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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원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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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원 단상(斷想)
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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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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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어울림의 미학(상)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감칠맛 없고 좀은 투박하나 내 용모가 내 선택이 아니듯 환경유전버릇(DNA)인걸 내 어쩌겠는가? 절대로 고집이 아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부드러운 서울 말로 바꿀 수도 없지 않으나 그게 쉬운가? 


부모 자식도 그렇다. 비록 내 선택이 아닌 천륜적 만남이지만 배우고 못 배우고, 잘생기고 못 생기고의 우열 따위에 상관없이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인연으로 하늘에 감사하며 살고 있는 터다. 


우주는 다름의 전시장이다. 그 모든 것이 다르기에 만물(萬物)이라 하고 그 상(象)이 만가지라 만상(萬象)이라 하는데 그 만물만상이 변할 줄 모르고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다면 세상 무슨 맛으로 살아질까? 


더욱이 만상이 한가지로 닮아 있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질식할 것 같다. 지옥이 별 곳인가? 바로 그런 곳이지 싶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작이 무언고 하니 닮은꼴로 획일하자는 꼬드김이다. 다름이 다름의 값어치로 있는 다양성의 묘미, 양귀비가 예쁘다고 세상 여인들이 제다 양귀비 붕어빵으로 닮아버리면 그래 살맛 날까? 이제 맞춤형 성형 미인들이 판을 칠듯하니 아찔하다.


 나는 그때 군 병영생활에 힘들어 했었다. 같은 옷 같은 신발에 같은 밥을 같은 양으로 먹고, 같은 시간에 자고 일어나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이 뛰어야 하는 게 고역이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는 남과 다르기 때문이고, 이 개성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하늘이 준 절대 몫(DNA)이라 그 어떤 이유로도 흠집 낼 수 없는 나만의 존엄성이다. 


그러함에도 그 모든 것들과 더불어 함께 어울림으로써 만이 기능적 존재가 된다는 조건이 있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다름의 미학이며 어울림의 미학이다. 그래서 혼자 살 수 없어 사람인(人) 자라 했다.


천지만상엔 똑같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 그 형상, 그 색상, 그 소리, 그 맛깔이 다르다는 것, 이 얼마나 살맛 나고 신나는 일인가. 그러면서도 이들 개체들이 홀로 각기 따로 있지 않고 서로 어울려 있을 때가 더 좋게 보이고 값져 보인다는 것, 화단은 다양한 꽃의 어울림이며, 오케스트라는 다양한 소리의 조화가 아닌가. 


무지개 또한 3원색이 만들어 내는 색의 파노라마이고, 캐나다의 명물 가을단풍 풍경은 자연이 그린 수채화이며 우리가 즐겨먹는 비빔밥은 각개 나물이 버물려 어우러져 나오는 맛의 향연이다.


한가지로 획일하자 함은 우주본질을 거역하자 함이며, 다름이, 비교가 없는 곳엔 새로움(탄생)이 숨어버린다.


심지어 생물과 무생물이 쓸모의 다양성으로 존재, 서로 먹이사슬로 얽혀있다는 사실, 이를 자연생태계라 이름하는데, 어지간한 생태계의 상처는 자연치유가 되나 지나치면 치유불능 공해에 찌들어 생명체의 멸종(씨앗의 죽음)으로 이어질까 인간들은 지금 떨고 있다.


 ‘좋다’를 한자로 쓰면 호(好)다. 처녀(女) 총각(子)이 함께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모습, 보기만으로도 좋다. 둘이 있어 좋고, 이웃이 있어 좋다. 이게 바로 하늘 뜻이다.


우리는 종종 차이를 차별로 인식할 때가 있다. 자기 것에 애정을 가질수록 그 징후는 심하다. 사람이 덜 될수록 제 새끼만 감싸 돈다. 


다름을 차이로 보지 않고 차별의 눈으로 보는 데서 세상의 비극이 시작 된다. 흑과 백의 차이, 길고 짧음의 차이, 높고 낮음의 차이, 차이가 없는 것은 이 우주상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그 차이 사이를 헤엄치듯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다.


만물을 비추는 저 하늘햇살이, 만물을 적시는 저 하늘빗물이, 만물을 숨쉬게 하는 저 하늘공기가 차별이 있는가? 하늘은 만물의 근원이며 만물의 어버이시다.


만물을 운행하는 저 바탕하늘이 나만을 택했다는 선민의식이 되면 남은 이방인이 되고, 남의 하늘은 우상이 돼버린다. 참으로 웃기는 난감한 수작이다. 그리하여 내 것만이라는 아집(ego)에 의해 전쟁도 불사, 살상을 춤추듯 천하에 바보짓거리를 밥 먹듯이 벌여 지구촌이 쑥대밭이 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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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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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사이의 실종(다름의 미학)

 

60살 늦은 나이에 어렵게 배운 나의 애창가 ‘사철가’ 몇 소절 한번 들어보소.


“이산 저산 꽃이 피니 산림풍경 너른들, 만자천홍 그린 병풍 앵가접무 좋은 풍류, 세월 간줄을 모르게 되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된들 또한 경계 없을 소냐, 한로상풍은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피잖는 황국단풍은 어떠하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이 펄펄 휘날리어 월백설백 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일레라” 


사철을 노래한 이 창 소리가사처럼 이곳 내가 사는 캐나다 토론토도 사계절이 비교적 분명했었다. 그런데 근년 들어 겨울이 겨울 같지 않고 봄이 봄 같지가 않다. 


모든 생물들이 기후환경에 민감하게 길들어 살아가고 있는데, 예측이 어긋난 기후적응에의 혼돈은 심히 난감한 일이고, 먹을 거리 수급에서부터 차질이 불가피하고 생활관습 등으로 받을 긴장(스트레스) 또한 보통 문제가 아니다. 


