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계정 찾기 다시 시도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캐나다 加人 강신봉

samkang39
CC4D997A-BE4C-4C6E-9970-4F8B74E5DA58
54801
Y
메뉴 닫기
오늘 방문자 수: 10
,
전체: 32,175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카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카나다사장, 전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카나다문협회원.현 GTA한가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메뉴 열기
samkang39
강신봉
66825
7829
2018-07-16
‘설마’의 역사 500년 (24)-6.25 남침 발발(1)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을 하고, 9월 9일에는 북한에 인민공화국이 건국함에, 약 3년간 신탁통치를 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1949년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반도는 우리 민족끼리 순탄한 길을 갈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하나 38선 이북에 수립된 김일성 정부는 그것이 아니었다.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는 국제공산주의자들의 계산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1949년 미군이 완전 철수한 남한의 국방력은 거의 공백 상태였다. 이 때를 계기로 북한의 김일성은 남한을 공산주의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남한 정부는 그러한 눈치도 못 채고 미군들의 철수를 멀건이 처다만 보고 있었다. 설마 북한이 그렇게 빨리 처내려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우리 역사의 “설마” 고질병이 되살아 났다.


 하지만 한반도에 국제공산주의로 통일을 하고 싶은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한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48차례나 스탈린에게 무기를 대 달라고 졸라댔다. 드디어 김일성은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의 비행기, 탱크, 각종 화포 등 막강한 무기 지원의 약속과 더불어 남침전쟁을 허락 받았다.


 미군이 철수하고 국방력이 텅 비어 있는 남한을 공산주의로 해방시키겠다는 김일성의 꿈은 충분한 실현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1949년, 중국 모택동은 중국을 다 통일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하였다. 


대만으로 도망을 친 장개석 군대를 쳐부수기 위하여 팔로군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인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약 5만 명의 특수 병력을 모택동은 북한으로 귀국시켜, 김일성을 돕게 하였다. 


중국에서 전쟁을 마치고 북한으로 귀국한 이들은 아주 막강한 실전경력의 인민군이 되었다. 결국 이들이 6.25전쟁을 일으키는 선봉군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 북한의 전 인민군에게, 38선을 넘어 일제히 남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바로 그 전날 남한의 국방군은 전군의 반 이상이 주말외출을 나갔고, 육군본부에서는 장성급의 큰 파티가 있었다. 


육군본부의 장성급 중에는 북한의 스파이 역할을 하는 첩자가 있어서 그렇게 무력화 공작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 아주 무력화된 남한의 군대는 소련제 탱크와 장갑차와 전투기로 중무장한 인민군을 대항할 수가 없었다.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내려와 3일만에 서울을 장악하고 달포 만에 남한 전 국토의 90%를 차지하였다. 남한정부는 낙동강까지 후퇴를 하여 마지막 숨을 거둘 태세에 이르렀다. 
  
 소련제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북한 인민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애치슨 국무장관의 비밀 문서에 의하면 이승만 정부가 몰락을 하면 미국은 이들을 실어다가 태평양 가운데에 있는 황무지 웨스트 싸모아 섬으로 옮겨 그 곳을 개척하며 농사를 짓고 살게 해주기로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번에도 우리 나라를 버리지 아니 하시고 UN군의 참전이라는 아주 특별한 기회의 문을 열어 주심으로, 대한민국을 구제하신 것이다. 참으로 기이하고 감사한 일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66737
7829
2018-07-09
‘설마’의 역사 500년-신탁통치와 남-북에 다른 이념국가 건국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일본이 패전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한반도는 38선으로 남북이 갈리어 두 쪽이 났다. 미국과 소련 양대 강국이 한반도를 반쪽으로 나누어 각각 3년간 신탁통치 군정을 실시하였다. 


통일이냐 분단이냐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은 남과 북을 오가며 안간힘을 다 하였으나, 강대국들의 언덕을 넘을 수가 없었다. 민주주의 – 공산주의 각각 다른 이념의 나라가 한반도에 건국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는 세계 역사의 이념전쟁 격전지로 변모하였다. 


 미국은 1945년 8월 13일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소련군의 한반도 전역 점령을 막기 위하여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하고 이를 소련에 통고하였다. 소련군은 동년 8월 21일 원산에 상륙, 평양에 소련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미군은 9월 8일에 인천항을 경유, 서울에 진주하였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개국 외상회의가 개최되었으며 미국의 제안으로 한반도에서 신탁통치 실시를 결정하였고,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합의문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신탁통치를 포함한 한국문제 토의를 위한 1946년 1월 16일부터 2월 5일까지 예비회의, 3월 20일 덕수궁에서 본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진전 없이 5월 6일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였다.


이듬해인 1947년 5월 21일 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으나 협의대상 단체 선정문제를 놓고 양측의 의견이 맞서고 2차에 걸친 공동위원회는 결국 1947년 8월 12일 결렬되었다.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선(先) 정부 수립•후(後) 외국군 철수를 주장한 미국과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소련이 날카롭게 대립하였으며,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양 결의안을 놓고 토의한 결과 소련의 반대결의안을 부결시키는 대신 미국 측의 제안을 찬성 43표, 반대 6표, 기권 4표로 채택하였다.


결국 1947년 10월14일 제2차 112번째 국제연합 총회에서 찬성 43표, 기권 6표로 결의안이 가결됨으로써, 1948년 3월 31일 안에 UN한국임시위원단(UNTCOK;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의 감시하에 한국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호주•캐나다•중화민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공화국 등 9개국 대표로 구성된 'UN한국임시위원단'을 발족시켰다. 


