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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용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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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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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인생 극장(劇場)(3부)-희년(禧年)의 축제(祝祭) (오십 년만의 음악회)

 

 

생전 처음 겪는 격정의 시간이었다. 오십여 년의 세월을 용해하고 사십여만의 시간들을 그 자리에 차려진 훌륭한 정찬요리와 함께 우리의 추억으로, 우리의 가슴으로, 우리의 목구멍으로, 까마득히 사라진 과거와 그날 그 자리에 세 사람이 함께한 현재를, 동시에 음미하며, 느끼며, 마시고 삼키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 말씀이 11월 00일00시 명동성당 미사시간에 본인이 지휘하는 000성가대가 병용이 보내준 곡을 발표할 것이니, 그날은 꼭 와달라는 부탁이셨다. (병용이 한국 방문 전 그가 이십여 년전 가사를 붙이고, 그의 친구가 곡을 만든 악보 한 편을 메신저를 통해 선생님께 송부해드렸음)


하지만 그날은 병용이 이미 한국을 떠난 뒤의 일자(日字)가 될 것이라 말씀 드리니, 그럼 그전에 또 다른 큰 행사가 있으니 00일 몇 시까지 00장소로 꼭 와달라는 재청을 하셨다. 


그날 역시 병용의 일정에 맞지 않아 고사의 뜻을 드리니, 그렇다면 마지막 으로 성가대 연습이 00일 00시에 강남구 00처에서 있으니 그때 와서 우리대원들과 함께 병용의 노래를 부르고 연습에 동참 해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다시 하시었다.


그것마저 거절한다면 큰 결례가 될듯하여 빡빡한 일정을 조율한 뒤, 그 자리에 나아가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동석했던 친구도 그 자리에 초대되었으나, 그 친구는 이미 같은 날 00대학에 변경 불가능한 일정이 잡혀있어 함께 동행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그날 저녁 만찬의 장소는 선생님이 주선하셨고, 황공하게도 모든 비용을 당신께서 친히 감당하신 극진한 제자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귀한 자리였다.) 


몇 번의 낯과 밤이 지난 후, 약속 시간에 맞춰 그 장소로 간 뒤, 성가대원들 앞에서 간략한 자기소개와 선생님과의 마치 영화와도 같은 극적 해후에 대한 사연을 말씀 드린 후, 그 분들 앞에서 병용은 자신의 곡 한절을 독창하고, 다시 그분들과 함께 합창을 한 뒤 그분들의 앵콜 요청에, 준비해간 가곡 두 곡, 또한 선생님이 병용에게 선물하신 CD에 실린 곡 중 1곡을 독창하기도 하였다.


병용은 그날, 그분들로부터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환대와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렸으며, 대원들이 정성으로 준비한 케익과 떡을 들며 약간은 민망할 정도의 융숭한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케익은 선생님이 병용을 위해 준비하신 듯)


대원들 중엔 명문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쟁쟁한 분들이 계시다고 하였는데, 그런 자리에 웬 무지렁이 같은 자(者), 병용이 설쳐 대었으니.


그날, 병용은 생애 중 아주 특별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생의 중요한, 한 시점으로 기억될 대사(大事)를 마치고, 대원 여러분께 정중히 감사와 헤어짐의 인사를 드리고, 선생님께도 각별한 고마움과 반가움, 또한 섭섭함의 언제 다시 재회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석별의 정(哀情)을 나눈 후, 그의 임시 체류지인 아들네 집을 향하여 발을 떼었다.


두 주간의 모든 일정을 잘 마무리하고, 병용은 귀국길(Canada )에 올랐다. 인천을 떠나 서해를 가로질러 중국, 러시아 북동부, 앨러스카 북미대륙의 만 미터 고도를 장시간 날며 병용은 금번 한국방문의 전 과정을 리뷰 하였다.


처음엔 한국방문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무겁고 부담이 되는 여행이었으나, 하지만 그가 아니면 누구도 대신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담대히 나서기로 하였던 터였다. 


그러했던 고국방문이, 하루 평균 두세 시간의 수면과 빠듯한 일정으로 느긋하게 즐기지도, 식도락의 일탈마저 누려보지 못한 채 매일 바쁘게 일을 보고, 짬짬이 지인들을 만나고 하였음에도 전혀 지치지 않고 오히려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으니.


