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계정 찾기 다시 시도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형인 칼럼

leehyungin
BEFD2E86-F55D-4E58-8661-372E241DF02D
62857
Y
메뉴 닫기
오늘 방문자 수: 85
,
전체: 6,646
(전 실협회장)
[email protected]
메뉴 열기
leehyungin
이형인
71732
11090
2018-11-15
‘Sold’ 사인의 비결

 

 

 

 

집이고 땅이고 매물에 ‘Sold’ 사인이 붙었다는 것은, 그동안 애태웠던 땀의 대가 이려니와 분명 행운임에 틀림없다. 거기에 더하여 황금어장에 버금가는 부동산에 Sold 사인을 거는 것이야말로 천운에 비교할 수 있는 횡재요, 천금보다 귀한 마케팅의 성취다.


지난주 칼럼에 밝혔듯이 금 밭을 나에게 개발하라는 천금 같은 기회가 안겨진 것이다. ‘For sale’ 간판은 한시라도 서둘러 ‘sold’ 사인으로 바뀌어야 할 막중한 책무가 중개인에게 주어진다.


2년씩이나 별볼일 없이 허탕이었던 매물이 3주 만에 홈런을 친 비결이 어디 있을까? 이 이야기는 어떤 특출한 부동산업자들의 성공비결이라기보다 내 바로 주위의 끈끈하고 절실한 대인관계에서 이뤄낸 완성품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은 진리다. 손톱 밑에 가시 먼저 뽑아야 한다는 말과 상충한다. 바로 우리동네에 이사하려는 바이어를 찾는 일이 최우선이란 비법이 3주 만에 ‘sold’ 사인의 숨은 비결이다.


그는 매우 진지한 자신감과 함께 지난 수년 동안 나름대로의 지론에 충실했기에 남다른 금 밭을 발견하곤 한다는 것이다. 그 매물의 원초적 실체는 과거 ‘sold’ 사인의 그늘에서부터 드러난단다.


 그 그늘 밑에 서성이던 이웃들의 눈초리가 사인 색깔이 바랠 정도로 스쳐 지나가다 매물로 연결되는 행운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의심했던 중개인의 숨은 능력과 마케팅의 요술을 기대하는 집주인들의 공통적 관심사에 무엇으로 기대감을 안겨줄 것인가? 친분관계로 이어져 온 이웃 부동산업자들에게 매일 20~30통의 전화나 이메일을 띄운다는 것이다. 


 멀티플리스팅(MLS)에만 의존하며 두 손 비벼가며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새 매물을 홍보하는 전략이 바로 친분과 인연을 재확인하는 목소리와 손끝에 있단다.


그들 역시 연관된 매물들을 소개하는 기회로 공유함은 물론, 서로의 마켓을 분석하는 것을 일주일 이상을 반복한단다. 한 주일이면 150명 정도의 중개인들과 긴밀한 소통을 한다.


투망질을 한두 번 하고서 어찌 없는 고기 탓을 할건가? 열 번도 짜증스럽겠지만 계속 투망을 던졌을 때 뭔가 걸려 나오고, 그 중엔 월척의 기쁨으로 환성을 지를 때도 있을 것이다.

 

 만일 일주일이 8일이라도 부족할 판인데 어찌 다른 일에 신경을 빼앗길 수 있겠느냐는 매물 요리사의 철학이요 신념이다. 일주일이 9일이라면 하루 골프장에 갈 수 있을 거라는 그의 철저한 직업의식으로 2년 동안 묵혔던 폐광에서 금을 캐내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그의 지난 10여 년 부동산 전략은 초등학교 수준의 교과서에 실려있는 기본 이란다. 동네를 눈길로 살피는 고객들의 발걸음이 금 밭을 일구어내는 도구라는 것이다. 그 발걸음을 함께 동행하는 자가 바로 친분 있는 협력자들이란다. 


그들의 눈길이 바로 sold sign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이다.


 협력자들은 경쟁자가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실수요를 충족시켜주는 부동산의 활기요, 용솟음치는 마케팅의 불씨인 것이다.


 떠벌려 소리소리 메아리쳐야 산울림이 되어 막혔던 숨통을 열어준다는 지론이 바로 그의 철학이다. 그런 전략이야말로 부동산의 첫걸음이라고 미소를 가득 담은 얼굴로 ‘sold’ 사인을 걸고 걸음을 재촉한다. 


 기쁨에 취할 틈도 없이 다음을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매우 활기차고 가뿐하기 그지 없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hyungin
이형인
71596
11090
2018-11-14
부동산 중개업자들과의 만남

 


 
 매물은 금광임에 틀림없다. 형편이 어찌되었건 부동산을 팔거나 산다는 인연들, 뭉칫돈이 몰려다니는 품세가 금광을 연상케 하는 희열이 넘친다. 특히 몇 년 전부터 요동치던 부동산 마켓, 이미 집을 가진 이들은 모두 금광에 안겼다.


금 밭을 일구어내는 듯 매물을 찾아서 온갖 열정을 쏟아내는 부동산 중개업자들, 합작품을 성사시킨 후일담은 금 밭을 뒹구는 횡재임에 틀림없다. 금 밭이 훤히 보이는데 어찌 게으름을 피울 여유가 있으랴. 부동산업자들의 번쩍이는 눈빛을 보노라면 활기가 돋는다.


성실, 근면, 열정, 패기, 그들이 추슬러 마켓에 대처하는 고객들의 자산이 바로 그 낱말들과 함께 숨고르기 상황대처를 절대 게을리 할 수 없는 관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두 해가 지났다. 매물을 마켓에 내놓으면서 부단한 생각들을 추스르며 구석구석 정리정돈에 정신을 쏟아내야 하는 강박관념이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아무나 붙들고 내 집 좀 팔아주세요, 한마디로 금광을 맡기려는 순간들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던 것이다.


몇 십 년 이 땅에 살면서 부동산 거래를 할 때마다 나의 자산을 들쑤셨던 부동산업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과 절묘한 마켓을 함께 했기에 자산증식이란 눈높이를 격상하는 기쁨이 금광 같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물론 폐광도 있었고, 반면에 요샛말로 대박을 친 만남으로 중개인들과의 인연이 각별하기도 했었다.


매물을 오래 전부터 소통해왔던 잘 나가는 중개인에게 리스팅을 했다. 잘 나간다는 표현은 곧 눈코 뜰새 없이 시간에 쪼들려 고객들과의 자상한 중개 역할을 원만하게 수행할 수 없었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그와의 3개월 리스팅은 물 건너 가버릴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금 밭을 발로 차버린 것이나 진배없이 시간만 잃어버렸다. 누가 바이어들을 끌어 들이겠지,. 기다려만 보는 듯, 본인의 열정이나 성실함이 보이질 않는 수수방관, 책임감의 부재다.


