 헤어짐의 수 없는 반복이 인생인 것 같다.


 세월이 이리도 빠른가, 참으로 초고속으로 달려온 열차처럼 그 숱한 나날의 작은 간이역들을 쉬지도 않고 지나쳐 어느덧 종점을 향해 가는 한 가을의 고갯길에서 길고 지친 기적을 울리고 있는 계절의 뒷모습을 본다. 문득 지나가는 바람소리에도 갈대와 옥수수밭 서걱이는 소리 들리는 것 같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코스코에 들린다. 식료품 선반에 산더미같이 쌓인 과일들 앞에 서면 잠시나마 우리들 삶에서 가난이란 말을 잊게 하는 이 계절은 분명 즐거운 절기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그 팽만한 단감의 감미로운 향기를 맡고 있으면 불현듯 어린애 같이 가슴 뿌듯해지고 이상하게 설레는 환각으로 아득한 고향 감나무에 매달려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던 까치밥(주홍감)이 떠오르기도 한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먹을 것 입을 것이 모자라는 어려운 생활환경 가운데서도 어려운 이웃에 대하여 나눔의 문화가 꽃피워져 있었고 하찮은 짐승에 대하여도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따뜻한 마음의 결과인 까치밥을 남겨 놓는 배려와 나눔이 있었다. 그 배고팠던 시절에도 늦가을이 되어 날씨가 영하의 기온으로 추워질 때에 까치를 비롯한 날짐승들이 먹을 것이 없음을 염려하고 까치밥을 남겨두었던 선조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다.


 하늘도, 바람도, 햇살도 자연의 모든 것들이 향기롭다. 가을을 일러 천고마비의 계절, 결실의 계절, 독서의 계절, 낭만의 계절, 사색의 계절, 사랑의 계절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낌없이 예찬했다.


 북쪽에는 눈이 내린다는 소식이 전해오니 이곳에도 가을이 이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예고 없이 가을이 왔듯 곧 겨울 추위가 스며들 터, 이 계절이 다 가기 전 아름다운 정취를 가슴에 담는다.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물방아 돌듯 때가 되면 돌아오고, 또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건만 가을이 되면 우리는 감성적, 성찰적 존재를 회복한다. 이렇게 가을의 의미가 새삼 인생의 의미로 연결된다. 아마 자연의 섭리를 인생살이에 비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열적이고 생산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계절을 지나, 찬 바람이 옷깃 속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삶의 끝자락이 언뜻언뜻 비친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인간의 최대의 스승이며 스스로를 비춰보는 계절이 주는 성찰이리라. 그래서 가을은 생각나는 얼굴들이 있는 그리움의 계절이다.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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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okim
김종호
71334
9204
2018-10-21
남과 북의 만남

 

 봄인가 싶더니 여름이었다가 어느새 가을로 들어섰다. 인생은 마음가짐에 따라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고, 풍요롭고,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즉 세상을 보는 눈이 비관적이냐 낙관적이냐에 따라 그 인생은 비관적이 되기도 하고, 낙관적이 되기도 한다. 어떠한 일이든 그가 가지는 마음가짐에 따라 좋게도 되고 나쁘게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한반도에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남북간의 관계도 좋아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정상회담의 반응도 국민들 중에서는 엇갈렸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들을 헷갈리게 한다. 


한마디로, 우리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각자의 취미나 직업관으로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우리 자신의 자로 이웃을 재고, 나에게만 통용되는 산법으로 사람들을 계산한다. 우리는 주관적으로 보지 객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즉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보이는 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상회담에 대해서 비판적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있으나 한국 국민 절반 이상은 긍정적 변화를 기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정상회담의 평가는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한 것같고 역사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분열과 통합을 거듭해 왔다. 삼국시대는 통일신라로, 후삼국은 고려로, 이어 조선까지, 그리고 조선이 패망하면서 일제의 지배를 받았고 마침내 해방이 됐지만, 그것은 또 다른 분열의 시작이었다. 분단된지 73년,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들어선 지 70년, 이 시점에 열리고 있는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겨례의 노력을 이 산하는 어떻게 기억될까.


