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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원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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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원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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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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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8
한(限)으로 읽는 세계정복사(史)

 

기원전(334) 정복자 알렉산더는 20살에 왕위에 오르자 정복의 길로 말을 몬다. 12년을 남의 땅 따먹기 전쟁만 하다 그 정복의 길에서 33살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영웅 대왕이라 칭한다.


그 정복의 길에서 피아간에 회생된 인명이 그 얼마이며, 피해 자산이 또한 그 얼마인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정복이며, 그 파괴와 희생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호랑이 가죽을 남기듯 영웅이란 이름인가? 그렇지, 단지 그것뿐인 것을…!


이 무모한 광란의 극, 어찌 알렉산더 뿐이겠는가? 징기스칸이 그러했고, 나폴레옹이, 히틀러가, 풍신수길이 그러했다. 그런 그들도 한줌의 흙으로 돌아 갔다. 그저 그뿐인 허무의 결과를 위해 그토록 많은 피와 눈물을 강산에 뿌리게 했다. 


만약 그들이 그 영리한 머리로 저 한낱 허무뿐인 결과를 위해 정복의 길에 묻어버린 헛된 비극들을 미리 눈 여겨 볼 수만 있었던들 인류역사는 보다 부드럽게 쓰여지고 오늘날 지구촌은 순화되어 있을 것을.


그래 양보해서 정복의 길이 화려했고, 그 결과가 문명발전에 기여했다 치자, 그러나 그 과정이 피눈물로 점철된 악이었으니 결과가 어떠한들 무슨 가치가 있는가? 


절대가치인 하늘의 잣대는 결과로서가 아니라 과정만을 볼 것이니, 하늘에 닿은 그 악의 죄 값에 내가 믿는 하늘도 치를 떨었을 것이다. 나는 그 절대가치인 하늘에 빈다. 어떤 명분의 전쟁도 죄악이니 지구촌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달라고.


 그런데 세상엔 자신들이 믿는 이름의 하늘이 택한 민족(소위 선민)만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나머지 민족(소위 이방인)을 개미떼를 짓밟듯 짓뭉개버리는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내 맘속의 하늘은 그런 속 좁고, 옹졸하고, 고집불통일 순 없다. 우주만상의 근본이며, 그 질서를 주간하는 행위는 바름이고 옮음이니, 그래서 우러러 그 하늘을 보고 나는 나의 삶의 지침으로 삼는데 말이다. 


모순이다. 내가 믿는 그 하늘에게 만물은 창과 방패 들고 무찌를 상대가 절대 아니라, 보기만으로도 좋은 사랑의 대상이라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이 시간에도 진행형이 되고 있는 중동의 저 비종교적 피 비린내를 풍기는 종교전쟁의 모순도 그들의 경전에서 출발하고 있는 이상 누구도 못 말린다. 그들이 믿는 하늘은 상대를 서로가 악의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 손에 경전, 한 손에 총칼을 든 서구인들의 세계식민지 정복사를 들여다보면 그 오만이 가관이다. 당시 서구인들의 눈에는 그들이 사는 대륙 이외의 땅은 미개척 처녀지요, 인종은 미개인으로 보여 개척, 탐험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영웅적 개척자요, 마젤란은 영웅적 탐험가가 된다. 이런 잘못된 서구중심적 엉터리 역사를 우리는 수정 없이 달달 외우며 배웠는데 아직도 한국 교과서에서 ‘아메리카 신대륙발견’으로 수록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사람이 살고 있는 대륙이 어찌 신대륙발견이 되는가? 바로 이런 것이 교과서 왜곡이다. 그 과정에서 서구인들이 저지른 아프리카, 아메리카, 호주 등 원주민 학살의 죄 값은 하늘에 닿았고, 아시아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우리의 이웃 일본도 못된 것만 본받아 배워 식민침략의 발톱으로 한반도를 유린하게 된다.


그 길고 참혹한 식민화 시대도 2차 대전 종식과 함께 막을 내리고, 미-소를 정점으로 한 이데올로기 대결로 해체 모여 냉전시대로 접어드는데, 우리나라 같은 약소국은 그 틈바구니 소용돌이에서 허리가 부러지는 몸살을 백 년 가까이 진행형이 되고 있는 비극의 땅이 되고 있다.


 그 냉전시대도 20세기가 저물 무렵 그 한 축인 공산진영이 힘없이 무너지면서 자유민주주의, 자유경제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세계화니, 자유무역이니 하는 사탕발림에 편성, 세계는 요사스럽게 서서히 그리고 교묘하게 또 다른 형태의 자본침투, 경제 식민화 정복사가 쓰여지게 된다. 아니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세계자본이라는 총 없는 정복군은 적과 아군이라는 종래적 전투개념의 침투와는 달리 상대 당사국의 필요에 의해 정중히 초대되어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무혈입성, 경제 식민화를 달성하게 된다. 그 경제 식민들은 죽도록 일해서 국물을 얻어먹는, 재주 부리는 곰 신세가 돼버린다. 


무력정복엔 저항이라는 자존심의 굼틀거림이라도 있었지만, 자본침투엔 포도청인 목구멍 문제라 찍소리 한번 못하고 광 열쇠(경제권)를 송두리째 내어주는 자본 식민화의 노예를 자초하고 만다. 


