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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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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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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9
유명 음악가 시리즈(VIII)-'내 이름은 바흐' (My Name Is Bach)(1)

 


왕과 거장 음악가의 만남, '음악적 헌정'을 통해 교감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 게오르크 헨델(1685~1759)과 함께 이른바 '바로크 삼총사'로 일컬어지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서양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 J.S. 바흐를 소재로 한 영화가 여러 편 있지만 여기서는 스위스 취리히 출신 여감독 도미니크 드 리바츠(Dominique de Rivaz, 66)의 "내 이름은 바흐(Mein Name ist Bach)"를 소개할까 한다. 


 이 영화는 픽션이지만 역사적인 사실에 그 근거를 두고 제작된 수작이다. 2003년 스위스•독일•프랑스 합작 영화. 출연 바딤 글로브나, 위르겐 포겔, 카롤리네 헤르푸르트, 아나톨 토브만, 파울 헤르비크, 안체 베스테르만 등. 러닝타임 97분.

 

 

 


 배경은 1747년 5월 라이프치히. 어느 안과 병원에서 이대로 두면 몇 달 후에 시력을 상실할 수 있다며 백내장 수술을 권고 받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딤 글로브나). 그는 새 안경을 썼지만 초점이 잘 잡히지 않고 뿌옇게 보이는 눈 때문에 비가 쏟아지는 골목길에서 절규한다. [註: 바흐는 1749년 5월에 뇌일혈로 졸도하여 시력이 더 크게 나빠져, 1750년 3월 존 테일러(John Taylor, 1703~1772)라는 영국인 돌팔이 안과 의사에게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무균, 소독의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바흐는 왼 눈 수술 1주 후 다시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백내장이 다시 나타났다는 이유였다. 낙후된 수술방법과 합병증으로 2차 수술 후 바흐는 안타깝게도 완전히 실명했고 심각한 눈 통증과 고열에 시달리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4개월 후인 7월28일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 존 테일러라는 작자는 1758년 8월 엉터리 수술로 게오르크 헨델도 실명시킨 아주 몹쓸 인간이었다.]

 

 

 


 그리고 타이틀이 뜨고 오픈 크레디트에 두 장면이 겹친다. 하나는 'FR'이라고 쓰인 부항단지를 사용하여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국왕(위르겐 포겔)이 포츠담 궁에서 마사지를 받고 있는 장면이다. 여기서 FR은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1712~1786)을 일컫는 'Friedrich Regium'의 약자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장면은 휘장을 친 마사지 팔러 옆에 거대한 개 조각상이 있고 그 주변에 개들이 먹이를 먹고 있는 광경이다. [註: 프리드리히 대왕은 개인적인 인간관계는 극도의 불신 때문에 폐쇄적이었지만,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애견들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개의 충성심을 극찬했다.]


 다른 하나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가는 J.S. 바흐와 그의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아나톨 토브만)의 모습이다. 


 프로이센 령의 세관원(데틀레브 벅)이 바흐 일행이 탄 마차를 정지시키고 꼬치꼬치 캐묻는다. 이 문답을 통해 우리는 여행의 목적과 가족관계를 알게 된다. 일행은 바흐의 차남인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의 첫아들의 세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라이프치히에서 포츠담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에마누엘은 프리드리히 왕세자의 하프시코드 주자로 있다가 그가 프리드리히 2세 국왕으로 등극하자 궁정작곡가가 되었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ilhelm Friedemann Bach, 1710~1784)는 당시 할레(Halle)의 리브프라우엔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재직 중이었다. 


 세관원이 아기의 이름을 묻지만 바흐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아서 이름이 없다고 하자 프리데만이 즉석에서 '아담'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작 에마누엘과 그의 부인 요한나 마리아의 의사에 관계없이 아담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이때 흥미롭다는 듯 마차에 실려있는 바흐의 하프시코드(쳄발로)에 손을 댔다가 바흐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고 혼줄이 나는 세관원.