병용은 곰곰이 묵상을 이어갔다. 참으로 고맙고 다행스러웠으며 한동안 소원했던 옛 친구, 또한 서먹했던 형제와의 만남을 통해 껄끄러웠던 관계를 회복하고, 늘 다정했던 몇몇 지인들과는 더 깊은 정을 주고받는 보람되고 값진 열매가 맺어진 그런 복된 여정이었다.


그에 더해 평생 잊을 수 없는 귀한 만남을 가졌으니, 그것이 바로 오십여 년 만에 상봉을 하게 된 중등시절 음악을 담당하셨던 N선생님과의 만남이라 하겠다. 세상 그 누구라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병용에게는 그의 옛 시절 삶의 궤적에, 제일 아쉽고 그리운, 어쩌면 한스럽기까지도 하였던 그 장면이 N선생님과의 인연이었다.


오랜 인생의 숙원이었던 그 ~ 큰 ~ 소원이 금번 고국방문을 통해 이루어졌으니, 진정 병용의 생애에 언제까지라도 잊혀지지 않을 소중한 ~희년(禧年)의 축제(祝祭) (오십 년 만에 치러진 음악회) ~ 로 병용의 가슴에, 고이고이, 새기어 지리.  


 출연: J H, Nam / E S , Kyung / 유병용 / 명동성당 000 성가대원 일동


 (희년의 유래(year of Jubilee): 기독교(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전통 중 하나로 옛 시절 유대민족이 칠 년마다 안식년을 지키고, 일곱 번의 안식년이 끝나고 오십 년째 한 해를 희년으로 정하여, 자유를 선포하고, 종 되었던 자는 풀어주고, 매였던 자들은 놓임을 받고, 빚을 졌던 자들은 탕감 받고, 땅을 빼앗긴 자들은 그것을 돌려 받는 등 민족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공동체의 축제이며, 자유를 선포하는 은혜의 해를 일컬음.
 제목을 ‘희년의 축제’로 한 것은 병용이 오십여 년 만에 옛 스승을 뵙고, 그간 병용의 가슴에 맺힌 오랜 소원, 슬프고 아렸던 그 숙원이 모두 완전히, 후련하고 말끔하게, 씻어진 그 기쁨을 나타내려 한 것임을 밝힙니다.) (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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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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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5
인생 극장(劇場) (2부)-희년(禧年)의 축제(祝祭) (오십년만의 음악회)

 


 
 꿈결과도 같았던 나흘간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간 친구와는 계속 메일 또는 메신저를 통한 소통을 이어가며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부여된 삶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극적인 옛 친구와의 재회를 계기로, 또 하나의 드라마틱한 놀라운 만남이 연출 되었으니 그것은 그 시절 중2학년 음악을 담당하신 N 선생님과의 만남이라 하겠다. 


병용은 N 선생님과의 특별한 인연을 아직껏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의 생애 동안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아리고, 한편 슬프기도 한 숨은 비화가 병용의 인생 Black box 에 선명하게 흔적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기억하는 중학시절의 N 선생님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으로 교직에 부임하신 분으로 느껴졌으며, 그 시절 시골에서는 전혀 접할 수 없었던 첨단 New fashion 의 차림으로 혜성처럼 나타나신 분으로 각인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때까지 큰~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한 병용에게는 가히 충격적이고 파격적이라 할만한, 강렬하고도 대범한 이미지로 비추어진 그런 분이셨다.


그때 병용은 교내 음악경연(노래) 대회에, 친구들의 추천이 있었는지 아니면 예심을 통한 결정이었는지 확실하진 않으나, 반 대표로 뽑혀 선생님 앞에서 그분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연습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래실력은 불문하고 병용의 태도 즉 노래하는 자세가 앞을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 천장만을 올려다 보는 것이, 선생님께는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아니하였다.


