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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인 칼럼

leehyun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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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hyungin
이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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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7
크루즈(Cruise) 여행의 빛과 그림자

 

 

 

순항하다, 라는 배를 일컫는 크루즈, 듣기만 해도 환상적인 매력이 밀려오는 단어다. 크루즈 미사일이란 전쟁 무기도 있다지만, 대형 아파트가 연상되는 배가 광활한 바닷길을 거침없이 항해하는 여행의 길잡이가 요즘 휴가를 즐기는 세대로 여유롭게 삶을 향상시켜주는 경험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하리라, 한편으로 벼르고 뜸들여 끙끙거리며 공항의 철저한 관문을 통과했어야 했다. 혼란을 예방 정리하는 관문이 거미줄처럼 얽혀 펼쳐진 통관의 절차야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세상살이 참으로 험악함이 감지되는 과정에 피곤과 짜증이 범벅이 되었다.


 긴 줄을 따라 서너시간의 차례를 묵묵히 차분하게 소화해내야 하는 공항의 검색대, 마약이나 총기소유를 가려내기 위한 온갖 방법을 총동원해야 하는 심각하고 예민한 과정을 죄인인양 마음을 사려야 하는 각별한 통관절차인 것이다.


하늘길은 비행물체의 고속도로다. 구름도 바람도 안개 속을 벗삼아 사쁜하고 과감하게 250여 탑승객을 안전하게 이동시켜주는 현 세대 과학문명의 완성품이 아닐까!


 마이아미 항구에 위치한 크루즈 항구들, 7천 명의 승선 인원을 자랑한다는 Royal Caribbean cruise가 정박해 있는 같은 시간에, 승선인원 3천명의 C,EQ라는 크루즈 탑승 절차를 밟았다.


처음 크루즈 여행이 아닌데도 또다시 놀랍도록 완벽하고 정교한 여행선의 면모가 참으로 화려하고 경이로웠다. 아늑하게 바다경관을 내려다 볼 수 있는 Veranda room을 배정받아 피곤과 짜증이 한순간에 물결치는 바닷물과 소슬한 흰 파도에 스르르 풀려가는 뭉클한 기쁨이 밀려왔다.


저 엄청난 양의 바닷물은 뭐가 그리 바쁘다고 어디로 저렇게 쉬지 않고 서둘러 흘러갈까? 높고 낮음에 순응하듯 흰 거품을 땀 흘리듯 파도에 밀리고 실려 둥근 지구의 목적지를 향해 줄달음치는 것일까?


시간이 행운일까? 아니면 돈의 위력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감사뿐인 건강이었음을 고백하며 진수성찬이 마련된 파도 위의 식당을 마주했다.


 있을 것은 다 갖춰진 음식들, 없는 것 없이 다 마련된 온갖 채소 과일들, 물론 이미 지불되었던 여행경비에 포함되었던 것이지만, 10여 곳이 넘게 마련된 식당 속에는 반 이상이 따로 음식값을 계산하지만 화려한 정찬 식당들이 즐비했다. 


일인당 30불에서 80불까지 풀코스 국제식당들이 완벽함을 뽐내고 있다. 그런 곳을 즐겨 이용하는 특수층 여행객들, 그 속에는 누가 포함될까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끝나는 여행기간 2, 3일 전부터는 특별할인 값으로 고급식당을 출입할 수도 있었다. 


시간마다 꽉 찬 예능시간들. 특별한 영화나 댄스파티장, 음악회 역시 추가 요금을 부과하며 심지어는 방마다 물 한 병에 US $ 6.50씩이나 하듯이 강요된 결코 공짜가 아닌 치사스러움에 고개를 흔드는 이들이 많았다.


헬스장이며 수영장의 풍경들, 수백 개씩이나 해변을 연상케 하는 안락의자들의 로맨틱한 장식들, 마사지용 스파 시설이 부족함 없이 들끓어대는 탕 속에 눈을 딱 감고 전신 물 마사지에 모두를 저당잡힌 인간 삶의 절정을 최고의 반열에 올려두고 있었다.


손에 손에 들려진 음료수들, 물론 모두가 별도로 계산되는 $ US 호주머니를 털어내야 한다. 환상적인 휴가의 의미를 바다 위에 물결처럼 들뜨게 출렁이게 하는 순간의 연속이기도 했다. 


일주일이 짧을 것이란 아쉬움과 더불어 쉬지 않고 파도 치는 바닷물결에 시간은 말없이 휩쓸려 지나가 버렸다. 들떠 흥분된 여행준비에 소홀했던 탓이었을까? 여행사의 실수였을까? 마이애미 항구에 새벽아침 7시 도착, 아침을 먹고 비행장을 향했다. 저녁 8시반 비행기의 예약은 1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지옥 같은 공항의 대기 시간이었다.


에어캐나다 비행일정이 그런가 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생각했었다. 어깨너머로 다른 탑승객들의 보딩패스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이럴 수가! 12시에도 4시에도 비행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카운터에 마른침을 삼키며 빨리 좀 탑승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예약을 문의했다. 있단다. 4시반 비행기란다.


옳거니, 원칙적으로 추가요금을 부과하는데, 일기 불순으로 항공사 측의 특별요금을 부과하지 않겠다는 친절함에, 에어캐나다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여행사의 선처라면 아마 여유롭게 마이아미 공항근처를 즐기라고 특별히 설정된 일방적 배려였을까? 고객서비스에 만전을 다해야 하는 여행사의 무지에 씁쓸함을 달래며, 우는 아이에게 젖 먹인다는 말을 실감했던 여행이었다.


