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계정 찾기 다시 시도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동렬 수필

leed2017
7E8154D2-B5E0-4AC4-BC39-F4216D5215AD
58119
Y
메뉴 닫기
오늘 방문자 수: 2
,
전체: 13,988
이동렬 수필
메뉴 열기
leed2017
이동렬
66877
9216
2018-07-20
울음

 

 우리는 여러 가지 일로 운다. 배우자를 잃었을 때는 물론, 자신이 서러운 일을 당하거나 남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운다. 흘러간 옛 노래가 나오는 [가요무대]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비 내리는 고모령"이나 "불효자는 웁니다" 같은 애조 띤 노래가 나오면 금시 손수건을 찾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꼭 슬픈 일을 당해서 우는 것만은 아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된다든지, 결혼식장에서 부모에 드리는 인사에서도 신부 되는 사람은 울고(신부가 결혼식장에서 좋아서 너무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것은 철따구니 없어 보인다) 고생고생해서 키운 딸이 신랑의 손을 잡고 손님들에게 인사를 올려도 부모 되는 사람은 눈물을 글썽인다.


 30년, 40년 떨어져 있던 가족을 다시 만나서도 울고, 자녀가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운다. 지금까지 쌓여온 정(情)과 한(恨), 원(怨)과 그리움, 이 모두가 하나로 용해되어 한 방울의 눈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250여 년 전에 태어난 박지원은 복잡한 심리실험실 없이도 이 사실을 스스로 알았다. 그가 중국에 다녀와서 쓴 [영하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칠정(七情) 가운데 슬픈 감정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만 알았지…까지것 기쁘면 울 수도 있고,까지것 골이 나면 울 수도 있고, 까지것 울 수 있고, 까지것 사랑하면 울 수 있고, 까지것 미우면 울 수 있고…맺힌 감정은 한번 홀딱 푸는 데는 소리쳐 우는 것처럼 더 빠른 방법이 없다.”


 재미있는 것은, 그다지 울 일이 아닌데도 울음을 한번 시작하게 되면 자신의 구슬픈 소리, 자기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 뺨에 흘러내리는 축축한 물기 등이 모두 하나의 자극이 된다. 이 복합 자극 때문에 건성으로 시작한 울음은 점점 심각하게 되고 이렇게 울다 보면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로 내리막길 내려가듯이 나중에는 정말로 설움에 북받쳐 더 열심히 울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울음이 울음을 낳을 뿐 아니라 울음도 웃음처럼 전염이 된다. 사회심리학자들에 따라서는 기쁜 감정 때문에 숨이 가빠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것이나, 성난 감정 때문에 숨이 가빠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것은 생리적으로는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당사자가 그 현상이나 사건을 어떻게 이름 붙이느냐에 따라 기쁨도 되고 분노도 된다는 것, 기쁜 것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기쁨이, 억울하다는 이름을 붙이면 분노가 된다는 말이다.


 울음은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한 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다. 울음은 물, 염분, 단백질, 리피드(lipid)와 당분으로 구성된 눈물을 생산한다. 울음은 우리 신체가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한계가 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생화학자요 눈물박사로 알려진 미국 미네소타에 있는 흐레이(William Frey II) 교수에 의하면 울고 난 다음에 미국 여자들의 85%는 기분이 더 좋아지고 남자들은 이보다 적은 70% 정도가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우리나라에서는 통성기도를 하는 교회에 가서 목을 놓아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고 한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는 “은혜 받았다”고 한다. 남자나 여자들이 12살 전에는 비슷한 정도로 울지만 18살 정도에 이르면 여자가 남자보다 1배 반 정도 더 자주 운다고 한다. 용감무쌍해야 할 사내가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나약한 행동의 노출이라는 문화적 세뇌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 남자가 울어도 좋다는 것을 가르치는 사회는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는 정도에도 문화적 차이가 있다. 북미보다는 구라파 사람들이 더 많이 울고, 구라파 사람들 중에서도 이태리 사람들이 더 많이 운다. 한국 사람들은 어떨까? 내 생각으로는 이태리 사람 못지않게 눈물과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인지 텔레비전을 보면 유난히 우는 장면과 먹는 장면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는 데도 죽기 살기, 그야말로 젖먹는 힘을 다해서 운다. 가족 중에 사별(死別) 같은 갑작스런 비극을 당해서 우는 것을 보라. 옆에 두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우는 장본인은 그야말로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죄송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악을 바락바락 써가며 운다.


 북미 사람들은 울 때도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2002년에 뉴욕에서 세계무역센터 비극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 유가족들이 우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울어도 손수건만 눈에 갖다대고 흐느끼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워밍업(warming-up)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점잖은 말로 하면 신사적이고, 교양 있게 운다고 할까. 화끈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교양이고 신사적이고 모두 저리 가라다. 우리는 그야말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애절하고, 정성을 다해서 운다. 지진강도를 말해주는 리히터(Richter) 척도로 말하면 북미 사람들이 2.0이라면 우리는 0.9의 강진이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극과 극에 치우치는 경향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세계의 문화와 노력]이라는 책을 쓴 홉스테드(Hofstede)라는 사람의 주장을 따르면 불확실한 것을 잘 참는 사회가 있고, 불확실성을 잘 참지 못하는 사회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불확실한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사회에 속한다고 한다.


 그런데 불확실한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사회는 모든 것이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다는 것이다. 미국 템플대학에서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있는 최준식 교수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종교를 믿는 것을 보면 홉스테드가 말한 극으로 치닫는 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믿는다는 것이다. 설교를 듣고 찬송 몇 곡 부르는 것만으로 직성이 풀리지 않아 울부짖으며 통성기도를 하고 방언(放言)을 한바탕 하고나야 속이 후련하고 은혜 받았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열심히 운다는 말은 그만큼 감정의 기폭이 넓다는 말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어느 정도 감정 기폭이 있어야 “사는 맛”이 난다고 생각한다. 흥분한 일도, 슬퍼할 일도 없는 사회에서 산다고 가정해 보라. 춥고 더운 기온 변화가 없는 데서 사는 것 같아서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북미대륙에서 오래 산 우리 교민들을 보면, 좀 과장된 표현을 빌리면 방금 병석에서 일어난 환자처럼 맥이 풀려있다. 그러나 흥분할 일도 많고 슬프고 분한 일도 많은 한국 같은데 살면 늘 깨어있는 사람이 된다.


