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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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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칼럼

심리학자, 토론토대학교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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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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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8
2018-07-16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3)

 

 (지난 호에 이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다는 사건에 뒤지지 않는 사건, 즉 아담과 이브가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이유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단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으로 덮여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낙원의 이유를 기독교에서 보아 온 것처럼 단지 “불복종”에 무게를 두게 되면, 하나님이 아담/인간을 하나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 자신의 숨을 그의 코 안에 불어 넣어 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잊게 되고 인간의 본성이 본래 악한 것으로 단정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교회에서나 유대-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둔 서양에서의 인간관은 성악설이다. 그 예가 프로이드(Freud)의 정신분석학이다. 그러나 우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면서 인간을 탕자에 비유하게 되고 비록 탕자가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으나 그가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아버지의 아들로서 특권을 그대로 회복할 수 있으리만큼 그의 본성이 선함 그대로임을 지적하셨다. 


인간의 본성을 악한 것으로 보는가, 아니면 선한 것으로 보는가에 따라 신행의 목표와 방법 역시 크게 달라진다. 본성을 악한 것으로 보게 되면, 본성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창세기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을 닮아있다고 보게 되면 구원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즉 전자가 숙명론인데 비하여 후자는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 후자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살아계신 아버지로 믿고 영접하면 된다. 구약성서의 내용과 신약성서의 내용이 여기서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여기서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기 때문에 처형을 당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불교사상의 핵심은 바로 아담과 이브가 왜 선악이라는 지식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 때문에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또한 인간의 “몸이 곧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그 예수님의 본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장사꾼들을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쫓아내면서 자신의 죽음을 성전의 재건으로 비유하신 그 뜻 역시 깨닫게 한다. 


자신의 본심을 되찾는 것, 견성이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이 되는 것과 같이 기독교 신행의 목적 역시 견성에 있다. 기독교의 목적을 “거듭 남”이라 하기도 하고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비교하기도 한다. 견성은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적 목적이고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불교는 성경에서 찾기 어려운 것으로, 인간의 망상을 제거해 버리는 구체적 방법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한 가지 목적은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불교 간에 공통점을 발견함으로써 서양과 동양을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양자가 인류가 지금 처해있는 비극적 상황을 해결할 수 있으리란 희망도 그 속에 있다. 특히 지금을 이민의 시대 또는 글로벌시대라 부른다. 인종과 종교 간의 갈등은 인류멸망의 위협이 되고 있다. 


이 책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독교와 불교가 문제로 삼는 인간의 마음 또는 지식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발달되는지를 학습이론(Pavlov, 1928; Skinner, 1950)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인간이 우주와 공유하고 있는 본심을 회복하게 될 때 얻을 수 있는, 치유와 사랑 그리고 지혜에 관하여 논의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은 바 되지 않은 것은 없고 누구나 하나님의 숨, 성령으로 생명을 얻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진리, 그 본질이 문화권에 따라 각각 다른 말과 문자로 표현되었다 할지라도 그 핵심에 있어서는 다를 수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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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66721
9218
2018-07-09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2)

 

 (지난 호에 이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질이 인간 나름으로 경험하게 되고, 느끼게 되고, 또한 판단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자신이 실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망상을 일으키게 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아들로서의 특권을 잃고 말았다. 


아담이 낙원을 잃어버린 이유를 창세기가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망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교에서 인간 고통의 원인을 분별심에서 찾고 있다는 것과 더 나아가서 과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지각과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까지도 기독교의 우주관과 인간관에 일치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불교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하는 깨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말과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 안에는 아직 아담/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으며 어떤 생각과 방법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는지 까지도 마치 구약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을 보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가 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만들어 낸 말과 문자와 병행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과 문자로 전하되 그 안에 따로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이것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성령의 두루마기” 또는 “성령의 감화”를 강조한다. 


“탕자”란 이미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그가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가 그를 종의 한 사람으로라도 받아드리고 먹여주시지 않을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귀향의 여정에 우리는 탕자가 두 가지 심리적 경험을 하게 될 것이란 것을 예견할 수 있다. 


