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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칼럼

kimbo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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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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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2886
9218
2019-02-21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15)

 

(지난 호에 이어)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을 이전 행동 경험의 결과로 보면 벽관을 위시한 묵조선(?照禪)이나 참선(參禪)이 모두 마음을 씻는 방법이고 초심(初心)을 회복하게 하는 방법이다. 즉 “거듭남”을 의미한다. 


성경이 모두 사람의 말과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말과 문자로는 사람이 지상에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의 말과 문자로 기록된 그 이면에 이심전심으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로서가 아닌, 몸으로 체득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린 십계명의 본의가 바로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며,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너희 몸이 곧 성전”이란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이 말씀은 과학자들이 사람은 우주자연에 속한 것이므로, 우주자연의 통제 하에 살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잊지 않게 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람은 누구나 이미 성전이다. 사람은 다만 그것을 잊고 있을뿐이다. 도에 들어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방법은 교학(敎學)에 의존하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외우며 설교를 듣고 생각하며 듣고 배운 그대로 행동하도록 힘쓰는 것이다. 


이 방법에서의 문제는 마치 오래된 가죽포대에 새 술을 담는 것처럼 새 술조차 곧 변질되어 버린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의 방법은, 예수님이 성전으로 직접 들어가 성전을 더럽히고 있는 장사꾼들을 밖으로 쫓아내신 것처럼 이미 자신 안에 들어와 자신을 성전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들을 소재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심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이므로 사람의 간교한 생각만 자신으로부터 제거하면 그대로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되찾게 된다. 왜 유대인들은 그들이 믿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섬기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미워하였을까? 그리고 유대인 지도자였던 바울은 무엇을 깨달았기 때문에 변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어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었을까?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 거하시고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한다. 사람이 우주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게 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법에 따라 살게 되어 있다. 그것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과 소통하며 동행하게 되어있다. 사람이 자기라고 믿고 있는 것은 잡다한 이전 행동 경험이 쌓인 냄새 나는 쓰레기통에 불과하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의 본성을 방해하고 있다. 


공 또는 무념행은 불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성도가 속한 교회나 인간 사회나 우주를 유기체로 보는 기독교나 과학이나 심리학에서까지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실존적 조건이다. 인간의 지식으로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자신의 지식으로서는 자신의 본질 역시 보지 못한다. 


인간의 지식이나 논리는 사회적으로 이미 조건화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을 떠나있다. 하나님, 창조주의 말씀은 사람이 무아로 따라야 할 법이며 이(理)다.

바울의 눈은, 아담과 이브의 눈이 선악과라는 지식의 열매를 따먹고 열린 것과는 다르게,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감기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은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오직 안으로만 볼 수 있다. 도에 들어가는 두 가지 방법은 불교에도 있고, 기독교에도 있고 또한 심리치료법에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미 분별망상으로 오염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보지 못하도록 되어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 방편으로서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예수님 간의 논쟁이나 유대교 지도자였던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암시하는 것은 사람이 만든 문자로 기록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해석할 때와 성경이 문자의 한계를 넘어 따로 전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의 차이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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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2803
9218
2019-02-19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14)

 

(지난 호에 이어)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이 견성, 즉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무념행으로, 자신이 우주에 통합된 존재로서의 자연지, 근본지를 잃지 않도록 하는데 있음을 보게 되면 불교의 수행법이 “긁어 부스럼”과 같은 허망한 생각을 제거함과 동시에 무아로 자신의 행동이 자연의 법칙에 일치하도록 조율하게 하는 방법으로 우주와 공유하고 있는 본심으로서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누구나 배워야 할 기술에 속한다. 


사실 무아가 되지 않으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자동차 고치는 기술자도 될 수 없고, 차를 끓이거나 밥을 지을 수도 없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될 수 없고, 의사도 될 수 없고, 과학기술자도 될 수 없다.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이 우주자연의 물리학적 화학적 법칙의 통제 하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정신적 또는 신체적 장애자가 되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화엄경에는 선재동자가 지혜를 얻기 위하여 53인의 스승을 찾아간다. 그들 중에는 이교도도 있었고, 왕도 있었고 뱃사공도 있었고, 심지어 창녀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들이 하는 일에 있어서는 최고의 전문가들이었다. 선재동자가 그들을 만나면서 배운 것은 어떤 영역에 있어서나 자기가 맡은 일에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무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라 할지라도 몸이 그렇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온전한 상태에 있지 않고서는 통제할 수 없다. 


