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계정 찾기 다시 시도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김종호 칼럼

jonghokim
CF52F936-E790-4F69-8203-F798CE26EED9
58300
Y
메뉴 닫기
오늘 방문자 수: 30
,
전체: 14,791
김종호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www.budongsancanada.com
메뉴 열기
jonghokim
김종호
66568
9204
2018-06-21
김종호 이집트(7)-홍해를 품은 휴양도시 ‘후르가다’(Hurghada)

 

신의 나라 이집트의 여행은 룩소르 신전 관람을 마지막으로 이집트의 고대 유적지 관광은 끝이난 셈이다. 이집트에서 남은 마지막 2일간을 중동의 보석 “홍해”를 품은 아름다운 휴양도시 후르가다에서 바다를 즐길 예정이다. 이집트에서 보내는 마지막 해변도시이다. 


이집트의 리비에라로 불리는 홍해(Red Sea) 해안지역은 이스라엘 국경에서 수에즈 운하까지, 그리고 남쪽으로 이집트의 동해안을 따라 수단 국경까지 이어진다. 후르가다는 이집트 홍해 주의 주도이며, 해변에 있는 휴양도시이다. 20세기 초에 건설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이집트 정부에 의해 관광업이 발달되었다.

 

 

 

 

 

룩소르에서 후르가다로 가는 길은 나일강 동쪽의 높은 사막지대를 넘어가는 280km의 멀고 험한 사막길이다. 모래와 먼지만 풀풀 날리는 모래사막을 끝도 없이 달렸는데 사막 한가운데에서 버스엔진에 문제가 생겨 오도 가도 못하는 사막에 갖히고 말았다. 


버스 운전사는 엔진을 고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해가 넘어가고 어둡기 시작하니 모두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몇 해 전 이 사막에서 관광객을 목표로 테러리스트들의 대 사건이 생각났기 때문에 사막의 밤은 공포에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1998년 룩소르 사막에서 벌어진 참극, 이슬람 과격세력이 총기를 난사 외국인 관광객 58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늦은 밤에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나타났다. 관광객을 보호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모양이다. 구세주가 나타난 셈이다. 우리들은 드디어 안도감을 찾았다. 도움을 받아 사막을 통과하는데 무슨 검문검색이 그렇게 많은지, 버스로 약 5시간의 거리를 9시간이 걸린 늦은 밤에 후르가다의 AMC Royal Hotel에 도착했다. 사막에서의 무서운 경험이었다.


필자는 이집트에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이집트가 바다를, 그것도 두 면이나 너르게 접한 나라라는 것을 제대로 몰랐다. 이집트에 대한 로망을 품게 되었던 소설 “람세스”에 모세가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홍해의 기적”도 당연히 비중있게 언급되었지만, 성경도 역사도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필자로서는 비유와 메타포로 채워진 신화 정도로만 인식했던 것이다. 

 

 

 

 

 

홍해의 기적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모세가 홍해를 가른 기적이다. 그래서 필자는 홍해를 더욱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기적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신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면 기적은 사람의 상상으로는 감당이 안되는 것일텐데 모세는 인간으로써는 감당하기 힘든 일을 했기 때문에 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모르겠다.


유럽 사람들에게는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홍해지만 우리에게는 가기 쉽지 않은 바다, 그곳에서 수영을하고 홍해 바다를 갈랐던 모세의 기적을 바다 속에서 느껴보기 위해 팔로 물을 가르는 시늉을 해 보았으나 홍해는 반응이 없었다. 함께 선탠을 하고 있던 Mr. 김은 아직 믿음이 얕아서 그렇단다.


홍해 해변의 썬베드에 드러누워 올려다 본 하늘, 가까운 바다는 투명한 에메랄드 빛, 멀어질수록 짙푸른 코발트 블루, 세상이 온통 평화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왜 푸른 바다가 홍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빨갛다는 것과 푸른 바다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고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단어다. 아직도 궁금하다. (2018.04)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nghokim
김종호
66495
9204
2018-06-16
이집트(6)-죽은 파라오와 살아있는 신이 만나는 곳 ‘룩소르’(Luxor)

 

카이로 일대가 대 피라미드로 연상되는 이집트 고왕국의 중심이라면 카르낙 신전이 있는 테베는 침입자 힉소스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이집트를 건설한 곳이다. 파라오 중심의 역사에서 이집트 대중의 시대, 람세스2세의 시대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곳, 바로 테베가 오늘날의 룩소르 일대이다.


3500년 전 나일강 상류에 번성했던 왕묘와 신전의 도시, 이집트 문명의 혼과 대중적 신화가 살아 숨쉬는 룩소르를 빼면 이집트 여행은 별 의미가 없다. 이집트 최대의 관광명소이자 고고학 유적지 룩소르, 기원전 1550년부터 1075년까지 500여 년간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였던 테베가 있던 곳이다.

 

 

 

 


룩소르는 나일강변에 있는 고대 이집트의 생활상을 그대로 만나볼 수 있는 유명한 관광 명소 중 하나이며 이집트 남부에 있는 도시이다.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존재해 왔으며 룩소르 신전, 카르낙 신전, 멤논의 거상 등을 포함한 유적들이 위치해 있고 서안지역에는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이 있다.


시민들은 주로 사탕수수 농사에 종사하며, 경제는 관광업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룩소르는 문명이 수세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드는 곳이다. 아주 시골이란 얘긴 아니지만, 마차가 수시로 지나다니고, 오래된 건물과 그 사이로 이어진 좁은 골목에는 여행자들을 보고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환영 인사를 하고, 말과 당나귀가 수시로 다니는 골목에서는 냄새가 조금 나기도 했다. 


이집트에서는 당나귀가 말과 함께 매우 중요한 동물로 여겨진다. 사람들이 당나귀를 타고 다니거나 당나귀 뒤에 짐을 싣고 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 낮선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지만, 사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쫑긋한 귀와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당나귀가 불상한 생각이 들었다.


가장 유명한 피라미드는 카이로에 있지만, 고대 이집트의 나머지 전부는 룩소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베라고 불리던 먼 옛날부터 파라오들은 이곳에서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자신도 언젠가 그들의 곁에 다가갈 수 있도록 기도했던 곳이다. 그러다보니 도시 전체가 거대한 유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볼 것이 많다.


왕가의 계곡(The Valley of the King) 같은 유명한 관광지는 대부분 나일강을 건너 서안지구에 있다. 사막인데다 태양은 뜨거웠다. 정말 황량한 이 사막에 이집트 최대 관광지가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태양 아래 그대로 노출돼 걷는 내내 정말 더웠다.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유적지는 멤논 거상이었다.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이 거상은 야외에 있어 별도의 입장료는 내지 않았다. 하지만 룩소르의 4월, 그것도 대낮에는 그림자를 찾아 쉬기 바빠서 멤논 거상은 우리를 오래 붙잡지 못했다.