계절(季節)의 혼돈도 혼돈이지만, 지역(東西), 장유(長幼), 남녀(男女)의 구별이 슬그머니 구렁이 담 넘듯 지워지면서 사이, 차이, 구별의 선이 흐려지니 괜히 공해에 이유를 붙여 말세의 징조라 말들을 한다. 


아이가 어른 같고 어른이 아이 같은, 처녀가 총각 같고 총각이 처녀 같은, 아내가 남편 같고 남편이 아내 같은, 총각김치 다꾸왕(단무지) 피끌(오이지)이 함께 나란히 밥상에 오르는 세상, 과연 멋진 세상일까? 


인간이 꿈꾼 지상낙원이 바로 이런 걸까? 절대로 아닐 것이다. 음양이 만나 불꽃이 티고, 다름이 있어 그 삶의 풍요가 감칠맛이고 멋인데.


그러고 보니 장유유서(長幼有序) 부부유별(夫婦有別)이 고리짝신세 된지 오래고, 우주적 음양질서가 뒤죽박죽 생산질서의 종말론적 혼돈의 징조가 하 수상하고, 지역, 인종, 계급구별 또한 평준화 수순을 밟고 있고, 클래식의 도도함이 대중화에 밀리어 고상함과 평범함의 사이가 애매모호 따지는 것 자체가 촌스럽다. 


남은 건 하늘과 땅 사이, 삶과 죽음 사이이라는 궁극분별만이 숙제로 버티어있다 할까? 아니다 이마저도 과학이 넘보고 있고, 그리고 이 모든 자리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사이가 옛날 계급서열보다도 더 짙게 갑(甲), 을(乙)질 차별화로 파이고 있다. 


이제 5대주 6대양이 한나절 거리로 축지 되어 백인 흑인 황인이 뒤섞여 10대, 100대, 1000대로 흐르는 동안 인종의 구별이 사라질 것이고, 언어 또한 아마도 한 언어가 세계통용어로 사용되고 각 민족어는 지방 사투리로 소통이 되어질 것이다. 


음식문화와 종교문화가 그 독특한 고집으로 좀은 오래 버틸 것 같으나, 이 또한 세월에 장사 없을 것이다. 


이렇게 좁아져 버린 지구촌의 지리, 기후, 인종, 성별, 언어, 풍습, 종교 같은 분별 색이 희미해져 버리면 후대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아질까? 


손가락으로 IT폰을 눌러 1초면 지구반대쪽 어느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아는, 시시콜콜 모르는 것이 없는 정보화시대에 토론토 집에서 아침을, 파리 사촌 집에서 점심을, 서울 외갓집에서 저녁을, 베이징3촌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밤을 보내고, 모스크바로 날아가 상담을 하는, 국경선은 지도상의 선일 뿐이요, 인종, 언어, 풍습, 음식, 옷, 음악, 춤, 주거환경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는, 구별이, 사이가, 차별이, 분별이, 다름이, 낯섦이 없는 싱거운 지구촌 현주소를 보면 겨우 지난 100년에 이룩해 낸 인간재능이 참으로 대단하다 싶은데, 찬사 대신 장송곡을 부르고 싶으니 어이한담.


사이가 분명하고 다양함이 화합으로 있는 세상, 다름이 이웃사촌으로 있는 세상, 차이가 차별이 아닌 세상, 만가지 꽃이 제멋으로 어우르는 화단 같은 세상,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이 각기 제 색으로 함께 어울려 곡선을 그리며 하늘에 걸려있는 무지개 같은 세상, 너 따로 나 따로 인 채 함께 있음이 행복으로 있는 세상, 그런 모자이크 같은 세상이기를, 그렇게 나는 꿈꾸며 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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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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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2
사물보기

 

신문에 나오는 내 사진이 너무 젊어보여 근황 걸로 바꿀까 하여 그쪽 전문가인 딸에게 부탁해서 여러 장 찍게 했다. 정면으로, 대각으로, 갸웃이, 미소진, 무표정, 안경 쓴, 안경 벗은, 정장차림, 수수한 차림, 더부룩한 머리, 말끔한 머리, 그렇다고 여(呂)서방이 김(金)서방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마치 성형수술을 한 가짜 얼굴 같은, 그 중 실물보다 젊게 찍힌 매력남(?)을 골라 보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늙은걸 생각지도 않고. 


사진을 찍을 때의 기본은 빛(명암)과 위치(각도)와 그리고 초점인데, 이를 비유로 말하면 빛은 품격이고 각도는 자리이고 초점은 판단력이라 하겠는데, 바른 품격으로 바른 자리에서 바른 판단을 한다면 일단은 바른 사물보기가 된다 하겠다. 


사물보기를 바르게 할 수만 있다면 내 삶 자체가 바르게 될 것 같은데 그게 쉽지가 않으니 탈은 늘 여기에 있다. 품격이 비뚤면 사물이 비뚤게 보이고, 위치가 나빠 초점이 흐리면 흐릿하게 보일 것이고, 더욱이 보일 상대가 위장 술이 능하다면 제아무리 밝은 눈도 속수무책이다. 


이렇게 같은 사물, 같은 사건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보이고, 같은 눈인데도 때와 장소와 기분에 따라 달리 보이니 세상물정보기에 정답이 없다는 말도 맞다.


똑바로 놓고 보고, 거꾸로 뒤집어보고, 비딱하게 기울여보고, 멀리 놓고 실눈으로 보고, 상대 입장에서 보고, 술 취한 몽롱한 기분으로 보고, 화 났을 때 보고, 기분 좋을 때 보는, 그때마다 같은 사물이 천차만별 달리 보이니 세상사 그래서 재미있는지는 모르지만, 정답은 어디에서 찾을꼬? 