이제 세계는 자본과 정보 앞에 국경선은 무의미하고,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세계자본이 발행하는 신용카드라는 괴력으로부터 지구촌 시민은 자유로울 수가 없다. 세계자본의 노예문서 격인 지구촌 주민등록번호(개인 카드번호)는 정보그물망에 등록되어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 조절당하고 있다.


이렇게 세계 정복사는 땅 따먹기 무력정복으로 시작, 종교정복, 식민화 정복, 이데올로기 정복을 거쳐 자본정복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다음 정복세력은 무엇이 될까? 


아마 컴퓨터 정복시대가 아닐까 상상 된다. 이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의미하며 인간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아니 어쩌면 인간은 운명적으로 무엇인가에 정복의 노예상태로 살아가게 마련인가? 영원한 자유인이고 싶으면서도 말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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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0
참새의 세계 붕(鵬)새의 세계

 

 

나는 초인, 기적, 도통이라는 말에 인색하고, 평범, 보통, 정상이라는 말에 후한 점수를 준다. 그래서 커피는 언제나 레규럴(보통)이다. 


세상엔 초인, 기적, 도인 같은 초능력에 의해 변화 발전된다고 들 말하지만 그 무지개 빛 뒤편에서 묵묵히 받쳐주고 있는 평범, 보통, 정상이라는 바탕이 튼실해야 알찬 열매가 맺지 않을까 해서다.


해서 물처럼 순수하고, 흰색처럼 깨끗하고, 공기처럼 투명한 바탕이면 우선은 도(道)가 노닐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아서다.


장자에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고, 구만 리 창공을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푸른 하늘을 날아 남쪽으로 간다.’고 했다.


붕새의 웅장함이 웅장함이라면 비둘기의 나약함은 나약함일 뿐이다. 붕새의 비상(飛上)은 붕새의 것이고, 비둘기의 날개 짓은 비둘기의 것이다.


웅장함은 웅장함이 값어치고 나약함은 나약함이 값어치다. 큰 값어치 작은 값어치라는 상대적 차이는 있겠으나 절대가치로 따지면 차이는 없다. 큰 몫 작은 몫이라는 비교를 뺀 몫으로 따지면 같은 몫이다. 


비둘기의 몫으로 붕새의 몫을 대신할 수 없듯이 붕새의 몫으로 비둘기의 몫을 절대로 대신할 수 없는 것, 작음은 작음의 값어치고 큼은 큼의 값어칠 뿐 서로 대신 할 수는 없는 값어치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없다는 뜻이다.


미장이가 대통령 일을 대신할 수 없듯 대통령은 미장이 일을 대신할 수 없다. 대통령 직업이 세상에 있어야 하듯 미장이 직업도 세상에 있어야 한다. 있어야 한다는 몫으로 따지면 같다는 뜻이다. 


우주만상은 각기 제 몫을 지니고 존재하며 그 존재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얽혀 운행되고 있는 것이리라. 


하루살이에게 참새는 초월이며, 참새에게 붕새는 초월로 보일 뿐이다. 물론 하루살이와 참새와 붕새는 크기가 다른 만큼 나를 때 받는 공기부력의 총화는 다르나 단위면적 당 받는 부력은 같다.


큰 붕새의 날개가 받는 공기의 총화는 참새가 받는 공기의 총화보다는 물론 많다. 하지만 공기가 많다 해서 공기의 성질이 더 강하다는 뜻은 아니다. 참새를 공중에 날게 하는 공기나 붕새를 공중에 날게 하는 공기나 똑같은 공기인 것이다. 


도(道)는 초월적 붕새의 날개 짓 속에만 있지 않고 참새의 고달픈 삶 속에도 있다는 뜻이다. 크고 작은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숲을 이루듯 인간 숲에서 각기 그릇 크기만큼으로 살아가는 것. 물론 노력 여하에 따라 조금은 변화되지 말란 법은 없겠지만 만물이 자기 분수(그릇)를 알고 처신할 때 우주 질서는 제자리를 찾아 운행되리라 믿는다. 


물론 나도 인간능력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신(神) 같은 능력은 인정하지 않는다. 해서 초인, 기적, 점괘 따위에 현혹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일상적 평범, 보통의 삶을 고마워 하며 내 몫으로 산다. 그런데도 나는 왜 잘 나가는 사람이 많이 부러울까? 이중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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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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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0
씨앗의 신비(하)

 
 

(지난 호에 이어)
한창 나이, 건강할 때 남긴 닮은꼴 씨앗이 암수의 사랑짝짓기 융합으로만 닮은 듯 다르게 전수되는 절차는 건강성을 위해서도 환상적이다. 이는 생명체의 퇴화, 나아가 멸종을 우려한 방어적 수단으로서의 닮은 듯 더 좋게 하려는 치밀한 하늘의 의도이기에 하늘 스스로도 기독교에서는 보기에 좋다고 고백하고 있지를 않은가?


젖가슴을 최고의 미학으로 다듬어 그 젖을 만지며 빨고 자랄 아이 정서까지 계산된 배려와 생식기를 남녀로 만들어 지상극치의 즐거움까지 준 하늘의 의도는 퇴화 멸종을 우려한 영원히 번성하라는 은총인데, 이 치밀한 하늘 의도를 빼버리고 기계적 유전 조작으로 한 대물림을 가능하게 한다면 변하지 못한 같은 DNA만이 붕어빵 불변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때 생길 수밖에 없는 권태(퇴화)를 방지할 절대적 수단인 사랑이 빠져버렸으니 멸종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고 인간적 과학의 발달(횡포)을 막을 의사도 수단도 인간에게는 없으니 이제 또 하늘(자연)이 팔을 걷을 수 밖에 없는데 하늘의 다음 생각은 과연?