입장료 160파운드를 내고 무덤이 많은 언덕에 도착했다. 왕가의 계곡은 룩소르의 유명한 관광지다. 피라미드처럼 거대하고 눈에 띄는 무덤이 아닌 외딴 곳에 굴을 파서 내세에 평안을 얻으려 했던 왕들의 무덤인데, 단 하나의 무덤을 제외하고는 전부 도굴되었다고 한다.


그 단 하나의 무덤이 그 유명한 투탕카멘이다. 사실 투탕카멘은 재위 기간이 고작해야 9년으로 매우 짧은 편이다. 하지만 왕가의 계곡에서 유일하게 온전하게 보전된 채로 발굴된 무덤인 데다가 황금마스크가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음) 있어서 유명하다.


왕들의 계곡에는 고대 이집트 왕(파라오) 64명이 잠들어 있는 넓고 호화로운 지역이며 이 중에는 투탕카멘, 세티1세, 람세스3세, 아멘호텝2세 그리고 람세스6세가 포함되어 있다. 


이 중 BC 1352년에 세워진 투탕카멘 왕릉은 가장 유명한 무덤으로 1922년 호와드 카터가 왕의 전설이 담긴 유물을 발견하여 세계적으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투탕카멘의 유물이 대거 발견된 것은 무덤의 위치가 다른 왕들의 무덤 위치와는 사뭇 다른 위치로 인하여 도굴이 안 된 것으로 보인다.


관람을 마치고 신전 주변을 보니 마치 고대 세계로 온 것처럼 온통 발굴 중이거나 이미 발굴된 또 다른 작은 신전들이 주변에 즐비한 것을 보고 인간의 겸손함과 역사에 대한 경외감이 솟구친다. 


저 멀리 나일강 강변을 따라 파랗게 물든 룩소르 평야는 과연 이곳이 사막 한 가운데인가를 잠시 잊게 하고 있다. 황량한 사막의 산맥에서 문명의 최정점을 달성한 고대 이집트인들에 대한 관심과 존경심이 갑자기 더해가는 순간이다. 


왕들의 계곡을 비롯한 왕비의 계곡, 귀족의 계곡이 이처럼 50도까지 기온이 올라가고 1년 내내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곳에 자리잡은 것이 오히려 그들의 자취를 오늘에 남겨준 것임을 생각할 때 비록 도굴을 막을 수 없었을지라도 풍수지리적 관점에서는 묘터를 잘 잡았다고 생각된다.


왕들의 계곡 정반대편으로 합셉슈트 장재전은 테베의 험한 계곡을 등지고 세워진 건축물이며 이집트를 통치했던 유일한 여왕 합셉슈트는 그의 무덤을 “제세르 제세루”라고 불렀다. 이는 훌륭한 것 중에서 훌륭한 것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모세의 어머니로 알려진 인물로 강한 성격의 여성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신전 중 가장 큰 신전이 카르낙 신전이다. 수세기에 걸쳐 지어진 고대 이집트 사원의 탑문, 기둥이 많이 세워진 홀, 거대한 동상, 사원, 오벨리스크 등이 있다. 


카르낙 신전부터 룩소르 신전까지 약 3km에 걸쳐 고대에는 스핑크스의 길이 있었다고 하여 현재 계속 복원과 발굴 중에 있다. 축제 때가 되면 카르낙 신전에서 살고 있던 신들이 이 길을 따라 룩소르 신전으로 놀러 와서 며칠 동안 축제를 즐기고 돌아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룩소르 신전을 관람하였는데, 신전 입구에 태양신에 바치는 기념비 오벨리스크가 두 개 있었으나 현재 하나는 프랑스 콩코드 광장에 있다. 카르낙 신전 입구의 하나는 터키 이스탄불의 히포드롬 광장에서 관광객을 맞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뒤섞이고 강자가 약자가 되고 언젠가 약자가 다시 강자가 되면서 약탈과 지배를 반복하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nghokim
김종호
66400
9204
2018-06-11
김종호 이집트(5)-이집트 여행의 매력 ‘나일강 크루즈’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 나일강이 실어나르는 풍요로운 영양물이 없었다면 이집트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나라일지도 모른다. 나일강은 아프리카 적도 부근에서 발원해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수단 등을 거쳐 이집트를 통해 지중해로 흘러가는 장장 6690km의 긴 강을 말한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나일강 크루즈’의 나일강은 이집트를 흐르면서 수천 년 동안 종교와 신앙의 근간이 되어 온 그 나일강을 말한다. 그것은 바로 이집트가 자랑하는 인류문명의 근원이자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인 나일강을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나일강 크루즈 여행일 것이다.


풍요로운 삶과 화려한 문명을 꽃 피운 이집트의 수많은 문화와 유적지를 감상할 수 있는 편안하고 호화스러운 여행 방법 중 하나이다. 

 

 

 

 

 
아스완 나일강가에는 수많은 크루즈 선박들이 정박해 있었는데 크루즈선의 이름 중에는 파라오들의 이름을 딴 것이 많음이 특이하다. 아스완에서 룩소르까지의 300km를 운행하는 우리가 승선한 크루즈 선은 “Nile Goddess” 이다. 


Aswan을 출발한 3박4일간의 나일강 유람선 Nile Goddess는 사하라 사막을 지나면서 시작되었다. 아스완, 콤옴보, 에드푸, 에스나, 룩소르 등 대부분의 주요 관광지가 나일강을 따라 위치해 있기 때문에 크루즈 선상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나일강의 풍경과 사막을 편리하게 즐길 수 있었다.


나일강변의 사막에는 수로를 만들고 강물을 끌여들여 농경지를 만들고 푸른 숲과 잔디가 자라고 많은 말들이 강가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하늘과 나일강, 그리고 이집트 땅이 양쪽으로 펼쳐지고 해뜨는 나일강, 해지는 나일강의 환상적인 풍경을 배 위에서 감상했다. 2천년 전에 클레오파트라가 시저를 유혹하여 두 달간 나일강을 크루즈하며 사랑을 나누었다는 곳이 아니던가.


크루즈 배에 탄 사람들은 바쁠 것도 없이 그저 모여 앉아 산을 즐기고 사막을, 강을 즐기고 이야기를 나눴다. 배의 옥상에는 40도의 내려쬐는 무더운 햇볕을 우리들은 견딜 수 없었는데 유럽에서 온 여행자들은 오히려 선탠을 즐기고 있었다. 해 지는 나일강에는 붉은 노을, 붉은 하늘이 물드는 산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녁에는 크루즈에서 제공되는 쇼 벨리댄스와 이집트 전통춤인 탄두라 공연같은 소소한 볼거리도 제공되었다.