세상 사물보기 중 내게 가장 어려운 것이 종교보기와 이념적 가치관이다. 나의 이성을 총동원해 이어령 교수처럼 영성에까지 접근시켜 보려고 해도 고차원(?) 위치에 감추어진 절대자의 모습은 오리무중 잡히지 않고, 안전적 보수의 가치관과 뒤집어보려는 진보적 가치관 사이에 나는 언제나(젊었을 때나 늙어서나) 보수 쪽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런 내가 줏대 없어 보이는가? 품격이 낮은가? 심성이 비뚠가? 내 자리 환경이 나쁜가? 아니면 내 분별력에 문제가 있는 건가? 그도 아니라면 세상보기 명제들이 사물보기 같은 수단으로는 어림없는 차원인가? 


아무튼 내 나름으로 자리매김해버린 고집으로 버티고 서있는 한, 대상이 선명히 보여지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성경에 기독교의 하느님께서 만물 만상을 하루하루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다는데, 하늘 절대자에게도 좋음과 나쁨이라는 상대가치 개념이 있다는 게 의아하지만 보기에 좋게 하려는 예술성만은 높이 사고싶다. 들꽃 한 송이도 모양 내며 피는 자연 그 자체가 예술품 전시장이니 말이다. 


저 모양들, 저 색상들, 저 소리들. 그 맛깔, 그 표정 하나 하나가 제 멋으로 있는 자연의 자태에 나는 숨이 멈출 듯 반해버리니 말이다. 


우리 속담에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짚신 고무신 하나를 만들어도 거기에 모양내기가 보인다. 


이렇게 우주자연이 중용적 보기 좋음의 미학으로 나를 감싸고 있는데 왜 나는 늘 미움과 악에 넘어지고, 옳고 그름의 사리판단에 돌아서서 후회하는, 서툴게 살아가고 있는지? 


사물을 동(東)에서 보면 서(西)에 있고 서에서 보면 동에 있는 것, 그래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중요할 것이나, 서 있는 자리가 어디가 되던 보는 마음은 늘 가운데(중용)를 지킬 수만 있다면 이상적일 텐데 성인(聖人)이 되기 전에는 어려우니 대충 사물보기로 살 수밖에 없나 보다. 보통 사람답게.


한 세상 그저 그렇게 다투고 화해하며 서툴게 사는, 그게 사는 재미려니 허허하며 살아지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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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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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2
분위기에 산다

 

삶에 영향을 주는 2가지 분위기가 있다.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이다. 지세와 기후는 자연환경이고 풍습과 종교는 사회환경이다. 이는 마치 본능적 유전인자처럼 삶의 바탕을 만든다. 


육지인가 섬인가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고, 온대인가 한대인가에 따라 다르고, 시골분위기가 있고 도시분위기가 있다. 


무슨 종교 어떤 사상이념의 영향권에서 사는가에 따라 다르고, 어떤 무리에 섞여 사는가에 따라 마음흐름이 다르다. 부모와 동무의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며, 건강과 용모 또한 삶의 용기에 큰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제멋에 산다고 큰소리들 치지만 환경 분위기라는 손바닥 위의 꼭두각시임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남들이 우로 몰려가는데 나 홀로 좌로 가기란 여간한 고집 없인 어렵다. 왕따를 각오해야 하고, 외로움을 견디어야 하고,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더욱이 사회적 분위기에 누를 끼치는 무뢰한을 자초하면서까지 내식대로의 길을 가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때론 내키지 않는데도 남 따라 하다 낭패 당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남들이 여행 간다, 골프 간다, 쇼핑 간다 따라 하고, 남이 명품으로 휘감으니 내 옷 입은 태가 초라해 보일까 신경 쓰게 되고, 요즘 다들 80, 90을 거뜬히 사는데 70살이면 단명 같아 억울해 한다.


남이 내가 될 수 없듯이 내가 남일 수 없는데도 남 따라 장에 가듯 따라 하다 보면 내 실존은 실종돼 버리는 스스로의 속물성에 혐오감을 느끼게 되면서도 적어도 남만큼은 되고 싶은 비교에 약한 것이 또한 사람마음이라, 되려 이것이 삶의 재미일 수도 있겠다 생각되니 어쩌겠는가.


나는 내 그릇 크기만큼으로, 하늘이 준 능력만큼으로, 팔자소관 만큼으로만 살게 되어있음을 잘 알면서도 늘 이 속물성을 넘지 못해 상대적 잣대로 재어 남이 나보다 많은 것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배아파 한다.


방문 열고 한 발짝만 나가면 보이는 것들 모두가 나의 경쟁상대로 다가와 비교해 보니, 소인배일수록 비교에 민감함을 감안하면 나는 소인배 중의 소인배임이 분명하다.


비교는 내게 분발의 원동력을 주는 긍정적 매체이긴 하나 나를 피곤케 하는 스트레스의 주범인데다 여간한 수양 없이는 피하기가 불가능하니 늘 지고 만다. 특히 한국적 풍토에서 자란 한국 사람이라 더욱 그러한지 모른다. 


잘 나가다 왜 또 갑자기 엽전타령인가? 우린 사촌이 논을 사면 배아파 경쟁에 날을 세워 일등, 최고, 출세, 성공이라는 단어를 신주 모시듯 끌어안고 요란한 열정으로 온 강산을 달구어 그 역동성에 휘말려 달린다. 