종자씨앗(DNA)이 있다는 것, 이는 탄생과 죽음을 통해서 우주적 질서를 만족시켜주고 있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임을 증명하고 있는 증거이다. 죽음을 전제로 해서 종자씨앗이 있는 이 절대질서는 어떤 힘으로도 간섭되지도, 될 수도 없다. 


그리고 암(女) 수(男)를 일대 일 동률로 엉켜 서로 의지(사랑)하며 살게 한 하늘이치로 보니 우리 남성의 그간의 횡포가 부끄러워진다. 어떤 이유로서든 남성과 여성을 주종의 관계로 차별화 하고 있다면 벌써 여기서부터 하늘 뜻을 벗어난 모순이다. 


음양(암수)를 반반으로 한 우주운행질서의 본질 그 한 가닥 줄기만을 살펴보아도 당장에 눈치 챌 수 있는 뻔한 하늘이치를 남성이라는 폭력이 미련을 부려 연약한 여성이 고통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한 치사한 죄악은 없다. 


그래 여성의 원죄가 얼마나 컸기에 삼복더위 여름날에 남편은 남방으로 시원하게 차려 입으면서 아내에게는 눈만 빠끔히 뚫은 검은 천으로 휘감게 한 폭력적 횡포는 남성의 입장에서 심히 부끄러움이다. 


그렇다. 다름은 다름 그 자체가 창조의 바탕이다. 음 양이라는 그 다름의 조화에 의해 제2, 제3의 다름의 탄생(창조)으로 이어짐은 진화의 과정을 밟아가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만약 단수로 생명체 이음을 가능하게 했다면 복사판 붕어빵이라는 단조로움의 연속이 되지만 굳이 두 성의 궁합으로 탄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새로움이라는 진화에 목적을 둔 하늘 의도라 여겨지는데, 억지인가? 


근친의 혼사를 꺼린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 보여진다. 생물의 모든 씨앗을 보라. 혹 가시를 달고, 혹 솜털 날개를 달고, 고소하고 달콤하게 만들어 뭇 짐승들 입맛 들게 만들어 가능한 한 멀리 시집 보내려는 의도로 설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진화를 의식한 자연의 섭리를 엿볼 수 있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하늘의 창조에는 진화의 속성까지 포함된 것이라 싸잡아 보면 헷갈릴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빠(수컷) 없이도 출산이 가능하다는 하늘비밀을 훔친 과학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고개 숙인 사내심벌도 비참하지만 미래의 생태학이 심심해져 무슨 재미로 살아질까가 궁금하고 걱정이다.


아빠가, +가, 양(陽)이 제거된 설렘이 영원히 사라질 종자씨앗의 장례식 날 퇴화의 길은 여기에서부터이고, 종말의 징조가 바로 이날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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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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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7
음(陰), 양(陽) 그리고 기(?)

 
 

 남(男), 여(女) 라는 글자만을 놓고 봐도 가슴이 설레는, 동성끼리는 밀어내고 타성끼리는 잡아 단기는 음(-) 양(+)의 힘(?), 단성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양성의 힘에 의해 생산이라는 사건을 만들어내는 우주적 상서로운 속성 그 기(?)가 신묘하다. 


이 상서로운 기운이 신의 작품이든 자연의 속성이든 신비엔 변함이 없다. 홍수가 휩쓸고 간 황무지에 어느 시기를 지나고 보면 새싹들이 돋으며 새로운 숲이 다시 형성되고 있다. 


누가 심은 것도 가꾼 것도 아닌데 새 씨앗들이 음 양의 조화에 의해 움을 틔우고 있는 신비, 이 상서로운 새로운 씨앗의 시작도 자신의 명(命)이라는 때를 다하면 또 다른 닮은 씨앗(DNA)알맹이를 땅에 떨구고 죽어 흙이 되어 다음에 올 새싹의 밑거름이 된다. 


이 알맹이들이 묘하게도 암과 수라는 양성을 동수로 해서 짝 맞춰 생과 사의 관계과정(속성)에 의해 연속 이음으로 존재한다는 원칙이 신비롭고, 이 인연적 조화가 내 보기엔 너무 어여쁘다.


씨앗 없이 탄생 없고, 탄생 없이 사망 없는, 씨앗, 탄생, 사망은 한 몸에서 일어나는 영원성의 3위 기운이다. 


개체의 생명이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으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닮은꼴 대물림 질서를 영원성으로 보면 죽음까지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生命) 줄의 기운에 전위되고 있으니 영혼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이 분명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음양 기운(energy)의 운동작용의 근원지는 도대체 어디에 누가(무엇이) 담당하고 있는가? 혹 신인가? 혹 자연인가? 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시종의 비밀해법에 영생이라는 깃발을 들고 종교가 등장한다. 


그래 과연 “나”라는 낱개 개체의 영생이 최종 해법인가? 또 다른 의문으로 남는다. 해서, 죽음의 해법엔 영생 외에는 답이 없을 듯하니 진리인 듯 수긍이 되나 낱개들이 영생해버리면 낳음과 죽음이라는 과정의 절차가 무효와 종말이 돼버리는, 이 절대모순은 어떻게 설명될까?


