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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고 장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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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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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1
고난과 역경에 대한 극복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마다 달란트의 은혜를 주셨다. 그리고 은혜를 수행하기 위한 사명을 부여하시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고난과 역경을 동시에 주셨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과 역경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불의 사람으로 사후에 영혼이 불 못으로 가게 되고 의로운 사람은 천국으로 가게 된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어려운 고난과 역경을 맞이하게 된다.


나의 경우 마태복음 25장에서 고난과 역경에 대한 극복에 대해 해답을 발견하고 묵상하였다. 마태복음 25장에는 달란트의 비교와 열 처녀 비유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달란트 비유를 분석하면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을 불러 자기의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25: 14)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이시며 또한 각 사람마다 그 재능대로 그 달란트들은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따라서 성경에는 재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을 들어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역경을 극복하면서 쉬지 않고 열심히 투자하여 두 배의 이익을 남겼으나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게으를 뿐 아니라 투자의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며 또한 만일 역경을 극복하고 두 달란트의 이익을 얻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득이 없고 소득을 위한 과정에서 한 달란트까지 없어진다면 주인에게 받을 벌을 두려워하여 땅속에 묻어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무익한 종이라 하시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 30 참조) 라고 하셨다.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5명은 미련하고 5명은 슬기롭다고 하였다. 미련한 자는 신앙심은 있으되 성령을 받지 못하였고 슬기 있는 자는 성령이 충만한 신앙심이 마음속에 있기에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믿는 신앙인들에게도 역경이 반드시 도래함으로 이를 극복하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니라, 하시고는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와 함께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리라 하시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을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말씀하셨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복하는 인간들은 영벌에 처하고 순종하는 인간들에게는 영생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믿는 자들이여 바깥에 쫓아냄을 받고 구원받지 못하여 슬피 우는 인간들이 되지 말고, 항상 깨어있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이다. 

 

 "불의한 인간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25: 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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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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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7
출애굽의 소고(小考)

 
  
요셉에 의해 애굽에 온 야곱의 자손들이 430여간에 큰 민족으로 번성 되었으나 애굽왕의 혹독한 고난과 핍박 속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하는 눈물과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불러 이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모세는 수 차레나 거절하다가 복종 하였다.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을 떠난 지 2개월만에 광야에 이르자 불평하기 시작 하였다. 애굽에서 배불리 먹었던 때를 회상하며 그곳에서 그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 손에 죽을 것을 모세의 손에서 굶어 죽게 되었다고 불평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시고 가나안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하늘의 양식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로부터 내려주셔서 먹게 하셨다. 애굽땅을 떠난 지 3개월만에 시내광야에 시내산에 오르니 하나님께서 너희가 내 말과 언약을 지키면 모든 민족 중에서 너희는 내 소유가 되겠고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 하셨다(출 19: 5-6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할 때는 언제이고 구원과정에서 조그마한 고난이 있다고 해서 모세를 원망하고 있으니 이 민족이 얼마나 사악한 민족인가? 하나님께서 시내산 꼭대기에 강림하셔서 모세를 부르시고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시면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인 십계명을 말씀 하셨다. 이것이 구약시대의 율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는 인간의 죄를 사하여 구원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에 동정녀 마라아의 몸을 빌어 이미 구약시대에 독생자의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율법에 따라 살면서 율법을 지키기 위해 한 점의 죄도 없으시면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승천 하셨으니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마련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 말과 언약을 지키기만 하면 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그곳에 우상숭배의 모든 백성을 네가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고 말씀 하셨다(출 23; 3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민족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국으로 분리시키셨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로, 남유다국은 바벨론에게 종속케 하셨다. 


따라서 애굽의 노예에서 다시 두 민족의 노예로 바뀐 것뿐이다. 깊이 묵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고전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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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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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5
영의 눈

 
 

영의 눈이 없이는 살아계셔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육에는 오각(5 Sense: 五覺 五感 五官)을 주시고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호흡으로 영을 불어 넣어 주셔서 인간에게 신의 눈과 영의 눈을 갖게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의 눈이 없이는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 하시면서 육신에는 눈과 귀와 코와 혀를 만드셔서 5각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視覺, 聽覺, 嗅覺, 味覺, 觸覺)을 주셨다. 


