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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加人 강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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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카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카나다사장, 전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카나다문협회원.현 GTA한가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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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강신봉
70503
7829
2018-09-13
‘설마’의 역사 500년(31)-반공포로 석방

 

 

 

 1951년 6월 18일, 반공포로석방은 미국측과 상의 없이 이승만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정한 역사적인 사항이었다. 미국측의 상당한 반발이 있었지만 휴전협정,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과 맞물려 있는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굳건한 뚝심과 탁월한 외교력의 발로라고 평가된다. 여기에 동아일보 2015년10월10일자 기사를 소개한다. 

 

 

 1953년, 반공포로 석방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막으면 행동 나설것” 
 美에 초강수, 美 합참 기밀문서로 본 당시 상황

 

 

1953년 6월 18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반공포로가 전격적으로 석방되었다. 미국은 반공포로의 강제 송환을 요구하던 북한을 의식해 휴전협상 결렬을 막으려고 반공포로 석방에 반대했다. 


1953년 6월 18일 오전 2시 10분. 논산, 마산, 부산, 거제도 등 한국의 4개 포로수용소에 있던 2만7388명의 반공포로(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공산군 포로)가 전격 석방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알리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단행한 결단이었다.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결코 휴전할 수 없다고 버티던 이 대통령이 취한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이었다. 결과적으로 휴전회담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한국 정부의 입지를 반전시키는 일대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동아일보가 단독 입수해 최초로 공개하는 미 합동참모본부의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일방적인 포로 석방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는 미국의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 “필요하면 전시작전통제권을 다시 한국으로 가져오겠다”며 당당하게 따졌다.


 휴전회담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미국은 결국 이 대통령의 뜻을 받아들였고 세계에서 가장 공고한 군사동맹으로 평가 받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태동하는 초석이 됐다.


1953년 5월 27일 한국 정부는 더 이상 휴전협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미국에 통보한다. 이틀 전 유엔군사령부가 한국에 있는 포로들을 즉각 석방하지 않겠다고 북한 측에 양보한 데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휴전협상 시작 당시 미국 중국 북한 대표와 함께 협상에 참여했던 한국은 결국 포로협상 진행 과정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면서 협상장을 뛰쳐 나온 셈이다. 


한국 정부가 문제 삼은 대목은 포로 중에 한국 출신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점. 1951년 12월 당시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던 포로 중에는 북한군이 남침해 내려오면서 강제로 끌고 간 한국 국민이3만 5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피해가 주는 교훈 

 


 3년여의 포화는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고, 그 폭탄은 세계 제1차 대전 때의 전체 소모량과 비슷하다고 한다. 10만 명의 미망인과, 2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약 45%의 공업시설이 파괴되었고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하였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북한인구의 11.1%에 해당하는 113만 명이 사망하였고, 남북한 양측을 합하면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미군은 5만4천명이 사망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운명이 어떠한 존재이었는가를 한 번쯤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1)전 후의 많은 문제점들이 우리 민족의 미래사를 가늠하여 준다는 것. (2)1949년 미군이 철수함으로 남한이 국방력 공백상태가 되었을 때 6.25전쟁이라는 사상 최대의 비극이 초래되었다는 것.
 (3)한반도는 세계의 이념대립의 각축장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3백만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것. (4)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에 의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벌써 없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것. 
 (5)중공군의 투입으로 거의 다 이루어진 우리 한반도의 통일이 깨어져버렸다는 것. (6)바야흐로 북한을 속국화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 정책이 앞으로 통일문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문제점. (7)오늘날 북핵 문제는 어떻게 풀려야 할 것인가? 하는 등등… 지금도 많은 사안들이 우리 민족의 운명을 혼미 속으로 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남한 국민들에게는 이제 설마 설마 하는 의구심도 공포도 다 귀찮아졌다. 전쟁불감증에 취해버렸기 때문이다. 전쟁을 생각하는 자체가 골치 아픈 일이다.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남한의 국민들. 오늘이 즐거우면 그만이지 내일의 전쟁의혹을 왜 걱정해야 하는가? 식량도 무기도 시원치 않은 북한이 무슨 능력으로 남한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설마 그것을 같은 민족에게 사용할 것인가? 세계 경제 10위권의 대한민국인데 뭘 그리 걱정을 한단 말인가? 


과연 남한의 정부나 국민들이 이렇게 방관을 하고 북한을 무시해도 괜찮은 것인가? 모두가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점들이다. 500년 뼛속에 도사리고 있던 “설마, 설마의 역사의식”이 또 다시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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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강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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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9
2018-09-02
‘설마’의 역사 500년(30)-인천상륙작전 1.4후퇴 휴전(3)

 
 
(12) 1953년 3월 5일(스탈린의 사망): 스탈린 사망으로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북한과 중국에 통보하면서 부상을 당한 포로들의 우선교환에 동의하였다. 


(13) 1953년 5월 30일(한미상호방위조약요구) :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공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이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작전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승만의 단독적인 반공포로석방은 한미방위조약을 성사케 하기 위한 압력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전문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서명, 1954년 11월 18일 발표) 

 


본 조약의 당사국은 모든 국민과 모든 정부와 평화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희망을 재인식하며 또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평화기구를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고 당사국 중 어느 일방이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고립하여 있다는 환각을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도 가지지 않도록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하여 그들 자신을 방위하고자 하는 공통의 결의를 공고히 한다.