사람의 몸은 이미 우주의 물리적 화학적 법칙에 따러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정신적 또는 신체적 장애자가 존재하게 된다. 농부가 되거나 비행기 조종사가 되거나 뱃사공이 되거나 외과의사가 되거나 자동차를 고치는 기계공이 되거나 무슨 일이든 간에 그 일에 달인이 되게 하는 방법은 그 일이 요구하는 정신적, 신체적 조건에 무아로 조율하는 기술을 몸으로 습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벽관과 같은 선 수행의 목적도 거기에 있다. 


자신이 “인연(因緣)의 힘”에 따라 무아로 움직일 수 있도록 자신을 “놓아 버림”에 있다. 이를 불교에서 보면 거대한 ‘그물 망’으로 비유되는 법계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인간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고, 기독교에서 보면,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 사는 방법이며, 심리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마음과 행동이 이전 경험에 의하여 고착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한 환경에 적응해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유기체 본래의 능력을 뜻하는 것이고, 뱃사공의 관점에서 보면 배를 목적지에 안전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닿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일이 요구하는 다양한 조건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정확하게 일치되도록 조율하는 기술을 취득하여야 한다는 것에 해당된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우주자연의 법칙에 따라 산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우주자연의 법칙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지은 바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육신을 이룬 것이다. 하늘도 그렇고 땅도 그렇다.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다. 성전의 지붕이나 벽은 흙이나 돌이나 나무와 같은 물질로 되어있다. 


성전인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떡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실 수 있도록 깨끗이 비워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전으로서의 사람의 몸이 움직일 수 있다. 


만약 사람의 몸이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채워져 있다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의 기능은 사라진다.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란 예수님의 말씀은 화엄사법계에서 이사무애법계를 지적함과 동시에 사사무애법계를 말함과도 같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아무 장애 없이 소통하게 되고, 사람과 사람이 아무 장애 없이 소통하게 된다.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하나님은 농부”라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벽관은 학습된 탐진치를 씻어내는 방법이다. 벽관에서 체험하게 되는 심신의 고요함은 탐진치가 일으키는 신체적 동요나 감정과는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대치 또는 대법의 관계에 있다. 


벽관의 효과가 강력해질수록 탐진치가 설 자리는 점차 줄어든다. 그 예가 이완훈련으로 개나 뱀과 같은 동물이나 높거나 좁은 곳과 같은 어떤 장소나 각종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이후의 사고 후유증 등을 치료하는 심리학적 방법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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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2725
9218
2019-02-10
선(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13)

 

(지난 호에 이어)    
불교에 비하여 기독교는 여호와 하나님을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절대적 신으로 믿기 때문에 타력종교라고 볼 수 있지만, 신약에 와서는 집을 떠났던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는가, 돌아가지 않는가 하는 탕자 사신의 결정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게 하는 조건임을 암시하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린 계명의 본의를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에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 자신이 하늘 문을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것은 기독교가 단지 무력하게 하늘만 쳐다보게 하는 종교가 아님을 지적한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과학자들이 인간은 누구나 우주의 법칙에 따르게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불교에서 인간은 누구나 무아로 인연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과 같다. 


기독교에서 보면 하나임의 말씀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밥을 먹어야 살 수 있게 되는 것과 동일하게, 사람이 살아가는데 요구되는 절대적 조건이며 진리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무조건 사랑이라 말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라 말한다. 


절대적 진리에 따라 산다는 것을 타력이라 하거나 자력이라 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자기라는 고집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불교에서 보나, 기독교에서 보나, 심지어 과학에서 보나 매 한 가지다. 


사념처는 사람의 일반적 생각과 판단이 얼마나 허상에 속하는가를 발견하게 하는 동시 자신의 본성에 일치되는 건강하고 슬기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하는 방법이다. 


사념처의 이면에는 연기의 이법, 학습의 원리가 좋은 현상을 일으키게 하거나 좋지 못한 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법칙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이는 우리가 사념처를 개인 자신이나 사회를 변화시키는 과학적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념처에 포함된 연기 또는 학습의 법칙은 동일한 학습 원리에 따라 형성된 부적응 행동을 재학습, 탈학습 또는 소거시키는 방법으로 적응 행동으로 전환하게 하는 과학적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달마 대사가 설한 이입사행과 사념처 그리고 참선(參禪)을 바탕으로 이전의 바람직하지 못했던 경험, 즉 학습에 의하여 형성된 개인적 성격이나 개인이 속한 사회 자체의 변화를 가져 오게 하는 방법에 대하여 이후 다시 논의하게 될 것이다.