마음에는 영각(靈覺)을 주셔서 6각(6 Sense)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을 내가 누구이며, 인간을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가를 자연, 선지자, 또는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게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천지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시다. 이에 대해 모든 창조된 피조물을 통해서, 선지자 및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세상에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들에게 알게끔 하신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꽃의 경우 겨울에는 땅속에 보관하여 주시다가 봄이 되면 새싹을 돋게 하시고 비를 내리어 주시고 따뜻한 햇빛을 비추어 아름답게 꽃을 피게 하시고, 꽃이 지면 열매를 맺게 하시고 그 열매가 다시 땅에 떨어져 있다가 다시 새싹으로 돋아나게 하는 반복이 계속 이어진다.


이는 피조물 하나하나를 직접 창조하시고 관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고유의 역사이시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시고 악인까지도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한 점의 죄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믿는 자들도 이를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도 승천하여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살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의 길을 보여 주셨다.


결론적으로 우리 믿는 자들은 궁극적인 목적이 구원 받는 것이고, 반면 궁극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복음을 모든 인간들에게 전하여 다 함께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가 청지기이며 동시에 파수꾼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해야만 할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시 2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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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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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6
순종과 겸손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독생자로 탄생하시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까지의 생애를 살펴보면 예수님과 같이 순종하고 겸손한 예는 없다.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 하심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소유주가 되셔서 오늘날까지 모든 만물을 보존하며 관리하고 계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성부인 하나님의 아들 성자로서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께 순종과 겸손으로 복종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시며 세상 만물의 창조자이시면서도 일개의 피조물인 인간같이 되셔서 종의 형체로 세상에 살아가시면서 오히려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음까지 하시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것이다. 인간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빕2:6-8).


여기서 인간에 대한 순종과 겸손에 대해 살펴보면 세상의 속어에 ‘갑질’이라는 말이 있다. 갑질은 권력과 재력이 있거나 또한 많이 배운 지식이 있는 자들로 아무 힘도 없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어야 함에도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착취까지 하면서 그들 위해 군림(君臨)하여 인간의 기본권 및 인격까지 침해라면서 살아가는 자들의 행위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와 부귀영화를 마치 자기 자신들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오만하고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는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괘씸하게 여기실까? 생각해 본다. 


따라서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공포와 진노로 다스리시며 겸손한 자들에게는 반드시 축복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과 위선은 물론 겸손치 않고 오만한 자들을 매우 싫어하신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겸손하지 않고 오만한 자들을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치리 하셨으며, 신약시대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치리 하시다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은 영벌로 의로운 자들은 영생으로 심판하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마25:31-46 참조).


결론적으로 우리 믿는 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고 사양하시는 겸양지덕(謙讓之德)의 순종과 겸손으로 적은 믿음에서 큰 믿음으로 변화되는 신앙생활을 통해 의로워져서 잠깐 왔다가는 초로와 같은 육의 세상보다는 영원한 영혼의 세상, 천국에서 영원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영생해야만 할 것이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앞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겔 3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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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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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0
만물 창조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그 공간에 만드신 만물을 보관 관리하고 계시다. 그 중 하나가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오늘날까지도 하나님은 왜 인간들을 만드셨는가? 하며 확실한 이유를 알고자 한다. 


인간을 만드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부터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도 하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 가는 길을 만드시고 믿는 자들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구원하여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한 계획이라고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일을 다 완성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늘의 거처를 만들고 다시 와서 너희를 초청하여 함께 하신다고 말씀 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 2-4)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셔서 서로 사랑하며 영원히 함께하시려는 것이 분명하나 인간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으로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있는 선악과를 따 먹을 경우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를 믿지 않음으로써 죽음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이다.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불순종은 큰 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된 인간과는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들을 세상으로 쫓아 내셨다. 