또한 정식으로 선언할 것을 희망하고,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 조직이 발생될 때까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자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제 1 조

 


당사국은 관련될지도 모르는 어떠한 국제적 분쟁이라도 국제적 평화와 안전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하고 또한 국제관계에 있어서 국제연합의 목적이나 당사국이 국제연합에 대하여 부담한 의무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의 행사를 삼갈 것을 약속한다. 


제 2 조


당사국 중 어느 일방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정이 외부로부터의 무력침공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 당사국은 단독적으로나 공동으로나 자조와 상호원조에 의하여 무력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지속하여 강화시킬 것이며, 본 조약을 실행하고 그 목적을 추진할 적절한 조치를 협의와 합의하에 취할 것이다. 


제 3 조


각 당사국은 타 당사국의 행정관리하에 있는 영토 또한 금후 각 당사국이 타 당사국의 행정관리 하에 합법적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영토에 있어서 타 당사국에 대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제 4 조


상호합의에 의하여 결정된 바에 따라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許與)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제 5 조


본 조약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에 의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절차에 따라 비준되어야 하며, 그 비준서가 양국에 의하여 워싱턴에서 교환되었을 때에 효력을 발생한다. 


제 6 조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어느 당사국이든지 타 당사국에 통고한 일년 후에 본 조약을 종지시킬 수 있다. 


대한민국 전권위원 변영태
미합중국 전권위원 존 포스터 델레스 

 

 (14) 1953년 7월 27일(정전협정발효): 주로 개성과 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북한이 소련을 통해 정전을 제의하였고 UN측의 승인으로 정전이 발효되었다.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 3년 1개월 만에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지어졌다. 

 

 

 

 


그런데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전이 아닌 휴전으로 남아 있고, 아직도 DMZ휴전선에서는 수 십만의 정예군이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의 대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나라가 다시 하나가 되면 가장 먼저 없어지는 것이 비무장지대 일 것이다.
이후 남한과 북한의 군인들이 싸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기로 약속한 장소다. 
왜냐면 비무장지대는 전쟁으로 남북이 나눠지면서 만들어진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는 군대 시설이나 군인들이 거주할 수 없으며 이미 설치된 군대 시설도 없애야 했다.


우리의 비무장지대는 1953년 7월 27일 전쟁을 중지한다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결정되었다. 위치는 서해안의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강원도 고성에 이르는 총 길이 248km(155마일)의 군사분계선, 즉,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km, 총 4km를 뒤로 물러선 구역이다. 지도에서 보면 휴전선을 따라 띠 모양이다.


비무장지대는 유엔과 남북한 대표로 구성된 군사 정전위원회의 허락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때문에 40여 년 동안 거의 출입이 통제되었고 덕분에 자연상태도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멸종되어서 보기 힘든 고니와 솔부엉이 같은 야생동물과 희귀한 식물들이 남아있다.


비무장지대의 넓이는 얼마나 될까? 도로를 보면 노란색 중앙선을 중심으로 양쪽 가장 자리에 흰색 선을 그어 사람들이 다닐 수 없다. 비무장 지대도 도로와 비슷해서 가운데 중앙선이 휴전선에 해당하고 도로의 폭이 비무장지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휴전선은 휴전 협정에 따라 1292개의 푯말을 이어 만들어졌는데, 임진강 강변에 그 첫 번째 푯말이 있고, 동해안 동호리에 마지막 푯말이 세워져 있다. 즉 1번~1292번까지의 푯말이 휴전선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이어진 휴전선은 총 길이가 육지로는 248km, 바다로는 서해해상(NLL) 약 200km에 이른다. 


비무장지대에 관한 내용은 ‘정전협정 제1조 군사 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조항’에 따른 것으로, 이렇게 만들어진 비무장지대는 육지 면적을 기준으로 한반도 전체 22만 ㎢의 1/250에 달하는 총 907㎢ 면적을 차지하게 되었다. 폭이 넓기 때문에 비무장지대에는 6개의 강, 1개의 평야, 2개의 산맥이 지나고 있으며 그 안에 70개의 마을이 있었다.


남한의 경우 비무장지대보다 아래쪽인 휴전선 남쪽 5-20km 밖에는 일반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약 7억 평의 ‘민간인 통제선’이 있다.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정착해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으로, 비무장지대를 관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1954년 2월 미군 제8군단 사령관이 결정한 곳이다.
민간인 통제선은 총면적 1,528㎢에 달하며 비무장지대처럼 우리 땅임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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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강신봉
68301
7829
2018-08-23
‘설마’의 역사 500년(28)-인천상륙작전?1.4후퇴?휴전(2)

 

 

 

 

(지난 호에 이어)


 (4) 1950년 10월 20일(중공군의 참전): 한국군에 의하여 북진통일이 거의 성공적인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중공군이 개입하였다. UN군과 국군이 북진을 하여 올라 옴에 김일성은 황급히 모택동을 만났다. 


만일에 미군이 북한군을 섬멸하고 나면 여세를 몰아 중국도 공격할 것이고 그리 되면 대만의 장개석 군도 중국본토로 진격을 해 올 가능성이 짙다는 판단 하에, 모택동은 한국땅에서 미군과 싸워 북한을 구제하고 공산당의 보루를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판단을 하였다. 