몇 번의 주의에도 끝내 자세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선생님께서는 그를 탈락으로 밀어 내시고 말았었다. 그때의 아픈 기억이 육십여 년 세월을 살아온 그의 가슴 한가운데, 아직도 가끔씩 애잔함과 쓸쓸함으로 다가와, 병용은 스스로 자신에게 연민을 보내곤 하였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병용은 혼자 부를 땐 스스로 자신의 노래 솜씨를 훌라시도 도밍고, 테너 박인수, 혹은 가수 윤형주와 같은 대열에 올려놓기도 하는 優 아닌 愚를 가끔은 저지르기도 하는 者이다. (사실 그때는 도밍고, 박인수, 윤형주와 같은 분들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며, 좀 과장된 표현법이 구사되었음)


한데 그의 약점이라면, 많은 사람들 앞에만 서면, 너무 긴장되는 탓인지 그만 꽁꽁 얼어붙어 평소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죽을 쑤어버리는 고질병이 도지는 것이었다. (나이가 든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그 나쁜 버릇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아 그 점이 늘 아쉽고 힘들기도 하였다. 더욱이 어릴 땐 더더욱 숫기가 없었고, 대담스런 기질이 못 되었으니. 그런 悲運의 추억 속, 그때 그 선생님을 반세기가 넘어선 지금 다시 뵐 수 있다니, 이것은 마치 悲戀의 연인이 통한의 눈물 속에 헤어졌다 수십 년 지나 뜻밖의 재회를 갖는 것처럼 온 세상을 다 얻은 기쁨과 감격, 뜨거운 감동의 해후를 나누는 듯 그런 감회와 느낌으로 병용의 가슴을 서서히 달구고 있었다. 


병용은 선생님과 수개월 동안 메신저를 통한 만남과 소통을 나누며, 상당히 친근한 관계로 발전 하였고, 비록 연배의 차이는 있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정서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더욱이 선생님이 보내주신 가곡 CD에 수록된 그분의 노래가, 병용의 취향과 음악성에 차츰차츰 가깝게 다가왔으며, 나중엔 아침 저녁 출퇴근시 줄곧 선생님의 노래를 고정시킨 채 감상을 하며 즐기기에 이르렀다. 


병용은 본래 여성 성악가의 곡보다는 남성의 곡을 더 좋아하였는데, 그 오래된 음악적 취향이 선생님의 곡을 애청하는 사이 맥없이 허물어지고야 말았다.


그런 어느 날 병용은 갑자기 고국 방문을 준비하게 되었다. 약 두주간 일정으로 집안의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지체 없이 바로 돌아와야 하는 바쁜 스케줄을 짜고, 출국하기 전 고국의 몇몇 친지들께 소식을 전하며 선생님께도 알려 드렸다. 


 며칠이 지난, 시월 하순경 서울에 당도하여 우선 중요한 용무를 처리하며, 틈틈이 지인들을 만나고 선생님께도 전화를 드렸더니 무척 반가워 하시며, 다음날 역삼동 00 요리점에서 00시에 만날 것을 제안하셨다.


지난 유월 캐나다로 병용을 찾아왔던 친구와도 함께하기로 약속을 하시며, 그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계시는 듯, 미세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다음날 친구와 먼저 만나, 그의 차를 타고 약속 장소에 가니 선생님께서 미리 기다리고 계셨다. 거의 53년만의 만남이니, 그런 것을 무어라 해야 할까? 까까머리 13세 소년이 육십 중반이 다 되었고, 이십 초반 묘령의 선생님이 칠십 중반이 다 되어 만나게 된 그런 운명적인 사건을, 반세기 세월의 두꺼운 벽을 뚫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사십오만 여의 시간을 관통하였다고 할까나.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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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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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9
인생 극장(劇場) 1부-반세기(半世紀) 세월의 벽을 뚫고

 

 


 
 병용은 올해초 불현듯 그의 60여년 지나온 생의 발자취를 되새김질 해보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들을 회상해보는 그런 시간들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지난 세월을 더듬어 나가던 중, 그 기억의 초점이 1965-67 년 사이 앳된 12-14 세 전후의 나이로 충북지방 어느 시골 소재 중학교 1-2 학년 차에 만났던 한 친구에게 멈춰지게 되었다.


 ~마치 래디오의 주파수를 맞출 때처럼, 어느 지점에선 소리가 명료해지며 빨간불이 선명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저울추가 무게중심의 근처에서 잠시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장 중심점에 이르러 고정 되듯이~ 


그의 이름이 어렴풋이 생각나고, 그와 나누었던 아련한 우정의 편린들이 하나 둘씩 아른거리며 옛 시절의 필름들이 병용의 맘속에, 그리고 그의 눈앞에서 서서히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인지하게도 되었다. 