18. 벽관의 심리적 기능


 벽관은 사람이 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옹벽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이 옹벽이 된다는 것은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음을 뜻한다. 불교에서 사람의 본심을 거울에 비교하거나 허공에 비교하거나 태양에 비교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벽관은 심신의 절대적 안정을 뜻하기도 하며, 절대적 소극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벽관에서 경험하게 되는 이러한 심리적 태도를 심리학자들은 ‘소극적 주시’(passive attention), ‘무판단적 수용’(non-judgemental acceptance)이라 부른다.


사실 숨을 헤아리게 하는 방법이나 근육이완 훈련을 통하여 심신을 깊은 이완상태에 들어가게 하는 것도 무념을 위한 벽관에 비교된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벽관에서 체득하게 되는 무념은 어떤 자극이나 상황에 조건화된, 두려움이나 혐오감과 같은 부적 감정이 몸과 마음에 일으키는 반응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상호제지의 관계에 있다.


벽관에서와 같은 이완이 유지되면 불안과 같은 감정이 일어날 수 없고, 불안감이 일어나면 이완을 유지할 수 없다. 이러한 상호제지의 원리에 따르면 이완이나 무념의 강도만 증가시킬 수 있게 되면 심신의 안정을 방해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감정적 문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사실 불교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마음 하나에 따라 천국이 되고 지옥이 된다. 벽관은 사물에 조건화된 감정이나 행동을 소거하는 방법이다. 


그 예로서, 이완반응으로, 이완과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각종 공포증을 치료하는 방법이다(Wolpe, 1958). 사실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어떤 작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심신의 안정을 방해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이완은 심리치료에 있어서 만병통치약과 같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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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2602
9218
2019-02-04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12)

 

(지난 호에 이어)    
심리학자들은 대치나 대법에 해당되는 원리를 상호제지(reciprocal inhibition)이라 부른다. 탐진치를 각각 계정혜로 전환하게 하는 것도 대치, 대법에 속한다. 학습 및 행동심리학이 산소와 수소가 결합되면 물이 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화학적 법칙을 학습의 원리로 적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불교에서도 사물이나 인간의 행동에 동일한 물리학적 화학적 법칙이 적용된다고 본다. 


즉 인과의 법칙, 연기의 법칙으로 모든 물리적 심리적 현상을 설명한다. 불교의 각종 수행법을 관찰하고 분석하면 대치 또는 대법이 중심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불교에서 “고른 숨으로 고른 숨을 방해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병을 고친다”고 하거나 분노를 자비심으로 대치하게 한다는 것 등이 그 예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라도 미리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반연(絆緣)’ 도는 ‘수반(隨伴)’하여 일어난다는 뜻의 불교의 연기법과 A(선행자극)-B(행동)-C(결과)라는 공식으로 학습 및 행동변화를 설명하는 행동주의 심리학 사이에 연합주의라는 유사점이 발견된다.

 

17.사념처(四念處)


달마의 사행과 비교되는 것으로 초기불교의 수행법으로 사념처라고 하는 것이 있다. 사념처는 신(身)념처, 수(受)념처, 심(心)념처, 그리고 법(法)념처로서, 신념처는 몸과 연관되어 일어나는 탐욕을 통제하는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고, 수념처는 감각기관들과 마음을 통하여 느끼게 되는 즐거움과 괴로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맛을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감정에 휘말리지 않게 하는 기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심념처는 자신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하는 방법이고, 법념처는 오관과 마음의 대상이 되는 어떤 자극이나 상황이 번뇌를 일으키면 그것은 마음에 번뇌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는 방법이다. 


사념처는 사람이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어떤 신체적 반응이 일어나며, 어떤 감정이 일어나며,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또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스스로 점검하면서 그러한 상황을 달마의 사행에서와 같이, 적절하게 대치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신념처에는 예를 들어 욕정이 일어날 때 이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는 방법, 고른 숨을 쉬게 하는 방법 등 몸을 통제하는 방법과 사람의 몸이란 본래 깨끗지 못한 것이라는 부정관(不淨觀)으로 욕정을 제어하는 심리적 방법, 도심(道心)이 높은 사람을 가까이 하게 하는 사회적 환경을 통하여 육체적 탐욕을 멀리하게 하는 방법까지도 들어있다. 


수념처는 자신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게 되는 자극들과 자기가 지각하는 상황이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거나 무엇에도 집착됨이 없이 맛보게 함으로써 어떤 감정에도 동요하지 않게 하는 훈련이다. 