당시 중국의 공산군은 장개석 군과의 오랜 내전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았기에, 국민들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어서 한국전 참전에 희망하는 의용군이 많았다(기록에 의하면 약 53만 명이라고 하였다).


또 소련은 중공군에게 많은 무기를 제공하였다. 중공군은 UN군의 화력과 공습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밤이면 이동을 하였고, 일면 한 밤중이면 산속으로 넘어와 꽹과리와 징을 울리며 우리 아군을 현혹하였다. 앞에서 쓰러진 자기 전우의 시체를 밟고 넘어 오고 또 넘어 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우리 아군의 숫자로는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5) 12월 4일(평양에서 철수): 우리 아군은 평양을 내주었고, 12월 9일에는 원산을 떠났다. 


(6) 12월14~24(흥남부두 철수): 동부전선에서 싸우던 아군 10만 명이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피란민 10만 명과 더불어 20만 명을 흥남부두에서 해상철수작전을 해야 했다. 이 해상 피란작전을 위하여 중공군의 남하작전을 지연시키고 있던 부전고원 지대의 7,000여명 UN군은 중공군의 공격과 극한의 추위로 인해 거의 전멸을 당하였다. 


흥남 철수 작전은 약 70만의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국 10(X) 군단과 대한민국 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이다. 


이 철수작전에는 약 200여 척의 민-군 선박이 동원되었다. 흥남에 쌓아 놓았던 폭약을 모두 폭파하였고, 군함에 실었던 트럭과 장갑차 등을 모두 바다에 던지고 약 10만 명의 피란민을 구제한 일은 길이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일이었다.


당시 흥남부두에 남아 아비규환을 하던 피란민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이 때에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들도 이 군함을 타고 거제도로 내려왔다고 했다. 이 피란작전을 총지휘한 메러디스 빜토리아호 선장 ‘레너드 라우’ 대령과 통역사로 일하던 현봉학 박사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이 피란작전 중에 선박에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들의 이름을 Kimchi #1, Kimchi #2 …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7) 1951년 1월 4일(1.4후퇴) : 중공군에게 밀린 아군은 1월 4일에 다시금 서울을 내주어야 했고,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전세를 재정비한 아군은 반격을 가하여 1월 14일에 다시 서울을 찾았다. 이러한 극렬한 전투로 말미암아 중공군은 10만 여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38선 부근으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머뭇거림으로 쌍방간의 희생자는 계속 늘어났지만 치열하던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면서 정전을 해야 한다는 설이 퍼졌다. 


 (8)1951년 2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38선은 북한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졌기에 북진만이 남아있다고 강력히 선언하며 미국에도 자기의 뜻을 재차 강조하였다. 


(9)1951년 3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은 한만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는 정전불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후 38선을 넘어 일진일퇴를 하던 전선에 소련군이 참여하였다. 그렇게 큰 변동이 없이 그 곳에 쌍방이 방어선을 쳤다. 그것이 오늘까지 남아있는 DMZ인 것이다.


(10)1951년 6월 9일(휴전협정회담): 1951년 6월 9일, 이승만은 정전을 결사반대 하였고, 6월 27일에는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하나 7월에 들어 서면서 정전회담이 개시되었다.


(11) 9월 20일(휴전조건) : 이승만은 정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가)중공군 철수, 나)북한무장해제, 다)UN감시하의 총선거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는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후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당년 5월에 이르러서는 포로교환문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합의에 이르렀다. 


한국전쟁 2년 동안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 되자, 중공군을 부담스러워 한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소련의 부분적 참전으로 말미암아 세계 여러 나라들은 한국전쟁이 머지 않아 세계3차 대전으로 번져갈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UN군과 중공군은 서둘러 이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정전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또 다시 갈라진 대로 정전을 하는 것을 극구 반대함에 UN여러 나라들로부터 인기를 잃었다. 그는 미국이 중국에 대하여 강력한 폭격과 대응조치를 하지 아니 하는데 대하여 불쾌감을 자아내곤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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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강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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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3
‘설마’의 역사 500년(27)-UN군 참전 현황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함에 주미한국대사 장면 박사는 다음날 즉시 백악관을 방문하여 해리 투루먼 대통령에게 미군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파죽지세로 남진을 하고 있던 북한군은 8월 3일, 낙동강에 이르렀고 대한민국의 영토는 90%가 인민군의 손에 들어 갔다. UN군의 지원이 없었던들 대한민국은 소멸되었을 것이다. 긴박하게 움직였던 UN의 상황을 통계자료로 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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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강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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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1
‘설마’의 역사 500년(26)-?6.25 남침 발발(3)

 

 

 

 

 (다음 호에 계속)


(2) 한편 한국정부는 전쟁이 발발하자 주미한국대사 장면과 서기관 한표욱에게 긴급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을 알렸고, 6월 26일 장면대사는 백악관으로 트루먼 대통령을 방문, 미군의 한국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즉시 UN의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한국문제를 건의 하였다.


(3) 6월 26일 4시에 UN의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 들여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중지와 38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0으로 가결하였다(이 표결에서 유고슬라비아는 기권). 미국과 UN은 이를 북한에 통고하였으나 북한은 이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4) 6월 27일 안보리는 다시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1(기권 2)로 결의 하였다.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은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남한에 대한 해,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문제가 발생하였다. 소련의 말리크 대표가 회의에 결석을 한 것이다. 안보리에서 미-영-불-소-중 상임이사국은 어느 누구든 한 나라만 반대를 하여도 모든 법안은 부결되게 되어 있는데, 소련이 마땅히 부결을 할 한국 파병안이, 그의 결석으로 인하여 일사천리로 통과한 것이다.