1948년 1월 12일 서울 덕수궁에서 첫 총회를 가지고 그들의 임무에 착수 하였으나, 1월24일 동 위원단의 북한 입장이 소련군정당국에 의해서 거부되자 소총회에 이를 보고하였다. 소총회는 2월 26일 동 위원단이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 그 과업을 계속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단독선거를 저지하고 통일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대책을 논의한 회담을 말한다. 1948년 4월 19일부터 시작된 이 회의는, 김구, 김규식 및 김일성, 김두봉과 같은 남북의 명망가들이 다수 참석하여 그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 듯하였으나 결국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대한민국 건국

 


UN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감시 아래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었다. 제헌국회 총선거: 총 의석수 198석. 1948년 5월 31일 월요일 아침 열시가 조금 지난 때, 국회의사당(중앙청 홀)에 모인 198명의 제헌의원들은 제1차 회의에 들어갔다. 국회선거위원회 사무총장 전규홍(뒤에 국회사무총장)의 성원 보고에 이어 노진설 국회선거위원장(뒤에 심계원장)이 최고연장자인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추대할 것을 제의하자 의원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이승만은 "나는 먼저 우리가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 이승만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신익희를 부의장으로 선출하였다.


 6월 초, 국회헌법기초위원회에 헌법 초안이 제출되었다. 헌법 초안은 이승만도 포함한 모든 정파들이 동의한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는데, 6월 15일 이승만이 돌연 기초위원회에 나타나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7월 17일 헌법을 제정, 공포하였으며 7월 20일 제헌국회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에 의한 제1대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 후보를 초대 대통령으로, 이시영 후보를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한 김구, 김규식은 불참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8월 15일 정부를 구성하고 대한민국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이와 함께, 이승만은 제1공화국 제1대 대통령 취임식을 치렀다. 이로써 미군으로부터 권력을, 임시정부로부터 한국인의 법률상 주권(主權)을 넘겨 받았다.

 


북한에 인민공화국 건국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반도(조선반도)는 북위 38도를 경계로 이북 지역을 소련군이 맡아 군정을 실시하였으며, 1946년 2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여 건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48년에는 조선반도 총선거에 기초하여 김일성을 수상, 박헌영•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하여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조선로동당, 천도교청우당, 조선사회민주당이 있는 형식상의 다당제 체제이지만, 사실상 조선로동당의 1당 체제이며, 특히 국가주석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 그리고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은이 차례로 세습 집권했다. 


현재 내세우는 정치이념은 주체사상과 선군정치(先軍政治•군이 앞장서는 정치)이다. 주체사상은 1972년 사회주의헌법 개정에서 최초로 등장하였고, 1992년 4월 헌법 개정 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삭제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서 독자적인 사회주의 체계를 마련했다. 


1998년 사회주의헌법 개정 때 공산주의 문구를 전부 삭제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국방위원장이 자국의 실권자임을 명시하였다. 2013년 6월에는 헌법이나 노동당 규약보다 상위 규범인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39년 만에 개정하면서 공산주의 강령을 삭제하고 주체사상으로 대체하였으며, 김일성 가문의 '백두 혈통' 계승을 명문화하였다.


설마 한반도의 운명이 외세에 의해 이렇게 꼬여갈 줄을 누가 알았으랴! 남북에 세워진 두 국가가 서로 한 피의 형제국이 아니라, 철천의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이는 비극의 역경이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66627
7829
2018-06-28
‘설마’의 역사 500년(22)-8.15 해방~남북 분단(2)

 

(지난 호에 이어)


(1)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


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은 나치 독일 항복 후 1945년 7월 17일~ 8월 2일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 정상이 모여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처리를 결정하기 위한 회담이었다. 회의 끝에는 포츠담 협정이 책정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고, 합의 내용은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으로 공포되었다. 이 선언은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화민국, 소련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발표했다.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영국의 수상인 처칠, 중화민국의 총통인 장제스가 회담에 참여하여 선언에 서명하였고,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참전과 동시에 이 선언에 참가하였다. 


선언의 요지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이며, 그 내용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그 중에 우리가 한반도 영토를 되찾을 수 있는 내용은 포츠담 선언 제8항 “카이로 선언의 실행과 일본 영토의 한정”에 명시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묵살했고, 이에 미국이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동시에 참전하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8월 폭풍 작전). 상황이 불리해지자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에 2차 대전은 종전되었다.


중국 대표 장제스는 중일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독일 영토인 포츠담까지 가기엔 무리라고 판단, 이후에 서명한다는 양해를 얻어 불참했다. 이 때문에 포츠담 회담은 미-영-소가, 회담 중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미-영-중의 서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에서는 2차 대전이 5월 9일 독일의 항복으로 종결됐지만, 일본은 패전이 분명한 상황에도 1억 총옥쇄(일본 제국이 전 국민을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에 총동원하기 위해 사용하던 악명 높은 1억 옥쇄(一億玉碎)는 본토 일본인들만의 죽음이 아닌 조선인, 대만인 모두의 죽음을 의미했다)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지속했고, 이런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유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다. 물론 눈치 없는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한 큐에 거절했고 그 결과는 인류 역사 최초의 핵무기 실전 투입이었다. 


 (2)북위 38도선으로 한반도 분단


 38선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 위해 그어놓은 군사분계선이다. 삼팔선을 확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기관원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소련군이 8월 8일, 폭풍작전을 개시한 후, 3부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 Dunn)은 1945년 8월 11일에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이후 주한미군사령관 역임) 대령과 미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이후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 중령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고, 이 안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삼팔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이 제안하자 소련은 별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1945년 8월 23일 개성시까지 내려갔던 소련군은 9월 초에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1953년 7월 27일 발효된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은 위도상 북위 38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만, 38선과 비교해 서쪽 경계가 남하하였고 동쪽 경계가 북상하였다. 