심념처는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방법이다. 마음에 어떤 번뇌가 있는지, 욕심이 있는지, 분노가 있는지, 더러움이 있는지, 닦음이 있는지, 정함이 있는지를 분석하면서 자신이 법에 일치되는 마음을 가지도록 자신을 변화시켜가게 한다. 


법념처는 곧 일체유심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 방법이다. 누구를 미워하게 된다면 그것은 상대 자체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 미움이 있기 때문이며, 무엇이 자신을 두렵게 만든다면 그것은 두려움이 자신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법념처는 사람의 괴로움은 그가 처한 환경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어떻게 지각하고 해석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달마의 사행이나 사념처는 인지를 바탕으로 한 자기통제법이란 점에 특징이 있다. 


그러나 불교의 치료법은 어디까지나 대치 또는 대법이라는 연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므로 서양의 정신분석이나 의미치료나 인간중심상담과는 다르다. 오히려 불교의 방법은 사람의 생각까지도 학습된 행동과 다름없이 보는 행동주의 심리학에 더욱 가깝다. 


양자 모두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을 이전 행동 경험의 쌓임으로 본다는 점과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 역시 미리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법칙에 따라 생기게도 되고, 변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나쁜 현상을 좋은 현상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자력종교라고 부르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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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2540
9218
2019-01-28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11)

 

(지난 호에 이어)    
사람이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다. 사람은 아담과 이브처럼 지식으로 눈이 열리고 밝아진다. 사람의 눈이 밝아질수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의 본질은 흐려진다. 


사람의 눈에는 지식이 사람을 지혜롭게 할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사람을 오히려 미신과 무지에 빠지게 한다. 사람의 지식이란 자신이 실은 유기체로 비유되는 사회나 우주의 부분이면서도 그것을 보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것이 미신이며 무지며 탐욕과 분노의 원인이 된다. 


사람의 눈이 이미 선악이라는 지식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전제 조건으로 둔다면 십계명과 같이 선으로 악을 통제하도록 하는 계율이나 도덕이 필요하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안다는 지식 자체가 사람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선이나 악이라는 관념 자체까지도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단지 율법만 지키면 된다는 소극적 단계에서 무조건 사랑과 무조건 용서라는 적극적 단계로 옮겨와야 한다. 그것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다. 달마 대사가 도에 들어가는 두 가지 방법으로 설했다고 하는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은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곧 구약의 완성이라고 믿는 이유를 깨닫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입사행에 포함되어 있는 행입(行入)으로서의 사행(四行)은 수행자가 지신의 내적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행동과 감정 그리고 생각을 스스로 통제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입(理入)으로서의 벽관(壁觀)은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사행의 내용은, 첫째 보원행(報怨行)으로, “나는 이전에 알거나 모르거나 남들을 많이 괴롭혀 왔다. 지금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내가 지은 죄의 대가에 불과하다”고 자신에게 말하면서 일체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의 수연행(隨緣行)은, 수행자가 자신에게 “모든 것은 인연의 힘에 의하여 무아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임을 자신에게 말하면서도 좋은 일이 생기거나 언짢은 일이 생기거나 일비일희하지 않는 것으로, 감정적으로 심신을 동요하지 않도록 통제한다. 


셋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으로 “나는 도리(道理)를 알고 있어서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음을 무위(無爲)에 두고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모든 것은 공이라 생각하여 어떤 욕심도 내게는 없다”는 내적 대화로 욕심을 내지 않도록 통제한다. 


그리고 넷째 칭법행(稱法行)은 “법에는 중생이 없다. 중생이란 관념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법에는 자아라는 것이 없다. 자아라는 관념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자신에게 설득시키며, 법 자체가 결코 인색하지 않음과 같이 자신도 온 몸과 정성을 다하여 이웃을 위하여 보시하도록 한다. 


이입으로서의 벽관은 자신의 마음을 옹벽과 같이 긴장시켜 밖으로나 안으로부터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다. 벽관은 가옥의 외벽이 밖으로부터의 바람과 먼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과, 마음에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되어 마음 호수가 명경지수처럼 맑고 고요하게 될 때 이전에 탐진치를 일으켰던 어떤 자극이나 상황도 이제는 어떤 심신의 동요도 없이 바라 볼 수 있게 됨을 뜻한다. 


벽관은 사람이 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동의 벽이 되어 탐진치로 동요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벽관의 심리학적 기능은 탈감화로, 옹벽과 같은 부동의 태도로 탐욕이나 분노로 조건화된 자극이나 상황을 바라보게 되면 그것이 점차 소거된다. 