당시의 중국은 모택동 정부가 아니라 장개석 정부로 우리 편이었던 것이다. 설에 의하면 말리크가 복통이 나서 결석을 하였다고도 하나, 여하튼 그의 결석은 우리 한반도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이를 보고 우리는 천우신조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가 출석을 하였다면 한국전쟁은 완전히 적화통일이 되었을 것이고 남한은 없어졌을 것이다. 지금까지 UN이 전투병력을 결의하여 파병케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설마의 역사는 이렇게 천우신조에 의하여 아슬아슬하게 또 한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5) 6월 29일, 맥아더는 하네다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회원국이 UN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6) 7월 1일, 영국과 프랑스는 “UN군사령부의 설치와 UN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정부의 단일 지휘아래에 둔다”라는 공동결의안을 안보리에 제출하였다. 이 공동결의안은 7:1(기권 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16개국이 전투병력을 파견하게 되었다: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콜롬비아, 그리스, 필리핀, 에티오피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타이, 터키, 남아프리카연방.


 이러한 긴급파병문제에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군의 전설로 불리는 명장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중장 계급장을 떼고 중령으로 강등하여 대대장의 직함으로 프랑스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터키의 영웅인 <타흐신 야즈즈> 장군 역시 2개 여단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콜롬비아에서는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용병부대, 에티오피아에서는 황제의 특명에 의하여 정규군과 황제의 친위대 병력까지 합세를 했고, 뉴질랜드의 마오리족도 참전을 하였다. 


이들 중 어느 군대는 총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여 창과 화살을 가지고 오는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드디어 미군에게서 총을 지급받아 전투에 임하기도 하였다.


(7) 7월 10일, 미국대사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 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그리고 “침략자를 격퇴하는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북진통일론을 선포한 것이다. 이승만의 이 선언은 미국을 크게 놀라게 하여 애치슨 국무장관으로 하여금 주한 미국대사 죤 무초에게 긴급 지시를 내리게 하였다. 미국은 38선을 넘어서는 북진하지 않을 것이며 그곳에서 계속 방어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애치슨과 무초 대사도 이승만의 고집을 꺾지 못하였다.


 (8) 8월 1일, 안보리의 8월 의장국이었던 소련대표 <말리크>는 6.25전쟁이 남한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동안의 안보리 결의안들이 다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한국을 조종한 북침이라는 것이었다. 


소련은 이 전쟁에 전혀 참여한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총 한 자루도 도와 준 것이 없다. 이 전쟁은 한국인끼리의 전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역선전을 예상한 장면은 미국측 대표 오스틴과 짜고 한국전선에서 노획한 소련제 소총 한 자루를 가지고 와서 각국 대표들 앞에서 제시를 하였다. 소련제라는 철인이 찍힌 그 총으로 인하여 “소련의 불개입, 남한의 북침”이라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논파를 당하였다. 


(9) 8월 3일, 조선 인민군은 대구와 부산 가까이 쳐내려 왔다. 국토의 9/10를 점령하였다. 곧 각국에서 UN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정보를 받으며 미군과 국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강렬한 저항을 함으로써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 때에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은 다부동 전투에서 인민군의 침공을 처음으로 격퇴하고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며 UN군의 도착까지 시간을 버는 작전에 성공하였다.


(10) 9월 1일, 영국이 안보리의 의장국이 되었다. 옵서버로 참석한 장면 대사는 영국 대사 글랜드윈의 허락을 받아 참석하였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장면은 포효를 하였다. 


“그 동안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 말을 못하고 참아왔다.” 첫마디부터 소련을 공격하니 소련 대표 말리크는 규칙발언 이라면서 “도대체 저 자가 누구인데 무슨 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발언을 하는 것이냐? 저 자는 이승만 도당의 괴뢰”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미국이 조종하는 남한의 북침설, 한국민들끼리의 전쟁을 떠들어 댔지만, 다른 대표들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장 대사는 말리크에게 욕설을 취소하라고 항변하였다. UN에서 이러한 욕설과 항변이 있었지만 모든 결과는 그렇게 우리 뜻대로 착착 진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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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6
‘설마’의 역사 500년 (24)-6.25 남침 발발(1)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을 하고, 9월 9일에는 북한에 인민공화국이 건국함에, 약 3년간 신탁통치를 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1949년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반도는 우리 민족끼리 순탄한 길을 갈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하나 38선 이북에 수립된 김일성 정부는 그것이 아니었다.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는 국제공산주의자들의 계산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1949년 미군이 완전 철수한 남한의 국방력은 거의 공백 상태였다. 이 때를 계기로 북한의 김일성은 남한을 공산주의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남한 정부는 그러한 눈치도 못 채고 미군들의 철수를 멀건이 처다만 보고 있었다. 설마 북한이 그렇게 빨리 처내려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우리 역사의 “설마” 고질병이 되살아 났다.


