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계정 찾기 다시 시도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강신봉 칼럼

samkang39
B78EFD4C-5B04-4E60-9C0E-8F051096B681
54801
Y
메뉴 닫기
오늘 방문자 수: 9
,
전체: 48,562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email protected]
메뉴 열기
samkang39
강신봉
72429
7829
2019-01-18
‘설마’의 역사 500년(48)-반공의식의 쇠퇴(3)

  

 

 

 

(지난 호에 이어)


 “공산주의자를 어떻게 알아보냐고요? 마르크스와 레닌에 관한 책을 읽은 사람이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반공주의자들을 알아보냐고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겠죠." (로널드 레이건)

 


 한국의 주사파 학생들은 어떻게 태동하였나

 


1970년 – 1980년대에 대한민국의 많은 대학생들은 박정희 군사정부의 반공사상에 반항하여, K. Marx나 Lenin 서적을 가방에 감추고 다녔다. 왜냐하면 그 때에 그러한 책자를 공개적으로 가지고 다니면 금기서적 은닉죄로 반공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불온 문서를 몰래 구입하여 소유하면, 그러한 책을 갖고 있지 못한 학생들은 꽤나 부러워하기도 했다. 비밀리에 공산당을 연구한다는 것은 무언가 신비로운 학문을 연구하는 것으로 생각이 들던 때였다. 


인간 심리에 있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을 구태여 못하게 하면 더욱 호기심이 나고,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매력적인 심리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Karl Marx와 Lenin, 그리고 김일성을 연구하며 북한의 주사파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은 마치 대한민국에서 누구도 연구하지 못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으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반공주의 학생들은 그러한 독존적 자부심을 가슴에 품기 시작하였다. 그 때의 그 사람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청와대를 점령하였고 대통령이 됐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은 사회주의- 공산주의-주사파 쪽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의 그 사람들이 연구했던 그 공산주의 이념은 아주 완벽한 이념이라고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고, 그러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이념은 착취 내지는 독점의 이념이라고 배타적으로 여겼다. 실로 그들에게 자본주의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한 생각은 지금까지도 그들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서 공산주의 실험 70년의 결과는 실패작이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이를 자인하였고, 다시 자본주의로 돌아왔지만, 한 번 실패를 다시 회복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소련은 지금 무던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며, 경제적으로 후진국 생활을 감수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국가의 정치와 경제는 실험대상이 아니다. “해 봐서 안 되면 다시 하겠다”는 식의 정치나 경제는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로서, 절대적으로 있어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인 것이다. 


삶이란 한 번 살고 가는 것이듯이 ‘지도자 노릇’도 한 번으로 지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한 지도자가 국가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여 실패를 하면, 실로 고생을 하는 것은 지도자 자신이 아니라, 온 국민이 그 짐을 다 같이 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소련이 바로 그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이 그 길을 따라가지 않기를 기원해 마지 않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 흔들고 있으니, 그 부작용이 말이 아니다. 정책마다 부작용이 따르고 있는 것은 문재인 정권이 실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신조가 말하는 1•21사태


김신조 목사는 2017년 12월 1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50년이 지났지만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북한은 망할 때까지 절대 대남전략을 바꾸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1•21사태가 일어난 지 50년이 지났다.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살해를 목적으로 청와대 근방까지 침투했던 1968년 그 해는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 한반도 전쟁 기운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다음은 김신조 목사의 증언이다. 


“ 1968년 1월 22일 오전 1시경. 영하 10도의 칼바람까지 몰아쳤다. 세검정계곡(서울 종로구)은 조명탄과 플래시 불빛, 확성기 소리로 가득 찼다. ‘나와라. 살려준다. 투항하라.’ 계곡의 바위 뒤 곳곳에 자리잡은 육군 30사단 92연대 소속 장병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무기는 수류탄 하나뿐이었다. 북한에서 가져온 총과 350발의 실탄, 13개의 수류탄은 도주 과정에서 인왕산 바위 밑에 숨겼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됐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수류탄 안전핀에 손가락을 걸었다. 수년 동안 훈련 받은 대로 자폭해야 할 시간이었다. 확성기 소리가 다시 귀를 파고들었다. ‘반드시 살려준다. 믿고 나와라’. 그래서 두 손을 들고 플래시 불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김신조 목사는 탈북자 또는 귀순용사가 아니다. 1968년 1•21사태 당시 투항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6기지 2조 조장(소위)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지시를 받고 남파된 특수부대 장교였다. 당성과 실력을 인정받은 엘리트 군인이었다. 투항 직후 기자회견에서 “왜 내려왔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72351
7829
2019-01-16
‘설마’의 역사 500년(47)-반공의식의 쇠퇴(2)

  

(지난 호에 이어)
이명박 정부는 초장부터 친공 종북주의자들의 광우병 데모에 질려 버렸다. 데모에 주눅이 들어 아예 반공이란 이념을 포기하고 파랭이도 빨갱이도 아닌 중도주의라고 애매한 이념노선을 선언하였다. 데모꾼을 달래기 위해서 이념을 포기한 것이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나라가 되었다.