 웃음의 반대는 울음이고 울음의 반대는 웃음이다. 모든 사람들이 노산 이은상의 노래처럼 “마음에 색동옷 입혀 웃고 지내기”를 원한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한 세상 살아가는 데는 눈물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고. 가끔 아무도 없는 데 가서 혼자 실컷 울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2004. 11)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d2017
이동렬
66817
9216
2018-07-15
우리말과 우리글

 


 해마다 5월과 11월이 되면 대학가에서는 논문 심사에 바쁘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1년에 석사 논문 2, 3편에 가뭄에 콩 나기로 박사논문 1편 정도면 끝이 났지만, 여기는 대한민국, 한 학기에 10편 내지 15편을 심사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니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대충 일고 논문심사장에 들어가는, 실로 교수로서 양심에 가책을 받는 일을 마구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못 느끼는 낯 두꺼운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이 논문에 쓰는 단어나 문장형식이다. 한 마디로 학생들은 알아듣기가 쉬운 단어나 문장보다는 무슨 무슨 적(的)이니 하는 단어에 외래어까지 보태가며 될 수 있는 대로 거창하고 어마어마하게 들리는 표현을 즐기는 버릇이다. 예를 들어보자. "이 연구는. "하면 될 것을 "본(本) 연구는. " 하거나 "논문 요약" 대신에 "논문개요(論文槪要)" "이렇게 생각한다" 대신 "이러한 사고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연구는 OOO가 맨 처음 했다"는 능동형 대신 "이런 연구는 OOO에 의해 맨 처음 연구되어졌다"는 수동형, "이러한 생각을 했다"는 말 대신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같은 참으로 알 수 없는 표현들이다.


 논문 뿐 아니라 청중을 향한 말을 들어봐도 별로 다를 게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기에다가 외래어, 특히 영어의 범람은 우리 말과 글의 존재를 위협하는 독소가 되고 있다. 예로 이수열 님이 쓴 [우리말 바로 쓰기]에서 빌려온 E 대학 L 교수의 [문화의 비상등 켤 때]라는 글을 보자. ". 모든 사람이 문화를 산소처럼 호흡하고 그 가치를 공유할 수 있게 하려면 문화를 이벤트화하여 감동을 나누고 멀티미디어 초고속 정보망을 통해서 . 문화 인프라라는 모뉴멘탈한 건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적 발상에서. 문화는 이미 만들어진 에르곤이 아니라 앞으로 창조해 나가는 에네르게이어야 한다. 문화네트워크에 새로운 콘텐츠를 부가하는 것이. " 한국 사람 몇 %가 이 말을 알아들을까?


 한 번은 이화여대에서 어느 집단의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에 "한국 전통문화의 근대 체험과 새로운 모색"이라고 써서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학생들 10여 명에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할 사람이 없었다. 아직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왜 이렇게 어려운 말, 어려운 글을 좋아할까? 여기에 대한 답은 [세계문화와 조직]이라는 책을 쓴 Hofstede라는 사람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Hofstede를 따르면 세계문화 중에는 불안을 잘 참고 견디는 문화, 즉 불안회피지수가 낮은 문화가 있고 불안을 잘 참지 못하고 이를 피해가려는 문화, 즉 불안회피지수가 높은 문화가 있는데 한국은 불안회피지수가 높은 문화에 속한다는 것이다. 불안회피 지수가 낮은 문화에서는 아무리 어려운 생각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이나 쉬운 문장으로 풀어서 쓰는 사람이 환영을 받는다는 것. 그러나 한국처럼 불안회피 지수가 높은 나라에서는 어렵고 어마어마하게 들리는 말과 글을 써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다.


 학술논문에서도 쉽고 평이한 말을 쓰면 "학(學)적 무게가 없다"고 한다. 되도록 어렵고 어마어마하게 들려서 일반 사람은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어야 "공부를 많이 한 깊이 있는 학자"로 인정받는다 한다.


 이런 생각은 배웠다든지, 혹은 유식하다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도 존경받는 유교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종교학을 전공하고 이화여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최준식 교수에 의하면 세계 여러 종교경전 중에 배울 학(學)자로 시작되는 종교는 유교밖에 없다고 한다. "밥은 굶어도 자식 공부는 시켜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처럼 공부, 공부하는 나라도 없지 싶다. 배움을 중요시하다보니 너무 배워버렸는가 우리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늘어놓아야 자기가 유식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같이 생각한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말과 글이 이처럼 황폐한 쪽으로 변해가고 있을까? 우리말과 글이 이렇게 된 것은 대학강단에 서는 사람들, 특히 영어권 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나 방송언론인들에게 그 일차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 같다. 상아탑을 지키는 교수들은 쉬운 글을 쓰면 자기 글의 권위가 떨어지는 줄 아는지 필요 없이 거창한 말과 글, 여기다가 어려운 외래어를 마구 써가며 우리 글을 황폐화하는데 앞장서 왔다. 전적으로 교수들의 책임이라고 돌리기는 어렵지마는 또 하나 슬픈 모습의 하나는 영어권 원주민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한국식 영어 표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예로 음식점 벽에 붙은 '물은 셀프(self)입니다' '멘트(ment)' 같은 아리달송한 말부터 '레이블(label)'을 '라벨'로, '프로파일(profile)'을 '프로필'로 잘못 발음하는 경우이다.


