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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봉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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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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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강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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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5
‘설마’의 역사 500년(40)-5.16 군사혁명(6)

 

 

▲김종필과 오히라 

 

 

 

(지난 호에 이어)
2) 1962년 3월, 구정치인을 정죄하는 ‘구정치인정화법’을 발표하였다. 이에 반발한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을 하였고, 박정희는 대통령대행직을 물려 받았다. 동년8월, 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수반으로 역임케 하였다.


3) 1963년 중반, 박정희는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공약과는 달리 육군대장으로 예편을 하였다. 예편 후, 곧바로 민주공화당에 입당을 하여 제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하였다. 


이 무렵, 구정치인 정치정화법이 일부 해제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구정치인들은 군정연장이라며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이후 군정연장과 군정반대를 놓고 야당들이 갈등을 하게 되었다. 야당통합의 명분을 걸고 ‘국민의 당’이 창당되었으나 윤보선, 허정, 이범석의 갈등이 심화되어 야당내 대립은 격회되었다.


4)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를 치렀다. 공화당의 박정희, 민주당의 윤보선의 대결이었다. 유권자의 84.99%가 투표를 하였는데 박정희가 46.7%를 얻어 약 15만표 차이로 윤보선에게 신승을 하였다. 박정희의 지지율은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압도적이었다. 


■대한민국과 일본간의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혁명을 하고 나서 국가의 살림살이를 맡아보니 너무도 가난한 나라가 되어 살림살이를 일으켜 나갈 수 있는 밑천이 없었다. 외국에서 돈을 빌려다가 국가의 산업을 개발하여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외국 어느 나라도 군사정부에게 돈을 빌려주지를 아니 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정부에서 5.16군사혁명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면으로 애로가 많았다.


박정희는 독일에 가서 뤼부께 대통령에게 눈물의 하소연을 하여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3개월분 월급을 담보로 하여 차관을 얻어 오기도 하였으나 그러한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경제개발을 하고자 하는 웅지는 크지만 자본금이 없으니 어찌해야 공장을 짖고 기술을 연마할 수가 있을 것인가? 


GNP는 83불밖에 안 되고, 대학을 나온 고등실업자들은 다방에 모여 담배나 빡빡 피우고 앉아 있고, 공장이라고는 영등포 구로동에 있는 삼립건빵공장이 전부이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우리나라의 산업을 일으킬 수가 있을 것인가? 생각은 많지만 현실은 암담하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對日 재산 및 청구권 문제’였다. 얼마를 어떻게 해야 받아 낼 수가 있을 것인가? 그것을 받아 오면 목돈이 생길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경제개발의 밑천을 삼는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과연 그리 쉽사리 돈을 내줄 것인가?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일본에게, 36년간 우리를 괴롭히고 재산을 빼앗아간 보상문제를 풀어 보자고 제안을 하였다. 돈이야 많이 받아올수록 좋겠지만 어찌 그자들이 그리 쉽게 내어 주겠는가? 


1년여를 두고 흥정을 하고, 회담이 결렬될 뻔도 하고, 학생들은 굴욕외교라고 매일 데모를 하고, 차라리 집어치우라고 국민들은 아우성을 치는 판이었다. 하지만 박정희에게는 그것이 일억 불이건, 십억 불이건 받아오지 못한다면, 어떠한 수단으로라도 경제개발을 할 수 있는 희망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수난 끝에 타협을 본 것이 바로 대일본 재산 및 청구권 문제의 해결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케다 하야토는 즉각 한국의 신정부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1961년 11월 22일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를 만나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1962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협상의 내용을 합의하였다. 이 협상 내용은 ‘김-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후일 김종필은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김종필-오히라 마사요시 합의사항


1. 무상공여로 3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한을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573만 달러는 3억 달러 중에서 상쇄한다. 


2. 대외 협력기금 차관으로 2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리 3푼 5리(정부 차관) 


3.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민간 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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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강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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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2
‘설마’의 역사 500년(28)-5.16 군사혁명(5)

 

 

 

 

■혁명 거사 후의 반응


 1) 혁명을 거사하고 박정희는 유원식을 데리고 청와대를 찾아갔다. 그러나 대통령 윤보선은 혁명군을 진압할 생각은 아니 하고 올 것이 왔다고 생각을 하였는지 아주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2) 매그루더 UN군 사령관은 혁명을 주도한 군부를 인정하지 아니하였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진압명령서를 들고 싸인만 하시면 혁명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 대통령은 오히려 “우리 한국에서는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고 유회적 이야기를 하면서 방관 자세를 취하였다. 


3) 하지만 매그루더 사령관은, 5월 17일자 미국 합참의장에게 보낸 전문에서, “미군 방첩대(CIC)가 거리의 행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10명중 4명은 혁명을 지지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하였으며, 나머지 2명은 반대를 하였다.”고 보고 하였다. 


4) 혁명초기에 당시의 강력한 언론인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뽑고 새로운 민족의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고 혁명을 지지하였다. 


5) 언론인 송건호도 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혁명을 지지하였다. 