 하지만 한반도에 국제공산주의로 통일을 하고 싶은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한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48차례나 스탈린에게 무기를 대 달라고 졸라댔다. 드디어 김일성은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의 비행기, 탱크, 각종 화포 등 막강한 무기 지원의 약속과 더불어 남침전쟁을 허락 받았다.


 미군이 철수하고 국방력이 텅 비어 있는 남한을 공산주의로 해방시키겠다는 김일성의 꿈은 충분한 실현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1949년, 중국 모택동은 중국을 다 통일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하였다. 


대만으로 도망을 친 장개석 군대를 쳐부수기 위하여 팔로군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인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약 5만 명의 특수 병력을 모택동은 북한으로 귀국시켜, 김일성을 돕게 하였다. 


중국에서 전쟁을 마치고 북한으로 귀국한 이들은 아주 막강한 실전경력의 인민군이 되었다. 결국 이들이 6.25전쟁을 일으키는 선봉군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 북한의 전 인민군에게, 38선을 넘어 일제히 남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바로 그 전날 남한의 국방군은 전군의 반 이상이 주말외출을 나갔고, 육군본부에서는 장성급의 큰 파티가 있었다. 


육군본부의 장성급 중에는 북한의 스파이 역할을 하는 첩자가 있어서 그렇게 무력화 공작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 아주 무력화된 남한의 군대는 소련제 탱크와 장갑차와 전투기로 중무장한 인민군을 대항할 수가 없었다.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내려와 3일만에 서울을 장악하고 달포 만에 남한 전 국토의 90%를 차지하였다. 남한정부는 낙동강까지 후퇴를 하여 마지막 숨을 거둘 태세에 이르렀다. 
  
 소련제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북한 인민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애치슨 국무장관의 비밀 문서에 의하면 이승만 정부가 몰락을 하면 미국은 이들을 실어다가 태평양 가운데에 있는 황무지 웨스트 싸모아 섬으로 옮겨 그 곳을 개척하며 농사를 짓고 살게 해주기로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번에도 우리 나라를 버리지 아니 하시고 UN군의 참전이라는 아주 특별한 기회의 문을 열어 주심으로, 대한민국을 구제하신 것이다. 참으로 기이하고 감사한 일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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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설마’의 역사 500년-신탁통치와 남-북에 다른 이념국가 건국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일본이 패전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한반도는 38선으로 남북이 갈리어 두 쪽이 났다. 미국과 소련 양대 강국이 한반도를 반쪽으로 나누어 각각 3년간 신탁통치 군정을 실시하였다. 


통일이냐 분단이냐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은 남과 북을 오가며 안간힘을 다 하였으나, 강대국들의 언덕을 넘을 수가 없었다. 민주주의 – 공산주의 각각 다른 이념의 나라가 한반도에 건국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는 세계 역사의 이념전쟁 격전지로 변모하였다. 


 미국은 1945년 8월 13일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소련군의 한반도 전역 점령을 막기 위하여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하고 이를 소련에 통고하였다. 소련군은 동년 8월 21일 원산에 상륙, 평양에 소련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미군은 9월 8일에 인천항을 경유, 서울에 진주하였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개국 외상회의가 개최되었으며 미국의 제안으로 한반도에서 신탁통치 실시를 결정하였고,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합의문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신탁통치를 포함한 한국문제 토의를 위한 1946년 1월 16일부터 2월 5일까지 예비회의, 3월 20일 덕수궁에서 본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진전 없이 5월 6일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였다.


이듬해인 1947년 5월 21일 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으나 협의대상 단체 선정문제를 놓고 양측의 의견이 맞서고 2차에 걸친 공동위원회는 결국 1947년 8월 12일 결렬되었다.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선(先) 정부 수립•후(後) 외국군 철수를 주장한 미국과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소련이 날카롭게 대립하였으며,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양 결의안을 놓고 토의한 결과 소련의 반대결의안을 부결시키는 대신 미국 측의 제안을 찬성 43표, 반대 6표, 기권 4표로 채택하였다.


결국 1947년 10월14일 제2차 112번째 국제연합 총회에서 찬성 43표, 기권 6표로 결의안이 가결됨으로써, 1948년 3월 31일 안에 UN한국임시위원단(UNTCOK;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의 감시하에 한국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호주•캐나다•중화민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공화국 등 9개국 대표로 구성된 'UN한국임시위원단'을 발족시켰다. 


1948년 1월 12일 서울 덕수궁에서 첫 총회를 가지고 그들의 임무에 착수 하였으나, 1월24일 동 위원단의 북한 입장이 소련군정당국에 의해서 거부되자 소총회에 이를 보고하였다. 소총회는 2월 26일 동 위원단이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 그 과업을 계속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단독선거를 저지하고 통일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대책을 논의한 회담을 말한다. 1948년 4월 19일부터 시작된 이 회의는, 김구, 김규식 및 김일성, 김두봉과 같은 남북의 명망가들이 다수 참석하여 그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 듯하였으나 결국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대한민국 건국

 


UN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감시 아래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었다. 제헌국회 총선거: 총 의석수 198석. 1948년 5월 31일 월요일 아침 열시가 조금 지난 때, 국회의사당(중앙청 홀)에 모인 198명의 제헌의원들은 제1차 회의에 들어갔다. 국회선거위원회 사무총장 전규홍(뒤에 국회사무총장)의 성원 보고에 이어 노진설 국회선거위원장(뒤에 심계원장)이 최고연장자인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추대할 것을 제의하자 의원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이승만은 "나는 먼저 우리가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 이승만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신익희를 부의장으로 선출하였다.