 

 

 

 

 

 
아스완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져 있는 콤옴보에 도착했다. 악어 머리를 한 신인 세베크와 매의 형상을 하고 있는 Horus 신에게 봉헌된 콤옴보신전은 이집트에서는 보기드문 이중구조 양식을 띤 신전으로 강변 바로 앞에 신전이 위치하여 편하고, 신선한 강바람을 동시에 맞을 수 있어 더 좋았다. 


그때에 나일강변에는 악어들이 많이 살았고 사람들은 악어를 무서워했을 것이 틀림없다. 파라오를 비롯한 사람들은 두려운 악어를 모시고 (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모든 자연이 다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이었던 시절 우리는 그 시절에 지었다는 유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에드푸 신전, 이 신전은 오시리스와 이스시의 아들로 태양신으로 숭배되었던 매의 형태를 한 호루스 신을 모신 신전이다. 기원전 3세기경에 이집트를 지배했던 프톨레마이우스 왕조 당시 6대에 걸쳐 건설된 것이다. 천동설을 믿었던 당시에 세워졌으며, 아스완에서 북쪽으로 123km 떨어져 있는 이 신전은 그 규모가 웅장하고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어 고고학자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는 신전 중 하나이다. 


마지막 날 고대 이집트의 수도 룩소르(Luxor)에 도착했다. 날씨는 37도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늘에만 들어서면 선선한 기운이 감도는 날씨였다. 나일강이 이집트의 젖줄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광경이다. 나일강이 흐르는 쪽의 땅은 기름져 보이는 검은색 토양이었고 많은 나무(야자수, 바나나 등)와 밀, 사탕수수가 재배되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편, 강이 흐르지 않는 쪽은 모래사막이거나 황량한 사암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집트에서 나일강 서안은 대부분 사막지대인 사하라 사막이며, 예로부터 죽은자의 땅이라 여겨오고 있다. 아스완 댐 건설로 물이 풍부해졌지만 관개시설의 미비로 아직도 이집트 국토의 97%는 사막이다.


크루즈 선을 타고 가면서 창 밖의 강물이 끝없이 이어진 풍경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곳곳에 이어진 물길 따라 세워진 조각품을 비롯하여 고색 찬란한 옛건축물은 관광객의 눈길을 끌었다. 강을 대하면서 항상 강은 젖줄이라는 생각을 한다. 젖줄이란 생명을 구원하고 역사를 만들어낸다. 


인류문명의 시작이 강가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젖줄이기 때문이다. 강가에 모여서 부락을 이루고 농사를 짖고 인류역사는 면면히 이어왔다. 동네마다 강물이 지나가도록 치수사업은 동서고금 끝없이 이어져 왔다.


사막에서의 색다른 체험과 이집트의 찬란했던 문화유산 등을 돌아보며 또한 나일강 크루즈를 경험한 필자와 같이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막기후와 배 위에서 제공되는 다른 음식문화에 고생은 했지만 뜻깊은 크루즈 여행이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nghokim
김종호
66295
9204
2018-06-02
이집트(4)

       

사막의 끝에 핀 인류문명의 금자탑
아부심벨 신전(Abu Simbel Temples)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의 거대하고 웅장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고대 박물관 등 여러지역의 탐방을 끝내고 카이로를 출발 아스완을 향해 하늘을 날았다. 카이로에서 아스완까지 1000km를 Nile Air 항공기로 1시간30분 걸렸다.


 굽이굽이 흐르는 나일강과 깍아지른 듯한 사막 산, 끝없이 이어지는 사하라 사막의 상공을 날 때 우리는 마치 영화 “아웃 오프 아프리카”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나일강을 지나며 고대 이집트를 떠올렸다. 모세와 람세스2세, 클레오파트라 등 나일강과 역사를 함께한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서 룩소르 신전부터 수많은 신과 파라오와 함께한 수천 년 된 유적지가 사막 그리고 띠처럼 형성된 비옥한 범람지역을 지나갔다.


 마침 사막위로 아침 해가 힘차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사막위로 떠오르는 일출의 모습은 산이나 바다에서 보던 일출과는 다른 장관이었다. 아스완에서 먼저 찾은 곳은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거대한 아스완댐, 이것은 보통 “올드 아스완댐”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홍수조절의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으므로, 나세르 대통령이 이 댐보다 7km 상류지점에 새로운 댐을 건설하였는데 이 댐은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이라고 불린다.


 이 댐의 완공은 이집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매년 반복되던 나일강의 홍수를 막아 국민생활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으며 충분한 물을 확보하여 나일강 유역의 사막에 많은 농경지를 조성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엄청난 양의 전력을 생산하여 이집트에 전기가 남아돌도록 만들었다. 


이 댐 때문에, 아니 나일강 때문에 국경문제가 생겨 이집트와 수단은 같은 아랍계 종족인데도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이집트와 수단의 국경지역에 아부심벨 신전이 있다. 크루즈 배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에 아부심벨로 갈 예정이다. 아부심벨은 수단과의 국경지역으로 수백 평방km나 되는 사막을 거쳐 가야 하기 때문에 테러리스트가 마음만 먹으면 그곳을 오가는 관광객을 표적으로 삼을 수 있다.


아스완에서 아부심벨까지는 280km로 새벽 4시에 출발하여 3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곳곳에서 군인들이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다.


 시야를 뿌옇게 흐려 놓았던 새벽녘의 안개가 연기처럼 흩어지면서 벌써 동이 트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막의 지평선을 가르면서 붉게 물든 동녘하늘을 뚫고 솟구쳐 오르는 장대한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새벽에만 볼 수 있는 사막여행의 또 다른 백미였다.


 사막의 아침은 짧았다. 사막은 단 한 번의 기지개로 태양을 품속으로 받아들였다. 사막은 누런 황토 빛 바탕에 검게 탄 듯한 봉우리가 점점이 흩어져 있어 신화적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부심벨에 도착하자 먼저 마주한 것은 아스완 하이댐 완공으로 사막에 거대한 푸른 담수호(나세르 호수)가 끝없이 이어지는 장관이었다. 수단 국경까지 이어지는 사막의 호수는 나일강을 끼고 5000년간 이어져 오던 문명의 풍토와 역사를 바꿔놓고 있다고 한다. 거대한 자연을 인위적으로 변화시켜 도전한 대역사에 앞으로 신은 어떤 인과응보를 내릴지 자못 두려움이 앞선다.