 폭염이 겉옷을 벗겨주던 곳에서 불과 3시간 차이의 하늘길은, 꿈이여 다시 한번, 얼어붙은 동장군의 토론토 땅에 사뿐히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hyungin
이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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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1
이 겨울 찬가

 
이 겨울 찬가 

 

 

 

푹푹 빠진 폭설일랑 감당 못해 쩔쩔맸지
그럴거야 포기 하고 떨린 가슴 달래면서
이 겨울의 풍경 속에 애탄 가슴 잠재웠소


이제까진 심호흡에 이월 초반 맞았는데
누가 알까 별안간에 더 많은 눈 쏟아낼 걸
그럴 때면 꼬리 치며 앞마당에 재롱이들
소리 없이 하늘길에 그 사연 속 속삭임들
낭만이란 설레임이 사뿐하게 함께 하리


다정스런 팔장 끼며 좋아좋아 안겨들며
가는 세월 추억 속에 애뜻한 정 포근해라
산다는 것 꿈길마냥 그것보다 황홀한 것
즐겨야지 짧은 세월 너무귀한 한평생을


토론토에 이런 겨울 이거 정말 축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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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hyungin
이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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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잔칫날의 희비 쌍곡선

 

 

 분명 축제요, 경사임에 틀림없다. 온 식솔들이 함께하는 잔칫날의 풍경 말이다. 하지만 음식상을 마련하는 여인들은 죽는 날이다. 명절날이 그렇고 제삿날이 그렇다. 


시어머니 며느리가 함께 허리와 팔다리며 온몸이 쑤셔 거의 죽음 직전까지 숨을 헐떡이며 온 친인척 가족들의 환성을 불러 일으키려고 난리법석을 견뎌내야 하는 날이다.


 분명 기쁨의 날이고, 미풍양속의 대대손손 수백 년을 이어온 조선땅의 경사요, 세상 떠난 집안 어르신들을 추모하고 애도하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자랑스러워 하는 기념비적 풍습의 날이다.


그런데도 이날은 해롱해롱 잔치마당을 휩쓰는 남정네들의 술바가지 속에 넋두리와, 쭈그려 앉은 아낙네들 솥뚜껑의 기름냄새에 엉킨 땅 꺼지는 한숨 소리는 완전히 하늘과 땅 차이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풍습의 일장 치고는 참으로 어허! 이럴 수가? 몇 백 년의 잔칫집, 이런 감당키 어려운 모습을 전설인양 마냥 방치해둔 우리네 일상들, 어느 정치사에 단 한번도 구습을 타파하자고 손드는 정치인들 못 봤다.


그냥 이렇게 여자들은 몸살을 겪어야 하고, 남정네들은 윷가락에 장구와 북소리에 핫바지가 내려간 줄도 모르고 게슴츠레 눈을 비벼가며 술독에 나뒹굴고 있는 날, 여자들이 죽어 넘어질 듯 하면서도 거창한 상차림에 전력을 쏟아 부어야만 하는 희한하고 얄궂은 제도가 사람 잡는 행사로 의젓한 듯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간신히 근세대에 들어 약간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쩔건가? 명절 뒷감당일랑 드디어 정치 마당에서 법정까지 비화되기 시작했다. 이혼 숫자가 명절날의 부작용으로 곪고 곪아서 결국 터지고 마는 상황으로 점철된 것이다.


지지고 끓이고 볶아대는 태곳적부터 이어져 내려온 부엌문화가 이제야 폭발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여자들이 팔 걷어붙이고 잠자던 부엌문화의 인권을 부르짖는 것이다.


변화의 물결이 느림보처럼 그나마도 그 땅 잔칫상 위에 오르게 되었다면 이민의 천국, 이곳 캐나다 한국동포사회 역시 바꿔야 할 중차대한 잔칫상 차림이 있다.


 이민사 2세대, 3세대까지 이어져가는 새터민들의 뿌리가 박힌 지 반세기가 훨씬 넘었다. 그동안 원주민 같은 1세대 할아비 할미의 손과 발, 어깨들 다 멍들어 버렸다.


손주들과 증손주들까지 돌보며 지난 세월 속에 이제 남은 것, 한숨 속에 주름살뿐. 참으로 애처롭기 그지없는 할아비 할미들의 삶의 여정을, 지금도 혹사 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아직도 구부정한 허리로 가족행사인 잔칫상을 준비하도록 내맡기는 가족들, 우리 주위에 여전히 존재한다. 무엄하기 짝이 없는 혹사요, 불효다. 아니라면 가정교육의 실종이 아니겠는가.


온 가족들의 만남, 오랜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모르고 지나온 각 집안들의 이야기들, 따사롭고 포근한 피붙이들의 애정어린 눈길들, 경사스러운 잔칫날, 가족이란 태생적 축복가운데 이뤄지는 모임이 아니던가. 


대가족 중심으로 오천만 남한 인구의 분포도, 그래도 인구 다변화에 못 미쳐 아이 낳기 캠페인이 정치사의 주를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가족 이민사가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져 줄기줄기 주렁주렁, 오빠 동생 언니 형부, 씨앗처럼 뿌리내린 일가족 한번 모임에 얼른 보이는 머릿수 20, 30명의 대가족을 이룬다.


행복이 넘치도록 평안이 움트는 나라, 이 땅에 뿌리내려 풍성한 잔치마당의 축제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펼쳐 갈수 있도록 기원한다. 그러나 확실히 집고 넘길 일이 있다. 가족모임의 잔칫상, 이제는 할아비 할미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입히고 먹여가며 진자리 마른자리 보살펴 성년으로 발돋움시켰던 늙은 세대들의 애환들, 이제는 새순처럼 파릇파릇한 세대가 이어받을 효의 근본이 아닐까. 잔칫상의 음식 맛 역시 싱싱하고 맛깔스러움에 감칠맛이 더할 것이다.