개체(낱개)의 죽음 빈자리에 그들이 남긴(낳은) 씨앗에서 새 순이 돋아나 자리 메우는 순환의 영원성으로 이어지는 새끼줄 같은 생명줄 질서과정이 우주의 속성인 듯, 땅(흙)이 있고 물이 있고 태양기운을 받은 음양(- + 女男)이라는 생명체 자체가 영원성으로 존재하는, 낱개의 영원성으로서가 아닌, 생명체의 대물림이 내 눈엔 영원성으로 보인다. 


생명체의 연속성에 참여된 부분(세포적 영혼)으로서의 개체존재는 생(生)과 사(死)라는 단세포적 일생이 전부라 하면 영혼을 갈구하는 각 낱개(개체)들의 욕심엔 성이 차지 않을는지는 모르나 불로초를 찾는 진시황의 부질없는 욕심으로 보면 답이 될 듯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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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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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0
유전인자(DNA)의 비밀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는 남과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똑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나 개체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 독립적 개체 하나 하나가 개성을 갖고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 개성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절대몫(DNA)이다. 


다름은 우주의 본질이다. 다름이 있어 만물 만상이고, 우주는 다름의 전시장이다. 창조는 다름의 산물이며 진화의 근원이다. 그래서 창조의 결과는 늘 보기 좋다라는 쪽으로 마무리 된다. 보기 좋다라는 말은 달라진 진화적 상태로 본 상대적 비교어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게 하고, 팥 심은 데 팥 나게 한 생명체유전공학이라는 창조도 경이 이지만 어느 것 하나 정지된 같음이 없다는 것, 아버지와 내가 닮은 듯 다르다는 것, 오늘의 내가 비슷하긴 해도 어제의 내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시시각각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나의 이력이 만들어지는 진화의 과정, 참으로 묘하고 재미있지 않은가? 


한가지로 획일하자 함은 우주본질을 거역하자 함이며, 다름이 없는데 어찌 새 창조(진화적 탄생)를 바라며, 비교가 없는 같음엔 진화는 숨어버린다.


심지어 생물과 무생물의 다양성이 쓸모의 다양성으로 존재, 서로 먹이사슬로 얽혀 공생하고 있다는 사실, 이를 자연생태계라 하는데 어지간한 생태계의 상처는 자연치유가 되나 지나치면 치유불능 상태라는 공해에 찌들어 생명체의 멸종(씨앗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하늘은 자신이 창조한 생물을 어여삐 여겨 자연치유 같은 식으로 도우려 노력할 것이나 인간 스스로 오염시켜 자연치유의 한계를 넘기면 하늘쪽에서 먼저 손을 놓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종의 이음을 단수에 의하지 않고 굳이 음양의 사랑이라는 유희적 조화에 의해 탄생이라는 창조적 과정을 거치게 한 하늘의 깊은 의도는 만물이 서로 사랑으로 부드럽게 얽혀 살게 하기 위함일 진데, 사랑행위가 빠진 기계적 아기탄생은 연속적 사랑인자의 감소로 나타날 유전적 퇴화라는 결함으로 이어져 거칠고 살벌한 미래사회가 될 공산이 클 수밖에 없다.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


해서, 종이 다르고, 성질이 다르고, 모양이 다른 생명체 중 인간 동물로 태어나 말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종교가 다른 다양성의 우주본성대로 화합으로 살아 아름다운 화단이 되고, 멋진 오케스트라 화음의 소리 되어 천상에 울려 퍼지면 이 모든 다름을 진두지휘 하시는 지휘자이신 하늘(天)이 감동을 받아 은총으로 보답 하시리라! 나는 그렇게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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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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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2
통키(우리집 개)의 효심

 

내 나이 65살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시니어 삶을 시작했을 때 처제가 퇴직 선물이라며 쒸쥬종 강아지를 선물로 사주었다. 개를 처음 키워보는 일이라 달가운 선물은 아닌 것 같아 키우다 정 안되면 되돌려주기로 하고 우선 받기는 했다. 


그렇게 시작은 어렵게 한식구가 된 통키는 15년을 식구로 살다 아내가 간지 7개월 후 갑자기 3일을 앓다 아내 뒤를 따라가버렸다. 아마 15년을 같이한 정을 못 이겼던가 싶다.


이제 나는 함께라는 무리개념이 없어져버린 쓸쓸함에, 아니 조용함에 낯이 설어 아내 잔소리마저 그리움이 되고, 통키 돌봄까지 추억으로 멍청해하고 있다. 


오늘은 50년 함께 산 아내 이야기는 왠지 쑥스러워 피하고, 15년 통키 돌봄 이야기에서 결코 일방통행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통키가 내게 준 큰 선물에 대해 비록 짐승이지만 그 고마움을 몇 자 남기고 싶어졌다. 


그건 통키의 효심이다. 그렇다 효심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는 일편단심이다. 나는 통키와 둘이서 아침 저녁 30분씩 2번을 생리적 해결 겸 산책을 나갔었다. 마침 우리 집이 미시사가 크래디트 강변이라 산책으로는 천혜의 코스다. 눈이오나 비가오나, 추우나 더우나 15년 365일을 한번도 결근 못하고 가야하는 하늘이 준 운명적 보약 은총이었다.


다른 집들 개는 뒤뜰이나 집안에서도 쉽게 뉜다는데, 우리 통키는 뒤뜰에서 몇 번 시도해 봤으나 뱅글뱅글 돌기만 할뿐 성공하지 못하여 결국 귀찮고 번거로우나 강변으로 갈 수밖에 없는 내 처지에 그때는 통키가 얼마나 미웠었는지.