첫째는 자기가 집을 떠나기로 한 그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그 때의 어리석었던 마음을 후회하며 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결심과 다짐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가 정작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또한 아버지가 돌아 온 아들을 위하여 베푼 잔치를 보면서 이전에 아버지가 자신을 종으로라도 받아주기를 원했던 그 마음까지도 완전히 사라지게 된, 아들로서의 특권을 다시 되찾았을 때의 기쁨과 감격이다. 


탕자가 귀가의 여정을 통하여 경험할만한 이 두 가지 심리적 과정을 우리는 불교를 중국에 처음으로 전한 달마 대사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입(二入)이란 도(道)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첫째의 행입(行入)은 “선한 생각으로, 악한 생각”을 다스리게 한다는 것과 같은, 수행자가 내적 대화(對話) 또는 자기지시를 통하여 자신의 행동이 도에 일치하도록 스스로 통제하는 방법으로, 남을 탓하지 않는다거나, 자랑하지 않는다거나 욕심을 내지 않는다거나 이웃을 위하여 아낌없이 보시한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도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고, 이입(理入)은 무엇인가 후회하거나 기대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또는 진리에 자신이 들어가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입사행을 기독교 사상이나 신앙에 비교한다면, 사행은 예수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사람을 주종의 관계로 보고 하나님이 내리신 십계명을 일자일획도 빠트리지 않고 지키기 위하여 애쓴 것을 행입에 비교할 수 있으며, 이입은 예수님이 십계명을 역시 일자일획도 빠트리지 않고 지키는 방법이 곧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것에 비교된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 하신 것이나 예수님 자신을 “포도나무, 사람을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 하나님을 농부”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입의 예를 볼 수 있다. 이 책 역시 이입사행을 모델로 하고 있다. 이입사행을 심리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행입은 인지-행동적 접근법에 속하고, 이입은 인지에 의존하지 않는, 행동적 접근법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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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66644
9218
2018-07-01
禪으로 성서를 읽다-인간의 본질(1)

 

1. 실낙원의 원인으로서의 인간의 지식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의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중략).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세기 2-3장 1-7)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이 만약 그들이 따서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엄하게 경고한 선악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도 큰 죄가 되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눈이 밝아져 그들이 벌거벗고 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무화과 나뭇잎을 따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는 것과, 하나님 보기가 두려워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하는 행동 변화에 있다.


선악과는 지식의 열매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을 잃게 된 것은 “지식의 열매를 따먹은 결과”라고 하는 것에 일치되는 가르침이 있다. 그것이 불교다. 기독교와 불교는 여러 면에서 서로 달라 보이지만 양자가 공통적으로 인간의 말과 문자로 표현되는 지식을 인간 고통과 죽음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과 믿음 또는 수행의 결과로 지식 또는 분별심을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쫓아내어버렸다고 하면 기독교와 불교 간에 보였던 차이점도 사라지게 될 것이란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는 오직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가게 한 바로 그 “지식으로 밝아진 눈”으로 볼 때 나타나게 되는 것일 뿐, 사람이 생각하고, 비교하고, 선악으로 정죄하고, 거부하는 인지적 영역만 벗어나게 되면 그 차이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어떤 문제로 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신, 여호와시다. 그리고 아담/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이 직접 그의 숨을 아담의 코 안에 불어넣으심으로 생명을 얻었다. 이는 인간의 본질이 창조주 하나님의 본질과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주종의 관계, 주객의 관계, 귀천의 관계, 미추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아버지의 뜻과 법이 아들의 뜻과 법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비록 인간이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되었을지라도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그대로 회복할 것이란 것이 신약성경의 내용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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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66555
9218
2018-06-22
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54)-“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5)

 

 (지난 호에 이어)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죄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에게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생기게 되자 그들은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의 행동은 그 결과로, 몸을 감추고 숨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제 자유를 잃었다. 


그들에게는 불안이 생기게 되었고, 욕심이 생기게 되었고, 시기와 질투가 생기게 되었고, 삶과 죽음이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 인간으로 하여금 오히려 무지와 미신을 부르게 되었고 죽음을 부르게 되었다. 