대가족들의 화기애애한 모임 속에서, 세월에 찌들었던 늙은 세대들의 힘겨운 한숨 소리를, 이제는 웃음소리로 바꿔야 할 차례다. 지지고 볶아내고 끓이고 튀겨낸 잔칫상의 맛 속에, 주름살로 범벅이 된 할미 할아비들의 한숨 소리들 방관하며, 과연 허기진 뱃속만을 채울 것인가? 


일가 친척들의 모임, 어떤 모임이 이보다 더 화기애애한 모임이 있으랴. 활기찬 세대들의 준비된 가족애를 펼쳐 보여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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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hyungin
이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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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이젠 졸업을 해야지”

 

 

정말 싱싱하고 흠 하나 없는 새해가 밝아 나를 깨워줬다. 뭘 하라는 예시를 듬뿍 담아서 저리도 밝은 하늘빛은 놀랍도록 맑고 깨끗하게 새해를 밝혀 주었을까?


태양의 따뜻하고 밝은 빛은 온 세상의 것이라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슨 연유로 빛을 막아 서느냐고? 불만이나 투정은 언제 한번 볼 수도 없었지. 어찌하던지 간에 단 하루도 빈틈 하나 없이 여전히 이 한해 사계절을 지치지 않고 틀림없이 우리 곁을 순전히 무상으로 밝은 빛을 쏟아줄 것인데.


과연 이 새로운 한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값을 보상하라고 천둥 번개나 해일과 쓰나미 같은 호통으로 엄벌을 내려칠까? 어찌 우리가 알 수 있을까? 당최 모를 일이지만 고개를 갸우뚱 반신반의 하면서 새날이라 밝아진 새해 새 아침의 새로운 다짐을 해보고 싶다.


온갖 자연의 섭리는 순전히 공짜로 넘치게 퍼부어 주고 있기에 그래서라도 뭔가는 해봐야 할 것 아닐까. 하다가 쓰러지고 비틀거리며 힘들지 몰라도 운명의 동반자는 헤아려 주시겠지 믿으면서 말이다. 


작심삼일의 반복이 될지도 모른다. 뒷간 길과 나오는 길이 완연히 다른 것처럼, 그래도 각오는 해보리라. 이제는 졸업장을 받아야지, 졸업은 새 출발의 시작이며 도전이다. 부푼 희망을 안고 미지를 개척하려는 용단과 결단의 순간이 가슴을 벅차게 한다. 


탱크의 휘발유를 다 비웠기에 이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탱크를 가득 채운 것이다. 그게 바로 졸업장의 의미를 더해 준다. 삼청교육대도 아니다. 서로 울며 통곡대학 졸업장 역시 아니다.


콩이야 팥이야, 찌그락 째그락, 아웅다웅, 티격태격, 이젠 박사학위 정도의 실력이 충천했지 않았는가. 바로 그 부부생활 통달과에서 졸업을 하자는 것이다. 졸업 후엔 알콩달콩, 오순도순, 손도 만져주고 건강에 최상이라는 마사지도 해주며, 남은 삶을 함께 하자고 정겨운 눈빛을 밝게 하리라고 다짐하고 결단해 보련다.


몇십 년을 함께 한 이불 덮고 살았는데 어찌 그리도 "맞는 게 하나도 없어?" 부부들 속상할 때 흘기는 눈빛으로 내뱉는 말이다. 못된 소갈머리 나도 너도 이미 삐뚤어 있거늘 뭐가 맞겠는가? 이미 틀어져 있기에 당연한 불평이라지만, 피가 용솟음치게 젊은 시절, 맞는 것이 넘쳐났기에 좋아했고 혼을 빼듯이 빠져들었기에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한 침대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아왔지 않았던가 말이다.


아들 딸 생산 과정은 마스터 키의 완벽한 작동을 확인한 위대한 선물이 아니었던가. 모두 성장해버린 자식들 훌훌 집 떠나버리고, 노친네 단둘이 호젓하게 살고 있다. 남은 세월 얼마 있다고? 내 곁을 함께하는 아내와의 미지근한 모습으로야 분명히 천지신명께 죄스럽지 않는가.


무상 공급된 자연의 배려에 허송세월, 고맙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불만으로 투정으로 반목으로 역성으로 기름과 물처럼 함께 할 줄 모르는 이해관계를 억지로 끼워 맞춰 산다면 송구스럽고 멋쩍어 면목이 없는 일임에 말해서 뭐하랴.


 아마도 말만 앞세워 하는 척 하다 말지라도, 밝아오는 새해 이제는 그럴듯한 계획 속에 보람되고 의미로운 발길, 눈길을 가슴 속으로 헤아리며 죽는 날까지 동반자인 부부 얼굴에 미소를 띄우리라.


 있을 때 잘해! 히트친 유행가 가사 일지라도 평범한 한마디가 아니다.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우리말로 교훈 중에 가훈이다. 몇장 몇절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던가?


