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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봉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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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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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7
김매기 본능

 
    
 지난 여름 텃밭 농부로 지낸 나는 매일 아침 눈 뜨면 열무 싹이 얼마나 자랐을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름 내내 잡초와 달팽이와 집게벌레 같은 것들과 싸우며 지냈다. 얼마 전에 토마토를 걷어낸 자리에 열무씨를 심었다. 올 여름은 예년 같지 않게 비도 많이 오고 선선하더니 뒤늦게 날씨가 한여름보다 더 더워서 씨앗에게는 마침 잘 되었다 싶기도 했다. 


 우연히 재미난 글을 읽었는데, 어느 시골학교 동문들의 가을 운동회 개회식에서 내빈 축사가 길게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대부분 60대 여자노인들인 참석자들이 땡볕에 서있는 게 안쓰러워 모두들 앉게 했다고 한다. 개회식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군데군데 풀 무더기가 쌓여있었다고 한다. 모였던 자리가 마침 잔디구장이었기에 할머니들은 앉은 자리에서 무심코 조금씩 움직여 가며 잡초를 뽑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본 농촌 다큐멘터리 프로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사돈부인들이 만나서 인사하자마자 털썩 땅바닥에 앉아 김매기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잡초만 보면 본능적으로 뽑고 싶어지는 김매기 본능이 바로 그것이다. 텃밭 농부인 나 역시 언제부턴가 잡초만 보면 뽑고 싶어지는 본능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기둥 아래 납작 엎드려 있는 잡초를 발견하곤 “ 저걸 그냥 카터로 한방이면 되는데…” 하고 아쉬워 하다가 며칠 후에 지나다 보니 지름이 1미터는 될 듯 퍼져 있어서 속으로 안타깝기까지 했다. 비상용으로 칼을 갖고 다닐 수도 없고 온동네 다 뽑고 다닐 처지도 아니고. 자고 나면 성큼 자라 우거지는 잡초. 잡초는 생명력이 지독하리만큼 강하니까 심고 가꾸지 않아도 번식한다.


 최근에는 꾀를 부려 보느라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부직포 덮개로 땅을 덮은 위에 채소모종을 심어보는데 그래도 잡초는 끈질기다. 손으로 잡아 뜯다 보면 얼마나 힘이 센지 뒤로 나가 넘어질 정도가 되기도 하고 모르고 무심코 맨손으로 뽑다가 손에 독이 올라 한동안 고생하기도 한다. 한동안 여름만 되면 왜 눈병이 잘 나는지 이유를 몰랐는데 잡초를 뽑다가 흙이 눈에 튀어서 그런 것이었다. 그 후론 언제나 모자에 고글에 장갑에 긴 팔옷으로 중무장을 하고 잡초와 전투태세에 들어간다. 


 드라이브웨이의 잡초 역시 고민거리이다. 벽돌 사이로 헤집고 올라오는 민들레, 질경이, 땅강아지, 쇠비름, 돼지풀, 또 이름도 모르는 것들. 이들과 싸우다가 손가락에 관절염까지 생길 지경이다. 뜨거운 물을 붓기도 하고 눈 녹이는 소금물을 풀어 붓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미안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무리 잡초라 해도 저도 생명이 있는 몸. 죽느냐 사느냐 이를 악물고 발버둥치는데 무슨 삼대멸족할 중죄인이라고 발본색원 능지처참하려 드는가. 모기에 물리더라도 제 까짓 게 먹어봐야  한 컵이나 먹겠냐고 너그럽게 봐주라는 사람도 있는데.


 올해 나는 신나는 방법 하나를 전해 들었다. 흔히들 카터라고 부르는 칼 하나면 너무도 쉽게 잡초가 제거되었다. 물론 뿌리가 있으니 다시 나오기는 하지만 나올 때까지는 깨끗하니까 허리 아픈 것도 잊고 새치 뽑듯 김매는 재미에 빠져든다.


 비록 잡초일지라도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씨가 맺힌다. 완전한 하나의 생명체이다. 인간도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면 완전 동격이다. 잡초를 뽑다가 과연 나는 잡초만 하기는 한가 하는 깊은 명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 끈질김에 있어서, 그 세심함에 있어서, 그 완벽함에 있어서, 때로는 그 위장술하며 그 친화력과 적응력에 있어서, 보기에 하찮다고 감히 잡초라 부르다니 겨울이 오면 모두 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존재들인 것을… 점점 더 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느 날 산책길에 길섶의 작은 풀꽃들이 예뻐서 몇 개 뽑아 집에 와서 가지런히 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하얀꽃 노란꽃 분홍색꽃 보라색꽃 아주 작아 잘 보이지 않던 꽃들이다. 나태주시인의 예쁜 시 <풀꽃>이 생각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잡초만 보면 발동하는 김매기 본능이 이럴 때는 살그머니 고개를 숙이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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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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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꿈을 꾼다는 것


 
 요즈음 내가 제일 요긴하게 쓰고 있는 물건은 딱정이라고 부르는 한국제 로봇 청소기이다. 모양이 흡사 커다란 딱정벌레처럼 생겨서 우리 가족은 그렇게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 산 청소기가 소리가 시끄러워서 번거롭던 차에 한국제 로봇 청소기를 써보니 너무도 쉽고 편리해서 주변에 얘기했더니 주위에서도 하나씩 사서 쓰기 시작했다. 


 약 30년쯤 전에 나는 꿈을 꾸었었다. 새해를 맞아 새해소망을 묻는 신문 앙케이트에 국산 카메라 둘러메고 세계 여행하는 거라고 썼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제 카메라는 명함을 내밀만한 형편이 아니어서 독일제나 일본제 카메라에 비해 아주 싸구려 취급에다 저가품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어떤가. 정말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카메라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등 가정에서 주로 쓰는 가전제품은 한국제가 아주 고급품이라는 인식이 점점 커지고 있다. 냉장고, 세탁기, 스토브, 청소기는 물론이고 밥솥도 전에 일본에 가서 한국 관광객이 일제 밥통 싹쓸이로 하나씩 사 갖고 오던 이야기는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가 된지 오래이다. 