심리학자들은 각종 공포증 환자들에게 벽관과 비교되는 이완훈련을 시킨 후에 이완된 상태에서 공포증을 일으키는 사물이나 상황에 점차 노출시키는 방법으로 공포증을 치료한다. 공포증을 느끼게 되면 심신이 동요하게 된다. 그것과는 반대로, 이완은 심신의 동요를 저지한다.


이완이 유지되고 있는 한 공포반응은 일어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 쌍 지워 좋지 못한 현상을 좋은 현상으로 전환하게 하는 방법을 대치(對治) 또는 대법(對法)이라 부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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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2456
9218
2019-01-17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9)

 

 

(지난 호에 이어)    


16. 도에 들어가는 두 가지 방법, 달마의 이입사행론 


도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두 가지가 있다. 불교에서 보면 그 두 가지 중 첫째는 경전을 읽으며 경전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공부해 가면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부처님이 가르친  바와 같은 지를 스스로 점검하면서 마침내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방법으로 점오점수에 속한다. 


두 번째 방법은, 첫째의 방법이 “생각으로 생각”을 통제하는 방법임에 비하여 생각 그 자체를 차단해 버림으로써 무념의 세계로 바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 돈오돈수다. 


기독교에서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로 구약과 신약이 있다. 구약의 특징은 십계명을 일자일획도 빠트리지 않고 엄격하게 지키게 하는 율법 중심이다. 


율법이란 금지령으로 그것을 지키지 않거나 못한다면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이 그 안에 수반된다. 그 반면, 신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린 십계명의 본의가 무조건 사랑과 용서에 있음을 깨달아 그 사랑을 실천하게 함에 있다. 


구약과 신약을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의 마음과 그것을 따먹기 전의 마음에 비교한다면 구약은 아담과 이브가 동산으로부터 쫓겨난 이후 그들이 낳은 자손들이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동산으로부터 쫓겨나게 한 바로 그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해당되고, 신약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초심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 모든 것이 번성하도록 관리하며 다스리는 것에 해당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게 각각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그 사물마다 가진 특성과 역할에 대한 존경을 의미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이름을 지어주려 한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그 임무를 맡긴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아담이 그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만족해 하셨다. 에덴 동산의 존재 조건이 바로 그 안 어디에도 해함과 상함이 없었다는 것과 주종이나 선악이나 귀천이라는 관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나 기독교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지식과 논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특징이 있다. 그것은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우주자연의 일부라고 하면 인간 나름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망념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 누구나 매 순간 경험하게 되는 바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자면 그 일이 요구하는 물리학적 화학적 법칙에 일치하도록 자신을 무아로 조율하는 기술을 습득하여야 한다. 자전거를 탈 때도 그렇고, 수영할 때도 그렇다. 


그러므로 무념행을 실천하게 하는 불교는 인간이 우주자연과 공유하게 되어 있는 자연지, 근본지를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지혜의 원천이 된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너희 몸이 곧 성전”이란 가르침 속에는 자신의 생각을 끊어버리게 될 때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예수님의 능력이 예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음을 예수님은 반복해 알게 하셨다. 


예수를 믿고 영접한다는 것은 죽은 후 천국에 간다는 의미보다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바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동안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이 된다.


즉 자기라는 고집을 버릴 때 실현시킬 수 있는, 기적적 능력을 말한다. 실은 21세기 과학기술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주자연의 법칙을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사람은 사람의 생각으로 신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세상에 있는 다양한 우상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창세기는 분명 사람의 형상대로 하나님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이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창세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지고 또한 하나님의 숨으로 생령이 된 인간이 선악과라고 하는 지식의 열매를 따서 먹음으로 그 본성을 잃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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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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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6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9)

 

(지난 호에 이어)
묻고 다니는 것으로는 결코 평상심을 체득할 수 없다.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 평상심은 도망간다. 도란 “시장하면 먹고, 피곤하면 자는데” 있다. 아담과 이브는 “긁어 부스럼”으로 그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에덴동산을 스스로 잃게 만들었다. 


평상심이 곧 도라는 깨달음은 불교를 위시하며 기독교가 인간의 현실적 삶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그 가르침은 과학과도 소통하고 심리학과도 소통한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불교나 기독교가 인간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지를 과학/행동심리학과 연관시켜 분석한다. 