그렇게 옛 동무의 이름과 추억의 조각들이 떠오르니, 그때부터는 갑자기 그의 마음이 통제불능 조급증 환자가 된 듯, 어떻게 하여야 그 친구를 빠른 시일 안에 만날 수 있을까? 설렘과 흥분 초조함이 병용의 가슴에 순간 융기되어 그를 거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며 심하다 싶을 정도의 채찍질을 가해 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와 함께했던 시절이 하도 먼 옛일이기도 할뿐더러 중학 2년 차에 병용 가족은 서울로 이주하여 거의 그 친구 소식을 접할 수 없었고, 97년도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왔기에 반세기가 지난 현재의 시점으로는 그 친구와 쉽게 연결점을 찾는다는 것이 난관(難關)이라면 큰 난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 병용의 머리 속에 한가지 Idea가 떠올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니 그의 성이 참으로 드문 희성(稀姓)이어서 그런지 딱 한 사람이 뜨긴 하였는데 그 사람이 병용이 찾는 그 친구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 사진도 없고 프로필도 찾기가 어려워 좀 낙심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검색을 하다 마침내 프로필을 찾게 되었고, 그 친구가 병용이 찾는 친구인 것이 확실히 밝혀진 다음 e-mail 연락처도 알게 되었으며, 동시에 병용은 急 메일을 보냄으로 한걸음에 그에게 달려 나아갔다.

 

병용의 뇌리 속에 남아있던 친구의 모습은 중2시절 교내 웅변대회 나갔던 것과 그 친구가 외쳤던 원고의 내용이 지금껏 그대로, 자신의 기억창고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는 것이었다.


~ 잔잔한 호숫가에 집어 던진 하나의 돌이 온 호수를 메아리 쳐 나가듯, 청천벽력과도 같은 삼팔선 전역에 걸친 육이오 불법 남침을. ~ 


그 외에도 그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침착성과 의젓함이 있었으며, 용의주도한 면도 느껴졌던 그런 기억들이 떠오르며 지금쯤은 어느 자리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나게도 하는 그런 친구였었다.


그렇게 마치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놀랍고 반갑기 그지없는, 충격적? 이기까지 한 두 사람의 만남은 몇 차례의 서신교환과, 카톡을 통한 교신과 대화를 수없이 이어갔으며, 거기에 멈추지 않고 급기야 그 친구는 지난 6월초 병용을 찾아 나흘간의 일정으로 토론토를 방문하는 극적(劇的)인 사건을 연출하였다.


그가 병용을 찾아올 때 그의 선물과 더불어 중학시절 음악 선생님으로 두 사람을 가르치셨던 N선생님(女)의 소식과 선생님의 가곡 Solo CD집을 가지고 선생님께서 친필로 쓰신 손 편지와 함께 병용에게 안겨주었다. (선생님은 평소 친구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과 자주 교류를 나누시며, 그 동안 성악가로 많은 활동을 하시고 지금은 명동성당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시며, 여러 차례 외국순방 음악회도 다니신 젊음의 열정을 지닌 분으로 병용의 소식을 들으시고 안부와 선물을 보내주시기에 이르렀다.)


병용은 그때 오랫동안 거의 잊다시피한 옛 친구를 오십여 년 세월의 장벽을 뚫고, 인터넷과 통신을 통해 다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인생의 event라 생각하기도 하였는데, 친구가 직접 이곳까지 찾아온다는 사실이 실로 꿈같기도, 또한 새삼 어린 소년시절로 환생이 된듯한 착각이 일기도 하는 삶이 꿈같고, 꿈이 삶 같은 그런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 친구도 고백하였지만, 아주 오래 전 첫 여자친구를 만나 연해 하던 그때의 설렘을 뛰어넘을 정도의 떨림과 기다림이 서로의 가슴에서 뜨겁게 뛰고 있던 환희(歡喜)의 시절이기도 하였으며(~그런 것을 정신적인 회춘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의 교차가 극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친구는 병용의 곁으로 날아와, 4박을 하며 하루는 천섬을 돌아보고, 하루는 나이아가라를 함께 거닐며, 반세기 동안 묵혀있던 세월의 나이테를 한 칸, 한 꺼풀씩 압축하여 다 벗겨내는 막중한 과제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완수해내기도 하였다. 