 쌀밥을 어쩌다가 먹는 서양사람들도 간단하고 싼 전기밥솥만 있는 줄 알았다가 우리의 비싼 압력 밥솥을 보고는 놀라움을 표한다. 그리고 김치 때문에 따로 냉장고를 사용한다는 이야기엔 웃음을 터뜨리며 놀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전 제품점에 가면 한국제는 값비싼 고급반열에 놓여있고 점원들도 추천하곤 한다. 


 최근의 싸이 열풍이 언제까지 갈 것인가 하고 점치는 사람들이 많다. 벌써 3억을 넘어선 유튜브 조회수 역시 놀랍기만 하다. 오늘의 한류 열풍이 그저 일시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우리는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는 화랑도의 후예들이 아니었던가. 예쁘고 잘생긴 젊은이들을 뽑아 무리 지어 경치 좋은 산과 들을 다니며 무예와 풍류를 익힌 것도 어쩌면 걸 그룹이나 아이 돌의 시조가 아닌가 한다. 


 싸이를 위시한 한국 제품과 한류 열풍은, 우리의 기술과 국력을 넘어선 한국 역사와 문화의 저력의 확산이며 코리아라는 국가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 아무리 B급 문화라 하던 말던 괴짜 가수인 줄 알았던 싸이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전세계를 뒤집고 세계 대중음악계를 제패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K 팝, K웨이브, 경제든 체육이든 예술과 전통 문화 등 어느 분야에서든 이런 날을 이미 세종대왕은 예측하였을 것이다. 싸이가 어렸을 때 그에게 한글을 가르친 이에게 축복 있으라. 그에게 낙심하지 않고 주눅들지 않게 교육한 그의 부모에게 기쁨 있으라고 말하고 싶다.


 방송인 강호동은 5년 전 무릎팍 도사에서 당시 삶의 목표에 대해 고민하는 싸이에게 그의 성공을 기원하며,  2100년 국어사전에 ‘싸이 스타일’이 등재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미 지난13일 미국의 시사잡지 타임지가 인터넷판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금주의 중요한 단어로 선정 등재하였다. 


 강호동은 또 “선배를 따라가지 말고 싸이 스타일로 가라”는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싸이 스타일은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적 스타일, 모험적이며, 기죽지 않는 배짱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뉴욕의 록펠러 센터 플라자에서의 공연 때 익스큐즈미 라고 하며 마이크에 대고 ‘대한민국 만세’ 라고 말하는 모습은 귀엽기 조차했다. 


 일찍이 김구선생은 백범 일지에서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언급하며 우리 민족의 문화강국으로서의 꿈을 그리며 이렇게 말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시인 황순원은 꿈이란 시에서 이렇게 썼다.


  “꿈! 어젯밤 나의 꿈 / 이상한 꿈을 꾸었노라 / 세계를 짓밟아 문지른 후 생명의 꽃을 가득 심고 / 그 속에서 마음껏 노래를 불렀노라.” 


 꿈을 꾸지 않는다면  이룰 것도 없다.  우리는 모두 꿈꾸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다.  (2012)

 

201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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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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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가끔은 눈부실 때가 있다. 그것은 비 온 뒤의 5월의 신록일 것도 같고, 수목원에서 하늘로 뻗은 나뭇가지들을 우러러 보았을 때 아프도록 강한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보일 때, 잔잔한 파도가 이는 호숫가 물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볼 때 너무도 눈이 부셔서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눈을 가리게 된다. 갓 대학 졸업한 젊은 청년을 바라 볼 때, 신입사원일 것 같아 보이는 의욕에 찬 아침 출근길의 젊은이들의 바쁜 발걸음 속의 싱그런 에너지…


 눈이 부시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건만 그때는 물론 몰랐었다. 그저 언제나 고민 많고 웃음 많고, 꿈 많던 누구에게나 그랬던 젊은 날의 초상이 아니었던가. 함빡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휘어질 듯한 나무 가지의 꽃무리 보다 더 눈부신 것은 윤기 나는 초록 잎새들을 자랑하는 숲의 화음이다.


 밖은 5월의 신록이건만 도서관에서 책 속에 파묻혀 열중하고 있는 모습도 눈부시다. 젊음이 눈부신 것이다. 젊음이 눈부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이미 젊음에서 한 발자욱 뒤로 물러서 있음을 뜻한다. 이제 눈부신 나이에서 슬쩍 비켜서서 보니 그 눈부심은 청춘의 심볼이며 놀라운 팽창과 도약의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그 시기로 돌아간다면?  


 소설가 박경리는 말년에 이렇게 말했다.


  "모진 세월가고.. 아아 ~~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 한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 가분하다"    


 
 그리고 소설가 박완서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안하고 싶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안하고 싶은 것을 안하고 싶다고 말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난 살아오면서 볼 꼴 못 볼꼴 충분히 봤다.
   한번 본거 두번 보고 싶지 않다.
   한번이면 충분하다.
   한겹 두겹 어떤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이젠 고인이 된 두 작가의 말년의 시를 읽으며 나도 생각해 본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


 내가 첫 손녀를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딸이 첫아기를 해산했을 때 마치 내가 아기를 낳는 것처럼 흥분하고 설레었다. 그 순간 나도 다시 시계를 돌려 첫아이를 낳던 젊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은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맘속 깊은 곳에서 고개를 젓고 있는 나를 보았다. 


 인생 한번이면 족하다. 독신으로 생활을 하는 성직자에게 참 좋겠다고 부러운 듯 말하는 사람을 보면 그 분의 결혼생활이 미루어 짐작된다고 한다. 왜 아까운 세월 혼자 사느냐고 하는 사람이라면 결혼 생활이 아마도 행복한 모양이라고 짐작이 간다고 한다.


 그러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 언제나 해가 뜬 화창한 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고 또 언제나 흐린 날만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은퇴하고나니 어떤 분은 집에서 헐렁한 옷 입고 서성거리다가 앉아 커피 마실 때가 제일 좋다고 말한다. 통근시간에 쫓기느라 아침에 일찍 일어날 걱정 안 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사람도 있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늙어서 편해지는 것도 많다. 모든 것이 느긋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한 발짝 뒤에 서서 생각할 수 있어진다. 노오랗게 단풍 든 가로수와 떨어져 누운 잎새들을 보면서 조금은 여유를 찾게 되나 보다. 곧 겨울이 오겠지. 