 이집트 왕국 3500년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대를 이끌었던 람세스2세는 태양신 아모, 창조신 프타 그리고 자신을 위해 거대한 신전을 건립했다. 이곳 아부심벨에는 람세스2세 신전으로 불리는 아부심벨 대신전과 그가 가장 사랑했던 부인 네페르타리를 위한 신전인 하트로 신전이 나란히 나일강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아부심벨 대신전 앞에는 20m 높이로 우뚝 서 있는 4개의 람세스2세의 거상이 있다. 그의 두 다리 사이에는 그의 딸의 상이 발가락을 딛고 미소짓고 있다. 신전 내부에는 오시리스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람세스2세의 8개의 입상이 서 있고 기원전 1275년 시리아의 카데쉬에서 벌어진 히타이트와의 대규모 전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람세스는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신전에 새김으로써 누구도 이곳을 지나 쳐들어올 생각 말라는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웃에 있는 왕비의 신전은 람세스의 신전에 비해 규모가 작고 소담스럽지만 건강미와 세련미가 돋보였다. 사원이 가득한 이집트에도 아부심벨은 특별한 취급을 받는 장소이다. 물속에 잠겨 있어야 할 위대한 인류의 축조물이 지상에 남아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1959년 이집트 정부가 관개수로를 통한 농업혁명을 내새우며 아스완댐을 건설한다고 발표했을 때, 아부심벨도 나일강에 있는 무수한 신전과 함께 수몰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하는 문명세계는 이 위대한 문화유산을 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인류사회는 막대한 돈을 들여 두 신전을 1000여개 조각으로 나누어, 1967년 9월 드디어 원래의 위치보다 210m 뒤쪽, 63m 위쪽으로 통째로 옮겨놓는데 성공했다.


 이전 기금을 댄 50개국 중에는 한국도 포함된다. 이곳이 더 유명해진 계기는 4년에 걸쳐 진행된 유네스코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의 장소에서 안전한 곳으로 사원 전체가 옮겨간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신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잘랐다 이어붙인 자국을 수없이 볼 수 있다. 아무튼 아부심벨 이전공사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으로, 아부심벨이 고대 이집트의 문화유산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유산임을 세계인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양 신전의 관람을 마치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돌아보는 심정으로 아부심벨을 뒤로 하고 아스완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사막 한가운데 멀리 바다에 푸른 물결이 일렁이고 푸른 산맥이 연이어 있는 풍광이 계속되고 있었다. 


안내자는 저것이 바로 신기루라고 말했다. 아무리 봐도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듯한 광경이었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그곳을 향하여 기진맥진 가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래 속에 묻혔을까. 한국말로 신기루라고 말하는 이집트인 가이드 김철수는 대단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nghokim
김종호
66210
9204
2018-05-29
고대문명의 비밀 기자 피라미드(Giza Pyramids)

 

 

 오늘은 카이로에서 마지막 일정으로 피라미드와 박물관을 관람하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 아침부터 모래바람이 불어 불쾌한데다 교통마저 혼잡하여 무질서의 카이로 시를 통과한다. 이곳에는 4거리에 교통신호등이 없어 먼저 들어서는 마차 또는 사람이나 자동차가 왕이다. 선진국이 될려면 이것부터 고처야 될 것같다.


 피라미드로 가는 도중 안내자는 한국인이 잊어서는 않된다는 카이로 회담 장소로 쓰였던 메나하우스 호텔을 안내한다. 카이로 회담이라면 제2차 세계대전 중 1943년 말 연합국 중에서 미국의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칠, 그리고 중국의 장제스가 수뇌 회담을 개최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특기할 것은 이 회담에서 일제의 압제 속에 있던 우리나라의 독립문제가 최초로 거론된 역사적인 장소라는 점인 것이다. 이곳에는 카이로선언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집트 기자에 가면 세상에 다시없을 거대한 피라미드가 서광을 가린 채 우뚝 솟아있다. 4천년 이상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 건조물로 이름을 날린 이 피라미드는 고대 7대불가사의 하나로 통하며 지금까지도 이집트를 대표하는 건물로 익히 알려져 있다. 


과거 쿠푸왕의 지시로 세워진 기자의 대 피라미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쿠푸왕의 아들과 손자의 피라미드가 한데 모여 있으며 그들을 지키는 수호의 괴물 스핑크스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이집트의 유명한 관광명소로 알려진 대 피라미드,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당시 무시무시한 왕권의 희생물이 된 수많은 노동자의 혼이 서려있다.


 이집트를 찾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피라미드를 알현해야 할 듯한 유혹에 빠지며, 그 앞에 서면, 무슨 주문이라도 홀린 것처럼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수천년 세월의 흔적에 고개를 떨구게 된다.

 

 

 

 


 피라미드란 고대 이집트의 국왕 및 왕족무덤의 한 형식으로, 현재 80여 개정도가 알려져 있으며, 나일강 일대, 문명의 발상지에 고루 흩어져 있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 반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많은 신들을 믿었다. 그들은 우주 만물 하나하나에 모두 신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 중 태양신을 최고 신으로 섬겼다. 


또한 기독교가 부활과 생명의 종교인데 반해 고대 이집트인들이 믿는 종교는 가희 죽음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죽음 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믿음에 시신의 보존이 중요했고 또 무덤에는 살아서 누리던 모든 것(옷, 음식, 가구, 보물 등)들을 함께 넣었다. 그러다 보니 미라기술이 발달되었고 무덤의 크기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왕위에 오르면 바로 무덤건축을 시작하였다 한다.

 

 

 

 


 무덤의 크기와 권력의 크기가 비례하는 것은 다른 고대 문명에서도 흔히 발견되었지만, 이집트의 경우는 그 규모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이 방대하며 견고하게 건축되어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이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기자에는 이외에도 쿠푸왕의 아들 카프레와 카프레왕의 아들 멘카우레왕의 무덤과 여왕들의 무덤이 있다. 부대시설로 장례(시신에 향을 넣고 미라로 만드는)가 치러졌던 계곡신전과 시신(미라)을 옮기는 둑길, 죽은자에게 음식을 바쳤던 장례신전, 이 모든 것을 지키는 태양신을 상징하는 스핑크스가 있다.


 고대 세계 7대불가사의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불리는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중의 하나이다. 기원전 2600년경 세워진 이 건축물은 이집트 고왕국 파라오 쿠푸왕의 무덤이다. 구조높이는 147m이며, 사각형 모양의 돌 230만개를 쌓아 완공하는데 약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돌의 평균 무게는 2.5톤, 개중에는 15톤 이상 나가는 돌도 있다. 그 무겁고 많은 돌을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가져왔고, 거대한 무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당시 파라오에게 죽음은 영원한 휴식을 뜻하지 않았다. 피라미드 내부 석실에 있는 그림에서 보듯이 고대 이집트인은 하늘로 올라간 파라오가 밤과 시간을 다스린다고 여겼다. 고대 이집트인은 이런 생각을 피라미드에 고스란히 반영했다. 


