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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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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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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이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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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0
어떻게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2)

 

 

 (지난 호에 이어)
 행복의 또 다른 요소로 사회적 비교를 들 수 있다. 오늘 나의 행복이 남의 성취에 달려 있을 때가 많다는 것. 행복감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데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행복감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데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이것이 왜 어제의 빈곤한 사회가 오늘의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다 해도 행복감은 그대로 있느냐는 것을 설명해 준다. 


 한마디로 내 손에 든 떡이 남의 손에 든 떡보다 작을 때는 행복감을 못 느낀다. 연구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자기 말고 다른 사람 20%가 부자라고 생각하는데 자기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1%도 안 된다. 대부분은 "남은 부자이고 나는 부자가 아니가"고 생각한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행복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개 적어보자.


 첫 번째는 아주 능동적이고 활동적이고 바쁘게 지내라는 것이다. 조용하게 지내지 말고 아주 바쁘게 지내자. 꽃꽂이를 한다든지, 낚시를 간다든지, 사교춤을 춘다든지, 헬스클럽에 간다든지, 개를 키워보자. 활동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행복감을 낮추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교, 친교, 대인관계를 많이 하라는 것이다.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며 참여하는 집단이 많고 분주할수록 좋다. 온종일 쏘다니고 남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동물이라 하지 않았는가.


 세 번째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일 일은 내일 일이다. 아이가 유치원을 마치고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못 가서 대학교를 못 가면 어쩌나 약 20년 앞을 내다보고 잠을 못 이루는 밤이 있다. 그것은 그때 가서 할 일, 우선 걱정을 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을 하자.


네 번째는 우리가 가진 기대를 낮추는 것이다, 희망사항이 있는건 좋은데 희망이 너무 크면 실망도 너무 크기 마련이다.


 다섯째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 너무 비관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인생살이에서 가장 값진 것은 눈물이라고 한 어느 시인의 말을 생각하면 슬퍼할 일도 소중한 경험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섯째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은 내 권리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어하던 것을 마음껏 유감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일곱째는 내 생긴 대로 살자는 것이다. 호랑이는 고양이를 보면 "조그마한 놈이 무엄하게 나를 닮았다"고 혼을 내준단다. 그런데 사람은 호랑이보다 못해서 그 반대로 "나를 왜 안 닮아주냐"고 야단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권한, 즉 누구를 속일 권한, 누구에게 정직하게 행동할 권한,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앞세울 권한, 남을 도울 권한, 바보짓을 할 권한, 거짓말을 할 권한, 얌체짓, 질투를 할 권한도 있고, 순수하게 살 권한도 있다.


 여덟째는 행복에 가치를 두라는 것이다.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된다. 나에게 행복이 오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사과가 내 입안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아홉 번째, 우리가 행복감을 방해하는 건강하지 못한 생각을 한다고 생각될 때에는 즉시 다른 생각으로 바꿔치기를 해야 된다. 불안하다, 걱정이 된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걸 더 건강한 생각으로 바꿔치기를 해야 한다.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들 때 손을 쓰지 못하고 운명에 내맡긴다. 행복을 방해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는 그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행동을 해야 된다. 많은 사람들은 불행한 생각이 들어도 어찌 할 줄을 모르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하루 종일 '나는 가치 없는 인가', '나는 쓸모없는 인간', '나는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하루 종일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 있다.


 열 번째는 우리의 행복감을 방해하는 비합리적인 생각이다. 많은 경우 우리의 생각은 합리적이지 못한 극단적인 생각을 스스로 하고, 그 생각 때문에 우리 감정이 영향을 받는다. 어려운 문자를 쓰자면 자승자박(自繩自縛)인 셈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가끔 "나는 모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 선언한다. "사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모르지만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꼭"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등의 극한 용어, 즉 합리적이지 못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 때문에 불행감에 시달린다.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비합리적이다. 이같이 비합리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는 우리는 재빨리 그 합리적 근거를 찾아보고 그 근거를 찾기 어려울 때는 용감하게 그 비합리적인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한다. 앞에서 지적한 비합리적 생각 말고도 우리는 여려 개의 비합리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종합해서 결론을 지어보면 행복이란 우리의 생각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생각에서 끝나는 것이다. 또한 행복은 만들어지는 것인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2002. 9.) (끝)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d2017
이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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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8
어떻게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1)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맨 첫 번째 나오는 답은 돈이다. 그럼 "돈이 행복을 가져오느냐?고 물으면 "물론"이라는 대답이 나온다. 연구 결과를 보면 어느 정도의 돈은 행복을 가져오지만 그 이상은 행복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의 기본권리가 주어지고 의식주가 넉넉하고 여려 가지 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 이를테면 캐나다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행복감과 돈은 관계가 없다.


 물질적인 풍요에 비례해서 행복감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효용체감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월급이 처음 10만원 올랐을 때와 두 번째 10만원 올랐을 때는 다르다. 결국 가서 문제 되는 것은 절대적인 부가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부이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버는 돈에 어느 정도 만족하느냐 하는 해석에 달려있다. 


 행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가진 것에 얼마나 행복해 하느냐에 달려 있다. 윌리엄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 슬픈 일, 기쁜 일이란 없다. 오직 슬프고 기쁜 생각이 있을 뿐이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은 얼마나 "내가 은행에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보다도 "내가 가지고 있는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얘기했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평을 좀 덜해야 된다. 어떤 말을 입 밖에 내놓느냐에 따라 우리 감정과 생각이 달라진다. 물론 우리 감정과 생각에 따라 우리의 말도 달라지지만 우리가 입 밖에 내놓는 말에 따라 우리 감정도 영향을 받는다. 긍정적인 말을 하면 긍정적인 태도를, 부정적인 말을 하면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된다. 한마디로 말하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똑같은 의견이나 말을 수없이 반복하면 그것을 정말로 믿게 된다고 한다. 교회에 가면 이 원리를 이용해서 신도들로 하여금 "미쉼다(믿습니다)" "미쉼다"를 수십 번씩 외치게 하지 않는가.


 그러면 약간 말머리를 돌려서 성공과 실패는 어떻게 행복감에 영향을 주는가 생각해보자. 성공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실패를 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 모두가 일시적이다. 복권에 당첨된다든지, 월급이 올랐다든지, 자전거를 새로 샀다든지, 새 집을 장만했다든지, 새 양복을 장만했다든지.  


 이 모든 것도 일시적인 것으로 오래는 못 간다. 자동차 사고라든지 실연의 쓰라림, 심지어 암(癌)에 걸린 사람도 몇 달만 지나면 정상적인 감정상태로 돌아온다는 보고가 많다고 하지만 한 마디로 우리가 흔희 얘기하는 것처럼 "시간이 약"이라는 것이다. 중국 속담에 "끝이 없는 파티는 없다"는 말이 있다. 맹인이나 불구가 된 사람들도 일정한 기간의 적응기가 지나면 정상에 가까운 기분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미국 일리노이즈 대학에서 연구한 결과를 보면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사람은 50%가 행복하다고 대답하였다.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20% 정도이고, 30%는 "행복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다"로 대답했다. 신체적으로 불구인들의 행복감도 이와 별 차이가 없었다.