불안이나 의심으로 스스로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본심으로 나타날 수 있는 지혜도 인간이 잃어버리게 되었고, 억지로 애쓰지만 않는다면 잘 먹고, 잘 수 있는 것도 잘 먹지 못하고, 잘 자지 못하게 하여 스스로 병들게 만들었다. 삶과 죽음이 둘이 될 수 없는 것도 둘로 만들어 삶도 삶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죽음도 죽음답게 맞이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방해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어떤 삶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고, 그런 죽음이 아니라면 영생 역시 인간에게 있을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곧 인간이 망심에서부터 본심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보게 되고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에 속한 인간 자신의 본심을 보게 된다. 


인간의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인 인간의 몸을 스스로 ‘장사꾼의 소굴’ 그리고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인간의 지식, 분별망상을 쫓아내도록 지금도 고함을 지르시고 몽둥이로 내려치시고 계신다. 


예수님이 보이신 행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인간의 몸과 같은 유기체로 볼 때, 한 몸에 속한 지체들이 각각 본질로 소유하고 있어야 할 조건이 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행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러한 다섯 가지 행동특성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얻게 된, 인간의 지식, 즉 인간이 모든 것을 흑백이나 선악으로 분별하는 버릇과는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상반관계에 있다. 


인간의 본질이 분노하고 남을 원망하는 것이라면, 성내고 원망하는 것이 사람에게 만족을 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인간의 본질이 창조주의 뜻과 법에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라면, 인간 나름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인간에게 만족을 주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인간의 본질이 탐욕 덩어리라면, 탐욕이 인간에게 만족을 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그리고 인간의 본질이 사랑이 아닌, 증오라면, 증오심이 인간에게 만족을 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음을 보게 되면, 예수님이 보인 그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의 분노나 탐욕이나 어리석은 생각으로 ‘더럽혀졌던’ 자신의 “거듭 남” 또는 ‘성전으로서의 재건’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 자신의 본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자기라는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소위 자기라는 정체성은 이전 행동 경험의 쌓임에 불과한, 허상에 속한다.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수시로 변하게 되는 마음을 미리 고정된 자신의 실체로 착각하게 되면, 자기라는 것과 대조되는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라는 분별적 관념이 생기게 된다.


인간의 눈은 모두 이렇게 채색되어 있다. 여기서 인간은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혼돈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죄며 지금도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죄다. 이것이 인간의 무명이며 무지다. 


예수님은 빛으로 어둠을 밝히려 세상에 오신 것이다. 빛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지혜다. 그러나 인간은 어둠에 길들여져 있어서 밝음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거짓이 오히려 참으로 보인다. 세상은 온통 그러한 무명과 무지로 덮여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재창조가 요구된다. 땅이 혼돈되어 있었고 천지가 깊은 어둠에 덮여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서와 조화를 되찾아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대 혁신이 필요한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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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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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8
2018-06-20
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53)-“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4)

 

 

 (지난 호에 이어)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믿는 것이다. 사도신경의 핵심은 사도들이 실제 그렇게 한 것처럼, 자신도 예수님이 가신 바와 같은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도록 서약하는 것이다. 성령은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게 하는 것, 죄를 사하게 하는 것, 몸이 다시 살게 하는 것, 영원히 살게 하는 하나님의 본질,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은 본래 성령으로 생명을 얻었으며 성령을 숨 쉬며 살게 되어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숨으로 우주에 채워져 있다. 성령을 자신 밖에서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 성령이란 스스로 방해하지만 않으면 자신의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솟아나게 되어 있다. 


27.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고 선포하셨다.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행적을 보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성품을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이신 행적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요약해 본다면, 첫째는 무조건 용서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고통 그 자체로서, 고독과 불신, 오해와 멸시, 배신과 누명,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까지 당하셨으나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고,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에게 죄지은 자들을 그가 용서함과 같이 하늘에서도 용서”하시기를 기도하셨다. 