 한편 에마누엘 바흐(파울 헤르비크)가 마사지를 받고있는 프리드리히 국왕에게 그가 작곡한 새로운 곡 '트리오 다듀(Trio d'Adieu)' 악보를 갖고 온다. 새로 짓고 있는 상수시 궁(Sanssouci Palace)으로의 이전을 축하하고, 현재의 포츠담 궁에 이별을 고하기 위해 작곡했다고 동기를 밝히는데, 왕은 돈은 받았냐고 물으며 자기는 작곡하라고 명한 적이 없다고 차갑게 반응한다.


 그러나 에마누엘은 아내가 첫아들을 낳았는데 세례식 등 가계 부담이 크다며 연봉 인상을 요구하지만, 왕은 현 연봉 300탈러(약 2천만원)는 충분하다며 더 이상의 인상은 안 된다고 못박는다. 사실 왕은 이때 다섯 음으로 된 멜로디를 읊조리며 에마누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데 눈치 없이 때를 잘못 택한 것 같다. 


 아직도 물러가지 않고 서 있는 그를 보고 왕은 J.S. 바흐가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이라며 오늘 저녁에 궁정악사 없이 연주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알려준다. 갖고 온 악보는 비서관 골츠(길레스 츄디)에게 건네라고 하지만 골츠는 슬쩍 구석에 내버린다. 그리고 왕은 재미있다는 듯 또 그 멜로디를 읊조리는데…. 

 

 

 

 


 장면은 바뀌어 아말리에 공주(카롤리네 헤르푸르트)가 하프시코드를 연주하고 있는데, 음악지도교수 크반츠(필리프 뷔유미에)의 플루트 연주가 곁들여지지만 템포가 맞지 않다. 그녀는 이런 따위의 음악을 지겨워 했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註: 요한 요아힘 크반츠(Johann Joachim Quantz, 1697~1773)는 플루트 제작자 및 연주가 겸 작곡가였다. 1728년 작센 선거후이자 폴란드 왕이었던 아우구스트 2세를 따라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당시 왕세자였던 프리드리히 2세를 만나 그의 플루트 선생이 되어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을 오가며 가르쳤다. 1740년 프리드리히 2세가 프로이센의 국왕으로 등극하자 그의 궁에서 평생을 머물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는 플루트 디자인에 혁신적인 기여를 했으며 18세기의 플루트 기교와 연주법에 관한 논문 '플루트 연주의 예술(On Playing the Flute•1752)'은 연주법 습득을 위한 입문서인 동시에 응용미학 개론서로 매우 가치있는 사료로 남아있다.] 


 이때 프리드리히 2세가 들어오면서 아말리에 공주에게 연주를 멈추도록 명령하지만, 계속 하프시코드를 치면서 "왕이랍시고 음악은 그만 두고 이제 춤을 추라고 명령한다."며 큰소리로 대들자 그가 악기의 뚜껑을 확 닫아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손가락을 다친다. 


 안나 아말리에 공주(Princess Anna Amalie, 1723~1787)는 프리드리히 2세의 막내 여동생으로 자유분방한 막내기질이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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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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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6
유명 음악가 시리즈(VII)-'비발디’ (Antonio Vivaldi, a Prince of Venice)' (4)

 

 
비발디는 과연 성자인가, 죄인인가? 

 

 

(지난 호에 이어)
 베네치아 집으로 돌아온 비발디와 안나 지로에게 여동생이 베네치아에서 손꼽히는 극작가인 카를로 골도니(Carlo Goldoni, 1707~1793)가 찾아왔었다고 알린다. 


 다음날 비발디와 안나 지로는 오페라 "그리젤다(Griselda)"를 통해 골도니(크리스티앙 바딤)의 능력을 검증한다. 골도니는 비발디에게 귓속말로 그녀의 노래가 좀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평하는데, 이를 들은 비발디는 무례하다며 내쫓으려 하지만 벌써 대본을 척 써서 건네는 그에게 금세 반해 그를 고용한다. 