 행복감은 우리의 이전 경험에 달려 있다. 심리학의 중요한 원리 하나는 사람은 이전 경험에 비교해서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새 집을 산다든지, 새 자동차를 산다든지, 월급을 받는다든지 이 모든 것이 이전과 비교해서 상하로 감정이 구분된다. 경험이 바뀌면서 옛날의 사치가 오늘의 빈곤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정신과 의사는 "이따위 연봉을 받고 공직에 있는 의사로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 따위 연봉이라는 게 2억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눈알이 튀어나올 돈을 가지고 이따위 연봉이라고 했다. 왜나면 자기의 과거 수입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이전과 비교하는 이러한 현상 때문에 사람들은 욕심을 내고 더 큰 것을 성취하려고 애쓴다. 만약 이 현상이 없다면 우리는 첫번 성공에 만족하고 절대로 더 올라가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환경에 적응하는 현상 때문에 복권 당첨의 행운이라든지, 새 자동차라든지, 교통사고라든지, 잃어버린 애인리라든지, 암이라는 것은 시간이 흐르며 이에 대한 우리의 불행감도 줄어든다.


 우리의 행복은 그날그날 일어나는 작은 일에 따라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굶주리는 북한 사람들에게 쌀을 보내 주어야 하는가?" 같은 제목으로 싸우는 부부는 없다. 아주 시시콜콜 작디작은, 남에게 이걸로 싸웠다 하기에 창피한, 별것 아닌 걸 가지고 원수나 만난 것처럼 싸운다.


 둘째 원리는 반작용의 원리이다. 반작용 원리라는 것은 한 가지 감정은 반드시 그 반대되는 감정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가 끝나면 그 반대되는 감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술꾼이 술기운이 떨어지면 견디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행복의 또 다른 요소로 사회적 비교를 들 수 있다. 오늘 나의 행복이 남의 성취에 달려 있을 때가 많다는 것. 행복감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데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행복감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데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이것이 왜 어제의 빈곤한 사회가 오늘의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다 해도 행복감은 그대로 있느냐는 것을 설명해 준다. 


 한마디로 내 손에 든 떡이 남의 손에 든 떡보다 작을 때는 행복감을 못 느낀다. 연구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자기 말고 다른 사람 20%가 부자라고 생각하는데 자기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1%도 안 된다. 대부분은 "남은 부자이고 나는 부자가 아니가"고 생각한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행복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개 적어보자.


 첫 번째는 아주 능동적이고 활동적이고 바쁘게 지내라는 것이다. 조용하게 지내지 말고 아주 바쁘게 지내자. 꽃꽂이를 한다든지, 낚시를 간다든지, 사교춤을 춘다든지, 헬스클럽에 간다든지, 개를 키워보자. 활동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행복감을 낮추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교, 친교, 대인관계를 많이 하라는 것이다.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며 참여하는 집단이 많고 분주할수록 좋다. 온종일 쏘다니고 남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동물이라 하지 않았는가.


 세 번째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일 일은 내일 일이다. 아이가 유치원을 마치고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못 가서 대학교를 못 가면 어쩌나 약 20년 앞을 내다보고 잠을 못 이루는 밤이 있다. 그것은 그때 가서 할 일, 우선 걱정을 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을 하자.


네 번째는 우리가 가진 기대를 낮추는 것이다, 희망사항이 있는건 좋은데 희망이 너무 크면 실망도 너무 크기 마련이다.


 다섯째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 너무 비관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인생살이에서 가장 값진 것은 눈물이라고 한 어느 시인의 말을 생각하면 슬퍼할 일도 소중한 경험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섯째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은 내 권리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어하던 것을 마음껏 유감없이 할 수 있어야 하낟.


 일곱째는 내 생긴 대로 살자는 것이다. 호랑이는 고양이를 보면 "조그마한 놈이 무엄하게 나를 닮았다"고 혼을 내준단다. 그런데 사람은 호랑이보다 못해서 그 반대로 "나를 왜 안 닮아주냐"고 야단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권한, 즉 누구를 속일 권한, 누구에게 정직하게 행동할 권한,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앞세울 권한, 남을 도울 권한, 바보짓을 할 권한, 거짓말을 할 권한, 얌체짓, 질투를 할 권한도 있고, 순수하게 살 권한도 있다.


 여덟째는 행복에 가치를 두라는 것이다.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된다. 나에게 행복이 오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사과가 내 입안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아홉 번째, 우리가 행복감을 방해하는 건강하지 못한 생각을 한다고 생각될 때에는 즉시 다른 생각으로 바꿔치기를 해야 된다. 불안하다, 걱정이 된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걸 더 건강한 생각으로 바꿔치기를 해야 한다.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들 때 손을 쓰지 못하고 운명에 내맡긴다. 행복을 방해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는 그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행동을 해야 된다. 많은 사람들은 불행한 생각이 들어도 어찌 할 줄을 모르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하루 종일 '나는 가치 없는 인가', '나는 쓸모없는 인간', '나는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하루 종일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 있다.


 열 번째는 우리의 행복감을 방해하는 비합리적인 생각이다. 많은 경우 우리의 생각은 합리적이지 못한 극단적인 생각을 스스로 하고, 그 생각 때문에 우리 감정이 영향을 받는다. 어려운 문자를 쓰자면 자승자박(自繩自縛)인 셈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가끔 "나는 모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 선언한다. "사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모르지만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꼭"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등의 극한 용어, 즉 합리적이지 못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 때문에 불행감에 시달린다.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비합리적이다. 이같이 비합리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는 우리는 재빨리 그 합리적 근거를 찾아보고 그 근거를 찾기 어려울 때는 용감하게 그 비합리적인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한다. 앞에서 지적한 비합리적 생각 말고도 우리는 여려 개의 비합리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종합해서 결론을 지어보면 행복이란 우리의 생각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생각에서 끝나는 것이다. 또한 행복은 만들어지는 것인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200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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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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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행복 불감증

 

 토론토대학교 철학 교수로 있는 킹웰(Mark Kingwell)이라는 사람에 따르면 현재 이 세상에 알려져 있는 정신병은 모두 374개로 거의 400개에 가깝다 한다. 이것은 10년 전의 297개에 비해 무척이나 많이 늘어난 것이다. 이렇게 정신병 종류가 많이 늘어난 것은 문화적으로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상태의 혼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최근 사회심리학에서 나오는 얘기를 들어보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생리적이랄까, 타고난 성향이 상상외로 큰 역할을 한다고 한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자신에게 좋은 일, 즉 자신에게 긍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횟수가 많은 사람들은 그만큼 행복감이 높은 반면 자신에게 좋지 못한 일, 즉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횟수가 많은 사람들은 행복감이 낮을 것 같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객관적인 사건과는 관계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 행복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관계없이 언제나 행복감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행복감이라곤 느끼지 못하고 불평불만으로 찌푸린 얼굴을 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돈이 많고 교육 정도가 높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행복감이 남보다 높긴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높지는 않고, 가난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고 해서 행복감이 낮은 것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좋은 소식이다. 신(神)은 이 세상을 참 공평하게 만들었나보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밤에 두 아이를 둔 아버지가 생활고로 자살을 했다는 아침 뉴스를 듣고 "생활조건이 좋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구나" 하는 결론을 내릴 때가 많다. 그런데 그 결론이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재물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객관적 조건은 행복감과 그다지 큰 관련이 없다는 연구보고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많다. 사회적 지위, 돈, 이 세 가지가 종합해서도 행복변량의 8%~15% 밖에 설명 못한다는 것이다. 행복감과 가장 큰 연관을 보이는 것은 재물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건강이라고 한다. 역시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평범한 말은 천년을 내려와도 변함이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건강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건강이 곧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는가.