 6월 초, 국회헌법기초위원회에 헌법 초안이 제출되었다. 헌법 초안은 이승만도 포함한 모든 정파들이 동의한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는데, 6월 15일 이승만이 돌연 기초위원회에 나타나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7월 17일 헌법을 제정, 공포하였으며 7월 20일 제헌국회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에 의한 제1대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 후보를 초대 대통령으로, 이시영 후보를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한 김구, 김규식은 불참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8월 15일 정부를 구성하고 대한민국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이와 함께, 이승만은 제1공화국 제1대 대통령 취임식을 치렀다. 이로써 미군으로부터 권력을, 임시정부로부터 한국인의 법률상 주권(主權)을 넘겨 받았다.

 


북한에 인민공화국 건국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반도(조선반도)는 북위 38도를 경계로 이북 지역을 소련군이 맡아 군정을 실시하였으며, 1946년 2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여 건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48년에는 조선반도 총선거에 기초하여 김일성을 수상, 박헌영•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하여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조선로동당, 천도교청우당, 조선사회민주당이 있는 형식상의 다당제 체제이지만, 사실상 조선로동당의 1당 체제이며, 특히 국가주석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 그리고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은이 차례로 세습 집권했다. 


현재 내세우는 정치이념은 주체사상과 선군정치(先軍政治•군이 앞장서는 정치)이다. 주체사상은 1972년 사회주의헌법 개정에서 최초로 등장하였고, 1992년 4월 헌법 개정 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삭제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서 독자적인 사회주의 체계를 마련했다. 


1998년 사회주의헌법 개정 때 공산주의 문구를 전부 삭제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국방위원장이 자국의 실권자임을 명시하였다. 2013년 6월에는 헌법이나 노동당 규약보다 상위 규범인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39년 만에 개정하면서 공산주의 강령을 삭제하고 주체사상으로 대체하였으며, 김일성 가문의 '백두 혈통' 계승을 명문화하였다.


설마 한반도의 운명이 외세에 의해 이렇게 꼬여갈 줄을 누가 알았으랴! 남북에 세워진 두 국가가 서로 한 피의 형제국이 아니라, 철천의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이는 비극의 역경이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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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설마’의 역사 500년(22)-8.15 해방~남북 분단(2)

 

(지난 호에 이어)


(1)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


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은 나치 독일 항복 후 1945년 7월 17일~ 8월 2일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 정상이 모여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처리를 결정하기 위한 회담이었다. 회의 끝에는 포츠담 협정이 책정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고, 합의 내용은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으로 공포되었다. 이 선언은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화민국, 소련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발표했다.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영국의 수상인 처칠, 중화민국의 총통인 장제스가 회담에 참여하여 선언에 서명하였고,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참전과 동시에 이 선언에 참가하였다. 


선언의 요지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이며, 그 내용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그 중에 우리가 한반도 영토를 되찾을 수 있는 내용은 포츠담 선언 제8항 “카이로 선언의 실행과 일본 영토의 한정”에 명시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묵살했고, 이에 미국이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동시에 참전하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8월 폭풍 작전). 상황이 불리해지자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에 2차 대전은 종전되었다.


중국 대표 장제스는 중일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독일 영토인 포츠담까지 가기엔 무리라고 판단, 이후에 서명한다는 양해를 얻어 불참했다. 이 때문에 포츠담 회담은 미-영-소가, 회담 중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미-영-중의 서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에서는 2차 대전이 5월 9일 독일의 항복으로 종결됐지만, 일본은 패전이 분명한 상황에도 1억 총옥쇄(일본 제국이 전 국민을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에 총동원하기 위해 사용하던 악명 높은 1억 옥쇄(一億玉碎)는 본토 일본인들만의 죽음이 아닌 조선인, 대만인 모두의 죽음을 의미했다)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지속했고, 이런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유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다. 물론 눈치 없는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한 큐에 거절했고 그 결과는 인류 역사 최초의 핵무기 실전 투입이었다. 


 (2)북위 38도선으로 한반도 분단


 38선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 위해 그어놓은 군사분계선이다. 삼팔선을 확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기관원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소련군이 8월 8일, 폭풍작전을 개시한 후, 3부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 Dunn)은 1945년 8월 11일에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이후 주한미군사령관 역임) 대령과 미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이후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 중령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고, 이 안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삼팔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이 제안하자 소련은 별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1945년 8월 23일 개성시까지 내려갔던 소련군은 9월 초에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1953년 7월 27일 발효된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은 위도상 북위 38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만, 38선과 비교해 서쪽 경계가 남하하였고 동쪽 경계가 북상하였다. 


38선(1945.9.2 - 1950.6.25)과 현재의 군사분계선(1953.7.27 이후)은 다르지만, 한반도 분단에 있어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크고, 분단의 직접적 원인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군사분계선을 삼팔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설마 한반도가 이렇게 두 쪽이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분단의 결과는 지금까지도 해결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비극을 안겨 준 것이다. 힘 없는 민족의 설움이다. 힘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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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설마’의 역사 500년(21)-8.15 해방 , 남북 분단(1)

 

 
 

▲얄타 회담에 모인 3국 수뇌들(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1945년 8월6일과 9일, 미국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졌다. 그리고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횡재를 맞았다. 해방이 된 것이다. 사실, 이 축복은 우리 민족이 수고를 해서 해방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해방 며칠 전까지도 이러한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내려준 특별한 축복이었다. 해방은 되었지만 나라를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는 38도선 두 쪽으로 나뉘어 미국과 소련의 군인들이 지배하는 군정이 시작되었다. 