 이 때부터 북한의 간첩들이 남한 땅에서 합법적인 둥지를 틀기 시작하였다. 탈북자라는 탈을 쓰고 간첩들이 떼거리로 내려 오기 시작을 하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국정원이 간첩을 잡지 않았다. 이제는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간첩들이 내려와 수천 만원 정착금을 타면서 방방곡곡에 진을 치기 시작하였다. 


오래 전부터 꿈틀거리던 교육계의 전교조들이 고개를 들고 나와서 6.25의 남침을 북침이라고 가르치고 김일성 주체사상을 부추기기 시작하였다. 종북사상 수하의 전문 데모꾼들이 국가의 국책사업장 어디에고 따라 다니며 반대 반대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노동조합이 들고 나서서 종북단체에 찬조데모를 해주고 한속이 되어 버렸으니 이제는 누구도 억제할 수가 없는 종북 좌파세력이 나날이 비대해져 가고 있다. 


비례대표제라는 국회의원 선거절차에 의하여 종북 빨갱이들이 줄줄이 국회로 입성하였다. 이석기, 임수경, 통합진보당 사람들… 이들은 모두가 이미 종북 친공주의자들이다. 헌데 이들이 대한민국의 국회를 점령하였다. 


대한민국 국회는 자유 민주주의를 하는 야당과 여당이 아니라 한 쪽은 종북이념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변질되어 갔고, 다른 쪽은 그들과 흥정을 하여 법안을 통과시키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 드디어 국회 망국론까지 국민들의 입에 회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의 국회를 해산하라고 공공연하게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간첩을 잡으라고 만들어진 국정원이 간첩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국정원장이 선거에 개입을 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줄줄이 감방 신세를 면치 못하는 세상으로 변모하였다.

국회에 진을 치고 있는 붉은 세력들이 법조계에 깔려 있는 종북세력과 동조하여 국정원 잡아 죽이기에 지금도 혈안이 되어 있다. 간첩 잡으러 다니는 국정원 직원이 너무도 억울해서 자살을 하는 소동도 벌어지고 있다. 과연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나는 미국의 CIA가 FBI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대한민국의 국정원은 어찌 된 것인지 검찰의 밥이 되어 감방 살이 하기에 바쁜 기관이 되어 버렸다. 차라리 국정원을 해체하라는 소리까지 들린다. 


남북이 대치하여 70년을 살아 왔고, 또 앞으로 어떤 전쟁이 일어날지, 어떤 변혁이 올지 심각한 대처상태에 있는 대한민국인데 그러한 정보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국정원을 저렇게 때려 눕혀도 되는 것인가? 백년대계를 놓고 심사숙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70년간 지켜 온 반공이념은 국민의식 속에서 망각 되었고, 이제는 국회의원이나 정치가들마저도 반공이라는 단어 쓰기를 꺼려하는 세상이 되었다. “설마 종북좌파가 정권을 잡으랴?” 그 설마가 진행형으로 달려가더니, 드디어 골-인을 하였다. 이제 대한민국의 미래는 과거 월남같이 될 운명이 멀지 않아 보인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72292
7829
2019-01-10
‘설마’의 역사 500년(31)-반공의식의 쇠퇴(1)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자유 민주주의 나라와 공산주의 세습제의 나라가 생겼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과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대결양상으로 시작을 하더니, 소련제 탱크와 기관총을 내뿜으며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을 일으켰다.


 3년간 오락가락 남북한을 초토화 하는 포성이 1953년 7월 27일 정전으로 조용해졌다. 300만 명이 죽었고, 일천만의 이산가족이 생겼으며, 십만 명의 과부가 생겼고, 이십만 명의 고아들이 길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미국의 교회들이 모아다 주는 구호물자의 옷과 가루밀크와 강냉이가루가 아니었다면 무엇으로 살아남을 수가 있었을까? 그러면서 우리는 4.19학생혁명을 치렀고, 5.16군사혁명의 경제발전과 5.18이란 민주주의 길을 모색하여 왔다.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은 군인들의 정권이기에 강력한 반공이념과 애국심이란 의식으로 국민들이 정신무장을 하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치르고 정리될 때까지 우리 민족의 의식은 ‘반공’이 ‘민주’보다 더 앞서 있었다. 


반공의 문제라면 다소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희생되더라도 군말 없이 받아 들였다. 공산주의와 전쟁을 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정도의 정신 무장은 늘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각오를 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1992년, 김영삼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는 ‘반공’이라는 소리가 쇠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민주주의를 떠들면서 학생들을 길거리 데모 꾼으로 내몰던 김영삼이 정권을 잡으니 반공이라는 이념은 꼬리를 내리고, 자유와 민주와 인권을 내세우는 개인주의 사고방식이 사회에 만연해지기 시작 하였다. 