쫓겨난 인간들로부터 태어난 후손들도 당연히 죄성을 갖고 태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이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독생자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본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서 계시다가 인간보다 더 낮은 위치로 오셔서 급기야 긍휼과 자비로 대속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의 보혈의 피로 인간을 구원하는 길을 만드셨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험난한 고난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 길로 가기를 싫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망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 5-8)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되시지만 종의 형체인 인간과 같이 되었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보시고 하늘과 땅에 모든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도 모두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주 라고 시인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경외(敬畏)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자비와 긍휼로 은혜를 베푸시지만,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한치의 용서 없이 진노의 대상으로 여기시는 매우 무서운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두 가지 진리가 있다면 하나는 믿는 자들에 대한 천국의 구원이며 다른 하나는 불신자들에 대한 영원한 불꽃연못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소유주이시다. 반면에 인간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마다 다른 달란트의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에 따른 청지기로서 하나님 사업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사업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것으로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 사업에 주어진 달란트대로 얼마나 하나님 사업에 공헌하였는가를 평가하신다. 여기서 천국과 지옥의 삶이 판단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최선을 다하여 하늘나라의 구원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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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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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세월에 따라 노화되어 가는 것을 인간이 어찌할 것인가? 내 나이 81세가 되니 눈도 어둡고 기억력도 약화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매년 1회의 성경을 통독하게 하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기도 드린다. 매년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감회를 느끼게끔 하신다. 올해에도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느낀 소회를 적어 본다.


예레미야는 출생 전부터 하나님의 전적인 의지와 은혜로 선민의 후손 유다의 패역 함을 깨우치기 위한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고, 유다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대언자인 동시에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중보적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뿐만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배척과 핍박을 당하면서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고도 동족인 유대인들의 핍박 속에 눈물의 생애를 보내다가 끝내 죽음으로 생애를 마치었다(렘16: 6-9 참조). 


이는 마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예표한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예레미아는 수 차례 투옥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의 복음을 전한 소명 의식이 투철하고 인내심이 강한 분이다. 이러한 고통 속에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아의 생애에 대한 어려운 역경을 돌보지 않으시고 일생을 고난 속에서 보내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사료 된다.


예레미아는 바벨론에 투항하라는 반민족 언사 때문에 동족에게 고난을 당했으나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깨달음에서 이루어졌기에 예레미아는 동족으로부터 배척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지시하는 바를 반드시 선포해야 할 의무를 다한 눈물의 선지자이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친미와 반중 정책으로 가야 하나 오히려 반대로 반미 친중으로 가고 있다. 그 당시 바벨론은 오늘날의 미국이 되고 애굽은 중국이다.


결론적으로 예레미야가 극심한 박해로 인해 사명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듯이 오늘날의 사역자들도 여러 가지 모양의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 사역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에 사역자들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장애물들은 물리치고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장차의 상급을 기대하는 마음을 지키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낙심과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끝까지 선포한 예레미야와 같이 모든 사역자들은 우리나라와 민족이 가야 할 길을 하나님께 의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 축복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또한 동시에 오늘날의 사회에서 들려오는 암울한 상황과 암담한 현실 속에서 성도된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어두운 곳에 소망의 빛을 비추어야 할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나이다" (렘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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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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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0
노인의 허상(虛想)

 

  

인생 80부터는 세상 삶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세대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죽어도 아쉬움이나 여한이 없다는 말이다. 살 만큼 살았으니 억울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노인들은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천년, 만년 살 것으로 생각하는지?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노인들을 만나면 왜 그리 말들이 많은지! 첫째로 자기 자랑부터 시작해서 항상 남의 이야기로 그치고 있다. 남의 이야기는 칭찬보다는 흉허물에서 시작하여 비판과 저주로 이어지는 이야기로 고집이 매우 강하다. 인간이란 날 때부터 죄성을 갖고 태어났기에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죄인이 죄인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두 귀로 들었다고 다 말할 것이 못 되고 두 눈으로 보았다고 다 말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남의 욕설이나 비평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남의 단점을 보려고 하지도 않으며, 또한 남의 잘못을 말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아무리 조리 있게 말을 잘한다 할지라도 사람으로 갖추어야 할 예의를 갖추지 못한다면 이런 노인들은 자기의 허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노인들의 말씀이 진실하여 후손들에게 감동을 주는 말이 되어야 한다. 


반면 말 한마디로 실망을 주고 심지어는 죽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도 위와 같은 상황의 노인들은 아직도 기력이 있는 세상의 복을 타고난 노인들이다. 이와 반대로 자손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가던지, 내외 중 한 분이 먼저 세상을 떠나 외롭게 독신으로 살든지, 노화로 인한 갖은 병으로 심신이 불편한 노인들은 항상 근심과 걱정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고 노숙하며 구걸하는 상태에서 보내는 노인들의 경우에는 국가에서 노인요양소에 입소시켜 살게 하고는 있지만 일정한 규율 속에서 노인들의 자유는 물론 즐거움을 충분히 느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은 젊은이들에게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노인들은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젊은이들로부터 증오 및 기피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 왜냐하면 노인이 될수록 자기 고집이 강해지며 노인이기에 젊은이들로부터 노인이라는 허상만으로 존경 받기를 바라며 젊은이들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지 않고 있으면서 요사이 젊은이들은 예의가 없으며 노인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고 말 들을 하고는 한다.