38선(1945.9.2 - 1950.6.25)과 현재의 군사분계선(1953.7.27 이후)은 다르지만, 한반도 분단에 있어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크고, 분단의 직접적 원인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군사분계선을 삼팔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설마 한반도가 이렇게 두 쪽이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분단의 결과는 지금까지도 해결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비극을 안겨 준 것이다. 힘 없는 민족의 설움이다. 힘을 키워야 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66570
7829
2018-06-25
‘설마’의 역사 500년(21)-8.15 해방 , 남북 분단(1)

 

 
 

▲얄타 회담에 모인 3국 수뇌들(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1945년 8월6일과 9일, 미국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졌다. 그리고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횡재를 맞았다. 해방이 된 것이다. 사실, 이 축복은 우리 민족이 수고를 해서 해방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해방 며칠 전까지도 이러한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내려준 특별한 축복이었다. 해방은 되었지만 나라를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는 38도선 두 쪽으로 나뉘어 미국과 소련의 군인들이 지배하는 군정이 시작되었다. 


 해방이 된 이후 3년간 남한에서는 미국의 군정, 그리고 38선 이북에서는 소련의 군정이 실시됐다. 그러다가 1948년 남북에 각각 이념이 다른 국가가 수립된 것이다. 남한에는 그 해 8월 15일, 그리고 북한에는 9월 9일이 두 나라의 합법적인 건국일이다. 


한데 어떻게 해서 38선으로 한반도가 두 쪽으로 갈리고 남과 북에 서로 다른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는가? 그 뿌리는 우리의 의지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최고 이념이라고 기치를 내건 소련, 양대 이념세력 속에서 찾아 보아야 한다. 


당시 우리는 일제의 속박에서 갑자기 해방을 맞이 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대처능력이 없었다. 자체적으로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망명정부였기에 힘의 실세가 없었다. 남과 북이 갈라진 과정에는 미-영-중-소 4대 강대국들의 흥정이 있었을 뿐, 통일된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우리 민족의 의지는 반영되지 않았다.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나기 전에, 그 4대 강국은 전후 국제적 처리문제를 놓고 진지한 논공행상의 회담을 3차례 개최하였다. 그 최종적인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는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지는 운명선이 결정된 것이다. 


(1)카이로 회담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은 1943년 11월 27일 미?영?중,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5일간에 걸친 회담에는 루스벨트?처칠?장제스가 각기 미국, 영국, 중국을 대표하여 참가했으며, 회담 결과 발표한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했다. 


또한 회담에서 연합국은 승전하더라도 자국(自國)의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키로 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결의를 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포츠담 선언에서 재확인됐다.


카이로 선언 주요 내용 - 각 군사사절단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정지시키며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을 속행하고 있는 것으로, 위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또 영토를 확장할 의도도 없다.


위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이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축출될 것이며, 앞의 3강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행동을 속행한다.


(2)얄타 회담


 얄타 회담(영어: Yalta Conference)은 1945년 2월 4일부터 2월 11일까지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들이 모여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무렵, 주 적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가 항복을 하고 나치 독일이 패전할 기미를 보이자, 연합국의 지도자들이 나치 독일의 그 후를 논의하기 위하여 크림반도에 위치한 얄타에 모여서 회담을 하였다.


각국 수뇌는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비에트 연방의 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이다.


이 회담에서 3국 수뇌들은 패전 후 나치 독일을 소련?미국?프랑스?영국 이렇게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웠으며,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하여 최저 생계를 마련해 주는 것 이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또 나치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하거나 몰수한다고 선언하였으며, 전쟁의 주요 전범들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하였고, 전후 배상금에 대한 문제는 위원회를 구성해 위임하기로 하였다.


또한 이 회담에서 폴란드에 대해서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서 규정한 폴란드 동부 영토 대부분을 소련 영토에 병합하고, 폴란드에게는 동독의 일부 지역을 대신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각각 폴란드 동부 영토 일부를 얻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66496
7829
2018-06-16
‘설마’의 역사 500년(20)-왜정 36년, 일본의 착취

 

 

1910 – 1945, 왜정 36년 동안 일본은 우리 조선에서 많은 물자와 인력을 수탈 착취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정신대, 대동아전쟁 징병, 보국대 등 필요에 따라 이용하였고, 때로는 인간생체실험 등 우리의 생명을 실험 자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설마, 설마 하다가 반만년 사직을 빼앗긴 대가는 참으로 참혹하였다. 


1. 동양척식주식회사 - 조선의 경제독점과 토지 및 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일본제국이 설립한 국책회사이다. 이는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뜬 식민지 수탈기관으로 제정한 동양척식회사법에 근거하여 세워진 회사이다. 


을사보호조약에서 한일합병을 음모하던 1909년 1월부터 대한제국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모든 소유권은 일본인에 한하며, 활동지역은 조선에서 만주까지 확대 되었고, 이후 일본군의 점령지에 따라 타이완, 사할린, 남양군도로 확장되었다. 


세부사업은 (1)농업 토지의 매매, 임차, 경영, 건물의 건설 및 매매, 대차 등이었는데 이는 일본 소작인들에게 한반도 이주를 유도하는 “동척농업이민계획”을 시행하여 조선 각지에 일본인 촌을 세워 나가는 일이었다. 