 구태여 말이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우리에게는 껄끄러운 표현은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 만큼 많다. 이를테면 "좋은 주말 가지십시오" "멋진 시간 되시길 빕니다" 하는 따위의 영어식 표현은 듣기에 여간 껄끄러운 말이 아니나 무슨 유식의 상징인 양 마구 쓰고 있다. 한 번은 어느 학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자우편을 받았다. “. 근데 셤 결과 말이에여, 그게 맞는거에여? 이대로 가다간 전 쫓겨나겠어여, 섐에 대한 임프레션이 넘넘 좋았는데. 다시 할 수 있는거에여? 걱정되니 꼭 알려줘여. " 대학원 학생의 말이 '섐"은 선생님, '넘 넘'은 너무너무, '임프레션'은 인상, '. 거에여'는 요사이 젊은 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이지 결코 반말이나 존경의 의미가 빠진 말이 아니니 애교로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자 하나라도 줄여보려는 전자통신 사용자의 피눈물나는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말과 글은 한 문화의 정신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말과 글을 없애면 그 문화는 곧 죽고 만다. 캐나다에 가본 사람이라면 퀘백주에 사는 프랑스계 사람들이 퀘백주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영어는 알아듣고도 짐짓 못 알아듣는 척 불어를 고집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네들은 참으로 자기네 말과 글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과 애정을 느낀다.


 이대로 가다가는 100년 200년 후면 우리말은 오늘날 이 땅을 밟고 사는 한국사람들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망칙한 언어가 되지 않을까 겁이 난다. 그 불행한 때는 토씨만 우리말로 되고 그 나머지는 외래어로 메우는 그런 불행한 시대가 아닐까 걱정된다. (2005, 4)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d2017
이동렬
66733
9216
2018-07-09
명당

 

 몇 해 전이다. 일간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명당 판매'라는 큼지막한 글자로 한국의 묘소 명당 세일을 하니 다 팔리기 전에 빨리 계약하라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연락처는 경기도 양평에 있는 어느 풍수지리 연구소 지부(지부가 있으니 어디고 본부가 있겠지)로 몹시 권위 있어 보이는데 같았다. 명당 가격이 얼마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재고품이 얼마나 있는지는 적어놓았다.


 명당 보유 목록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나올 자리 69개, 왕비 나올 자리 30개, 국무총리 90개, 장관 600개, 장군 600개, 국회의원 2000개, 판검사 600개, 안기부장 15개, 올림픽 위원장 1개, 월드컵 위원장 6개, 유엔 사무총장 4개, 기타 600개. 모두 3600개가 넘는 명당 터는 앞으로 1500년에 걸쳐 효력을 발휘할 자리로서 당대에 두 자리 이상은 나올 수 없다는 것.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불초소생이 30년 넘게 몸담고 있는 직업, 즉 교수는 눈에 뜨이지 않았다. 성희롱 하다가 잡혀 들어간 교수, 연구비를 떼먹다가 쇠고랑을 찬 교수, 그와 명예롭지 못한 이유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교수들이 많아서 그럴까, 아니면 너무 흔해서 지천에 널려있는 것이 교수라 그럴까. 좌우간 원통하다. 내가 교수라는 직업이 이 영광스러운 대열에 끼이지 못해 원통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천직에 대한 이 불초 소생의 피 끓는 사랑과 프라이드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대통령이 나올 명당이라 해도 그 명당 효력은 명당매입문서에 도장을 찍은 날부터 1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사이 어느 때에 나타날 것이라 하니 그 때면 이 몸은 영혼조차도 미라가 되었을 때가 아닌가. 


 장관자리가 600개가 있다 하나 월요일에 들어와서 다음 월요일에 나가는 요새 같은 하루살이 벼슬자리를 두고 어찌 장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기야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 묘소 명당 중에는 잘못하면 큰 도둑으로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끝내는 감옥살이로 패가망신을 할 위험이 있는 자리도 1000개가 넘는다.


 문제는 유엔 사무총장이다, 올림픽 위원장이다, 하는 권위와 영광이 차고 넘치는 자리를 왜 나라 안에서만 팔려고 하는지 이해가 잘 안간다. 이런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 수백만 명이 넘을 텐데 기왕이면 CNN 같은 방송을 통해서 광고를 하면 외화도 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명당 인기가 너무 좋은 날에는 돈이라면 지옥도 마다않는 장사꾼들에 의해 그린벨트(greenbelt)도 명당으로 팔려나가고, 결국에는 국토 전체가 공동묘지가 될 위험도 있지만.


 앞으로 이 묘소 명당 판매 사업이 번창하게 되면 요사이 한창 인기가 올라가는 납골당 사업이 큰 타격을 입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또한 시신을 화장해서 납골당에 모시질 않고 그 재를 바람에 날리거나 강물에 흘려보내는 것은 올림픽이나 월드컵 위원장, 유엔 사무총장 같은 고상하기 짝이 없고 국익을 가져 올 수 있는 그런 자리를 한 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분명 비애국적이요 반민족적 행위다. 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겠다.


 그러나 속이 타는 사람은 소생이다. 비록 50년 후가 될지 500년, 1000년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불초소생의 피를 받은 후손이 장차 이 나라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엄청 놀라운 소식이다. 운명아 듣거라,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에헴, 소생의 가문에 대통령이.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내가 왜 구태여 권력의 맨 꼭대기인 대통령 자리를 탐을 내느냐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 즉 좀더 고상한 말로 선비라 불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컨트롤 할줄 알며 세상 명예나 이익은 뜬구름 보듯 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 이씨 가문에 대통령이 나온다고 이렇게 좋아하니. 벼슬에 나가 감투를 써야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고, 가문을 빛낸다는 그 욕망의 피가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도 내 핏줄 밑바닥 어디에 흐르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의 선비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말로는 깨끗하고 의리 있는 말과 행동을 외치고, 돌아서서는 남을 모략중상하고 정치 패거리를 만들어 자기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몸부림 친 그 이중적인 피가 내게도 흘러서 그런 것은 아닐까? 


