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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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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칼럼

심리학자, 토론토대학교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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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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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8
2018-09-16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10)

 

 

 (지난 호에 이어)
사람의 학습된 눈은 “파블로프의 개” 처럼 종소리를 종소리로 듣지도 못하고, 음식을 음식으로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사람은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하고, 피곤해도 잘 수 없게 되었다.” 종소리는 이제 개인의 이전 경험에 따라 불안이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자극으로 변하게 되기도 했고, 탐욕을 일으키는 자극으로 변하기도 했다. 


모든 형상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전체가 사람의 탐심과 분노 그리고 무지를 일으키는 자극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의 몸과 맘에 붙어 있는 오감이 전부 그렇게 오염되고 말았다. 온 몸이 “도적의 소굴”이 되었다. 


사람이 사회를 통하여 배워 익힌 일반적인 상식으로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다. 선악이라는 관념조차 사람에게 없다면 그것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세상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눈이 밝아진 아담과 이브를 에덴으로부터 쫓아내었는가?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이 깨달아야 할 화두(話頭)다.

 

5. 공의 지혜 


사람은 누구나 서로 용납되지 않는 두 가지 세계에 양 발을 걸쳐놓고 불안한 가운데서 살고 있다. 첫째의 세상은 자기가 만들어 낸 세계다. 그 다음 세계는 실제의 세계,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쉬어야 하는” 현실 세계다. 


전자의 경우는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실은 귀나 발이 한 몸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나는 몸에 속하지 않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망상과 실제 간의 차이는 결국 사람을 병들어 죽게 한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 하거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고 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처럼 자신이 지금 자기의 본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도적’과 같은 것임을 알고 예수님이 채찍을 만들어 성전을 더럽히고 있는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것처럼 몰아내고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이란 ‘빈 것’이다. 한 몸에 속한 지체와 지체 그리고 지체와 전체의 관계가 공, 즉 ‘빈 것’ 이다. 지체와 지체 간에 경계가 있거나 분별이 있다면 지체들로 한 몸을 이룬 유기체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이 속한 우주자연이나 사회나 교회를 유기체로 보면 천지만물과 더불어 인간의 본질 역시 공, ‘빈 것’이어야 한다.


공은 ‘빈 것’으로 무한한 지혜를 그 안에 갖추고 있다. 태양과 지구의 본질이 공이기 때문에 우주자연의 법칙에 따라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자전하면서 돌고, 태양은 그 밝고 따뜻한 열로 지상의 생물들을 생육한다. 


구름의 본질도 공으로 바람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물의 본질도 공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인간의 본심 역시 ‘빈 것’으로 인연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공이란 인간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다.


공이란 공기가 찬 곳에서 더운 곳으로 움직이거나 산소와 수소가 만나 “물”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물리적 화학적 법칙이지만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법칙이다. 


인간의 몸과 몸에 붙어 있는 모든 감각기관들이 물질에 있어서 동일한 물리적 화학적 법칙에 따라 작용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의 허망한 생각으로 인간은 그러한 우주자연의 속성 또는 통제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이나 망상은 귀나 발이 실은 한 몸에 붙어있으면서도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에 해당되는 자해와 자살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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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0433
9218
2018-09-12
禪으로 성경을 읽다(9)-인간의 본질

 

 (지난 호에 이어)
다시 말하면 어떤 영역에서 보다 앞서, 인간 나름으로 만들어낸 신념이나 지식이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창조주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된 인간의 본질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기독교에서 이 지식의 문제에 대하여 직접 논의하거나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화합하는 길이며 진리로 직접 언급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물론 기독교는 구약시대로부터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이유를 “불복종”과 “원죄”에 무게를 두는 바람에 정작 인간이 지금도 따먹고 있는 선악과가 가진 독성에 대하여서는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대로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되면 인간의 생각은 차단될 수 밖에 없다.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는 한 몸으로 소통하게 된다. 사람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을 참 음식으로 먹고, 자신의 피를 참 음료로 마시라고 하신 것도 인간이 예수님과 한 몸이며, 예수님이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인 것처럼 사람 역시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성도란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진정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성찬의 본의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지체가 되는 데 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믿는다고 말만하면 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도 견성에 있고, 불교의 궁극적 목적도 견성에 있다. 견성이란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 나타날 창조주의 형상과 지혜를 그대로 닮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것은 “억지로 애쓴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간교한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기왓장을 간다고 해서 거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갈아야 하는지는 예수님도 가르쳐주고 부처님도 가르쳐 준다.