6) 또한 6월 14일, 혁명을 한지 한 달이 되어서, 일제강점기에 제암리 학살사건을 수습했던 캐나다의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코리언 리퍼브릭’지에 “5.16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여 “5.16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서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과업을 주도한 박정희(朴正熙)는 누구인가?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고령 박씨 박성빈 공과 수원 백씨인 백남의 여사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중수(中樹). 대한민국의 군인, 교육인, 정치가이며 5, 6, 7, 8, 9대의 대통령이다.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3년간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졸업한 후,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과정에 편입하여 졸업을 하였다. 만주 보병 제8사단에서 일본이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일본군 장교였다.


해방이 되자 장교가 부족하였던 광복군이 당시 장교경험자를 기용하는 정책에 의해 북경으로 건너가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 남로당에 입당을 하였다. 1946년에 고향에 돌아와 대한민국 육사 2기생으로 편입하여 육군 대위가 되었다.


군에서는 각종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혁명 당시에는 제2군사령부의 부사령관이었고, 혁명 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거쳐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통령직을 역임하였다. 


 집권기간 동안 경제개발5개년 계획 등을 수립하여 산업화를 일구어 냈으며, 국방력증강 및 자주국방을 시도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으로 야당 및 학생운동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였고, 1979년 10월에는 김영삼 의원 제명파동 등을 사주하여 부마항쟁을 야기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으로 다양하게 나뉘어지고 있다. 우선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은, 전쟁과 가난으로 몹시 피폐해져 있던 대한민국을 국가주도의 ‘산업화’에 성공하였으며,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서 경제적으로 강한 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유비무환(有備無患)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였고, 특별히 그가 이끈 농촌의 ‘새마을운동’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후진국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표본이 되게 하였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역대의 국가 지도자들의 공적 평가에서 항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첫 번째 부인 김호남씨에게서 딸 박재옥씨, 그리고 육영수 여사에게서는 빅근혜, 박서영 두 딸과 아들 박지만씨가 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정치 및 입법 사항


대통령중심제의 체제하에서 국회 국무회의에서 제정되는 모든 입법활동을 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였기 때문에 입법활동은 아주 활발하였다. 중요 정치적 문제의 입법사항을 열거해1961년 6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로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1) 1961년 8월 12일 민정이양에 관한 계획을 최초로 결정하고 박정희 의장을 통하여 발표했다. 


가)혁명정부는 정권이양에 앞서서 진정한 민주정치 질서를 창건하고 구악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a)구악일소와 법질서 확립 b)모든 체제의 개혁 및 발전 c)종합 경제5개년 계획의 추진 등의 기초작업을 완수한 후에 정권을 민간정부에 이양한다.


나)정권이양시기는 1963년 여름으로 예정하고 a)1963년 3월 이전에 신 헌법을 제정 b)    1963년 5월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정당의 활동시기는 1963년 초로 한다.


다)정부형태는 대통령책임제를 선택하고 a)국회구성은 100인 내지 120인의 단원제로 b)선거관리는 국가공영제로 c)구정치인 중 부정 축재한 자의 정계진출을 막기 위해 입법조치를 취한다. (다음 호에 계속) 

 

 

 

[출판기념회에 초대합니다]

 


 1968년 11월 26일 토론토에 도착, 이 달로 캐나다 이주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간 캐나다 동포 사회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건강하게 살아온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그간 부동산캐나다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설마의 역사 500년’과 ‘Canada Study’란 글을 책으로 엮어, 아래와 같이 출판기념회를 하오니, 왕림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일시: 2018년 11월 26일(월) 오후 2시
 장소: 토론토한인장로교회(67 scarsdale Rd. Toro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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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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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5
‘설마’의 역사 500년(38)-5.16 군사 혁명(4)

 

  


▲5.16 군사혁명 직후 중앙청 앞의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박정희 소장, 차지철 대위

 

 

 

(지난 호에 이어)
실로 혁명을 이끈 것은 부위원장 박정희 소장이었으나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이 형식상으로 위원장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얼마 후에 장도영이 혁명 실세로부터 제거되기까지는 모든 발표내용이 장도영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이는 5.16군사혁명을 주도한 군사혁명위원회가 5월 18일에 이름을 바꾸면서 발족한 국가의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을 행사하였던 혁명과업수행의 최고기관이다. 


첫 번째의 국가재건최고회의 군사내각은 1961년 5월 20일에 발표되었다. 이 기관에 의하여 약 2년 반 동안 모든 국정이 수행되었다. 1963년 12월 17일에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혁명 초창기에 박정희는 혁명을 주도한 실세이긴 하였지만, 형식상으로는 최고 지도자가 아니었다. 혁명 당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면서, 군내부의 반혁명 세력의 반항이나, 외적인 모양새를 고려하여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을 내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장도영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하였고, 박정희는 부의장으로 취임하였다. 


 1963년 6월 10일에는 비밀첩보기관이자, 국민감시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발족시키고 김종필이 그 첫 번째 부장이 되었다. 그 이후 군 일부의 반혁명세력을 찾아내서 이들을 숙청하였으며, 7월 3일 이와 관련된 장도영마저도 의장직에서 추방을 당하고, 박정희가 의장이 됨으로 숙청작업을 마무리 하였다. 