그토록 수년 동안 친분은 물론 신뢰와 믿음을 쌓아 두었건만 그마저도 뜬구름 잡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중에 그래도 맘을 확 끌어대는 중개인이 누굴까?


이리저리 둥글둥글 잠자리까지 불편을 겪어가며, 그래도 묶은김치 맛이 최고라는 옛말이 생각을 정리해 주었다.


오래 전에 깔끔하게 뒷처리까지 책임을 다해주었던 C라는 중개인에게 리스팅을 했겠다. 금 밭을 내어 맡긴 것이다. 이러이러한 조건을 붙여 서로 만족스럽지 않을 땐 계약취소를 하자고 조항을 삽입해 두기까지 했다.


그녀 역시 동서남북 일주일을 8일처럼 열정을 쏟아내는 중개자로 낙점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시 운이 다했을까? 결국 금덩이는 캐내지 못했다. 매물에 "for Sale" 간판이 오래 걸려있어 비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야말로 몇 달씩 또는 일년 이상 동네길을 장식하고 있다면 참으로 볼썽사납다.


집 근처에 다른 집이 몇 달 만에 ‘sold’ 사인이 붙었다. 아니 이럴 수가! 우리 집보다 더 낡고 허름한 모양새의 매물에서 금덩이들을 들춰낸 것이다. 부러우면서도 속이 부글거릴 수밖에. 아니 2년이나 출렁거린 ‘for sale’ 간판이 보기도 싫었다


팔려나간 집 리스팅 에이전트는 바로 집 근처에 있는 허름한 부동산 업자였다. 그는 일년 전에도 바로 근처에 1백만 달러가 넘는 금덩일 두 번이나 캐냈었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진작 그 에이전트와의 대면이 있었어야 할 것을 후회하면서 이제라도 그에게 리스팅을 했다.


3주 만에 5명에게 쇼잉 후 2년 이상 애태우며 기대했던 오퍼에 금덩이를 포장해 가져왔다. 금광이 터진 것이다. 모래알보다 수 많은 사람 중에 딱 금 한 덩이 같은 바이어를 찾아내어 합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야 가슴 조이던 ‘sold’ 사인을 걸었다.


 비결이 뭘까? 남들은 6개월 이상 허송세월하며 헤매었는데, 원 세상에나 3주 만에 금 밭을 발견하다니. 


 이 복덕방의 비결은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분명 행운인 건 틀림없는데, 어찌 그리도 손쉽게 금 밭을 일궈냈을까? 능력일까? 수완일까? 흔히 말하는 운이었을까?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hyungin
이형인
71510
11090
2018-11-02
호칭의 미학

 
 
사람마다 특성을 타고난다. 엿본다고, 부러워한다고, 닮을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의 성품이 아닌가. 어쩌면 그렇게도 각별하고 특이한 개성을 갖춰 세상에 존재할까?


이민의 나라에 와서 쉽고도 편안함을 하나 손꼽으라면, 호칭을 이름 그대로 쉽게 부른다는 것이다. 이름도 쉽지만, 젊은이나 늙은이나, 선생이나 제자나 서로들 허물없이 털어놓고 이름을 부르며 친근함을 금세 드러낸다. 


몇 번 만남으로 곧바로 친근해져 버린다. 하이 쟌, 헤이 메리, 알고 난 이름들이 천리길을 함께 한 듯이 벌써 가까워져 버렸다. 갑도 을도 구분할 필요 없는 너나 나나 똑같이 땅 밟고 다닌 수평적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엘씨, 비씨, 케이 선생님, 회장님, 사장님, 두꺼운 철판대기가 눈앞을 가로막고서 언제 친근해지려나. 그렇잖아도 근세에 들어 갑의 을에 대한 횡포가 세상을 뒤집어버린 조국땅의 현실이 눈쌀을 찌푸리게 하지 않던가.


천만다행 약간의 사회적 변화를 재촉하고 있긴 하지만, 과연 언제쯤이나 근대화된 인간관계가 서구사회의 질서를 닮아갈 수 있을까? 


나의 처가 형제들의 별명들이 유별나게 특이하지만 의미 있고 정겹다. 큰처남의 별명은 두꺼비다. 본인의 작품인지, 누가 먼저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탄복할 정도로 잘 지어낸 별명이다. 뜸한 표정이며 눈을 끔벅거리는 모습이 확실히 두꺼비를 많이도 닮았다. 


두꺼비를 건드리면 건드는 사람이 손해를 당한다는 옛 속담이 있다. 쳐다보며 인색한 눈빛만 보여도 나에게 불이익을 초래한다니, 그것참 묘한 생물이다. 그래서 그럴까?

큰처남의 삶의 모습은 꼬이고 꼬여 역시 힘들게 사는 것도 같은데, 술술 뚜벅뚜벅 풀어 적응해내는 품세가 두꺼비를 많이도 닮았다. 


가끔 소원해질 이해관계가 눈에 뜨일 때도 있다. 그때마다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산다. 건들면 내가 손해를 본다는데, 얼른 커피라도 먼저 사야 맘이 놓일 것을, 조심하며 몸을 사려야지 어쩔건가, 그래서 그런지 처남의 주변은 평탄하게 잘도 풀려가는 모습이 순조롭게 드러난다.


바로 여동생인 나의 아내의 별명은 부엉이다. 부엉이는 소쩍새와 올빼미와 같은 과에 속한 천연기념물이다. 영특하게 먹이를 잡아내어 나눠 먹을 줄 아는 희귀종인 새로 밝은 눈을 겸비한 날짐승의 일종이다. 


 나의 아내는 동양 여인의 보통 눈보다 좀 큰 눈을 갖고 태어났다. 아마 그래서 오빠가 즐겨 부른 부엉아! 여동생의 정다운 별명인가, 듣는 나 역시 별로 싫진 않다. 아빠가 지어 부른 큰 딸내미의 특출한 별명이란다, 아내 역시 싫은 표정을 내색하는 것 한번도 못 봤다.


남편인 나야 어찌 부엉아! 단 한번도 불러본 일 없지만 나와 동갑내기 아내의 오빠인 큰처남의 자랑스런 여동생의 호칭에 매우 호감이 가기도 한다. “부엉이냐, 오라비다.”


가족 사랑의 간절함이 절절히 묻어나는 표현이기에 듣는 이들조차 포근함으로 곁에 끼어든다. 하여간에 욕심이 많고 절대 손해보지 않는다는 조류의 으뜸이라는 부엉이, 토론토엔 미네르바의 부엉이 식당이 정평이 난 맛집이다. 이름이 특별해서 그럴까?