“참 좋은 이웃이 되는 것” 그것 이상 인간을 고통에서 구하는 방법은 없다. 우리가 “참 좋은 사마리아 인”에서 얻는 단서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인”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방법이 인간이 만든 명칭이나 제동에 한정되어 있음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인간의 몸이 곧 성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 자신의 몸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어리석은 생각을 몰아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십계명의 완성임을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각과 판단을 넘어선 크신 분이다.


예수님의 모습은 제사장이 아니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닮아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봤을 때는 예수가 그들이 천대하는 사마리아 사람 또는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이방인으로 보였다. 사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다. 예수님의 모습에는 선악이라는 관념도 없었으므로 누구나 그의 사랑과 자비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예수 자신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 자신의 본심을 보면 하나님을 본 것과 다르지 않음을 역시 의미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자신의 생각에 묶여 있는 그 족쇄를 푸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자신이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눈으로는 예수님의 언행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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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68350
9218
2018-08-30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9)

 

 

 (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서 몸소 보이신 그 행적에 일치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본다면 비록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처럼 좋은 이웃이 되는 사람은 오히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큰 칭찬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란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도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를 물어 온 청년에게 “나를 믿어라”는 말씀보다 “가서 너의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이웃에게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조건은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 즉 ‘이웃사랑’에 있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에 있다. ‘아담과 이브가 왜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을 지적한다. 우리가 이방인이니 유대인이니 기독교인이니 불교신도니 동양인이니 서양인이니 흑인이니 백인이니 하는 것이나 “하나님”이니 “천주님”이니 “예수님”이니 하는 것도 인간의 생각으로 임의로 붙인 명칭에 불과하다. 


이러한 명칭이나 경계에 집착되어 있는 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에 의하여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밝아진” 그 눈, 그리고 그들이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게 된 바로 그 “선과 악을 알게 된 그 지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관계로 아직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 말씀하시고, 또한 사람을 자신의 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몸이 성전이 되고, 사람의 몸이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본심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면 예수님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제사장이나 래위 사람보다 더 온전한 사람으로 칭찬하신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는, 그 본의 역시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온전한 신앙에는 명칭에 구애 받지 않음을 뜻한다. 하나님은 밖이 아니라 내면을 보시고, 잎이 아니라 열매를 보고 심판하신다. 


창세기로부터 인간의 지식을 에덴을 잃고 또한 고통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원인으로 지목하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성전이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 비유하시거나 바울 사도가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라는 말씀으로, 지금 우리가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 일깨워주고 있지만 정작 그렇게 자신을 버리는 방법에 대하여 교회는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독교에서처럼 인간이 속한 사회나 우주자연을 유기체 또는 거대한 “그물(網)”로 보고 있는 불교는 수행의 궁극적 목적을 견성(見性), 즉 자신의 본성을 “지식의 어두운 그림자”의 방해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것에 두고 용맹 정진한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곧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 되는 것이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서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 즉 무아(無我) 또는 공(空)의 지혜를 회복하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을 학습의 결과로 보는 심리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담과 이브가 “지식의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치마를 해 입었다는 것이나 하나님이 두려워 숨었다고 하는 행동의 변화는 탈학습 또는 소거 또는 치료의 대상이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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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68285
9218
2018-08-26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8)

 

 

 (지난 호에 이어)


4. 누가 참 이웃인가? 


예수님은 불한당을 만나 죽게 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길을 갔던 제사장과 래위 사람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을 비교하시면서 누가 “좋은 이웃”인가를 물으신다. 


제사장이나 래위 사람의 도덕이나 윤리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은 보통 사람보다 휠씬 높았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학식이 높았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선악에 관한 분명한 판단과 십계명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으로 존경을 받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무엇이 선이며 악인지를 가슴으로가 아닌, 지식으로 배운 사람들의 결함은 선행의 대가로 무엇인가를 챙기려는 마음을 버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것이 지식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라는 질문으로 자신을 설득시켜야 하고 남을 설득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동에는 위선이 있고, 계산이 있다. 그들은 대상에 따라 베풀기도 하고, 대상에 따라 베풀지 않기도 한다. 