 대 피라미드의 네 모서리는 정확하게 동서남북, 네 방향을 향한다. 오차도 거의 없다. 주목할 것은 쿠푸왕의 석실에 난 두 개의 통로가 피라미드 외벽까지 이어져있다. 고고학계에선 이를 공기 통로라고 여겼다. 이집트인이 무덤에 환기구멍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통로의 역할을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밀은 1964년 밝혀졌다. 북쪽 통로는 북극성을, 남쪽통로는 오리온 자리를 가리켰다. 당시 이집트인은 북극성을 모든 별의 중심이라 생각했고, 오리온 자리는 영혼의 부활을 관장하는 이집트 최고의 신인 오시리스라고 여겼다. 파라오가 죽어서 영원의 존재가 된다는 생각을 천문학과 건축학으로 나타낸 것이다.


 거대한 파라오의 무덤으로 지어졌고, 스핑크스가 굳건히 지키고 있는 피라미드 단지는 여행자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장소로 통하며, 고고학자들이 수세기 동안 건축물의 건설된 방법에 대해서 골머리를 썩게 만들었던 장소이며 이집트 여행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이다.


 물론 피라미드를 찾아가는 것이나 관람은 예상과 달리 순조로웠으나 바깥에서 외부모양을 구경하는 것은 120파운드, 내부는 300파운드를 주고 쿠푸왕의 피라미드 티켓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를 보러 왔으니 안에도 들어가 봐야겠지, 라는 심정으로 구입을 했는데 내부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피라미드는 무덤이고, 설령 유물이 함께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박물관으로 옮긴 뒤다. 허리를 구부려 기어서 올라간 내부에는 그저 커다란 방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실망스러웠다. 


 카이로 시내식당에서 점심은 그들이 자랑하는 비둘기 메뉴였다. 안내자에 의하면 그들에겐 결혼식 때나 먹는 귀한 음식이란다. 그런데 역시 음식문화 차이 때문인지 우리들에겐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그 뒤부턴 시내에서 먹을 때는 우리가 잘 아는 멕도날드로 가기로 했다.


 오후에는 수세기에 걸처 수집되고 발굴된 10만점이 넘는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카이로 박물관(Egyptian Museum)을 관람했다. 고고학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에겐 유익한 곳이기는 하지만 사실 일반 시민들에겐 그저 그런 것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보고 지나기 일수다. 나의 관심을 끌었던 투탕카멘 유물전시관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룩소르에 있는 왕들의 계곡의 아주 작은 지하묘지에서 110kg의 황금관과 11kg의 황금마스크 등 5000점 이상의 귀중한 유물들이 발굴되어, 이 박물관을 가득 채워 놓았다. 투탕카멘은 기원전 1332년 9살에 18왕조 12대왕으로 등극하여,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 못한채, 9년 만인 18살에 피살 의혹을 받고 있는 파라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무덤 발굴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가, 1922년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nghokim
김종호
66067
9204
2018-05-17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사하라 사막길

 

 

▲알렉산드리아 유적

 

 

 

 인구 518만의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북부 지중해에 면한 항구도시로 수도인 카이로 다음으로 두 번째 큰 도시이자 이집트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이다.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정복지의 수도로서 그의 이름을 따서 건설한 도시이다. 


정복지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그리스문명과의 융합을 꾀했던 알렉산더대왕의 사후에 그의 부하 장군에 의해 건국된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의 왕들은 알렉산드리아에 거대한 도서관을 세우고 지중해 지역의 문화중심지로 알렉산드리아를 키웠다. 이집트와 지중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이며 현재도 이집트의 천연가스와 송유관이 지나는 중요한 산업중심지이다. 


 프톨레마이우스 왕조는 정복자인 그리스인들에 의해 세워진 왕조이면서도 이집트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함으로써 300년 간 지속되다가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시대에 이르러 로마에 왕조를 내어주고 이후 로마의 직할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로써 3500여 년간 여러 왕조를 거치며 유지되던 이집트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BC 47년 줄리어스 시저는 그의 최후의 경쟁자인 폼페이우스가 전투에 패배하여 이집트로 도망하자 그를 추적하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미 이집트 왕실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로써 시저가 이집트에 온 목적은 달성되었으나 이집트의 현실은 쉽게 시저가 이집트를 떠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친 로마 성향의 선대왕이 사망하고 그의 유언에 따라 공주인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남동생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으나 궁중관료들의 모략으로 형제간의 권력다툼으로 군사적으로 대결상태에 있었다. 지중해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로마의 최고실력자인 시저로서 중요한 동맹국인 이집트의 왕실분규를 모른척하고 갈 수는 없게 되었다. 


 21살의 꽃다운 처녀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자신의 세력을 확대시키려는 목적으로 시저에 접근하여 연인이 된다. 시저에의 접근은 운명을 건 도박이었지만 전쟁터를 전전하던 노장군 시저에게 그녀의 접근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로마의 실력자 장군인 줄리어스 시저 그리고 안토니우스와의 애정행각은 서유럽의 작가들과 헐리우드의 좋은 작품소재가 되어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사막에는 나일강물을 끌어들여 많은 농작물이 재배되고 건축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카이로의 혼잡한 도심을 힘겹게 벗어난 우리는 카이로ㅡ알렉산드리아 간 사하라 사막속의 고속도로를 시원스레 달린 후 다시 카이로 도심보다 훨씬 교통이 혼잡한 알렉산드리아 시내를 통과하여 4시간 만에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던 자리에 도착했다. 


기원전에 세워졌다가 시저의 이집트 원정 때에 화재로 소실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서있던 자리에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집트문화가 옛날처럼 번성하기를 기원하면서 또한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건립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옛 유적의 편린이라도 보기를 기대했던 필자에게는 실망의 대상일 뿐이었다. 또한 가는 곳마다 겨우 폐허가 된 유적지를 보여 주면서 돈을 받는 이 나라의 상술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알렉산드리아 시내 모습은 카이로와 별 차이없이 마차들이 교통수단이 되고 낡은 자동차들이 시도 때도없이 울려대는 경적소리와 움직이는 자동차들 사이를 교묘히 빠져 다니는 보행자들이 이루어내는 무질서의 향연에 입을 다물 수 없다. 사람 사는 활기찬 모습이라고 보아 줄 수도 있겠지만 그 혼돈스러움이 머리를 아프게 한다.


 알렉산드리아 시내에는 도대체가 로마시대의 유적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고작 남은 것이 “폼페이의 기둥” 과 로마의 원형극장 유적 정도였다. 그러나 이태리, 그리스, 터키를 여행하면서 규모도 크고 보존상태도 훨씬 양호한 여러 곳의 원형극장을 보고 온 나에게는 알렉산드리아의 원형극장 유적은 폐허같이 보였을 뿐이다. 