 지족안분(知足安分)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기억은 분명하지 않지만 언젠가 채근담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은 적이 생각난다. "권력이 더럽다, 더럽다 하는 사람은 그것을 속으로는 은근히 그리워하는 것이다. 진정 권력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말을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묘소 명당 세일 광고는 한번 본 후에 다시 보질 못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돌 지난 아이 어학연수 보내는 것도 마다 않는 한국부모의 극성을 생각하면 명당판매 사업이 시원치 않아서 회사가 부도를 맞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첫번 광고에 동이 난 모양이다. (2003. 4)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d2017
이동렬
66643
9216
2018-07-01
가슴

 

 사랑이 결혼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은 개인주의 사회인 서양에서 흘러들어온 생각이다. 이와 비슷하게 여성의 가슴이 단순히 유아 양육의 기능을 넘어서 성(性)적 의미에 더 치중하게 된 것 역시 서양에서 흘러들어온 생각이다.


 나는 가끔 KBS, MBC나 SBS 같은 한국의 주요 방송사 탤런트들이 아프리카나 남미, 인도네시아의 외딴곳에 가서 그곳 원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본다. [지구 탐험대] 같은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은 속으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사는구나" 하고 세계의 다른 구석에 사는 사람들의 참모습을 보았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텔레비전으로 보여 주기 위하여 없던 것을 새로 만들고, 하지 않던 놀이를 마치 자기네들의 아직까지 내려오는 전통이요 관습인 것처럼 꾸며낸 하나의 연극에 불과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우리도 방송 프로그램에서 듣도 보도 못한 것을 꾸며내서 "지구 탐험대: 이것이 한국이다" 하고 보여주면(요사이 한국영화고 풍물기행이고 이런 종류가 점점 늘어 가는 것 같다) 처음 보는 외국 사람들은 '한국문화의 진수'를 보았다고 흐뭇해하지 않을까. 


 이것을 볼 때 가끔 눈에 거슬리는 장면이 하나 있다. 즉 원주민 여인들의 가슴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적나라하게 노출시켜 방영하는 것이다. 북미 대륙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설사 보여준다고 해도 순간적이요 극히 미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국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장면은 그야말로 노골적이다.


 나는 이 사실, 즉 여성의 노출된 가슴을 오랜 시간 적나라하게 방영하는 것도 일종의 성희롱 내지 여성에 대한 집단적인 개념으로서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본다. 이 말에 수긍이 가지 않는다면 다음을 가정해 보라. 즉, 외국 어느 방송사에서 한국 여성들의 가슴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촬영한 것을 자기 나라 전국 텔레비전망을 통해서 방영했다고 하자. 우리가 가만히 있을 것인가? 어떻게 보면 이것을 문화적 차별의식, 즉 그네 원주민들은 '미개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그네들은 가슴을 드러내놓고 사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가슴을 감추고 사는 사람들인데,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그네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보여 주어야만 하는가?'는 것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그것을 방영하는 사람들의 '진지성'이랄까 진실성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문화 인류학자들이 보고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이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무슨 진기한 놀이 장면이나 되는 것처럼 극히 가벼운 코미디를 하는 마음자세로 보여주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성희롱이란 반드시 개인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여성의 가슴을 드러내놓는 것이 공공연히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그것이 텔레비전 방영에 그친다고 해도 '여자는 어디까지나 성적 대상'이라는 생각이 쉽사리 가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생각해봄직하다.


 성희롱이니 성적 학대란 말은 내가 유학을 떠나던 1966년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말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남녀평등의 깃발이 높아지고 여권신장의 북소리가 점점 우렁차게 들리면서 성희롱이란 말도 활기를 띠었다.


 성희롱으로 고소를 당하는 사람들이 매일 신문사회면 기사를 장식하고 있다. 주로 가해자는 남성이고 피해자는 여성이다. 동물들도 성희롱이란 게 있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수놈 암놈이 둘로 갈려서 서로 밀고 당기고 으르렁대는 것은 동물 세계에서는 없는 것으로 안다. 성적 갈등이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닐까.


 성차별이나 성에 대한 고정의식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그쳐서야 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저 남미의 파라과이, 인도네시아의 밀림, 필리핀, 중국, 어디에서나 하루 바삐 사라져야 할 일이다. 바야흐로 세계화로 향하는 세상, 성차별이니 성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의식도 나라 안에만 국한하지 말고 좀 더 넓은 시야로 눈을 돌려야 한다. (2002, 2)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d2017
이동렬
66545
9216
2018-06-22
꽃 한송이

 

 작년 여름에 대구에서 내 강의를 들었던 Y로부터 몇 주 전에 긴 사연의 편지 한 장을 받았다. Y는 대구 시내 어느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선생님으로 석사과정을 마치느라 하계 학교에 와서 내 강의를 들었다. 선생님이자 동시에 학생 신분의 이중 역할을 감당하느라 일 년 내내 하루도 쉴 날 없이 바쁘게 보내는 사람이었다. 절후 안부를 묻자 다음과 같은 사연을 늘어놓았다.


 “. 올해 새 문교부 장관이 들어서고부터 교사들 촌지(寸志)를 받는 데 강한 쐐기를 박고 있어요. 일부 교사들이 문책을 받기도 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잘한다 싶어요. 저희 학교는 스승의 날에도 학생들에게 일절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하게 하고 가슴에 꽃 한 송이 달아주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년 같으면 학생들이 주는 자잘한 선물들을 집에 와서 하나씩 풀어보고 적힌 메모를 읽어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어제는 이런 재미는 없었어요. 그래도 작년에 담임했던 학생들이 교무실에 우르르 몰려와서 편지를 주고 가서 무척 고맙고 기뻐서 몇 번이고 읽었어요. ”


 나는 Y의 편지를 읽으면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서울이나 부산, 대구 같은 대도시 사람들 때문에 소도시나 농어촌 사람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는 아직은 대도시같이 금전과 치맛바람이 교실에서 활개를 치고 있지는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한 견해인 것 같다. 거기라고 금전이나 치맛바람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나 아직은 시골의 교육현장은 큰 도시처럼 오염이 된 곳이 아니다.