 “하염없이 내려 쌓인 눈도 봄이 오면 어쩔 수 없이 녹고 만단다. 눈 속에는 언 땅을 뚫고 움터 솟아 올라오려고 애쓰는 안까님이 있단다.” 


 이렇게 말하고프다. 그리고 다시 또 새들의 날개짓을 부르는 연두빛 봄이 나뭇가지 끝 작은 잎사귀에서부터 돌아오겠지. 그렇게, 그렇게 눈부시게. (2014)

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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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나무 이야기

 

 

 

 저녁 먹고 나서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다.


 동네를 걷다가 보면 어느 집의 나무는 몇 년만에 담장을 훌쩍 넘도록 몸피가 무섭게 커버려서 그 옆을 지나노라면 공연히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연리지(連理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유래를 찾아보다가 나무의 모양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쳐다본 앞집 나무가 바로 그 연리지였다. 아는만큼 보인다더니 매일 산책하면서 바로 눈 앞에 두고도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것이다.


 가끔 나는 창밖의 그 나무를 부러운 듯이 내다본다. 행여 창문을 가릴까 살짝 빗기어 서서 둘로 된 기둥줄기가 곧게 자라 위로 올라가다가 중간쯤부터는 가지가 둥그스름한 삼각형 모양이 되어 2층 지붕 끝에 닿을 듯이 바르게 서있다. 


 하나처럼 보이는 두 그루의 침엽수 나무. 그들이 손잡기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서로 비키라고 밀기도 했을 것이고 네 그림자 때문에 내가 못 자란다고 화도 내었을 것이고, 밀쳐 내다가 서로 부대껴 상처내며 잎새를 떨구기도 했을 것이다. 


 가로등 어스름한 밤이면 서로 부비며 속삭이기도 하고 무섭게 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날이면 꼭 껴안고 흔들리지 않게 서로 의지하며 서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둘은 화해했나 보다. 우리 이럴게 아니라 서로 사이 좋게 배려하고 양보하며 하나의 보기 좋은 모습으로 가꾸어가자고. 그래서 더 튼튼하게 위로 뻗을 수 있었을 것이다. 


 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가다가도 유심히 보게 된다. 세 그루가 늠름하게 잘 뻗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잘 자란 우애 깊은 삼형제 같다. 


 아래는 여러 줄기인데 대여섯 그루가 위로 가면서 잎새와 가지가 하나로 엉키어 하나의 둥치를 이룬 것을 보면 마치 한마음으로 똘똘 뭉친 가족이 함께 서서 합창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럴 때 나는 패밀리 나무라 이름 지어준다.


 얼마 전에 찾아갔던 수녀원 뒤뜰 산책길엔 열 네 그루의 키 큰 나무가 정확한 간격으로 서있었다. 산책하며 기도하기 위해 오래 전에 그 누군가가 14처로 심은 것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얼마나 많은 기도를 먹으며 자란 성스러운 나무들인가. 나도 나무를 쓰다듬으며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그 나무는 위로하는 나무였을지도 모른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 수형이 아름다운 그래서 혼자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은행나무나 마로니에, 포플라, 후박나무 같은 것도 있다. 


 잘 자란 나무를 보면 의연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무도 사람처럼 어려서부터 잘 가꾸어야 한다. 길섶에 절로 자란 작은 풀꽃도 물론 아름답기는 하지만, 묘목일 때부터 전지를 하고 잘 손질하고 가꾸면 보기 좋은 나무가 된다. 난초 화분도 정성스레 가꾸고 쓰다듬고 보살펴줘야 좋은 난으로 향기론 꽃을 피우게 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6천살 정도로 추정되는 거대한 바오밥 나무가 있다고 한다. 생떽쥐 뻬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밥 나무 종류이다. 실제 사진을 보니 줄기가 둥글번번하니 정말 신기하게 생겼다. 


 일본 남쪽의 야쿠시마 라는 섬에는 그 줄기가 흡사 늙은 할아버지의 얼굴과도 같은 7천 2백 년 된 삼나무가 있다는데 그 근처에 는 메오토스기 라는 천년 된 부부삼나무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부부 나무가 손잡는데 5백 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천 년의 반이나 걸린 거다. 


 부부가 진심으로 손잡는 데는 얼마 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지금 우리 부부는 과연 연리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은혼식을 지나 금혼식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때론 틱탁거리니 말이다. 


 그리고 과연 우리의 아이들은 패밀리 나무가 될 수 있을까?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커다란 숲으로 이루어가길 바라는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그들은 알까?(2012)

 

201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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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입을 귀에 걸고

 

입을 귀에 걸고


 다섯 살 손녀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입을 귀에 걸고 라는 글이 나왔다. 대뜸 “할머니, 입을 귀에 건다는 게 뭐예요? 입을 어떻게 귀에 걸어요?” 라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순간 나도 잠시 갸우뚱했다. 


 “그러게 말이다. 아하! 싱글벙글 웃다가 보면 입이 귀밑에 까지 가는 것처럼 보이니까 입이 귀에 걸린다고 하는 거야. 자아, 이렇게 웃으면 입이 양쪽으로 자꾸만 올라가다가 귀에까지 가잖아?” 그 후론 손녀딸은 “입을 귀에 걸어요.” 라는 말을 자주한다.


 “흥미진진이 뭐예요, 할머니?” “으음 그건 너무 너무 재미가 있어서 갈수록 더 재미가 있어진다는 말이야.” 흥미진진한 일들이 이 세상엔 너무나 많이 널 기다리고 있단다. 라고 눈으로 말해주고 있다. 손녀 딸애의 앞날이 흥미진진하고 입이 귀에 걸리는 일들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하루는 ‘이츠고너비어 해피데이’ 라는 노래를 배워와서는 흥얼거렸다. 어린애라 흡수가 빠르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백지와 같다고 하지 않는가.  나도 덩달아 “이츠고너비어 해피데이” 하고 흥얼거리다 보니 정말 꼭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정말 좋은 노래가사이다. 아침에 데이케어로 가는 아이한테 “이츠고너비어 해피데이” 라고 말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늦잠꾸러기 할머니가 이럴 때만은 손을 흔들어주려고 일부러 일어나 매무새를 가다듬고 나온다. 그 애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흥미진진할 것이다.