원형극장과 폼페이의 기둥 이외의 고대 유적이라면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가 서있던 자리와 그 위에 세워진 카이트베이 요새 뿐이다. 기원전 285ㅡ247년 사이에 건설된 이 거대한 파로스 등대는 일찌기 그리스의 필론에 의하여 세계7대불가사의로 지정될 정도로 장관이었던 등대였다. 높이가 125m나 되었고 낮에는 청동거울로 햇빛을 반사하여 빛을 발하였고 밤에는 횃불을 거울에 비추어 보냈는데 멀리 50km 밖에서도 등대를 볼 수 있어 지중해의 험한 뱃길을 항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길잡이었던 것이다.


 중동의 부호들이 즐겨 찾는 휴양도시 알렉산드리아, 해변가에서 바라다 본 지중해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등대가 서있던 자리인 카이트베이 요새에서 몬타나 궁전에 이르는 활모양의 해안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파란 하늘의 흰 구름과 어울린 푸른 바다는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데 그들이 자랑하는 생선메뉴로 세 마리의 생선이 나왔는데 절반 정도 구운 상태로 나와 먹을 수 없었다. 역시 음식문화에도 차이가 있어 고생을 했다. 그러나 호텔음식은 일품이었다.


 늦은 오후 알렉산드리아의 혼잡한 도심을 힘겹게 벗어난 우리는 카이로를 향해 다시 사막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지금부터 200여 년 전 이집트 정복에 나섰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여 이 유서 깊은 도시를 점령하고 카이로를 향하여 진격할 때에 지금 우리가 달리는 고속도로와 같은 노선을 따라 행군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가 1799년 7월이었다. 요즈음은 관광객들도 무더위와 모래바람을 피하여 찾지 않는 계절에 군대와 대포를 이끌고 행군을 한 나폴레옹의 집념과 용기가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nghokim
김종호
65969
9204
2018-05-16
이집트(Egypt)(2)-수도, 카이로 Cairo

 

 (지난 호에 이어)
 여행을 하다 보면 많은 에피소드가 생긴다. 즐거운 일도 많지만 당황스럽고 놀라운 일도 많다. 그럼에도 길을 떠나고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만은 아니다. 내 것이 아닌 것에서, 내 나라가 아닌 이역만리에서 겪는 여러 경험을 통해 느끼고 배우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수백, 수천 년 된 우람한 석조건물의 경관을 그저 돌아보는 것만이 아니다.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 이 도시에서 온 일생을 다하여 배우고 노력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이룩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큰 기쁨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이집트는 사막 한가운데로 나일강이 햇볕에 반짝이는 은빛 띠처럼 둘러쳐 있고, 카이로 시내가 모래먼지와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 때문인지 잿빛으로 무겁게 착 가라앉아 있는 이른 아침이었다.


 문화와 피부색이 다른 나라 이집트에 간다는 설렘을 안고 드디어 카이로에 도착했다. 우리를 맞은 건 모래먼지 가득한 시내 전경과 사막 그리고 예스러운 풍경의 카이로 시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혼란스런 문화적 차이에 대한 생각은 한 치 앞도 하지 않은 채 우리들은 들떠 있었다. 아랍계의 중심지 카이로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나일강과 사막 전경에 우리 모두는 즐거웠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한국말을 한국인보다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집트인 안내자가 나타난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 한국의 두 대학에서 어학을 공부했고 하숙집 주인 김씨 이름을 따서 김철수라는 한국이름도(이집트 이름: Medhat Fatah) 가지고 있었다. 그의 한국어는 농담을 썩어가며 우리들을 웃기기도 하고 능숙한 언어와 풍부한 역사 지식을 겸한 프로 여행안내자였다.


 세상은 넓고, 또 넓으며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해 살고 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우리에게 있어서 참으로 멀고도 생소한 곳으로 느껴진다. “아랍의 봄”의 중심지로서 민주화의 바람을 아랍세계 전역에 퍼뜨리는데 일조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이를 제외하면 카이로는 지리학 교과서에서나 가끔 볼 법한 존재였다. 그러나 카이로는 인류 문명 출발지 중 하나였던 이집트 문명의 수도이자 역사의 풍파를 5천 년이나 버텨온 고도이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들려줄 비밀스런 이야기가 많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여행가였던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를 “나일강의 선물”이라 묘사한 바 있으며, 예수의 탄생 훨씬 이전부터 여행가들은 피라미드, 스핑크스, 고대룩소르, 나일강 등 이집트의 이미지에 매력을 느꼈다. 파라오, 그리스, 로마, 아랍, 터키, 영국이 모두 이집트를 지배했었고, 그들의 모든 유산과 이슬람 그리고 20세기 문명이 혼합되어 오늘날의 이집트가 되었다.


 카이로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폭이 좁은 차선들과 곳곳에 있는 이슬람 사원, 마드라사, 파티마 등은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다. 이곳에는 미로 같은 칸 엔 칼리리 시장을 만나볼 수 있고, 도자기, 직물, 향신료, 향수 등을 구매할 수 있다. 시장을 둘러싸고 있는 오래된 이슬람 제국의 아름답고 잘 보존된 건축물과 혼잡한 도로를 체험할 수 있다. 


 도시에서도 자동차와 당나귀가 끄는 짐마차와 함께 어슬렁거리는 염소도 도로를 활보한다. 이러한 대조가 카이로보다 더 다채롭게 드러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카이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며 자동차 경적 소리,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 신자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리는 무에진(Muezzin) 소리로 항상 귀가 멍멍하다. 


그러나 이집트는 혼란스럽고 떠들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이버들이 꿈꾸는 나라이기도 하고, 사막을 가로질러 조용히 낙타를 몰고 가는 대상과 나일 강을 따라 여유롭게 내려가는 긴 너벅선이 지나 다니는 곳이기도 하다.


 나일 강을 중심으로 카이로 중심가는 현대 고층건물로 가득차 있고 유유히 흐르는 나일강물은 어느 국가의 수도 못지 않다. 카이로는 세계 어느 도시 못지 않게 아름다워 보이는 21세기 현대 문명과 근세의 문명이 나일강을 중심으로 뒤범벅 되어 충돌하는 혼돈의 도시인 것 같다. 


인구 1200만의 이 거대 도시는 공해와 교통, 주택문제, 환경문제로 가득찬 듯하다. 중앙선이 없는 도로에 차가 엉키기 일수고, 횡단보도와 신호 등이 없어 사람들이 차가 달리는 대로를 그냥 건너도 곁에 있던 경찰도 상관하지 않는 세계에서 혼돈이란 말이 가장 어울리는 도시인 듯 하다.