지식으로 배워서가 아닌, 인간의 본심으로 나오는 무조건 선행이 있다. 그것이 곧 바울 사도가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라고 하시면서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와 지체가 서로를 위하여 어떻게 수고하고 희생하는지를 보라고 하신 것과 같은,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라는 관념조차 초월한 선행이다. 


이러한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넘어선 도덕과 윤리를 우리는 또한 “보살은 보살이면서도 보살이라는 관념이 없고, 보살은 보시하면서도 보시한다는 관념이 없다”는 불교의 금강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선행 아닌, 선행은 부모의 자녀에 대한 무조건 사랑에서 그 그림자를 볼 수 있다. 교회나 사회나 우주를 사람의 몸과 같은 유기체로 보게 되면 그런 선행이 인간의 본질로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예수님이 칭찬한 사마리아인과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린 제사장과 래위 사람의 차이에서 우린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된다는 생각으로 계명을 지키려는 사람과 십계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실은 십계명의 본의에 일치되는 행동을 한 사람의 예를 볼 수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처럼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도 아니며 자기들처럼 하나님의 계명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로, 상대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사장과 그 천한 사마리아 사람을 비교하여 사마리아 사람을 “참 좋은 이웃”으로 칭찬하신 것이다. 


기독교에서 특히 예수님에 의하여 “참 이웃”이라 칭찬을 받은 사람이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죽어도 다시 부활할 사람이며, 천당에 갈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 의문이 생긴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처럼 그가 유대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유대 사람들처럼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가 진정 “좋은 이웃”이라면 기독교에서도 구원을 받고 천당에 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사실 바울 사도가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주었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도들이 있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비록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섬겨왔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길 줄도 몰랐고, 그들처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도 않았지만 그도 유대인으로 선행을 한 사람과 동일하게 그리스도교 안에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근거를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찾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시면서 자신을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이 말씀에 의한다면 예수를 모르거나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이 들린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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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67179
9218
2018-08-17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7)

 

 

 (지난 호에 이어)
인간의 마음은 이러한 탐진치로 인간의 몸을 오염시키고 있다. 인간의 감각이나 인간의 몸뚱이 전체가 그러한 욕정이나 질투나 미움으로 조건화되어 있고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오염되어 있다. 


이렇게 오염된 몸과 마음으로서는 교회나 사회나 우주라는 유기체의 부분으로서의 인간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수는 없다. 인간은 그렇게 학습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된 그 본심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게 되었다. 


사람은 새끼줄을 보고서도 뱀을 본 것처럼 적대심을 가지고 돌을 들어 새끼줄을 치려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인종차별도 거기서 오게 되고, 사회의 온갖 부조리도 거기서 오게 된다. 비록 뱀을 실제로 본 경우라도 뱀을 돌로 쳐 죽이려는 적의를 품을 일은 아니다.


뱀에 대한 두려움 역시 학습의 결과다. 뱀에게 물려 본 일이 있어서 뱀을 두렵게 생각하게 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모방하고 남의 말을 듣기만 해도 그렇게 눈이 밝아져 스스로 이 아름다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


학습의 이면에는 연합의 법칙이 있다. 사람이나 동물은 두 가지 사건이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근접된 상태에서 일어나면 그 두 가지 사이에 어떤 인과의 관계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된다. 개가 종소리가 날 때마다 음식물이 들어오면 종소리를 음식물이 들어 올 것이란 신호로 듣고 타액을 분비하게 되는 것도 그러한 연합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또한 자연적 상황에서는 그러한 기대가 장차 당면하게 될 상황에 대치하는 방법이 된다. 천둥소리가 나면 비가 올 것이라고 하는 기대로 대처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던 중 우연히 춤을 추던 것이 비와 겹쳐지면 춤과 비가 실은 무관한 것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는 것과 같은 미신으로 굳어지게 된다.


사람은 특히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보고 그것에 어떤 의미를 가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지금의 사회와 같은 인공적인 것이 되면 마치 하늘을 나르던 새가 높은 빌딩의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은, 새가 가진 본성과 인공적 환경 간의 어긋남에서 오는 불행이 인간에게도 쉽게 일어난다. 심리학자들도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는 문명사회에서 흔하게 보게 되는 불안과 같은 신경증의 정신적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우리의 선과 악에 대한 관념 역시 학습의 결과다.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선이라는 이름 하에 온갖 비극이 일어났고 또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민족과 민족 간의 끝없는 분쟁, 종교와 종교 간의 전쟁, 지금도 세계 각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폭테러와 같은 것이 선이라는 미명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본성이 파괴적인 것이어서가 아니라 마치 “새끼줄을 보고도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면서 새끼줄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것”과 같은 ‘학습된’ 인간의 망심에서 온다.