 대도시 몇 군데서 정도를 벗어난 교사와 학부모의 행위를 바로 잡는다고 스승의 날 선생님 가슴에 꽃 한 송이를 달아드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상식(常識)'에 어긋난, 그야말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의 어리석고 용렬한 짓이다.


 우리 사회가 썩었다지만 그 썩은 정도로 말하면 아직은 교육계가 가장 덜 썩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사 작은 도시와 농어촌이 큰 도시같이 금전과 치맛바람이 교정을 어지럽힌다고 해도 스승의 날에 꽃 한 송이를 허락하지 않는 그런 융통성 없는 시책으로 썩은 부분을 도려낼 수 있을까?


 부모 생일 날에 자식들이 선물한다. 그것을 받는 부모 마음은 선물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무한히 흐뭇하고 대견스러운 것이다. 말로는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니, 좀 낡은 말이지만 '사부(師父) 일체'를 내세우며 정작 스승의 날에는 꽃 한 송이도 선물로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린 머리 속에 일어나는 한 가닥 의문의 꼬리는 어떤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 생각에는 아동에게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비정상적인 교육이 되기 쉽다고 본다. 아버지 생일이 가까워져 오면 엄마가 "이틀만 있으면 아빠 생일이다" 하며 넌지시 선물 준비할 것을 귓속말로 일러주면서 정작 스승의 날에는 꽃 하나, 감사의 쪽지 하나 선생님께 드리지 못하도록 한다면 우리는 어린이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교육이 썩었다, 교육이 썩었다 하는데 썩은 것은 교육이라기보다 어른사회인 것이다. 촌지(이 말이 무슨 말인가는 사전을 뒤져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를 주는 것도 어른이요, 받는 것도 어른이다. 가져온 선물을 받는 사람이 교사라고 해서 교육이 썩었다고 하면 좀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내가 캐나다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한 사실로 크리스마스 때 어린 학생들이 선생님께 초콜릿 같은 선물을 가져오지 못하도록 한 학교가 있었다. 이유인 즉 선물의 단위가 점점 커지거나 초콜릿 상자 밑에 돈이 깔려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혼으로 자기를 낳은 엄마와 살지 않는 아이는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챙겨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긍정적인 결정이냐 하는 것은 시빗거리가 되겠으나 어디까지나 불우한 환경에 있는 어린이를 위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도 교육국에 따라 다른 것이지 "캐나다는 이렇게 한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몇몇 학교에서 촌지가 왔다 갔다 하므로 시골 학교에서 꽃 한 송이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독재가 아닐까?


 나는 속으로 이런 질문을 해본다. "스승의 날에 꽃 한 송이도 선물로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공문 대신에 그 날만큼은 선생님의 가슴에 큼직한 꽃 한 송이를 달아드리도록 하자는 권유를 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썩은 교육이 되는 것일까? (1985, 6)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d2017
이동렬
66489
9216
2018-06-17
저 하늘 미리내 건너 장모님은

 


나는 지난 9월 21일, 음력으로는 8월 초하룻날에 장모님을 잃었다. 지난해 내가 안식년으로 한국에 가 있을 때 장모님도 가셔서 몇 달을 함께 계셨는데, 캐나다로 돌아온 후에는 피곤하다며 자주 드러누우시곤 했다. 오랜 여행에서 쌓인 피로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회복할 날만 기다렸는데 너무 오래 끄는 것이 이상해서 전문의를 찾았더니 폐암 말기라는 청천벼락이었다.

 

그때가 2월 말이었으니 사형선고를 받고 꼭 7개월이 지나서 저세상으로 가신 것이다. 폐암이라 해도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아픔도 없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랄까,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는 혼수상태로 들어가 있다가 바로 옆에서 간호하고 있던 사람도 모르게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향년 일흔 네 살, 아무리 고희(古稀)를 넘겼다 해도 요새같이 살기 좋은 세상에는 억울한 천수(天壽)라는 생각이 든다.

 

장모님 윗대들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바로 그때부터 서울 종로 권농동에서만 살았다. 서울 사람 중의 서울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18살에 결혼하여 지금의 내 아내 하나를 놓고 26살 되던 해에 6.25가 터지자 장인은 난데없는 의용군이 되어 월북했다. 그 날부터 딸 하나와 시어른 내외분을 모시고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장모님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삯바느질, 뜨개질, 청과도매상 등 안 해본 것이 어디 있을까. 아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로 불려갔을 때 비로소 장모님의 재정적 책임이 끝났으니 홀몸으로 10년 넘게 시부모를 포함한 4식구를 먹여 살린 셈이다.

 

우리 내외는 장모님을 내가 캐나다 서부에 있는 노틀댐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시고 살았다. 햇수로 치면 꼭 25년, 한국에서 나를 낳으신 어머님보다 더 오래 한솥밥을 먹고 지낸 셈이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내외가 장모를 모시고 살았다기보다 장모님이 우리 두 젊은 사람들을 모시고 살았다는 말이 더 맞을 정도로 우리 집 살림을 일체 도맡아 살아주셨다.


노산(蘆山) 이은상 선생이 스무 살 된 동생을 잃고 쓴 [무상(無常)]이라고 제(題)한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 한 토막이 적혀있다.

 

장자(莊子)가 초(楚)나라로 가던 길에 사람 죽은 두골을 보고 말채찍으로 두들기며 물어 가로되, "그대 삶을 탐하다 도리를 어기어 이같이 되었는가. 혹은 나라가 망할 때 죽음을 입어 이같이 되었는가. 혹은 악한 일을 행하고 추한 이름을 끼치기 부끄러워 이같이 되었는가. 혹은 얼고 주려 이같이 되었는가. 혹은 천명을 다하고 이같이 되었는가" 하고 두골을 끌어 베개 하고 누웠더니 밤중에 두골이 꿈에 나타나 말하되 "그대의 말은 모두 산 사람의 일이니 죽으면 이것이 다 없어지노라. 죽음이란 임금도 신하도 없고 사시(四時)도 없어 시원히 천지로써 역사로 삼는 것이니 저 제왕의 즐거움도 이보다 날 것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장자(莊子))는 믿지 아니하고 가로되 "내 저승왕에게 말하여 그대 형상을 다시 살려 그대 살던 곳으로 보내게 하려니 그대 가려는가?" 두골이 한참이나 궁리하고 가로되 "내 어찌 이 제왕의 즐거움을 버리고 다시 사람이 될까 보랴" 하더라고 하였다. 

