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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칼럼

kimbo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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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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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1595
9218
2018-11-14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2)

 

 

 (지난 호에 이어)
화엄사법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사무애법계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안으로 뛰어 들도록 요구한다. 사사무애법계란 우주만물이 생동하며 서로 하나가 되어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하는 지금 바로 이 세상이다. 사람은 다만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불교에는 화엄사법계와 더불어 유식삼성(唯識三性)이라는 가르침도 있다. 이것 역시 인간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세 가지 단계로 되어있다. 유식삼성의 첫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다. 이는 사람의 지각과 판단은 마치 “어스름한 밤, 길 앞에 가로 놓인 새끼줄을 보고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어떤 것도 진실한 모습 그대로 볼 수 없음을 지적한다. 


둘째의 의타기성(依他起性)이란 연기(緣起), 즉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현상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기게 되기도 하고 또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의타기성은 화엄사법계의 이사무애법계에 해당된다. 


셋째의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사물의 형상이나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까지도 그것은 모두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그 본질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게 된다”는 것과 같이 “빈 것”임을 지적한다. 


원성실성 역시 사람이 단지 유식삼성을 머리로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여 비로소 모든 번뇌망상으로부터 해방되는 길, 진리 안으로 들어가라고 촉구한다. 


화엄사법계나 유식삼성은 공통적으로 지금 우리가 자신의 본심이라고 믿고 있는 마음이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진실한 모습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동시에 우리가 자신의 본성에 일치되는 방향을 취함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목표를 설정해 준다. 


화엄사법계나 유식상성은 인간 사회나 우주를 유기체로 보고 있다는 점과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과학과 심리학과도 연관되며, 또한 사람의 몸을 창조주가 거하시는 성전으로 비유하거나 사람을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비유하는 성경말씀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사무애법계나 원성실성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서의 성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8. 깨달음 


깨달음이 무엇인지는 화엄사법계가 설명해 준다. 우선 인간 사회나 우주자연을 갖가지 꽃들이 모인 화원으로 본다. 사회나 우주의 한 쪽 자락을 끌어당기면 전체가 딸려 나오는 거대한 그물로 보거나, 여러 모양과 색깔의 유리 조각들이 모인 결과인 모자이크로 보거나, 만다라(Mandala)로 보는 것도 화엄법계에 해당된다. 


깨달음이란 자신이 아름다운 화원을 이루는 한 송이의 꽃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자기라는 것은 없어지고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자기만이 있을 뿐이다. 그가 있으므로 화원이 있고, 화원이 있으므로 자신이 산다. 즉 자신이 사사무애법계의 일부로서 자기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 곧 깨달음이다. 


깨달음의 경지가 무엇인지는 바울 사도가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 비유함에 판박이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란 “세상을 구원하실 분”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스도”는 생명과 창조의 원천이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사람의 “몸이 성령으로 채워진 성전으로 기능하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인간이 우주자연의 부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가 몸에 붙어 있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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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1516
9218
2018-11-03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1)

 
 

 (지난 호에 이어)
실은 기독교와 불교의 수행방법에는 서로 명칭은 다를지라도 그 원리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의 “깨달음”과 기독교에서의 “거듭 남”도 다르지 않고, “공의 지혜”와 “성령의 지혜”도 다르지 않다. 양자 모두 유기체 모델이므로 서로 다를 수 없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깨달음을 통하여 거듭나게 하는 불교의 방법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게 하는 기독교의 방법을 비교하면서 인간이 “본래 부처(本來佛)이라고 하는 불교와, 인간의 ”몸이 곧 성전“이라 선언하는 기독교 간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동시에 불교의 수행방법을 어떻게 기독교 신행에 접목시킬 수 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7. 화엄사법계(華嚴四法界)


선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중의 하나인 화엄경에는 화엄사법계를 설한다. 화엄이란 갖가지의 꽃들이 모여 조화롭고 아름다운 화원을 이룬다는 것으로, 화엄경은 인간이 속해 있는 천지만물을 그런 화원과 같은, 유기체로 본다. 


화엄사법계는 꽃들로 장식된 화원과 같은 세계 안에서 네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즉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그리고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네 가지다. 