 발레리나가 꿈이라는 다섯 살 손녀에게 발레를 배운다. 몇 달 배운 그 애가 뭘 하겠는가마는 “할머니 학생 이렇게 하세요. 발을 요렇게요. 손을 요렇게요” 하면서 가르쳐준다. 그러다간 “나 무서운 선생님이야, 선생님 화나면 무섭다.” 하면서 엄포를 놓기도 한다.


첫 손주를 보았을 때 할머니 소리가 어설프기만 했다. 손주가 넷 정도 되니까 이젠 정말 내가 진짜 할머니가 되었구나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의 첫 아기가 겨우 말을 배워 처음으로 “엄마” 하고 발음을 했을 때의 가슴 뛰던 그 감격이 아직도 생생한데 할머니라니… 


 그러다가 점점 자라가며 이런저런 재롱을 떠는 손주들을 보면 할머니라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 아이들이 커서 남자친구 얘기도 하고 여자친구 얘기도 하겠지? 아름다운 사랑도 느끼고 결혼도 하겠지? 그리고 또 엄마도 아빠도 되겠지? 생각은 꼬리를 문다. 우리 할머니가 날보고 느끼셨을 것 같은 생각들. 


 할머니의 환갑 되던 해에 내가 태어났고 10살 이후엔 할머니가 서울로 오셔서 함께 사셨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을 할머니와 보내고 할머니 모시고 살다가 결혼을 했다. 할머니는 다정하신 성격도 아니고 오히려 내게는 엄격하신 편이었다. 그 시절에는 거의 집에 일하는 사람이 있었는데도 늘 손을 쉬지 않고 무언가 하찮아 보이는 것 같은 일을 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바늘방석이나 골무를 만들어 나누어 주시기도 하고 콩나물 콩을 밥상에 놓고 고르고 계시는 모습도 보았다. 사람들은 그것이 할머니의 건강비결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주 노년에는 안경 쓰시고 커다란 글자의 옛날 글씨로 된 성경책을 읽으시다가 십자가의 슬픈 장면에선 눈물도 짓고 그러다가 낮잠을 주무시기도 했다. 


 할머니는 늦가을이 되면 솜을 두어 아버지 명주 바지 저고리를 지으셨다. 아버지는 퇴근해오시면 할머니가 손수 지으신 명주 한복으로 갈아입으셨다. 아주 간혹 어떤 때는 그 위에 두터운 모직 오버코트를 입고 외출하시는 때도 있었다. 아버지의 따뜻한 겨울이 할머니의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초등학생이던 어린 내 동생과는 정월이 아니라도 윷놀이나 반질 반질 길이든 길쭉한 박달나무로 된 주사위 놀이도 하셨는데 늘 할머니 옆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맴돌던 동생이 그래서 성격이 느긋하고 낙천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동생은 학교 다녀오면 얼른 할머니가 계시는 안방으로 가서 할머니 방의 장롱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사탕이나 과자나 그런 먹을 것을 꺼내어 먹고는 할머니의 동무가 되어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는 일부러 손자를 옆에 끌어들이기 위해 항상 먹을 것을 그 속에 감추어 넣어 두셨을지도 모른다. 나는 일부러 먹을 것을 뒤지러 할머니한테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느 만치 커있었기에 할머니 드시라고 혹은 동생 주라고 모르는 체 했을 수도 있겠다. 동생과 나는 열 살이나 차이가 났었으니까. 


 우리 할머니의 곡조 없이 부르시던 찬송가 소리. 언젠가 주일 미사 때 노인 한 분이 내 옆에서 그렇게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할머니의 찬송가가 생각이 났었다. 아마도 요즈음의 랩의 원조였을까? 그래도 언제나 따뜻한 할머니 방 아랫목과 언제나 아랫목에 깔려있는 부드러운 명주로 된 할머니의 손때 묻은 그 따뜻한 이불. 나는 거기에 두 손 넣고 드러눕기를 좋아했다.


 할머니는 “일러라.” (일어나라) “물러라.”(물러나라) “이니라” 라는 옛날 말투를 쓰셨다.  “종의 종 노릇 멈의 멈 노릇이니라. 종이나 행랑어멈에게 시키는 것도 다 알고 있어야 시킬 수 있느니라. 어서 밖에 나가 부엌일 좀 거들어라.” 라고 하셨지만 내가 안 나가도 부엌에서 누가 부르지는 않았기에 살살 피해 다녔다. 그래서 결혼 후에 내가 내 살림을 하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할머니 말씀이 절실하게 생각나기도 했다. 


 어른 앞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뒷태를 보이지 말고 뒷걸음으로 물러나야 한다고 하셨다. 그냥 방문을 확 열고 쑥 나가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안동 권씨는 양반이니라 라고 하시며 긍지를 지키려고 하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신식공부는 하지 않으셨지만 한글로 고문과 같은 문장의 편지를 멀리 있는 동생에게나 미국에 있는 손녀딸에게 쓰기도 하셨는데 할머니가 보시던 성경책의 글씨도 역시 그렇게 어려운 아래아가 달려있는 훈민정음 글씨에 가까운 한글로 된 것이었다. 할머니의 성경책을 읽으며 나도 고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의 틀니는 아드님이 자주 바꾸어드렸다. 엄마는 질색을 했지만 나는 그 틀니를 내 입에도 넣고 보기도 하고 씻어드리기도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엄마와 할머니, 나와 할머니는 관계가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삼 남매를 두셨고 거기서 손자 손녀가 열댓 명이나 되었지만 아마도 내 동생과 내가 가장 많이 할머니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내 동생은 아버지 쉰에 본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말 그대로 금지옥엽이었다. 내게는 남동생을 보았다고 장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도 아들에게만 쏠리는 시선에 내가 질투할까 봐 그러셨을 것이다.  


 나와 할머니의 다른 점이라면 나는 손녀딸에게 “아이구 예뻐” 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이렇게 할머니를 기억하는 것처럼 나의 작고 귀여운 손녀도 언젠가는 나를 기억하게 될까? 손녀딸을 보며 나의 할머니 생각을 한다. (2012)

 

201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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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그리운 나무

 

 


 사람만 그리워하는 건 아닌가 보다. 나무도 그리워질 때가 있다.


 긴 여름 방학이 끝나고 다시 교정에 들어설 때면 나무들이 성큼 웃자라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개학이라고 산뜻하게 이발한 학생들과는 반대로 더부룩한 모습이다. 그래도 그 동안에 훌쩍 커버린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운동장가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은행나무들은 “함께 모여 기다리고 있었어요.”라고 합창하는 것도 같다.