그런데 이제와 보니 이런 효자가 세상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계획성이 없고, 이랬다 저랬다 뭐 한가지 지속성이 없는 내가 만약 통키가 없었다면 지금쯤 건강이 어떠했을까?


365일 15년을 통키 따라 세상이 거꾸로 돌지 않는 이상 적어도 하루에 아침 저녁 30분씩 한 시간을 끌려 다닌(?) 보약적 효성, 만 번도 더 고마워해야 될 은혜다.


걷기가 최상의 운동이란 걸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러나, 이 상식적 기본운동을 실천하기란 밥을 굶는 것보다 어렵다. 안 먹고 안 자면 못사는 걸 알면서도, 걷기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런데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하루에 아침 저녁 30분씩 2번을 내가 개를 끌고 다녔다기보다 개가 나를 끌고 다닌 산책이 통키의 배려였음을 지금에야 실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루에 1시간 걷기는 건강법 기본 1조란 걸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상식인데도 계획성이 엉망인 나를 15년을 한결같이 끌고 다닌, 다니게 한 통키의 효심, 그렇다. 효심이다. 딴 집들 개처럼 집을 나가자마자 누지 않고 꼭 30분 걸어 멀리 가서야 누는 심사가 당시엔 그렇게도 밉살스러웠는데, 그게 모두 나에 대한 배려였음을 지금에야 알자 무한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병조마니였다. 먹성 하나는 좋아 배부름에 상관없이 먹는 것만 보면 걸 귀신마냥 먹어대는 먹돌이가 내 별명이었고, 일생 6번을 전신마취 대수술을 받은 종합병원이었다.


10년 전 위암 수술을 받았을 때 담당의사에게 나는 “이번에 배를 열 때는 아예 지퍼를 달게 해버리는 게 다음을 위해 좋겠네요”라고 농담을 했었다.


그렇게 병과 동무처럼 더불어 함께 살고 있는 나는 그래도 복이 있어 통키 같은 효자를 얻어 이렇게 80 장수로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기적인가 말이다. 내가 너를 키운 것이 아니라 통키 네가 나를 보살핀 덕이다


이제 너를 보낸 지 7개월에야 너의 효심을 깨달은 게 미안하지만 먼저간 네 엄마(아내)와 함께 잘 있으리라 믿는다. (2016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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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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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0
2018-07-20
어울림의 미학(하)

 

(지난 호에 이어)
세상 종교들이 순화라는 본뜻을 버리고 제국주의적 대결로 흐르면 할 짓은 전쟁밖에 없다. 하늘 뜻은 절대선이고 전쟁은 절대악인 데 말이다. 하늘 뜻을 따르는 선의의 경쟁은 긍정이지만 하늘 뜻을 빙자한 어떤 전쟁도 그래서 모순이다. 


다름을 미움으로 보면 시기가 되어 싸움을 낳고, 사랑으로 보면 설렘이 되어 사랑의 씨앗이 된다. 그래서 지구촌의 평화는 서로가 다름을 인정할 때만이 가능하다. 아니 인정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똑같지 않으니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은 서로가 그냥 다름인 채로 두는 것이다. 왜 자꾸 억지로 같아지길 바라는가?


나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네가 될 수는 없으나 오순도순 함께 살아갈 수는 있는 것이다. 아니 네가 있어 함께 사는 재미가 더 쏠쏠하니 얼마나 복 받은 인연들인가.


엄밀히 따져 내가 중심이 되어서 보면 모든 것이 이단으로 보인다. 남의 것이 이단이면 내 것은 남의 이단이 되는 이치로 보면 서로는 상생의 조건이지 까부술 상대가 절대로 아닌데 말이다.


다름에 우열의 의미를 둘 때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만 다름을 서로가 보완적 부분이라 여기면 서로에게 축복으로 돌아온다. 다시 말하지만, 모자이크의 기능이 그것이고, 오케스트라의 화음이 그것이고, 무지개의 조화가 그것이고, 단풍의 어울림이 그것이고, 각개 나물이 버무려내는 비빔밥이 그것이고, 화단의 어울림이 그것이다. 


개체가 독립적 가치(개성)로 참여하여 전체의 가치에 기여할 때 보람은 각 개체에 몇 곱절로 돌아온다.


내가 오케스트라에 감동하는 이유는 그 합주가 만들어 내는 멜로디의 아름다움에만 있지 않고 각 악기의 최상의 자기 소리들이 상처 하나 받지 않고 함께 어울려내는 더 큰 화음의 아름다움이 좋아서이다.


내가 화단에 매료되는 이유는 꽃 한 송이만으로도 충분한 아름다움인데 그 만가지 기화요초들이 돌과 나무와 개울물과 어울려 각기 제멋으로 흐드러져 더 큰 아름다움을 내는 모양새에 반해서이다. 


하늘공간에 무지개가, 그것도 직선이 아니라 보기에 알맞은 7색 곡선으로 수놓으면 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설렘으로 하늘의 또 다른 그림솜씨 그 미학에 취한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선생님은 칠판 가득 무지개를 그려놓고 색에는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빨강, 파랑, 노랑 이렇게 3원색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빨강만으로도, 파랑만으로도, 노랑만으로도 충분한 아름다움인데 그 3원색이 어울려내는 일곱 색의 조화미, 단색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적외선, 자외선이라는 인간가시권을 넘은 색(파장)도 있다지만, 하늘이 그런 초월적 한계를 숨겨두는 심술 또한 삶의 재미를 위한 하늘의 배려인지 모른다. 살짝 초월을 엿보는 재미, 혹 이것이 도(道)의 경지가 아닐는지? 