제 3 장: 본심, 평상심의 회복


인간의 눈은 그가 살아오면서 겪게 된 온갖 잡다한 경험에 의하여 조건화 또는 학습되어 어떤 것도 진실한 모습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 “길 앞에 가로 놓인 새끼줄을 보고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은 것이 사람의 눈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나 단어 하나하나에도 이미 미추나 귀천이라는 감정으로 오염되어 있는 것이어서 그 눈 그대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성경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과 말로 해석되어 버린다. 


인간의 눈이 그렇게 오염되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눈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또한 설교를 듣지 않을 수도 없다. 이와 같이, 비록 우리의 눈이나 마음이 신뢰하지 못할 형편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눈이나 마음이 진실을 볼 수 있도록 점차 배워가는 공부가 요구된다. 


누구에게나 스승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스승은 예를 들어 화엄사법계에서 사와 이가 있고, 이사가 결합하여 마침내 사사무애법계로, 우주자연이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를 이룬다는 사실을 머리, 인지적으로 알게 한 후, 최종적으로는 조사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제자들이 그 화엄의 세계에 속한 지체로 기능하도록 생각조차 제거 하도록 촉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지적 영역에서 행동적으로 들어가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이러한 점진적 그리고 위계적 방법은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심리, 교육, 사회 전반에서 적용되는 방법이다. 


특히 학습 및 행동심리학은 자연과학에 바탕을 두면서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행동이 환경변화에 따라 어떻게 학습되는지에 대한 법칙을 발견하여 그 원리를 이상적인 사회건설을 위하여 적용하도록 한다(Skinner, 1953).


종교와 과학은 병행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실은 인간이 우주에 속한 부분이면서도 인간이 주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또한 생각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스스로 만들어 낸 망상이 인간이 본래 소유하게 되어 있는 지혜를 방해하게 된다는 것을 밝혀주는 기독교나 불교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고 숭배하는 것으로 복을 얻으려는 기복 종교와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오히려 기독교와 불교에서 과학을 본다. 그것이 곧 기독교에서 사람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거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 비유하거나 또는 불교에서 인간의 본질을 무아나 공으로 보는데 있다. 


하나님을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바로 그 법과 이(理)로 보면 인간의 일거수일투족도 하나님의 뜻과 법에 따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며 인간의 생사화복 등 그 무엇 한 가지, 하나님 손, 그 법에 달려있지 않은 것은 없다.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라고 보는 것도 과학자들이 인간을 우주의 부분으로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불교에서는 연기의 법칙, 연합의 법칙으로 인간이 우주자연이라는 거대한 그물의 한 자락에 속하는 일부임을 깨닫게 한다는 것도 그것이다. 


그렇게 보면, 과학자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오히려 무지에 속해 있다. 그들은 인간을 우주에 속해 있는 일부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태도는 그들이 발견한 그 원리와는 무관한, 관망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 결과는 그들의 발견, 발명이 그들의 무지와 욕심에 의하여 오히려 인간을 자멸의 길로 이끄는 위험요인이 된다. 만일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발견한 그 법칙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킨다면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쉽게 인간의 몸이 곧 성전이란 예수님의 지적이나 인간의 본질이 공이라는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도인이 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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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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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8
2019-01-10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8)

 

(지난 호에 이어)
평상심은 마음을 놓고 있을 때를 말한다. “억지로 애씀”이 없는 때다. 평상심은 정상(正常)을 뜻한다. 병이 든 상태가 아니라 아주 건강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뜻이다. 아담과 이브의 평상심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수치심이나 두려움을 얻게 되기 전의 자유로웠던 때다.


인간의 마음이 항상 탐욕에 집착되어 있는 것이라면 평상심은 탐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고, 죽음이라는 두려움으로 삶의 순간을 즐길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런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평상심이다. 우리는 항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고 지낸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평상심을 말씀하신다. 성경의 본의가 평상심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었다.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다. 사람이 걱정 근심할 필요가 없다. 성도에 있어서의 평상심은 자신이 성전이 되고 또한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 남아있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을 창조하셨다. 


아담과, 제2의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쌍둥이와 같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아담이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에 비하여 예수님은 아버지의 아들로 집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아담의 마음은 세속에 의하여 오염되었으나 예수님의 마음은 본래 그대로 청정하다. 그는 어린 양의 순박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담이 잃어버린 평상심을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에서 발견하게 된다. 평상심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본심을 떠나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을 “인자(人子)”로 부르시면서 사람과 똑 같이 시장하면 잡수시고, 목이 마를 때 물을 찾으셨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사랑과 인자하심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의 관심은 항상 사람의 일상성에 있었다.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동이 났을 때 더 좋은 포도주로 즐기게 하셨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게 하셨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셨고, 오빠의 죽음에 애달파하는 누이들을 위하여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다. 