두 사람이 함께 여행 중 캐나다의 광활한 High way를 달리며 창 밖으로 전개된 아득한 지평선을, 다른 한쪽으로 펼쳐진 끝모를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러나 그보다도 더 먼 거리 반세기 세월의 두께와 시간의 원거리(遠距離)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중년을 넘어 만년을 향해가는 두 친구는 어느새 사라져간 옛 시절의 보물(추억)들을 건져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친구는 98년도에 뉴욕에서 두 해 정도 유학하던 시절, 나이아가라와 토론토 천섬 등을 잠깐 돌아보았다고 하였지만, 그때는 이번과 같이 아름다운 절경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그저 주마간산으로 빠르게 훑고 지나가기에 바빴노라고 말하였다.


나이아가라 나들이엔, 병용의 절친인 H K, Kim이 자신의 차로 출발부터 돌아오는 시간까지 병용과 옛 친구와의 만남이 더욱 값지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직접 운전을 하고, 나들이 코스를 안내하는 등 귀한 우정을 선사하였다. (병용과 그의 옛 친구를 배려해 직장을 하루 쉬고 기꺼이 나서준 병용의 캐나다 20년 지기이며, 병용은 그를 자신의 지음(知音)으로 여김) 


4박5일이 꽤 길 것 같았으나, 금새 지나버리고 백여(100)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오랜 시간 적체되었던 서로간의 역사(歷事)를 다 풀어내기엔 한계(限界)를 깨닫고, 미처 다 풀지 못한 사연들은 서로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이어 감당하리라는 ‘인생숙제’를 안고 자신의 자리로 숙연히 회귀하였다.

 


 출연: J H, Nam age 22~75 
 출연: E S, Kyung 12~65, Location: Korea and Canada
 출연: 유병용, 12~65
 우정출연: H K, Kim ~ 65

 


 
 (글쓴이 참고: 본 글의 마지막 단원 歷事의 표기는 歷史의 오기가 아닌 표현임을 알려드리며 오랫동안 쌓여있던 친구간의 묻혀있던 사연들을 나타내려, 글쓴이가 조합한 단어인 것을 밝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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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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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6
동무생각(思友)(3)

 

내 어릴 적 소중한 친구여!


고국 산천에는 지금 진달래, 철쭉이 지천으로 피어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중이라네. 그간도 잘 지내고 계신가?


먼저 답신이 늦어서 미안하네. 공사간 바삐 돌아다니다 보니 차분히 글을 적기 어려웠음을 널리 이해하여 주시게나. 자네가 정성으로 써서 보내준 편지와 저절로 미소가 번지는 가족사진들, 좋은 추억의 글도 잘 읽어보았다네. 


친구, 보내준 사진에 비친 친구의 안정된 이민생활, 그리고 자녀교육에서 성공한 모습을 전해주었기에 지난 세월 온갖 어려움을 오롯이 이겨내고, 노신사가 되어 나를 다시 찾아준 친구가 한없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네. 오늘 다시금 전화로 밝고 건강한 음성을 들려주시니 더욱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라네. 


편지에서도 친구의 어릴적과 조금도 변함없는 어진 인성과 고운 마음결이 깊은 공감을 느낄 수 있어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고마웠다네. 특히나 어릴적 내가 느끼었던 친구의 그 다정하고도 그윽한 마음씨, 어른스러운 배려심이 되살아나서 마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 행복하였다네. 


친구! 나이 들어갈수록 행복의 비밀은 아주 단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네. 그건 바로 비록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함을 나누며 살아가는 순간순간들이 아닐까? 


사람의 삶 속에서 이런 소박한 행복을 나누며, 서로 공감이 일어날 때만큼 좋은 감정이 있을까 싶구먼. 따뜻함과 든든함, 연대감 등등… 연애의 감정보다 더 뿌듯하고 흐뭇하였다네.