 

 

 

 


 오페라 '그리젤다'는 지오반니 보카치오(1313~1375)가 쓴 '데카메론' 중 '열흘째 날 이야기(인내심 많은 그리젤다)'에 기초하여 골도니가 각색한 것으로 1735년 5월18일 산 사무엘레 극장(일명 그리마니 극장)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다. 


 같은 해 "아리스티데(Aristide)"를 같은 극장에서 상연했고, 1737년 5월26일 베로나에서 "우티카의 카토네(Catone in Utica)"를 올려 성공을 이어갔다. '우티카…'는 같은 해 암스테르담 국립극장 100주년 기념 공연작으로도 올려졌다. 


 당시 극작가 카를로 골도니는 "비발디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사제로서는 0점이다."고 평했다. 비발디는 다음과 같은 평으로 골도니에 응수했다. "골도니는 험담가로서는 만점, 극작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법률가로서는 0점이다."


 비발디는 94개의 오페라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작곡으로 확인된 것은 50개 미만이고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현존하는 곡은 단지 20여 곡에 불과하다. 더욱이 제목은 달라도 그가 작곡한 곡들은 "짬뽕음악(pasticci)"이 많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는 작품을 수백 개 쓴 게 아니라 한 곡을 수백 번 베껴 쓴 사람이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비발디는 500개 이상의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450곡은 피에타 양육원에 재직하는 동안 써진 것이다. 또 신포니아 및 73개의 소나타를 비롯하여 칸타타, 교회 성악곡을 작곡했다. 허약한 체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힘으로 창작활동을 해나간 결과이리라. 


 하지만 피에타 측은 곡당 금화 1냥(sequin)만 쳐서 보상했다는데, 당시 인쇄공이 금화 4냥을 받은 것에 비하면 형편없는 대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1736년 크게 의지했던 아버지 바티스타 비발디가 세상을 뜬다. 


 1738년 베네치아 주교의 보조신부로 안나 지로를 처음 비발디에게 소개했던 안젤로가 대운하에 있는 유명한 포목상의 딸인 안토니아 그리소니(프란체스카 데 케치)와 피에타 양육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때 성직자로서의 도덕성 문제 때문에 페라라의 주교에 의해 '파르나체'의 페라라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주교 집무관을 통해 접하게 되어 희비가 교차한다. 


 그동안 온갖 추문에 시달리던 안나 지로는 모든 게 자기 탓이라며 드디어 비발디를 떠나 오스트리아 그라츠 가극단으로 간다. 


 1740년 3월21일, 비발디는 피에타 양육원에서 마지막 연주를 한다. 이 곡이 "조화의 영감, 작품3,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8번 A단조, RV 522". 


 그리고 5월11일 괜한 소문 내지 않기 위해 파올리나의 집에서 자고 안나 지로를 만나기 위해 오스트리아 그라츠로 홀로 떠난다. 그녀가 떠난지 2년 만이다. 

 

 

 

 


 비발디를 흠모하던 파올리나는 그를 원하지만 성직자로서의 의무감에서 그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는 비발디. 한편 병상에 있던 베네치아 주교는 비발디가 사라지자 신이 나서 "트럼펫 협주곡"을 미친 듯 불어대는데, 미셸 세로의 넌센스 한 연기 및 상황 설정이 잘못된 장면이다.


 드디어 그라츠에서 안나 지로를 만난 비발디는 비엔나의 과부 마담 발러(카티아 첸코)의 하숙집에 머물며 카를 6세 황제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시 가극단을 맡기겠다던 약속의 실행 대신 황제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註: 1740년 10월20일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1685~1740)는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자,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가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다.]