 


 <1961년 5월 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내각>


 의장: 장도영(육군참모총장, 중장)
 부의장: 박정희(2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위원: 김종오(중장), 박임항, 김신, 이성호, 김성은, 박창암, 정래혁, 이주일, 한신, 유양수, 한웅진, 최주종, 김용순, 채명신, 김진위, 김윤근, 장경순, 송찬호, 문재준, 박치옥, 박기석, 손창규, 류원식, 정세웅, 오치성, 길재호, 옥창호, 박원빈, 이석제 이상 29명 
 고문: 김홍일(예비역 중장), 김동하

 


 6월 10일에는 방첩기관이자 감시기관인 중앙정보부가 발족했다. 박정희는 이 후 '군 일부에서 반혁명사건'(알래스카 토벌 작전)을 일으켜 군부 내의 반대세력을 숙청하였다. 그 뒤 7월 3일 에는 알래스카 토벌작전에 연루된 장도영을 의장직에서 추방했다. 박정희는 추대형식을 빌어 스스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직에 취임하였다.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대한민국의 특별 행정기관이자 정보, 첩보, 수사 업무를 전담하는 기관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기관으로 설립되었다가 1962년 3월 정부의 직속기관이 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수사 업무와 경찰, 검찰을 지휘하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서서히 대공, 정보 수집 분야로 영역을 확장하였다.


국외 정보 및 국내 보안 정보의 수집과 작성 및 배포, 국가 기밀에 속하는 문서.자재.시설과 지역에 대한 보안 업무, 형법 중 내란의 죄.외환의 죄, 군형법 중 반란의 죄.이적의 죄.군사기밀누설죄.암호부정사용죄, 군사기밀보호법.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에 규정된 범죄의 수사, 정보부 직원의 범죄에 대한 수사, 정보 및 보안 업무의 조정.감독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직속 중앙행정기관이었다. 


1981년 4월 8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되었다가 이후 정보원으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국내의 선거에 개입했다는 등 문제가 많다 하여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서는 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국정원은 거의 해체 단계에 이르러 개점휴업 상태이기에 대한민국의 정보업무, 특히 간첩을 잡는 대공업무는 거의 마비상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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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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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5
‘설마’의 역사 500년(37)-5.16 군사 혁명(3)

 

 

 

  

 5.16 군사혁명의 배경


 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혼선, 그리고 국민들에게 아무 희망적인 미래를 보여주지 못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의 무능함이 군사혁명을 일으키게 된 첫 번째의 동기이고 배경이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집권자 두 분은 참으로 착한 성품의 지도자였다. 하나 착하다고 정치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모질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기만 하였던 그 당시의 상황이 오히려 4.19의 진의를 퇴색케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실로 그 당시의 시국상황에서 그 두 분의 정치방법은 현실성이 결핍되어 있었다. 4.19혁명 이후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은 국민들에게 희망은커녕 오히려 실망을 안겨 주었고, 학생들이나 사회계층에서 요구하는 개혁을 실행치 못하였기 때문에 정치가들에 대한 신망을 상실하였다.


두 번째의 배경은 군부 자체 내에서의 문제점이었다. 1958년 이후 미국의 전략적 요청에 의하여 추진된 감군(減軍)정책은 군부의 불안을 내포하고 있었다. 왜 미국의 감군요청에 한국이 따라야 하나? 그 당시에 우리 국가가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외세의 위협보다 원조물자의 상황에 따라 군사력을 유지해야 하는 국가이었으니 어찌하겠는가? 북한의 김일성 공산군은 일취월장으로 강군화 되어가는데 남한에서는 감군을 해야 하니 실로 그 정책은 무언가 현실성을 무시한 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감군정책은 군 장성들의 미래에도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특히 장성급 승진에 부정부패가 얽혀 있었으니 이를 정상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비리가 공개적인 사실처럼 되어 있었으니, 군의 자체적 내부정화 문제도 한 번쯤은 폭발을 하려고 술렁술렁하던 때였다. 


세 번째로는 박정희라는 혁명가가 때를 만난 탓이다. 왜정시대 일본군 장교가 되었을 때부터 국가혁명성의 책을 보고 연구하며 마음속으로 혁명을 꿈꾸어 오던 사람이 박정희 이었다.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은 그 당시의 혁명 필요성과 실현성을 가늠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혁명사상과 야망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생각하고 생각하며 쌓아온 결과인 것이다. 당시 군부내의 실세인 육사 8기와 9기생들을 중심으로 거사할 것을 손꼽아 본 것이다. 박정희 소장은 육군중령 김종필, 소령 이낙선, 소령 박종규 등과 머리를 맞대고 숙의 하였다.


 군사혁명 행동 개시


 5.16군사혁명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부사령관 육군소장 박정희가 김종필, 이낙선, 박종규 등 육사 8, 9기생 장교들과 모의하여, 장면 내각의 무능력과 사회적 혼란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정치기풍을 일으키겠다는 굳은 의지(혁명공약) 아래, 제6군단포병대, 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하여 새벽녘에 한강다리를 건너 와서 청와대를 장악하고, 제2공화국을 무너뜨려, 정권을 장악한 군사혁명이다. 


이후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한 모든 군 부대들이 이를 지지하였기에, 군 세력간에 큰 충돌 없이 혁명과업을 진행할 수가 있었다. 