 본관에서 신관으로 가노라면 화단 오른쪽에 멋진 커다란 후박나무 하나가 서 있었다. 곧 3층까지도 닿을 듯 했다. 잎새가 고무나무처럼 두텁고 예쁜 모습이어서 어느 가을에는 거기다가 우표를 붙여서 친구들에게 진짜 나뭇잎 엽서를 띄운 적도 있었다. 주먹만한 열매는 처음에는 초록색이다가 나중에는 점점 붉은 자줏빛으로 변하는데 마치 아보카도와도 같았다. 


 나무의 늠름한 자태가 좋아서 사람도 저렇게 늠름하게 잘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매시간 학생들에게 허리를 곧게 펴고 바른 자세로 앉으라고 당부를 하곤 했다. 하루에도 수없이 본관에 있는 교무실에서 신관의 교실로 오가면서 때로는 씩씩한 육군사관학교 생도의 모습을, 때로는 위엄 있고 당당한 이순신장군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어느새 방학이 지나고 와서 보니 그 동안 운동장 공사를 하느라고 신관 앞의 화단이 몽땅 없어져 버리고 작은 관목들만 몇 그루 남이 있었다. 그때의 서운함이라니…


 못내 아쉬워하며 지내던 어느날, 대입 체력장 검사를 하는 날이었다. 턱걸이 검사 요원으로 차출되었는데 마침 평소에는 잘 가지 않던 저 아래 운동장이 시험장이었다. 철봉대가 있는 아래쪽으로 가고 있을 때 운동장 구석 쓰레기 소각장 옆에 가지가 다 잘린 채 외롭게 서있는 키 큰 나무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보니 내가 좋아하던 바로 그 나무였다. 몰골이 너무 가여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옮겨와서 살아있어 준 것만도 고마웠다. 수업 중에도 어쩌다 창문 너머로 멀리 서 있는 그 나무에게로 시선이 가면 가슴이 아팠다. 어느날 드디어 나는 담임 반 아이들에게 그 나무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열 다섯 살 소년들의 마음도 나와 비슷했나 보다. 몇 명이 제안하여 나무 살리기 작전에 돌입했다. 그래서 두 명씩 조가 되어 아침 저녁으로 물을 두 양동이씩 부어주기로 하였다. 소년들은 열심히 물을 주었다. 나보다 먼저 오는 학생들이라서 출근 길에 멀찍이서 보아도 땅이 젖어있는 걸로 보아 벌써 당번이 자나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다가오고 방학이 되었다. 겨울 동안엔 나무도 쉴 거라고 생각했다.
 봄이 되고 다시 아이들이 모여왔다. 한 학년 진급한 아이들 중엔 반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나무에 물을 주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점심시간만 되면 일부러 산보 삼아 나무한테까지 걸어가서 나무기둥을 쓰다듬으면서 “제발 살아나다오.” 라고 말하곤 했다. 나무에 새 잎새가 돋는 듯했지만 시원치가 않았다.


 다시 또 방학이 되고 개학이 되었을 때 운동장 한 귀퉁이에 커다란 나무뿌리 하나가 덩그라니 거꾸로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목공예에 조예가 깊었던 체육선생님이 가져다가 모양을 살려서 티테이블을 만들 거라고 했다. 아마도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 될 것이다. 그렇게라도 흔적으로 남아있어 달라고 아쉬운 마음을 애써 눌렀지만 가슴 한 켠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지금도 꼿꼿하게 자세가 바르고 훤칠한 남자를 보면 그때 그 후박나무가 떠오르고 나무와 함꼐 양동이로 물주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2013)

 

201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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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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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바늘 한 개

 

 


 대개는 바늘귀 두 개짜리 바늘에 대해 잘 모른다. 아주 오래 전에 잘 아는 분이 내게 준 선물이 있었는데 한 개의 바늘이었다. 선물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부피가 있을 법한데 바늘 한 쌈이 아니라 달랑 한 개였다. 참 어쩜 이렇게 쩨쩨한 선물이 다 있나 하고 속으로 생각한 내 마음을 아셨는지  


 “바늘을 여러 개 주면 귀한 것을 모르니까 한 개만 주는 거예요. 이것은 정말 귀한 바늘이예요. 잘 쓰세요.” 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분은 출근길에 만나서 친하게 된 이웃 학교 여선생님이었다. 나보다 스무 살쯤 연상으로 돗수 높은 안경을 쓴 독서광이었는데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일본어로 된 문학잡지를 빌리는 단 한 명이 바로 그분이었다. 어쩜 그 분을 위해 도서관에서 일본책을 구입하는 지도 몰랐다. 


 아침 출근 버스 안에서는 언제나 지난 밤에 읽은 책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년을 몇 년 앞둔 그 분은 자기 아파트에는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만은 예외가 되었다. 당뇨 때문에 고생이라 때로는 넘어지는 일도 있어서 무릎이 멍들기도 했기에 걸을 때는 내가 옆에서 늘 보살펴드리는 기분이었다. 


 혼자 사는 그 분께 매일 아침 모닝콜을 해드리고 우리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같은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한 정거장 더 가서 그 분의 학교가 있었다. 몇 년을 그러는 동안 우리는 아주 친해져서 맘을 터놓고 비밀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분은 정말 아는 게 많고 사람을 끄는 묘한 화술을 지니고 있었다. 때로는 내게 여러 가지 조언도 해주었다. 옷을 항상 잘 다려 단정히 입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지 말 것이며 외출 후에는 옷을 털어 걸어두어야 한다는 등. 


 아무튼 내가 그 분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그 분 방에는 항상 그때는 귀했던 원두커피를 끓여 다른 선생님들이 들락거리게 한다고 했는데 이상한 것은 13층에 살던 내가 쪼르르 7층에 있는 그 분의 집에 갈 때가 있었는데 한번도 차라든가 그런 걸 내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실 것이나 먹을 것을 좀 들고 가곤 하였다. 아마도 내가 가지고 가서 그랬을 것이라고도 생각해 본다.  


 매번 방학이 오면 어김없이 해외여행을 다녀오셨는데 선물로는 이야기 보따리가 다였지만 어떤 선물보다도 아주 흥미로웠다. 