이것은 노인들의 자녀가 되는 젊은이들에게 예의와 도덕 등 교육에는 관심이 없이 소홀히 하였고 오로지 존경의 대상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노인들의 잘못인 것이다. 따라서 항상 젊은이들에게 표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노인의 백발은 사회의 지혜라고 하는데 오히려 어린아이가 되어간다는 속어가 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착하고 진실한 어린아이의 마음이 아니라 점점 고지식화 되고 세상 지혜와 지식에서 멀어져 간다는 뜻이다. 


옛날 유교사상에서 살던 시대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도덕지침이 되어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였다. (三綱; 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婦綱, 五倫; 君臣有義, 父子有親,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이는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고 지배층의 통치이념으로 인한 문제점으로 퇴보된 사상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사상은 권력과 빈부, 노인이나 젊은이나 모두 서로 존중하며 동참하는 세대이므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서로 돕고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세상임을 노인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노인들도 늘 겸손하여 노인간 노소간에 서로 화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항상 젊은 세대를 바르게 인도하여야 하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를 깨달아야 한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 15:31).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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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eungo
이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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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3
2018-11-12
전도서에 대한 감회

 

세상은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사악하고 거짓과 위선으로 변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 인간들 사이의 사랑마저 메말라가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따라서 혹자는 말세지 말의 현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따스하고 온화했던 어머니 태 속에서 차가운 공간의 세상으로 태어날 때부터 불편한 울음을 터트리며 태어나 갖은 고통과 고난 속에 인생의 삶을 살아가게 하셨는가? 생각도 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셔서 고생을 겪게 하시고, 또 이 고난에서 구원하고자 하나님 자신마저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받으셨는가? 


인간을 만드신 목적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이 기업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 하셨고(엡 1:12),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로 예비한 긍휼의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시려고 하셨으며(롬 9:23),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게 하려고 인간을 만드셨으며(사 43:21),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셨다(엡 22:10)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결과를 모르시고 인간을 만드셨다는 말인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시는 일을 인간이 어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오늘날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의 통치자들은 물론 모든 인간이 위선과 거짓 없이는 모든 것이 이루어져 갈수가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이다. 그래도 잠깐 왔다가는 세상 삶에서 하나님께서 통치자로서 권력자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세상 최고의 은총을 입은 솔로몬과 같은 자들도 해 아래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하였으니 타고날 때부터 가난하고 장애인인 인간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후 인간을 만드실 때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하셨으니, 창조주 하나님 뜻에 피조물인 인간이 이에 대해 대적할 수 있겠는가?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냐고 말을 하겠는가? 


이것에 대해 하나님은 불공평 하시다고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영원하신 분으로 언제고 공평하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매우 공평하신 분이다. 


또한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은 분이시기도 하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고 하시면서 또한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영광 받기로 예비하셨으며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 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롬 9:19-23 참조).


그럼으로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이 금이나 은 덩어리도 아닌 흔한 흙덩어리로도 하나님 손에 붙들리게 되면 흙을 불에 달구어 급기야 값나가는 청자나 백자와 같이 되듯이 인간 성군 다윗도 양치는 목동에 불과했고 나합은 이방 여인의 신분임에도 왕의 조상 할머니가 되었다. 


보잘것없는 흔한 진흙 덩어리 같은 미천한 인생도 귀하고 복된 인생으로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택한 사람을 귀한 그릇으로 만드실 때나 또한 자기 백성을 택해서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실 때에도 마찬가지로 훈련과 연단 후의 과정을 겪게 하신 후 거룩하고 청결한 것으로 만들어 쓰신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하늘나라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훈련과 연단의 과정이 필요한가? 추상이 된다. 


결론적으로 2018년에 전도서를 읽으면서 느낀 감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인간 중 솔로몬만큼 세상 축복을 주신 적이 없음에도 솔로몬은 세상 축복 속에서도 허무함을 느끼면서 평안을 갖지 못하고 결국은 오직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며 순종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본분이라고 잠언서를 끝맺고 있다.