(2) 1916년부터는 일본의 식량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조선에서 “추수공출제도”를 실시하여 조선에서 쌀과 보리 등 곡식을 수탈해 갔다. (3) 1930년부터는 금융사업을 확장하고 식산은행을 수립하여 금전적 착취의 분야를 넓혀갔다.   2. 조선여자근로정신대 - 이는 일제강점 말기에 조직된 태평양전쟁 지원조직이다. 원래 정신대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여러 분야의 전쟁 지원단체에 붙어 사용되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전쟁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된 것이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미 특별한 법적 근거도 없이 실시되고 있던 조선의 여자근로정신대는 1943년 8월 23일에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면서 합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고 공식적으로 출범되었으나 실제로는 훨씬 그 전부터 실시되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이 소속되었으며, 주로 군수공장 등에 투입되었다. 동원 방법은 (1)관청의 알선 (2)공개 모집 (3)자발적인 지원 (4)학교나 단체 등을 통한 다양한 방법이었지만, 취업이나 진학을 미끼로 여성을 유인한 후 노동 현장에 투입되었는데, 실로 강제노동이었다. 


이중 일부는 일본군 위안부로 발탁되어 전쟁이 진행되는 지역으로 보내져서, 군인들의 성적 만족을 채워주는 위안부로 강요되었다. 근로정신대의 명목으로 연행되어 간 조선 여인은 약 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의 문제는 현재까지도 깨끗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한일간의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세계의 인권단체들이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생존자들에게 다소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치부를 역사의 기록에서 은폐하려 하기 때문에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2011년 12월 14일 현재 전 세계의 인권 단체들은 이 문제를 놓고 1,000회 이상 시위를 벌였다. 일본인들은 개인적으로는 양심적이고 예의가 바른 것 같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추잡한 역사를 소유한 민족임을 여기에서 다시금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3. 일제의 지원병제도와 징집제도 - 일본에 의한 특별지원병제도는 1938년 2월 2일 칙령 제95호로 공포되어 그 4월 3일부터 시행되었다. 응시자격은 17세 이상 신장160cm 이상 소학교 졸업자 이상으로 되어있다. 이 제도는 1944년 4월 20일까지 6년간 시행되었다. 


미나미 총독은 훈시대로 “시행의 목적은 한반도의 일본화, 즉 내선일체의 구현”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선의 청년과 학생들에게 황국 시민의 자각이라는 목표로 활용되었다. 하나 말만 자원이지 실은 지방관청의 경쟁적 모집을 통해 입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지원보다는 강제성 징집제도였다고 볼 수가 있다. 


그리하여 1944년 5월부터는 노골적인 할당제 징집으로 모집되었다. 대동아전쟁 말경 조선인 지원병의 숫자는 1942년 4,500명, 1943년 6,100명이었다. 하지만 1944년과 1945년의 통계는 전쟁 말기로 강제 징집의 숫자가 수만 명으로 추산되나 기록을 감추었다.


4. 징용, 근로보국대 - 일본은 제2차 대전 중 전쟁체제에서 인력확보를 위해 많은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8년의 국사총동원법과 1939년의 국민징용령을 제정하였다. 조선인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지원형식을 취했지만 결국 모두가 강요로 이뤄졌다. 


마을 단위로 총동원연맹을 만들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조선의 농민들은 군대에서 사용할 벙커용 가마니 짜기, 탄피용 놋쇠 모집하기를 위하여 제기(祭器)를 다 탈취해 갔다. 이 연맹에 강제로 가입된 조선인은 약 458만 명이었으니 남자 세대주는 거의 다 포함되었다. 


 전쟁을 위한 노동자로 강제 징용된 사람들은 사할린, 일본 탄광 등지에서 강제 노역을 하거나 군속으로 차출되어 일본이 침략한 동남아 지역의 기지건설과 철도공사에 동원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의 원자탄 두 방을 맞고 갑작스럽게 항복을 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정착을 하다 보니 지금도 사할린과 일본 내에 우리 동포가 많이 살게 된 것이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한국정부에 따르면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 되었던 한국인 피해자는 103만 2,684명이라고 하였다. 


5. 창씨개명과 조선어 사용금지 - 1939년 11월 창씨개명법을 제정한 일제는 도청, 군청, 면사무소, 경찰서, 학교 등 공식 기구들과 친일 단체들을 총동원하여 이름을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할 것을 강요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케 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넋을 빼앗아 민족 자체를 말살하기 위한 책동이었다. 창씨 개명을 하지 않으면 조선 아동은 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으며 어른들에게는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이 정책에 반대하는 자는 비국민, 불온분자로 박해하고 징용과 보국대의 첫 번째 선발 대상이 되었다. 


 필자는 1945년 3월에 일본 소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한 두 달쯤 지나니까 선생님이 조선어사용금지 딱지를 30장씩 나누어 주었다. 학교 내에서는 일본말만 사용하여야 하는데 어쩌다 조선말을 하면 상대에게 그 조선말금지 딱지를 하나씩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그 표를 다 빼앗긴 학생은 방과후에 변소청소를 하거나 벌을 받아야 했던 일이 생각난다. 


 이상에서 열거한 이외에도 우리 민족이 36년간 일본의 박해를 받은 것은 부지기수이다. 이 시대에는 친일을 아니 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나라가 없어졌고, 모든 통치와 법률이 조선인들을 옭아매고 있는데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자기들의 잣대로 친일파 명단을 작성하고 함부로 조상을 욕되게 함은, 우리 문화와 전통적 정의로 보아 별로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지 않는다. 


역사적인 사실은 감정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불가분의 다른 면이 있고, 이분법적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사려해야 할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죄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고통과 아픔이었고 죽음이었다. 이제야 우리가 조상들의 무능을 탓하고 논공행상을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조상들이 생각한 설마 설마의 역사가 그러한 대가였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으면, 그것으로 역사를 공부하는 가치는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조상을 비난만 했지, 자신들의 평가가 착각이거나 과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니 마음이 더 아프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66378
7829
2018-06-13
‘설마’의 역사 500년 (19)-기미(己未)년 3.1운동(하)

 

(지난 호에 이어)


 (5) 제암리 학살 사건 -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장날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던 일본 군인들이 제암리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아 놓고 문을 잠근 채 불을 질러 23명이 타 죽었다. 