 그런데 상대적으로 행복감이 높은 사람들과 낮은 사람들 간에는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을 해석하는 데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 즉 좋은, 긍정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행복감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간에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좋지 못한, 부정적인 사건을 받아들이는 데는 행복감이 높은 사람들과 낮은 사람들 간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 즉, 행복감이 낮은 사람들은 부정적인 사건을 더 부정적으로, 행복감이 높은 사람들은 부정적 사건에 대해서도 그 사건의 긍정적 면을 찾아내어 덜 부정적이 되도록 해석한다는 주장이 있다. 


 예로 시험에 낙방을 한 것 같은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행복감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들은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내 인생은 이제 막다른 골목에 왔구나" 하는 극히 부정적인 해석을 한다는 것. 그러나 행복감이 높은 사람들은 "내가 시험에 떨어지다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있다. 이번 낙방을 좋은 경험으로. " 하는 식의 덜 부정적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지도하고 있는 I양의 석사논문에서는 그 반대 결과가 나왔다. 노인들은 연구 대상으로 한 그이 논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즉 노인들은 부정적인 사건을 해석하는 데는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노인들과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노인들 간에 차이가 없다. 그러나 긍정적 사건을 해석하는 데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즉, 행복감이 높은 노인들은 긍정적인 사건을 더 기분이 좋은 것으로 해석하지만 행복감이 낮은 노인들은 행복한 사건이 있어도 그다지 행복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결과이다. 


 우리는 아직 이 선행연구와 다른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문화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면 노인과 젊은이들 차이 때문인가. 젊은이는 늙은이에 비해 부정적 사건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진다는 연구 보고가 많다.


 사람의 일생이란 것도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건강을 찾고, 돈을 벌고, 지위를 찾는 것도 행복하기 위한 간절한 소망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에서 행복을 완전히 거머쥔 사람도 없고, 행복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도 없다. 듣기 좋은 말이다. 


 행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있다. 이렇게 가까운데 두고 그걸 찾아 그렇게 멀리 헤매는 것이 인생살이라 생각하니 사람이란 게 무척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청마(靑馬) 유치환의 노래처럼 "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마는 머리 위에 푸른 하늘 있어 이렇게 행복되노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200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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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이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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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0
묘지송(墓地頌)

 


 요사이 들어 묘지를 찾아가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지난 9월에 장모님이 돌아가셔서 집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정도 걸리는 동네 공동묘지에 모신 후다. 사실 나는 장모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도 묘지에 가서 돌아다니길 좋아했으니, 이 버릇은 꽤 오래 된 셈이다. 


 지금부터 20여 년 전인 1974년 중반에 캐나다 서부의 레드 디어(Red Deer)라는, 우리 말로 옮기면 '붉은 사슴'이라는 인구 3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마을에 있는 앨버타 학교 병원(Alberta School Hospital)이라는 기관에서 심리학자로 일한 적이 있다. 그 기관은 웬만한 크기의 대학보다도 더 넓은 부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부속 건물들도 서로 1천 미터나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A군(群)과 B군으로 갈라져 있었다.


 A군에서 B군 건물 사이에는 작은 계곡이 하나 있고 바로 그 계곡 옆으로는 큰 공동묘지가 하나 있었다. 그래서 다른 건물군(群)으로 오갈 때는 그 공동묘지 옆을 지나가곤 했다. 그러다가 호기심으로 몇 번 그 안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묘석을 살펴보며 다닌 것이 그만 습관이 되고 말았다. 간혹 중국 산동성(山東省) 어디에서 태어나서 캐나다에 와서 죽었다는 것을 한문으로 적어둔 묘석을 볼 때는 아련한 향수나 슬픔 같은 것이 배어들어 한참 그 묘비의 주인공에 대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장모님 묘소에서 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우리 동네에서 살다가 세상을 뜬 우리 마을 사람들의 묘석도 대여섯 개가 눈에 띈다. 그 가운데 C형의 묘석은 볼 때마다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마흔여섯 살 나이에 저세상으로 간 C형은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했었는데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캐나다에 친척은 물론 가까운 친구도 별로 없어서 뼈에 저리도록 외롭게 살았을 C형. 췌장암으로 목숨을 잃었다. 나는 그가 죽기 며칠 전에 문병을 가서 임종석에 누워 눈을 껌벅이며 씩 웃던 그를 본 생각이 난다. 바다가 보이는 양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하나 바다가 천리만리 밖인 우리 동네에서 그 유언은 사치스러운 빈말이 되었고, 그 대신 템스강 물줄기가 저 멀리 내려다 보이는 공동묘지에 잠들게 되었다. 아내도 자식도 없이 갔으니 그가 묻힌 후 15년 동안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을까? 아무도 없지 싶다.


 내가 공동묘지를 좋아하는 데는 무슨 별난 사연이나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굳이 이야기 한다면, 술이 내 기분을 들뜨게 만든다면 묘지는 내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진정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묘지는 내가 세상을 때문에 안달하고, 성내고, 시기하는 것은 물론, 기뻐하고, 흥겨워하고, 뻐기는 그 모든 일체를 한순간에 가라앉혀 버리는 것이다.


 인생이 허무한 것이라는 생각을 뼛속까지 느낄 때는 장례식에서 돌아올 때일 것이고 세상살이를 그렇게 바둥대며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좀 마음을 놓고 쉽게 살아가자는 다짐이 간절할 때는 묘비 앞에서일 것 같다.


 묘지는 내 삶의 모든 것과 심지어는 삶 그 자체까지 새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묘비 앞에 서면 죽음과 친숙해질 수 있어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도 줄어든다.