아내의 여동생인 처제의 별명은 호박이다. 역시 큰오빠는 만날 때마다 아이구 우리 호박 잘 있었냐? 절친함과 사랑이 함께 터져 나올 듯한 티없는 부름에 호박 역시 고마운 듯 흠뻑 미소를 가득 담고 “응 오빠아!”


푸짐하고 넉넉하게 노랗게 탐스런 이 시절 핼로윈 호박들이 시장통에 즐비하다. 품성이 호박처럼 둥글둥글 모나지 않는 처제의 다정스런 미소에 딱 어울리는 별명이다. 


형제들의 다정함 역시 노란 호박의 달고 깔끔한 맛 속에 가득 배어있다. 호박의 영양가의 실체는 채소의 왕이라 하잖은가. 결코 흔치 않는 형제들의 우애가 주위 친구들은 물론 이웃들의 부러움도 기쁨도 함께 불러 모은다. 


두꺼비, 부엉이, 호박, 뭐 하나도 세상을 얄궂게 물들인다거나, 눈살 찌푸릴 사연 하나도 없잖은가! 나에겐 형제들이 많았는데도, 뭐가 그리도 바빠서 별명 하나 못 부르며 지났을까? 그토록 재치 있는 유머마저도 가난했을까? 정겹고 사랑스런 별명으로 각별함을 담아내는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의 표현들을 왜 몰랐을까?


미숙하기도 했겠지만, 그 정도의 따사로운 정감을 이어주는 여유로움이 함께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이제야 형제들에게 미안하다.


부엉아! 호박이냐? 기왕이면 향기롭고 친근감이 배어있는 별명들 서로 불러가며 가족애를 격상시켜보는 세상살이, 보다 더 풍요롭고 정답게 살아가는데 향기로움이 더하지 않을까. 


비인간적이며 상식에 저촉되는, 때로는 자존의식을 내려놓아 스스로를 격하시키는 별명들이 많다. 본인들 앞에서 부를 수 없는 별명들로, 이웃들의 마음을 언짢게 하는 호칭들 말이다. “아! 그 짠돌이”, “응 그 대머리요”, “아니 그 입 큰 여자 말이요”, “아니 그 점박이요”. “와우 그 왕덩이요”. 이런 표현들로 향기로운 아메리카노 향기를 코앞에 놓고 노닥거린 날, 과연 그 기쁨은 영원할까?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hyungin
이형인
71437
11090
2018-10-25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

 

고 박주삼님

 

 


 
낭만과 추억이 황홀하게 가슴을 안아주는 계절을 맞이했다. 가을을 여미는 낙엽 떨어지는 소리는 없지만 바람에 날려 뒹굴어대는 모습은 허무하고 초라하다 못해 쓸쓸하기 그지없다.


눈길로 가슴으로 형형색색 아무렴 욕심부려 황홀함을 덧입혀 보고 싶은 계절이라지만, 역시 가버린 사랑만큼이나 아쉽고 처량하다. 오죽하면 오래 전에 유행했던 유행가 가사마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이라 했던가.


예년이나 틀림없는 계절은 여전히 우리 곁에 다가왔다. 산천초목이 초자연적 생태계의 리듬을 타고 온누리를 곱게 물들이면서, 옷깃을 쥐어짜면 주르르 색감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 흥건함이 낙엽 속에 비춰진다. 


아름다움의 극치요, 완성이다. 놀라움의 신비다. 오색찬란한 색체들에 나의 몸과 마음을 주체없이 물들이고 싶다. 이토록 황홀하고 로맨틱한 자연을 뒤로 하고 이 세상과의 인연을 뿌리쳤다. 인정이 넘치던 그 사람은 우리 곁을 말없이 훌훌 떠났다.


남다른 체력과 정신력으로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쇳덩이 같았던 그의 삶이었건만, 결국 떨어지는 낙엽 따라 함께 가버렸다. 의식은 가을잎에 흩날려 버렸는데 죽음이란 넋을 잃어버린 생명의 형체만이 분칠을 하고 누워 있었다. 


탐스럽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조화들이 그의 관을 에워싸고 있는데, 어허! 그걸 어찌 천국으로 가져 가려나? 우버의 배달도 가능하다면 좋으련만, 숨죽이며 고개 숙여 애끓는 조문객들의 발걸음은 또 어찌 살펴보려나.


잔디밭을 많이도 걸었다. 남다른 골프실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신출귀몰, 말 그대로 귀신 같은 숏게임의 달인이기도 했다. 병상에 눕기 전 몇 년간 체력의 한계를 직감하고 파워카트를 타고 라운딩을 하기도 했다. 그마저도 그의 건강은 그를 끝내 낙엽과 더불어 앗아가 버린 것이다.


몇 개월 전의 그의 모습이 새롭게, 혹여 동영상을 보는 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제 생각하니 그때 그의 모습은 주위 친구들을 향한 준비된 유언이었다. 세상에, 그 장소 그 시간 왜 그의 표정이 그토록 진지하고 심각했었을까? 이제야 생각이 난다.


세상을 살아오며 왜 더 열심을 다하지 못했을까? 어찌 이렇게 멍하게 주위 친구들에게 무심했을까? 내 가족들과 좀더 사랑의 관계를 의롭게 다독거리며 살았어야 했는데, 내 것만 아끼려고 남의 호주머닐 노렸던 잘못도 있었다. 부끄럽고 후회스럽기에 용서를 빈다.


너무 늦었나.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 내 인생 내 주위사람들과 더불어 최선을 다하며 남은 삶을 살고 싶다. 바로 몇 개월 전으로 기억하건대 그의 마음이 예비되었던 틀림없는 유언이 아닌가.


살인마 같은 암이라는 최면술에 견딜 자 어느 누가 있으랴. 이 시대가 아무리 초현대적 의술의 힘찬 개혁으로 인간생명을 백방으로 치료한다 할지라도 수백만의 암세포를 아직도 점령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인정하며 어물어물 살아가고 있다. 폐암이란 질병의 악화로 절벽에서 결국 흩날리는 낙엽 따라 가버린 것이다. 


평생 함께한 사랑스런 아내와 자식들의 뜨거운 눈물이 장의사의 밑바닥을 흥건하게 적시었건만, 관속에 누워 있는 그는 흙더미 속을 예약해버린 넋 나간 시신이었다. 


나무 등걸처럼 무정한 그 모습은 누군가 앗아가버린 그의 혼을 운명의 집행자마저 절단해 버린 것이다. 저토록 살아있는 가족들의 애닯은 슬픔이 운명의 신 앞에 안타까움을 쏟아내고 있는데도 나 몰라라, 관 속엔 혼을 몽땅 도용당한 시신만이 사람의 형상만으로 꿈쩍도 않고 누워있다.