창문으로 넘어 나오는 사람들은 총칼로 찔러 죽였다. 동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시신을 거둘 형편도 못 되었는데 캐나다의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불에 탄 시신들을 거두어 뒷산에 묻어 드렸다. 지금은 23구의 합동묘로 잘 가꾸어진 관광묘소가 되었다. 

 

 

 

 

 


 캐나다의 이민 동포들은 이에 감사하여 ‘스코필드박사 동상건립위원회’(이사장 강신봉)를 만들고 한국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토론토동물원 한국정원 내에 235cm의 스코필드 박사 동상을 건립하였다.

 


(1) 평안남도 사천 학살 사건 - 1919년 3월 3일, 개신교 목사 한예헌과 천도교 교구장 이진석, 최승택, 김병주 등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헌병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73명을 학살하였다. 시위 군중은 헌병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 2명을 타살하였다. 


(2) 평북 정주군 곽산 학살 사건 - 곽산 그리스도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수천 명이 시위에 동참하자, 일제는 지도자 박지협을 죽이고, 체포한 100여명 중 50명을 잔인한 고문으로 사망케 하였다. 시위 군중에게 광견을 죽이는 쇠갈고리를 휘둘러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케 하였다. 


(3) 경기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 학살 사건 - 1919년 4월 3일, 시위군중이 화수리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순사 1명을 타살하자 11일 새벽에 헌병과 경찰들이 민가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을 총으로 쏘고 칼로 찔러서 수십 여명을 학살하였다. 40여 가구의 동네가 거의 다 불타고 18가구만 남았다. 


(4) 평남 맹산 학살 사건 -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사건 며칠 후 일본군이 기독교인 지도자 한 사람을 헌병분견소에 가두고 고문을 하자 군중들이 몰려와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자 이들을 분견소 마당으로 끌어들인 후 문을 잠그고 60여명을 총살한 사건이다.


(5) 대구학살 사건 - 대구에서는 2만3천명이 시위를 했는데 113명이 총살되었고, 87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김용해 부자가 투옥되었는데 며칠 후에 모두 사망하였다. 


(6) 경남 합천 학살 사건 - 3월 16일, 야로면 주민들과 해인사의 승려 등 1만명이 시위를 계속하였는데, 3월 19일에 5명 체포했다. 22일에는 3만 여명이 시위를 하였는데 일본군의 발포로 42명이 사망하고 100여명 부상, 같은 날 초계면에서도 8,000명이 시위를 하였는데 발포로 5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7)남원학살 사건 - 1919년 4월 3일, 800여명이 모여 식수기념행사를 하고 19개 면장 등이 만세를 선창하고 시위를 시작, 이 과정에서 일본군의 발포로 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20여명이 체포되었다.


(8) 익산 이리 장날 만세운동 - 기독교인인 군산 영명학교 교사 문용기가 1919년 4월 4일 장날을 이용하여 300여명이 시가행진을 하니 그 수가 점점 늘어나 1,000명에 이르렀다. 일제는 이에 소방대원과 농장원 수백 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곤봉 쇠갈고리 등으로 시위대와 대치했다. 문용기가 오른 손에 태극기를 들고 연설을 하자 헌병이 칼로 오른 팔을 베었다. 그는 다시 왼팔로 태극기를 들고 연설을 계속하니 왼팔도 베어버렸다.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만세를 부르니 헌병은 다시 그의 몸을 칼로 난자하여 현장에서 순국했다.  


(9) 군산 3.5 만세운동 - 전북 군산에서 영명학교 출신 김병수가 민족대표 33인 중 이갑성과 접촉하여 독립선언서 20장을 받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군산의 영광여학교, 구암교회, 시민 등 500여명이 3월 5일에 시위를 시작함에 그 수가 3만 명으로 불어났다. 일제의 폭력진압으로 53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실종되었으며 195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는 3.1운동이 벌어진 후 최초로 한강 이남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이기에 그 의의가 크다. 


(10) 만주 용정 만세운동 - 만주에서의 대표적인 시위는 3월 13일 용정에서 3만 여명이 참가한 시위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쳤는데, 시가행진을 하자 중국군대가 시위자들에게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3.1운동을 차단하기 위하여 심양에서 조선인회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조선인과 일본인과의 차별철폐를 요구하였다.


3.1독립운동 이후 일본정부는 조선통치 방식을 무단정치에서 회유정치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 결과 다소의 단체활동 및 언론활동이 허가되었고, 기초적인 초등교육이 확대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 부드럽게 하는 척하면서 친일파를 양성하여 조선민족의 분열을 조장하였고, 일본정책에 동조하게끔 모든 회유책을 동원하였다. 


3.1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한민족의 일치단결된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은 이러한 우리의 뜻을 받아들여 대한민국 수립과 독립국가로 인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오랜동안 설마의 역사에 취해 있던 우리 민족이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이 3.1운동이다. 그 때에 다시는 그러한 설마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많은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삼일절 노래


 기미녀 3월 1일 정오 /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 태극기 곳곳마다 / 삼천만이 하나로 / 이 날은 우리의 의요 / 생명이요 교훈이다 / 한강물 다시 흐르고 / 백두산 높았다 /선렬아 이 나라를 보소서 /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66280
7829
2018-06-05
‘설마’의 역사 500년(18)-기미(己未)년 3.1운동(상)

  

 우리 민족의 약점 중의 하나는 사후약방문(死後藥房問)이다. 죽은 다음에 약방을 찾는다는 말이다. 나라가 죽은 지 9년이 지나서 약방을 찾은 것이 1919년 3월 1일, 소위 3.1운동이다. 왜 죽기 전에 약방을 찾지 못하였는가? 그것을 알았으면 지금 이 글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는 반드시 고쳐야 할 고질병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같이 나라를 지키는 일에 사전약방문(事前藥房問)을 하였다면 을사보호조약이나, 한일합병이나, 왜정 36년이나, 3.1운동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후약방문마저도 아니 하였다면 오늘날 우리 나라와 민족은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3.1운동이란 사후약방문을 한 그 수고를 깊이 고려하시어 우리에게 8.15해방이란 기적을 주셨고, 다시 한 번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기회를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그 하나님의 축복을 만끽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1910년에서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36년간은 우리 민족이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수치와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을 겪었던 시기였다. 한일합병을 한 이후 일본은 무단정치를 펼쳐 무자비하게 우리 민족을 탄압하였다. 