외세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군인정치라면 신물이 난다고 하였다. 국민들의 사상은 반공이라는 생각 대신에 자유와 민주주의와 개인주의 맛에 취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다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는 반공이념은 거의 다 사그라져 버렸고, “같은 민족끼리”라는 북한의 구호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국민들은, 굶주림에 삐쩍 마른 북한 동포들에 대하여 꽤나 동정적 자세로 바뀌었다. 반공이라던 자기 주관의식을 어느새 다 잃어 버리고 불그스름한 색깔의 이념이 대한민국의 구석구석으로 물들어 오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혼동 속에서 역사의식을 망각하고 흐리멍텅 해져갔다. 군인들마저도 주적 개념이 희미해졌고 오히려 동맹국인 미국이 주적이라고 생각하는 군인들이 나오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국방백서에서 북한을 주적으로 하는 용어를 빼라고 대통령이 지시하였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아직도 반공이념을 지키고 있는 수구세력과 갑자기 불거져 나오는 신진 진보세력으로 남남갈등의 세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300만 인민이 다 굶어 죽는데도 적화통일 야망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북한은 한 치도 변함이 없이 남한의 부(富)를 뜯어 가기에 충혈이 되어 있었다. 혹여나 마음이 부드러워질까 하여 한없이 퍼다 주었다. 하나 그 돈은 원자탄으로 바뀌었을 뿐, “전쟁은 없다”는 김대중의 선언은 무색해졌다. 김대중의 퍼다 주는 자비는 김정일에게 사기를 당했다. 


노무현 정권이 뒤를 이으니 반공이념이 은근슬쩍 반미로 탈바꿈을 하여 갔다. 어느새 친공 종북사상으로 물들은 전교조 교사들이 젊은 세대들을 유혹하였다. 제주도 4.3사태, 지리산 빨치산 사태, 여수 순천 반란사건 등 70년이나 묵은 역사적 사건들의 재판을 다시 벌렸다.


빨갱이가 파랭이가 되고, 파랭이 경찰 군인들이 역적으로 몰리는, 역사적 재판의 결과가 뒤집어지는 변란이 생겼다. 그 때에 빨갱이가 파랭이로 뒤바뀐 적색 가족들은 지금도 국가보훈처에서 애국지사로 등록되어 상당한 보훈비를 타고 있다. 


재판이 비밀재판 이었는지 그 사건의 현장에는 가지도 않은 많은 사람들이 애국지사가 되어 보훈비를 타고 있다고 쉬쉬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그들의 명단은 공개할 수가 없게 감추어져 있다고 한다. 


뿐만이 아니다. 그 자녀들은 공무원 시험 등 취직에 특혜를 받는 가산점 제도까지 만들어 놓았다는데 그 비밀 게임을 누가 알랴! 멀쩡한 자유 민주주의 공개적인 세상인데 이런 음흉한 비밀이 대한민국 안에 서리어 있다니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72144
7829
2018-12-24
‘설마’의 역사 500년(45)-5.16군사혁명(11)

 

 

 

 

(지난 호에 이어)
이상의 경제 패턴을 보면 후진국에서 중진국이 되기까지의 경제행로는 완전히 계획경제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경제가 일단 궤도에 올라서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야흐로 중국이 이러한 패턴으로 급부상하는 것을 보면 후진국이 일어 설 수가 있는 길은 선 민주주의가 아니라 선 경제주의이어야 하고 그 경제는 확실한 계획경제이어야 하며, 이를 성공적으로 이끈 후에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다.


많은 전후 신생개발국들이 이러한 패턴이 아닌 선 민주주의 후 경제를 외치다가 경제개발은 해보지도 못하고 넘어지고 있는 것이다. 


 ■ 새마을 운동


1970년 4월22일, 박정희에 의해 제창된 이 운동은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 운동이다.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는 이 운동은 낙후되어 있는 농촌과 어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정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여 자발적으로 현대화 작업을 추진하는 운동이다.


그래서 새마을 운동을 풀뿌리 지역사회개발운동이라고도 한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전국의 농어촌에 전기가 공급되었고, 초가지붕이 기와지붕으로 바뀌었으며, 우마차와 지게가 수송수단이었든 시골에 자동차와 경운기, 이앙기, 추수탈곡기 등 자동화가 시작되었다.


시골 구석구석에도 TV와 냉장고가 보급되었으며, 유선통신망과 문화시설이 건립되었다. 시골 어느 곳에도 자동차가 들어가도록 도로가 확장되었으며 징검다리가 없어지고 높고 아름다운 교각이 세워졌다. 이 운동으로 인하여 도시와 시골의 격차가 거의 없어졌다. 이 운동은 지금까지도 끝이 없이 전세계로 이어져가고 있다. 


세계의 74개 국가에서 우리의 새마을 운동을 배우러 오고 있으며, 우리의 연수원과 현장에서는 계속적으로 이 운동의 질을 연구하고 교육을 시켜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해 내고 있다. 


1972년 4월 21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을 하여 전국에서 일하는 새마을 운동자들에게 보급하였다. 가락이 경쾌하고 가사의 내용이 순박한 이 노래는 듣는 이들에게도 의욕적으로 참여하고 건설하고픈 기분을 상기시켜서 온 국민의 노래로 승화되었다.


 실로 이 운동은 1969년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이 발표됨으로 시작됐다. 1971년에 ‘새마을 운동’으로 명명되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고, 1973년 1월16일 박정희는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에는 대통령비서실에도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해서 1975 년에는 이 운동이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하였다. 1973년 5월 31일,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을 새로 건립하여, 새마을운동지도자교육을 집중화하였다. 1972년에 1490명, 1973년에 4354명으로 차츰 증가하여 매년 6천여 명이 교육을 받는 기구로 발전하였다. 