 

사실 죽음이 제와의 즐거움과 같다는 말도 맞지 않는 말. 죽으면 고통도 환희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 일체 무(無)의 세상이라 하지 않았는가.


공자는 일찍이 "삶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사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이가 어디 있으랴. 부처도 이를 알지 못하여 화엄경에 이르되 "어디에서 왔느냐(生從何處來), 어디메로 가는고(死向所處去)"라고 했다.

 

뒤주에 쌀 떨어지고는 살아도 가슴속에 정(情)떨어지고는 못 산다는 사바 세상, 우리 부부에게 폭포수 같은 사랑을 내리쏟던 장모님과 이승의 인연이 사그라진 마당에 어찌 못다 한 정(情)과 한(恨)이 없겠는가.

 

"꽃 피자 비바람 인생엔 이별(花發多風雨 人生足別離)"이라 탄식한 우무릉(于武陵)이란 시인이 있었다. 그렇다. 사람의 일평생이란 것도 눈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지 않는 것일진대 오래 살았다, 못살았다는 게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저승 가는 길에 노자는 눈물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있다. 옛날 자하(子夏)라는 사람은 자식을 잃고 하도 서럽게 울어 눈이 어두워졌다고 한다. 한편, 장자(莊子)는 아내가 죽었을 때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러 인생을 웃었다지 않는가.

 

장모님의 넋은 지금 가을 하늘에 한 조각 구름이 되어 떠가려니 생각하면 이승과 저승이란 것도 바로 옆에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려고 붓을 들었을 때는 자하처럼 정에 울었으나 이제 장자(莊子)를 닮아 인생을 웃어나 볼까. 그런데 장모님, 도대체 어디로 가셨습니까? (1998.10.)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d2017
이동렬
66085
9216
2018-05-22
여자는 다소곳해야 한다?

 

 몇 주 전 대통령이 전국 검사들을 대표한 40여 명의 검사와 면담을 한 적이 있다. 검찰에 대한 인사와 관련된 불평을 가라앉히기 위해 새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여성 후보 K 씨를 대동한 자리였다.


 그때 K 장관이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가 눈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물론 이를 놓칠세라 텔레비전도 집중적으로 몇 번이나 K 씨의 앉은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면담이 있고 나서 또 몇 주 지난 후 K 씨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어느 국회의원이 K씨가 검사들과 면담을 할 때 앉은 자세에 대해서 '공식적인 꾸지람'을 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점잖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세가 무슨 그런 자세가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이 나라를 대표하는 '국회의원 중에는 참으로 한심스럽고 무식한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K 씨가 어떻게 앉는 것은 남이 참견할 성질이 아니다. K씨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 앞에 드러눕지 않는 이상 K씨 자세에 대한 불평이 청문회 자리에서 나왔을까?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여자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테두리를 무척 좁디 좁게 규정해 놓고 그 테두리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기만 해도 비난을 쏟아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치 종이를 돌돌 말아서 그 좁은 구멍을 통해서 세상만사를 내다보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까.


 술좌석에서나 몇 마디 오갈 수 있는 그런 말을 이 나라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장관의 자질을 알아보기 위한 청문회 자리에서 내놓았으니 국회의원들의 정신적 수준을 잘 보여주는 참으로 한심스러운 행동이다. 인사청문회 같은 자리에서는 후보로 지명된 사람이 일을 잘해나갈 수 있느냐 아니야 하는 직무수행능력에 대한 자격심의가 그 초점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뒤로 미루다시피 하고 앉은 자세에 대해서, 입은 옷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아도 질이 낮은, 영어로 말하면 no class 인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행동은 남성과 비교해 볼 때 여성은 어느 면에서나 열등한 위치에 있고, 문화적으로 창조적이지 못하며 남성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성(性)에 대한 편견이랄까, 차별의식을 부채질하기 쉽다. 지금부터 64년 전 이 세상을 하직한, 정신분석학 주창자 후로이트(S. Freud)의 여자에 대한 편견을 벗어나지 못한 그야말로 낡고 무례한 행동이 아닐까?


 어둡고 뒤떨어진 사고방식을 가진 것은 비단 국회의원뿐이 아니다. 지성의 상징이니, 이 사회의 정신적 선도자니 하는 대학교도 남자와 여자 교수의 비율이 수십 년 간 100대 0 붙박이로 고정되어 있다 싶은 데가 있고, 많은 대학이 90대 10을 넘지 못하고 있다. K장관에게 청문회에서 앉는 자세가 나쁘다고 나무라던 사람들도 바로 이런 대학에서 4년을 수학한 사람들이 아닐까?


 하루면 비행기가 지구를 한바퀴 돌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연인들끼리 전자우편으로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듯 하는 세상에 아직도 이처럼 낡고 무식한 생각을 가진, 그것도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란 사람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것을 보면 이 나라 남녀평등 의식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10년이면 산천도 변한다는데. (2002)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d2017
이동렬
65880
9216
2018-05-08
감성의 농축액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고도 하고 생각하는 갈대라고도 한다. 생각하는 갈대는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이지(理智)랄까 지성을 말하는 것이니 진정한 민주주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하나의 필수요소로 볼 수 있다. 제각기 서로 다른 집단이 서로 모여 살아가는 오늘날같이 복잡한 사회에서는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는 감성도 필요하지마는 합리적이랄까, 사리에 따라 행동하는 이성 혹은 지성도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물론 감성, 이성 이 두가지 특성의 상호비례는 사람마다 다르고 사회마다 다르다.