각본처럼 성당의 유인물에 쓰여진 대로, 구원하소서, 돌보아주소서, 기억하소서, 위로하소서, 그의 수고를 빛내주소서, 신부님의 장례집전은 하늘로 향한 순종의 울부짖음일까? 조객들의 절박한 슬픔을 위한 선포였을까? 유가족들의 눈물을 훔쳐주는 손수건이었을까?


아리송한 종교의전의 절차와 지배하신 영의 소관을 구분할 수 있는 길은 "무조건 믿는 것”이라지만 이미 떠나버린 넋을 위하여 호소하는 습관적 장례행위의 모습은 과연 천국을 향한 호소력으로 어떻게 간구되어 질것인가? 


범벅이 된 눈물바닥에 속이 터져라 몸부림치는 온가족의 쓰라리고 애통하는 슬픔만이 미어지는 가슴을 쥐어짜고 있었다. 


고개 숙인 조객들의 비통한 발걸음에 나뒹구는 가을잎의 처량한 슬픔과 함께 하면서, 그토록 왕성하던 푸르름은 어찌하고 낙엽의 초췌한 모습처럼 흩날리며 바람 속에 구름처럼 떠나버렸을까? 


 예비된 운명의 수순과 절차는 온갖 세상만사 벗어던진 최선의 선택이 이 길밖에 없는 걸까? 영생을 누리는 길은 결국 구르는 낙엽과 동행자 되는 그런 길 뿐이란 말인가?


 영혼이 평안을 누린다는 그곳엔, 그래 남은 유가족들과 조객들의 미어지는 슬픔들은 어찌하라고… 이 가을을 뿌리치며 떠나버린 그곳에서 영생을 누리소서! 


(이 글을 살아생전 함께 했던 박주삼 전 온주실협 이사장님의 영전에 올립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hyungin
이형인
71332
11090
2018-10-21
‘이/사/용/포…’

 

 이삿짐에 무슨 포를 싣고 다니는가? 별안간 어디에 전쟁이라도? 글 제목이 뚱딴지같이 무슨 포 소리야? 방탄소년단의 열광적 무대가 세상을 놀라게 하는 총소리와 어찌 비교를 할까만, 화약이 터지는 것 같은 폭발적인 인기가 가히 지구촌을 환상적인 이변으로 달구고 있잖은가. 


 폭탄 터지는 한맺힌 전쟁의 참상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옛 세월이라서, 불안과 공포 속에 가슴조리던 그때 그시절, 끔찍이도 절박하고 험했던 세상을 증거하는 우리 세대들 어찌 잊으리. 그 포성들을 “이해하니까, 사랑이 움터, 용서하게 되니까, 포용할 수 있다”는 순우리말 사자성어라고 독자들의 공감대를 자극하고 싶어 억지로 지어낸 글자다.


 글뜻이야 쉽지만 결코 쉽지 않은, 가슴을 활짝 열지 않는 한 실행할 수 없는 말임에 틀림없겠다. 어렵고 까다로운 세상만사에, 먹고 마시는 것처럼 빼놓을 수 없는 매우 귀한 성경의 핵이며 불전의 자비와 영적인 비타민이기도 하다.


다스리고 추스르며 고운 맘씨로 백번씩 양보해야 빚어내는 혼의 찬가 중에 불멸의 명곡이랄까?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사용포’의 고운 성품으로 갖추어져 있다면 만사가 행복과 평안일 터이다.


 땀흘려 노동으로 얻을 수도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악을 써서라도 달성 하겠지만 얄궂은 행동거지나 번민의 골짜기를 헤매며 살아갈 때, 스스로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한 이룰 수 없는 특수한 인성의 생태다. 


어느 누가 감히 쉽고도 어려운 ‘이사용포’에 자신할 자 있으랴. 성직자들, 교직자들, 자칭 인격의 첨병이라 할지라도 떳떳하게 이 낱말에 스스로 자만으로 자유스러울 자 아무도 없다. 성직자들이 이 말을 유도하지 않고선 강론도 설교도 성립될 수 없다. 설교와 강론의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인 것이다.


 필자가 참석했던 주일예배에 설교 목사님의 용서하라는 말씀 속에 바로 이, 이사용포의 단어가 삼십 번 이상씩 동원되었던 기억이 난다. 아니 이 순간도 주장하며 설교를 담당해야 했기에 어느 누가 뒤질세라, 아무나 다 말만으로야 마음대로 털어낼 수 있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순수한 우리말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네 글귀의 의미야 얼마나 쉬운가. 드러내기야 식은죽 먹기로 누구나 할 수 있는 흔한 말이다. 그런데 실행하고 보여주기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에 글 속에 불가항력적 고충을 털어내련다.


그 좋은 이웃들도 좋은 친구였기에 서로 반목하는 일이 행여 언제 있으리요. 부담없이 자유하며 덤덤하게 살다가도, 삐그덕거린 한순간의 상상할 수 없는 불화가 틈새를 파고드는 세상살이다.


깨알 같은 하찮은 인간사 툴툴대며 남이 돼버린 일들, 우리 곁에서 날마다 겪고 살아간다. 철천지원수가 따로 없지 않는가. 수십 년을 함께 사는 부모형제, 일가친척들, 오순도순 살아도 짧은 인생인 걸 별일도 아닌 사소한 삶의 한마디에 뒤틀려 담을 쌓고 살아가는 주위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인 그 자리에 눈물과 설움들, 우리민족만이 터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견뎌내야 하는 역사의 상처가 아니던가. 인륜이 끊긴 그 사연들이 누구 탓인가? 대국들의 정치싸움에 말려들어 핏줄이 끊겨 살아야 하는 변란을 우리는 겪어야 했다.


그렇게 흩어진 인연들과 다시 만남들 얼마나 한이 맺히고 서럽던가. 언제 또 만날 거냐고 피눈물을 쏟아내며 다시 헤어짐의 통곡들을, 민족의 그 한 많은 역사를 과연 언제 끝장을 볼 것인가. 


그런 일을 바로 발 밑에서 겪고 보면서도, 함께 하는 부모형제들인 우리들 주변엔 갈라서지 못해 서로를 질시하고 응얼거리며 온갖 심통을 부리며 살아야 되느냐 말이다. 