 생각해보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무서운 것이지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삶이 끝나면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끝나면 죽음도 끝난다"고 한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죽은 뒤의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은 뒤의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0여 년 전에 같은 동네에 살던 S형이 마흔일곱 나이에 간암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나는 걸핏하면 그의 무덤을 찾아가곤 했다. 장모님은 "공연히 그런데 가는 게 아니다"는 충고를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죽음이 상서롭지 못하고 불쾌한 것이라는 생각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오전에 장모님의 무덤을 다녀왔다. 나보고 "일없이 그런데 자꾸 가는 게 아니다"고 충고하시던 장모님이 오늘은 어느 시인이 그의 친구 무덤 앞에서 읊은 노래처럼 "아, 벌써 가느냐고, 언제 또 오느냐"고 무덤 속에서 쓸쓸한 표정을 지으실 것만 같았다.(199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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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4
진화심리학에서 바라본 행복(2)

 

 
 현대인의 행복이 원시 태곳적 환경과 너무나 뚜렷한 차이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면 이에 대비해서 현대인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서운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더위와 추위, 전염병과 천재지변에 별 대처를 할 수 없었던 원시 태곳적 환경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진화심리학이 현대인의 행복을 위해서 내놓을 수 있는 '처방'은 대충 다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맨 먼저는 흩어진 가족, 일가친척 간에 약해진 상호지지 관계를 보완 수습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가까운 거리에서 매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지내던 식구들과 일가친척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꿈을 찾아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살고 있으므로 해서 서로가 외로움과 우울증을 겪기 쉬웠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보다 더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해야 한다. 


 이 점에서 핸드폰은 물론 E-mail이나 팩스, 비디오테이프 같은 전자 통신 수단은 실로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의 저쪽 아프리카 대륙의 공사장에 있는 아들이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사촌, 친구들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천리를 지척에 두는'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지 않는가.


 행복을 향한 걸음의 또 하나는 깊은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깊은 우정을 나누기가 점점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깊은 우정이란 평상시보다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찾아보기가 더 쉬울 것이다. 서양 속담에 "필요한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현대 사회는 진짜 우정을 시험할 수 있는 많은 '위기'들은 거의 사라졌다. 무서운 짐승들의 위험은 말할 것도 없고 천재지변의 위험도 이제는 극히 적은 정도로 줄어들었다. 도둑질이나 강탈 행위는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부족과 부족, 개인과 개인 사이의 다툼은 경찰서와 재판소가 관리한다.


 무서운 짐승들과 싸우는 데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창칼을 들고 나설 친구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겪는 비교적 '좋은 시절', 풍랑 없는 뱃길에서는 진짜 우정과 가짜 우정의 차이도 희미해졌다.


 인간이 자신의 심리적 불안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진화를 했다면 그것을 줄이는 사회적 환경도 만들 수 있다. 예로,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가치, 흥미, 취미, 성격과 비슷한 사람으로 정하는 것은 미래의 불행을 예방하는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수많은 사회심리학 연구가 배우자 간에 흥미나 가치, 성격이나 취미가 서로 다르면 그 사이에 애정의 금이 가기 쉽다고 한다. 서로 달라서 매력을 느끼고 상호 보충을 할 것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틀린 말이다. 가치나 흥미 취미나 성격이 비슷한 배우자를 고른다는 것은 배우자의 바람(외도)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질투심을 막는 좋은 방법이다.


 진화론에서 행복을 바라보는 시각 중에 가장 큰 어려운 문제 하나가 상호 경쟁과 자리다툼에 대한 생각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차별을 없애고 협동을 늘이는 것이다. 진화 심리학이 내놓을 수 있는 충고의 하나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식의 공동 운명의식을 권장하는 것이다. 적에 대한 공동 투쟁, 천재지변 같은 고난에 대한 공동 노력같이 개인의 운명이 집단 안[內]사람들의 운명과 연관이 될 때는 경쟁심은 내려가고 협동심을 올라가기 마련인 것이다.


 행복을 성취하는 또하나의 방법은 진화된 욕망을 이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에 적응해서 진화한 것처럼 성취를 해서 오는 기쁨도 진화를 했다. 성공, 건강하나 육체, 남을 돕는데서 오는 기쁨, 긴밀한 인간관계, 자신감, 유능감 등은 현대인에게 가슴 뿌듯한 행복을 안겨주는 것들이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것은 결혼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유전인자, 즉 자기의 종자를 넓게 많이 퍼뜨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동물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쉬운 것이 결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아룁기 황송한 말씀이나 행복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 하나는 남녀를 막론하고 결혼을 한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남편의 횡포, 아내의 변덕, 자식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시집, 처갓집 식구들 때문에 속상할 때도 있지마는 그 부대끼는 세월에 부대끼는 즐거움이 그래도 독신으로 사는것보다는 훨씬 더 크다는 말이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미(美)적 감각도 원시 태곳적 환경과 연결지어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즉 인간은 미적 유쾌함을 즐길수 있도록 해주는 여러 가지 기제를 가지도록 진화했다는 것. 예로, 현대인은 원시 태곳적 풍경과 비슷한 초원과 지형을 좋아하며 인공재배보다는 자연산을, "남은 나를 들여다보지 못해도 나는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비밀스런 장소에 집을 짓기를 좋아한다. 


 오늘의 현대인은 일년 열두 달 어느 때나 슈퍼마켓 선반에 놓인 채소를 집어들 수 있으니, 3, 4월 봄이 와서 첫 냉이 뿌리를 캐서 입에 넣는 원시 태곳적 사람들의 달콤한 맛을 느끼기는 어렵게 되었다. 없는 게 없고 지나치게 편리한 세상이 놀라움과 반가움에서 오는 즐거움을 방해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요소는 앞에서 말한 것 말고도 수없이 많다. 그중에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예로, 사람은 얻음[得]과 잃음[失]을 똑같이 경험하지 않는다. 돈 10만원을 잃어버리는 아픔은 10만원을 얻은 기쁨보다 훨씬 더 오래가고 그 아픔은 기억 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정구선수가 말한, "나는 이기기를 좋아하기보다 지기를 싫어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까. 


 왜 잃음[失]의 아픔이 얻음[得]의 기쁨보다 오래 가는 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날 현대인의 감정이 행복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물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200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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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7
진화심리학에서 바라본 행복(1)

 

 몇 주 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어느 음악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한 사람이 무대에 나와서 청중에게 인사를 하고 활[bow]을 막 바이올린에 대려는 순간, 어디서 "삐르르르, 삐르르르. " 하고 핸드폰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순간 이 갑작스러운 '사건'에 놀란 바이올리니스트는 활을 내리고 "아줌마 빨리 전화 받으세요. " 하는 말을 내던지고는 무대 옆으로 휙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화가 나도 몹시 난 것이 틀림없다.