 서로 울며 그 대학 재학생과 수석졸업생들, 지난 일들 미안했다고, 퇴색되어 가는 사랑을 부활시켜 졸업장을 우리 서로 확인하자. 그리고 나서 다정히 이 겨울에 골프여행도, 한겨울을 달래는 캐리비안 어느 곳에서 따가운 햇빛을 즐겨보자. 내 곁에 있을 때, 있을 때 잘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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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hyungin
이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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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8
글 쓰기, 한 해를 회고하며

읽고 나서 아! 바로 이거야,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읽고 또 읽어보며 쓰는 사람과 영적 호흡을 실감하며, 나의 가슴에 뭔가를 심어주는 글, 수필이란 습작을 흉내 낼지라도, 평범한 하루 하루를 정리해 보듯이 엮어내 보는, 그런 수상록을 펼쳐보려 했습니다.


나름대로 완벽함을 구사하려고 무던히 애써 써내리던 글 속에, 문체의 생명력을 구성하는데 부끄러움이 듬성듬성 사방에 흠으로 보였겠지만, 나무라지 않고 더러는 부족한걸 채워주시고, 쓰러진 건 바로 세워주셔서 지면을 할애하신 이용우 사장님을 위시해서, 김효태 편집부장님과 편집 팀원 여러분들께 새해 인사와 더불어 감사를 올립니다.


일년을 그런대로 밀어낸 듯, 휴우! 큰 한숨을 몰아 쉽니다. 일상생활 평범함을 매끄럽게 표현해 보려는 글속 사연들, 공감대를 엮어내서 울고 웃고, 때론 수필의 의미를 함축시키는데 인색하지 않으셨던 독자 여러분들께 지면을 빌려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감히 쉽다고 덤벼들었던 글쓰기였지만,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든 변변치 못한 글속의 사연들을, 정겹고 친절한 격려와 사랑으로 다독이시며, 댓글로 참여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손을 흔들며 고마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름도 성도 한번도 대면치 못했지요. 해밀턴 근교에 사신다는 C씨 내외분 말입니다. 지난 일년간 결코 쉽지 않는 독후감을 거의 매주 띄워주신 애정 어린 성의에 참으로 잊지 못할 인연이라 기억하고 있습니다. ( “이 작가님의 평범한 글 속에 요동치는 맥박이 뛰는 모습을 매주 함께 호흡합니다. 자상함이 활기 넘치게 폭발적 어휘 구성에 찬사를 보냅니다.” )


더 한층 분발하라는 독촉장을 띄워주신 격려라고 스스로 가슴에 안고, 아직도 미성숙의 뒤안길에서 뒤뚱거린 저의 글을, 확대 접목시켜 주셔서 불끈 힘이 솟아 납니다.


이웃동네에 윤여사님, 돈밸리 남쪽에서 새벽을 깨워 과일점을 하시는 김형, 신문이 기다려진다는 주말휴식의 읽을거리에 갈증을 느끼는 독자분들, 글 속의 생명은 한마디로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호흡하며 삶을 투시하고 열망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순수함을 곧이곧대로 표현해 가면서, 나태해진 영혼에 채찍질을 하련다는 각오와 다짐을 했습니다. 어찌하면 읽으신 분들이 읽고 또 꺼내보고 싶은 글이 될까? 난해하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글속에 싹이 틔어나는 생명력을 구사하려고 무던히 잠결을 뒤척이기도 했습니다.


문체의 구성내역은 문학적 장르를 거슬러 있었을지는 몰라도, 읽고 느끼는 일반 독자분들의 관념적 정서 함양엔 쉽게 적응이 되는 보탬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글을 쓴다는 효율적 요소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오묘한 감성의 요리 같은 다양함은 물론, 무뎌진 뇌의 활동 범위를 과감하고 정교하게 파헤쳐보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묵은 해의 원고를 마감하면서, 많은 부족함이 널려있기에, 독자 분들 곁에서 차분한 발걸음으로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렵니다.

 

열리는 새해, 포동포동한 황금돼지 떼가 풍요를 상징하는 듯,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부디 풍성하게, 기쁨이 넘치는 싱싱한 새해를 맞이하시길 간곡히 머리 숙여 축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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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hyungin
이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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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6
멋진 남자

 

최근 칼럼 ‘멋진 여자’를 읽고 몇몇 독자 분들이 "멋진 남자 이야기는 없느냐”는 이메일을 보내와 이 글을 쓴다. 여자들 앞에서 있는 척 거들먹거리며 돈을 뿌려대면, 멋진 남자일까? 아니면 고분고분 두 손 비비며 순종하는 척하는 아양 끼가 여자들에게 멋지게 보여질까? 연예인으로 무대 매너에 익숙하여 수없이 많은 팬들을 확보한 남자를 멋있다고 할까?


이 모두가 상식적인 바탕 위에서 인물평을 할 수 있겠지만, 결코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은 아닐 듯싶다. 연애 시절이야 간혹 그런 척 수줍고 다소곳한 데이트의 수준에 맞춰 남자들의 의미심장한 미소 속에 멋을 치장한 남성미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혼하고 아이들과 함께 평생을 엮어가는 거친 항해 같은 삶 속에, 아내에게서 멋진 남자라는 말을 듣고 사는 남편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근면, 성실함은 물론 행복함의 절정을 이뤄가는, 마치 신혼 같은 꿈속을 거니는 듯 환상적인 삶의 모습을 만끽하고 사는 꿀맛 같은 부부 말이다.


하지만 그런 믿음직한 관계로 남편이란 존재를 확고히 다져가는 부부가 결코 흔치 않다는 것, 참으로 안타까울지라도 모든 아내들이 소크라테스의 아내처럼 악처의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살기야 하겠는가. 어떤 종교에선 부부들의 만남은 악연의 시작이라고 설파했지 않았던가! 


아내에게서 멋진 남자라는 존경과 사랑을 받고 사는 남편들이 있다면, 그대야 말로 참 인간세상을 달관하고 있음을 기뻐할지어다. 