(1)조선인 민족자본 성장억제정책, (2)농민들의 토지몰수 정책, (3)조선인 노동자들의 저임금 차별정책, (4)농산물 착취정책, (5)징병 징용 정신대등 인력강제동원정책, (6)조선문화말살정책, (7)창씨개명과 한국언어금지 등 내선일체정책으로 우리는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일본을 위한 종살이 국민으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괴로움과 아픔을 당하는 만큼 우리 민족은 정치적 사회적 의식이 깨어나 자아의식이 고취되었고, 더욱이 미국대통령 윌슨의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14개평화원칙”에 의거한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우리의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불길을 댕기자 항일운동은 삽시간에 거국적인 운동으로 번져 나갔든 것이다. 


손병희를 대표로 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지도급 인사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마침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국장)이 1919년 3월 3일로 결정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 3월 1일 정오를 기해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인쇄물을 살포하고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또 각 지방에도 미리 조직을 짜서 독립선언서와 함께 운동의 방법과 날자 등을 비밀리에 전달하여 두었다.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에 대한 통고문, 미국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낼 의견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비용과 인쇄는 천도교측이 맡아, 2월 27일 밤 보성인쇄소에서 21,000장을 인쇄, 은밀히 전국 주요 도시에 배포하였다. 


손병희 이하 33인의 민족대표는 3월 1일 오후 2시 정각에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이 독립선언서의 낭독을 끝내자 만세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고하여 자진 체포 당했다.


 한편, 파고다공원에는 5,000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나섰다. 이들의 시위행렬에 수만 명의 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서울시내는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게 되였다. 


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오후 6시경에는 진남포, 선천, 안주, 원산, 함흥 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다음 날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이 전개 되었다. 서울에서는 3일 날 국장 당일에만 잠잠했을 뿐 매일 가두시위가 벌어 졌으며, 학생은 휴교, 상인은 철시, 노동자는 파업, 관리는 퇴직으로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 독립운동은 약 2개월 가량 계속되었다.


 이에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 비무장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군중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 부상, 투옥이 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화수리, 정주, 맹산, 강서, 대구, 밀양, 합천 등 많은 곳에서 일제에 의해 잔인한 집단 학살이 저질러지고, 유관순의 참살 등이 자행되었으며, 민족대표를 위시한 지도자 47명은 내란죄로 기소되었다. 


전국적 시위운동 상황의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측 발표)


 총 집회: 1,542회, 총 참가인원: 202만3,089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 2,770명, 불에 탄 교회: 47개소, 불탄 학교: 2개교, 불탄 민가: 715채 
이러한 거국적 시위로 말미암아 일제는 무단정치를 끝내고, 조선사람들을 달래야 한다고 교활한 문화정치가 등장하게 되었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고, 해외 무장독립운동의 촉진,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및 반식민지 민족운동 등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무저항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지역의 민족운동을 촉진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당시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있던 사건 중 중요한 몇 곳을 소개한다. 


(1)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 1919년 4월 1일(음 3월 1일), 천안 병천시장에 있던 3,000여명의 군중들이 일시에 독립만세를 부르니 경찰의 총검에 의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 총으로 쏘아 죽이고 그의 두개골을 박살을 냈다. 


비보를 듣고 달려온 노모가 시신을 안고 통곡을 하자 노모마저 칼과 창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 19명이 죽었다.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당하고 투옥되었다. 

 

 

  

 

 

(2)평남 강서군 사천장터 시위 -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약 3,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사천시장 방면으로 시위행진을 벌였다. 사천지구 헌병대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하였다. 헌병대 주재소장 사또는 한국인 헌병보조원 강병일, 김성구, 박요섭 등과 같이 수십 명을 살상했지만 시위대의 돌팔매를 맞아 그 자리에서 함께 죽었다. 


(3)경남 창원의 삼진의거 - 1919년 3월 28일, 4월 3일. 제1, 2차로 두 차례에 걸친 삼진의거는 창원일대의 연합 대규모 시위였다.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한 뒤 시골에 내려온 변상태씨가 진전, 진북, 진동, 3개 면에서 동조인사들을 모아 3,000여명이 시위를 벌였는데 헌병대와 충돌을 하여 5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66066
7829
2018-05-25
‘설마’의 역사 500년(16)-한일합병(상)

 

  

1910년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이다. 반만년 역사의 사직이 완전히 끝이 난 날이다. 한일합병의 역사는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요, 무능의 소치다. 외침에 의하여 빼앗긴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나라를 넘겨 주었으니 천지신명 누구에게 이 한을 하소연하고, 찢어지는 가슴을 위로 받을 수가 있겠는가? 


못난 민족, 자괴감도 망각한 민족,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일본을 외면시 하고 증오하고 있지만, 욕하고 외면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 날을 철저한 귀감의 역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1910년 한일 합병: 절차상으로는 우리 조정의 매국노 대신들이 자진 납부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일제가 무력으로 한일합병을 선언한 것이다. 사직 519년을 이어온 조선왕조는 이렇게 아무 힘도 없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설마 설마 하던 조선의 역사는 이제 설마를 생각할 기력도 없이 쓰러져 간 것이다.