첫째의 사법계(事法界)란,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달과 별들이 나타나며, 구름이 모이고 비가 오며, 사람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과 같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관찰할 수 있는 밖의 세계를 뜻한다. 둘째의 이법계(理法界)는 사람이 그것을 알든 모르든 사람이 보고 경험하게 되는 사물사건의 현상이면에는 어떤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이사무에법계는 사람이 이제,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현상이면에는 ”만유인력”과 같은 법칙이 장애 없이 항상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지막의 사사무애법계는 사람의 눈으로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사물과 사물 그리고 사건과 사건이 실에 있어서는, 예를 들어 산소와 수소가 의존한 결과로 “물”이 되는 것과 같이, 현상과 현상이 어떤 경계나 어떤 분별이나 어떤 장애도 없이 소통하며 무한정의 인과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게 됨을 뜻한다. 


화엄사법계는 단지 우리가 물리학이나 화학을 학교에서 배울 때처럼 사물사건의 이면에는 그러한 물리적 화학적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지식으로 끝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도 마음도 그러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 법칙에 자신의 몸과 마음이 일치되도록, 그 법칙에 일치되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마치 과학자가 인간을 자연에 속한 것이고, 자연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자신이 발견한 사실 그대로 자연의 부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의미가 그것이다. 


우리는 화엄사법계 중에서 이사무애법계까지는 우리의 생각과 지식으로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사사무애법계라는 진실 앞에서는 뒷걸음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를 물었을 때, 예수님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을 듣고, 그는 가진 것이 많은지라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하는 것과 같이, 실은 누구나 사사무애법계에 살면서도 그 법에 일치되는 삶을 살지는 못한다.


우리는 사사무애법계에 들어간 사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는 모든 집착으로부터 떠났다. 그는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그에게는 그가 우주자연과의 일부분으로 본래 가지고 있는 지혜가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의하여 방해를 받지 않게 됨으로써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의 오감은 누구보다 민감하며 자신의 마음이 무지와 미신으로 가려져 있을 때와는 다르게, 자신을 이해하거나 남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거나 또는 사물의 원리를 이해하거나 육체적으로도 오고감에 자유로울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실은 인류가 오늘 날 자랑하는 21세기 과학기술문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것이고 자연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인간 자신마저 사사무애법계에 일치되는 본심으로 돌아갔을 때 인간이 건설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는, 지금 우리가 염려하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참으로 인간이 영생할 수 있는 낙원이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성도가 실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 숨을 쉬며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몸에 붙지 않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 바로 교회라는 유기체를 교란시키는 마음이라고 지적한다. 인간 사회를 유기체로 보거나 인류가 속한 우주를 유기체로 보게 되면, 인간이 가진 지금의 마음이란 유기체의 부분으로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게 되어 있는 본심으로부터는 크게 어긋나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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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1424
9218
2018-10-30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12)

 

 

 (지난 호에 이어)
그것은, 인간이 실제 우주에 속하여 있는 부분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무지의 상태에서 인간에게 그 허망한 잠을 깨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온다. 


달마 대사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말로 도에 바로 들어가는 방법을 설하셨다. 예수님이 새로운 계명으로 내려 주신,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직지인심이란 자신의 마음 그 자체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직시하는 것이고, 견성성불이란 그러한 망심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본심을 보아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나 불교 모두 인간의 지식이 일즉다, 다즉일의 유기체 관계에 있게 되어있는 본심을 방해한다고 보는 것이므로 양자 간의 방법이 그렇게 일치된다고 하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구원의 길은 “거듭 남”에 있다. 그러나 “거듭 남”이란 쉬운 과제가 아니다. 예수님이 “거듭 남”을 언급했을 때 제자들까지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거듭 남”의 진의를 그들은 비로써 깨닫게 되었다. 


구름과 같은 망심이 제거됨으로써 해와 같은 본심이 환하게 들어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방법이 된다. 


구원의 길은 한 길밖에 없다. 인간이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서의 본심을 되찾는데 있다. 그것은 기독교나 불교나 과학에서까지도 동일하다. 성경의 본의도 유기체관에 있고, 불경의 본의도 유기체관에 있고, 과학 역시 유기체관이다.