이는 진실한 의와 평강은 세상 속에서는 찾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 나라에서만이 진정한 평강의 안식처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서 12:13)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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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eungo
이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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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4
세월에 대한 추억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가고 있다. 80년의 세월을 흘려 보내고 나니 남는 것은 아쉬움과 추억뿐이다. 내가 고국을 1993년도에 떠나 지금은 수만 리 미국 땅에 와서 살아갈 줄이야 상상도 못 하였었다. 


아브라함은 태어난 고향인 갈대아 우르 지방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민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명령에 기어코 가나안 땅으로 이민하고 말았다. 역경의 이민의 삶을 지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인간들로부터 믿음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이민은 나의 결정으로 이루어졌으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역사 하셨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나의 이민의 삶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난 조국을 한시라도 잊을 수가 없다. 개천에서 미생물인 연어 알이 부화되어 새끼 연어가 애초 태어난 개천을 떠나 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넘어 북쪽 태평양 연안 대륙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어미 연어가 되어 뱃속의 많은 연어 알을 품고 다시 태평양을 거쳐 부화했던 개천에 다시 찾아와 알을 낳고 죽는다. 미천한 물고기도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죽는데 하물며 인간이 죽어서 조국 땅에 묻혀야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의 경우 캐나다에 이민해 나이아가라 폭포가 보이는 좋은 곳에 우리 내외 묘지를 구입하였다. 그러나 다시 미국으로 이민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였다. 또다시 이곳에 묘지를 물색하였으니 왜 가는 곳마다 묘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나? 


우리나라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충효 사상으로 인해 죽은 조상들의 영혼으로부터 세상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미신에 가까운 사상에 젖어있다. 그래서 조상의 묘지를 좋은 곳에 마련하고 명절, 또는 수시로 묘소를 찾아 절을 하며 재단에 음식까지 차려놓고 축복을 빌기도 한다. 


따라서 명당의 묘지를 찾기에 매우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이를 풍수지리라 말하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묘소는 산을 등지고 산 능선의 언덕 끝부분에서 남향으로 하여 좌측은 동쪽이 되며 우측은 서쪽이 되어 동쪽을 청룡, 서쪽을 백호라고 부른다. 이 형상의 지형을 좋은 명당자리로 조상의 영혼으로 자손이 부귀영화를 노린다는 내용이다. 


나는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는 등 가정의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을 못 하고 4년간 한서에 통달하였으며 제사 문화와 당시 시대적인 샤머니즘에 젖어 살아왔다. 


어머님께서는 그 당시 여인들의 문맹률이 95%에 이를 때에 외동딸로 태어나셔서 국문을 터득하셨으며 우리 가문의 맏며느리가 되셨기 때문에 선조들의 제사는 물론 가족 모두의 생일 절기에 따른 우상숭배로 인한 고사 등으로 어려운 시집살이를 하셨다. 그 당시에는 지식인으로 존경을 받으셨으나 전통적인 조상 숭배를 비롯한 우상숭배에 대해 항상 마음에 거부감을 느끼시고 계셨다. 


때마침 집에서 4km 거리에 조그마한 천막 교회가 설립되자,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혼자서 교회를 나가셨다. 대대로 유대 가문의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 하심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유다 나라의 요시야 왕 같이 전통적인 우상재단(신주단지 등)을 소탕하시고 우상숭배의 관습을 철저히 배척하셨으니 나는 어머니의 영혼이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칭찬받고 계시리라 확신한다. 이로 인해 모든 자손이 주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어머님을 도구로 쓰시는 믿음의 유산인 것이다.


지금은 자손들 중에서 목사, 목사 사모, 선교사, 장로 및 권사 등 주님의 직분을 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볼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내가 주님을 영접하기 전 유교 사상에서 살던 때와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 세월에 대해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교 시대의 충효 사상에서 조상들의 영혼에 따라 세상에서 축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여 조상들의 묘지까지 풍수지리설에 따라 선택하고 절기마다 수시로 묘소를 찾아 절을 하고 축복을 기원하였던 추억과 주님을 영접한 후로는 묘소를 방문할 때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조상들의 육체가 이곳에 매장되어 흙만이 있는 곳이라고 인정하고 이제는 흙에 대해 절하지 않기로 하고 반면에 묵도로 조상들의 생존시의 추억에 대해 회상하곤 한다.