정부는 1980년대 초반까지 각 지역사회에 시멘트와 철근 등을 비롯한 필수재료 등으로 총 경비의 반액을 지원하였고, 주민들은 노동력과 봉사활동을 제고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탈바꿈을 하였고, 마차길 지방도로는 자동차길 산업도로로 바뀌었다. 


전국 방방곡곡에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고, 뒷동산 나무를 베어 땔감을 하던 취사 보온시설이 전기와 가스 시설로 현대화되었다. 식량이 모자라던 나라가 쌀이 남아 돌아가는 나라로 탈바꿈을 하니 반만년 굶주림이 해결 되었고, 지금은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영양과잉이 문제인 나라다. 


 이상의 여러 가지 정책 외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강력한 국방, 고유문화창달, 국민윤리제고 등 모든 분야에 골고루 새로운 정책을 세워 대한민국을 확고한 반석 위에 세워놓은 것이, 516군사혁명의 열매였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새마을 노래)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 가꾸세/ 살기좋은 내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좋은 내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서로서로 도와서/ 땀흘려서 일하고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 살기좋은 내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우리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 일하면서 싸워서/ 새조국을 만드세 살기좋은 내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72060
7829
2018-12-14
‘설마’의 역사 500년(44)-5.16군사혁명(10)

 

 

 

 

(지난 호에 이어)


■  제3차 경제개발계획


 1972년에서 1976년까지 세 번째 경제개발계획이었다. 목표는 모든 산업국가들이 갖추고 있는 중화학공업을 추진하여, 산업의 안정적 균형을 이룩하는 데에 두었다. 
이 세 번째 계획을 착수하기 직전 1871년 8월의 ‘닉슨 쇼크’에 의한 국제경제 질서의 혼란, 1973년 10월의 석유파동 등으로 인하여 어려운 고비에 처하게 되었으나,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추진하여 외자도입의 급증, 수출드라이브 정책, 중동건설경기 등으로 난국을 극복하고, 연평균 9.7%의 고도 성장률을 유지하였다.


■ 제4차 경제개발계획


1977년부터 1981년까지 5개년의 기간이다. 성장, 평형, 능률의 기조 하에 자력성장구조를 확립하고 사회개발을 통하여 형평성을 증진시키며, 기술을 혁신하고 능률을 향상시킬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77년에 100억불 수출을 달성하였다. 경제계획 15년 만에 1인당 국민총생산은 $83에서 $944이 되었다. 1978년에는 물가의 상승과 부동산 투기, 생활 필수품의 부족, 각종 생산애로 등의 누적된 문제점이 나타났다.

여기에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가세하여 한국경제를 더욱 어려운 고비로 몰아 넣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망과 흉작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은 1980년의 경제를 마이너스 성장으로 이끌었다. 

대통령의 사망은 국가의 리더십 결핍으로 나타나면서 경제성장이 곤두박질을 한 것이다. 이를 보면 박 대통령 한 사람의 지도력이 무엇이었는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1981년에는 경제가 차츰 다시 회복세를 보였다.


■ 제5차 경제개발계획


1982년부터 1986년까지의 계획으로 이 때는 전두환 대통령의 시기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성장기조를 변경하여 안정, 능률, 균형을 기조로 하여 물가안정, 개방화 정책, 시장경쟁의 활성화, 지방 및 소외부문의 개발을 주요 정책의 대상으로 하였다. 
이 계획의 가장 큰 성과는 한국경제의 고질적 문제였던 물가의 상승을 획기적으로 안정시킨 것이며, 투자재원의 자립화로 경제의 질적 구조를 튼튼하게 하였다. 


■ 제6차 경제개발계획


1987년에서 1991년까지의 5개년 계획이다. 이 시기는 노태우 대통령이 들어 서고 88올림픽을 치르는 등 우리나라가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능률과 형평을 토대로 한 경제 선진화와 국민복지의 증진을 기본 목표로 설정하고, 선진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다양한 제1단계 실천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결과 경제성장률은 목표 7.5%를 상회하여 10%를 달성하였으며, 실업률은 2.4%로 고용안정을 가져왔고, 저축증대를 노력한 결과 국내저축률은 예상치 보다 훨씬 높게 36.1%를 기록하였다.


■ 제7차 경제개발계획


1992년에서 1996까지의 5년간이다. 김영삼 대통령 시기이다. 우리 나라의 경제는 이미 국제수준에 올라섰으며 이제는 국가가 주도개발을 하지 않아도 산업이 자율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자율과 경쟁에 바탕을 두어 경영혁신, 근로정신, 시민윤리 확립을 통해 21세기 경제사회의 선진화와 민족통일을 지향한다는 기본목표 아래 기업의 경쟁력강화, 사회적 형평제고와 균형발전, 개방과 국제화의 추진, 통일기반 조성을 3대 전략으로 삼았다.
하지만 1996년 말부터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아시아경제 공격정책으로 인해 이듬해인 1997년에 IMF시대를 맞게 되었다. 처음으로 국가의 경제적 위기를 맞은 것이다. 