 해방이 된 이후 3년간 남한에서는 미국의 군정, 그리고 38선 이북에서는 소련의 군정이 실시됐다. 그러다가 1948년 남북에 각각 이념이 다른 국가가 수립된 것이다. 남한에는 그 해 8월 15일, 그리고 북한에는 9월 9일이 두 나라의 합법적인 건국일이다. 


한데 어떻게 해서 38선으로 한반도가 두 쪽으로 갈리고 남과 북에 서로 다른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는가? 그 뿌리는 우리의 의지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최고 이념이라고 기치를 내건 소련, 양대 이념세력 속에서 찾아 보아야 한다. 


당시 우리는 일제의 속박에서 갑자기 해방을 맞이 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대처능력이 없었다. 자체적으로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망명정부였기에 힘의 실세가 없었다. 남과 북이 갈라진 과정에는 미-영-중-소 4대 강대국들의 흥정이 있었을 뿐, 통일된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우리 민족의 의지는 반영되지 않았다.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나기 전에, 그 4대 강국은 전후 국제적 처리문제를 놓고 진지한 논공행상의 회담을 3차례 개최하였다. 그 최종적인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는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지는 운명선이 결정된 것이다. 


(1)카이로 회담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은 1943년 11월 27일 미?영?중,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5일간에 걸친 회담에는 루스벨트?처칠?장제스가 각기 미국, 영국, 중국을 대표하여 참가했으며, 회담 결과 발표한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했다. 


또한 회담에서 연합국은 승전하더라도 자국(自國)의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키로 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결의를 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포츠담 선언에서 재확인됐다.


카이로 선언 주요 내용 - 각 군사사절단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정지시키며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을 속행하고 있는 것으로, 위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또 영토를 확장할 의도도 없다.


위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이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축출될 것이며, 앞의 3강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행동을 속행한다.


(2)얄타 회담


 얄타 회담(영어: Yalta Conference)은 1945년 2월 4일부터 2월 11일까지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들이 모여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무렵, 주 적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가 항복을 하고 나치 독일이 패전할 기미를 보이자, 연합국의 지도자들이 나치 독일의 그 후를 논의하기 위하여 크림반도에 위치한 얄타에 모여서 회담을 하였다.


각국 수뇌는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비에트 연방의 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이다.


이 회담에서 3국 수뇌들은 패전 후 나치 독일을 소련?미국?프랑스?영국 이렇게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웠으며,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하여 최저 생계를 마련해 주는 것 이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또 나치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하거나 몰수한다고 선언하였으며, 전쟁의 주요 전범들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하였고, 전후 배상금에 대한 문제는 위원회를 구성해 위임하기로 하였다.


또한 이 회담에서 폴란드에 대해서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서 규정한 폴란드 동부 영토 대부분을 소련 영토에 병합하고, 폴란드에게는 동독의 일부 지역을 대신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각각 폴란드 동부 영토 일부를 얻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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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강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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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6
‘설마’의 역사 500년(20)-왜정 36년, 일본의 착취

 

 

1910 – 1945, 왜정 36년 동안 일본은 우리 조선에서 많은 물자와 인력을 수탈 착취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정신대, 대동아전쟁 징병, 보국대 등 필요에 따라 이용하였고, 때로는 인간생체실험 등 우리의 생명을 실험 자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설마, 설마 하다가 반만년 사직을 빼앗긴 대가는 참으로 참혹하였다. 


1. 동양척식주식회사 - 조선의 경제독점과 토지 및 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일본제국이 설립한 국책회사이다. 이는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뜬 식민지 수탈기관으로 제정한 동양척식회사법에 근거하여 세워진 회사이다. 


을사보호조약에서 한일합병을 음모하던 1909년 1월부터 대한제국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모든 소유권은 일본인에 한하며, 활동지역은 조선에서 만주까지 확대 되었고, 이후 일본군의 점령지에 따라 타이완, 사할린, 남양군도로 확장되었다. 


세부사업은 (1)농업 토지의 매매, 임차, 경영, 건물의 건설 및 매매, 대차 등이었는데 이는 일본 소작인들에게 한반도 이주를 유도하는 “동척농업이민계획”을 시행하여 조선 각지에 일본인 촌을 세워 나가는 일이었다. 


(2) 1916년부터는 일본의 식량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조선에서 “추수공출제도”를 실시하여 조선에서 쌀과 보리 등 곡식을 수탈해 갔다. (3) 1930년부터는 금융사업을 확장하고 식산은행을 수립하여 금전적 착취의 분야를 넓혀갔다.   2. 조선여자근로정신대 - 이는 일제강점 말기에 조직된 태평양전쟁 지원조직이다. 원래 정신대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여러 분야의 전쟁 지원단체에 붙어 사용되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전쟁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된 것이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미 특별한 법적 근거도 없이 실시되고 있던 조선의 여자근로정신대는 1943년 8월 23일에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면서 합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고 공식적으로 출범되었으나 실제로는 훨씬 그 전부터 실시되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이 소속되었으며, 주로 군수공장 등에 투입되었다. 동원 방법은 (1)관청의 알선 (2)공개 모집 (3)자발적인 지원 (4)학교나 단체 등을 통한 다양한 방법이었지만, 취업이나 진학을 미끼로 여성을 유인한 후 노동 현장에 투입되었는데, 실로 강제노동이었다. 