그것이 사람마다 가진 평상심이다. 평상심은 인간 누구나 가진 본심으로 자신을 고통과 죽음에서 살리고 또한 이웃을 고통과 죽음에서 살린다. 경전의 본의가 평상심에 있고, 깨달음의 목적이 평상심에 있는 것과 같이 성경의 본의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연유도 인간의 본심, 평상심의 회복에 있다. 


평상심의 회복이야 말로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고 낙원을 잃어버린 아담과 이브에게 낙원을 되찾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또한 죽는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를 믿는다고 그것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법이기 때문이다. 


생로병사를 자타나 내외가 따로 있는 인간의 생각으로 보면 절망적인 것이지만 인간 사회나 우주를 일즉다, 다즉일의 무한한 고리로 보게 되면, 개인의 죽음은 우리 몸의 신진대사와 같은, 새로운 창조와 생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구나 영생을 얻는다. 


죽으면서도 죽지 않는 지혜를 우린 거기서 얻을 수 있다. 평상심은 안심을 뜻한다. 눈물과 한숨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평상심은 질투와 시기로부터의 해방이며, 탐욕으로부터 해방이다. 


그는 자기의 몸이 곧 성전임을 깨닫고 안심하게 되고, 자신의 몸이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임을 깨닫고 안심한다. 그의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이, 이전 행동 경험에 의한 흔적이 남지 않아서 오고 가는 것에 자유롭다.


그는 “속옷을 달라면 겉옷마저 벗어주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도 갈 마음”으로 준비되어 있다. 평상심이 곧 도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 억지로 애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육체에 집착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육체를 학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자기의 몸, 즉 사(事)와 하나님의 말씀, 즉 이(理)가 무애법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고”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사무애법계에서 춤추며 산다. 


이것이 평상심으로 사는 세계이자, 천국에서의 삶이다. 평상심이 도임을 깨달은 조사는 도가 무엇이며,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에게 “차 한 잔 마시기를” 권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말에서 도가 곧 평상심임을 “문득” 깨닫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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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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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0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7)

 

 

(지난 호에 이어)
예수님이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도 공안이며, 병든 사람을 고친 것도 공안이며,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게 하셨다고 하는 것도 공안이며, 죽은 자를 살린 것도 공안이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한 것도 공안이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도 모두 사랑의 공안이다. 


만일 누가 예수님에게 왜 하나님이 태초에 선악과를 에덴동산 한복판에 심어 놓아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게 했는가를 묻는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대답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가나안 잔치 집에서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시장하여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있는가 하고 찾아보다가 없자, 잎만 무성한 그 나무를 저주하여 시들어 말라 죽게 하였다. 그 때는 무화과가 열릴 때가 아니었음을 성경은 지적한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장님이 된 것인가를 제자가 묻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장님이 되게 하실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흙에 자신의 침을 섞어 장님의 눈에 발라 그의 눈을 뜨게도 하셨다. 그 모두가 사람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이다.


화두는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언행에 대하여서도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야 한다. “태어나기 전에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라는 화두도 있고, “한 손으로 치는 벼락과 같은 박수”라는 화두도 있다. 


이러한 수수께끼와 같은 화두를 의심하고 의심하다 보면 마치 “밤송이를 통째 삼킨 것”과 같은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갈등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다가 마침내 생각과 문자를 떠난 그 본의가 이심전심으로, “아! 그것”이라는 자기만이 깨닫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역사”라 이름한다. 


그러나 성령은 밖으로부터가 아닌,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온다. 인간의 본래 모습이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숨, 성령으로 생명을 얻었다. 기독교는 선악이라는 인간의 지식으로 집을 떠나게 된 아담과 이브가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과 같다. 에덴은 인간이 세상에서 배워 익힌 분별심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낙원과 낙원 아닌 것이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가 낙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 명령은 천국에서 지킬 명령이 아니고, 바로 지금-여기서 지켜야 할 명령이다.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나의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지금 여기라면 이 곳 이외 다른 천국이 있겠는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 땅과 천국이 따로 있지만 낙원을 잃게 한 생각만 떠나면 여기가 바라던 그 천국이 된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 지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 기능하고 있다면 그 위에 또 천국을 바랄 것인가? 예수님도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장차 따로 올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이 천국으로 변해있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임은 분명하다.