여기에서 한일합병 조약전문과 매국노의 명단과 그들이 일본 천황으로부터 받은 은급 등의 내용을 소개한다. 


 한일합병조약 전문(韓日合倂條約 全文)


 한국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에 합병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을, 일본황제 폐하는 통감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각각 그 전권위원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케 한다.


1)한국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
2)일본국 황제폐하는 앞 조항에 기재된 넘겨준다고 지적한 것을 수락하는 동시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3)일본국황제 폐하는 한국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서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받도록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연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4)일본국황제 폐하는 앞의 조항 이외에 한국의 황족 및 후손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받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5)일본국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준다.
6)일본국 정부는 앞에 지적한 병합의 결과 전 한국의 통치를 담당하며 이 땅에서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변과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 주는 동시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7)일본정부는 성의 있게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8)본 조약은 한국황제 폐하와 일본국황제 폐하의 결재를 받을 것이니 공포하는 날로부터 이 조약을 실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이름을 쓰고 조인한다.


실로 이상의 8가지 조항을 만든 것은 1910년 8월 22일이었다. 일주일간 뜸을 들이며 물정을 살핀 다음 8월 29일에 공포를 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이렇게 강압에 의하여 억울하게 맺어진 합병조약이 부끄럽고 불법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우리는 8월 29일을 <국치일>이라 명명하였고, 그 조약을 <늑약>이라고도 칭하여 왔다. 그 당시에 매국 늑약을 위하여 앞장을 섰던, 경술국치의 국적(國賊) 8명은 다음과 같다.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 일본 제국은 실제 병합 일년 전인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조선병합의 방침을 확정해 놓았으며, 조심스럽게 국제사회의 눈치와 조선정부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에 앞서 송병준은 1909년 2월에 일본에 건너 가서 매국흥정을 벌였다.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에게 “당장합병”을 역설한 바 있었으나 일본정부는 이완용과 송병준을 경합시켜 일본정부에 충성도를 높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제 나라 팔아 먹기에도 경쟁을 한 이 자들,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해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일본국 천황폐하와 정부는 매국 역적들에게 합병조약 제 5조와 7조에 의거하여 높은 지위와 많은 은급을 내려 주었다. (이하 하사금은 1910년도에서부터 1990년도까지의 누진이자를 가산하여 대략적으로 계산한 것임- 1990년도 기준액) 

 


1)이재면 - 대원군의 장손, 고종의 형으로 궁내부대신 166억원
2)이완용 - 백작 벼슬을 하사 30억원
3) 이지용 - 백작 벼슬을 하사 20억원
4)송병준 - 자작 벼슬을 하사 20억원
5)고영희 - 자작 벼슬을 하사 20억원
6)이재각 - 후작 벼슬을 하사. 왕족 출신으로 33억6천만원
7)이재완 - 후작 벼슬을 하사. 왕족 출신으로 33억6천만원
8)박영효 - 중추원 부의장. 조선귀족회 회장 56억원
9)윤택형 - 후작 벼슬을 하사. 순종의 장인 100억8천만원
10)이준용 – 신궁봉경회총재. 대원군의 손자 32억6천만원
11)이용구 - 귀족은 아님. 한일합병에 일조 20억원

 


이외에 많은 사람들이 일본정부의 관직을 차지함에 따라 은급과 토지를 별도로 하사 받아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이렇게 받은 재산은 일본이 자기들의 재산을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한국을 합병함으로 인해 몰수한 대한제국의 국가재산과 개인재산을 나누어 준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것이 일본의 것으로 몰수된 것이기 때문에, 실로 이는 우리 한국인에게는 소유권이 바뀐 것뿐이다.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제시대의 소위 “적산땅 소유권 문제”가 복잡하게 불거졌고 올바른 주인을 찾아야 한다는 재판은 지금도 끝이 나지 안았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66176
7829
2018-05-24
‘설마’의 역사 500년(17)-한일합병(하)

 

(지난 호에 이어)
합병 이후, 조선 백성들은 일본천황을 군주로 모셔야 하는 의붓자식이 되었고, 일본 국민들의 종살이를 하여야 했다. 그러나 왜 나라가 없어졌는지, 어떻게 해서 의붓백성이 되었는지, 그 억울함을 소리치며 할복자살을 하는 이는 없었다. 


아무리 시시해도 내 나라가 있을 때에는 억울한 일이 있으면 소리칠 곳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도 아니었다. 말 못하는 벙어리의 냉 가슴속에서 그저 울분만 쌓이고 쌓여갔다. 나라를 빼앗긴지 9년, 1919년 3월 1일 정오, 우리 민족의 울분은 드디어 폭발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아무도 이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을 기억하려 들지 아니한다. 매년 8월이 되면 아프고 부끄럽고 쓰라린 이 비극의 날을 기억하지 아니 하고, 8.15경축 행사만 벌인다. 때문에 젊은이들은 역사를 배워도 아픔의 뉘우침을 모르고, 반성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해방이 된 기쁨을 축하하는 일에만 취해서 정작 아픔을 되새겨야 하는 비극의 역사는 뒤안길에 묻혀버렸다. 역사를 공부하는 의미도 목적도 잊어버린 민족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1910년 8월 29일을 잊어 버린다면, 설마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한일 병탄 조약시 전권위임장에 관례와는 다르게 순종의 이름(?)이 서명에 들어갔다. 그러나 서명은 순종의 친필이 아니다.


창덕궁 대조전에 있는 흥복헌. 1910년 8월 22일, 이곳에서 한일 병합 조약을 찬성하는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일본 제국은 병탄의 방침을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명분을 얻는 일만 남겨두었다. 