확고한 믿음 속에 멋진 남편을 확인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부엌 일에 헌신적이며, 집안 구석구석 청소하는 일이며, 냉장고 청소와 더불어 필요한 것이 뭔가? 시장까지 봐와서 식탁을 챙겨주는 일들, 세탁물을 살피고, 침대 커버들 손수 갈아 끼워 아늑한 잠자리를 마련하는 세세한 일들이며, 밖에 정원을 가꾸고 겨울엔 눈을 치우는 일들, 하나하나 모두를 말끔하게 책임지는 남편들, 이 정도면 멋진 남편이라 해도 과장되지 않는 삶의 모범이 아닌가.


행여 무거운 것 들고 계단을 오르다가 아내의 어깨, 팔뚝이며 무릎이라도 다칠까 봐 "여보! 내가 할게, 어디에 가져다 놓을까?" 세심하고 자상한 남편으로써의 자질이 넘쳐나는데, 분명코 "와우! 당신 멋지다. 고마워요" 남편에게 한마디 한다면 아내의 자존심에 두드러기가 생길까?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대화일까? 


열거한 기본적 집안일들, 남자들의 의무요 몫이기에, 그런 일 해놓고 무슨 생색이며, 뭐 그게 자랑거리냐고 반문해버리면, 남자의 자존심 따윈 진흙더미에 곤두박질이다.


연약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여성의 체질이라 주어진 가정생활 패턴이 바로 그런 수순인걸, 뭘 그렇게 입에 바른 과시를 꼭 해야 하느냐고, 묵사발을 만들어 버린다면 이 또한 천하의 낭패다.


구걸하듯이 한마디, "여보! 수고하셨어요"라고 치사 받고 싶었던 마음을 빨리 쓸어 담아 버리고 싶어진다. 당연시 되는 집안일, 분명코 여성 체력의 한계를 남편이 돌봐야 하는 것, 가정생활의 기본 중에 첫 번째가 아닐까!


"내 그럴 줄 알았지!" 당신이 이런저런 일 해놓고 특별히 과시할 날이 있을걸 이미 알고 있었단다. 한마디로 내 몫, 네 몫을 가려내야 할 가정생활은 구분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아내의 나들이에 자동차 문을 열고 닫아주며, 고급식당 정찬을 자주 해야 하고, 로맨틱한 음악회나 명화감상, 영화를 함께 보는 여유로운 시간들, 자칭 문화인의 흉내를 모방하면 되는 것인가?


 꼭 교과서 같은 이론만은 아니리라. 멋들어진 데이트로 평범한 일상에서 새로운 분위기를 일구어내는 짜릿하고 곰살맞은, 더러는 좀 특별한 변화의 삶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혼자서 1인10역의 책임감에 찌들고 짜증에 겨웠던 사랑스런 아내에게 슬쩍 돌파구를 마련해 주며, 어깨를 토닥거려 주는 남편, "여보! 오늘 당신 참 멋지다" 연애하던 시절보다 더 묵직하고 믿음이 살아 숨쉬는 대화로 아내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여태껏 함께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모두 치렀거늘 무슨 뚱딴지 같은 자존심인가. 단연코 멋을 품어내는 남편의 놀랍도록 변화된 모습임에 틀림 없으리라. 


몸이 불편해 의사들을 봐야 할 때마다 운전수 노릇을 충실히 담당해야 하는 것들, 허리, 어깨가 쑤시고 아프다면 마사지에 주무르기까지 총동원 해야 하는 일들, 참으로 멋진 남자라는 말 한마디 듣기가, 억지로 하려면, 하늘에 별따는 것보다 더 어렵다. 


모르는 척 묵묵히 천근보다 더 무거운 삶을 안고 사는 백년해로의 삶, 바로 그게 멋진 남자임에 틀림없지 않을까.


그래도 공치사라도 듣고 싶은 마음 어찌 없을까만, 아내의 습성이 그런걸, 탓해서 뭘 얻을 수 있으랴? 차라리 포기하고 살아야지, 그렇고 말고, 그때부터 집안은 안정된 온기가 한 겨울에 벽난로의 화력처럼 훈훈할 것을.


멋진 남자란 의미는, 아내의 무딘 감정 따위를 억지로 깨워 주입시킨다거나, 헉헉거리며 집안일들하며 들춰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절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숨죽여 소리없이 온갖 얄궂은 일들 눈 딱 감고 돌보는 남자, 그게 바로 멋진 남편인걸, 글 쓰면서 이제야 알았다. 겨우 이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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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hyungin
이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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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6
기해년 새 아침에

 

기해년 새 아침에

 


 

(기) 기를 쓰고 달려들어 쟁취해낸 한해런가,
(해) 해와 달이 여느 때와 천지만물 여전한데,
(년) 년 전보다 풍요롭게 기대 또한 넘쳐나니

 

(황) 황금돼지 떼를 지어 우리 삶에 풍성하게
(금) 금은보화 넉넉하듯 식탁 위에 올려주리
(돼) 되로 주고 말로 준들 살찐 모습 닮아갈까
(지) 지금처럼 풍요로움 지난 세월 뿌리인걸 
(해) 해봅시다 행복하다 복스러운 말 한마디 

 

(복) 복에복이 따로있나 어허둥둥 춤을추면
(많) 많이많이 웃고즐겨 건강행복 넘칠것을
(이) 이리좋은 세상살이 어찌하려 투정하리 

 

(받) 받는 기쁨 베푼 축복 인생살이 달콤한데
(으) 의리 찾아 이웃친구 불러내어 한잔 하세 
(세) 세세연연 쌓은 추억 남은 인생 살찌울 걸
(요) 요즘처럼 값진 세월 할일마다 설렘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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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hyun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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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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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0
멋진 여자

 
 
날씬하게 예뻐서 넋이 나갈 듯한 여자 이야기가 아니다. 훤한 인물에 매력이 철철 넘치는 여인이 나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해서 이 글을 쓰는 것 또한 아니다. 그냥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다소곳한 중년 여인의 삶의 모습이 대단했기에, 오래 전에 겪었던 사연을 잊을 수가 없어 제목을 "멋진 여자" 라 붙였다.