학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개가 종소리에 침을 흘리게 되는 것이나 우리가 “김치”라는 말만 들어도 입에 침이 고이게 되는 것과 같은, “종소리”나 “김치”라는 말, 즉 본래 침을 흘리게 할 자극이 아니었던 것이 음식물과 연합됨으로써 그것이 침을 흘리게 하는 자극으로 변하게 되는 종류의 학습이 있고, 둘째는 일단 어떤 자극이 얻고 싶어하는 것이나 피하고 싶은 자극으로 변하게 되면 그것을 취하거나 피하는 도구로서의 행동이 또한 학습된다. 심리학에서는 전자의 경우를 “고전적 조건형성”이라 부르고 후자의 경우를 “도구적 조건형성”이라 부른다. 


사실 인간의 대부분의 감정이나 행동은 그러한 두 가지 종류의 학습결과에 불과하다. 사람은 쉽게 인간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피부색이나 그가 입고 있는 옷이나 그가 태어난 가문이나 그가 속한 사회적 계급에 의하여 친구 아니면 적 또는 선악이나 귀천이나 미추로 판단한다. 거기 따라 그 사람을 대하는 행동 역시 달라진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사람의 호의와 인정을 받고자 하는 기대로 욕심을 내며, 시기하고 질투하며, 자신이 배운바 그대로 허세를 부리려고 하다가 절망하기도 하며 스스로 생명을 잃게도 된다. 인간은 그러한 “학습의 그림자”에 의하여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없다. 인간의 학습의 결과로 본성을 잃은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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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67109
9218
2018-08-12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6)

 

 

 (지난 호에 이어)


3. 마음이란 학습된 것 


예수님은 또한 “너희 몸이 곧 성전”이란 말씀으로 사람의 몸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법에 일치하게끔 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장사꾼들을 쫓아내시면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부활로 비유하셨다.


인간의 몸이 곧 성전이라 하는 것은 아담의 본래 모습, 인간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나타낸다. 인간의 몸은 창조주의 뜻과 법, 우주자연의 법칙을 따르게 되어 있다.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이 물리적 법칙, 화학적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은 어떤 현상, 사(事) 뒤에는 항상 그런 현상과 병행되는 법칙, 이(理)가 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와 같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바람이 불고 물결이 치는 것과 같은 현상뿐이다. 그러나 성경이 보라는 것도 현상 이면의 법이다. 우리는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는 말씀에서도 흙으로 된 인간의 몸, 사와 하나님의 뜻, 이를 본다.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며 기도하는 집인데도 그 안으로 도적과 같은 마음이 도대체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을까. 창세기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말하고, 불교에서는 이전 행동 경험의 쌓임, 즉 온(蘊)이나 모임, 집(集)이라 말한다. 


자연과학에 속하는 학습심리학 역시 불교가 이전 행동 경험의 쌓임으로 보는 것과 동일하게, 이전 경험을 통한 “학습의 결과”로 본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어 무화과 나무 잎을 따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거나 하나님을 바로 보기 두려워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하는, 이전에 없었던 행동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 역시 “경험을 통한 행동의 변화”라고 하는 학습의 범주에 속한다. 


학습의 사례로서 유명한 것이 “파블로프(Pavlov)의 개”이다. 러시아의 심리학자 파블로프는 개에게 종소리와 음식물을 동시에 반복 제공한 결과로, 이전에는 종소리에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개가 이제는 종소리만 나도 음식물이 입에 들어 온 것과 같이 침을 흘리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것을 조건반사라 불렀다. 