 

 

 ~~~~~~~~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친구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내 어릴 적 소중한 친구여!

 


노산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의 이 정다운 노래 "사우"를 아시는가? 언제 들어도 좋은 곡일세.


가사와 같이 정말 멋진 모습으로 이국 땅에서 모진 세월 다 견디어 내고 멋지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나의 고향 동무와 함께 하는 이 복된 삶 속에서 어릴적을 떠올리면 금새 모든 세상 근심이 사라진다네.


친구, 중학시절 어여쁜 처녀 선생님(000 음악선생님)을 기억하시는가? 지금 75세이신데 가끔 모시고 식사도 하는 인자하고 고마운 은사님이시지. 


근데 몇 해 전, 선생님의 전화가 왔다네. 이민 가서 워싱턴DC (Virginia)에 사는 노래 잘 하는 우리 1년 선배 000씨(음악경연대회에서 1등 수상) 그립다며,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부탁하시더구먼. 어찌어찌 수소문 끝에 찾아 알려드렸더니, 글쎄 일부러 그 멀고도 먼 미국 버지니아로 찾아가셔서 그 옛날 불렀던 수상곡 "가고파"를 함께 부르시며 감격의 시간을 나누셨다지 무언가?


누구나 노년엔 추억을 먹고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 내가 역시 친구와의 추억에 젖어 하염없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언제 서울 오실 기회는 없으신가? 나도 캐나다 출장 기회라도 만들어 꼭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구먼. 


그럼 오늘은 이만 줄이고 또 연락하겠네. 늘 건강하시고 하나님을 기억하며 인자하신 부인과 더불어 보람찬 나날 엮어가시길 비네. 굿~나잇!

 

과천에서 00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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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용
65868
14217
2018-05-09
동무생각(思友)(2)

 

(지난 호에 이어)

 


 보고픈 친구여,
 지난 2주간은 약간의 불안과 설렘 그리고 다시 큰 기쁨과 환희를, 실낱 같은 기대와 한편 일말의 조바심 가운데 가파르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격정의 순간 이었다네.


이제 인생의 연륜이 쌓인 탓인지 아니면 인간 본연의 회귀본능이 작용하였는지, 얼마 전부터는 옛 시절이 아련히 그리워지며 나의 출생시부터 자라온 온 과정을 뒤돌아 보는 마치 명작의 영상을 감상하듯 되돌려 보기를 하는 그런 습성이 생겼다네.


그러던 중 중요한 장면을 또 한번 되돌리는 과정에, 바로 그 자리에 친구 ‘ㅇㅇㅇ’ 란 이름이 나의 마음을 꼭 붙들고 말았다네. 


친구, 근 반세기 동안을 무심히 잊고 살았던 이 부족한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주기 바라네. 하지만 한번 그대의 생각이 떠오르자, 그때부턴 왜 그리도 마음이 조급하던지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넷 검색에 친구의 이름을 치고, 혹 전화번호나 메일 주소는 없는지, 수십 번을 검색하고 또 반복하기를 셀 수 없이 하였네만.


마침내 친구의 블로그에 회사 전화번호를 발견하곤, 반가운 마음에 그 번호가 꼭 살아있길( ? ) 소원하며 시간에 맞춰 다이얼링을 하고, 드디어 친구의 휴대전화 번호를 친절한 여직원으로부터 받게 되었네(요즘은 세태가 험악해 아무에게나 신상정보를 공개할 수 없는 시절인데, 고맙게도 그 여직원의 현명한 맘 씀씀이 덕에 행운을 얻었다네). 나의 이 고마운 뜻을 전해 주게나.


그렇게 갈망하던 친구와 ‘전격’ 비록 전화기를 통하기는 하였지만 서로의 목소리를 나누며 만남을 갖고 보니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개가 무량하였던지 그 마음을 다 설명하기 어려울 뿐이라네.


전화를 통하여 내가 보낸 메일을 알리고, 바쁜 일상 탓에 짧은 대화를 마친 후 친구의 답신을 기다리는 그 한주간이 내게는 왜 그리도 멀고 더디게만 느껴 지던지, 언제부터인가 젊은 열정이 식은 탓인지 그런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는데.


 실로, 오랜 세월의 벽을 관통한 극적인 통화에서 그 무수한 시간들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목소리가 전혀 낯설지 않게 내 귀에 와 닿는 그 점도 새로웠고, 친구의 억양이 진정 나의 옛추억을 새록새록 되살려 주었으며, 아울러 나 자신도 어디에 묻혀있는지도 모르는 지난 세월 나의 삶, 나의 궤적들을 한 조각 한 무더기씩 일깨워주는 자네의 그 세밀한 기억의 보따리가 놀랍고 경이롭기도 하였지. 