그녀는 참 멋있었다. 차분하게 고분고분 천성적인 마음씨를 겸비한 여인이었다. 매우 소박한 성품에 별 치장도 않고 호박꽃처럼 순박한 시골 아낙네 같은 여인, 그녀는 아내의 둘도 없는 사랑스런 친구다. 그런 멋지게 가슴이 넉넉한 여인이 나의 아내 곁에 있어서 그런가? 영향력을 넓혀서였을까? 


이제까지 수십 년을 아내와 아웅다웅하면서도 부서지지 않고 살아왔음에, 그녀 에게는 물론 동행하신 인도자에게 감사할 뿐이다. 여학교 일년 선배라고 깎듯이 언니, 언니라고 존칭을 섞어 부르며 다정다감하게 평생우정을 다져가고 있다.


한핏줄 친형제보다 더 정겹고 따뜻한 마음씨를 여태껏 아마 평생을 끔찍하게 서로 아끼며 그렇게 오붓한 관계로 주위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어릴 적부터 이웃집에 살면서 친형제나 다름없이 앞뒷집을 서로 자기집처럼 흉허물이 없었다는 이야길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바로 그녀의 삶, 한편으로 멋지고 대견한 모습을 글에 담아보고 싶다. "여보!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다음엔 조심할게요." 이 정도의 대화 속엔 아무렴 폭군 같은 남편이라도 괴팍하고 요상한 표정은 감춰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부부가 으르렁거리며 다툼으로 그 순간을 망칠 수 있었겠는가?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아무것도 흠잡힐 일도 아니었는데 뭐가 그리도 자존심이 짓밟혔다고 눈알을 부라리고 핏대를 세우며 자식들 낳고 미주알고주알 평생을 함께 하는 아내를 그렇게도 허망하게 했을까? 그래 평소 아내의 잔소리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그 후유증이 폭발한 것일까?


하이웨이 진입로를 잘못 들었다고 한마디 거들던 순간, 까딱하다 만신창이 될뻔했던 아내 친구 남편의 볼썽사나운 행패가 참으로 상상할 수 없이 어이없는 순간이었다. 아니 Exit을 잘못 들어섰다는 아내의 염려스럽고 사랑스런 말 한마디였다. 그게 뭐 그리 빈정 상하고 자존심의 묵살이라고, 달리는 차를 멈춰 세우고는 "네가 운전해라." 하는지. 바로 뒷좌석에 몇 십년만에 찾아온 친구 앞에서 그게 무슨 꼴인가. 어이없어 아내와 나는 못들은 척 숨을 멎을 수밖에 없었다.


 바쁜 시간에 배웅을 서둘다 보니 짜증스런 불청객이라고 행여 속풀이가 그 정도였을까? 방문길을 멈춰 다시 되돌아가버릴까? 후회스러움에 안절부절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아이쿠야! 그렇네, 깜박하는 바람에 바로 지나버렸네, 다음길로 빠지면 될거야 미안미안, 어허! 나이 들어가니 순간적으로 실수들이 어디 한두가지라야지, 고마워 여보, 내 마누라가 최고야”


능히 이런 대화쯤 갖춰야 할 분위기로 마무리할 수 있는 유머러스한 평소 때의 인품은 어디로 실종돼버렸을까? 모처럼만에 먼길을 달려온 친구 부부를 맞아들인 판국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그 멋진 여인에게 어찌하여 그런 비상식적 몰지각한 성품을 지닌 남편인가? 뭐라 나무랄 상황이 아니었다. 고대했던 수년만의 만남이 너무 소중한 터에, 우리마저 왈가왈부 그 자리에 참견했다간 박살이 날뻔한 살벌함에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는 출중한 최고 학벌에 전교 일등을 독차지한 내노라한 개천의 용 같은 인물이다. 특출하고 탁월한 기백과 투지가 번뜩이는 사나이로, 뉴욕 유명한 상선회사의 부사장까지 역임한 자랑스런 풍운아였다. 


학벌이며 사회활동 영역이 부부생활에 무슨 자격운운 할 수 있을까만, 그래도 그렇지. 매사에 상대편의 의중을 읽고 판단하는 성품과 인격이 그 정도뿐이라면, 머리 좋아 수능평가해봤자 가정생활 수준이 엉망인걸 뭐라 변명할 것인가.


멋진 여자의 재치있는 미덕으로 이 상황반전은 요행으로 험악한 남편 성격을 잠재웠다. 폭발적인 남편의 화약같은 성품을 훤히 뚫고 있는 아내의 여유로운 배려야말로 내 팔자려니 눈 딱 감고 부부싸움의 승리자임을 확인하던 순간이었다.


지는 자가 승리자란 성어가 증명되고도 남았다. 이해하며 양보와 포용의 미덕이 백년해로의 지름길이 아니던가. 그만큼 멋진 포용력을 겸비했기에 그런 남편의 곁에서도 세 아이를 훌륭하게 키웠으리라.