잘 살아 보자고 구슬려 얼리고 달래고 두 손 싹싹 비벼도 보지만, 웬걸 몇날 지나면 또다시 개미 쳇바퀴 돌듯 반복의 삶이다. 투덜대며 눈길로 쥐어박고 악을 쓰고 입에 거품까지 마치 칼끝이라도 번득거려야 해결점을 도출할 수 있을까 으르렁거린다. 일가친척, 부모형제들과 오순도순 정답게 사이 좋은 가정들이 어찌 없을까만, 부자연스런 삶의 모습들에 얽힌 부모형제들과 이웃 친구들, 아낌없이 모두들에게 퍼부어 버리자. 


‘이사용포’ 그 넉자가 꽈리를 틀듯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 말이다. 그 포는 품어낼수록 끝없는 환상의 기쁨을 토해내는 인성의 소염제가 아닌가. 퍼내고 또 퍼내도 영원히 말라비틀어지지 않는 콸콸 쏟아지는 폭포처럼 그 말뜻에 넘치도록 담겨 있잖은가. 


순수한 한국적 사자성어 이사용포란, 아끼고 인색할 때 참으로 불편함이 우리 삶을 너무 심란하게 묶혀 썩어드는 곰팡이 같은 것을 암덩이란 심적 화약가루가 가슴을 태우고 있을걸, 이 하루도 눈 지긋이 감고 터트려 내버리자. 그 포성으로 내 주위를 마구 흔들어 버리자.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hyungin
이형인
71249
11090
2018-10-15
이웃과 친구들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삶의 동행자들이 친구와 이웃이다. 이웃들의 숨 쉬는 소리야 어찌 들을까만, 그들이 꾸려가는 모습들을 날마다 확인하고 산다. 밥은 매끼마다 먹어야 살지만 친구는 만남이 없더라도 생각하며 그리워만 해도 영원히 약속된 것 같은 흐뭇한 관계로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한다.


동서남북 우리집을 이웃한 이들, 복합문화의 산실답게 유럽인, 중동인, 중국인이 함께 매일 대면하고 산다. 각 나라별 특수성을 지닌 그들의 삶을 한인인 나와 양푼 비빔밥처럼 어울려 맛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집은 뒤뜰이 남향이다. 종일 햇빛에 정원수며 사시사철 꽃망울들이 장관을 이룬다. 남쪽에 사는 토니와 캐시 부부, 깔끔하고 아담한 채소밭을 일구어 토마토며 호박, 오이를 재배하여 풍성함이 울타리를 넘어온다. 


우리집 역시 마늘이며 들깻잎들 따고 또 따내도 가득하기에 서로의 손길을 나누며 베풀고 산다. 생전 보지 못했던 풀잎인데 무슨 향기가 이토록 신선하고 깔끔하냐고 놀란다. 바비큐에 싸서 먹는 맛에 흠뻑 빠진 이웃이다. 확인한 바 없지만 지구상에 한국인만 즐겨먹는 특별한 채소가 아닌가?


 폴(Paul)과 수(Sue)라는 이태리 젊은이가 왼쪽에 산다. 수는 안과의사, 남편은 비행기 조종사인데 그들의 직업이 마치 정원사 같다. 뒤뜰이 넓어 여유롭게 온갖 채소를 가꾸며 여가선용에 반세월을 보낸다.


얼마나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지 부럽고 존경스러운 중년 부부다. 심코호의 카티지도 서로 이웃하고 있어 우리는 특별한 인연이라고 끈끈한 정을 나누며 산다.


벌써 초가을의 기온이 말해주듯, 정원에서 가꾼 포도며 고추 같은 것들을 함께 나누자고 울타리 너머로 손길을 뻗친다. 엊그제 무농약 농토에서 재배된 달콤한 옥수수를 넘겨줬다는 감사보다 몇 배 넘치는 친절로 이웃의 정을 쏟아준 것이다.


드높은 단풍나무 이파리와 씨앗이 지붕에 날라와 물통을 막히게 한다 했더니, 순발력 있는 21살 아들을 대동하고 높은 사다리를 들고 와 한순간에 청소해준다.


아들이 어렸을 때 넉넉한 캔디를 예쁜 주머니에 넣어 할로윈의 계절을 함께 하고, 연말연시가 되면 이웃이라 미소를 보였을 뿐인데,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고 풍성함을 확인하고 있다.


 앞문 밖 마주 보이는 곳에 50대 젊은 부부는 이사온지 몇 년된 중국인이다. 부인은 고등학교 교사요, 남편은 미술지도사로 집에서 방과후 특수화실을 운영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아침 쓰레기 수거일에 자기집 통에 함께 버려도 된단다. 그쪽은 아침 일찍 쓰레기를 수거하기에 매우 유용하고 편리하다. 우리 쪽은 오후에 수거하는 시간이라, 중년부부가 깜박했을 땐 우리 쪽을 서로 이용하기도 한다.


부피가 크지 않는 종이박스며, 음식찌꺼기 플라스틱 용기들, 두 집이 합해도 용량미달이라고 함께 버려도 상관없단다. 역시 미술가다운 세심하고 요령있는 살림꾼이 틀림없다.


앞뒷집 언제든 시간내어 디너시간을 함께하자는 오퍼를 해마다 몇년을 공중에 띄워버렸다. 금년엔 우리가 먼저 제안을 해야겠다.


앞문 밖 바로 정면에 이태리언 싼토라는 마블 전문 건축사가 산다. 한겨울이 되면 눈치우기 힘들다고 통통거리는 제설기로 우리집 차고 입구를 치워준다. 대중교통을 위하여 밀어붙인 산더미 같은 눈을 자기집보다 먼저 밀어준다.


새해맞이 인사로 와인 한 병을 신년인사 카드와 전했을 뿐인데 형제들 우애 같은 이웃 정들이 세상살이 참으로 신나고 즐겁다.


순이네가 엊그제 우리집을 잠깐 들르겠단다. 맛있는 것만 있으면 손수 챙겨 나눠 먹어야 편하다는, 참으로 절친한 친구다. 왕복 200킬로를 달려 허니크리스프(Honeycrisp) 사과를 직접 사과밭에서 따왔단다. 우리몫까지 준비했던 광주릴 들고 전해준다. 별것 아니라며 오히려 미안해하는 겸손함을 보인다. 사각사각 사과 맛이 감칠맛으로 꽉 찼다. 단단하게 영근 사과 맛이 순이네 부부처럼 싱그럽다.


지난 주말 물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명한 농장에 들러 끔찍이도 순이네가 좋아한다는 강냉이 한꾸러미를 전해주며, 오징어볶음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순이네와 저녁을 함께 했다. 세상살이 누가 뭐래도 희망과 기쁨이 매 순간 쏟아지는 축복의 산실인 것을. 