거기에 멈추지 않고, 친구의 그 깊은 인성 속에 간직해 있던 나에 대한, 우리가정에 대한 연민과 따뜻한 관심, 보잘것없는 이 사람에 대한 애틋한 우정 (심히 무익한 나에 대한 과분한 인상 등), 내 일찍이 보아왔던 그대의 인품이 지금껏 고이 지켜져 온 것이 진정 나를 기쁘게 하였다네.


정녕 그대와 전화 상면을 하고 나는 얼마나 마음이 설레고, 흥분을 하였던지 아마도 어린 시절에나 느껴 보았을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내 가슴을 격렬하도록 일렁거리게 하였다네.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여준 친구, 진실로 고마우이…이젠, 앞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간 못다한 우리의 우정을 잘 되살려 보자꾸나. 난 어릴 적 꿈이 그 시절 하도 고생을 하여서 그랬는지, 좀 풍요롭게 사는 것과 또 한가지는 우리 가정이 순탄치 못하여 나의 오롯한 바램은 ‘Sweet Home’을 이루는 것이었다네.


이민 오기 전 나름 열심히 치열한 삶을 살아오며, 어느새 가정을 이루고선 그런 소망을 어느 정도는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하지만 나의 생각이 더 성숙하여진 것인지 그것으론 나의 인생이 진정 행복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새로운 바람, 하루를 살더라도 참 사람답게 물질을 뛰어넘어 참 가치 있는 삶을 살아 보자는 소박한(어찌 보면 절대 소박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으로 이민을 하게 되었다네…


그렇다고 이곳의 삶이 유토피아 같은 그런 삶은 아니라네, 자네도 알겠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기에 어디든 고충과 애환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사실 나의 경우엔 경제적으론, 이곳에서의 삶이 한국에서 살았던 과거에 비하면 5분의 1 아니 그 이하로 형편없이 떨어진다네.


하지만, 상기한 대로 경제적인 것만을 인생의 가치로 정하지 않았기에 이민의 삶을 그렇게 후회하거나 되돌릴 생각은 아직까진 없다고 말할 수 있네. 그저 큰 욕심 없이 자족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삶이라네.


 내가 너무 나의 미흡한 얘기만 늘어놓은 것을 용서해 주시게, 친구의 지금의 모습을 내 아직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의 느낌엔 지금의 친구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가정과 사회, 그대를 아는 모든 구성원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족한 이 사람은 감히 말할 수 있다네.


내 일찍이 친구의 됨됨이를 잘 알아보지 않았겠는가? 나의 벗이여, 나의 허물을 너그러이 덮어주길 바라며 오늘은 여기서 글을 맺으려 하네, 이제 여유롭게 생각나는 대로 만나 보기로 하세.


광수에게도 나의 소식을 전해주게나, 전화번호나 멜 주소도. 내가 부족하여 좋은 친구를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지 못한 점 크게 뉘우친다고 전해주시게. 친구와 가족 모두의 건강, 행복을 기원하면서

 

-리치몬드힐에서 병용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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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byungyong
유병용
65773
14217
2018-04-27
동무생각(思友)

 

 

옛친구 00兄 前,


벗이여 나를 기억하겠소? 유병용(劉秉鎔)이라고, 아주 먼 옛날 65~67년여 간에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서 잠깐 살았고, 학교는 감곡중학교를 다니다 2학년을 마칠 즈음 그만두고 집안 사정상 서울로 이주하였던… 그때 나의 부친이 감곡 지서에 근무하시어 지서 근처에 살았었고, 친구도 근처에 살았던 걸로 기억되기도 하고.