차분하고 고요함을 생소해 하고, 깨끗하고 맑음을 부담스러워 한다. 고려청자, 이조백자를 빚어낸 잔잔한 선비상이 밥 먹이냐? 성공이라는 목적을 위해선 냄새 나는 수단쯤은 잠시 무시해라! 성공으로 보답하면 된다는 논리가 판을 치면 추한 이기심에 의해 평정심(平靜心)이 뒤로 숨어버리니 탈이다. 


치국성공이라는 정치가의 꿈, 목회성장이라는 성직자의 꿈, 기업성공이라는 기업가의 꿈, 그 꿈들이 거창할수록, 그 구상이 화려할수록 주위 사회가 몸살을 앓고, 앓고 있는 이치를 외면하면서 달린다. 


지난 20세기, 백년에 인간이 망가뜨린 공해수치가 인간 유사이래 망가뜨린 수치를 능가한다 해도 된다. 이로 미루어 21세기 슈퍼 컴퓨터시대가 저질러낼 공해수치는 3살배기가 열손가락으로도 풀 수 있는 뻔한 사실이다. 


이런 사회분위기에 왕따 당할까 옆 눈치 비교에 사팔뜨기 신세로 오늘도 나는 눈뜨자마자 신문, TV, 컴퓨터 보기로 하루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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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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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7
영혼(靈魂) 그리고 꽃

 

영혼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꽃은 왜 아름다운가?


영혼 때문만으로도 세상에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라 여겨지고, 꽃이 예쁘게 핀다는 이유만으로도 지구촌 만물이 어울려 살아진다 보여진다.


나처럼 죽으면 흙이 된다는 이에겐 그래서 종교 그 자체가 성립되지가 않을는지 모르나 그러함에도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게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연속적 변화의 과정만으로도 나는 삶이라는 고마움에 충분히 취하며 산다.


벌과 나비가 우리인간들도 예쁘다는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바람둥이 기질 버릇이 그래서 예삿일로 보여지지 않는다.


꽃처럼 싱그러운 나이, 이 팔(2 8)청춘 짝짓기 시기의 발랄한(예쁜) 생기(生氣)는 우주 만상이 살아있음의 표상(表象)이고 생의 연속성의 주체이다. 그래서 우주만상의 표상은 낳고 죽음이라는 모든 과정 자체가 순리이고 연속성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나무가 죽으면 흙이 되듯, 15년 내가 키우던 통키(개)도 죽어 흙이 되고, 나(인간)도 죽으면 흙이 된다는 이치가 왜 틀리는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영혼이라는 실체가 논리를 벗어난 실존적 문제로 내(사람) 머리에서 맴돌게 된다. 산 사람 그 누구도 영혼을 만나보지를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특히 종교 쪽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꽃은, 어떤 꽃이든 예쁘게 핀다. 자연의 이치는 무엇에나, 어디에나 이유가 있다. 꽃이 예쁘면 예쁜 이유도 분명 있을 터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어디에나 무엇에나 까닭, 이유가 궁금하여 생각을 이어보게 된다.


육체가 아니면서 육체에 깃들어 인간의 활동을 지배하다 죽어서도 육체를 떠나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영혼이라는 실체가 종교의 주체로 대우받고 있다.


그렇다. 영혼이 없다면 종교 그 자체가 무용이 되기 때문으로도 그러하다. 그런데 문제는 영혼의 개수(個數)에 있다. 기독교에선 영혼이 사람에게만 적용되지만 불교에선 뭇 생명체(동물) 모두로 확대되어 어떤 살상도 죄라 여겨 고기를 못(안) 먹는다.


그래서 기독교에선 태초에 아담과 이브로 시작된, 수억만 명으로 늘어난 영혼들이 최후의 심판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 영혼의 문제에서 좀 빗겨 꽃의 아름다움(예쁨)에 초점을 맞춰 생각을 이어보자.


꽃은 어떤 꽃이든 왜 아름답게 필까? 그리고 나비와 벌은 왜 꽃을 찾아 날아들까? 내가(인간) 봐도 꽃은 예쁘니 벌과 나비는 예술가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 이유는 종자 번식을 위한 자연의 수단이지만 내 관심은 벌과 나비가 나(인간)처럼 아름다움이라는 유혹에 약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영혼과 관계 있어 보인다. 개인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고 아름다움이라는 유혹에 의해 생명체의 연속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이 묘한 관계성, 이것이 생명체의 영원성으로 보인다.


해서 내 눈엔 아름다움이 곧 연속성의 실체, 곧 영혼이다. 이는 개수(個數)라는 개념을 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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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동물이 산다는 것-땅을 딛고 하늘 보기(영화 March of the Penguins를 보고)

 

영하 60oC혹한의 남극에서 사는 펭귄의 삶을 다룬 기록영화(National Geography 제작)를 봤다. 천지간에 온통 하얀 눈과 얼음 그리고 파란 하늘뿐인 단순색상의 화면에 검정과 흰색의 앙상블이 환상적인 곡선으로 배합된 턱시도 예복차림의 펭귄대열의 행진이 끝없이 이어지는 대이동의 장면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색상의 아름다움에 우선 빨려 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내면에서 전개되는 펭귄의 삶의 실상을 접하면서 자연은 결코 은총만이 아니라 만만찮은 극복의 대상임을 보게 된다. 짝짓기서부터 알 낳아 부화시키고 그 새끼를 키워내는 숭고한 종자 대이음의 과정을 위해 대이동의 장면으로 시작, 남극의 모든 펭귄들이 한 집결지로 모여드는 광경이 화면 가득 장관을 이루며 전개된다.