유기체관은 물리학이나 화학에서와 같은 인과의 법칙이고, 연합의 법칙이고, 사랑의 법칙이고, 자비의 법칙이고, 생명의 법칙이다. 


“거듭 남”이란 자기의 몸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성령으로 생명을 얻게 된, 본심이 작동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그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위계적 단계가 필요하다. 첫째의 단계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만들어졌는지를 발견하는 동시에 그 마음을 동일한 경로를 통하여 쫓아내는 방법으로, “선한 생각으로 악한 생각을 통제”하는 인지-행동적 방법이다. 둘째의 단계는 생각 그 자체를 차단하는, 행동적 방법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미 지식이나 논리로 오염된 눈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선 이 눈으로 성령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이며,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한 그렇게 노력하는 동시에, 어느 순간에 와서는 그러한 의도조차 없이도 자신의 본심으로 그러한 행동이 자동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 도달하게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그 두 과정에 비교하면 전자는 구약성경의 내용이 되고, 후자는 신약성경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본의다. 자기의 몸이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각이 그 안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에서는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를 묘사하는 방법으로 탕자의 비유가 있고 또한 죤 번(John Burn)이 쓴 “천로역정”도 있다. 불교에서도 심우도라 하여, 사람이 망심에 의하여 잃어버린 본심을 되찾는 과정을 소를 잃어버린 사람이 소를 찾는 과정에 비교하여, 열 가지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는 기독교에 비하여 본심을 되찾는 방법에 관한 한 더욱 구체적이고 분석적이다. 기독교 신행의 목적 역시 동일한 견성에 있는 것이므로 불교의 수행방법을 특히 적용한다는 것 역시 기독교 교리와 어긋날 수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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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1340
9218
2018-10-22
禪으로 성경을 읽다(11)-인간의 본질(13)

 

 

 (지난 호에 이어)


6. 구원의 여정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으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요 오매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요한계시록 21장 1-7) 

 

구원은 계명을 지키는데 있다. 구원을 위한 유일한 계명은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측면,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긴다”고 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실은 두 가지가 아니라, 손등과 손바닥과 같이 하나다.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둘로 갈라질 수 없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체(體)와 용(用), 본질과 기능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본질이 선한 것이면 선이 밖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선이 밖으로 나타나면 본질이 선할 수밖에 없다. 선이 본질이 아니면서, 선한 척 하는 것이 “양 가죽을 뒤집어 쓴 이리”이며 “회칠한 무덤”이다. 밝은 날에는 이러한 가짜는 청청백백하게 드러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그가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무관하게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숨, 성령으로 생명을 얻은 존재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할 것 없이 그러한 본성에 있어서는 한 점도 다를 바 없다. 


유대인이라서 미리 선택된 것도 아니고 사마리아인 이어서 선민이 아닌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을 유대인이며 그 위에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기까지 한 사람과 비교하여 ‘착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자손, 야곱의 자손으로 자랑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흔하게 발에 차이는 돌로도 유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의 오만을 쳐부쉈다.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섬기거나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거듭 남”이다. 이것은 사십 년 동안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한 순간에 파괴해 버리고 그 위에 새로 성전을 세우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그것을 상징한다. 죽음이란 예수님이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장사꾼들을 쫓아낸 것과 같이, 본래 성령으로 소통하게 되어 있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을 뜻한다. 


성경의 본의는 성도가 되는 조건으로 그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가 되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태초로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임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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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1252
9218
2018-10-16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11)

 

 

 (지난 호에 이어)
공의 지혜는 현실과 직결되어 있다. 사람은 공의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비록 자신의 현상학적 경험으로서는 자신이 전체와는 분리되어 있는 것과 같이 느끼고, 인간이 자연이나 환경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고 또한 자유로워야 하는 존재로 보이게 되는 것이지만 실은 한 발자국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둥치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생존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인간은 그렇게 허망한 생각에 잠겨있다. 인간의 이성이니 인간중심이니 인본주의니 하는 것이 모두 인간의 몸을 창조주가 거하시는 성전이라 하거나 인간을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고 하는, 실제를 부인하고 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 자기라는 것이 없는, 공으로 붙어 있음으로써 포도나무가 가지가 가진 지혜를 조금의 손실도 없이 발휘할 수 있다. 그것이 포도나무 가지에 싱싱하게 움트는 새싹이며 아름다운 꽃이며 열매다. 이를 공의 지혜라 한다. 공의 지혜야 말로 창조며 생명이다. 