산 정상(진리)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동, 서, 남, 북 어느 쪽에서 오르든 정상(목적)에 오르는 길(과정)만 다를 뿐이다. 이것이 다원론의 이론이다. 


이렇게 다원주의는 남의 길을 인정은 하되 자기 길이라는 독립성의 이기적 싸늘함으로 남과 더불어라는 화합의 어울림이 보이지 않으나, 비빔밥, 화단, 무지개, 오케스트라는 완벽한 각 독립적 개성을 지닌 개체들의 조화가 어울러 만들어 내는, 개체만으로는 어림없는 더 보기 좋음으로 창조된 미학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다름의 미학이다. 보라! 다름이 화합으로 어우러지면 올림픽이 되고 감정으로 대립하면 전쟁이 되는 이유를. 


창조는 다름의 산물이며 진화의 근원이다. 그래서 창조는 더 보기 좋다라는 쪽으로 마무리 된다. 보시기에 좋다라는 말은 진화적 상태로 본 상대비교(相對比較) 어(語)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게 하고. 팥 심은 데 팥 나게 한 생명체유전공학이라는 창조방식도 경이이지만 어느 것 하나 정지된 같음이 없다는 것, 그래서 시시각각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나의 이력이 만들어지는 진화의 과정, 참으로 묘하지 않은가? 


해서 종이 다르고 성질, 모양이 다른 생명체 중 인간동물로 태어나 말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풍습과 종교가 다르나 우주본성대로 화합으로 살아, 보기 좋은 아름다운 화단이 되고 멋진 오케스트라 화음의 소리되어 천상에 울려 퍼지면 하늘이 감동을 받으리라 나는 그렇게 여기며 산다. 


이것이 목적이니 과정이니 하는 군더더기가 없는, 있는 그대로의 미학이다. 네가 있어 내가 있는, 너 좋고 나 좋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두루 좋은 미학이다. 


팔도 사투리가 있어 한국 드라마 보기가 감칠맛을 더하듯, 문화의 다양성, 이게 삶의 활력이고 생명력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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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어울림의 미학(상)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감칠맛 없고 좀은 투박하나 내 용모가 내 선택이 아니듯 환경유전버릇(DNA)인걸 내 어쩌겠는가? 절대로 고집이 아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부드러운 서울 말로 바꿀 수도 없지 않으나 그게 쉬운가? 


부모 자식도 그렇다. 비록 내 선택이 아닌 천륜적 만남이지만 배우고 못 배우고, 잘생기고 못 생기고의 우열 따위에 상관없이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인연으로 하늘에 감사하며 살고 있는 터다. 


우주는 다름의 전시장이다. 그 모든 것이 다르기에 만물(萬物)이라 하고 그 상(象)이 만가지라 만상(萬象)이라 하는데 그 만물만상이 변할 줄 모르고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다면 세상 무슨 맛으로 살아질까? 


더욱이 만상이 한가지로 닮아 있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질식할 것 같다. 지옥이 별 곳인가? 바로 그런 곳이지 싶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작이 무언고 하니 닮은꼴로 획일하자는 꼬드김이다. 다름이 다름의 값어치로 있는 다양성의 묘미, 양귀비가 예쁘다고 세상 여인들이 제다 양귀비 붕어빵으로 닮아버리면 그래 살맛 날까? 이제 맞춤형 성형 미인들이 판을 칠듯하니 아찔하다.


 나는 그때 군 병영생활에 힘들어 했었다. 같은 옷 같은 신발에 같은 밥을 같은 양으로 먹고, 같은 시간에 자고 일어나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이 뛰어야 하는 게 고역이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는 남과 다르기 때문이고, 이 개성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하늘이 준 절대 몫(DNA)이라 그 어떤 이유로도 흠집 낼 수 없는 나만의 존엄성이다. 


그러함에도 그 모든 것들과 더불어 함께 어울림으로써 만이 기능적 존재가 된다는 조건이 있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다름의 미학이며 어울림의 미학이다. 그래서 혼자 살 수 없어 사람인(人) 자라 했다.


천지만상엔 똑같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 그 형상, 그 색상, 그 소리, 그 맛깔이 다르다는 것, 이 얼마나 살맛 나고 신나는 일인가. 그러면서도 이들 개체들이 홀로 각기 따로 있지 않고 서로 어울려 있을 때가 더 좋게 보이고 값져 보인다는 것, 화단은 다양한 꽃의 어울림이며, 오케스트라는 다양한 소리의 조화가 아닌가. 


무지개 또한 3원색이 만들어 내는 색의 파노라마이고, 캐나다의 명물 가을단풍 풍경은 자연이 그린 수채화이며 우리가 즐겨먹는 비빔밥은 각개 나물이 버물려 어우러져 나오는 맛의 향연이다.


한가지로 획일하자 함은 우주본질을 거역하자 함이며, 다름이, 비교가 없는 곳엔 새로움(탄생)이 숨어버린다.