 

 

 

 


 그동안 오페라 공연 및 바이올린 연주 등으로 벌었던 재정도 바닥나고, 말년에 세인의 관심이 차갑게 식은 상태에서 비발디는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1741년 7월28일 63세로 쓸쓸하게 객사하였다. 비엔나 슈테판 대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註: 한참 후배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도 같은 성당에서 결혼식과 장례식을 치렀고, 빈민묘지에 묻혀 행방이 묘연한 점도 비발디를 닮았다.]


 이때 앙드레 캉프라(1660~1744) 작곡의 "진혼미사곡(Messe de Requiem)"이 소년합창단의 노래로 나오는데, 9살의 요제프 하이든이 클로스업 된다. 그러나 당시 장례식에서 음악프로그램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는 억지로 짜맞춘 얘기라고 보는 것이 옳다. 다만 장례비가 당시 극빈자치고는 상당히 비싼 19굴덴 45크로이처(약 140만원)이었다고 한다. 

 

 

 

 


 그가 묻힌 성 카를 교회 인근의 빈민묘지(Armensunder-Gottesacker)는 178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1741~1790)의 칙령으로 폐쇄되었는데, 연고자의 신고나 이장이 없는 상태에서 그 위에 1815~1818년에 비엔나 기술대학이 들어섰다. 1978년 비발디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조그만 명판이 하나 붙었다. 또 그가 머물던 집은 오성급 자허 호텔(Hotel Sacher)이 들어서, 인걸은 간데 없고 인생무상을 말해주고 있다. 


 안나 지로는 베네치아로 돌아가 성공적인 활동을 펼치다가 홀아비인 자나르디 란디 백작과 결혼한 후 은퇴하여 여생을 보냈다는데 1748년 이후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는 모른다. 


 여자는 무드에 약하고 남자는 누드에 약하다지만 두 사람의 우정과 예술적 협력 이상의 관계를 증명할 자료는 없고 영화 속에서도 비발디는 이를 단호하게 부인하는데… 베네치아의 왕자 비발디는 과연 성자인가, 죄인인가?…


 비발디의 이름은 그 후 아주 잊혀져 있었으나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 이르러 1927년 토리노의 도서관에서 일하던 이탈리아 음악학자들이 비발디의 주요 필사본 모음집을 발견하여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의 음악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건반협주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등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전모가 밝혀지면서 1950년에 이르러서야 비발디의 첫 음반이 나오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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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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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4
유명 음악가 시리즈 (VII)-‘비발디’(Antonio Vivaldi, a Prince of Venice)'(3)

  
비발디는 과연 성자인가, 죄인인가? 

 



(지난 호에 이어]
 만토바의 시골 풍경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은 '사계'는 음악적 개념의 혁명적 설정이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여러 새들의 지저귐, 개 짖는 소리, 윙윙거리는 모기소리, 양떼의 울음소리 그리고 폭풍우, 고요한 밤, 술 취한 댄서들, 사냥꾼들 파티, 얼어붙은 풍경과 얼음지치기를 하는 아이들, 화톳불 등의 정경을 소네트 시에 담아 음악적 협주곡으로 묘사한 것이다. [註: 소네트(sonnet)는 14행의 짧은 시(詩)로 각 행 10음절로 이루어지며 복잡한 운(韻)으로 짜여 있는 서양 시가(詩歌)의 한 형식. '사계'는 1725년 암스테르담의 출판업자인 미셸 샤를 르 세느(Michel-Charles Le Cene, 1684~1743)에 의해 12개 악장을 각각 3악장씩으로 묶어 4개의 협주곡으로 출판되었다.] 


 비발디는 1722년 로마 새 교황 베네딕트 13세(미셸 갈라브루)의 초청을 받고 그를 위한 공연을 하고, 1725년 다시 베네치아 피에타 음악학교에 복직한 후 4개의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비엔나, 암스테르담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연주회를 가졌다. 