이중 일부는 일본군 위안부로 발탁되어 전쟁이 진행되는 지역으로 보내져서, 군인들의 성적 만족을 채워주는 위안부로 강요되었다. 근로정신대의 명목으로 연행되어 간 조선 여인은 약 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의 문제는 현재까지도 깨끗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한일간의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세계의 인권단체들이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생존자들에게 다소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치부를 역사의 기록에서 은폐하려 하기 때문에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2011년 12월 14일 현재 전 세계의 인권 단체들은 이 문제를 놓고 1,000회 이상 시위를 벌였다. 일본인들은 개인적으로는 양심적이고 예의가 바른 것 같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추잡한 역사를 소유한 민족임을 여기에서 다시금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3. 일제의 지원병제도와 징집제도 - 일본에 의한 특별지원병제도는 1938년 2월 2일 칙령 제95호로 공포되어 그 4월 3일부터 시행되었다. 응시자격은 17세 이상 신장160cm 이상 소학교 졸업자 이상으로 되어있다. 이 제도는 1944년 4월 20일까지 6년간 시행되었다. 


미나미 총독은 훈시대로 “시행의 목적은 한반도의 일본화, 즉 내선일체의 구현”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선의 청년과 학생들에게 황국 시민의 자각이라는 목표로 활용되었다. 하나 말만 자원이지 실은 지방관청의 경쟁적 모집을 통해 입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지원보다는 강제성 징집제도였다고 볼 수가 있다. 


그리하여 1944년 5월부터는 노골적인 할당제 징집으로 모집되었다. 대동아전쟁 말경 조선인 지원병의 숫자는 1942년 4,500명, 1943년 6,100명이었다. 하지만 1944년과 1945년의 통계는 전쟁 말기로 강제 징집의 숫자가 수만 명으로 추산되나 기록을 감추었다.


4. 징용, 근로보국대 - 일본은 제2차 대전 중 전쟁체제에서 인력확보를 위해 많은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8년의 국사총동원법과 1939년의 국민징용령을 제정하였다. 조선인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지원형식을 취했지만 결국 모두가 강요로 이뤄졌다. 


마을 단위로 총동원연맹을 만들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조선의 농민들은 군대에서 사용할 벙커용 가마니 짜기, 탄피용 놋쇠 모집하기를 위하여 제기(祭器)를 다 탈취해 갔다. 이 연맹에 강제로 가입된 조선인은 약 458만 명이었으니 남자 세대주는 거의 다 포함되었다. 


 전쟁을 위한 노동자로 강제 징용된 사람들은 사할린, 일본 탄광 등지에서 강제 노역을 하거나 군속으로 차출되어 일본이 침략한 동남아 지역의 기지건설과 철도공사에 동원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의 원자탄 두 방을 맞고 갑작스럽게 항복을 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정착을 하다 보니 지금도 사할린과 일본 내에 우리 동포가 많이 살게 된 것이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한국정부에 따르면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 되었던 한국인 피해자는 103만 2,684명이라고 하였다. 


5. 창씨개명과 조선어 사용금지 - 1939년 11월 창씨개명법을 제정한 일제는 도청, 군청, 면사무소, 경찰서, 학교 등 공식 기구들과 친일 단체들을 총동원하여 이름을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할 것을 강요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케 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넋을 빼앗아 민족 자체를 말살하기 위한 책동이었다. 창씨 개명을 하지 않으면 조선 아동은 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으며 어른들에게는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이 정책에 반대하는 자는 비국민, 불온분자로 박해하고 징용과 보국대의 첫 번째 선발 대상이 되었다. 


 필자는 1945년 3월에 일본 소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한 두 달쯤 지나니까 선생님이 조선어사용금지 딱지를 30장씩 나누어 주었다. 학교 내에서는 일본말만 사용하여야 하는데 어쩌다 조선말을 하면 상대에게 그 조선말금지 딱지를 하나씩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그 표를 다 빼앗긴 학생은 방과후에 변소청소를 하거나 벌을 받아야 했던 일이 생각난다. 


 이상에서 열거한 이외에도 우리 민족이 36년간 일본의 박해를 받은 것은 부지기수이다. 이 시대에는 친일을 아니 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나라가 없어졌고, 모든 통치와 법률이 조선인들을 옭아매고 있는데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자기들의 잣대로 친일파 명단을 작성하고 함부로 조상을 욕되게 함은, 우리 문화와 전통적 정의로 보아 별로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지 않는다. 


역사적인 사실은 감정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불가분의 다른 면이 있고, 이분법적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사려해야 할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죄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고통과 아픔이었고 죽음이었다. 이제야 우리가 조상들의 무능을 탓하고 논공행상을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조상들이 생각한 설마 설마의 역사가 그러한 대가였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으면, 그것으로 역사를 공부하는 가치는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조상을 비난만 했지, 자신들의 평가가 착각이거나 과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니 마음이 더 아프다. 

 

 

▲동양척식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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