 그 분께로부터 받은 눈에 보이는 단 한가지 선물이 바늘이었다. 그 바늘이야말로 정말 오래도록 기억되고 내 생애에 커다란 의미가 있는 바늘이다.


 나는 이 바늘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조침문을 쓴 유씨 부인처럼 바느질 상자에 고이 모셔두고 아이들 떨어진 옷을 꿰맨다든가 떨어진 단추를 달기도 하면서 바느질에 취미를 붙였다. 


 이 바늘은 특이하다. 바늘귀가 두 개인 것이다. 그 후에 나도 그런 바늘을 구해서 아직 모르는 이에게 한 개씩 나누어주며 잘 쓰라고 똑같이 당부를 하였다. 독일 가는 사람이 있으면 사오라고 부탁도 했다. 


 그 후에 보니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그걸 만들고 있는데 벨기에제 바늘이 제일 좋았다. 나는 어느덧 바늘 수집가가 된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눈이 나빠진 후에도 바늘귀를 쉽게 낄 수가 있어서 그냥 바늘을 실에 대고 누르면 바늘귀에 쏙 들어가도록 되어서 편리하다고 할까.


 바느질을 할 때마다 아끼고 절약하며 살라는 말없는 교훈을 내게 주신 그 분을 떠올린다. 그 분은 내게 바늘 한 개로 많은 지혜를 선물로 주셨던 것이다. 아직도 우리 가족은 그 분을 로사 선생님이라고 추억하고 있다.   (2012)

201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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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아클로폴리스의 팬던트

 

아클로폴리스의 팬던트

 

 

 액세서리를 별로 걸치지 않는 나지만 여행지에서 별로 비싸지 않은 팬던트를 하나 사서는 때때로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한다.


 몇 년 전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남편과 둘이서 트롬이라 불리는 전차를 타고 사흘 동안 시내 구경을 하고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트롬 안에서도 교회 앞을 지날 때는 성호를 그었다. 재래시장에서 과일을 사먹어 보기도 하고 수퍼에도 들어가 보고 하노라 발바닥이 아픈 것도 몰랐다.


 아클로폴리스 바로 아래에 있는 동네를 기웃기웃 구경하며 다니다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는데 타원형의 은으로 세공된 그림에 연하게 칼라를 넣은 것이었다. 아무 데서도 본 적이 없었다. 성모마리아의 모습인데 열쇠고리 용도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아름다웠다. 주인에게 이걸 목에 거는 팬던트로 만들어 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그는 흔쾌히 고리를 떼어내고 줄을 맬 수 있도록 고쳐주었다. 


 실은 그 집에 화장실을 빌리려고 들어갔던 것인데 화장실은 2층의 아주 불편한 곳에 있었지만 쓰도록 해주었기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오는 길에 그 집에서만 볼 수 있었던  신기한 걸 발견하고 친절에 보답하느라 값을 부르는 대로 주고 샀던 것이다. 그 후 내내 목에 걸고 다녔다. 


 오래 전 여고 졸업 40주년 기념여행에서 40년 만에 만난 친구의 목에 걸려있던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사각형의 초록색 돌로 된 팬던트가 좋다고 딱 한번 말했을 때 그 친구는 선뜻 풀어서 내 목에 걸어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 친구를 한국 방문길에 찾아갔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시골 고택을 지키며 멋지게 살고 있었다. 나는 친구가 차려주는 맛깔진 밥상을 기분 좋게 먹고는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봄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오르는 길에 표고버섯 농장이 있었는데 갓난아기 주먹 같은 표고 하나를 뚝 따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향긋한 표고 향기가 입안에 감돈다. 머리칼에 봄눈이 내려와 살폿이 앉았다가 날아간다. 


 피아노가 전공인 그 친구는 피아노를 칠 때 자기가 아닌 자기 엄마를 본다고 했다. 무언가 친구가 득도한 듯 철학적인 듯한 말을 했다. 어머나 이 애가 그 동안 내공이 많이 쌓였구나. 


 L.A 에서 나에게 선뜻 팬던트 목걸이를 풀어 주었던 일이 생각났다. 몇 초쯤 망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면 어쩌나 하고 순간적으로 내 가슴에 있던 아크로폴리스의 팬던트를 빼내어 친구의 목에 걸어주었다. 몸피가 나보다 좀 아담하게 작아서 무거울까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 기억하고 있어. 네가 여러 친구들과 함께 너희 집에 모여 찬송가를 녹음해서 보내주었던 것 잊지 않고 있단다. 그 때 네가 피아노 반주를 했었지?” 


 그 때 그 노래를 들으며 나는 마구 울었었다. 흡사 미친 것만 같았다. 고마워서 울고 다듬어지지 않은 합창소리가 꼭 내 목소리 같아서 웃고… 또 듣고 또 듣고, 또 울고 또 웃고… 


 똑 같은 여러 명의 내가 그 노래 속에 있었다. 10여 년 전 그 때 암 투병 중이었던 나. 아우성 속의 친구들의 격려 때문이었던가. 그 후 나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진정 고마운 친구이다.


 내 목에 걸려있는 십자가 표시가 있는 초록색 돌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한다. 친구의 목에도 지금 걸려 있을까. 그 아클로폴리스의 팬던트가. (2011)

 

201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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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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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2
리마인드 웨딩

 

 


 
 아침 일찍부터 딸애가 미장원에 다녀오라고 한다. 한복에 어울리는 머리로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미리 요금까지 내고 왔단다. 미용사는 아주 정성 들여서 올린 머리를 해주었다. 부모님 결혼기념일에 가족사진을 찍기로 예약을 했으니 준비하고 가자는 거였다. 엄마 한국에 오실 때 가족사진을 찍을 테니 한복을 좀 챙겨오라던 딸애의 말이 있었다. 


 은혼식, 금혼식도 아니고 회혼례도 아닌 결혼 40주년은 별로 기리지도 않는 것 같은데도 오늘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은 그냥 한복 차려 입고 가족사진 한 장 찍자는 것이었다. 남산에 있다는 사진관으로 향하는 길에 딸은 미리 주문한 꽃다발도 찾았다. 차는 마침 토요일인데도 밀리지 않고 잘 빠져간다. 거의 다다르자 사진사가 야외에서 기다리니 야외촬영을 먼저 하자고 한다. 