포도나무에 튼튼히 붙어 있는 가지는 어떤 것도 “억지로 애쓸 것”이 없다. 포도나무 둥치에 붙어있는 그대로 한 없이 자유롭고 또한 완전하다. 이러한 경지는 우리 자신들로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거나 항상 체험하고 있다. 허망한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편안하다는 사실의 체험이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 위에 다시 생각이 일어나 결국 그 생각의 종착점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은 행동이다. 우리는 그것을 스트레스라고 부르기도 하며 긴장과 불안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또한 번뇌망상이라 하기도 한다. 그와는 반대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심신이 안정되고 스트레스나 불안과 연관되어 일어나는 신체적 질병까지도 치유된다는 사실을 안다.


불교에서는 생각과 더불어 일어나는 것을, 탐진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세 가지 사람을 죽이는 독소, 삼독(三毒)이라 부르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때 얻게 되는 것으로, 계정혜, 질서와 고요함 그리고 “모든 것을 알게 하는” 지혜라 부른다. 우리가 탐진치에 빠져 있을 때는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탐욕으로 밝아진 눈은 “산을 산으로도 보지 못하게 하고, 강을 강”으로 보지 못하게 한다. 분노로 역시 그렇다. 분노로 휩싸인 마음은 자신과 이웃을 해치고 자신을 해친다. 어리석은 판단과 행동 역시 자신을 망친다. 그러나 계정혜가 일으키는 기적은 경이롭다. 


계는 법칙과 질서로, 부분과 부분 그리고, 지체와 지체를 한 몸으로 묶는 지혜가 된다. 계를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다. 예수님이 십계명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고치신 것과 같다. 정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으로 모두가 평화를 얻고 심신의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혜는 곧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음으로 “모든 것을 아는 지혜”가 된다. 그것은 머리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우주자연과의 통합적 관계에서 우주자연과 공유하게 되어 있는 지혜를 몸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됨을 말한다. 


계정혜는 삼학(三學)으로 배워가야 할 학습과제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그것은 우주나 자연에 속한 지체로 인간이 본심으로 가진 적응기제다. 계정혜는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그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공식이 된다. 


예를 들어 시험을 앞에 둔 학생이라면, 우선 계는 자신을 시험에 집중하도록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는 기초가 된다. 둘째 정은 심신을 고요하게 하고 주의를 집중하게 하는 방법으로 준비한 만큼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심리적 태도가 된다. 그리고 셋째 혜는 시험에서 자신이 보여주게 될 지혜다. 


계정혜, 사랑과 평화 그리고 모든 것과 소통하며 공감하게 하는, “일체지(一切智)”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 보거나, 우주를 갖가지 꽃으로 장식된 화엄(華嚴)의 세계로 보거나, 인간을 우주의 부분으로 보는 유기체관에서는 서로 이견이 있을 수 없는, 공통분모가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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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1074
9218
2018-10-02
禪으로 성경을 읽다(10)-인간의 본질

  

 (지난 호에 이어)
사람의 학습된 눈은 “파블로프의 개” 처럼 종소리를 종소리로 듣지도 못하고, 음식을 음식으로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사람은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하고, 피곤해도 잘 수 없게 되었다.” 종소리는 이제 개인의 이전 경험에 따라 불안이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자극으로 변하게 되기도 했고, 탐욕을 일으키는 자극으로 변하기도 했다. 


모든 형상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전체가 사람의 탐심과 분노 그리고 무지를 일으키는 자극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의 몸과 맘에 붙어 있는 오감이 전부 그렇게 오염되고 말았다. 온 몸이 “도적의 소굴”이 되었다. 


사람이 사회를 통하여 배워 익힌 일반적인 상식으로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다. 선악이라는 관념조차 사람에게 없다면 그것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세상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눈이 밝아진 아담과 이브를 에덴으로부터 쫓아내었는가?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이 깨달아야 할 화두(話頭)다.