집결 지에서 서로 맞선을 보며 짝을 만들어 애무하며 사랑행위를 하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한 폭의 깨끗한 수채화를 대하고 있는 듯 숭고하리만큼 우아하다. 이 사랑행위로 얻은 엄마의 알 생산이 이루어지면 곧바로 그 알은 아빠의 발등에 얹혀져 배 아래쪽 털 속에 감싸 안아 품어지고 엄마들은 다시 먹이를 얻기 위해 먼 해안을 향해 70마일(왕복 250 Km) 2개월 대장정이 또 시작된다.


아빠는 알을 발등 위에 품은 채 남극의 설한풍(100m/h)이 몰아치는 허허벌판 눈밭 위에 꼿꼿이 서서 꼬박 2달을 영하 60oC 혹한과 싸우며 버티어 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동안에 알에서 부화된 새끼를 부양하며 엄마를 기다리는 아빠의 모습은 처절하리만큼 힘겹다. 


그 두 달 동안 먹이 없이 버틴 아빠의 체중이 40%까지 줄어들고 새끼가 먹이를 달라고 보채는 광경은 투혼과 인내심의 극치다.


한편 엄마는 뒤뚱거리며 걸어서 두 달 만에 배속에 먹이를 잔뜩 저장한 채 서둘러 돌아오는데 그 모습 또한 옷을 여미는 긴장감이 흐른다. 1초를 지체할 수 없는, 배고파 할 아이와 아빠(남편)를 위해 자빠지고 구르며 뒤뚱뒤뚱 돌아와 가족을 상봉하는 장면, 내 눈에는 다 똑같이 생긴 그 많은 무리 속에서 용케 짝을 만나 ‘꾸꾸’ 대며 반기는 가족과의 재회의 모습, 인간의 세계와 무엇이 다를까? 


아빠로부터 새끼가 엄마에게로 인계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이번에는 아빠가 먹이를 찾아 70마일 밖 먼 해안을 향해 떠난다. 


 흔히들 우리는 생물이 살게끔 자연환경이 알맞게 만들어졌다고 여기며 그렇게 해주신 하늘에 감사할 일이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이 펭귄들에게만은 해당되지 않는다. 


생물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열악한 혹독한 환경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투쟁의 결과이지 하늘의 은총으로 만들어진 에덴동산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결단코 아니다. 


선(先) 환경, 후(後) 투쟁의 삶이 있을 뿐이다. 이들의 생존은 하늘의 은총이 아니라 스스로의 창조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 남는 것들만이 자연은 그들에게 동무가 되고, 물고기를 위해 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있어 거기서 살만한 것들만 살아 남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수 만년은 그렇게 그 어려운 환경에 길드는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살아남은 펭귄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본 내 마음은 슬프디 슬픈 동정심이었다. 


아니다. 극심한 삶의 고통을 살아내는 위대한 성자(聖者)의 모습을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삶의 승자(勝者)로 말이다.


불가(佛家)에선 삶이 곧 고통이라 했고, 그리하여 그 고통을 벗는 길은 수행으로 열반에 드는 길밖에 없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펭귄은 혹독한 삶의 고통을 준 자연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수용한 성자의 모습 그대로다. 


경외(敬畏) 스럽도다! 산다는 것이. 


위대하구나!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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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3
땅을 딛고 하늘보기(그 우주의 숨소리)

 


동양에선 음양(陰陽) 그 기(?)의 조화라 하고, 서양에선 음양(- +) 그 힘(에너지)의 운동이라 말하는 우주의 숨소리, 그 맥박소리에 귀 기울이며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이 모든 생산과 운동 그리고 사망 이라는 사이클에 의해 우주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옛날 고등학교 때 커닝하다 들킨 지옥 문에서나 당할 것 같은 절망적인 사건의 순간을 어른이 다된 딸들에게 이야기해주니까 배꼽을 잡고 방바닥을 뒹군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옛날 아픈 풋사랑 실패이야기를 들려주면 여인들은 연속극보다 더 재미있어 한다.


한 친구가 고시실패, 연애실패, 사업실패 끝에 목을 매달았는데 그것까지도 실패한 이야기를 먼 뒷날 그가 성공한 후에 들었을 때는 영웅담이 되어 감동까지 된다. 


나와 가까운 한 분은 젊은 시절 4번의 자살기도에도 살아 남아 건강하게 90 넘어 사시는데 당시의 자살 소동들을 내가 농으로 하면 피시 웃으신다.


불가에선 생즉고(生卽苦)라 말한다. 하루 하루의 삶이 곧 고(苦)라 해서다. 그런데 고(苦)만일까? 병들고, 죽고, 이별하는 생이 결코 락(樂)이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해도, 그래서도 생이 값져 보인다.


내일이 불확실한 세상,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사업, 내일을 모르는 건강, 정인들과의 영이별이 언제 어느 순간에 끼어들지 모르는, 서로간에 이기심으로 돌아 앉을 듯 아슬아슬한, 이런 불안들이 나를 삼킬 듯 암담하게 보이는 생(生)을 ‘락’(樂)이라 토를 달기가 뭣하나, 내가 살은, 살고 있는 경험으로도 감히 말해 ‘고’(苦)만이었을까? 


그렇다 해서 내 삶이 기차게 신나는 일들의 연속이었나 하면 그 반대 쪽이 많았다고 해야 옳다. 그러나 늘 찌푸린 하늘만 있었던 것만 아니라 파란 하늘도 있었다. 그 파란 하늘을 보는 순간 웅크린 하늘이 언제였더냐는 듯 곧 잊어버리는 고마운 버릇 때문에 오늘이 살아지는지 모른다.