"달마가 동쪽에서 온 연유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응답한 선사, 그것은 전혀 시비분별이 없고 인색함이 없는 잣나무, 법에 일치되는 본심을 무언의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이 “네 몸이 곧 성전”이라 하시거나 “네가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고 하시는 그 무언의 손가락은 어디로 향해 있으며, 마침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가리키는 그 손가락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나의 살을 참 음식으로 먹고, 나의 피를 참 음료로 마시라”고 하는 공안보다 더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공안이 있을 수 있는가?


15. 평상심의 도


선에서는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라 한다. 평상심은 말 그대로 일상적인 마음을 말한다. 탕자에 있어서 평상심은 무엇인가? 열등감이나 무력감에 의하여 항상 움츠리고 있는 사람의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항상 그런척하며 허세를 부리고 사는 사람의 평상심이란 어느 때를 두고 말하는 것인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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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2075
9218
2018-12-18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6)

 

(지난 호에 이어)
우리가 성경을 불립문자, 교외별전으로 보게 되면 인간의 생각 또는 소위 이성이나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성경의 본의를 깨닫는데 아무런 방해를 주지 않는다. 


성경의 본의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방법과는 달리, 예수님은 십계명을 일자 일획도 빠트림 없이 읽고 실행하는 방법을 “이웃사랑”에 두셨다. 


인간의 지각과 판단이 망상에 속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성경을 비합리적이니 비과학적이니 판단하는 것 자체도 무의미하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인간 그대로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자연의 법칙에 일치하게 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창세기 역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차 한 잔 들게!”


조주 선사를 어떤 수행자 두 사람이 찾아와서 절을 한 뒤에 그 중 한 사람이, “경전의 대의가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선사는 “자네 이 절에 온 적이 있는가?” 묻고는 그가 “없다”고 대답하자, “차 한 잔 들게!” 했다.


그 다음 사람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이번에도 그에게 여기 온 적이 있는가를 묻고, “한 번 있다”고 대답하자, “자네 차 한 잔 들게!”라 했다. 


이 말을 엿듣고 있던 이 절의 원주(院主)가 “스님은 어찌하여 이 절에 처음 왔다는 사람이나 이전에 한 번 온 적이 있다는 사람에게도 “차 한 잔 하라“는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가를 묻자, 선사는 “원주야!” 부른 뒤에 “너도 차 한 잔 해라”고 하셨다. 


이것이 조주의 ‘끽다거(喫茶去!)’라고 하는 유명한 화두다. 화두란 조사(祖師)들의 언행에서 선택된 것으로 1,700개나 있다고 한다. 그 중에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없다(無)!”라고 대답했다거나, “달마가 동쪽으로 온 연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제자에게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어떤 조사가 “부처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제자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몽둥이로 친 것도 화두에 포함되어 있다. 조사들은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이 사람이면 누구나 본심으로 가진 지혜를 방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나 논리를 버린 사람이다.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언행은 제자들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어떤 의도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사물사건에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시비분별이라고 하는, 따지고 비교하고 성내고 마침내 서로 적이 되게 하는 그런 마음을 떠나버린, 각자(覺者)의 언행이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의 언행과 같을 수는 없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 그들은 소동파가 우람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소리에 “번쩍” 자신의 본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사람과 같이 그들은 화엄, 사사무애법계에 들어간 사람이다. 


“개에게 불성이 있는지, 달마가 중국으로 온 연유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인지의 영역을 이미 넘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개와 같은 동물과도 한 몸이 되어있고, 잣나무와 같은 식물과도 한 몸이 되어 있다. 모든 것이 그들 자신의 일부분이고, 그들 자신이 모든 것의 부분이다. 그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자비와 사랑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들의 눈은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다. 그들의 눈에는 먼 길을 걸어 찾아 온 수행자들이 그들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된다. 


“차 한 잔 들게!”는 자비로운 아버지가 먼 길을 걸어 집에 온 아들에게 한 말이다.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공안은 정부의 법령과 같다. 화두로 선택된 조사들의 모든 언행은 한 몸에 붙어 있는 손과 발이 서로 소통하며, 공감하며, 배려하며, 희생하는 것과 같은, 사랑과 자비가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법칙 또는 공안으로 들어가 있다. 
깨달음이란 사사무애법계다.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이 천지만물이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유기체의 공안이 바로 사랑이다. 사람 하나하나가 우주이고 우주의 지체다. 기독교에서 보면 예수님의 언행 전체가 화두이며 공안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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