 지난해 8월 한국에 와서 이삿짐을 풀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이 핸드폰이라는 문명의 이기였다. 이 요물은 실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전철, 버스, 기차는 말할 것도 없고 식당, 강의실, 극장, 화장실, 목욕탕, 어디 한 군데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공중장소에서 고막이 터질 듯 큰소리로 통화를 하는데(특히 경상도 아줌마 아저씨들 제발 좀 봐주셔요) 놀라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내버스에서 핸드폰으로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목이 터져라고 "냉장고 쪼꼬마한 냄비 안에 있는 콩나물국 뎁혀 머거레이" 하고 소리치는 어머니의 애정 어린 지시를 들으면 그런 고성능 전파를 타고 오는 어머니의 보살핌 한 번 받아보질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데 대한 억울함 비슷한 것도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핸드폰같이 편리한 문명의 이기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긴밀하고 가깝게 만들어 주는 데 도움이 될까 안될까, 더 길게는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닐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텔레비전을 생각해보면 행복을 증진하는데 방해는 되지 않지만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기 보다는 따로따로 떼어놓는 반(反)사회적 행동을 부채질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텔레비전은 사람들을 안방에 가두어 두고 여름밤 이웃집 아저씨와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친(親)사회적인 행동을 막는다. 동네 아이들도 집 밖에 나와서 저희끼리 와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모습은 점점 줄어가고 텔레비전, 아니면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 있는 외로운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지 않을까.


 텔레비전과 비교해서 핸드폰은 어떨까? 약간 길을 벗어난 이야기가 되겠지마는 일반적으로 진화 심리학에서는 동굴 속에서 살던 우리 조상들의 원시 태곳적 생활환경과 현대 환경의 엄청난 차이 때문에 현대인이 행복감을 느끼는데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진화심리학이란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진 모든 특성은 동굴 생활을 하던 원시 태곳적 환경에서 시작해서 수수만년을 내려오는 동안 정직성이나 책임감 같은 다른 모든 심리적 특성이 생리적 특성과 마찬가지로 생식과 번식에 필요한 진화 과정을 통해서 살아남은 진화의 마지막 결정체로 본다. 


 이런 심리적 특성들은 처음 원시.태곳적 환경에서 맹수나 천재지변과 질병에 시달리고, 다른 부족과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나 현대생활에서 행복을 성취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견해이다.


 예로, 질투심이 그렇다. 질투심이란 태곳적 환경에서는 자기의 종자번식에 절대 필요한 성(性)적 파트너를 남에게 빼앗기거나 자기의 파트너가 몰래 남의 아이를 잉태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 생긴 특성이었다. 그런데 이 질투심은 자기 파트너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사람들이 자기의 성적 파트너를 남에게 빼앗기거나 남의 아이를 잉태했어도 별로 놀라지 않았던 사람들을 종족 보존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아직까지 하나의 잔재로 남아 있는 특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은 그 질투심 때문에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거나 잠 못 이루는 밤의 고통을 겪는 수가 있다.


 이것 말고도 태곳적 환경과 현대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현대인의 행복감을 방해하는 경우는 실로 많다. 예로, 태고 원시적 환경에서는 보통 50명, 100명의 혈육으로 얽힌 소규모 집단으로 살았으니 성(性)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다르다. 10만, 100만의 무수한 사람들이 거대한 공간에 퍼져 살고 있고 성(性)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후보자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성관계는 늘어가는 반면 깊고 긴밀한 성관계를 줄어든다. 여기서 오는 정서적인 공허감도 현대인의 행복감을 방해하는 무시 못할 요소이다.


 게다가 텔레비전을 비롯한 각종 매스 미디어는 날마다 세계 정상급 미남 미녀, 정상급 운동선수, 정상급 음악가, 정상급 댄서 등 그야말로 한 나라 혹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정상급 음악가, 정상급 댄서 등 그야말로 한 나라 혹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정상급에 대한 사람들의 소개를 쏟아 놓는다. 원시 태곳적 환경에서는 우리 마을에서 ‘내가 제일 힘센 사람’이나 ‘얼굴이 제일 예쁜 사람’은 이제 그 나라 혹은 세계의 정상급과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될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나는 유능한 사람’이라는 뿌듯한 자신감에서 오는 행복감을 유지하기는 더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원시 태곳적 환경과 현대 생활환경의 차이 때문에 행복감이 방해를 받는다면 그에 대한 ‘대책’ 같은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늘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자주 해서 외로움을 덜게 함으로써 원시 태곳적 환경과의 차이를 좁히는 것일 것이다. 이 점에서 핸드폰은 크게 공헌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사람이 이제 몇 발짝만 더 가면 어디쯤 도착할 것 같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에서는 대화도 많고 빠르고 정확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좌우간 소위 핸드폰같이 문명의 이기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바꾸어 놓는데 한몫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가?”에 명쾌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어떤 사람이 공자(孔子)를 보고 “선생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공자 “야 이 사람아, 내가 삶[生]도 모르는데 죽음[死]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대답했다 하지 않는가.


 삶과 죽음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승의 삶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 행복은 나 이외 다른 인간과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장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 없이 내 행복은 어려워진다. (200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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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논다는 것

 
 학생들에게 이번 방학에 무얼 하느냐?고 물어본다. 대부분이 영어 강습소를 다녀 영어 실력을 올리겠다는 대답이다. 나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든지, 소설이나 보며 집에서 실컷 놀기나 하라고 권한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놀 수 있는 때가 그리 많지 않은데, 그때는 바로 학창 시절, 그것도 방학 때일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학생들은 여행은 참 좋은 생각이지만. 하고 뒤끝을 흐린다. 아마도 여행할 돈이 없기보다는 할 일이 이렇게 많은데 뒤로 물려놓고 여행을 쉽게 갈 수 있겠느냐는 것 같다. 요새 학생들은 이런 의미에서 참 불쌍하다. 웬 학생이 해야 할 일이 그렇게도 많은지!


 여행은 노는 것이다. 노는 것은 즐거운 것. 여행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비성 행사이다. 그런데 우리는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을 엄연히 구분한다. 책을 들여다보며 영어 단어라도 하나 더 외우려 할 때는 공부, 만화나 보고 낚시질을 가는 것은 노는 것이라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놀이는 일 않고 세월을 보내는 것이니까.


 '놀다'라는 말은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니 여가가 있어야 쓸 수 있는 행위이다. 옛날 옛적에는 놀이는 일과 함께 존재했다. 즉 놀이는 노동을 즐겁게 해주는 목적으로 있었다. 농사일을 하며 부르는 농요나 고기를 낚으며 부르는 뱃노래를 보면 알 수 있다. 


 고인돌을 운반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무거운 돌을 움직이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어떤 사람은 술을 마셨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흥얼거렸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풋잠을 잤을 것이다. 모두 다 다음 차례릐 힘든 노동을 준비하기 위해서 제각기 다른 놀이를 한 것이다.


 한편 일은 힘들고 고단한 것이다. 옛날 옛날 그 옛날, 일과 놀이가 나뉘어지기 전에는 노는 꼴이나 노는 양도 사람들 사이에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계급 사회가 되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나타나면서 가진 자는 고된 노동을 적게 함으로써 시간적 여유가 더 많았고 놀 시간이 더 많아졌다.


 놀이에도 동서양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같이 집단주의 유교권 사회에서는 노는 데도 '건전하게', '점잖게', '신분에 맞게' 놀아야 한다. 그러니 서당깨나 다닌 사람은 여가에 난초를 치거나 서화나 창을 즐길 것이요, 놀이패 같은 것은 못 배운 사람이나 하는 놀이다. 놀이에 대한 경직성이 크고 여가선택의 폭도 극히 좁다. 예로, 봄이면 널 뛰고, 연 날리고, 윷판 벌리고 여름에는 그네나 씨름, 가을이면 강강수월래나 농악이 전부인 것이다. 