 5.16 혁명공약


 5.16군사혁명위원회에 의하여 사전에 작성된 공약 6개 항목으로, 서울 광명인쇄소에서 인쇄하여 혁명당일 전국적으로 살포되었으며, KBS의 박종세 아나운서에 의하여 당일 새벽 6시부터 연속 방송됨으로, 국민들에게 군사혁명을 알리고 그 혁명의 뜻과 목적을 약속한 내용이다. 


 <혁명공약>


1. 반공(反共)을 국시의 제1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 (군사혁명위원회 육군중장 장도영)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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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3
‘설마’의 역사 500년(36)- 5.16 군사혁명(2)

 

 
 

▲지난 2008년 5월 서울광장에서 열린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에서 시민들이 구호와 함께 촛불을 흔들고 있다.

 

 

 (지난 호에 이어)
그래서 특별히 5.16군사혁명을 나는 나대로 재조명해 보기를 시작하였다. 군인들이 한 일이니 미움을 살 이유도 많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행동보다는 입으로 떠들기를 좋아하는 신세대 지성인들에게 군인들의 정치는 사뭇 비위에 맞지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내가 느끼던 5.16에 대한 마땅치 못한 일보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일으킨 업적이 그 어느 정권보다 더 뚜렷하기에 내가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이다. 


해외에 나와서 살다 보니 이 지상의 여러 나라들을 보는 기회가 훨씬 더 많다.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것이다. 반만년 역사에 이룩하지 못했던 엄청난 일들을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많이 이룩하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면서 나의 선입관적 생각이 바뀌어진 것이다.


그래서 재조명을 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4.19와 5.16의 결과가 보여준 진가는 나의 기존 사고개념을 180도 돌려놓게 된 것이다. 


지금 나의 생각은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소위 수구꼴통이라고 부르는 고루한 늙은이 축으로 변하여 버렸다. 내가 일부러 그렇게 변하고 싶어서 변한 것이 아니다. 해외에 나와서 내 인생의 50년을 보내면서 내 조국을 들여다 보며, 매일매일 발생하는 세계의 사건들을 대비해 보고 전망해 보자니 저절로 그렇게 변화한 것이다.


한국 내에서 우물안개구리 소리는 올바르지 않다고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우물 속의 세계는 언제라도 우물 속이다. 그 몇 가지 실례는 이 시간까지도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1)몇 달을 두고 밤을 새워가며 광화문 광장에서 악을 쓰며 광우병 타령을 하던 그 젊은이들의 데모사건. 미국의 광우병 걸린 소를 수입해서 먹일까 봐 그런다는데 그것을 이성적으로는 전연 해석이 안 된다. 나는 미국의 광우병 소리를 이 북미에서 걱정해 본 적이 없다. 


(2)미순이 효순이 두 여학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어 죽었는데 그 사건을 놓고 미국 대통령에게까지 사과를 하라고 떠들어 대는 그 데모 꾼들.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6.25전쟁 때에 미군 5만여 명이 희생된 일은 남의 일이었나? 언제부터 한국이 그렇게 염치도 이치도 없는 나라가 되었나? 


(3)세월호 사건도 그렇다. 수학여행을 가다 배가 전복된 사건인데 왜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나? 미국의 9-11 사건의 뒤처리와 세월호 사건의 사후 처리하는 과정을 보니 천지 차이다.


대한민국의 정치가들도 국민들도 모두 얼빠진 사람들 같다. 서해바다에서 국가를 위하여 싸우다 전사한 군인에게는 3800만원을 보상해 주고, 세월호에서 빠져 죽은 학생들에게는 8억인가 10억인가 부르는 대로 시신 값을 준다니 그게 무엇에 근거한 계산법인가? 기준도 형평성도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참으로 한심스럽다. 


여행객을 태운 배가 바다에서 전복이 되었는데 왜 대통령이 책임을 지나?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근혜가 잘못해서 배가 뒤집힌 양 TV뉴스에서 떠든다. 웃기는 나라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의 정치가나 국민들의 수준이 선진 문턱에 갈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느낀다.


교육수준이 세계에서 최고라는 대한민국이 멀쩡하니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내가 잘못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혼돈과 착각에 빠진다. 내가 대한민국의 정치에 미련을 둘 이유는 없다. 지금 나는 외국인으로 내 조국을 들여다 보고 그 모습을 이야기 하고픈 것뿐이다. 


어느 분의 말씀에 의하면 5.16혁명 이후의 20여 년 업적은 이조 500년의 업적보다도 더 많이 성취하였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사랑으로 보고자 한다. 남의 사랑이 내 눈에 불륜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들의 사랑을 불륜이라고 매도하는 짓은 나의 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견해는 한국 역사 속에서의 한국이 아니라, 세계 역사 속에서 한국의 5.16이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 5.16 군사혁명은 그러한 관점에서 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생각에도 무게가 있고, 형평성이 있고, 확실성이 있어야 한다. 한국의 많은 현대사 책들은 two-pan balance 저울 위에 올려놓고 다시 달아보아야 한다.