■ 경제개발정책 이후


1997년 11월에 국가부도사태(IMF)가 일어나자 김대중 정부는 국내기업을 외국투자가들에게 매도함으로 위기를 극복하여 나갔다. 이후로는 모든 경제체제를 국가주도에서 자율적인 민간경제 체제로 변환하여 정부개입을 최소화 하였다. 
2011년 말, 대한민국은 5,000억불 수출을 달성하였고 세계 9번째 무역국이 되었다. 1977년 100억불 수출에서 34년 만에 5,000억불 수출실적을 올렸다. 이는 정말로 가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적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71988
7829
2018-12-12
‘설마’의 역사 500년 (43)-5.16 군사 혁명(9)

  

 

 

 

(지난 호에 이어)


 박정희의 단면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이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성적 석차 1등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 장교로 근무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그는 조국에 돌아와 대한민국을 중진국으로 이끌어 올리는 일에 여생을 바친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출생: 1917년 11월 14일, 대한민국 구미시
 -키: 1.58m
 -서거 날짜와 장소: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궁정동
 -재임기간: 1963년 12월 17일–1979년 10월 26일
 -배우자: 육영수(1950년–1974년), 김호남(1936년–1950년)
 -학력: 일본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1946년–1946년), 

 

박 대통령 독일 방문 이야기


1964년 12월 10일. 아침에 본을 출발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11시가 조금 못된 시각에 루르 광업지대 함보른 탄광회사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인근 탄광에 근무하는 한국 광부 3백여 명과 파독간호사 50여 명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했다.


박정희가 탄광회사 강당에 들어가자,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박정희의 선창에 따라 광원들과 간호사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한 소절 한 소절 불러감에 따라 모두들 목이 메고 눈물이 솟아나와 제대로 합창이 되지 못했다. 대통령도 울고, 영부인도 울고, 수행원들도 울고, 광부들과 간호사들도 울어 한바탕 눈물바다를 이루고 말았다.


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코를 푼 다음, 마이크 앞에 섰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연설문 낭독이었으나, 그 다음에는 아예 원고를 젖혀놓고 즉흥연설로 계속했다.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母國)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놓읍시다.”


그러나 박정희는 연설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곧 울음바다가 되고 만 것이었다. 결국 연설은 끝맺지도 못하고 중단되었으나, 박정희 생애 최고의 감동적인 명연설이며 명장면이었다.


박정희는 이어서 광부들의 기숙사를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밖으로 나오자, 어느 새 수백 명의 한국인 광부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 중에는 갓 막장에서 올라와 탄가루를 시커멓게 뒤집어쓴 광부들도 있었다. 


울어서 눈두덩이 부은 박정희는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광부들이 감정이 격해져 눈물을 쏟으며 몰려드는 바람에 경호원들은 그들을 달래어 길을 트느라 진땀을 뺐다.


이윽고 박정희가 차에 올라 손을 흔들자, 광부들은 팔을 번쩍 쳐들며 일제히 소리질렀다. “만세!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각하, 안녕히 가십시오!”


에르하르트 수상은 박정희가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간호사와 광부들을 붙들고 함께 우는 모습을 뉴스에서 보고는 감동한 나머지 이렇게 외쳤다.


“보라! 저런 민족과 지도자가 있는 나라라면 설령 차관을 줬다가 떼이는 한이 있어도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71899
7829
2018-12-02
‘설마’의 역사 500년(42)-5.16 군사 혁명(8)

 

  

(지난 호에 이어)
마르코스가 독재를 하던 필리핀, 남미의 칠레와 아르헨티나 모두 괜찮게 살던 독재국가였다. 하나 그들은 경제를 일으키지 않고 국민에게서 탈취를 일삼는 독재자였다. 국민을 게으르게 만들었고 결국은 민주주의도 경제도 바닥으로 다시 추락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근래에는 그리스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박정희는 먹고, 입고, 잠자리를 마련하기도 힘이 겹던 우리나라였지만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경제개발에 전력을 투입한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던 무능력의 국민들을 “우리도 할 수 있다.”의 능력이 있는 국민들로 올려 놓은 것이다. 오늘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져 놓았다. 


어떻게든 잘 살게 되면 자유와 민주는 쉽게 얻어질 수가 있다고 그는 믿었다. 우선 순위를 잡은 것이다. 이것이 박정희의 소위 한국식 민주주의 기본 철학이었다.


 이 패턴을 세계의 많은 후진국들이 따라하고 있다. 우선 중국의 등소평이 이 패턴을 적용하였음을 우리는 눈앞에서 잘 보고 있지 아니한가? 지금은 소련도 우리나라의 성공사례를 적용하려 한다. 비록 그가 적용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지만, 오죽하면 김정일이도 박정희의 그 패턴을 인정하고 칭찬하지 않았던가? 


 민주주의는 희생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단결된 노력과 인내와 투쟁이 없이 민주주의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독재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지독하게 다그치며 산업개발을 독려하였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된 것이다. 