이렇게 조건화되고 학습된 현상은 사람의 행동 대부분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김치!”라는 말만 들어도 침이 입안에 고이게 되는 현상에서부터 사물의 모양이나 색깔, 귀로 듣게 되는 소리나 어휘, 코를 통하여 들어오는 온갖 냄새, 혀로 맛보게 되는 온갖 자극, 그리고 피부로 느끼게 되는 온갖 감촉들이 개인이 이전에 경험한 사건들과 연관되어 어떤 기대를 일으키고 거기 따라 온갖 감정/생리적 반응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학습이란 인간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변하여 가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방법으로 필요한 것이다(예로, 종소리와 음식물이 항상 동시에 오는 것이라면 개가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리게 되는 것은 장차 들어오게 될 음식물을 쉽게 먹고 소화시킬 수 있는 적응행동이 된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종소리가 나도 음식물이 따라 나오지 않게 된 경우에도 계속 종소리에 침을 흘리게 되면 개는 이전 학습의 흔적에 의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오히려 어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학습과 더불어 환경변화에 따라 탈학습 또는 소거(消去)가 요구된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개인의 인격이나 성격을 이루는 그 대부분이 이전 경험이 쌓인 것이 굳어진 것으로 어떤 새로운 것도 새로운 것으로 경험할 수 없게 방해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학습의 결과를, “어스름한 밤에 길 앞에 놓인 새끼줄을 보고도 뱀을 보았다”고 놀라거나 고집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말하기도 하고, 원효 대사가 도를 얻기 위하여 먼 길을 가다가 간밤에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에 담겼던 빗물이었음을 아침이 되어 발견한 순간 구토증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일체유심조!“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과도 연관된다. 탐욕과 분노 그리고 미신과 같은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학습의 결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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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66985
9218
2018-07-30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5)

 

  

 (지난 호에 이어)
기독교에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 하거나 과학자들이 인간을 우주에 속한 부분이라 하거나 또는 불교에서 보살이 거짓된 생각을 버리고 가장 높은 깨달음을 향하여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은 모두 한 몸에 속한 지체와 지체가 서로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라는 관념도 없이 베풀게 되어있는 것이 곧 인간의 본질임을 지적한다. 


기독교나 불교 그리고 과학에서까지도 인간의 마음을 거짓으로 보는 이유는 바울 사도가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 선언하신 것처럼 인간은 실제 유기체로 비유될 수 밖에 없는 교회나 사회 그리고 우주자연의 부분으로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을 전체와는 무관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하나님은 농부”라는 비유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라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고, 불교에서는 우주를 거대한 하나의 거물, 망(網)으로 본다. 과학자들 역시 우주를 인간의 몸과 같은 것으로 본다. 인간의 몸을 소우주라고 보는 것이 그런 것이다.


즉 우주자연은 인간의 몸이 오장육부라는 지체로 구성되어 있고, 오장육부 역시 무진장의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세포 역시 유전인자와 같은 하위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이 우주에 속한 미세한 먼지 한 알에서부터 은하계를 위시한 우주 자체가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라는 동일한 형태로 무한히 나누어 질수도, 무한히 더하여 질 수도 있는 유기체로 통합되어 있다. 과학자들은 식물의 씨앗 하나하나에도 그 안에 우주를 품고 있다고 본다. 


사람이 속한 사회나 우주를 유기체로 보게 되면 인간이 지각하고 판단하는 그런 자신이나 사회 그리고 우주는 진실한 모습의 자신도 아니며 사회나 우주도 아니다. 인간이 지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모든 것이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나 귀천이나 미추로 분리된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에서나 불교에서 말하는 욕심이 생기고 죄가 생기고 또한 고통과 죽음이 생기게 된다. 


창세기에는 비록 인간이 뱀의 유혹을 받았다고 하기는 하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생각을 일으켜 자신들도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 선악과”를 따먹은 탓에 에덴 동산을 잃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불교에서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마음은 본래 고요하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과학자 아인슈타인 역시 “인간 나름으로 경험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생긴 망상이 인간을 전체로부터 고립시키게 되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창조주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본질이 창조주 하나님과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인간은 누구나 우주라는 유기체의 부분으로서 우주와 동일한 지혜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지혜를 기독교에서나 불교에서는 동일하게 빛이라 말하며 그것이 곧 인간을 무지에서 구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다. 


인간이 만일 우주자연과 한 몸으로 소통할 수 있는 지혜가 없다면 인간은 지상 위에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그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주라는 둥치 또는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 숨을 쉬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생긴 마음이란 곧 지금 우리가 가진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비록 에덴 동산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해도 에덴을 낙원으로 향유할 수 없게 만드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이란 바울 사도가 지적한 것처럼 성도가 실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이면서도 자신을 지체로 보지 못하고 또한 자신과 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다른 지체를 보고도 “나는 네가 소용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마음이다. 