 어느 카니발 가면무도회에 주교의 집무관과 안젤로가 참석하여 통속적이고 야한 공연을 보며 귀족 부인들의 외도를 화두로 삼으면서 재미있다는 듯 히히덕 거리고 있다. 이때 안젤로가 "베네치아 사람들은 반년은 죄짓고 반년은 회개하며 살고있다."고 이들의 종교적 도덕적 이중성을 꼬집는다. 

 

 

 


 이 무렵 베네치아는 세계 제일의 무역 항구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음악의 중심지 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거친 뱃사람들과 할 일 없는 몽상가들이 모여든 베네치아는 성적으로 문란하여 거리와 교회 문 앞에는 버려진 사생아와 고아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비발디가 45세 때인 1723년, 13살의 안나 지로(아네트 슈라이버)가 오디션을 받기 위해 비발디의 집으로 찾아온다. 공개적인 장소를 피해 비밀리에 오페라의 주연을 위한 오디션을 보기 위한 것이었지만, 집에 여자를 끌어들인 비발디에 대한 여동생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된다. [註: 안나 지로(Anna Maddalena Tessieri Giro, 1710~1748?)는 프랑스에서 만토바로 이민 온 이발사, 가발 제조업자의 딸로 1723년에 비발디에게서 성악을 배운 제자였다. 메조 소프라노 가수인 그녀는 1722년 가을에 트레비소에서 데뷔하여 그 다음해에 알비노니의 오페라 "Laodice"를 통해 베니스 무대에 서게 되었다. 그 후 1726년 "Dorilla in Tempe"부터 시작하여 1733년 "Motezuma" 등 비발디의 많은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으면서 비발디의 뮤즈라는 염문을 뿌렸다.] 


 오페라 "파르나체(Il Farnace, RV 711)"는 1727년 베네치아의 산탄젤로 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안나 지로가 폰투스의 왕 파르나체의 왕비 타미리 역으로 출연한다. 

 

 

 

 


 영화 속 아리아는 "Da quel ferro che ha svenato (From that sword which has killed)"로 실제 호르디 사발(Jordi Savall•77)이 제공한 음악이다. 이 오페라는 대단한 성공을 거둬 1730년에 프라하의 스포르크 극장에서 재공연되었다. 


 안나 지로가 존경한 비발디가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그의 집에 그녀의 이복 언니인 파올리나(디아나 페르티크)와 함께 1724년부터 기거하면서 그의 수발을 돕는가 하면, 비발디가 그녀를 자기 오페라에 주역으로 등장시켰고 함께 여행도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당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성직자로서의 도덕성 문제가 되어 1738년 페라라의 주교 루포(Tommaso Ruffo, 1663~1753)에 의해 '페르나체'의 페라라 공연이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비발디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6세 황제의 초대로 비엔나로 간다. 황제는 베네치아를 떠나 비엔나에 정착하면 시 가극단을 맡겨 평생을 보장해주겠다고 제의하는데….


 한편 비발디가 없는 동안 몰려든 채권자들에게 안나 지로와 파올리나는 빚은 갚아야 한다는 상식쯤은 알고 있다며 다만 비발디에 대한 험담을 거두어 줄 것을 당당하게 주문한다. 


 주교의 집무관이 베네치아 주교에게 프랑스 대사가 루이 15세의 쌍둥이 딸 생일을 맞아 비발디에게 콘서트를 부탁했고 주교도 초청했다고 보고한다. 교회와는 무관한 속물적 행사라며 내키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체면 때문에 만찬에 참석하는 주교. 

 

 

 

 


 주교 옆자리에 앉은 프랑스 대사(베르나르 피에르 도나디유)가 루이 15세는 비발디의 맑고 밝은 선율과 싱싱하고 상쾌한 리듬의 곡을 좋아하고 친숙한 나머지 그를 자주 초빙하여 연주회를 열었다며 비발디를 극찬한다. 