둘째로 예수님은 범사에 감사하며,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인내하며 자신의 뜻 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시며 행동하셨다. 그에게는 자기라는 어떤 고집도 없었다. 그는 고통의 십자가를 지게 되는 순간에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다. 


셋째, 예수님에는 욕심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머물 집이나 피곤한 몸을 눕혀 쉴 곳 한 평의 땅도 없었지만 그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해 하셨으며, “하늘에 나는 새를 보고,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는 말씀으로 육체를 위하여 염려하지 않도록 하셨으며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고 따른다는 것은 곧 욕심을 버리는데 있음을 가르치셨다. 


넷째, 예수님의 행적은 무조건 사랑과 자기희생으로 특징된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요청을 들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 집에 온 손님들을 기쁘게 한 것에서부터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그의 도움을 구하는 병든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고쳐주고, 오빠의 죽음에 애통해 하는 자매를 위하여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유약한 인간의 애원을 물리치심이 없이,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줌으로써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다. 


다섯째는, 예수님의 무조건 용서, 범사에 감사, 무욕, 그리고 한없는 사랑과 희생을 가능하게 한 조건으로서 어떤 분별망상도 일으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경계가 없었으며, 선과 악이나 귀와 천이라는 분별이 없었으며, 이 땅과 하늘나라가 따로 없었으며, 자신과 하나님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어디에도 걸림이 없었다. 


예수님의 행적은 자신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자신이 하나님 안에 거하시는, 자신이 곧 성전이라는 것과, 자신이 포도나무며, 그를 영접하는 성도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 그리고 하나님은 포도원을 가꾸시는 농부라는, 자타나 내외라는 관념이 없는, 모든 것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있고, 성령으로 모든 것이 숨을 쉬고 있다는, 무념의 지혜, 공의 지혜를 몸소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행적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이후에 보인 행동, 즉 부끄러움을 알고, 두려움을 알게 된 행동과는 확연하게 다른, 그들이 선악과라고 하는 “지식의 열매”를 따먹기 전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의 뜻과 법 안에서 자유자재 하던 행동과 일치된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질 역시 본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본질은 인간을 곧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는 영생의 지혜가 된다. 


이는 사람의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생과 죽음 역시 창조주의 뜻이며 법이다. 하나님의 뜻과 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우주와 자연 현상은 변할 수 없다. 변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아담의 망심이 본심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인간이 현재 본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개인이 이전 행동 경험을 통하여 조건화되고 학습한 것에 불과하다. 사람의 눈은 이전 경험으로 각양각색으로 채색된다. 그 눈으로는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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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66287
9218
2018-06-04
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51)-“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2)

 

 (지난 호에 이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그 ‘말씀’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셨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중략)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 난 것이나 육정으로 난 것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의 저자는 ‘말씀’으로 전체가 하나를 이루고 있음을 지적하신다. 이 ‘말씀’은 곧 빛이며 생명으로 이것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선언하신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 역시 단지 예수님을 머리나 지식으로 믿는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바로 자신의 인격이나 행동으로 나타나는, 즉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으로, 자신이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둘이 될 수 없고, 포도원과 농부는 둘이 될 수 없다. 포도나무와 해나 구름 역시 둘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창조주의 ‘말씀’, 지혜로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 안에는 “혈통으로 난 것이나 욕정으로 난 것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라는 분별이나 경계도 없다. 모든 것은 법(法), 계(戒)에 따라 태양은 그 빛을 비추게 되고, 구름은 바람 따라 흐르게 된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서 질서와 조화를 이룬다. 계정혜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서 포도나무와 공유하는 본질인 동시에 포도나무 역시 천지만물과 공유하는 본질이다. 


하나님을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또한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예수님의 간곡한 부탁이어서 지켜야 할 권위적 또는 의무적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한 몸에 속한 지체가 가진 본질로서, 이 본질에서 어긋나면 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관념 없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탐진치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그것에 중독되어 붙들고 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체가 약하여 그것에 메여있는 것이다. 인간 누구나 본능적으로 그것에 집착되어 있는 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란 것을 몸으로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이미 사탄의 시험에 진 아담과 이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다. 지금의 이 상태에서 어떻게 본래의 모습, 통합된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우선 선악이라는 관념으로 이미 오염된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섬겨 왔던 방법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이 다르다. 