 

5. 공의 지혜 


사람은 누구나 서로 용납되지 않는 두 가지 세계에 양 발을 걸쳐놓고 불안한 가운데서 살고 있다. 첫째의 세상은 자기가 만들어 낸 세계다. 그 다음 세계는 실제의 세계,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쉬어야 하는” 현실 세계다. 


전자의 경우는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실은 귀나 발이 한 몸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나는 몸에 속하지 않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망상과 실제 간의 차이는 결국 사람을 병들어 죽게 한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 하거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고 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처럼 자신이 지금 자기의 본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도적’과 같은 것임을 알고 예수님이 채찍을 만들어 성전을 더럽히고 있는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것처럼 몰아내고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이란 ‘빈 것’이다. 한 몸에 속한 지체와 지체 그리고 지체와 전체의 관계가 공, 즉 ‘빈 것’ 이다. 지체와 지체 간에 경계가 있거나 분별이 있다면 지체들로 한 몸을 이룬 유기체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이 속한 우주자연이나 사회나 교회를 유기체로 보면 천지만물과 더불어 인간의 본질 역시 공, ‘빈 것’이어야 한다.


공은 ‘빈 것’으로 무한한 지혜를 그 안에 갖추고 있다. 태양과 지구의 본질이 공이기 때문에 우주자연의 법칙에 따라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자전하면서 돌고, 태양은 그 밝고 따뜻한 열로 지상의 생물들을 생육한다. 


구름의 본질도 공으로 바람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물의 본질도 공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인간의 본심 역시 ‘빈 것’으로 인연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공이란 인간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다.


공이란 공기가 찬 곳에서 더운 곳으로 움직이거나 산소와 수소가 만나 “물”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물리적 화학적 법칙이지만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법칙이다. 


인간의 몸과 몸에 붙어 있는 모든 감각기관들이 물질에 있어서 동일한 물리적 화학적 법칙에 따라 작용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의 허망한 생각으로 인간은 그러한 우주자연의 속성 또는 통제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이나 망상은 귀나 발이 실은 한 몸에 붙어있으면서도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에 해당되는 자해와 자살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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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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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6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10)

 

 

 (지난 호에 이어)
사람의 학습된 눈은 “파블로프의 개” 처럼 종소리를 종소리로 듣지도 못하고, 음식을 음식으로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사람은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하고, 피곤해도 잘 수 없게 되었다.” 종소리는 이제 개인의 이전 경험에 따라 불안이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자극으로 변하게 되기도 했고, 탐욕을 일으키는 자극으로 변하기도 했다. 


모든 형상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전체가 사람의 탐심과 분노 그리고 무지를 일으키는 자극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의 몸과 맘에 붙어 있는 오감이 전부 그렇게 오염되고 말았다. 온 몸이 “도적의 소굴”이 되었다. 


사람이 사회를 통하여 배워 익힌 일반적인 상식으로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다. 선악이라는 관념조차 사람에게 없다면 그것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세상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눈이 밝아진 아담과 이브를 에덴으로부터 쫓아내었는가?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이 깨달아야 할 화두(話頭)다.

 

5. 공의 지혜 


사람은 누구나 서로 용납되지 않는 두 가지 세계에 양 발을 걸쳐놓고 불안한 가운데서 살고 있다. 첫째의 세상은 자기가 만들어 낸 세계다. 그 다음 세계는 실제의 세계,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쉬어야 하는” 현실 세계다. 


전자의 경우는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실은 귀나 발이 한 몸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나는 몸에 속하지 않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망상과 실제 간의 차이는 결국 사람을 병들어 죽게 한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 하거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고 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처럼 자신이 지금 자기의 본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도적’과 같은 것임을 알고 예수님이 채찍을 만들어 성전을 더럽히고 있는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것처럼 몰아내고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이란 ‘빈 것’이다. 한 몸에 속한 지체와 지체 그리고 지체와 전체의 관계가 공, 즉 ‘빈 것’ 이다. 지체와 지체 간에 경계가 있거나 분별이 있다면 지체들로 한 몸을 이룬 유기체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이 속한 우주자연이나 사회나 교회를 유기체로 보면 천지만물과 더불어 인간의 본질 역시 공, ‘빈 것’이어야 한다.