“이 선생님! 지난주 칼럼 잘 읽었습니다. 쉴만한 물가의 별장의 모습들이며, 마리화나의 양성화가 행여 이 사회의 악이 될까, 우려하신 글에 담긴 내용이 가슴에 다가오네요. 또한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해야겠다고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입니다.” 오랜 친구인 선아 엄마의 독후감이 칼럼의 의미를 살찌워준다.


 글은 이웃에게, 친구들에게 메아리 같은 울림이 되어준다. 음악감상실의 여운처럼 지극한 감성을 자아내면서…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hyungin
이형인
71172
11090
2018-10-07
골프의 마력-고달픈 이민생활에 큰 활력소

 

 

▲본인이 올 7월 26일 서밋골프장에서 홀인원을 한 후 받은 증표 

 

 

 

옆집의 친구 내외가 일터를 맡겨두고 골프채를 둘러매고 다니던 70년대 중반이었다. 골프의 ‘골’ 자도 모르던 그때, 아니 아예 “뭘 그런 걸 돈 버리며 하느냐?” 질책을 하듯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빈정거렸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 친구의 표정은 “모르면 잠자코 있어야지, 쓸데없는 참견이냐”고 오히려 불쌍하다는 눈빛이기도 했다.


“이렇게 흥겹고 신나는 운동인데… 이 사람아, 세상 사는 맛이 나니 한번 해 보시게나” 


어느 날엔가, 골프 신발과 채를 준비해서 연습장엘 한번 가보자고 나를 조심스럽게 불러내었다. 역시 싫었다. 바쁘다고 핑계를 댈까! 그렇지만 친구와의 관계란 간혹 싫어도 받아들여야 든든하고 끈끈한 정으로 다져지는 게 아닐까! 못 이기는 척 하고 따라 나섰다.


대충 골프의 A B C를 가르쳐주면서 한번 휘둘러 보란다. 그 딱딱하지만 탁구공 같았던 것이 적당한 무게가 있어 때리면 신기한 매력이 있었다. 당연히 젖 먹던 힘까지 입을 악물고 후려쳐 댔다. 빗나간 공이 태반이었지만 더러는 창공을 나르는 모습이 신통하고 후련했다.


친구 왈, 소질이 다분하단다. 격려와 함께 이토록 맛깔스러운 것을 어찌 거절하느냐는 안타까움이 목소리에 배어났다. 오죽하면 답답한 레슨을 하려고 옆 친구를 연습장에 데려갔을까? 참 고맙고 빚을 많이 진 친구였음을 이 순간도 잊지 않고 있다.


그렇게 배운 골프가 35년을 맞았다. 초원을 걷고 걸으며 세월이 득달같이 달려가는데도 "달려라 세월아, 나는 공만 보련다” 24시간 눈에 공만 어른거린다. 신기하게도 간밤의 피곤에 절은 모습이 확 사라지고, 골프 약속이 있는 아침이면 정신이 말짱해지는 것이다.


언제 피곤했던가. 무엇이 그리 바쁘던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초원을 향한 그리움이 전신을 휘감는다. 무슨 보약일까? 건강식품도 홍삼도 꿀단지도 없는데, 대관절 무슨 청량제가 이렇게도 효험이 있을까? 


생애 4번째 ‘홀인원’ 파티를 간밤에 성대하게 치렀다. 5백 멤버들 틈새에서 14명의 운 좋은 골퍼들이 이뤄낸 경사스런 잔치였다. 그 용사들을 위해 골프클럽의 연말 잔치에서 거창하게 파티를 열어주었다. 


 홀인원 기념패는 물론 가슴에 꽂아준 꽃송이는 축하의 디너파티를 한결 빛내주었다. 몇몇 회원의 홀인원 소감들이 발표됐다. “간밤에 꿈속에서 아내와 함께 하늘길을 산책했던 황홀한 꿈이 홀인원으로 다가왔다” “골프장에 서생하는 야생 터키가 골프백에 숨어 들더라”… 


 “몹시도 찬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이라 후려쳤던 공이 방향을 잃었다. 함께 라운딩하던 이들과 그린 주변을 샅샅이 찾았다. 뱅글뱅글 그린 주변을 서성이다 가 고개 숙여 홀 속을 본 순간, 결국 깃대를 맞고 굴러들어간 공이 이변을 연출했다”고 나의 기쁨과 소감을 발표했다. 


 이날 2백여 회원들이 참석한 디너 파티는 연예인들의 멋들어진 공연과 함께 댄스파티까지 곁들여져 연중 최고의 잔치였다.


 골프는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감당키 어려운 순간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보약이다. 부담스런 값비싼 곳만이 골프장은 아니다. 9홀만 걷는다 해도 심신의 피로를 달랠 수 있다. 고달픈 이민생활에 골프마져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까. (골프를 안 치시는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hyungin
이형인
71075
11090
2018-10-02
복덕방은 부동산의 교사

 

 

 


 
 예전부터 선생님은 속을 많이 태우는 직업이다. 답답하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제자들을 가르치려니 얼마나 육신과 정신이 찌들겠는가?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직업이 바로 교사직이다. 


 순수한 한국어가 겹쳐 있는 ‘복덕방’이란 이름이 사실은 중개인을 일컫는다. 전문인으로 교사의 반열에 오른 직업이다. 살짝 잘못하면 친절의 실종이요, 더 좀 아는 척하면 사기꾼으로 몰리는 직업이라 유리그릇 만지듯 조심해야 한다.


이들의 직업 역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어쩌다 더러는 비상식적 직업의식을 탈피치 못하고 이상한 방법으로 부동산의 의미를 혼란스럽게 하는 부동산업자들도 있었다.


수십 년 전 비행기로 현지답사를 하며 플로리다에 땅을 사라고 치근거렸던 일들, 이곳 나이아가라온더레이크 주변에 땅이 투자용도에 매우 유익하다고 이민자들의 눈을 홀렸던 적도 있다. 그 지역에 투자해서 대박을 터트린 경우도 더러 있었겠지만, 플로리다나 나이아가라의 부동산은 한마디로 뜬구름 잡기 같은 묘수가 뒤따른다.


규제가 각별하고 법규 역시 일반인들에겐 생소하기 그지없이 아리송한 점들이 많다. 지금도 30여년 전에 헐값에 매입한 나이아가라 주변의 땅들, 돌덩이 하나 움직일 수 없이 오크리지 모레인에 묵혀 있는 곳이 많다. 오크리지 모레인이란 특수 지하수 보호구역이란 말이다.


이런저런 매물들에 어찌하면 부동산의 생명인 투자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을까?