 산업전선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희생하고 뛰어야 했던가? 길거리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학생들을 앞장세워 자유를 달라고, 민주를 하자고, 얼마나 많은 데모를 하였던가? 


그들은 먼 길을 걸어갈 의향도, 준비도, 안되었던 단목(短目)의 인사들이었다. 오늘을 희생하자고 외쳐야 내일이 약속되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바야흐로 가파르게 발전하는 물질문명에 취해서 조상들이나 부모들의 희생을 외면하려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길인 줄로 알지마는 얼마를 살아보면 그것이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고, 제자리에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대간에 분열이 생기고, 부모 자식 사이에도 소통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물질의 풍요 속에서 정신적 고독을 느끼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박정희가 차라리 이러한 경제개발을 안 하고 장면정권 그대로 놔두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오늘날 라오스나 캄보디아 수준의 경제후진국이 되어있을 것이다. 


1988년 올림픽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에게 물어보니, 우리나라는 태곳적부터 꽤나 잘 사는 나라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등학교에서 역사교육을 제대로 배운 바가 없는 (역사가 선택과목이었는데 이를 택하지 않았기에) 세대이기 때문에 박정희가 누구인지 경제개발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4차에 걸친 박정희의 경제5개년 계획과 이후 계속된 5, 6, 7차에 걸친 경제개발의 내용을 한번 훑어보자.


■ 제1차 경제개발계획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 1월부터 1966년에 완료된 그 첫 번째의 계획이다. 모든 산업의 기본요건인 전력과 석탄 등 에너지원과 기간산업을 확충하고, 사회 간접자본을 충실히 하여 경제개발의 기초와 토대를 형성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제1차 산업인 농업소득을 증대시켜 기아선상에서 굶주린 백성들의 기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때에 다량생산을 위한 통일벼와 아끼바리 벼 등 종자개선에 많은 노력을 집중하였다. 


수출을 증대하여 국제수지를 균형화하고, 산업기술을 진흥하는 일을 주안점으로 경제계획이 작성되었다. 이 시기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7.8%로 목표를 상회하였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3에서 $125로 높아졌다. 

 

■ 제2차 경제개발계획


1967년에서 1971년까지의 제2단계 5개년 경제개발. 이 기간에 우리나라는 식량의 자급화와 산림녹화, 그리고 화학, 철강, 기계공업의 건설에 의한 산업이 고도화 되었다. 이 때에 7억불의 수출목표를 달성하였다. 


 고용의 확대, 국민소득의 비약적인 증대, 과학기술의 진흥, 기술수준과 생산성의 향상에 그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소요자금 9,800억원 중 국내자금이 6,029억원, 외자가 14억 2,100만불 이었다. 이 중 약 6억불이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로 들어오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71810
7829
2018-11-23
‘설마’의 역사 500년(41)-5.16 군사 혁명(7)

 

 

 

(지난 호에 이어)
대일본 재산 및 청구권,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을 위한 밑천이 생긴 것이다. 국민들이야 감정적인 굴욕외교라고 떠들고 흥분만 하면 그 뿐이지만 그것은 박정희에게는 해결책이 아니었다.


1965년 6월22일, 일본 동경에서 양국의 대표들이 서명함으로써 그 해 12월 18일로 발효된 청구권 문제의 금액은 다음과 같다. 


1)일본은 미화 3억불 상당의 재산 및 용역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2)일본은 미화 2억불 상당의 차관을 저금리로 제공한다. 


 실로 우리 대한민국의 산업은 이 청구권 문제의 해결로 도약의 계기가 되었고, 연속적인 경제5개년 계획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일본 청구권 문제는 국가간에 일단락이 되었지만 민간인들의 후속적인 문제들은 꼬리를 이어 복잡하게 양국간의 외교 전으로 번져갔다.  


문제는 협정문 제2조 “양국간의 재산, 권리 및 이익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라는 내용이었다. 


 2011년 12월, 1000회의 시위를 한 일본군 위안부문제는 지금도 끝이 나지 않았지만 언제 끝일지는 지금도 묘연하다. 일본측은 대일청구권 협정문으로 끝이 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일본군에게 끌려간 위안부 문제는 대일청구권 회담 시에는 내용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국제적인 미결의 역사로 남아 있다. 


실로 일본정부의 입장은 위안부에게 보상을 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조상이 저지른 그 야만적이고 비인륜적 행동의 죄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가 싫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하면 그 자신들의 역사책에 기록이 되고, 그리 되면 후손들에게도 너무나 치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공식적인 인정은 못하겠다는 의미다. 

 

■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오늘날 세계의 많은 정치가와 경제학자들이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어떻게 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는가?’ ‘어떻게 해서 대한민국이 최빈국에서 10대의 경제대국이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빠른 성장을 할 수가 있었는가?’ 그러면서 ‘어떻게 해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게 되였는가?’하는 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이 박정희 혼자만의 공적은 아니다. 온 국민이 다 같이 상을 받아야 할 일이지마는 박정희라는 지도자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성취될 수가 없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다. 