전자의 경우에는 선악이나 성범이나 귀천이라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생긴 망심, 분별심 그대로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아담과 이브의 마음에 어떤 분별망상도 들어오기 이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안심하고 에덴을 즐기고 살던 그 때의 그 모습으로 살게 하는 방법이다. 


후자의 경우란 “더럽히지만 않으면 되는 것”으로 “억지로 애씀”없이 인간 본래의 그 모습으로만 살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엄청난 자기 변화를 요구한다. 고질적인 옛 버릇이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그것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다.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뱀이나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이 가까이와도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한 생각도 일으키지만 않으면 그대로가 떡으로만 살지 않는 방법이 되고, 사탄에게 절하지 않는 방법이 되고,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방법이 된다. 


인간의 본질이 이미 타고난 윤리와 도덕으로 ‘말씀’과 하나가 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에 속한 세상은 그 빛, 그 진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게 된 이유는, 어이없게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 부르도록 했다는 죄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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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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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31
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50)-“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1)

 

 

 (지난 호에 이어)
원성실성이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가졌던 자유로운 마음이다. 그는 하나님이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숨으로 생명을 얻었으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자유자재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지혜가 자신의 것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에 아들로서 동참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 이름을 지어주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리는 역할을 맡았다.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다. 


 인간은 우주의 일부로 속하여 있고, 우주와 동일한 지혜를 공유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이 우주의 법에 일치하여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우주와 공유하게 되어 있는 지혜로 인간은 온갖 기적 역시 일으킬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성령의 역사라 표현한다. 


아담의 몸이 성령으로 생명을 얻었고,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된 것과 같이 인간 역시 본래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다. 인간의 몸이 곧 성전으로 인간과 하나님은 둘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얻는 방법은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서의 본심을 회복하는데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고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고 계신다. 

 

26. 총체성의 창조 


사십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사탄이 와서 시험한다. 첫째의 시험은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응답으로 시험을 이긴다. 


둘째는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을 하면 그 모든 것을 줄 것이라 했다. 예수님은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대답으로 이 시험을 역시 이긴다. 


셋째는 사탄이 예수님을 높은 탑에 데려다 놓고 거기서 뛰어 내리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너를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 않겠느냐고 했을 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네 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말씀으로 사탄을 그로부터 떠나게 하셨다. 


예수님이 체험한 이 세 가지 시험은 인간이면 누구나 경험하게 된다. 인간의 몸은 물질이므로 물질에 대한 원초적 욕망이 있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고, 또한 인간은 어리석어서 남을 쉽게 의심하게 된다. 사람이 가진 이러한 행동 특성을 불교에서는 탐진치라 부른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돌도 떡으로 보이게 되고, 세상의 명예나 권력에 집착된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영혼까지 판다. 그리고 사람은 향상 의심함으로 자신을 낳아준 부모까지도 의심하며 집을 떠나기도 한다. 


예수님이 사탄에 의하여 당한 세 가지 시험은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간교한 뱀에 의하여 당한 시험과도 일치한다. 뱀은 선악과라고 하는 먹음직한 과실(果實)로 유혹했고, 그것을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게 될 것이라고 유혹했고, 또한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그 의도를 의심하게 했다. 


예수님의 경우는 그러한 세 가지 시험을 이진 것이고 아담과 이브의 경우에는 그러한 시험에서 졌다. 이러한 세 가지 시험에서 이김은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러한 시험에서의 실패는 죽음을 뜻한다. 


인간이 자신을 전체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보게 되면, 이 세 가지 시험에 각각 속하는 탐진치가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서 잘 살게 하는 필수적 조건처럼 보이게 되지만, 인간 자신이 이웃이나 자연이나 우주라고 하는 유기체의 일부분이라는 실상에 들어가게 되면 그 세 가지는 자신과 이웃을 병들어 말라 죽게 하는 독소가 되는 반면, 탐진치와는 각각 쌍이 되는 계정혜는 자신도 살리고 이웃도 살리는 약(藥)이 된다.