 왜 경술국치를 망각하는가? 8월 29일을 ‘역사 반성의 날’로 정하자. “과거에 눈을 감으면, 미래를 볼 수 없다.”는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 중 하나다. 우리 민족은 반만년 역사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었고, 수치스러운 역사도 있었다. ‘자랑스러운 역사만’을 강조하는 것이 역사공부인가? ‘수치스러운 역사’를 기억함은 더 중요한 일이다.


12척의 배를 가지고 300여 척의 왜군과 싸워 이긴 이순신의 활약상, 북한의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밀렸던 상황에서 단숨에 전세를 뒤집어 놓은 인천상륙작전, 모두 자랑스러운 역사로 널리 알리고 강조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20여 일만에 한양이 점령당하였다는 사실, 임금인 선조와 관리들은 살길을 찾아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 등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민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겼고, 대통령과 정부의 주요 관리들은 국민들에게 남으라 하고 자신들만 도망친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국가를 유지 관리해야 할 책임자들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에 대해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1910년, 경술년 8월29일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날이다. 대한제국은 경술년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해서 이를 ‘경술국치’라고 한다. 대한제국은 조선에서 비롯되어 519년이 된 나라였다. 500여 년 역사를 가진 나라가 망하였지만, 망한 원인을 찾거나 반성하는 일에는 눈을 감고 있다. 아니 회피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역사공부를 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일제의 침략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국가의 운영을 책임진 군주와 대신들에게도 그 원인이 있고 큰 책임이 있다.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의 제5조는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는 내용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갖고 온 것은 4개조뿐이었다. 제5조는 대한제국 쪽에서 요구하여 들어간 내용이다. 국가의 주권을 빼앗겨도 황실만 안녕하고 존엄을 유지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백성은 버려도 된다는 것인가?


‘병합조약’도 다르지 않다. 8개조 중 제1조와 2조는 한국에 관한 통치권을 양여한다는 것과 양여를 수락한다는 내용이고, 제8조는 공포일로부터 시행된다는 내용이다. 나머지 5개 조항은 무엇 무엇을 해주겠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즉 황제•태황제•황태자를 비롯한 황실, 그리고 전•현직 대신들은 그 직위에 맞는 대우와 세비 등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일제는 이 약속을 지켰다. 이들에게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지급하였다. 황실과 대신들은 자신들의 신분보장과 대가를 받고, 500년이 넘는 나라를 일본에 팔아 넘긴 것이다. 


 해방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매년 8월29일이 되면 선언서를 발표하거나 기념식을 열었다. 국가의 치욕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다.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현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에서 제정하고 기념한 ‘3•1절’ ‘개천절’ ‘순국선열기념일’ 등은 모두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국치일은 기념하지 않고 있다. 잘못 됐다. 언제부터인가 역사에서 책임과 반성이 사라졌다. 500년 넘는 나라가 망했지만, 책임진 사람이 없다. 그 원인도 모른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해서 눈을 감고 있으면,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더 이상 눈을 감지 말자. 과거에 눈을 감으면, 미래를 볼 수 없다. 그래서8.29 국치일을 “역사 반성의 날”로 정해야 한다. 

 


 
<대한제국의 국권피탈 과정>


 1904년 2월 한일 의정서 
 1904년 8월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11월 제2차 한일 협약
 1907년 7월 한일 신협약
 1909년 7월 기유각서
 1910년 6월 경찰권 박탈
 1910년 8월 한일 병합 조약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65991
7829
2018-05-13
‘설마’의 역사 500년(15)-을사보호조약 , 고종의 하야(하)

 
 

(지난 호에 이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


 지난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전문)

 

 헤에그 만국평화회의와 고종의 하야


 을사보호조약을 1905년에 맸었으니 이제 고종황제는 일본정부의 손바닥에 들어 있는 공깃돌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국권을 행사함에 일본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하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이 조약의 체결을 무효화하기 위하여 1905년 11월 미국공사로 있던 헐버트씨에게 밀서를 보냈다. 하나 그 당시에 미국과 일본은 필리핀과 조선을 각각 하나씩 차지하기로 언약이 되어 있는 우방국이었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고종은 헐버트에게 호소문을 보낸 것이다. 오히려 엉뚱한 짓을 한 것이 일본정부에 들통이 났을 뿐이다.


1907년 6월, 네델란드 헤에그에서 세계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있었다. 비록 외교권을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에 빼앗겼지만, 고종은 대한제국의 억울한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하여 이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특사로 내정된 사람은 이상설과 이위종, 그리고 이준이었다. 


이들을 비밀리에 특사로 파견하면서, 고종은 다른 한 편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이들의 특사활동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특사들이 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하였지만,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밀사사건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갔다. 


 이 일의 실패에 격분하여 이준 열사는 현장에서 할복 자살을 하였다고 하였으나 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자살이 아니고 약 10여 일간 화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준 열사의 묘는 지금 네덜란드 헤이그에 우리의 사적지로 남아 있다. 


 이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세력과, 일본정부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그 해 7월 20일에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를 당했다. 곧바로 왕위를 왕자 척에게 물려주니 그가 27대 순종이다. 하나 모든 것이 강요에 의한 일이었기에 실제로 조선의 역사는 고종으로 끝이 난 것이고, 순종은 형식적으로 씌워진 임금이었을 뿐이다. 


일본은 순종을 일본으로 송치하여, 우리 조선 왕조가 마치 일본 왕조의 지파인 것처럼 역사를 조작하려 하였고, 방자여사와 결혼을 시켜 조선이 일본의 부마국인 것처럼 행세하게 하였다. 


 고종은 1919년 정월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일제의 독약으로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자 우리 민족은 일제히 격분하여 3.1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대한제국 고종황제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더보기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