심지어 생물과 무생물이 쓸모의 다양성으로 존재, 서로 먹이사슬로 얽혀있다는 사실, 이를 자연생태계라 이름하는데, 어지간한 생태계의 상처는 자연치유가 되나 지나치면 치유불능 공해에 찌들어 생명체의 멸종(씨앗의 죽음)으로 이어질까 인간들은 지금 떨고 있다.


 ‘좋다’를 한자로 쓰면 호(好)다. 처녀(女) 총각(子)이 함께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모습, 보기만으로도 좋다. 둘이 있어 좋고, 이웃이 있어 좋다. 이게 바로 하늘 뜻이다.


우리는 종종 차이를 차별로 인식할 때가 있다. 자기 것에 애정을 가질수록 그 징후는 심하다. 사람이 덜 될수록 제 새끼만 감싸 돈다. 


다름을 차이로 보지 않고 차별의 눈으로 보는 데서 세상의 비극이 시작 된다. 흑과 백의 차이, 길고 짧음의 차이, 높고 낮음의 차이, 차이가 없는 것은 이 우주상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그 차이 사이를 헤엄치듯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다.


만물을 비추는 저 하늘햇살이, 만물을 적시는 저 하늘빗물이, 만물을 숨쉬게 하는 저 하늘공기가 차별이 있는가? 하늘은 만물의 근원이며 만물의 어버이시다.


만물을 운행하는 저 바탕하늘이 나만을 택했다는 선민의식이 되면 남은 이방인이 되고, 남의 하늘은 우상이 돼버린다. 참으로 웃기는 난감한 수작이다. 그리하여 내 것만이라는 아집(ego)에 의해 전쟁도 불사, 살상을 춤추듯 천하에 바보짓거리를 밥 먹듯이 벌여 지구촌이 쑥대밭이 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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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사이의 실종(다름의 미학)

 

60살 늦은 나이에 어렵게 배운 나의 애창가 ‘사철가’ 몇 소절 한번 들어보소.


“이산 저산 꽃이 피니 산림풍경 너른들, 만자천홍 그린 병풍 앵가접무 좋은 풍류, 세월 간줄을 모르게 되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된들 또한 경계 없을 소냐, 한로상풍은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피잖는 황국단풍은 어떠하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이 펄펄 휘날리어 월백설백 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일레라” 


사철을 노래한 이 창 소리가사처럼 이곳 내가 사는 캐나다 토론토도 사계절이 비교적 분명했었다. 그런데 근년 들어 겨울이 겨울 같지 않고 봄이 봄 같지가 않다. 


모든 생물들이 기후환경에 민감하게 길들어 살아가고 있는데, 예측이 어긋난 기후적응에의 혼돈은 심히 난감한 일이고, 먹을 거리 수급에서부터 차질이 불가피하고 생활관습 등으로 받을 긴장(스트레스) 또한 보통 문제가 아니다. 


계절(季節)의 혼돈도 혼돈이지만, 지역(東西), 장유(長幼), 남녀(男女)의 구별이 슬그머니 구렁이 담 넘듯 지워지면서 사이, 차이, 구별의 선이 흐려지니 괜히 공해에 이유를 붙여 말세의 징조라 말들을 한다. 


아이가 어른 같고 어른이 아이 같은, 처녀가 총각 같고 총각이 처녀 같은, 아내가 남편 같고 남편이 아내 같은, 총각김치 다꾸왕(단무지) 피끌(오이지)이 함께 나란히 밥상에 오르는 세상, 과연 멋진 세상일까? 


인간이 꿈꾼 지상낙원이 바로 이런 걸까? 절대로 아닐 것이다. 음양이 만나 불꽃이 티고, 다름이 있어 그 삶의 풍요가 감칠맛이고 멋인데.


그러고 보니 장유유서(長幼有序) 부부유별(夫婦有別)이 고리짝신세 된지 오래고, 우주적 음양질서가 뒤죽박죽 생산질서의 종말론적 혼돈의 징조가 하 수상하고, 지역, 인종, 계급구별 또한 평준화 수순을 밟고 있고, 클래식의 도도함이 대중화에 밀리어 고상함과 평범함의 사이가 애매모호 따지는 것 자체가 촌스럽다. 


남은 건 하늘과 땅 사이, 삶과 죽음 사이이라는 궁극분별만이 숙제로 버티어있다 할까? 아니다 이마저도 과학이 넘보고 있고, 그리고 이 모든 자리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사이가 옛날 계급서열보다도 더 짙게 갑(甲), 을(乙)질 차별화로 파이고 있다. 


이제 5대주 6대양이 한나절 거리로 축지 되어 백인 흑인 황인이 뒤섞여 10대, 100대, 1000대로 흐르는 동안 인종의 구별이 사라질 것이고, 언어 또한 아마도 한 언어가 세계통용어로 사용되고 각 민족어는 지방 사투리로 소통이 되어질 것이다. 


음식문화와 종교문화가 그 독특한 고집으로 좀은 오래 버틸 것 같으나, 이 또한 세월에 장사 없을 것이다. 


이렇게 좁아져 버린 지구촌의 지리, 기후, 인종, 성별, 언어, 풍습, 종교 같은 분별 색이 희미해져 버리면 후대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아질까? 