 현대 세계사상 유일하게 73년 동안이나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한반도에서 민족공동체 구성원들이 겪은 고난과 비극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에서 엄청난 인명살상이 벌어졌고, 양쪽 권력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무고한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팽팽한 긴장이 상존하던 판문점은 1953년 6.25전쟁의 휴전협정 조인식을 거행한 이래 오늘날까지 한반도는 전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 발표된 남북정상의 공동선언문은 남북관계 개선, 한반도 긴장완화, 평화체제 구축 등이다. 향후 평화통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인도적 현안은 시급히 추진해야 할 과제이며 사실상 정상회담의 운명을 가를 비핵화가 포함된 평화체제 부분이다.


 핵문제 해결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협상이 잘 진행될 수도 있고, 또 난관에 부딪칠 때도 있을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관계와 한반도 정세에 전례 없는 기회가 찾아와 국제사회의 기대가 너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관련국 모두가 유연한 태도로 평화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과거, 현재 및 미래의 북핵 문제는 남북 정상간의 만남과 대화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정쟁속에서도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여는데 협의하기 위해 수많은 경제인을 포함한 정치인들의 방북과 비무장 지대에는 전쟁 중에 희생된 남북 공동 유해 발굴을 위해 남북이 지뢰제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평화를 위한 남북 두 정상의 만남과 회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북한은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불변의 신화가 깨지는 조짐이 이번 정상회담에 대한 호응으로 나타나고 있다. 분명 남북정상회담의 공동선언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한반도 문제의 남북 당사자간 주도적 해결의 원칙과 의지를 다지는 것이며, 한반도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의 실질적 출발이 될 것이다.


 아울러 남북정상회담은 대북포용정책의 지속적 추진의 결실로서 남북간 화해와 단합, 교류와 협력을 통한 민족 공동발전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정착과 동북아 및 세계평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반세기가 넘은 세월동안 분단된 민족문제를 하루 아침에 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국민은 정상회담의 가시적 성과에 집착해 조급하게 서드르지 않으면서 상호 이해와 신뢰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고 남북관계 정상화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남북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판문점 그리고 평양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남북한 8천만 동포가 언제나 기억하면서 실천하기로 다짐하면 좋겠다.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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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okim
김종호
71237
9204
2018-10-15
가을 소풍

 
 

 초가을이 눈앞에 다가왔다. 오늘은 오랜만에 가을 소풍 길을 나섰다. 멀리 보이는 산들은 가을빛이 완연하다. 가을은 춥지도 덥지도 않아 야외 나들이에 좋은 계절이다. 바람은 시원해서 길 위에 서면 상쾌한 기분을 전해준다. 저절로 처다보게 되는 높은 하늘은 그 푸르름 만으로도 사람을 맑게 해준다. 가볍게 떠있는 하얀 구름 때문에 마음이 무게를 잃고 떠나게 된다. 소풍은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나는 가을 소풍을 사랑한다.


 이번 가을 소풍의 목적지는 토론토에서 북쪽으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Belfountian Conservation Area 였다. 예나 지금이나 소풍의 설렘과 추억은 아련하다. 아침 일찍 가을 소풍을 떠나면서 어릴 적 국민학교 시절 소풍 전날이면 잠들지 못하고 들떠 오르던 마음의 기억이 달달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Belfountain의 유서 깊은 작은 마을 옆에 위치한 산정호수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이 공원은 나이아가라 절벽의 멋진 전망을 제공한다. 때묻지 않은 연못과 분수 주변의 초록 잔디에서 폭포, 강, 흔들다리, 아직 이르긴 하지만 주변의 단풍으로 숨막히게 아름답다.