지옥에서나 당할 것 같은 암담했던 피눈물 날 이야기들을 한참 지난 후 마치 전설처럼 들려주면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걸 보면 “개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이 수궁해지는 일회용 인생의 귀중함을 느끼며 산다. 이렇게 살아가는 순간들이 추억이라는 앨범에 담아지면 시간이라는 촉매에 의해 삶에 힘이 실린다.


해서 자살하려고 목을 매단 절대절망도 어쩌다 실패하여 죽지만 않으면 1년 후 들으면 슬프겠지만 10년 후 들으면 배꼽을 쥐고 웃을지 모르는 일, 아니 확실히 웃는다. 10년이 짧으면 20년 후에 이야기 해보라. 멋진 소설이, 아니 심금을 울리는 드라마 주인공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내 피맺힌 이야기에 남이 재미있어 한다는 건 그들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시간에 의해 객관화되었기 때문이다. 내 자신에게까지도.


그런데 잊혀지지 않는 예외가 있다. 현재 진행형일 경우이거나 자존심의 문제가 계속 남아있을 때이다. 과거사로 끝날 잊혀질 사건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객관화가 되지 못하는 악성종양 같을 때는 하늘에 묻게 된다. 


우리의 독립투사의 이야기가 아직도 내게 감동을 주고, 정신대 누나들의 비극역사 같은 왜정36년 식민지 역사가 뼈에 사무치는 것은 짓밟힌 자존심이 내 가슴에 응어리져 있기 때문이다. 


6.25 비극의 역사가 아직도 비극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동족상잔이라는 민족적 수치의 사건으로서 현재도 진행형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苦)는 낙으로 보상받아야 하고, 그렇게 되리라 여기며 산다. 하늘은 공정하시기 때문으로도 그러하다.


지금 이렇게 땅을 딛고 하늘을 우러러 내 80년 삶을 관조하며 쓴 이 글들이 숨겨두고 나 혼자 읽는 내 일기장 같은 고백서라 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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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3
건망증 유감

 

건망증이 심한 것이 치매라 보면 나는 그 초기증상 임이 분명하다. 유명한 19세기 독일 음악가 바그너(Wagner)의 건망증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외출할 때는 문에다 “지금 바그너 외출 중, 몇 시에 돌아옴”이라는 팻말을 달아놓는데,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와 자기집 문에 달린 그 팻말을 보고는 “허! 이 친구 또 외출했군” 했다니 아무래도 한 수 위인 건 확실하다. 


약간의 건망증이야 삶의 양념으로 애교일 수 있지만 잦게 되면 삶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도가 지나치면 일단은 병이 아닌가 의심해 보게 된다. 시시콜콜 모조리 기억하는 총기 좋은 사람이나 기차시간표처럼 정확한 사람보다는 약간의 건망증과 좀은 어눌한 푼수 끼가 삶의 여유일 수 있다고 봐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겐 심각한 고민거리일 수 있다.


“안녕하세요?” 한국식품점에서 만난 어여쁜 젊은 여인으로부터 받은 인사였는데,


“네! 그런데 누구시더라” 이쯤 되면 나의 실수는 엎질러진 물이다. 


“저 모르세요? 미세스 H예요”


“와이고! 오늘따라 너무 젊어 보여 처년 줄 알고 그만!!” 묘하게 둘러대긴 했지만 나의 건망증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자주 만나는 친구 부인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사람을 몰라보는 실수도 실수지만, 이름 외우기는 정말로 난감한 지경이다. 10년 지기 친구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곤혹스러울 때가 어디 한두 번이더냐. 


서양 사람들은 남 이름 외우기 천재들이다. 우리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과 통성명을 하면 서양인 백 명이면 백 명이 내 이름을 기억해 주는데 나는 백 명 중 한 명의 이름도 거짓말처럼 기억해내 지지가 않는다.


한번은 문우인 시인 J씨의 성을 다른 성으로 잘못 불렀다가 “여형, 아직도 내 성을 모르오?” 아! 그때의 난감함, 무안함, 미안함, 당혹감을 무어라 변명할까? 조상 탓으로 돌릴 것인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10리길 학교를 걸어가서 첫 시간 책을 펴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책이 없다. 책보를 안 갖고 온 것이다. 총 없이 전투장으로 뛰어간 병사 격이다.


나는 초등하교서부터 대학까지 선생님 중 단 한 분의 이름도 지금 진실로 기억해 내지 못한다. 군대 입대해서 제대할 때까지 만난 훈련소장서부터 소대장까지 그 많은 상관 중에서 기억해 낼 수 있는 이름이 솔직히 단 한 명도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전화번호는 먹고 살기 위해서인지 우리가게 것 단 하나밖에 없다. 집 전화번호도 깜박깜박 잊어버려 안다고 못한다. 한번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갔는데 경찰의 신원조사 중 대답한 가게와 집 전화번호가 나중에 알고 보니 엉터리였다. 


지도자의 첫째 조건이 사람이름을 많이 외우는 일이라 하는데, 만약 내가 목사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저 장로 이름이 뭐더라” 하기 십상인데다 매주 새로 들어오는 교인 이름 외우기는 동해 물이 마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터이니 몇 개월 지탱하다 쫓겨날 것이고, 학교 교사가 되어 60명 학생이름 외우기보다는 고시 시험치는 편이 쉬울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행히도(?) 나는 일생 단 한 명의 부하를 거느려본 일이 없다. 나는 소설책을 읽으면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주인공의 이름을 하얗게 잊어버린다. 