 역사를 정치이념이나 권력의 시녀로 생각한 그 역사책들은 또 다른 오류를 낳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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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설마’의 역사 500년(35)-5.16 군사혁명(1)

 

 

 

 인간에게는 별로 달갑지 못한 속성이 있다. 요즈음의 속된 말로 ‘내로남불’이란 말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다”라고 하는 말이 아마 상당히 그럴듯한 표현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써놓은 많은 책들을 분류해 보니,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꽤 오래 전에 수구꼴통이라고 하는 세대들이 쓴 책과, 수구꼴통의 세대를 무슨 숙적이나 되는 듯이 쳐다보는 젊은 학자들이 쓴 현대사가 많이 다르다. 나이든 사람들은 경험에 의해서 썼고, 젊은이들은 남의 이야기를 썼다.


 뭔가 새로운 시각에서 평가를 해야 자기의 연구결과가 가치가 있다는 듯이, 사실을 비꼬아서, 선인들이 피땀으로 엮어 놓은 사랑의 업적을 불륜으로 만들어 놓은 책들이 지금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승만은 독재자며 나쁜 정치가이고, 김구 선생은 착하고 훌륭했던 정치가다. 4.19학생혁명은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좋은 혁명이었는데, 5.16군사혁명으로 인하여 민주주의가 먹칠을 당했다.” 


이렇게 역사를 단정해 놓고 스토리를 제멋대로 써놓은 책이 많고, 컴퓨터의 기록도 엉터리가 많다. 일례를 들어 본다. 컴퓨터에 ‘5.16 혁명공약’을 검색하니 위키백과에 ‘한국 현대사의 사료 모음’이라는 제목하에 빨간 글씨로 ‘전두환 정권의 혁명 공약’이라고 써 놓았다. 열어 보니 박정희의 5.16 혁명공약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다. 


전두환 정부가 그러한 혁명공약을 발표한 적도 없는데 왜 그렇게 터무니 없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전혀 근거가 없는 내용을 적당히 아무렇게나 입력시켜 놓은 것이다. 역사의 기록을 그렇게 엉터리로 써 넣으니까 6.25의 남침도 북침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인터넷 백과사전이 이 모양이니 요즈음 정보를 얼마나 믿어야 하나? 참으로 한심스럽다. 이러한 역사의 착오가 요즈음 진보파의 지식인이라는 젊은 사람들에 의하여 함부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좋은 혁명이었는데 5.16군사 정권이 민주주의를 말아먹어 버렸다. 그래서 박정희는 나쁜 독재자였다. 민주주의 이론이면 춥고 떨리고 배고프던 것이 다 저절로 해결되는 줄로 아는 광신자들의 글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아온 세대들이 자유방종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자기 기분 대로 역사를 써놓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이건 공산주의이건 그런 사상이나 이론은 먹고 입고 춥지 않은 기본요건이 다 해결되고 나서야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 우선인지조차 모르는 지식인들이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요건을 갖추지 못한 여건하에서는 어떠한 이념도 옳게 적용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지상에 230여 개의 국가가 있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는 50여 개 국가도 안 된다. 


민주주의는 여유가 있는 나라에서나 실현이 가능한 사치스러운 정치이념이다. 이 지상에 춥고 헐벗은 나라에서 민주주의 하는 곳이 있는가? 우리나라가 춥고 배고프던 시절의 역사를, 오늘날 살이 너무 쪄서 걱정인 현대사에 대입시켜 판단을 하니 올바른 평가가 나올 수 있겠는가? 


책을 딸딸 외워 가지고 민주주의 못하던 시절의 민주주의를 떠들고, 또 그런 책을 참고하여 다른 책을 쓰고… 그런 색안경으로 쓴 책들이 책방의 선반 위에 널려있으니 한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젊은 지성인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한국의 미래를 흐리게 하는 행위인데, 아무도 이를 바로잡고 막아보려는 이가 없는 것이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니까 늙은 세대와 젊은 세대들이 같은 역사를 썼는데, 그 내용이나 평가가 아주 다르다는 말이다. 수구꼴통 세대들은 그 시대를 살아오며 스스로가 겪은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니까 그 시대의 자서전 같은 글들이기에 그래도 진실성이 있고 ‘사랑’의 냄새가 나는 책들이다.


 나 자신도 왜정 36년을 맛보고, 해방의 환희를 겪었으며, 6.25 비극의 흉터가 내 몸뚱이에 아직도 새겨져있다. 우리 세대는 4.19학생혁명을 한 세대였기에 그 데모를 한 것이 대한민국 역사에 엄청난 일을 한 것으로 자부를 느끼기도 하였다. 그런데 5.16이 나서 우리의 업적을 뭉개버렸으니 내 마음속에 5.16이 별로 탐탁지 않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 때에 나는 박정희가 꽤 미워 보였다. 