 

 

 

 


 하지만 정작 주교는 "교회는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를 얻었지만 주님의 신복을 잃었다"며 자기는 비발디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다며 애써 그를 폄훼하고, 괜한 언쟁 벌이지 말고 딴 얘기를 하자고 에둘러 말한다. 말하자면 그는 '비발디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열정을 채우기 위해서 멀쩡한 성직자를 꾀어내 오페라로 현혹시키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프랑스 대사가 비발디는 부친과 함께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암스테르담 국립극장 100주년 기념 연주회도 갖는다, 또 12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묶어 '라 체트라'를 출간했다는 둥 마치 무성영화의 연사처럼 설명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후에도 이런 장면이 두 번 더 나오는데 상당히 어색해 보인다. 차라리 자막처리를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註: "라 체트라(La Cetra, Op. 9)"는 1727년 출간돼 카를 6세 신성로마 황제에게 헌정되었다.] 

 

 

 

 


 1728년 5월6일 비발디의 헌신적인 어머니 카밀리아가 집에서 사망한다. 성직자인 비발디가 간단한 장례집전을 한 후 곧 아버지와 함께 베로나로 갔다. 그 곳 필라르모니코 새 극장에서 오페라 "La Fida Ninfa"를 1732년 1월6일 초연했다. [註: 비발디가 작곡한 오페라 "라 피다 닌파(The Faithful Nymph, RV 714)" 중 유명한 아리아 'Alma oppressa da sorte crudele (Soul oppressed by cruel fate)'를 안나 지로가 부른다. 대본을 쓴 프란체스코 시피오네 마페이(1675~1755)는 당시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발명한 '피아노포르테'에 관한 기사를 도표와 함께 1711년 베네치아에서 처음 발표하고 1725년 독일어로 번역됨으로써 피아노 발전 및 보급에 기여한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알림)
8월 1일(수) 갤러리아 쏜힐점에서 문화 강의가 있습니다. 강사: 문종명, 손영호(주제: 중국 서안 둘러보기), 천하성, 한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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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3
유명 음악가 시리즈(VII)-'비발디’(Antonio Vivaldi, a Prince of Venice) (2)

 


비발디는 과연 성자인가, 죄인인가? 



 

 

 

 

(지난 호에 이어)
성직자가 된 후에도 비발디는 천주님보다는 바이올린을 더 열심히 섬겼고 오페라 작곡에 전념하였다. 자연히 그는 사이비 사제로 사람들 눈에 비칠 수밖에 없었고, 그의 그러한 행실은 베네치아 주교(미셸 세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주교는 화가 나 당장 그를 불러들였다. 


 주교는 "성직자로서 응당해야 할 미사는 뒷전이고 교황의 사절이라도 된 양 나다니면서 귀족이나 대사들하고 어울리는 것은 유명세나 쫓자는 것"이라며 "바이올린 선생은 인정하지만 오페라 공연은 용납 못한다"고 질타한다. 


 비발디는 "병 때문에 먼 길도 못 가고 오래 서 있질 못하니 미사는 꿈도 못 꾼다"며 "말씀하신 분들을 찾아뵈어 제 작품을 알려야 제 오페라 올리는 데 힘이 됩니다"고 하소연 한다. 


그러나 "병으로 미사를 거행 못하는 건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고 몇 시간씩 서서 오페라 감독할 땐 병이 싹 사라지는 모양이군! 이 배우 저 배우 훨훨 날아다니던데… 집무관 한텐 통할지 몰라도 난 어림없네. 자넬 아끼지만 조심하게. 이 점 명심하게나!" 하고 훈계하는 주교.


 그러나 사실 비발디는 작곡할 때를 제외하고는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점, 또 그가 쓴 악보 첫머리에 "LDBMDA(Laus Deo Beataeque Mariae Deiparae Amen, '축복 받은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여 아멘'이란 뜻)"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곡이 적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그가 결코 사이비 사제는 아니었다고도 하는데…. 