안내자는 바로 복덕방이란 선생님으로서의 직업이다. 쓸만하고 건실하게 확실한 매물을 고객에게 최선을 다해 소개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잘나가는 복덕방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노라면 참으로 업무처리 능력에 찬사를 아낄 수 없다. 시간관념에 철저함은 물론, 내 차로 약속장소에 간다 해도 “아니에요, 제 차로 모실게요” 한다. 고급차든 낡은차든 깔끔하게 단장된 그의 모습 속에 정중함과 친절함이 배어 있다.


쇼잉을 할 때 역시 차분하게 설명하며 그의 의견을 곁들이지 않고 액면 그대로 거울에 비춰보듯 부담을 주지 않는다. 묻는 말에만 비중있게 설명해 신빙성을 더하는 반면, 부채질이나 풀무질 같은 마켓상황을 확대하는 행위 역시 모르는 척 겸손하다.


평생 고객으로 끌어 안으리라는 비전이 눈빛과 행동에 매우 인격적임과 동시에 차분하다. 만남의 시작이기에 절대로 최선을 다하리라는 각오없이 어찌 커미션이 내 손에 넘겨질까?


도란도란 평범하기 이를데 없이 편하게, 오래 전에 알았던 친한 친구나 이웃처럼, 또 만나야만 될 끈끈한 인연처럼 믿음과 사랑이 넘쳐난다. 이리도 친절과 배려가 남다른데 어찌 또 다른 중개인을 탐색할까? 


나의 고객으로 평생을 함께 하련다는 중개인의 자산이 뭔가? 신뢰와 겸손이다. 믿음과 예의는 어렵게 구현될 수 없다. 소박하고 순수하게 인간적인 모습이 부드럽고 상냥한 눈길과 손길에 묻어나야 한다.


쇼잉이 끝나고 그냥 헤어질 것인가? 절대 아니다. 천금 같은 시간과 관계의 확립이란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다. 주변 맥도날드의 저렴한 커피향기는 내일을 기약하는 최면제다.


그와 함께 영원히 기약없는 약속의 시간이 몰려있다. 인연을 확대하고 다시 만남의 약속에 정을 쏟아내는 사랑방이다. 우물거리지 말고 커피값이야 뛰어가 절대로 내 몫으로 만들어야 한다. 


내 자동차로 모셨기에 차 문을 열어주고 닫아주는 섬세하고 자상한 그 모습 속에 미래를 꿈꾸는 마스터 키가 달려있다.


사후 서비스가 뭔가? 부담을 피하고 믿음과 친근함의 배려가 바이어의 가슴을 열어주는 통로다. 지천으로 넘쳐나는 부동산업자들의 광고들, 오만 갈래로 펼쳐지는 마켓상황의 변화들에 대처할 수 있는 통로가 있을까? 수많은 경쟁자들의 틈바구니에서 하찮은 내 광고 속의 이름을 찾아낸 고객과의 만남, 이거야말로 천운이 아닌가.


조급하고 성급하게 대면하는 만남이 아니다. 기회를 축복으로 이어주는 안내자의 차분함과 상황인식에 충실한 마케팅이야말로 부동산의 기본이리라. 하늘의 뜻을 받들고 내 직업에 최선을 다할 때, 자동차는 오늘도 매물을 찾아 확보된 고객들의 필요를 맘껏 채워줄 것이다. ‘그물이 삼천 코면 걸릴 날이 있다’고 하잖는가.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hyungin
이형인
70890
11090
2018-09-24
“카티지(Cottage)를 원하세요?”


 
 물은 생명이다. 물이 없다면 단 한 순간도 우린 생명을 지탱할 수 없다. 그 물의 주인은 절대자요, 세상을 지배하신 창조주다. 때문에 "쉴만한 물가로 너를 인도하는도다" 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기쁨을 선물한다. 내것이기에 나의 권리를 너에게 건네줄 것이며, 너를 깨우쳐 나의 길로 인도하리라는 은혜 가운데 깊고도 오묘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호수의 땅 캐나다엔 쉴만한 물가가 지천이다. 주말만 되면 동서남북 고속도로가 미어진다. 평화와 자유를 즐기는 곳, 바로 별장이란 카티지(Cottage)를 찾아서다.


자자손손 이어 물려받은 가문의 자산이 태반이지만, 필요하기에 별장을 구입해 온 가족이 쉼터로 호숫가를 찾아 향연의 주말을 즐긴다. 투덜대며 불편해 하던 세상살이에 주말만 되면 그래도 카티지라는 쉼터에 머물면 꽃향기 같은 호숫가의 향기가 온가족의 신선함을 부추긴다.


 확 터진 호수 풍경과 감미로운 바람결에 풍겨오는 평화의 내음들. 언제 우리가 힘들었던가? 짜증스러웠던가? 잔잔한 호숫물에 말끔히 씻어버린다. 비단결 같은 바람에 두 손 높이 들고 심호흡으로 희망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모래밭 물가에 잔잔한 피라미들의 홀랑거림은 자유를 즐기려는 생태계의 표상이 아닌가.


 끝이 없는 광활한 호수의 풍성함은 누굴 위한 선물일까? 은빛으로 출렁이는 절대자의 미소가 나와 함께 동행하는 이 순간이 바로 오늘이라 확인하며, 만사를 제쳐두고 안락의자에 누워 감사와 더불어 파란 하늘을 우러러본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허덕였던 심신을 달래고자 아는 분의 카티지를 빌려 한주일 물가를 찾았었다. 젊음이 요동치던 싱싱하고 활기찬 시절이었다. 부대끼며 삶을 일궈가던 그 세월에, 여유가 있었다면 무엇이 얼마나 있었으랴, 그런데도 짜증을 달랜다고 가족여행이라는 휴가를 낼 수 있었으니, 이 나라의 풍토가 우리의 발길도 호숫가를 걷게 한 것이다. 웅크리며 살던 환경에 변화가 오니 어린 두 딸의 눈빛이 호숫물과 함께 더욱 황홀했다.


며칠간의 쉼터, 카티지라는 곳은 생소했지만 호수 나라의 발길, 눈길로 이어진 삶의 패턴은 이렇게 그려지고 있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혁명의 구호만이 아니라, 이민자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나름대로의 생활철학이 충분히 실현될 수 있다는 성취감이기도 했다.


 달콤하고 멋진 휴가를 끝낼 무렵, 호숫가에 취한 우리 가족은 부동산업자를 불러 카티지 마켓을 노크했다. 호수가 좀 넓진 않았지만 카티지 모습이 아담함은 물론, 정원이며 관리된 휴식처가 천국의 집으로 여겨졌다. 와우… 당장 오퍼를 진행, 꿈에 그리던 별장을 우리도 가질 수 있음을 기뻐했다. 