협곡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자연 산책로와 연못 및 계곡을 둘러 볼 수 있는 그 길을 따라 많은 곳이 나무경사로와 계단을 포함하고 있지만 강가를 따라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있다.


 요즘은 골프를 하느라고 조금 멀리하고 있지만 아리랑 산행 팀과 한 달에 한번쯤은 이곳을 찾았었는데 이 나이에 다시 찾은 감회가 새롭다. 오늘은 더 많은 추억을 담아가야겠다. 


몇 시간 동안 도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멋진 장소, 이 지역은 아름다운 경관, 결혼식, 낚시, 산책로, 곱게 물들어 있는 가을 색 및 사진 찰영에 아주 좋은 곳이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니 들국화와 키 작은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며 우릴 반긴다. 코스모스는 청초하고 고아한 자태를 보이며, 꽃 중에서도 고상하여 첫사랑과 함께 코스모스 핀 가을길을 걷던 생각이 나게 한다. 


흔들다리 밑의 폭포를 지나면서 가을이 들려주는 진한 소리에 취해 잠시 발길을 멈춘다. 계곡을 따라 흘러가는 좁은 강에는 낚시하는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산 속에서 낚시하는 재미도 나름대로 가을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산 아래 능선엔 성질 급한 나무들이 수줍은 듯 살며시 가을 색을 선보였지만, 정상을 향해 가파른 계곡을 오를수록 단풍의 색깔은 더 곱고 아름답다. 산중턱에 올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연의 선물이 생각할수록 오묘해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든다. 하늘 아래에는 산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먼 능선들이 첩첩이 포개져 물결처럼 일렁거린다. 졸졸거리는 계곡의 물소리가 정겹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푸르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에 공기도 맑다. 산꼭대기엔 이미 녹음이 저만치 물러갔다. 팔팔하던 잎새는 풀기가 빠졌고 찌르듯 창창하던 색깔도 흐릿해져 있다. 서서히 먼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피고 지는, 만나면 헤어지는 자연의 섭리가 조금은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오래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솔향을 맡으며 걸으니 기분이 상쾌하다. 길가에 들국화의 일종인 연보라빛 쑥부쟁이가 막 피어난 듯 싱싱하게 다가온다. 관심을 갖고 바라보니 비록 들꽃일지라도 퍽 사랑스럽게 보인다. 쑥부쟁이가 무리지어 피어나 가을의 정취를 더해 준다. 쑥부쟁이의 꽃말은 ‘그리움과 기다림’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인생을 계절에 많이 비유한다. 원색으로 물든 산 정상에 올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삶의 철학이 담겨있는 대자연을 마음껏 호흡하며 바람결에 묻어오는 자연의 소리에 잠시 멈추어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뚜렷한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한 세월의 아픔이 새삼스럽게 마음을 저리게 한다.


 단풍이 물들면 벌써 한 해가 끝자락이다. 싹이 트고 봄꽃이 핀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산에는 단풍이 든단 말인가. 단풍을 마주하면 아름다움도 있지만 쌩쌩 지나가는 세월에 정신을 못차리겠노라고 원망스런 마음도 함께 한다.


 아름다운 산과의 만남은 언제나 답이 없고 인자하며, 조용하고 우리의 심신을 어루만져 준다. 오랜만의 가을 소풍, 새로운 풍경이 거듭하여 진한 감동을 주었다. 역시 가을을 가을답게 느끼려면 자연과 함께하는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큼 다가온 가을 앞에 곱게 물든 아름다운 산, 맑은 계곡 물소리가 가슴을 고동치게 한다. 오늘 가을 소풍의 추억은 오래가지 싶다. 그만큼 공원도 좋았고, 함께한 사람들도 좋았다. 특히 본한인교회 봉사팀이 제공한 맛있는 빵과 김밥은 언제나 야외에선 그렇듯 꿀맛이었다. 그들의 희생적인 봉사활동에 찬사를 보낸다. (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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