 “무슨 야외 촬영씩이나? 그만 둬.” “그래도 사진사가 밖에서 기다리는데요. 저는 주차하고 올 테니 모두들 오른쪽으로 해서 조금만 올라가세요.” 작은 딸애는 언니가 시키는 대로 잠자코 우리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손주들 손잡고 한옥마을에 들어서서 걸어 올라가는데 갓 혼례를 치른 신랑신부로 보이는 커플과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 나오는 것을 보니 여기서 결혼식도 하는 모양이었다. 두리번 두리번 사진사를 찾고 있는데 민씨 집이라는 한옥 대문이 보이고 한쪽 기둥 앞에 방이 붙어있다. 가까이 가 보니 신랑 아무개 신부 아무개 라고 씌어 있다. 자세히 보니 우리 부부의 이름이었다. 


 순간 기절초풍. 놀라서 두발이 얼어붙어버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게 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딸애들이 깜짝쇼를 벌인 게로구나 그제서야 사태를 짐작하였다. 대청에는 시동생이 한복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어머나. 여긴 웬일이세요?” 또 한번 깜짝 놀라는 내게 시침 뚝 따고 싱글싱글이다.


 그때부터 신랑이 된 남편과 신부가 된 나는 각기 다른 방으로 인도되어 분장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뭉클해지더니 눈물이 맺힌다. 아이들이 우릴 기쁘게 해주기 위해 그 동안 몰래 준비했을 생각을 하니 눈물 방울이 톡 다홍치마 위로 떨어진다.


 옷을 갈아 입히고 연지곤지 찍고 쪽도리까지 씌워주었다. 생전 처음 입어보는 원삼 당의가 어색하다. 옆에서 시중드는 수모는 조곤 조곤 신부가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었다.


 “두 손을 모아 눈 위로 높이 올리고 발을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세요. 절할 때는 오른 무릎 먼저 굽히고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천천히 많이 숙이세요.” 라며 절 연습도 시켜주었다.


 드디어 시간이 되자 대청을 지나 차일이 쳐지고 멍석이 펼쳐져 있는 마당으로 내려간다. 조심조심 떨리는 마음은 흡사 진짜 어린 새 신부가 된 심정이었다. 내리 깔은 눈으로 긴치마를 밟을까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는 버선발.


“앞에 문턱이 있어요. 자, 마루로 나갑니다. 그리고 고무신을 신으세요. 마당으로 내려갑니다.”


 초례상엔 청색 홍색 촛불이 켜져 있고 밤 대추랑 음식들이 놓여있다. 주례가 시키는 대로 서로 절도 하고 갖다 주는 대로 한 모금 술잔도 입에 댄다. 나중에 보니 시동생은 신랑에게 기러기를 안겨주는 기럭아범 역할이었다. 옥색도포 차림의 주례는 40년 된 부부의 주례를 맡으니 감개무량하고 흥분된다며 그 동안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도 많았을 테지만 앞으로도 일편단심 잘 살라고 의미있는 주례사까지 한다. 6명의 악사가 연주하는 흥겨운 가락의 음악도 흐르고 있다. 


 그런데 모여있는 마당에 가득한 축하객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제서야 수줍은 신부는 조그맣게 옆에서 시중드는 수모에게 물어보았다.  “좀 봐도 되나요?”  “살짝 보셔도 되요.” 라고 허락을 해주었다. 이마 위의 두 손을 조금 내리고 흘끗 훔쳐보니 앞에 백 명도 넘어 보이는 하객들 맨 앞자리에 시누이 부부와 시동생 부부가 앉아있다. 아니 저분들은 언제 또 알고 왔을까? 


 나중에 나온 사진을 보니 신랑에 앞장서 청사초롱을 들고 엄숙하게 식장으로 들어온 다섯 살, 세 살 손녀 손자가 귀여워 모여든 관광객들의 감탄의 시선을 모았나 보다. 역시 처음엔 놀랐던 남편도 시종 싱글벙글하고 있는 늙은 새신랑이었다. 


 이렇게 식이 끝나고 모두 열 두 명의 식구들이 모여 조촐한 식사를 하였다. 그 이상은 딸애들의 호주머니가 넉넉지 못할 것이었다. 식당 창 밖으로 우리가 처음 만나던 세종호텔이 멀리 보였다.


 그러고 보니 40년 세월이 어느새 바람처럼 지나갔던가.


 <…그날 둘이는 명동으로 가서 일식 집에서 식사를 했었지. 난 위대하다며 체면 차리지 않고 맛있게 먹었지. 그이는 왠지 친근한 인상이었어.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의 명동거리는 북적거렸고 동생 먼저 혼인한 노총각의 마음은 아마도 조급하기도 했겠지. 그 이듬해 봄이 되자 결혼식을 하고 수돗물이 찔끔거리는 기자촌 산꼭대기 동네에서 신접살림을 차렸지. 아이 셋 낳을 때까지 거기서 살다가 이사 일곱 번. 나중엔 바다 건너 이주까지 하고…애들 결혼하고 손주가 4명이나 되었고… 나는 성공하고 싶었어. 적어도 실패한 결혼이 아닌 것이 결혼의 성공이라고 믿었어. 내 아이들도 그걸 인정해 줄까? 사십 년 세월. 그 동안 눈물 한 방울도 없었을까. 좋기만 한 세월이었을까.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서로를 굳게 사랑하고 살라던 주례의 말을 지키려고 서로 충실 하려고 노력해온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이만하니 건강하게 살아온 것만해도 행복이 아닐까…> 


 휘익하고 재빠르게 필름들이 지나간다. 허락해 주신다면 치매에 걸리지 않고 금혼식에 회혼례까지 할 수 있도록 욕심을 부려 볼까. 다시 시작한다면 알콩 달콩 재미있게 살아볼까나. 다시 태교부터 제대로 하고 아이들도 더 잘 길러볼까. 다시 또 그 고생과 기쁨과 눈물로 점철된 아름다운 무늬의 옷감을 짜는 베틀 앞에 앉아 볼 수 있을까. 