 죽음의 고대도시(Old Cairo)와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을 대충 관람 후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러 서쪽 기자 지구로 갔다. 서기전 5000년 초기 왕조시대부터 계속되다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후 서기전 30년 그리스 혈통 클레오파트라 7세가 로마에 망할 때까지, 그리고 무슬림에 의해 지배된 620년 이후,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침략 이후 약 백년간 영국지배를 받기까지 명멸한 수많은 지배자들이 쌓은 유물들이 박물관과 나일강변에 흩어져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nghokim
김종호
65861
9204
2018-05-10
이집트(Egypt)(1)-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아프리카 이집트

 
           
 

 이집트를 말하면 피라미드와 나일강이 먼저 떠오른다. 고대 파라오의 본고장인 이집트는 수많은 신전과 피라미드 무덤이 여행객을 놀라게 만드는 곳이다.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이슬람 고대도시 카이로까지 9237km의 먼 거리에 도착하는데 10시간이 소요되는 강행군이었다. 토론토를 떠날 때는 섭씨 0도의 쌀쌀한 날씨였는데 이곳 카이로는 37도의 무더운 날씨로 우리들을 맞이했다. 다른 대륙에 온 것을 느낄 수 있는 너무 더운 날씨였다.

  

 

 

 

 

이집트 아랍 공화국, 줄여서 이집트 또는 애급은 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나라로, 아랍어를 공용어로 하는 인구 1억 명으로 국토의 97% 이상이 불모의 사막지대이며 시나이 반도를 통해 서아시아와 이어져 있다. 북쪽에는 지중해, 북동쪽으로는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과 접하고 있고, 동쪽에는 홍해, 남쪽에는 수단, 서쪽에는 리비아가 있다. 해마다 나일 강에 일정한 홍수가 일어나, 이집트의 토양을 다시 비옥하게 만들어 준다. 덕분에 이집트는 연중 내내 수확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 하류에서 번성한 문명이었으며, 최전성기인 기원전 15세기에는 나일 강 삼각주에서 제벨 바르카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이 시기에는 에티오피아와도 교류하기까지 했다. 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 년 동안 존재했으며 알랙산드로스 대왕의 점령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집트는 원조 수로 제국으로서 관개 산업에 의존하였던 문명이다. 나일 강은 남쪽에서부터 지중해를 향해 북쪽으로 흐른다. 나일 강 하류에서 번성한 세계 4대 문명으로 석기시대 무렵부터 정기적으로 범람해 풍부한 식량을 확보하게 해준 나일 강으로 인해 인류가 남긴 가장 위대한 고대의 흔적 중 하나인 이집트 문명이 성립되었다.


 인류의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된 이집트의 유적지, 이집트 유적 기행은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이집트의 매력을 소개하고, 현지 유적을 통해 5000년 전 역사 속 세계로 초대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의 경계를 긋는 시나이 반도,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지역으로 언제나 영토분쟁의 대상이 되어온 곳이다. 여행자들에겐 시나이 반도는 아름다운 홍해와 시나이 산이 있는 장소로 통한다. 이 시나이 반도엔 두 군데의 휴양도시가 있는데 샤름 엘 셰이크와 다합이다. 이집트와 아랍의 부자들이 몰려드는 휴양도시로, 화려한 호텔과 리조트를 소유한 사설 해변이 즐비하다. 

 

 

 

 

 

중동 최대의 도시와 길다란 나일 강의 삼각주를 둘러보고 진귀한 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는 이집트는 황량한 사막에 자리 잡고 있는 고대의 유적지로 유명하다. 한편 많은 여행객들은 이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풍요로운 하곡에 자리 잡은 현대 도시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사하라 사막을 구경하고 나일강 유역과 지중해 해안을 따라 형성된 세계적인 도시들을 둘러본다.


 카이로와 룩소르에서는 이집트에서도 가장 유명한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카이로의 남서쪽 외각에서 기자 피라미드와 기자 대스핑크스, 거대한 박물관에서는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를 비롯해 이집트 전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이집트 남부에 자리 잡고 있는 룩소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왕들의 계곡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찾아 나일강 크루즈에 참여하여 이동할 수 있다.


 서부 사막의 광활한 사하라, 그레이트 샌드 시를 따라 부드러운 모래 언덕이 펼쳐지고, 흰 사막의 기이한 풍경을 따라 버섯 모양을 한 바위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막의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자그마한 녹지에 형성된 고대 도시가 오늘날까지도 번성하고 있는 시와 오아시스, 중세의 샬리 요새 유적지로 둘러싸인 도시 중심부에는 고대의 무덤이 가득한 험준한 언덕이 자리 잡고 있다. 사막을 탐험한 다음에는 아랍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로 일컬어지는 알렉산드리아의 중세풍 해변 카페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해보자.


 나일 강 하면 이집트를 떠올리겠지만 남쪽에 있는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해 두 줄기로 나뉜 강물이 수단을 지나 이집트로 흘러 든다. 그 두 줄기를 청(Blue) 나일강과 백(White) 나일강이라고 부른다. 전통적으로 수단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농업국가이다.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갖고 있는 수단의 북부 정부는 이집트와 같은 아랍계이기에 사이가 매우 좋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막지대가 많은 이 나라들은 나일강의 자원을 놓고 자주 대립했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먹을 거리다. 이집트는 바로 이 먹거리 확보에 있어서 어떤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일강에서 생산되는 곡물 “밀”이 그 주인공이다. 장장 6690km에 이르는 나일강은 매년 범람했고 그때 마다 최고 품질의 흙더미들을 하류로 옮겨 놓는 일들을 충실하게도 반복적으로 수행했다. 이 하늘의 축복 덕분에 이집트 사람들은 BC 2000년경부터 나일강 유역에서 밀을 재배하며 찬란한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를 꽃피울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nghokim
김종호
65753
9204
2018-05-01
통일한반도의 미래상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정권과 권력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분단으로 인한 갈등과 분열의 역사를 하루속히 끝내고, 한민족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한 통일시대를 열어가야 할 때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등장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50여 년이 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이러한 노력을 통일 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한다면, 인구 8000만의 통일한국은 세계 중심 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 지구촌 현상의 가속화로 민족국가의 역할이 감소되고 있다. 초국가적 정치, 경제 협력체 출현으로 지구촌이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바뀌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통일은 복고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즉 통일은 분단 이전 상황으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한반도의 미래를 설계하는 미래지향적인 것이어야 하며 통일 과정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리해야 한다.


 민족의 통일은 분단 전후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며,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민족 공동체를 실현하는 과업이 될 것이다. 국제, 정치적인 면에서의 통일은 군사적 불안감을 해결하고 민족의 화합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에 이바지할 것이다.