 한가지 확실히 추억되는 것은 친구가, 그때는 해마다 실시되는 교내 ‘반공(反共)’ 웅변대회에 나아가 ‘육이오’를 주제로 웅변을 하였던(외쳤던) 사건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다는 것이오. 그 내용이 이렇게 시작되었던 같으오. ‘. 잔잔한 호숫가에 집어던진 하나의 돌이 온 호수를 메아리 쳐나가듯 청천벽력과도 같은 삼팔선 전역에 걸친 육이오 불법 남침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 후 몇 수년이 지나, 서울에서 친구가 OO대학에 다닐 때 우연한 기회에 잠깐 재회하였던 기억이 지금 가물가물 하기도 하다오. 그러고서는 지금까지, 근 사십 수년을 서로의 소식(생사)을 모른 채 긴 세월 동안 단절이 되었으니. 국토분단의 비극도 아니고, 이 무슨 인생의 장난이란 말이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나는 가끔은 옛 시절을 떠올리며 아울러 친구 그대의 생각도 많이 해보았다오. 얼마 전 어린 그 시절이 그리워 옛 정취와 옛 친구들을 더듬어보던 중 친구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인터넷 인물검색 창에 OOO 세 글자를 쳤더니, 아아 반갑게도 OOO란 인물이 뜨는데 너무 오랜 세월 격세지감 탓인지, 처음엔 이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친구인가 확신이 서지 않았다오.


 그래 몇 번을 더 확인해보니 친구의 얼굴이 40~50년의 시간을 유추해 보아도 확실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더 검색해보니 친구의 블로그에 옛 시절 감곡, 매괴성당 사진과 그 시절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여러 차례 뒤져본 다음 친구의 전화번호나 아니면 이멜 주소라도 찾으려 했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오. 인내 끝에 친구의 옛 친구와의 서신교환을 찾아 간신히 이멜주소를 알게 되고, 오늘은 마침내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다오.


 블로그를 보니 친구는 과천에 살고, 지금은 부동산 감정평가사란 사업을 펼치며 열심히 살아 그 분야의 큰 역할을 하는 귀한 자리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소. 나도 실은 친구를 생각하며, 비록 긴 세월을 함께 하지는 못하였지만 어린 시절에도 친구의 모습에서 가볍지 않은 어떤 저력과 진지하고 결연한 생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예견해 보았었소. 그러한 나의 기대가 이렇게 현실로 입증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기쁘고 대견한 일이오.


나는 지난 97년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주한 후 21년째 이곳에 살고 있다오. 그곳을 떠날 땐 사십 중반이었는데 지금은 시니어로 불려지는 네 손주들을 본 할아비가 되었구려.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둘 다 결혼하여 아들은 현재 한국에서 미국계 금융회사 한국지사에 근무하며 그곳에 십년 째 살고 있고, 딸도 한국에 나가 십 년을 살다 그곳에서 짝을 만나 결혼하고 약 한달 전쯤 사위와 함께 네 식구가 이곳으로 막돌아 왔다오.


둘 다 이곳에서 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다, 아들은 유학생 며느리를 맞아 그곳으로 갔고, 딸도 한국생활을 하고 싶어해 그곳에서 십년을 살다 이제야 회귀하게 되었소.


나는 한국에서 어쩌면 내 인생 사업적인 면에서는 가장 정점인 사십 중반에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오. 이곳의 삶은 고국에서와 같이 왕성한 사업과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지는 못하나 그저, 조용히 자유롭게(?) 내 삶을 영위해 나가는 소박한 삶을 누리는 그러한 생활이라오. 지금 거주하는 곳은(Toronto G.T.A) Richmond Hill이라는 곳이고…


나도 이곳에 오기 전 과천 4단지에서 6~7년을 살다 일산 신도시에 새 아파트를 분양 받아 5년을 살고 그 다음 이곳으로 오게 되었소. 과천은 나도 좋아하고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깃든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기도 하다오.


 거의 반세기만에 이렇게 그대 앞에 나오니 무슨 말을 더해야 할지 수월하지가 않구려, 오늘은 예서 줄이고 우리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오. 이곳 우리 집엔 한국 070 전화가 있어 통화가 부담이 없으니 가능하면 내가 보내는 이 번호(000-0000-0000)로 전화를 주어도 좋을 것 같다오. 친구의 전화번호를 보내주면 나도 전화로 통화할 수 있을 것이오.


 두서없이 횡설수설한 것을 양해해주기 바라며, 친구와 가족 모두의 평강과 행복을 기원하면서 난필을 줄이오. -유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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