그러한 마음속에 앙금을 안고 나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한국에서 29년, 외국에서 50년을 살았다. 그 동안 이 넓은 세계를 보고, 내 조국을 쳐다보는 눈이 많이 변화하였다. 한 마디로 우물안 개구리가 아니라 우물 밖의 개구리가 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 조국은 나에게 어떠한 존재인가?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하였다. 나 스스로의 존재와 세계 속에서의 상관관계를 찾아보려는 잠재노력이 긴 세월을 통해서 내 몸속에 작은 철학으로 배어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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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6
‘설마’의 역사 500년(34)-이승만 하야, 제2공화국 출범(하)

 

   

 

 


(지난 호에 이어)
4.19는 이승만이 저지른 과오라기보다는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던 측근들의 야욕에서 발단된 사건이었다. 부통령 장면보다는 국회의장 이기붕이 더 앞장을 서서 이승만 박사에게 아첨을 하였으며 이기붕은 경찰은 물론 깡패조직까지 동원하였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그러한 사실들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는 그 비극을 목도하고 즉시 하야 하였으며, 부상을 당한 학생들의 병원을 찾아가 병문안까지 한 것을 보면, 악질적 독재자로 매도하는 것은, 오늘의 역사를 이어 가는 사람들의 또 다른 과도 편벽에서 오는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5.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 


1960년 4월, 장면은 잔여임기를 4개월 남겨 놓고 사퇴를 했다. 그는 당시 현직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유고 시에는 대통령 승계 서열 제1위였다. 


장면은 부통령직 사퇴 이유로 1)이승만이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대통령직을 계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여 이승만의 하야를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2)부통령으로서의 도의적인 책임. 3)이승만의 불행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는다는 것이 싫어서였다. 


6. 제2공화국의 출범


1960년 5월, 민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 총선거 후보 등록이 있었는데 이 때에 자유당원들에 대한 집단적 낙선운동과 선거방해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제1공화국의 고관이자 부산 정치파동의 주역으로 규탄을 받던 장택상, 이범석 등은 학생들의 후보 사퇴요구를 묵살하고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7월 29일로 예정된 제5대 총선거에 관심을 보인 미국은 친미성향이 강한 장면을 선택하였다. 7월 11일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서울 주재 미국대사에게 장문의 훈령을 내렸다. 장면을 한국의 지도자로 선발하는 것이 이상적이며, 이 점을 허정에게 주지시켜 장면에게 지도자 자리를 수락하게 하도록 은밀히 요청하라는 주문이었다. 


 6월 12일, 내각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국무총리로 내각 수반이었던 허정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8월 12일, 국회선거를 통해 대통령 윤보선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구파이자 한민당 출신이었던 윤보선은 같은 구파 출신의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하려 하였다. 이 때문에 민주당 신파가 집단 반발하였고, 자유당은 자유당대로 민주당을 흔들기 위하여 반대하였다. 


1960년 8월18일 2차로 지명한 민주당 신파의 장면이 총리로 당선 됨으로 내각제의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4.19혁명은 3.15부정선거의 곪은 부분을 도려내는 것으로 끝났고, 새로운 비전이나 희망을 국민들이나 혁명을 주도한 학생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새로운 인적 물갈이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권을 잡은 후에도 종전과 다름없이 신-구파의 정당 싸움이나 계속하였다. 설마 윤보선-장면 정권이 그렇게 군부의 벼락을 맞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구태의연한 제2공화국은 곧 5.16군사혁명을 거사케 한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


제2공화국은 1960년 6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두 번째 공화 헌정체제이다. 제2공화국 체제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6•15 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대통령은 윤보선, 국무총리는 장면 이었다. 


하지만 구태의연한 붕당정치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여 국민들의 눈총을 받아 오다가 불과 11개월 만에 5.16 군사혁명에 의하여 제2공화국의 막을 내렸다.


 이화장(梨花莊)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초석인 이승만 전 대통령이 기거했던 이화장은 현재 이 전 대통령의 기념관으로 재탄생 되었다. 이화장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과 사적관, 조각당과 생활관으로 구성돼 있으며, 조각당은 이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최초의 내각을 구상 및 발표한 곳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4.19학생혁명으로 하야를 한 이후 잠시 이 사저에 머물다가 미국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고, 하와이 호놀룰루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으로서의 예를 갖추어 동자동 현충원 국립묘지에 영안을 모셨다.


이화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1번지에 위치한 건축물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은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이 안정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불편한 생활을 하는 것을 알게 된 권영일 등 33명이 돈을 모아 1947년 이 집을 사서 기증했는데 이때부터 이화장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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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설마’의 역사 500년(33)-이승만 하야, 제2공화국 출범(상)

  

▲이승만 동상 철거 장면

 

 

 

 1.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 - 장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의 설득 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결심하였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소식을 전달 받고 병원을 찾아가 부상 당한 학생들을 위문한 뒤, 방송에 애도의 뜻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4월 24일, 유혈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 사임을 선언하였다. 4월 26일 오후 1시,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연설문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담화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 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하고자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겠다.
#3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 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단기 4293년 4월 26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2. 허정 대통령권한대행 출범 - 이리하여 4월 26일 오후 2시,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 하였다. 다음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의 사임서가 즉시 수리 되었다. 헌법규정에 따라 수석 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후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실로 당선자인 부통령 장면이 대통령 대행이 되어야 할 것이나 그는 하루 전에 사표를 냈기에 국무위원 우선 순위에 의거 외무장관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게 된 것이다. 오후 4시,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걸어갔다. 