 그리고 놀이도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도박을 한다든지 버스간에서 춤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여가 사회학]이라는 책을 쓴 김문겸님 주장에 의하면 우리 놀이에는 TV나 술집, 바둑이나 장기처럼 자리를 뜨지 않고 "앉아서 깔고 뭉개는" 놀이가 많다고 한다. 땅을 떠나기 싫어하는 농경사회의 유물이 그대로 있는 것 같다.


 반대로 서구의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놀이가 사회 공익만 해치지 않고 자신에 기쁨만 주면 OK이다. 고로 여가문화도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의식만큼 여러 가지여서 개인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그 자체가 여가이다. 여가의 범위는 여러 가지이다. 도박, 마약 등이 사회적으로 큰 거부감 없이 여가활동으로 수용된다는 것이 Godbey라는 사람의 주장이다.


 우리나라 같은 농경국가에서 출발한 나라의 놀이는 협동을 요구하거나 집단 단결을 유지하는 놀이, 예를 들면 줄다리기나 횃불싸움 같은 것이 많다고 한다. 우리는 좀처럼 혼자서 노래방이나 술집을 가지 않는다.


 그런데 요사이 놀이의 여왕벌로 뜨는 것이 하나 있으니 이는 다름 아닌 노래방이다. 노래방은 참으로 단군의 피를 받은 자손 적성에 맞는 놀이인 것 같다. 첫째 그것은 노래 중심이니 노래를 좋아하는 한국사람 취향에 꼭 맞는 것이요, 둘째 노래방은 여러 사람이 빙 둘러앉아서 제 신명나는 대로 하는 것이니 미리 정한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나이 많은 사람이 첫 번째 노래를 하는 사람으로 지목되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도 알고 보면 어디까지나 나이 많은 사람을 빨리 잠재우고 젊은 사람들끼리 놀겠다는 속심이 있는 경우가 많다. 


 셋째,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노래를 잘 하거나 못 하거나는 큰 상관이 되질 않는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정말 노래를 잘못할 때는 응원군은 얼마든지 있다. 노래를 잘하고 잘못하고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노래방이 한국 사람의 놀이 문화에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는 크고 오래갈 것 같다.


 한국의 놀이문화는 굿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굿판에서는 흥을 잘 내든 못 내든 별 상관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 술을 마실 줄 모른다 해도 억지로 술을 권하는 것도 굿판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처럼 가진 자라 할까 지배계급의 놀이행사도 이중적으로 되어 있는 사회도 드물지 싶다. 우리나라에서 지배계급은 겉으로는 ‘건전’을 외치지만 뒤로 돌아서서는 ‘호박씨 까는’, 원색적인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가 많다. 건전을 외치던 지배계급이 은밀히 또 하나의 ‘사모님’을 두고 있다든지 원색적인 오락을 즐기고 있을 때가 많다는 말이다.


 오는 겨울방학에는 학생들이 뭐좀 달라졌겠지. 어떤 녀석은 소설을 많이 읽었을 테고, 또 어떤 녀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워 동해안 눈바람을 맞고 왔을 것이다. 이 모두가 어른이 되면 해 보기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쉽지 않은 놀이들이라는 것은 녀석들이 어른이 되어보면 알 일.


 1주만 있으면 겨울방학이다. 신난다. 나에게 시작되는 영원한 겨울방학, 즉 은퇴가 내년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은퇴하면 무엇을 할까?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그것도 쓸데없는 일. 10분만 보면 눈이 어른거려 책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색소폰이나 부- 부- 불어보고 싶지만 그럴 기운이 있겠는가. 걸어서 10분 남짓 거리에 큰 저수지가 있으니 낚시질이나 갈까. (2004.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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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8
순발력

 

 미국 닉슨(Nixon0 대통령 시절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워터게이트(Watergate)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의 참모습을 알아보기 위한 공청회 자리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미국 하와이 상원의원 이노우에씨가 어느 증인에 대한 질문을 끝낸 바로 뒤 마이크가 열려 있는 줄 모르고 "What a liar(거짓말쟁이!)"라고 혼자 중얼거린 것이 그대로 방송되어 버렸다. 분명 이노우에 의원의 실수였다. "증인에게 질문을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비난이 빗발쳤다. 궁지에 몰리자 이노우에 의원은 자기는 그 증인이 묻는 말에 하도 척척 대답을 잘해서 감탄하여 "What a lawyer(대단한 변호사군!)" 하고 중얼거렸노라고 우겼다. Lawyer와 liar는 그 의미는 다르지마는 발음이 비슷하여 들어서 똑 떨어지게 구별이 가지 않는 말이다. 이노우에 상원의원의 이 같은 즉흥적 변명을 순발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게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양 이야기고 우리나라 예는 어릴 때 아버님에게서 들은 다음과 같은 일화 한 토막이 생각난다. 즉, 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난 후였다. 어느 젊은 선비 한 사람이 대원군을 찾아갔다. 대원군에게 넙죽 절을 올렸으나 대원군은 일에 바쁜지 본체만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이 선비는 한 번 더 절을 했다. 이때 모르는 척 하던 대원군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예끼, 이놈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닌데 절을 두 번 하다니." 당황한 이 선비는 "첫 번째 절은 왔다는 인사이고 두 번째 절은 소인 물러간다는 절이옵니다"고 임기웅변을 하였다. 이 기막힌 순발력에 대원군도 놀랐고 나중에 이 선비에게 큰 벼술을 주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순발력이 없는 사람이다. 네가 옳으니 그르니 하는 논쟁같은 것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곰곰이 그 장면을 마음속으로 다시 생각해 보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왜 그때 그 말을 못했던고." "그 때 이 말을 했더라면 상대방이 옴짝달싹 못했을 텐데" 하는 때늦은 후회를 해 본다. "나는 참 둔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버스 지나간 뒤에 손 든다"는 말과 같다고 할까.


 이것도 순발력과 관계된 것일까, 나는 사람이 여럿 모인 데서 갑자기 몇 마디 하라고 하면 꾸며댈 말이 없어서 쩔쩔맨다. 이런 경우 준비해 온 것처럼 마이크를 잡고 거침없이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참 부럽다. 이런 사람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며 기도하는 버릇을 들였던 사람들인 것 같다.


[국어 대사전]을 보니 순발력이란 “한 순간에 집중ㅇ적으로 내는 힘”이다. 그런데 언어에 대한 순발력은 이것 말고도 꾀라 할까 지혜가 있어야 되지 단순히 머리가 좋고 나쁜 것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 아내의 절친한 친구 중에 뛰어난 수재로 알려진 K씨가 있다. K씨 당사자가 수재일 뿐 아니라 K씨 집안이 온통 수재 덩어리다. 그런데 아내 말에 따르면 K씨는 순발력은 영점인 천진고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K씨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 단순히 꾀가 그다지 많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순발력이 그다지 없어도 순발력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쓸 때가 많다. 그런데 순발력이 워낙 없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쓸 때가 많다. 그런데 순발력이 워낙 없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행동을 하는 것도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학생들은 몇 해 전에 내가 한(재치 있게 보이는) 농담을 해가 바뀌어도 그대로 써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같다. 큰일이다.