 국내에서 많은 학자들이나 지성인이라고 하는 젊은 계층들이 박정희를 독재자로 몰아 세우고 친일파, 빨갱이로 우겨댄다고 역사가 바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잡는다는 것이 바로가 아니고 도리어 왜곡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의 민주주의 현대사를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사례를 하나 발견하였다. 물론 누구나 그렇게 느끼는 사실이지마는 그러한 사례를 민주주의 발전의 모델로 입증하지를 못하였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민주주의 이론의 적용은 실제로 불가하다. 민주주의는 먹고, 입고, 잘 곳이 해결된 연후라야 적용될 수 있는 정치이론이다. 그러므로 기초적인 경제해결이 없이는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없다.”


 이것이 박정희가 해결한 경제와 민주주의의 패턴이다. 그래서 그는 민주주의 실현에 앞서 경제개발을 서둘렀고, 우리나라의 경제가 궤도에 올라서니 민주주의의 기회를 맞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세계 제2차 대전이 종식된 이후 많은 군소국가들이 민주주의 기치를 내걸고 독립국가의 살림살이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나 한국을 제외하고는 살림살이를 제대로 하면서 민주주의를 한다고 할 수 있는 나라가 별로 없다. 


자유와 민주와 인권과 평화를 떠들면서 경제개발을 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는 입장에 토끼 두 마리를 동시에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루 밥 세끼를 먹지도 못하면서 인권을 내세우면 누가 그를 인정하겠는가? 민주주의만 하면 밥도, 옷도, 집도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국민, 국가에서 공짜로 해주기만을 바라는, 자기의 인권만을 주장하며 일하기를 게을리 하는 국민의 국가에서는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71727
7829
2018-11-18
‘설마’의 역사 500년(40)-5.16 군사혁명(6)

 

 

▲김종필과 오히라 

 

 

 

(지난 호에 이어)
2) 1962년 3월, 구정치인을 정죄하는 ‘구정치인정화법’을 발표하였다. 이에 반발한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을 하였고, 박정희는 대통령대행직을 물려 받았다. 동년8월, 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수반으로 역임케 하였다.


3) 1963년 중반, 박정희는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공약과는 달리 육군대장으로 예편을 하였다. 예편 후, 곧바로 민주공화당에 입당을 하여 제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하였다. 


이 무렵, 구정치인 정치정화법이 일부 해제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구정치인들은 군정연장이라며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이후 군정연장과 군정반대를 놓고 야당들이 갈등을 하게 되었다. 야당통합의 명분을 걸고 ‘국민의 당’이 창당되었으나 윤보선, 허정, 이범석의 갈등이 심화되어 야당내 대립은 격회되었다.


4)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를 치렀다. 공화당의 박정희, 민주당의 윤보선의 대결이었다. 유권자의 84.99%가 투표를 하였는데 박정희가 46.7%를 얻어 약 15만표 차이로 윤보선에게 신승을 하였다. 박정희의 지지율은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압도적이었다. 


■대한민국과 일본간의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혁명을 하고 나서 국가의 살림살이를 맡아보니 너무도 가난한 나라가 되어 살림살이를 일으켜 나갈 수 있는 밑천이 없었다. 외국에서 돈을 빌려다가 국가의 산업을 개발하여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외국 어느 나라도 군사정부에게 돈을 빌려주지를 아니 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정부에서 5.16군사혁명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면으로 애로가 많았다.


박정희는 독일에 가서 뤼부께 대통령에게 눈물의 하소연을 하여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3개월분 월급을 담보로 하여 차관을 얻어 오기도 하였으나 그러한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경제개발을 하고자 하는 웅지는 크지만 자본금이 없으니 어찌해야 공장을 짖고 기술을 연마할 수가 있을 것인가? 


GNP는 83불밖에 안 되고, 대학을 나온 고등실업자들은 다방에 모여 담배나 빡빡 피우고 앉아 있고, 공장이라고는 영등포 구로동에 있는 삼립건빵공장이 전부이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우리나라의 산업을 일으킬 수가 있을 것인가? 생각은 많지만 현실은 암담하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對日 재산 및 청구권 문제’였다. 얼마를 어떻게 해야 받아 낼 수가 있을 것인가? 그것을 받아 오면 목돈이 생길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경제개발의 밑천을 삼는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과연 그리 쉽사리 돈을 내줄 것인가?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일본에게, 36년간 우리를 괴롭히고 재산을 빼앗아간 보상문제를 풀어 보자고 제안을 하였다. 돈이야 많이 받아올수록 좋겠지만 어찌 그자들이 그리 쉽게 내어 주겠는가? 


1년여를 두고 흥정을 하고, 회담이 결렬될 뻔도 하고, 학생들은 굴욕외교라고 매일 데모를 하고, 차라리 집어치우라고 국민들은 아우성을 치는 판이었다. 하지만 박정희에게는 그것이 일억 불이건, 십억 불이건 받아오지 못한다면, 어떠한 수단으로라도 경제개발을 할 수 있는 희망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수난 끝에 타협을 본 것이 바로 대일본 재산 및 청구권 문제의 해결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케다 하야토는 즉각 한국의 신정부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1961년 11월 22일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를 만나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1962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협상의 내용을 합의하였다. 이 협상 내용은 ‘김-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후일 김종필은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김종필-오히라 마사요시 합의사항


1. 무상공여로 3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한을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573만 달러는 3억 달러 중에서 상쇄한다. 