3. 이기붕 일가의 변사 - 4월 26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허정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관련자 처벌을 약속하였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이기붕을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허정은 이를 거부하였다. 
허정은 경무대 비서관 박찬일의 제의에 따라 만송 이기붕을 해외로 잠정적인 망명을 보내려 하였다. 이유인즉 만송이 부정부패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지만, 공산국가에서처럼 실권(失權)=사형(死刑)이라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민주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체면에도 크게 관계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한데 양주로 피신을 하였던 이기붕은 4월 27일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그 당시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 육군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이 되어 있었는데, 4월 28일 새벽 0시에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 마리아, 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하였다. 실로 이 일가의 자결은 4.19의 종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 - 이승만은 이기붕 가족을 조문한 다음날인 4월 29일,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이 대통령의 비밀출국에 관한 일체의 절차는 허정의 명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그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지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를 대한민국의 초대 건국 대통령으로 예우하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케 하였다. 회고하건대 4.19혁명은 이기붕의 부인 박 마리아가 너무 설치며 국정에 깊이 관여하는 일로 시작하여, 이기붕의 정권야욕, 그리고 그러한 무리들에 의하여 둘러 쌓여진 이승만 대통령의 눈가림에 의하여 벌어진 사건이었다. 


오늘날 이승만을 독재자로 몰아 부치는 이도 많이 있다. 실로 그는 13년간 집권을 하기는 하였지만 악의 있는 집권자는 아니었다. 그가 3.15부정선거를 알아차린 것이 경무대로 시위대들이 쳐들어 갔을 때였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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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5
‘설마’의 역사 500년(32)- 4.19 학생혁명

 


 

 역사는 원인이 중요하지만 결과는 더 중요하다. 결과가 없는 역사는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일이라도 그 시작의 의도가 끝내 빛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아쉬움으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역사의 가치는 결과만이 말하는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부패정권을 뒤엎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세웠지만, 애당초 품었던 웅지를 실현하지 못하고, 1년만인 1962년 5.16군사혁명을 다시 맞아야 했던 일은 4.19의 의미를 많이 퇴색시켰다. 


하지만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처음으로 국민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민(학생)의 힘으로 부패를 척결하고, 민주주의 정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 발전사에 큰 획을 그은 일이라고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 중심제의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뒤엎고, 내각책임제의 새로운 장면정부가 들어섰지만, 처음부터 혁명의 주체세력이 기성 세력이 아니고,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정치의 인맥이 변화된 것이 없었다. 새로운 정부라고 하였지만, 실질적 세력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기에 획기적인 변화를 이룩하지 못하고 기존 정파 싸움에 휘말리고 있었다. 


주체세력이 기성정권세력이 아닌 학생들이었기에 이를 혁명이라 하지 아니하고 의거라고 해석을 하는 분들도 있다. 아무튼 4.19혁명은 국민들이 민주주의 의식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시금석이 된 것이다. 


 4.19혁명의 개요 


1960년 4월, 대한민국의 재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에 반발하여, 선거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3.15 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시위 도중 3월 18일에 실종된 김주열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르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승만 대통령은 책임을 지고 하야를 하였으며,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의 일가족은 맏아들 이강석에 의하여 모두 권총으로 동반자살을 하는 비운으로 끝을 맺었다. 


4.19혁명의 배경


1960년 1월말,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조병옥, 그리고 부통령 후보는 장면이었다. 자유당은 정부통령 후보에 이승만과 이기붕이었다. 


선거운동 도중에 조병옥이 신병에 의하여 하와이로 치료 차 건너가게 되었고, 2월 25일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대통령 단독후보가 되었지만, 부통령으로는 이기붕과 장면의 대결이 더욱 격화 되었다. 집권당인 자유당은 이기붕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부정선거 활동에 열을 올렸다. 


 정부의 공무원들을 통해 선거운동 망을 조직하고, 경찰이 선거운동에 가담을 하였으며, 금품을 살포하는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3.15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내무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을 함으로써 마산시민들의 분노 감을 달아 오르게 하였다. 결국 3월 18일, 내무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강학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그렇게 일단락을 짖는 듯 하였지만 4월 11일, 마산시위 때에 행방불명이었던 마산상고 김주열군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결과가 발표되지 아니 하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머리 뒤통수까지 최루탄이 박혀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드디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8일 오후 4시경, 서울 고려대학교 학생 3,000명이 데모 도중에 유진오 총장의 만류로 데모를 중단하고 귀가를 하는 중에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폭력배들이 종로 4가 천일백화점 앞에 나타나서 취재기자와 학생들을 습격하였다. 


 4월 19일 시위와 계엄령 선포


 서울지역 총학생회간에 물밑 논의를 통하여 19일 오전 9시, 일제히 경무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행동지침을 정하였다. 경무대 앞에는 대학생만 2만여 명을 헤아릴 만큼 엄청난 군중이 몰려 들었다. 여기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삽시간에 사망 21명, 부상 172명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수많은 대학생들의 궐기에 고무되어 자극을 받던 중고등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리는 이기붕 자택으로 몰려갔다. 학생들은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 와중에 곳곳에서 경찰의 발포가 자행돼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제 1공화국의 세력 3인자, 경무대 경찰서장(지금의 경호실장) 곽영주는 곡사포를 동원하여 학생들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경무대 정문을 부수고 학생들이 쳐들어오니, 갑자기 군인들이 나타나서 덮쳤다. 여기에서 또 많은 학생들이 희생되었다. 경무대 앞에서의 희생자는 모두 183명이었다. 