 나도 순발력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순발력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부럽던 순발력이 점점 부럽지 않게 되어간다. “내 생긴 대로 살자”는 말을 따르는 것이 좋고 “지금 와서 순발력이 많은들 무엇하리”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늙으면 늙은 대로 살아가고 생긴 대로 살아가는 것이 지족안분(知足安分)이 주는 교훈이 아닌가? 순발력 없는 사람이 지금 와서 순발력 많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것도 지나친 욕심이라면 욕심이다.


 남의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주제에 순발력까지 바란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꿈이요, 허영이요, 욕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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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이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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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0
울음

 

 우리는 여러 가지 일로 운다. 배우자를 잃었을 때는 물론, 자신이 서러운 일을 당하거나 남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운다. 흘러간 옛 노래가 나오는 [가요무대]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비 내리는 고모령"이나 "불효자는 웁니다" 같은 애조 띤 노래가 나오면 금시 손수건을 찾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꼭 슬픈 일을 당해서 우는 것만은 아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된다든지, 결혼식장에서 부모에 드리는 인사에서도 신부 되는 사람은 울고(신부가 결혼식장에서 좋아서 너무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것은 철따구니 없어 보인다) 고생고생해서 키운 딸이 신랑의 손을 잡고 손님들에게 인사를 올려도 부모 되는 사람은 눈물을 글썽인다.


 30년, 40년 떨어져 있던 가족을 다시 만나서도 울고, 자녀가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운다. 지금까지 쌓여온 정(情)과 한(恨), 원(怨)과 그리움, 이 모두가 하나로 용해되어 한 방울의 눈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250여 년 전에 태어난 박지원은 복잡한 심리실험실 없이도 이 사실을 스스로 알았다. 그가 중국에 다녀와서 쓴 [영하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칠정(七情) 가운데 슬픈 감정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만 알았지…까지것 기쁘면 울 수도 있고,까지것 골이 나면 울 수도 있고, 까지것 울 수 있고, 까지것 사랑하면 울 수 있고, 까지것 미우면 울 수 있고…맺힌 감정은 한번 홀딱 푸는 데는 소리쳐 우는 것처럼 더 빠른 방법이 없다.”


 재미있는 것은, 그다지 울 일이 아닌데도 울음을 한번 시작하게 되면 자신의 구슬픈 소리, 자기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 뺨에 흘러내리는 축축한 물기 등이 모두 하나의 자극이 된다. 이 복합 자극 때문에 건성으로 시작한 울음은 점점 심각하게 되고 이렇게 울다 보면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로 내리막길 내려가듯이 나중에는 정말로 설움에 북받쳐 더 열심히 울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울음이 울음을 낳을 뿐 아니라 울음도 웃음처럼 전염이 된다. 사회심리학자들에 따라서는 기쁜 감정 때문에 숨이 가빠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것이나, 성난 감정 때문에 숨이 가빠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것은 생리적으로는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당사자가 그 현상이나 사건을 어떻게 이름 붙이느냐에 따라 기쁨도 되고 분노도 된다는 것, 기쁜 것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기쁨이, 억울하다는 이름을 붙이면 분노가 된다는 말이다.


 울음은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한 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다. 울음은 물, 염분, 단백질, 리피드(lipid)와 당분으로 구성된 눈물을 생산한다. 울음은 우리 신체가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한계가 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생화학자요 눈물박사로 알려진 미국 미네소타에 있는 흐레이(William Frey II) 교수에 의하면 울고 난 다음에 미국 여자들의 85%는 기분이 더 좋아지고 남자들은 이보다 적은 70% 정도가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우리나라에서는 통성기도를 하는 교회에 가서 목을 놓아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고 한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는 “은혜 받았다”고 한다. 남자나 여자들이 12살 전에는 비슷한 정도로 울지만 18살 정도에 이르면 여자가 남자보다 1배 반 정도 더 자주 운다고 한다. 용감무쌍해야 할 사내가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나약한 행동의 노출이라는 문화적 세뇌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 남자가 울어도 좋다는 것을 가르치는 사회는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는 정도에도 문화적 차이가 있다. 북미보다는 구라파 사람들이 더 많이 울고, 구라파 사람들 중에서도 이태리 사람들이 더 많이 운다. 한국 사람들은 어떨까? 내 생각으로는 이태리 사람 못지않게 눈물과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인지 텔레비전을 보면 유난히 우는 장면과 먹는 장면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는 데도 죽기 살기, 그야말로 젖먹는 힘을 다해서 운다. 가족 중에 사별(死別) 같은 갑작스런 비극을 당해서 우는 것을 보라. 옆에 두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우는 장본인은 그야말로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죄송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악을 바락바락 써가며 운다.


 북미 사람들은 울 때도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2002년에 뉴욕에서 세계무역센터 비극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 유가족들이 우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울어도 손수건만 눈에 갖다대고 흐느끼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워밍업(warming-up)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점잖은 말로 하면 신사적이고, 교양 있게 운다고 할까. 화끈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교양이고 신사적이고 모두 저리 가라다. 우리는 그야말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애절하고, 정성을 다해서 운다. 지진강도를 말해주는 리히터(Richter) 척도로 말하면 북미 사람들이 2.0이라면 우리는 0.9의 강진이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극과 극에 치우치는 경향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세계의 문화와 노력]이라는 책을 쓴 홉스테드(Hofstede)라는 사람의 주장을 따르면 불확실한 것을 잘 참는 사회가 있고, 불확실성을 잘 참지 못하는 사회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불확실한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사회에 속한다고 한다.


 그런데 불확실한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사회는 모든 것이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다는 것이다. 미국 템플대학에서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있는 최준식 교수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종교를 믿는 것을 보면 홉스테드가 말한 극으로 치닫는 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믿는다는 것이다. 설교를 듣고 찬송 몇 곡 부르는 것만으로 직성이 풀리지 않아 울부짖으며 통성기도를 하고 방언(放言)을 한바탕 하고나야 속이 후련하고 은혜 받았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열심히 운다는 말은 그만큼 감정의 기폭이 넓다는 말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어느 정도 감정 기폭이 있어야 “사는 맛”이 난다고 생각한다. 흥분한 일도, 슬퍼할 일도 없는 사회에서 산다고 가정해 보라. 춥고 더운 기온 변화가 없는 데서 사는 것 같아서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북미대륙에서 오래 산 우리 교민들을 보면, 좀 과장된 표현을 빌리면 방금 병석에서 일어난 환자처럼 맥이 풀려있다. 그러나 흥분할 일도 많고 슬프고 분한 일도 많은 한국 같은데 살면 늘 깨어있는 사람이 된다.