하지만 나이 80에 죽을 날이 가까움으로 인해 내가 죽으면 묻힐 나의 묘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 캐나다에서 미국 이민 이전에 묘소를 마련하였으니 그곳을 우리 내외의 최종묘소로 결정하였다. 이것도 또한 우상숭배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주님께서 공중 재림 시 무덤이 열리며 승천하시는 것이나, 주님의 시체를 동굴에 모시고 큰 돌로 막아 놓는 것들을 성경을 통해 보면서 무덤의 묘소가 중요한 것을 느끼며 또한 우리 민족은 중국 문화의 영향하에 조상 묘지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하였다.


직업상 여러 민족의 서민들의 장례문화를 듣고 보아왔다. 예로 중동국가의 경우 온 사방이 사막의 나라로 산이 없어 일정한 묘지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람이 죽으면 가까운 근처 모래 속에 시체를 묻고 모래 돌로 표시를 하였으나 강한 모래바람이 불고 나면 흔적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중국도 이제는 시체를 화장하여 집 근처에 뿌리곤 한다. 또한 어떤 민족은 시체를 언덕 옆을 파고 넣어 방치 함으로 짐승과 새의 밥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한서에 의하면 묘소는 100년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고 부모, 조부모, 증조부까지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현대에는 시체를 화장하여 공중에 뿌리기까지 함으로 묘소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의 모든 민족의 죽은 시체들을 믿는 자들의 무덤은 공중재림 시에, 불신자들은 백보좌 심판 때 무덤을 여시고 다시 인간으로 부르시어 심판 하신다. 


오늘날에도 모든 종족 인간들에게도 삶과 죽음의 관습의 문화도 인정하시며 지켜주시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관심에 따른 행동이나 실천은 사전사후를 막론하고 영육간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동행하기만 하면 모든 소망하는 것이 해결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내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시편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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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eungo
이승고
71348
9213
2018-10-17
요지경 속의 신앙생활

 
  

하나님을 경외함 없이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와 찬송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


형식적인 예배와 찬송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믿는 자들은 알고 있는가? 나는 80세에 은퇴 장로로 이 교회에 온 지가 1년밖에 되지 않아 순수한 하나님 파로 그 동안 느낀 소감을 피력하기에 아무 장애가 없으리라 본다. 


요사이 교회 성도들이 서로 의견이 달라서인지, 양파로 갈라져 불협화음이 들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성도들을 하나로 화합하게 하여야 할 직임을 맡은 목사 그리고 장로들의 사명이다. 믿음의 젊은 후배들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 부끄러운 일이다. 


목사들 중 대표 두 명의 불화로 인해 성도들마저 불안과 신앙생활에 영향을 받게 하니 하나님이 무섭지 않은가? 우선 목사라는 이름을 받고 보니 목사가 해야 할 일을 잊었는가? 목사들 개개인의 잘잘못은 목사들의 양심에 맡긴다고 하더라도 목회로 인해 교회의 성도들이 허구의 성도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교회가 주님이 주신 목회의 사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에도 이를 떠나 이방인을 선교한다고 하며 또한 선교지를 개척한다고 하니 이것이 요지경이 아니고 무엇인가? 많은 목사가 배출되어 있는데 그 중 양심적인 훌륭한 목사님을 선택하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담임목사님을 장로교회 노회에서 지정한다고 하니 노회는 각 교회에서 결정 사항을 보고받고 확인하여 인정하는 것이 사명이다. 


예로 장로교회 담임목사가 장로교회 출신인지, 그간 목회 신앙생활 사실을 조사 확인한 후 사실을 당 교회에 알리고 지도하는 것이다. 그러고도 당교회에서 이어서 이탈하여 보고되면 승인 여부를 명료하게 교회에 알려주어야 한다. 예로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올바른 투표로 할 수 있게 하고 후보자들의 설교를 전 성도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하루속히 교회가 정상궤도에 이르도록 진심으로 기도 드린다. 


때마침 본국 장로신학대학 교수이신 김운용 목사님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말씀 성회가 이루어져 현장 목회 경험이 없이 순수한 교수로서의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 앞으로 교회에서 목회자로 사명을 다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하였다. 짧은 나의 생각이니 이해하고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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