그러면 나는 완전 고장 난 컴퓨터 두뇌의 소유자인가? 성급하게 그렇다고 단정하지는 않고 있다. 실오라기 같은 이유는 그래도 어떤 면에서는 남이 기억 못하는 것을 희한하게도 기억해 낼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운 공부 중에서, 이름까지 잊어버린 책 내용 중에서, 성경 구절 중에서, 그리고 그 많이 읽은 글 중에서, 살아오면서 격은 그 숱한 사건들 중에서, 이 망각의 창고에 숨어버린 재료들 중에서 글을 쓰는 도중 나도 모르게 생생히 불거져 나와 적절히 인용할 수 있을 때의 나의 즐거움은 필설로는 표현 못한다. 마치 고장 난 컴퓨터의 기억장치가 외부의 어떤 충격에 의해 어쩌다 작동이 될 때의 신기함이라 할까? 


물론 내 두뇌의 기억장치는 이처럼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실수가 잦고, 그 실수로 인해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하여 사교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것이 속상할 일이긴 해도, 이는 나의 노력과는 무관한 순 생리적 결함이니 조상 탓, 아니 하늘 탓으로나 돌릴까?


아니다. 어쩌면 하늘이 준 은총일 수도 있다. 그 많은 이름, 그 많은 사건, 그 많은 이야기, 그 아프고 괴로운 기억들, 그 잡다한 것들 하나하나를 내 작은 두뇌 속에다 모조리 기억 저장했다간 폭발하거나 미치고 말 것 같으니 말이다.


들어오는 대로 쪽쪽 잊어버리면서도 그 중 중요한 것들이 나도 모르게 두뇌 한쪽에 담겨 있다가 필요 시 써먹을 수 있는 좀은 약삭빠른 묘미, 이 어찌 신의 은총이라 아니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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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4
팔자 타령

 

내 나이 80이 눈앞인데 나답잖게 팔자타령이냐? 할 것이나, 오늘 아침 세수하다 거울에 비친 ‘나’라는 늙은이의 거울 밖에 서있는 네(나)가 새삼 신기하게 보여 묻는다.
왜 너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 이 시대에 태어났는고?
왜 너는 개도 닭도 아닌 사람으로 태어났는고?
왜 너는 영국인도 케냐인도 아닌 한국인으로 태어났는고?
왜 너는 김씨도 박씨도 아닌 여(呂)씨로 태어났는고? 그리고 하필, 
왜 너(나)는 여(女)자가 아닌 남(男)자로 태어났는고? 
라는 당연히 답이 없을 물음을 애꿎게 거울 속의 내가 거울을 보고 있는 나를 향에 바보처럼 묻고 있었다.


이 모든 게 하늘의 점지(필연)인지? 팔자(운명)인지? 그도 아니면 물 흐르듯, 구름에 달 가듯 이 장소에 이 모양으로 자연의 흐름과정에 우연히 참여된 한 점의 세포적 역할인지를?


만약 나라는 이 한 생(生)이 미리 정해진 예증이었다면 수용 외에 도리 없는 팔자지만, 그러나 내게 주어진 삶이라는 모양새가 시간 속에서 만나는 모든 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내 의지가 감당하는 행위로 결과 지어지는 그 무언가가 있다면, 내 의지라는 자존심의 운전 솜씨에 따른 삶의 모양새는 순전히 내 책임이니 주위에 끼칠 의무감의 무게가 없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면 허술히 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아니잖은가? 주어진 운명(필연)적 내 삶이 일회적이기 때문에도 더욱 그러하다. 표정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자존심이었는데, 예삿일이 아니잖은가?


생각하면 할수록 살얼음판 걷듯 하룬들 살아낼 것 같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79년 긴 세월 거만을 피며 살아지고 있었다는 게 신기방통이다. 그런데 어떤가? 천지만물이 내 이 한 생을 위한 조건에 딱 걸맞게 정확히 운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마치 천하가 나를 위한, 내 것인 양 제 잘난 맛으로 거들먹거리며 살은 이 뻔뻔함은 무언가?


아니다. 이 당당함이 내 삶의 활력일순 있어도 오만으로 살았다면 이웃과 하늘의 눈치가 이상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찔금 해진다. 


저 하늘과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신호등(양심, 윤리, 법질서)을 지키며 내 삶의 운전대를 잡고 일생의 골목길을 우회전(x), 좌회전(y), 조심 또 조심하며 나를 운전해야만 했을걸? 


비뚤비뚤 이리저리 난폭 운전한 후회는 이제 늦었지만. 물론 (z)방향이라는 3차원의 삶도, 그리고 시간(T)을 넘은 4(F)차원의 삶도 있을 터인데, 내 삶의 운전대에 달린 우(x)향, 좌(y)향 2차선 두 방향 깜박이 만으로도 못 간데 없이 휘젓고 다녔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이 모든 삶의 조건들이 하늘 예증이던 내 팔자이던 자연과 이웃 없인 나라고 하는 존재자체가 불가능한 인연적 관계존재인데, 너무도 허술히 살은 것 같아 이웃과 하늘 보기에 심히 민망할 뿐이다.


더욱이 내 독립적 시작(알파)과 끝(오매가)은 영원(무한) 속의 물리적 값은 얼마짜리일까? 


그리고 계속 거울 속의 내가 거울 밖의 나를 보고 묻는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본시부터 있는 변하지 않은 진짜 너(나)는 누구냐? 고. 
물론 나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은 안다. 흙이라는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걸. 해서 나의 마지막 바램은

 

 

흙이고 싶다
그냥 흙이고 싶다. 
흙을 먹다 왔으니 그냥 그렇게 흙이고 싶다.
천당 지옥 비교가 없는 영육이 몽땅 그대로 
본시부터 있었던 그냥 그렇게 자연(흙)이고 싶다.