 남북한은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 대립의 길을 걸어왔다. 남과 북의 번영을 위한 한민족이 꿈꾸는 통일한국의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통일은 단순히 분단된 2개의 국가가 하나로 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다. 통일 후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노동력, 그리고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합해진다면 우리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통일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과도기가 있을 테지만 한반도 통일 이후 이와 같은 경제적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자원개발은 내수경제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경쟁력이 될 수도 있다. 


통일 후 북한에는 대대적으로 사회기반 시설이 조성되고 도로와 철도가 거미줄처럼 뻗어나가 그 길이 중국, 몽골,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질 것이다. 북한과의 길이 뚫리면 중국횡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연결할 수 있는 유라시아 물류 통로를 확보할 수 있다.


 통일 한국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통일 과정에서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를 확고히 천명해야 하며, 한반도에서 핵 없는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최선의 길은 북한 스스로 개혁 개방의 길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 지배를 거쳐 동족상잔의 전쟁을 통해 오늘날과 같이 남북한의 분단이 고착되었다. 분단과 전쟁 이후 남북한은 서로 이념과 체제 등 모든 면에서 이질화가 심화되어 왔다. 따라서 남북간 오랜 단절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서로가 어루만지고 씻어낼 수 있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바람이며, 한반도의 희망찬 미래를 열어나갈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염원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제발전과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데 초점을 두지 않고 핵-미사일 개발에만 열을 올리는 북한의 미래는 아직 불확실하다. 북한이 계속되는 핵 실험으로 스스로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를 개발하여 적화통일을 이루겠다는 망상에 빠져있다. 국제사회의 현실을 무시하고 뜬구름을 쫓다가 몰락하는 것을 ‘거대한 착각’이라고 한다. 북한이 택한 길이다. 북한정권은 통일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통일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통일은 북한의 종말, 특히 북한정권의 종식과 권력의 소실을 의미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현재 체제로는 오랫동안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의 기존 체제가 변화를 경험할 때 북한은 대한민국과 경제적, 사회적으로 통합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북한의 인민들은 어떤 종류의 삶을 그들 자신이 살기를 희망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독일식 통일 방식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민족이 하나 된 마음으로 단결하고 전진할 때에는 발전과 번영의 꽃을 피웠지만, 국론이 흩어지고 분열과 갈등으로 갈 때는 반드시 위기를 겪었음을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통일이 되면 통일한국은 이제 하나된 민족의 지혜와 저력으로 보다 더 나은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오도록 우리는 힘을 모아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나는 굳게 믿는다. 남북한의 우리 민족 모두가 함께 노력한다면 반드시 한민족이 원하는 위대한 중흥의 꿈이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의 미래세대에게 희망의 대한민국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2017.09)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nghokim
김종호
65610
9204
2018-04-21
푸른 기와집

 

 지난 주말 칼국수 식당에서 ‘청와대에서 살고 있다’는 젊은 여인을 우연히 만났다. 이민 온지 그렇게 오래 되어 보이지 않는 여인의 입에서 쉽게 흘러나온 청와대. 듣는 순간 한국의 어느 역대 대통령의 자녀쯤으로 착각을 했는데 자리를 함께한 원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쏜힐에 있는 어느 대형 콘도가 푸른 색깔을 하고 있어 청와대라고 한단다. 


그곳에는 학교와 교통, 식당 등 환경 조건이 편리해서 새로 이주해 오거나 단기 유학생들과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살아가는데 모든 조건들이 풍족하고 편리해서 청와대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원래 청와대의 이름 뜻은 푸른 ‘청’, 기와 ‘와’ 자를 써서 ‘푸른 기왓장으로 지붕을 얹은 건물’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집이다.


우리들이 보통 말하는 청와대는 서울 북악산 기슭에 있는 대통령의 관저, 대통령께서 일하시고 생활하는 모든 공간을 일컫는 정식 이름이다. 그런데 그곳은 이름 있는 사람이나 정치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너무나도 멀고 높아서 소시민들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아득한 구중궁궐이 아닌가. 


그곳에서는 너무도 행복하여 세상의 번잡한 일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으며, 뭇사람들의 말 따위들은 들을 필요도 없는 곳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곳으로 들어가 주인으로 앉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귀 어둡고 눈 어두워져서 ‘오만과 독선’에 빠지게 되는 황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청와대 주인이 되기 위해 치열한 정치 싸움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들 족족 “존경하는 국민을 위해 한 몸을 다 던져서 섬기겠다”던 선거 때의 언약을 기억하기보다는, 온갖 위엄과 권리로 치장하고, ‘가신’인지 ‘간신’인지 알 수 없는 무리들로 겹겹이 울타리를 치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국민들은 반세기 동안이나 참아가며 보아왔지 않은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인과관계의 고리다. 오늘의 불경기와 불황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비리와 부정, 혼란과 혼미는 외부세계에서 주어진 짐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 순간순간 뿌려서 거둔 열매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역대 청와대 주인들이 줄줄이 끝물이 안좋아 고생을 하는 것을 보니 북악산 기슭의 터가 안좋은 모양이다. 청와대 주인들의 삶이 순탄치 않아 또다시 세인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다. 물론 주인이란 이 나라의 대통령을 말한다. 청와대의 주인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구속 수감되어 수의를 입거나 참담함을 느껴야 했다.


지금 한때 나라를 대표하던 전직 대통령이 두 명이나 수감중인 상황이어서 해외에서 보는 나라의 품격도 문제이지만 수의 입은 모습을 봐야 하는 국민들도 썩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보복 또는 부패, 비리 등 구속이유가 어떠했던 수의 입은 두 전직 대통령이 두번 씩이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은 아무리 순진한 국민일지라도 청와대를 그다지 높게 우러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대신 사람들은 누구나 청와대가 투명한 ‘유리집’이기를 원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곳은 국민이 뽑은 신뢰받는 대통령과 그의 성실한 보좌진들이 국민복지와 국가안보를 위해 땀 흘리며 사심 없이 일하는 곳이지, 일부 극소수 특수층의 권세와 영달을 위하여 ‘음모 작당하는’ 곳이 아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에 폭로되는 연이은 비리와 뇌물 스캔들을 보는 국민의 비판적인 여론이 청와대쪽으로 번져가는 것도 아마 국민의 이런 염원의 한 반영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 기회에 청와대가 몸소 앞장서서 이 나라를 절망으로 몰고 있는 검은 부패와 로비를 뽑아 없애는 것에 앞장서는 게 어떻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만이 “신은 너무 높이 있고, 황제는 너무 멀리있다”는 식으로 청와대를 원망하는 국민들의 원성이 튀어나오지 않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서야 캐나다에 있는 청와대가 좋다는 것을 알만도 하다. (2018.03)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더보기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