탐과 계는 함께 할 수 없고, 진과 정은 함께 할 수 없고, 치와 혜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으로서, 각각 인간의 신체적 측면, 정신적 측면, 그리고 영적 측면을 대표한다. 


이 세 가지, 몸과 마음 그리고 영적 측면의 통합은 인간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며 건강하게 살게 하는 절대적 조건으로 인간이 낙원에서 살거나 또는 비록 지금의 세상이 낙원이 아닐지라도 낙원으로 살게 하는 인간의 본질에 일치한다.


인간은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리고 인간은 창조주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되었으며 지금도 창조주의 숨, 성령을 누구나 함께 숨 쉬며 살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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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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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5
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49)-“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0)

 

 

 (지난 호에 이어)
의타기성이라고 하는 연합의 법칙을 우리가 알게 되면 이 원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마음이나 행동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불교에서 보면, 번뇌망상을 일으키는 분별심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발달되는가를 연합의 법칙을 바탕으로, 십이연기나 오온연기, 즉 유전연기(流轉緣起)로 설명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이러한 동일한 법칙을 적용하여 십이연기나 오온연기의 결과인 분별심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환멸연기(還滅緣起)란 것이 있다. 불교의 모든 수행법은 환멸연기에 속한다. 


학습 및 행동심리학에서도 동일한 연합의 법칙을 적용하여, 예를 들어 스트레스나 긴장을, 그것과는 반대되는 이완반응을 거기에 연합시킴으로써 통제하거나 소거되게 한다. 


의타기성은 물리학이나 화학에 속한 법칙이면서도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이 어떻게 발달되고 또한 변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원리로 적용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항상 병행한다는 법칙에 따르면 그것은 크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셋째, 마지막의 원성실성은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게 되어있다는 의타기성의 이면에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은 공이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원성실성은 개인을 사회라는 유기체의 일부분으로 보게 될 때 내리게 되는 결론과 같은 것이다. 


지체는 자기라는 것이 없으므로 원만한 전제를 이루게 된다는 깨달음이다. 원성실성은 자신의 행동변화를 요구한다. 원성실성이란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자신을 바로 그 법칙에 일치되는, 공의 도에 던져 넣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선수행의 궁극적 목적이 거기에 있다. 유전연기의 결과인 분별심을 차단해 버리고, 분별심을 가지고서는 바로 보고 바로 체험할 수 없었던 것을 바로 보고 바로 체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방법이란 지금까지 분별망상에 의하여 가려져 왔고 또한 방해를 받아왔던 본심을 회복함으로써 사회 또는 우주라는 유기체의 지체인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그 결과란, 이전 행동 경험으로 얼룩지고 찌그러진 본심을 본래의 ‘밝은 거울’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것을 견성이라 한다. 그리고 견성의 결과는, 금강경에서 설하는 것과 같은, “보살이면서도 보살이라는 관념이 없고, 보시하면서도 보시한다는 관념”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한 몸에 붙은 지체로서의 기능이 원만하게 발휘된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나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서의 유식삼성은 기독교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자신이 “새끼줄을 보고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고 있는, 무지의 상태에 머물고 있다면, 거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와 같은, 변계소집성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자신의 지각과 판단이 얼마나 망상에 속한 것임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나 “예수님”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은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만들어 낸 우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 역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음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겨 온 전통적 방법은 인간과 하나님을 갈라놓게 한 아담의 망심, 선악이라는 분별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보고 회개하기보다 죄 없는 양이나 비둘기를 잡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침으로 용서와 축복을 바랬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받치도록 명하신다. 제물이란 본래 깨끗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근본적 변화 없이는 자신이 제물이 될 수 없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곧 자신도 그러한 피를 흘려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사도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의타기성은 자신이 포도나무로 비유되는 예수님의 몸에 붙어있는 가지임을 깨닫는 것이고 자신이 교회라는 공동체, 사회라는 공동체에 붙어있는 지체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의타기성이란 연합 또는 연기의 원리를 적용하여 유기체로 비유되는 교회와 사회, 그리고, 자연을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에덴으로 변화시켜 가게 할 수 있다.