 멋진 여자의 멋진 품격, 바로 멋지다는 표현은 그녀를 위하여 예비된 어휘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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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hyungin
이형인
72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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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5
그리운 아버님, 어머님

 
 
그리운 부모님을 생각하면 한마디로 죄송함뿐이다. 후회스러움에 죄인인 듯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자식 노릇 올바로 했을까? 자책이 사무치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분명한 것은 좀더 잘해드렸었어야 할걸, 이제야 생각하니 아무리 먹고 살기에 허덕였다 하더라도, 부모님에 대한 예의와 의무만은 다소곳이 열정을 다 했었어야 했건만 너무 소홀했던 기억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야단스럽게 부모님 속을 썩혀드린 일이야 추호도 있을 수 없었다지만, 그런데도 소원했던 옛 추억을 더듬어 볼 때마다 더 좀 잘해드릴 수도 있으련만, 이제와 아쉬움에 후회가 밀려들어 가슴이 미어짐을 어찌 할거나! 무릎 꿇고 용서를 빌고 싶다.


부모님! 잘해드릴게요, 이제야 살아 오시라고 악을 쓸 수도 없는 일, 그토록 좋아하시던 것들, 지금도 기억해 볼 때마다 넉넉하고 정겹게 아들 할 일에 더 좀 충실치 못한 일들이 새록새록 가슴을 쥐어짠다.


노년에 이민봇짐을 싸들고 식솔들과 함께 새 터로 오시라고 가족 초청을 했었는데, 변변치 않게 사시다가 저 세상으로 떠나신 분들, 나의 부모님께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나이 들수록 이토록 가슴을 후벼댈 줄이야, 뒤늦게 철이 드는 이 모습, 어인 일일까?


자식들이 최선의 효도라고 바닥까지 전부 털어드린다 한들 어찌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까, 옛적이야 헐벗고 못살아 얼마나 한이 맺힌 삶이었던가. 그런 와중에도 자식들은 가르쳐야 한다는 탁월한 신념과 결단으로 전력을 다 쏟으셨던 부모님들, 1인당 국민소득 700불이었던 시절을 용케도 겪어내셨던 처절한 각오와 투지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유별난 세대 아니었던가.


그 곤욕스런 생활 속에도 애끓는 가족애로 최선을 다하여 실천하셨다. 가족애란 내리사랑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얼버무린 변명이나 핑계로써 부모에 대한 사랑을 대신한다면 철천지 불효인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육이오 전란의 시대를 겪은 청천벽력 같은 고행들은 자자손손 증언들로 그 전설 같은 산 역사를 어찌 우리 잊을고! 그 와중에도 새로운 역사는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는 1인당 국민소득 4만불을 향한 천문학적 변화의 세대들이 바로 그 시절의 뿌리로부터요, 혁명적인 국민성이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한이 맺힌 옛시절을 꼴사납다고 삶에서 도려내버리고 싶다는 이웃친구들이 많다. 너나 나나 모두 헐벗고 굶주렸기에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표현들로 과거를 잊어버리고 싶었을까. 


우리 아버님, 아직도 젊은 연세였던 61세에 세상 뜨신 생애, 그분이야말로 한에 맺혔던 세상이 근대화 시대로 물결치듯 변화했던 걸 하나도 모른 채 이 세상을 작별하신지 40년이 지났다. 40온스 위스키 한병 값이 10불도 안 되었던 시절, 40시간 주급이 60불 내외였던 그때였다. 캐나다에 입국하신 지 일년 만에 험한 교통사고를 당하여 눈을 감아 버리셨으니, 고생만을 짓궂은 운명처럼 하시다가 좋은 세상을 향하여 캐나다에 오셨건만, 풍요로운 복지를 누리지도 못하시고, 그렇게 숙명적인 죽음을 당하셨다.


왜 이렇게 오래 사나? 입버릇처럼 긴 삶이라고 투정하시던 우리 어머님, 97세로 최상의 삶을 누리셨던 어머님의 생애, 아버님이 놓고 가신 나머지 삶까지 덤으로 누리셨을까?


97 팔팔 114하셨던 어머님의 장수하신 초능력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속이 더부룩하시다고 반에 반 공기의 흰 쌀밥만 꼭꼭 오래 오물거리신 식습관에, 아들 딸네가 온갖 채소죽을 마련해 드리면 아껴 드시던 철저한 건강요법이 장수의 비밀이 아니었을까? 일찍 잠자리에 드시고 새벽같이 일어나시어 집안을 싹싹 청소하시던 몸에 배인 습관성 체질로 장수를 누리셨을까?


 운명을 누가 어찌 점칠 수 있을까? 창조자의 유일한 소관인걸,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님께 더 잘해드리지 못한 세월들이 후회막급한 불효였다. 


이제와 변명이지만, 후세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훗날 미련 때문에 가슴 아파하지 말고, 부모님이 살아있을 때 잘해 드리라고, 효도라는 강박관념에서 부담스러워 말고,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하라고.


 영생을 누리신다는 하늘나라, 있긴 있는지요? 아버지 어머니, 영원히 잠드셨나요? 아니면 천사들과 함께 하늘을 유람하고 계신가요?


 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신 후, 3년도 넘게 눈물을 훔치셨던 어머님, 합장을 준비 했건만 싫다 하시고 따로 묻히셨던 우리 어머님, 이젠 아버님 곁에서 영생을 누리시는지요? 죄송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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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hyungin
이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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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1
나를 닮은 사람이 있던가?