 1년 반 동안, 30대 후반의 젊음이 훨훨 불타던 시절이었다.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렸다. 천사들의 별장 같았지만 실책이요, 미숙한 성급함 같았다. 2시간 반 운전으로 가는 길은 결코 쉴만한 물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켓상황을 미처 의식할 사이 없이 구입한 별장에 투자는 대성공이었다. For sale 간판이 보인지 하룻만에, 새 주인이 될 바이어가 카티지 주변을 샅샅이 서성거렸다. 눈이 휘둥그래진 상태로 바로 이튿날 오퍼를 내밀었다.


1년 전 구입가의 80 %가 오른 거의 두 배였다. 그 시절 부동산시장의 매력치고는 확실한 대박이었다. 4, 5 년 후였던가. 다시 호숫가의 향기가 그리웠다. 


두 딸들도 성장했겠다. 지난번 호수야 조용했지만 시야가 좁은 반면에, 웰워터 라는 필터를 이용한 샘물의 불편함이 싫었다. 2시간 반, 부담스러운 거리였기에, 이번엔 호수가 시야를 더 넓게 펼쳐줄 곳이 어딘가? 


 1시간 정도 되는 곳에 50년 된 헌집이었다. 끝이 안 보이는 심코 호숫가였다. 재건축 허가를 받아 헐어버리고 새집을 지으면 또 대박일 것 같았다. 그러나 심코 호수에 재건축이란, 돌 하나라도 움직이는 허가를 받기가 까다로운 정책을 동반한다. 최소한 1년 이상의 절차를 겪어내야 하는 공청회며 법적 제약 역시 철벽이다. 그러나 결정의 대범함은 만족의 핵심이다. 만족하다는 순간은 매혹의 절정이기도 하리라.


별장의 첫째 조건은 호숫가의 절경이다. 시야가 넓어야 함은 물론, 먹는 물이 안전해야 하며, 수영할 수 있는 호숫가라면 금상첨화다. 겨울 낚시터가 구비된 곳이라면 사계절의 풍미를 더욱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전기며 수돗물과 더불어 가스 난방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면 환상의 별장이다. 


수돗물 시설이 없는 지역은 지하수를 사용해야 하지만 정수장치를 섣불리 하면, 물에서 클로린 냄새가 심해 북쪽 카티지들의 고민거리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무튼, 여러 여건을 고려하고 신중을 기해 카티지를 사두면 그만큼 삶이 여유롭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hyungin
이형인
70489
11090
2018-09-16
마리화나 자유화가 그리 급한지…

 

 


 
금년들어 유달리 극성을 부리는 무더위로 지구촌이 몸살이다. 우리가 태어난 고향 땅 그곳에도 찜통 더위와의 전쟁터를 방불케 해 아우성이라고 매스컴을 장식했다.


북극에 빙하가 녹아 침수된 바닷물이 넘쳐나 섬나라들의 생태계는 물론 생계 유지에 위협받아 절박한 모양이다. 백년에 한번 필까 말까 한, 마치 무궁화 꽃을 닮은 고구마 꽃들이 피어나는 이변도 생겨나고 있다. 고구마 꽃은 행운을 상징한다는데…


온난화의 수온계가 겨울의 나라 이곳 캐나다 토론토까지 기준치를 상회하는 이변을 속출하고 있다. 왕년엔 한여름 4, 5일 틀었던 에어컨이 두 달 이상 아예 온도계를 고정해두고 한여름을 견뎌야 했다.  


온난화가 지구촌을 위협하는 데도 그런 자연의 섭리엔, 과학문명의 손길로는 아예 손을 쓸 수가 없다는 지경에 이른 것인가? 훌러덩 옷을 벗어 던진 모습들 길거리마다 요란하다.


 스트레스가 넘친다. 불쾌하고 끈적이게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 열기로 몸살을 앓는다. 해마다 이럴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혼란을 부추기려는 듯 기쁜 소식은 아니다.


Adult village가 넘쳐 난다는 뉴스도 있다. 옷을 벗고 물놀이로 폭염을 달래고 있는 곳이 미어지는 모양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 중엔 그 모양이 최고일 것 같은데, 뭘 먹고 살아야 용기백배 남의 눈길 아랑곳 없이 남녀가 그 모습으로 모래사장을 활개칠까?


마리화나가 시중에 범람하려는 모양인데, 그걸 피워대면 걸쳤던 옷가지마져 팽개치려나? 인간들이 옷을 입는 것, 만인을 위한 예의요 상식이 아닌가. 


저스틴 트뤼도가 마리화나 시장을 확 열어 버린단다.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라고 이 나라를 모두 벗게 만들려나. 폭염일까. 마리화나일까? 끈적거려 열불 나게 찌는 더위가 동장군의 추위보다 훨씬 강력한 파워이구나 싶었는데. 


마약의 기본이 마리화나라는데, 이거야 원 헷갈려서, 과연 당연한 정책일까? 마약소유죄로 사형이라는 최고의 법적 제재까지 집행하는 곳도 있는데 유독 캐나다만 어찌 거슬려 가려는가? 

 

해롱해롱 초점 잃은 눈으로 자동차를 몰고 다닐 것은 뻔한데, 어찌하려고 몰핀의 씨앗을 우물거려도 좋다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들이 곧 닥칠 모양이다.


신기하고 환상적이라는 학교 친구들의 꼬드김에, 뒷전에서 수근거리며 피워대던 환각의 요물들이었다. 이제는 히히덕거리며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대놓고 피워댈 수 있을 것이니, 이 나라의 자의적인 평화라고 기쁨을 즐기려는 것인가?


 염려와 불안만이 아니다. 도덕과 치안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적립되어 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가? 훌러덩 벗어 던진 모래사장의 자유와, 해롱대는 눈빛으로 세대를 희롱하는 평화에 대해 매우 혼란스럽다. 자유와 평화는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라고 행여 교육과목에 실을 것인가?


멋 모르고 뻐끔거리다가 패가망신한 눈에 띄는 사람들의 허덕이는 모습들, 측은하고 안타까움에 동정도 도움도 애처로웠는데, 이것 참 야단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참상이 이 시대에 재연되려나?


시대적 물줄기가 겨우 마리화나의 개방으로 신세대를 아우르려 하는 거라면, 정치적 타산에 발맞추어 국민성을 난도질한다는 건데, 보수와 진보가 어우러져 두 손가락에 끼워 피우려는 마리화나의 연기에 눈을 꿈뻑일 모양이다.


아침 저녁으로 가을이 밀려드는 시절의 변화를 거부할 수 없듯이, 이 나라 마리화나의 정책 역시 손사레를 칠 수 없는 것인가? 이 일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더보기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