바울 사도가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 자타라는 관념도 없이 서로를 위하여 어떻게 하고 작용하는가를 묘사한 그것이 사회라는 유기체, 우주라는 유기체에 속하여 있는 인간의 본질이다. 불교에서도 그것을 말하고 과학에서도 그것을 말한다. 이러한 공통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간 사회나 우주를 유기체로 보면 그 속의 일즉다, 다즉일의 일부인 인간의 본질이 어느 측면에서 보나 그렇지 않을 수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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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66899
9218
2018-07-23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4)

  

 (지난 호에 이어)
특히 기독교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다는 것은, 창조설을 거부하는 과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는 경우라도 기독교가 일원론(一元論)이란 관념에서 그들의 인간관, 우주관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자연과학이 공통적으로 인간이 속한 사회나 우주를 인간의 몸과 같은, 유기체(有機體)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세 영역이 통합될 수 있다는 여지를 보며 또한 그러한 유기체관이 기독교나 불교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인류의 보편타당한 도덕관과 윤리관이 될 것임을 깨닫게 된다. 


2. 유기체로 비유되는 사회와 우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 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았다 할지라도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님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것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었으니 만일 한 지체뿐이라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고린도전서 12장 12-27 -

 

“인간이란 우리들이 소위 ‘우주’라고 부르는 총체의 일부로서 시공간적으로 제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나름으로 경험하고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게 됨으로써 스스로를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의식상의 시각적 망상을 가지게 된다. 이 망상이 자신의 개인적 욕망으로 눈을 어둡게 하고 주위에 가까이 있는 몇 사람에게만 관심을 가지도록 구속하는 감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들이 성취해야 할 과제는 열정의 폭을 넓혀 살아 있는 모든 창조물과 자연 전체의 아름다움을 가슴 가득히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아인슈타인 –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모든 거짓된 생각을 버리고 가장 높은 깨달음을 향하여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드러난 것에 머물러 마음을 일으켜서도 아니 되며 드러나지 않은 것에 마음을 일으켜서도 아니 된다. 마땅히 머무름의 대상이 없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만약 머무름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머무름이 된다. 그러므로 여래가, 보살의 마음이 대상에 머물러 베풀면 아니 된다고 말하였다. 수보리여, 보살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이와 같이 베풀어야 한다. 여래가 말한 모든 거짓된 생각은, 실제가 있는 존재로서의 생각이 아니며, 모든 중생 또한 실체가 있는 존재로서의 중생이 아니다. 수보리여, 여래는 참된 말을 한다. 거짓된 말을 하지 아니 한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것은 참됨도 없고, 거짓됨도 없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의 마음이 대상에 머물러 베푼다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보살의 마음이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베푼다면, 마치 사람에게 두 눈이 있어 햇빛이 밝게 비칠 때에 온갖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 금강반야바라밀 중에서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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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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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8
2018-07-16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3)

 

 (지난 호에 이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다는 사건에 뒤지지 않는 사건, 즉 아담과 이브가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이유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단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으로 덮여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낙원의 이유를 기독교에서 보아 온 것처럼 단지 “불복종”에 무게를 두게 되면, 하나님이 아담/인간을 하나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 자신의 숨을 그의 코 안에 불어 넣어 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잊게 되고 인간의 본성이 본래 악한 것으로 단정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교회에서나 유대-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둔 서양에서의 인간관은 성악설이다. 그 예가 프로이드(Freud)의 정신분석학이다. 그러나 우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면서 인간을 탕자에 비유하게 되고 비록 탕자가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으나 그가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아버지의 아들로서 특권을 그대로 회복할 수 있으리만큼 그의 본성이 선함 그대로임을 지적하셨다. 


인간의 본성을 악한 것으로 보는가, 아니면 선한 것으로 보는가에 따라 신행의 목표와 방법 역시 크게 달라진다. 본성을 악한 것으로 보게 되면, 본성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창세기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을 닮아있다고 보게 되면 구원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즉 전자가 숙명론인데 비하여 후자는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 후자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살아계신 아버지로 믿고 영접하면 된다. 구약성서의 내용과 신약성서의 내용이 여기서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여기서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기 때문에 처형을 당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불교사상의 핵심은 바로 아담과 이브가 왜 선악이라는 지식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 때문에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또한 인간의 “몸이 곧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그 예수님의 본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장사꾼들을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쫓아내면서 자신의 죽음을 성전의 재건으로 비유하신 그 뜻 역시 깨닫게 한다. 