 이성과 감정을 칼로 두부판 가르듯 둘로 딱 갈라놓고 이것이 어떻다, 저것이 어떻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이지보다는 감정이 더 우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한쪽이 우세한 사실 그 자체는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풍부한 감정은 우리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고 우리를 정열적이며 인정이 메마르지 않게 하고, 노래와 춤과 풍류를 즐기고 뛰어난 예술 감각을 가지게 함으로써 드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룩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한편 이성은 우리가 세상일을 객관적이랄까 냉정한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고 사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준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주로 이 이성이 있고 없음에 달린 것이니 이성이 발달했다는 말은 생각하는 힘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김태길 서울대학교 명예 철학 교수에 의하면, 지역적으로 좁은 범위 안에서 오랫동안 서로 얼굴을 맞대며 사는 농경사회에서는 주로 부드럽고 따뜻한 친화적 정서가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산업사회로 불리는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그것이 도리어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감정은 때로 사람을 극단으로 몰고 갈 위험이 있다. 이 극단으로 흐르는 감정을 막는 것이 곧 사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지이다.


 문제는 감정 내지 지성 둘 중의 조화 내지 균형이다. 감정, 지성 둘 중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우세하면 이 불균형은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요사이 언론과 방송을 메우는 대통령 탄핵을 보자. 탄핵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만약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으면 탄핵을 하고 말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사과란 잘못한 허물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과하는 방법은 주로 언어적 요소와 문자적 요소로 구성된다. 그러니 대통령이 용서를 비는 몇 마디 말만 하면 탄핵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나라 행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을 탄핵하느냐 마느냐 같이 중대한 결정도 사과의 말 몇 마디, 글 몇 마디에 달려있다. 100% 감정의 농축액이다. 우리 감정의 불길이 이처럼 맹렬할 수가 있을까 몸이 오싹해올 정도로 두려운 생각이 든다. 아무리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지만 대통령 탄핵 여부가 사과의 말 몇 마디나 글 몇 줄에 달려있다 하니 이 얼마나 가벼운 일인가. 좀 과장해서 비유하면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범을 만일 그가 사과하면 살려줄 수도 있으나 만약 사과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말이다. 말 바꾸기를 식은죽 먹듯 하는 국회의원들이 말 몇 마디나 글 몇 줄에 이처럼 큰 비중을 두는 것을 보니 경멸의 웃음을 참기가 어렵다.


 화목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감정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절실하다. 이성적 생각과 행동이 너무 약하면 우리가 꿈꾸는 민주주의의 실현은 그만큼 멀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 생각과 행동에서 감정을 말끔히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 많은 인류의 역사적 큰 성취는 피 끓는 정열과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 않는가.


 애당초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무리한 절차로 억지 결정을 해놓고 "법으로 정한 일이니 마지막 심판이 나올 때까지 감정을 누르고 조용히 지켜보자"고 이성적 자세를 호소하니 아무리 이성적으로 행동하자고 해도 내 피는 벌써 거꾸로 흐르는 것 같다. 재산에 탐이 나서 자기의 부모를 살해하고 난 어느 패륜아가 재판정에 서서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불쌍한 고아이니 동정을 바란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감정의 맹렬한 불길 앞에서는 이성도 맥을 못 추는 것은 바로 이런 때이지 싶다. (2004. 11)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d2017
이동렬
65749
9216
2018-05-01
어떤 어린이날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를 지키고 있던 어느해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초등학교 1, 2학년이 될까 말까 한 어린아이들 2, 30명이 자기들을 데리고 간 교사와 함께 청와대를 방문한 것을 텔레비전으로 본 적이 있다.


 널찍한 잔디밭에 꼬마 방문객들이 빙 둘러앉고 대통령께서 청와대를 방문한 어린이들을 환영하는 그런 자리였다. 대통령께서 자리에 앉자 데라고 간 교사는 꼬마들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통령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려야지요."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꼬마 손님들은 일제히 꾀꼬리 같은 목청을 높여, "대톤년 하라버지, 안년하제요"를 외치는 것이었다. 오기 전 연습을 수십번 한 모양이었다. 마치 어느 사극(史劇)에서 만조백관들이 임금 앞에 엎드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동시에 외치는 장면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어서 대통령 할아버지께서 그 자리에 온 꼬마들에게 한말씀 해달라는 사회자의 조심스러운 요청이 있었다. 자세한 어휘는 잊어버렸으나 대통령 할아버지는, "여러분, . 자신과 희망, 용기와 '야망'을 가지고. " 힘찬 나날을 살아가라는 말로 인사에 대신하였다. 대선을 앞둔 어느 야당의 전당대회에서 한판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수준 높은 북소리였다. 이렇게 용기와 자신감은 어릴 때부터 배워야 하느니라.


 지난 98년 봄 5월 5일 어린이날에도 청와대 잔디밭에서 또 다른 대통령 할아버지 앞에서 비슷한 숫자의 어린이들이 모인 것을 본 적이 있다. '국민과 대화'를 즐기는 대통령께서는 어린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때 한 어린이가 "학교에서 과제가 너무 많은데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좀 줄여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관계 당국의 검열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천진난만한 질문에 우리의 준비된 대통령께서는 "숙제가 '과중(過重)' 하면 줄여야 한다"는 요지의 대답을 했다.


 '야망'이란 말과 '과중'이란 말 중에 어느 것이 어린이들에게 더 어려운 말인지는 국어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선뜻 판가름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유식한 단어 모두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 같은 신동이 아니고서는 초등학교 1, 2학년 수준에서 그 말뜻을 이해하기는 무척 어려운 말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생전에 즐겨 들려 주시던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즉 옛날 어느 시골에 선비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대낮에 호랑이가 와서 그의 어린아이를 물고 산으로 달아났다. 놀란 선비는 "사람 살려요. " 하는 고함 대신에 선비로서의 학식과 풍모를 지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유식한 문자를 써서 상황의 긴박함을 알렸다. 