 풀어내어 다시 짜기는 정녕 힘들 테고 앞으로 남은 무늬만이라도 아름답게 짜보아야 할 것이다. 이생 삼생이란 말은 없고 일생이란 단어만 있는 이유도 알 것만 같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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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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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9
노량진

 

 

 
 
 다음 역이 노량진이라고 지하철 구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  수산시장. 벌써 오래 전부터 수산시장에 가고 싶었기에 얼른 내리기로 했다. 서울에 오면 먼저 가는 곳이 수산시장인데 이번엔 통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마침 노량진이라니 잘 되었다 싶어 곧바로 내려서 조금 걸어가다가 굴다리를 지나 어시장으로 간다. 


 굴다리 입구엔 노점상들이 채소를 놓고 팔고 있었다. 재래시장엘 가면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언제나 생기가 난다. 어렸을 때는 엄마 손잡고 남대문 시장에 따라간 적이 많았다. 그 때는 슈퍼마켓이 없었고 동네에 구멍가게도 별로 없어서 시청 가까이에 살았던 우리는 남대문 시장까지 찬거리를 사러가야 했나 보다. 


 입구에 나물들을 좌판에 놓고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며 잠시 후 나올 때 사야지 하고 생각했다. 어시장에 들어서니 낮 시간이라 한가해서인지 호객하는 상인들이 많다. 생선 골목의 비릿한 내음이 풍겨온다. 바닥에 질척이는 물이 튈새라 조심스레 밟고 지나가며 매대에 무더기로 놓여있는 가자미, 홍어, 갈치, 고등어, 조기 등을 눈여겨보며 걷는다. 낯익은 생선들이 눈에 뜨이자 왈칵 반가움에 정다움까지 밀려온다. 


 활어는 비싸기도 하려니와 또 회를 좋아하지 않으니 해물탕이나 생선찌게를 할 요량으로 이것저것 사서 담는다. 마침 저며놓은 찜꺼리 아구도 한 소쿠리 사고 보니 제법 묵직해졌다. 적당한 크기의 알밴 조기도 착한 가격이라 사고 나니 한껏 부자가 된 듯 흐뭇한 마음이 되어 발길을 돌린다.


 굴다리 안에도 야채상인들이 주욱 좌판을 벌이고 앉아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도라지를 다듬거나 더덕을 까거나 실파를 다듬고 있다. 아까 맨 처음 봐두었던 초입의 할머니 앞으로 간다. 두릅과 깻잎나물을 사고, 이왕이면 하고 고추조림용 꽈리고추도 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2천 원어치 사는데도 푸짐하게 넉넉히 주면서 더 달라지도 않았는데 덤까지 얹어준다.


 아주 작은 몸집을 한 할머니는 쉴새 없이 다듬던 손길로 검은 비닐봉투에 꾹꾹 눌러 담아주고는 까맣게 갈라진 그 손끝으로 거스름돈도 세어서 내어준다. 부지런한 손이다. 그제서야 주름지고 둥그스름한 할머니 얼굴로 시선이 옮겨졌다. 초로의 할머니, 아니 이 여인은 이 시장, 목 좋은 여기에서 몇 십 년을 지냈을 지도 모른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옆의 다른 이들과 둘러앉아 장바닥에서 점심밥을 먹으며 때로는 웃기도 하고 잡담도 하였으리라. 자식 학교 가는 얘기도 하고 고장 난 연탄보일러 얘기를 했을 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아 이 여인은 나랑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춥던 일사후퇴 때 화물기차 통나무 위에 올라가 한강을 건너던 그때 함께 있었을 지도 모르고, 같은 해에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리는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함께 한글을 배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콩나물 시루라 불렸던 교실은 한 반에 학생이 7십 명도 넘었고 책걸상이 모자라서 둘이 앉는 걸상에 셋이 앉았다가 밀려 떨어지기도 했었다. 시험 봐서 중학교엘 가야 했으니 6학년 어린 나이에 잠 안자고 입시공부를 해야 했다.

그때 모의고사 보다가 책상 위에 엎드려 침까지 흘리며 자고 있던 반 친구를 보고 담임 선생님이 너 그러다간 X여중이나 Y여중에 가야 한다고 야단치던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빨간 색연필로 서로 바꿔 채점하며 날마다 시험 또 시험이었다. 어쩜 덕수궁에서 열린 미술대회에 나갈 때 크레용이 없어서 못 갔던 애가 그 친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럴 때 왜 드는 것일까. 미니 스커트가 한창일 때 그 애도 함께 미니 스커트를 입고 다녔을 거야. 요즈음 유행하는 핫 팬티처럼 모두들 미끈한 무우 다리를 내놓고 다녔었지. 그러다가 판탈롱 수우트라고 나팔 바지도 입었고…  아마 그 애도 그랬을 거야. 그때 여자애들은 다 그랬으니까. 모노톤의 빛 바랜 흑백사진 몇 장이 휙 지나가는 듯 하다. 


 갑자기 얘, 영자야, 하고 부르고 싶어졌다. 아마도 순이 아니면 옥자, 아니면 영희, 그럴지도 몰라. 갑자기 반가움에 와락 안아 주고픈 충동을 느낀다. 작고 동그스름한 그 얼굴이 어린 시절의 얼굴로 돌아가서 오버랩 되어 아주 귀여운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바로 내 얼굴 같기도 하다.  


 아버지는 개장을 만든다며 동네 인부를 불러 일을 시키고는 앞마당 한 켠에 벽돌로 쌓아서 기와 지붕까지 얹어 아주 튼튼하게 만들고 마루까지 놓아주었다. 그 일은 하루에 끝나지 않고 아마도 사흘은 걸린 것 같았다. 일부러 일을 만들어서 시킨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는 품삯을 아주 후하게 치러주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저 할아버지가 나랑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구나.” 라고 하셨다. 그때 내겐 그게 너무도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개장에 지나치게 공을 들이는 거며 단지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그 말에 품삯을 지나치게 많이 주시는 게 아닐까 왜 그러셨을까 의아했었다. 그러나 나도 그 때의 아버지 나이 만큼이나 할머니가 된 이제서야 그 맘을 이해할 것만 같다.


 다시 전철을 타기 위해 역으로 돌아온다. 지하로 내려서자 마자 손 전화로 슬라이딩 도어에 써 있는 싯귀를 찍고 있는 중년여인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늦가을 청량리/할머니 둘/버스를 기다리며 속삭인다/"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유자효(1947-) ‘인생’)(2011)

201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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