공은 ‘빈 것’으로 무한한 지혜를 그 안에 갖추고 있다. 태양과 지구의 본질이 공이기 때문에 우주자연의 법칙에 따라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자전하면서 돌고, 태양은 그 밝고 따뜻한 열로 지상의 생물들을 생육한다. 


구름의 본질도 공으로 바람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물의 본질도 공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인간의 본심 역시 ‘빈 것’으로 인연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공이란 인간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다.


공이란 공기가 찬 곳에서 더운 곳으로 움직이거나 산소와 수소가 만나 “물”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물리적 화학적 법칙이지만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법칙이다. 


인간의 몸과 몸에 붙어 있는 모든 감각기관들이 물질에 있어서 동일한 물리적 화학적 법칙에 따라 작용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의 허망한 생각으로 인간은 그러한 우주자연의 속성 또는 통제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이나 망상은 귀나 발이 실은 한 몸에 붙어있으면서도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에 해당되는 자해와 자살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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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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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8
2018-09-12
禪으로 성경을 읽다(9)-인간의 본질

 

 (지난 호에 이어)
다시 말하면 어떤 영역에서 보다 앞서, 인간 나름으로 만들어낸 신념이나 지식이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창조주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된 인간의 본질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기독교에서 이 지식의 문제에 대하여 직접 논의하거나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화합하는 길이며 진리로 직접 언급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물론 기독교는 구약시대로부터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이유를 “불복종”과 “원죄”에 무게를 두는 바람에 정작 인간이 지금도 따먹고 있는 선악과가 가진 독성에 대하여서는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대로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되면 인간의 생각은 차단될 수 밖에 없다.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는 한 몸으로 소통하게 된다. 사람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을 참 음식으로 먹고, 자신의 피를 참 음료로 마시라고 하신 것도 인간이 예수님과 한 몸이며, 예수님이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인 것처럼 사람 역시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성도란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진정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성찬의 본의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지체가 되는 데 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믿는다고 말만하면 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도 견성에 있고, 불교의 궁극적 목적도 견성에 있다. 견성이란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 나타날 창조주의 형상과 지혜를 그대로 닮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것은 “억지로 애쓴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간교한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기왓장을 간다고 해서 거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갈아야 하는지는 예수님도 가르쳐주고 부처님도 가르쳐 준다.


“참 좋은 이웃이 되는 것” 그것 이상 인간을 고통에서 구하는 방법은 없다. 우리가 “참 좋은 사마리아 인”에서 얻는 단서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인”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방법이 인간이 만든 명칭이나 제동에 한정되어 있음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인간의 몸이 곧 성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 자신의 몸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어리석은 생각을 몰아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십계명의 완성임을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각과 판단을 넘어선 크신 분이다.


예수님의 모습은 제사장이 아니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닮아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봤을 때는 예수가 그들이 천대하는 사마리아 사람 또는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이방인으로 보였다. 사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다. 예수님의 모습에는 선악이라는 관념도 없었으므로 누구나 그의 사랑과 자비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예수 자신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 자신의 본심을 보면 하나님을 본 것과 다르지 않음을 역시 의미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자신의 생각에 묶여 있는 그 족쇄를 푸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자신이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눈으로는 예수님의 언행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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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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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0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9)

 

 

 (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서 몸소 보이신 그 행적에 일치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본다면 비록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처럼 좋은 이웃이 되는 사람은 오히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큰 칭찬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란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도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를 물어 온 청년에게 “나를 믿어라”는 말씀보다 “가서 너의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이웃에게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조건은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 즉 ‘이웃사랑’에 있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에 있다. ‘아담과 이브가 왜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을 지적한다. 우리가 이방인이니 유대인이니 기독교인이니 불교신도니 동양인이니 서양인이니 흑인이니 백인이니 하는 것이나 “하나님”이니 “천주님”이니 “예수님”이니 하는 것도 인간의 생각으로 임의로 붙인 명칭에 불과하다. 