2. 대외 협력기금 차관으로 2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리 3푼 5리(정부 차관) 


3.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민간 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samkang39
강신봉
71606
7829
2018-11-12
‘설마’의 역사 500년(28)-5.16 군사혁명(5)

 

 

 

 

■혁명 거사 후의 반응


 1) 혁명을 거사하고 박정희는 유원식을 데리고 청와대를 찾아갔다. 그러나 대통령 윤보선은 혁명군을 진압할 생각은 아니 하고 올 것이 왔다고 생각을 하였는지 아주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2) 매그루더 UN군 사령관은 혁명을 주도한 군부를 인정하지 아니하였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진압명령서를 들고 싸인만 하시면 혁명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 대통령은 오히려 “우리 한국에서는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고 유회적 이야기를 하면서 방관 자세를 취하였다. 


3) 하지만 매그루더 사령관은, 5월 17일자 미국 합참의장에게 보낸 전문에서, “미군 방첩대(CIC)가 거리의 행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10명중 4명은 혁명을 지지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하였으며, 나머지 2명은 반대를 하였다.”고 보고 하였다. 


4) 혁명초기에 당시의 강력한 언론인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뽑고 새로운 민족의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고 혁명을 지지하였다. 


5) 언론인 송건호도 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혁명을 지지하였다. 


6) 또한 6월 14일, 혁명을 한지 한 달이 되어서, 일제강점기에 제암리 학살사건을 수습했던 캐나다의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코리언 리퍼브릭’지에 “5.16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여 “5.16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서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과업을 주도한 박정희(朴正熙)는 누구인가?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고령 박씨 박성빈 공과 수원 백씨인 백남의 여사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중수(中樹). 대한민국의 군인, 교육인, 정치가이며 5, 6, 7, 8, 9대의 대통령이다.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3년간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졸업한 후,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과정에 편입하여 졸업을 하였다. 만주 보병 제8사단에서 일본이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일본군 장교였다.


해방이 되자 장교가 부족하였던 광복군이 당시 장교경험자를 기용하는 정책에 의해 북경으로 건너가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 남로당에 입당을 하였다. 1946년에 고향에 돌아와 대한민국 육사 2기생으로 편입하여 육군 대위가 되었다.


군에서는 각종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혁명 당시에는 제2군사령부의 부사령관이었고, 혁명 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거쳐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통령직을 역임하였다. 


 집권기간 동안 경제개발5개년 계획 등을 수립하여 산업화를 일구어 냈으며, 국방력증강 및 자주국방을 시도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으로 야당 및 학생운동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였고, 1979년 10월에는 김영삼 의원 제명파동 등을 사주하여 부마항쟁을 야기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으로 다양하게 나뉘어지고 있다. 우선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은, 전쟁과 가난으로 몹시 피폐해져 있던 대한민국을 국가주도의 ‘산업화’에 성공하였으며,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서 경제적으로 강한 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유비무환(有備無患)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였고, 특별히 그가 이끈 농촌의 ‘새마을운동’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후진국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표본이 되게 하였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역대의 국가 지도자들의 공적 평가에서 항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첫 번째 부인 김호남씨에게서 딸 박재옥씨, 그리고 육영수 여사에게서는 빅근혜, 박서영 두 딸과 아들 박지만씨가 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정치 및 입법 사항


대통령중심제의 체제하에서 국회 국무회의에서 제정되는 모든 입법활동을 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였기 때문에 입법활동은 아주 활발하였다. 중요 정치적 문제의 입법사항을 열거해1961년 6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로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1) 1961년 8월 12일 민정이양에 관한 계획을 최초로 결정하고 박정희 의장을 통하여 발표했다. 


가)혁명정부는 정권이양에 앞서서 진정한 민주정치 질서를 창건하고 구악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a)구악일소와 법질서 확립 b)모든 체제의 개혁 및 발전 c)종합 경제5개년 계획의 추진 등의 기초작업을 완수한 후에 정권을 민간정부에 이양한다.


나)정권이양시기는 1963년 여름으로 예정하고 a)1963년 3월 이전에 신 헌법을 제정 b)    1963년 5월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정당의 활동시기는 1963년 초로 한다.


다)정부형태는 대통령책임제를 선택하고 a)국회구성은 100인 내지 120인의 단원제로 b)선거관리는 국가공영제로 c)구정치인 중 부정 축재한 자의 정계진출을 막기 위해 입법조치를 취한다. (다음 호에 계속) 

 

 

 

[출판기념회에 초대합니다]

 


 1968년 11월 26일 토론토에 도착, 이 달로 캐나다 이주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간 캐나다 동포 사회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건강하게 살아온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그간 부동산캐나다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설마의 역사 500년’과 ‘Canada Study’란 글을 책으로 엮어, 아래와 같이 출판기념회를 하오니, 왕림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일시: 2018년 11월 26일(월) 오후 2시
 장소: 토론토한인장로교회(67 scarsdale Rd. Toronto)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더보기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