 

(유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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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죄와 벌

 
 
나는 오늘 교통법규를 어긴 죄(속도위반)로 법정이란 델 섰다. 죄를 지었으면 벌받아 마땅한데 억울하면 재판을 받으라 해서 밑져야 본전이란 배짱으로 찜찜해 하며 긴장으로 떨며 판사 앞에 섰다. 죄질 것이 아니구나 후회가 막심하다.


하지만 엄숙한 분위기와는 달리 부드러운 판사의 논고로 예상외의 결과를 얻어낸 것만으로도 만족한 수확인데다 앞으론 조심 또 조심 차를 몰아야겠다는 다짐을 들게 했으니 재판의 효과는 만점인 셈이다. 


재수 없이(?) 속도위반에 걸린 것 가지고 거창하게 “죄와 벌”이라는 제목을 붙여 호들갑을 떨고 있네 할는지 모르지만, 내겐 법이라는 말 자체가 천근 무게로 느껴지고, 죄라는 말에 오금을 주리며 살아온 소시민으로 경찰서 같은 관공서 나들이를 꺼려했을 뿐 아니라 초등학교 땐 교무실에 가는 것조차 싫어했는데 어쩌다 판사 앞에 서보니 고양이 앞에 쥐마냥 내가 그렇게 작아보일 수가 없다.


죄와 벌이란 게 도대체 뭔가 하는, 만감이 교차되어 집에 오자마자 서재에 꽂힌 법에 관한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서재에 꽂힌 많은(?) 책 중엔 법이란 글자가 적힌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법을 몰라도 한참 모르게 살아 왔구나 싶은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법 없이도 살만한 삶을 살아온 소시민이란 뜻도 되니 위안도 된다.


제목에서부터 거창하게 죄와 벌이라 무게를 잡고 보니 내가 감당할 문제가 아니지 싶으면서도 죄와 벌에 대한 나의 그간의 의식이 얼마나 유치했었나를 느끼게 되자 그 무지의 편견을 고백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게 된다.


나는 그간 “벌은 죄의 대가이며, 법은 벌을 주기위한 올가미”라 생각 했었다. 스스로 착하게 살고있는, 이성적 판단이 바른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는, 괜히 겁주기 위한 폭력이라고까지 여길 정도로 법망을 멀리하고 겁을 내며 주눅들어 살았었다. 


그런데 판검사 앞에 서 보니, 그 논고가 내게 유리하게 판결이 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법은, 적어도 캐나다 법은, 처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채벌이 목적이 아닌 예방을 목적으로 한 장치임을 보았다고 하면 과장된 아첨일까? 


규정된 채벌의 최저치에 적용 판결하려는 고심을 엿볼 수 있었다. 모든 예외적 상황을 고려한 판결은 인도적이라기보다 같은 잘못의 예방적 차원을 고려한 법 해석에 고심을 하는 것 같았다.


누가 말했던가? 법은 신호등 같은 것이라고, 신호등은 채벌을 주기 위해 겁 주려고 세워 논 것이 아니라 교통사고가 안 나게 하기위한 예방적 장치란 걸 알게 됐다. 


솔직히 나는 그 동안 법은 내 자유를 묶는 올가미쯤으로 부담스러워 했었다. 그렇다. 법을 올가미로 여기는 자에게는 법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신호등이 거추장스럽고, 세금이, 선거가, 줄서기가 거추장스럽다. 경찰의 눈이 괜히 걸리고, 판검사는 보기만해도 주눅이 든다.


그래서 독재자가 하는 짓이 무엇인가? 이 모든 거추장스러운 장치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부터 서둘러 마련한다. 모든 법에서 자기 혼자만이 벗어나는 일이다. 우선 줄을 서지 않는다. 세금을 내지 않는다. 선거를 하지 않는다. 경찰, 판검사는 자기 수족이 되고, 법까지도 자기 수족인 줄 착각한다. 심지어 “짐이 곧 법”이 되고 자기가 신이 돼버린다.


우리속담에 “법 밑에 법 모른다”란 말도 같은 맥락이다. 법을 지켜야 할 법 기관(경찰, 판검사, 국회위원 등)에서 위법이 많다는 뜻인데, 부패한 나라가 증명해주고 있다.
반대로 철인은 법을 신성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며 “국법에 복종하지 않으면 부정을 범하는 자다” 해서 기꺼이 사약을 마신다. 그래서 “법은 엄격하데 법 시행은 관대해야 한다”는 중국 속담은 진리다. 


불경죄로 잡혀온 ‘진’이라는 사내를 ‘위’의 ‘문제(文帝)’가 물었다. “왜 그대는 법을 어겼는가?” 


‘진’의 대답이 걸작이다. “소인이 멍청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폐하의 그물(법)의 구멍이 좁아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성경에 원죄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대목에선 자꾸 갸우뚱 해진다. 내 스스로 지은 죄가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는 죄란다. 이브라는 최초의 여인이 뱀의 꾀임에 빠져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먹음직스러운 실과를 따먹은 죄 값이 원죄란다. 이런 억울한 죄 값이 있나?


탐스러운 실과를 달아놓지를 말든지,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하지를 말든지, 전능하신 이의 의중을 피조물인 내가 감히 어떻다 말할 처지는 못되지 만서도 죄를 짓게 한 원인제공도 하나님이요, 죄를 준 것도 하나님이라면 모순일 것 같아 하는 투정이다. 


어쨌거나, 이번 법정경험은 죄는 안 짓는 것이 상책이라는 착한 마음을 들게 했으니 크나큰 수확이다. 범법이 당장엔 이익 같으나 마지막 날에 하늘을 우러러 결산해보면 복리로 불어 눈감기가 힘들 것만 같은 생각, 요즘 한국의 청문회뉴스를 보면서 더욱 그러하다. (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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