원성실성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라는 것을 없애버림으로써 진실로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 수준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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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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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48)-“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29)

 

 (지난 호에 이어)
우리가 사회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라를, 지금 물리학자들이 우주를 다양한 악기들이 각기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거대한 오케스트라로 보거나, 불교에서 우주를 갖가지 꽃들로 장식된 화원으로 보거나, 기독교에서 교회나 사회를 갖가지 지체들의 모임인 사람의 몸과 같은 것으로 보거나, 그리고 개인 자신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 하거나 또는 사람을 ‘포도나무’인 예수님의 몸에 붙은 가지라고 비유하는 것과 같은, 유기체관이 아니고서는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동시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을 지킬 수는 없다. 


즉 개인이 우주를 이루는 만다라(Mandala)의 일부, 또는 모자이크(Mosaic)의 일부로 자기라는 고집이 없이 전체로 하나가 될 때 인간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원만한 삶을 영위하게 되어있다. 


작게는 우리의 몸에 속한 세포 하나에서부터, 손발과 같은 지체, 개체, 사회, 자연 그리고 크게는 우주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일즉다, 다즉일의 관계로 무진장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보면, 개인은 그가 유기체의 일부로 속해 있는 사회와 자연 그리고 우주와 한 몸으로 소통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 우린 우주적 의식이라든가 영적 교제라 부를 수 있다.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이러한 우주적 의식이 인간의 본질로서 상실되어 있다면 자연/우주의 흐름에 따라 인간이 자연/우주의 일부로 순응하며 변해갈 자연지 또는 근본지를 가질 수도 없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예수님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고 또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이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 자신의 숨을 인간의 코 안에 불어 넣으심으로 인간이 생기를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담과 이브가 지은 죄는 본래 자신이 전체에 속한 지체로 기능하게 되어 있는 자신을, 선악을 분별하는 망심을 일으켜 자신을 전체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부터 욕심이 일어나고 죄를 낳고 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본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인 자신을 선악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게 됨으로써 스스로 포도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한 것이다. 


선에는 유식삼성(唯識三性)이란 것이 있다. 유식삼성은 지금 우리가 가진 마음은 무엇이며 우리가 점차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됨으로써 이 세상에서 원만한 삶을 얻을 수 있는가를 세 가지 위계적 단계로 설명한다. 첫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사람의 지각과 판단은 마치 “어스름한 밤에 길 앞에 가로놓여 있는 새끼줄을 보고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의 행동이 대부분 조건화 또는 학습된 것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된다. “새끼줄을 보고 뱀을 본 것처럼 놀라거나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게 되는 것은, 심리학자 파브로프(Pavlov)의 개가 종소리만 듣고도 입에 음식물이 들어간 것과 같이 침을 흘리게 된 것과 같은, 조건형성의 결과에 해당된다.


사람의 행동은 대부분 그런 것이다. “자라에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 역시 그것과 같다. 원효 대사가 길을 가다가 밤에 바가지에 담겼던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보니 자신이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에 담겼던 물임을 발견하고 구역질을 하게 되었다는 것도 전형적인 조건형성의 실례가 된다. 


둘째는 의타기성으로, 우리가 어떻게 새끼줄을 보고 뱀을 본 것처럼 놀라거나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게 되거나 또는 정작 뱀을 보고 뱀을 죽이려고 하는 행동이 일어나게 되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 이 단계에 속한다. 