 웃음의 반대는 울음이고 울음의 반대는 웃음이다. 모든 사람들이 노산 이은상의 노래처럼 “마음에 색동옷 입혀 웃고 지내기”를 원한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한 세상 살아가는 데는 눈물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고. 가끔 아무도 없는 데 가서 혼자 실컷 울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20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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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이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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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우리말과 우리글

 


 해마다 5월과 11월이 되면 대학가에서는 논문 심사에 바쁘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1년에 석사 논문 2, 3편에 가뭄에 콩 나기로 박사논문 1편 정도면 끝이 났지만, 여기는 대한민국, 한 학기에 10편 내지 15편을 심사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니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대충 일고 논문심사장에 들어가는, 실로 교수로서 양심에 가책을 받는 일을 마구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못 느끼는 낯 두꺼운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이 논문에 쓰는 단어나 문장형식이다. 한 마디로 학생들은 알아듣기가 쉬운 단어나 문장보다는 무슨 무슨 적(的)이니 하는 단어에 외래어까지 보태가며 될 수 있는 대로 거창하고 어마어마하게 들리는 표현을 즐기는 버릇이다. 예를 들어보자. "이 연구는. "하면 될 것을 "본(本) 연구는. " 하거나 "논문 요약" 대신에 "논문개요(論文槪要)" "이렇게 생각한다" 대신 "이러한 사고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연구는 OOO가 맨 처음 했다"는 능동형 대신 "이런 연구는 OOO에 의해 맨 처음 연구되어졌다"는 수동형, "이러한 생각을 했다"는 말 대신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같은 참으로 알 수 없는 표현들이다.


 논문 뿐 아니라 청중을 향한 말을 들어봐도 별로 다를 게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기에다가 외래어, 특히 영어의 범람은 우리 말과 글의 존재를 위협하는 독소가 되고 있다. 예로 이수열 님이 쓴 [우리말 바로 쓰기]에서 빌려온 E 대학 L 교수의 [문화의 비상등 켤 때]라는 글을 보자. ". 모든 사람이 문화를 산소처럼 호흡하고 그 가치를 공유할 수 있게 하려면 문화를 이벤트화하여 감동을 나누고 멀티미디어 초고속 정보망을 통해서 . 문화 인프라라는 모뉴멘탈한 건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적 발상에서. 문화는 이미 만들어진 에르곤이 아니라 앞으로 창조해 나가는 에네르게이어야 한다. 문화네트워크에 새로운 콘텐츠를 부가하는 것이. " 한국 사람 몇 %가 이 말을 알아들을까?


 한 번은 이화여대에서 어느 집단의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에 "한국 전통문화의 근대 체험과 새로운 모색"이라고 써서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학생들 10여 명에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할 사람이 없었다. 아직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왜 이렇게 어려운 말, 어려운 글을 좋아할까? 여기에 대한 답은 [세계문화와 조직]이라는 책을 쓴 Hofstede라는 사람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Hofstede를 따르면 세계문화 중에는 불안을 잘 참고 견디는 문화, 즉 불안회피지수가 낮은 문화가 있고 불안을 잘 참지 못하고 이를 피해가려는 문화, 즉 불안회피지수가 높은 문화가 있는데 한국은 불안회피지수가 높은 문화에 속한다는 것이다. 불안회피 지수가 낮은 문화에서는 아무리 어려운 생각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이나 쉬운 문장으로 풀어서 쓰는 사람이 환영을 받는다는 것. 그러나 한국처럼 불안회피 지수가 높은 나라에서는 어렵고 어마어마하게 들리는 말과 글을 써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다.


 학술논문에서도 쉽고 평이한 말을 쓰면 "학(學)적 무게가 없다"고 한다. 되도록 어렵고 어마어마하게 들려서 일반 사람은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어야 "공부를 많이 한 깊이 있는 학자"로 인정받는다 한다.


 이런 생각은 배웠다든지, 혹은 유식하다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도 존경받는 유교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종교학을 전공하고 이화여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최준식 교수에 의하면 세계 여러 종교경전 중에 배울 학(學)자로 시작되는 종교는 유교밖에 없다고 한다. "밥은 굶어도 자식 공부는 시켜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처럼 공부, 공부하는 나라도 없지 싶다. 배움을 중요시하다보니 너무 배워버렸는가 우리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늘어놓아야 자기가 유식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같이 생각한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말과 글이 이처럼 황폐한 쪽으로 변해가고 있을까? 우리말과 글이 이렇게 된 것은 대학강단에 서는 사람들, 특히 영어권 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나 방송언론인들에게 그 일차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 같다. 상아탑을 지키는 교수들은 쉬운 글을 쓰면 자기 글의 권위가 떨어지는 줄 아는지 필요 없이 거창한 말과 글, 여기다가 어려운 외래어를 마구 써가며 우리 글을 황폐화하는데 앞장서 왔다. 전적으로 교수들의 책임이라고 돌리기는 어렵지마는 또 하나 슬픈 모습의 하나는 영어권 원주민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한국식 영어 표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예로 음식점 벽에 붙은 '물은 셀프(self)입니다' '멘트(ment)' 같은 아리달송한 말부터 '레이블(label)'을 '라벨'로, '프로파일(profile)'을 '프로필'로 잘못 발음하는 경우이다.


 구태여 말이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우리에게는 껄끄러운 표현은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 만큼 많다. 이를테면 "좋은 주말 가지십시오" "멋진 시간 되시길 빕니다" 하는 따위의 영어식 표현은 듣기에 여간 껄끄러운 말이 아니나 무슨 유식의 상징인 양 마구 쓰고 있다. 한 번은 어느 학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자우편을 받았다. “. 근데 셤 결과 말이에여, 그게 맞는거에여? 이대로 가다간 전 쫓겨나겠어여, 섐에 대한 임프레션이 넘넘 좋았는데. 다시 할 수 있는거에여? 걱정되니 꼭 알려줘여. " 대학원 학생의 말이 '섐"은 선생님, '넘 넘'은 너무너무, '임프레션'은 인상, '. 거에여'는 요사이 젊은 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이지 결코 반말이나 존경의 의미가 빠진 말이 아니니 애교로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자 하나라도 줄여보려는 전자통신 사용자의 피눈물나는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말과 글은 한 문화의 정신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말과 글을 없애면 그 문화는 곧 죽고 만다. 캐나다에 가본 사람이라면 퀘백주에 사는 프랑스계 사람들이 퀘백주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영어는 알아듣고도 짐짓 못 알아듣는 척 불어를 고집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네들은 참으로 자기네 말과 글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과 애정을 느낀다.


 이대로 가다가는 100년 200년 후면 우리말은 오늘날 이 땅을 밟고 사는 한국사람들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망칙한 언어가 되지 않을까 겁이 난다. 그 불행한 때는 토씨만 우리말로 되고 그 나머지는 외래어로 메우는 그런 불행한 시대가 아닐까 걱정된다. (200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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