 한편 시내의 시위대는 경찰차를 전복시키고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제1공화국 정부는 오후 3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한편 부통령 후보자 이기붕은 이미 자택을 빠져나와 경기도 양주의 모 육군 부대로 피신을 하였다.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은 시위를 강경 진압하지 않고 아주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여기에서 당시 데모에 참여하였다가 희생된 한성여자중학교 학생 진숙영(16세)양이 어머니에게 드린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소개한다. 그 당시에 필자도 대학생으로 시위대에 끼어 있었기에 진숙영양의 그 유서는 필자의 가슴을 울렸다.

 


 
어머님께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뻐해 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 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남기고 진숙영은 마지막 길을 갔다.


 4.19 이후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다. 4월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을 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미대사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할 것을 권유하였다. 법무장관 권승렬, 신임 외무장관 허정 등도 이승만의 하야를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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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강신봉
70503
7829
2018-09-20
‘설마’의 역사 500년(31)-반공포로 석방

 

 

 

 1951년 6월 18일, 반공포로석방은 미국측과 상의 없이 이승만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정한 역사적인 사항이었다. 미국측의 상당한 반발이 있었지만 휴전협정,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과 맞물려 있는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굳건한 뚝심과 탁월한 외교력의 발로라고 평가된다. 여기에 동아일보 2015년10월10일자 기사를 소개한다. 

 

 

 1953년, 반공포로 석방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막으면 행동 나설것” 
 美에 초강수, 美 합참 기밀문서로 본 당시 상황

 

 

1953년 6월 18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반공포로가 전격적으로 석방되었다. 미국은 반공포로의 강제 송환을 요구하던 북한을 의식해 휴전협상 결렬을 막으려고 반공포로 석방에 반대했다. 


1953년 6월 18일 오전 2시 10분. 논산, 마산, 부산, 거제도 등 한국의 4개 포로수용소에 있던 2만7388명의 반공포로(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공산군 포로)가 전격 석방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알리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단행한 결단이었다.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결코 휴전할 수 없다고 버티던 이 대통령이 취한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이었다. 결과적으로 휴전회담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한국 정부의 입지를 반전시키는 일대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동아일보가 단독 입수해 최초로 공개하는 미 합동참모본부의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일방적인 포로 석방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는 미국의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 “필요하면 전시작전통제권을 다시 한국으로 가져오겠다”며 당당하게 따졌다.


 휴전회담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미국은 결국 이 대통령의 뜻을 받아들였고 세계에서 가장 공고한 군사동맹으로 평가 받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태동하는 초석이 됐다.


1953년 5월 27일 한국 정부는 더 이상 휴전협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미국에 통보한다. 이틀 전 유엔군사령부가 한국에 있는 포로들을 즉각 석방하지 않겠다고 북한 측에 양보한 데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휴전협상 시작 당시 미국 중국 북한 대표와 함께 협상에 참여했던 한국은 결국 포로협상 진행 과정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면서 협상장을 뛰쳐 나온 셈이다. 


한국 정부가 문제 삼은 대목은 포로 중에 한국 출신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점. 1951년 12월 당시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던 포로 중에는 북한군이 남침해 내려오면서 강제로 끌고 간 한국 국민이3만 5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피해가 주는 교훈 

 


 3년여의 포화는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고, 그 폭탄은 세계 제1차 대전 때의 전체 소모량과 비슷하다고 한다. 10만 명의 미망인과, 2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약 45%의 공업시설이 파괴되었고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하였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북한인구의 11.1%에 해당하는 113만 명이 사망하였고, 남북한 양측을 합하면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미군은 5만4천명이 사망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운명이 어떠한 존재이었는가를 한 번쯤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1)전 후의 많은 문제점들이 우리 민족의 미래사를 가늠하여 준다는 것. (2)1949년 미군이 철수함으로 남한이 국방력 공백상태가 되었을 때 6.25전쟁이라는 사상 최대의 비극이 초래되었다는 것.
 (3)한반도는 세계의 이념대립의 각축장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3백만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것. (4)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에 의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벌써 없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것. 
 (5)중공군의 투입으로 거의 다 이루어진 우리 한반도의 통일이 깨어져버렸다는 것. (6)바야흐로 북한을 속국화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 정책이 앞으로 통일문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문제점. (7)오늘날 북핵 문제는 어떻게 풀려야 할 것인가? 하는 등등… 지금도 많은 사안들이 우리 민족의 운명을 혼미 속으로 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남한 국민들에게는 이제 설마 설마 하는 의구심도 공포도 다 귀찮아졌다. 전쟁불감증에 취해버렸기 때문이다. 전쟁을 생각하는 자체가 골치 아픈 일이다.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남한의 국민들. 오늘이 즐거우면 그만이지 내일의 전쟁의혹을 왜 걱정해야 하는가? 식량도 무기도 시원치 않은 북한이 무슨 능력으로 남한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설마 그것을 같은 민족에게 사용할 것인가? 세계 경제 10위권의 대한민국인데 뭘 그리 걱정을 한단 말인가? 


과연 남한의 정부나 국민들이 이렇게 방관을 하고 북한을 무시해도 괜찮은 것인가? 모두가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점들이다. 500년 뼛속에 도사리고 있던 “설마, 설마의 역사의식”이 또 다시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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