손가락으로 IT폰을 눌러 1초면 지구반대쪽 어느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아는, 시시콜콜 모르는 것이 없는 정보화시대에 토론토 집에서 아침을, 파리 사촌 집에서 점심을, 서울 외갓집에서 저녁을, 베이징3촌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밤을 보내고, 모스크바로 날아가 상담을 하는, 국경선은 지도상의 선일 뿐이요, 인종, 언어, 풍습, 음식, 옷, 음악, 춤, 주거환경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는, 구별이, 사이가, 차별이, 분별이, 다름이, 낯섦이 없는 싱거운 지구촌 현주소를 보면 겨우 지난 100년에 이룩해 낸 인간재능이 참으로 대단하다 싶은데, 찬사 대신 장송곡을 부르고 싶으니 어이한담.


사이가 분명하고 다양함이 화합으로 있는 세상, 다름이 이웃사촌으로 있는 세상, 차이가 차별이 아닌 세상, 만가지 꽃이 제멋으로 어우르는 화단 같은 세상,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이 각기 제 색으로 함께 어울려 곡선을 그리며 하늘에 걸려있는 무지개 같은 세상, 너 따로 나 따로 인 채 함께 있음이 행복으로 있는 세상, 그런 모자이크 같은 세상이기를, 그렇게 나는 꿈꾸며 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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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2
사물보기

 

신문에 나오는 내 사진이 너무 젊어보여 근황 걸로 바꿀까 하여 그쪽 전문가인 딸에게 부탁해서 여러 장 찍게 했다. 정면으로, 대각으로, 갸웃이, 미소진, 무표정, 안경 쓴, 안경 벗은, 정장차림, 수수한 차림, 더부룩한 머리, 말끔한 머리, 그렇다고 여(呂)서방이 김(金)서방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마치 성형수술을 한 가짜 얼굴 같은, 그 중 실물보다 젊게 찍힌 매력남(?)을 골라 보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늙은걸 생각지도 않고. 


사진을 찍을 때의 기본은 빛(명암)과 위치(각도)와 그리고 초점인데, 이를 비유로 말하면 빛은 품격이고 각도는 자리이고 초점은 판단력이라 하겠는데, 바른 품격으로 바른 자리에서 바른 판단을 한다면 일단은 바른 사물보기가 된다 하겠다. 


사물보기를 바르게 할 수만 있다면 내 삶 자체가 바르게 될 것 같은데 그게 쉽지가 않으니 탈은 늘 여기에 있다. 품격이 비뚤면 사물이 비뚤게 보이고, 위치가 나빠 초점이 흐리면 흐릿하게 보일 것이고, 더욱이 보일 상대가 위장 술이 능하다면 제아무리 밝은 눈도 속수무책이다. 


이렇게 같은 사물, 같은 사건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보이고, 같은 눈인데도 때와 장소와 기분에 따라 달리 보이니 세상물정보기에 정답이 없다는 말도 맞다.


똑바로 놓고 보고, 거꾸로 뒤집어보고, 비딱하게 기울여보고, 멀리 놓고 실눈으로 보고, 상대 입장에서 보고, 술 취한 몽롱한 기분으로 보고, 화 났을 때 보고, 기분 좋을 때 보는, 그때마다 같은 사물이 천차만별 달리 보이니 세상사 그래서 재미있는지는 모르지만, 정답은 어디에서 찾을꼬? 


세상 사물보기 중 내게 가장 어려운 것이 종교보기와 이념적 가치관이다. 나의 이성을 총동원해 이어령 교수처럼 영성에까지 접근시켜 보려고 해도 고차원(?) 위치에 감추어진 절대자의 모습은 오리무중 잡히지 않고, 안전적 보수의 가치관과 뒤집어보려는 진보적 가치관 사이에 나는 언제나(젊었을 때나 늙어서나) 보수 쪽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런 내가 줏대 없어 보이는가? 품격이 낮은가? 심성이 비뚠가? 내 자리 환경이 나쁜가? 아니면 내 분별력에 문제가 있는 건가? 그도 아니라면 세상보기 명제들이 사물보기 같은 수단으로는 어림없는 차원인가? 


아무튼 내 나름으로 자리매김해버린 고집으로 버티고 서있는 한, 대상이 선명히 보여지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성경에 기독교의 하느님께서 만물 만상을 하루하루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다는데, 하늘 절대자에게도 좋음과 나쁨이라는 상대가치 개념이 있다는 게 의아하지만 보기에 좋게 하려는 예술성만은 높이 사고싶다. 들꽃 한 송이도 모양 내며 피는 자연 그 자체가 예술품 전시장이니 말이다. 


저 모양들, 저 색상들, 저 소리들. 그 맛깔, 그 표정 하나 하나가 제 멋으로 있는 자연의 자태에 나는 숨이 멈출 듯 반해버리니 말이다. 


우리 속담에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짚신 고무신 하나를 만들어도 거기에 모양내기가 보인다. 


이렇게 우주자연이 중용적 보기 좋음의 미학으로 나를 감싸고 있는데 왜 나는 늘 미움과 악에 넘어지고, 옳고 그름의 사리판단에 돌아서서 후회하는, 서툴게 살아가고 있는지? 


사물을 동(東)에서 보면 서(西)에 있고 서에서 보면 동에 있는 것, 그래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중요할 것이나, 서 있는 자리가 어디가 되던 보는 마음은 늘 가운데(중용)를 지킬 수만 있다면 이상적일 텐데 성인(聖人)이 되기 전에는 어려우니 대충 사물보기로 살 수밖에 없나 보다. 보통 사람답게.


한 세상 그저 그렇게 다투고 화해하며 서툴게 사는, 그게 사는 재미려니 허허하며 살아지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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