이러한 명칭이나 경계에 집착되어 있는 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에 의하여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밝아진” 그 눈, 그리고 그들이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게 된 바로 그 “선과 악을 알게 된 그 지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관계로 아직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 말씀하시고, 또한 사람을 자신의 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몸이 성전이 되고, 사람의 몸이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본심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면 예수님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제사장이나 래위 사람보다 더 온전한 사람으로 칭찬하신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는, 그 본의 역시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온전한 신앙에는 명칭에 구애 받지 않음을 뜻한다. 하나님은 밖이 아니라 내면을 보시고, 잎이 아니라 열매를 보고 심판하신다. 


창세기로부터 인간의 지식을 에덴을 잃고 또한 고통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원인으로 지목하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성전이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 비유하시거나 바울 사도가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라는 말씀으로, 지금 우리가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 일깨워주고 있지만 정작 그렇게 자신을 버리는 방법에 대하여 교회는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독교에서처럼 인간이 속한 사회나 우주자연을 유기체 또는 거대한 “그물(網)”로 보고 있는 불교는 수행의 궁극적 목적을 견성(見性), 즉 자신의 본성을 “지식의 어두운 그림자”의 방해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것에 두고 용맹 정진한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곧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 되는 것이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서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 즉 무아(無我) 또는 공(空)의 지혜를 회복하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을 학습의 결과로 보는 심리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담과 이브가 “지식의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치마를 해 입었다는 것이나 하나님이 두려워 숨었다고 하는 행동의 변화는 탈학습 또는 소거 또는 치료의 대상이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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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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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8)

 

 

 (지난 호에 이어)


4. 누가 참 이웃인가? 


예수님은 불한당을 만나 죽게 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길을 갔던 제사장과 래위 사람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을 비교하시면서 누가 “좋은 이웃”인가를 물으신다. 


제사장이나 래위 사람의 도덕이나 윤리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은 보통 사람보다 휠씬 높았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학식이 높았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선악에 관한 분명한 판단과 십계명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으로 존경을 받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무엇이 선이며 악인지를 가슴으로가 아닌, 지식으로 배운 사람들의 결함은 선행의 대가로 무엇인가를 챙기려는 마음을 버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것이 지식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라는 질문으로 자신을 설득시켜야 하고 남을 설득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동에는 위선이 있고, 계산이 있다. 그들은 대상에 따라 베풀기도 하고, 대상에 따라 베풀지 않기도 한다. 


지식으로 배워서가 아닌, 인간의 본심으로 나오는 무조건 선행이 있다. 그것이 곧 바울 사도가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라고 하시면서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와 지체가 서로를 위하여 어떻게 수고하고 희생하는지를 보라고 하신 것과 같은,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라는 관념조차 초월한 선행이다. 


이러한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넘어선 도덕과 윤리를 우리는 또한 “보살은 보살이면서도 보살이라는 관념이 없고, 보살은 보시하면서도 보시한다는 관념이 없다”는 불교의 금강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선행 아닌, 선행은 부모의 자녀에 대한 무조건 사랑에서 그 그림자를 볼 수 있다. 교회나 사회나 우주를 사람의 몸과 같은 유기체로 보게 되면 그런 선행이 인간의 본질로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예수님이 칭찬한 사마리아인과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린 제사장과 래위 사람의 차이에서 우린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된다는 생각으로 계명을 지키려는 사람과 십계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실은 십계명의 본의에 일치되는 행동을 한 사람의 예를 볼 수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처럼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도 아니며 자기들처럼 하나님의 계명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로, 상대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사장과 그 천한 사마리아 사람을 비교하여 사마리아 사람을 “참 좋은 이웃”으로 칭찬하신 것이다. 


기독교에서 특히 예수님에 의하여 “참 이웃”이라 칭찬을 받은 사람이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죽어도 다시 부활할 사람이며, 천당에 갈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 의문이 생긴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처럼 그가 유대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유대 사람들처럼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가 진정 “좋은 이웃”이라면 기독교에서도 구원을 받고 천당에 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사실 바울 사도가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주었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도들이 있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비록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섬겨왔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길 줄도 몰랐고, 그들처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도 않았지만 그도 유대인으로 선행을 한 사람과 동일하게 그리스도교 안에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근거를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찾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시면서 자신을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이 말씀에 의한다면 예수를 모르거나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이 들린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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