 "원산대호(遠山大虎)가 근산래(近山來) 하야, 가아(家兒)를 생포거(生捕去)하니, 오호통재(嗚呼痛哉)로다! 지봉자(持捧者)는 지봉(持捧)하고 지부자(持斧者)는 지부(持斧)하여 속래(速來)하라." 


 우리말로 옮기면 "먼 산에 호랑이가 가까운 산에 와서 우리 아이놈을 산 채로 물어갔으니 아아 슬프도다, 몽둥이를 가진 사람은 몽둥이를, 도끼를 가진 사람은 도끼를 들고 어서 빨리 나오라." 


 문자 투성이의 고상하기 짝이 없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농민들이 우물쭈물하는 동안에 호랑이는 아이를 물고 뒷산으로 가서 냠냠 해버렸다는 것이다. 이 어이없는 이야기가 고을 원님의 귀에 들어갔다. 화가 난 원님은 당장 선비를 잡아다가 볼기를 때리게 하며 꾸짖었다. 


 "이놈, 네가 유식하면 얼마나 유식하다고 사람이 호랑이한테 물려가는 판에 무슨 문자냐, 미련한 놈. " 아픔을 이기지 못한 선비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아지둔(我之臀)아, 차후(此後) 절대불용문자(絶對不用文字)로다."(아야야, 내 궁둥이야, 다음부터는 절대로 문자를 쓰지 않겠노라)


 이렇게 "소귀에 경 읽기" 식의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자기도 모르게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다. 과거의 자기 경험이나 버릇이란 지금의 버릇이나 행동에 이처럼 크나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한국에서 한때 유행했던 '정의 사회 구현'이니 '세계로 향한 한국인' 같은 화려한 구호들도 많은 사람에게 '야망'과 '과중'이나 '원산대호'에 지나지 않는 빈말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1998. 6.)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d2017
이동렬
65629
9216
2018-04-25
화장실

 

 몇 년 전에 백두산 관광을 다녀왔다. 북경에서 비행기 편으로 연길로, 연길에서 자동차로 6시간인가 7시간을 가는 긴 여행이었다.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도중에는 10번 넘게 차를 세우고 손님들에게 화장실을 다녀오라고 일러주었다. 병원에 가면 나와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듯이 백두산에 가니 관광을 온 사람들이 우리 이외에도 정말 많았다. 마치 주말에 안동 하회마을에나 온 것처럼 관광 온 한국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런데 연길에서 백두산까지 가는 동안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든 것은 10번 이상 자동차를 세운 그 화장실이었다. 10번 넘게 자동차를 세우고도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중국 농촌의 화장실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도록 민망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되어 있다. 비도 오지 않는 날 화장실 가면서 우산을 들고 들어가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문은 물론 칸막이고 가리개고 없는 화장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집행" 할 때 하반신은 그대로 내놓고 남들이 다 보는 데서 해야 하는 그런 열린 화장실이니 우산이라도 있어야 가리개로 앞을 가리지 않겠는가. 


 나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불결한 화장실은 어느 정도 잘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의 마지노선이 이번 백두산을 통해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너무 지저분해서 도저히 집무수행 불가능이었다. 자동차를 세울 때마다 그 소중한 것을 꺼내서 무슨 중범자나 되는 것처럼 바깥 공기를 한번 쐬고는 다시 집어넣고 말았으니 말이다. 중국 농촌 화장실이 러브 호텔급이라면 우리나라 농촌 화장실은 신라호텔 특실이다. 우리나라는 농촌이라 해도 우선 문만 걸어 잠그면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가.


 연암 박지원이 중국 북경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 [열하일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중국에서는 가장 더러운 냄새를 고려취(高麗臭)라고 하는데 조선사람들은 목욕을 잘 하지 않아 발 냄새가 흉하다는 것이요,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는 동이(動夷)라고 말하는바 이는 동이가 훔쳤다는 의미다. " 동이란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동쪽에 있는 나라나 종족들을 멸시하여 일컫던 말이다. 자세히는 중국 황하의 중간쯤으로부터 하류의 동쪽 이민족을 말하는데, 곧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방예의지국에 사는 사람과는 거리가 먼 묘사다. 


 그런데 "려"자 발음을 "리"라 하니 혹시 발 "고린내 난다"는 말이 "고려 냄새"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어쩌다가 그 중국 사람들까지 고려취라고 빈정댔을까? "똥벌레가 제 몸 더러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더니 중국 사람이 우릴 보고 발 냄새가 난다고?


 일본은 화장실에서는 중국의 반대다. 몇 년 전 일본에 갔을 때는 그네들 화장실이 캐나다보다도 깨끗하여 놀란 적이 있다. 중국 화장실에 비교하면 지옥과 천당이다. 일본 도시와 중국 농촌과 비교한다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러나 일본 대도시 중앙을 흐르는 청계천보다 작은 개천에 팔뚝만 한 잉어가 뛰놀던 것을 생각하면 일본 농촌은 안 가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쓴 중국 기행문을 보면 화장실에 대한 얘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조선 때의 화장실도 중국의 그것과 별 차이 없었지 싶다. 몇십 년 전만 해도 남녀 화장실이 같이 있어서 소변 보는 남자 옆에서 아주머니들이 손을 씻으러 왔다 갔다 하고(이쪽을 힐끔힐끔 보던 아줌마, 공짜관광하면 안 돼요)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여럿이 왁자지껄해서 “집무” 하는 동안 가슴이 조마조마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고 보면 우리 화장실이란 것도 88올림픽 전에는 선진국 여행자들의 화젯거리였지 싶다.


 아무튼, 요사이 우리나라도 화장실이 무척 깨끗해졌다. 대학 시절 미국 유학을 갔다 온 선생님들께서 “화장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별 신기한 화장실도 다 있구나” 싶더니 요사이 우리나라도 대부분 화장실에서는 커피를 마실 수 있을 만큼 깨끗하다. 앞으로 10년만 더 있으면 국제공항이나 큰 공공건물 안에 있는 화장실 앞에 “아침 식사 배달됩니다” 하는 친절한 광고도 나붙지 싶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더보기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