자신의 본심을 되찾는 것, 견성이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이 되는 것과 같이 기독교 신행의 목적 역시 견성에 있다. 기독교의 목적을 “거듭 남”이라 하기도 하고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비교하기도 한다. 견성은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적 목적이고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불교는 성경에서 찾기 어려운 것으로, 인간의 망상을 제거해 버리는 구체적 방법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한 가지 목적은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불교 간에 공통점을 발견함으로써 서양과 동양을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양자가 인류가 지금 처해있는 비극적 상황을 해결할 수 있으리란 희망도 그 속에 있다. 특히 지금을 이민의 시대 또는 글로벌시대라 부른다. 인종과 종교 간의 갈등은 인류멸망의 위협이 되고 있다. 


이 책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독교와 불교가 문제로 삼는 인간의 마음 또는 지식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발달되는지를 학습이론(Pavlov, 1928; Skinner, 1950)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인간이 우주와 공유하고 있는 본심을 회복하게 될 때 얻을 수 있는, 치유와 사랑 그리고 지혜에 관하여 논의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은 바 되지 않은 것은 없고 누구나 하나님의 숨, 성령으로 생명을 얻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진리, 그 본질이 문화권에 따라 각각 다른 말과 문자로 표현되었다 할지라도 그 핵심에 있어서는 다를 수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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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66721
9218
2018-07-09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2)

 

 (지난 호에 이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질이 인간 나름으로 경험하게 되고, 느끼게 되고, 또한 판단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자신이 실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망상을 일으키게 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아들로서의 특권을 잃고 말았다. 


아담이 낙원을 잃어버린 이유를 창세기가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망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교에서 인간 고통의 원인을 분별심에서 찾고 있다는 것과 더 나아가서 과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지각과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까지도 기독교의 우주관과 인간관에 일치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불교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하는 깨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말과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 안에는 아직 아담/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으며 어떤 생각과 방법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는지 까지도 마치 구약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을 보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가 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만들어 낸 말과 문자와 병행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과 문자로 전하되 그 안에 따로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이것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성령의 두루마기” 또는 “성령의 감화”를 강조한다. 


“탕자”란 이미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그가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가 그를 종의 한 사람으로라도 받아드리고 먹여주시지 않을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귀향의 여정에 우리는 탕자가 두 가지 심리적 경험을 하게 될 것이란 것을 예견할 수 있다. 


첫째는 자기가 집을 떠나기로 한 그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그 때의 어리석었던 마음을 후회하며 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결심과 다짐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가 정작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또한 아버지가 돌아 온 아들을 위하여 베푼 잔치를 보면서 이전에 아버지가 자신을 종으로라도 받아주기를 원했던 그 마음까지도 완전히 사라지게 된, 아들로서의 특권을 다시 되찾았을 때의 기쁨과 감격이다. 


탕자가 귀가의 여정을 통하여 경험할만한 이 두 가지 심리적 과정을 우리는 불교를 중국에 처음으로 전한 달마 대사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입(二入)이란 도(道)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첫째의 행입(行入)은 “선한 생각으로, 악한 생각”을 다스리게 한다는 것과 같은, 수행자가 내적 대화(對話) 또는 자기지시를 통하여 자신의 행동이 도에 일치하도록 스스로 통제하는 방법으로, 남을 탓하지 않는다거나, 자랑하지 않는다거나 욕심을 내지 않는다거나 이웃을 위하여 아낌없이 보시한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도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고, 이입(理入)은 무엇인가 후회하거나 기대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또는 진리에 자신이 들어가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입사행을 기독교 사상이나 신앙에 비교한다면, 사행은 예수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사람을 주종의 관계로 보고 하나님이 내리신 십계명을 일자일획도 빠트리지 않고 지키기 위하여 애쓴 것을 행입에 비교할 수 있으며, 이입은 예수님이 십계명을 역시 일자일획도 빠트리지 않고 지키는 방법이 곧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것에 비교된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 하신 것이나 예수님 자신을 “포도나무, 사람을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 하나님을 농부”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입의 예를 볼 수 있다. 이 책 역시 이입사행을 모델로 하고 있다. 이입사행을 심리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행입은 인지-행동적 접근법에 속하고, 이입은 인지에 의존하지 않는, 행동적 접근법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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