수행자는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게 되는 이면에 연기(緣起)의 법칙 또는 연합의 법칙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새끼줄의 외양과 뱀의 외양이 비슷하게 닮았다는 사실 때문에 뱀에 대한 두려움이 새끼줄로 일반화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종소리와 음식물이 서로 다른 것이지만 시공간적으로 연합되면 개나 사람은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리게 된다. “김치!”라는 말이나 “오렌지!”라는 말만 들어도 입에 침이 고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인”이라든가 “흑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각기 다른 감정이 일어나고 생리적 반응이 다르다. 모든 것이 그렇게 자신의 직접적 경험을 통해서나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고 모방한 결과, 책을 읽거나 또는 자신이 속한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에 의하여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을 보면서도 그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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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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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5
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47)-“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28)

 

 (지난 호에 이어)
즉 집을 떠난 탕자와 같은 허망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숨으로 생명을 얻게 된 인간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라 안에서 자유자재 하는 유일한 방법은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 자신 스스로 자신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기독교에서의 ‘거듭 남’이란 회개를 의미한다. 아담의 망심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인간에게의 회개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에서도 그렇게 보지만 탐진치를 계정혜로 대치하려고 하는 의식적 노력이나 애씀으로는 부족하다. 탐진치라는 관념이나 계정혜라는 관념조차 자신의 마음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 아담의 본심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린아이처럼 탐진치라는 의식분별도 없이 탐진치가 없고, 계정혜라는 의식분별도 없이 계정혜를 자신의 본질로 나타나게 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반야의 지혜이며 무념의 지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나 바울 사도가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고 하는 뜻에는 공의 지혜, 무념의 지혜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다. 성도가 속한 교회나 개인이 속한 사회 그리고 인간이 속한 자연과 우주를 우리의 몸과 같은 유기체로 보게 되면 인간의 본질은 공이 아닐 수 없고, 인간의 본질이 공이므로 그 안에서 자유자재 할 수 있게 됨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25.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달마도(達磨圖)에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글이 보통 부제로 들어가 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란 말의 뜻은 인간은 누구나 본래 부처이므로 부처를 자신 밖에서 따로 찾지 말고, 달마의 벽관(壁觀)이 예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 봄으로서 견성하고 성불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불교의 경전이나 기독교의 성서를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으로, 불교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본래불(本來佛)이라 하고,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그의 숨으로 생명을 얻게 된,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던” 존재라는 점에서 보면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란 기독교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수행법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양자 간의 수행 목적이 선악이나 성범이나 미추와 같은, 분별심을 제거함으로써 그 이면의 밝고 지혜로운 본심을 회복하게 하는데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본심은 망심에 의하여 가려지거나 방해를 받을 수는 있지만, 구름 위에 해가 빛나고 있는 것과 같이,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항상 밝은 빛을 발하고 있다. 해를 가리고 있던 구름만 물러가면 해는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본심을 회복하는 방법이란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곧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나름으로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본래의 그 모습 그대로의 가지로 포도나무둥치에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 이를 불교에서는 분별심에 상대되는 것으로, 평상심(平常心)이라고 부른다. 


평상심이란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젖을 빨다가 잠을 자는 것과 같은 편안하고 자유로운 마음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부끄러워하고 또한 두려워하게 된 마음이나 에덴에서 쫓겨나 괴로움 속에서 살게 된 마음을 분별심이라고 한다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에덴에서 자유로웠던 마음을 평상심이라고 할 것이다. 


평상심이란 개인적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것만은 아니다. 평상심이란 개개인이 한 몸에 속한 오장육부가 각기 다른 모양과 성질에 따라 온전한 형태로 각기 최대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몸 전체가 정상(正常)을 유지할 수 있게 됨과 같은 것이다. 


개체는 전체 안에서, 전체는 개체 안에서 조화와 평화를 이루게 된다. 개인 자신이 유기체인 것처럼 개인이 속한 사회나 나라나 자연 우주가 무진장의 일즉다 다즉일의 유기체의 형태를 띠고 있다. 거기에 무슨 계급이나 불평등이니 미추니 성범이니 귀천이니 하는 분별이 들어가 서로 다투거나 미워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


건강한 교회라면, 건강한 사회라면, 그래서 그 교회, 그 사회가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교회가 되고 사회가 되자면, 한 몸에 속한 지체들 간에 선악이라는 관념이 없는 것과 같이 교회나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 간에 각기 자신이 가진 위치나 책임이나 기능이 다르다고 해도 그 사이에 분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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