 
 
 묘한 존재 중에서 사람이란 대체 묘한 존재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우선 묘하고, 어디서부터 오고 가는지, 왜 사는지 모르는 것도 참 묘하고, 무슨 생각 하는지도 묘하고, 백인백색 성미가 다른 것이 또한 묘하다. 내가 만약 조물주였다면, 천지만물을 다 마련하였다 하더라도, 사람이란 묘한 것은 만들지 않았을텐데… 고 이희승 씨의 수필 한 구절이다. 


나를 닮은 사람 눈 씻고 봐도 절대 없다. 안약을 넣고 봐도 보이지 않는 것, 포기할 것 중에 하나 있다. 죽이 맞아 생각이 척척 들어맞고 하는 일들마다 어쩜 그렇게도 문고리 돌쩌귀 맞듯이 빈틈없이 뜻이 맞는 사람 말이다. 잊어가며 제쳐 버리면 마음에 평안이 솟는다.


밖에 나가려면 맨발로도 다니는 사람이 있겠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신발이 필요한데 슬리퍼냐, 운동화냐, 구두냐? 기본적 일상생활 그 평범한 일 하나만으로도 의견이 분분하잖은가. 있을 수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있다 해도 과연 그들은 서로 만족스러울까? 그런데도 우리는 나와 똑같지 않다고 비방하고 험담하며 어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함도, 미움도, 사랑도, 나누며 베풂까지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 평생을 함께 한다고 생각해보자. 똑같기에 편안함보다는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같은 생각이기에 서로 융합하고 절충하며 감싸안고 사랑하는 일들, 서로 같은 불평불만들까지도 함께 토해낸다면, 상대성 이론에 잘 적응이 되어갈까?


 상식적으로 이성문제 하나만 보자. 매력적인 여인과 멋진 남성을 서로 좋다고 차지하려 한다면 누가 누굴 양보하며 미소를 띄울까? 끔찍히 좋아하고 아껴주며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데 정말 요긴하고 친밀하게 쌍두마차처럼 굴러갈 수 있겠느냐는 상상을 해본다. 


한 뱃속에서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들도 얼굴모양만 같을 뿐, 하는 행동이며 생각의 차이가 생뚱맞게 엉뚱하다. 쌍둥이 부모인 주위 사람의 이야길 참고해 볼 때, 참으로 인간사 다양함으로 철저하고 오묘한 자연생태계의 이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삶 속에 가족은 물론 평생을 이웃과 친구들 함께 한다. 칭찬과 격려로 정겨운 기쁨 속에 서로 미소를 나누며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나름대로 약속이라도 하듯 열성을 다하고 살아간다. 그들이 나와 똑같은 인격체라면 능히 이겨낼 수 있을까? 저 사람 왜 저래? 왜 저 모양이야? 절망적 비극들이 연출되는 상황들을 피해 살 수 있을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적 특수성에 이렇게 해결될 수 없는 숙제를 안고 우리는 얼버무려 살아가고 있다. 의식이란 특수성을 분별할 수 있는 생명체라면 산 위에, 들녘에 산천초목처럼 그러려니 참아내고, 못 본 척 의젓하게 제자리를 지켜가고 있을 터인데 말이다.


물속을 휘젖고 사는 수백만의 물고기들, 천태만상이 아닌가. 고래가 참치 보고 나를 닮지 않았다고 비아냥거릴까? 새우가 랍스터를 비웃고 시샘하며 왜 그리 덩치가 크냐고 따지고 들까? 말이 소보고 뛰지도 못한다고 흉보며 비웃기라도 하던가?


 그러기에 못 본 척 들녘을 화려하게 장식한 자연의 생태계는 우리곁을 감싸주고 있다. 풍성한 산소를 뿜어대며 가지각색 모양으로 인간사를 말없이 향기롭게 부추기고 있다.


 순리에 적응치 못한 인간적 생태리듬은 묘한 상태로 꼬여있다 해도 절대 억설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으르렁거리며 푸념이 불만으로, 비방이 미움으로, 공격이 원수로, 삶을 애석하게 짓밟고 산다. 오죽해서 종교인의 고백 중에 "사랑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오는데 70년이 걸렸다”고 했을까.


 세상만물은 철저한 개성미로 본위주의적 완벽함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강과 바다도, 산과 들녘도, 인간과 동물들도, 특히 남편과 아내, 내집과 이웃 역시 절대 동질감으로 귀결점을 찾을 수 없는 존재다.


너와 나를 절대 합리화시킬 수 없는 문제들을 접어가며 어물어물 함께하고 있다. 그렇다고 눈을 부릅뜨고 주장하고 성토한다고, 의롭게 공동체란 정의를 표출해낼 수 있을까? 왜 나와 같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습성들 말이다.


우울하고 심란하다고 푹푹 속을 썩히며 가슴을 쳐가면서도 인간사 화합이라는 묘안이 있다. 포용하라는 진리가 가슴을 파고드는 피할 길이 분명 있다. 우리 혼을 정화시켜주는 인격적 여유로움 역시 따뜻한 가슴속에 꽉 차 있다. 더구나 다행인 것은 인간사에 만사를 해결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랑이 정겹게 존재하기에 나와 똑같지 않다고 비관만 하고 살기엔 너무 짧은 인생이 애닯지 않는가.


분홍빛 해당화와 탐스런 빨간 봉숭아 꽃이 함께 정원에 빈틈없이 피었다. 내 뿌리 곁에 다른 뿌리가 뻗어 침범했는데도 불평 하나 없이 의젓하게도 화려함의 극치를 피워내며 서로 다른 꽃으로 참으로 아름답게 피었다. 인간들이여! 나를 보시라. 이 한 계절을 아무 투정도 모른 채 장엄하게 화려한 꽃으로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피워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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