 

 

 

 

 


 집에서 아버지와 베네치아 산탄젤로 극장에서의 오페라 공연을 위한 상세한 준비 사항을 상의한 뒤 비발디는 후원자 중 한 사람인 보르기세 백작부인(다이안 스톨로쟝)을 만나러 간다. 항구도시 베네치아의 거친 입소문을 우려해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이른바 '베네치아 가면'을 쓰고 실내가 아닌 베네치아 다리 위에서 만난다. 

 

 

 

 


 그녀는 선뜻 후원을 약속하는데, 이때 나온 배경음악이 "유디트의 승리(Juditha Triumphans, RV 644)"이다. 이 곡은 비발디가 쓴 4개의 오라토리오 중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있는 작품으로 그 전에 써본 적이 없었던 대규모 기악곡이다. 말하자면 피에타에서 끌어올 수 있는 모든 악기를 사용하여 피에타 소녀들의 독창 5부와 혼성 4부를 접목한 것으로 보인다. [註: 유디트(Judith)는 아름다운 미망인으로 이스라엘을 강탈하려는 아시리아의 장수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그의 목을 칼로 베고 나라를 구한 영웅적 유태 여인이다.] 


 한편 피에타 양육원에서 세칠리아(모드 주레스)라는 학생이 안젤로 신부에게 베로나 공작과 혼약이 돼있다며 베로나로 보내달라고 고해성사를 한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 부모님은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는데 해안경비원이 겁탈하려고 하자 도망쳐 나왔으나 그 경비원이 부모 죽인 죄를 뒤집어씌워 감옥에 처넣고 금화 2만 냥까지 훔쳐갔다고 한다. 


 몇 주 감옥에 있던 중 수녀에게 맡겨졌고 가엾게 여긴 수녀가 피에타 양육원으로 데리고 온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청혼했던 베로나 공작과 결혼하기 위해 베로나로 가려 한다는 설명이다. 


귀족도 아닌 신분에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지만 보조신부 안젤로에게서 이 얘기를 들은 주교의 집무관(필립 드 발레랑)은 이 기회에 제자와 스승 간의 염문을 만들어 비발디를 쫓아낼 구실을 찾도록 그에게 은밀하게 지시하는데…. 


 안젤로는 비발디에게 남의 이목(耳目)이 있으니 밤에 자기 집에서 만나도록 주선하겠다고 말하고, 한편 세칠리아에게는 옷을 다 벗은 채로 침실에 있으라고 요구하는데….


 약속된 9시에 카운셀링을 위해 안젤로의 집으로 찾아간 비발디는 뜻밖에 잠옷을 입고 맞이하는 세칠리아를 보고 기겁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위선 부릴 필요 없다며 베로나로 갈 수만 있다면 이미 몸을 판 거나 다름없으니 어떤 짓이라도 하겠다고 말한다. 

 

 

 

 


 비발디가 불쾌감을 나타내자 오히려 연극은 그만 하라고 대담하게 말하는 세칠리아.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비발디는 안젤로를 통해 자기를 시험하여 옥죄려는 짓임을 알아채고 황급히 집을 나선다. 


 다음날 안젤로를 꾸짖으며 한 대 치려고 하다가 참고, 대신 세칠리아에게 사과하라고 타이르는 비발디. 만일 이 일이 잘못 새어나가는 날에는 비발디의 미래와 명예는 매장될 뿐만 아니라 성직자로서 파면될 중대사였다.


 물론 영화 속 픽션이지만, 젊은 여성고아들로 구성된 양육원이었기에 사실 이런 저런 이유로 고아원을 탈출하려는 여성도 많았고, 또 어린 사춘기 학생들의 성적 유혹 때문에 성직자 신분의 비발디를 곤경에 빠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이러한 추문설을 듣는 베네치아 주교는 "비발디 때문에 제 명에 못살겠네."라며 "주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하고 개탄한다. 그러나 이런 염문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서품을 준 사제가 파면 당하면 체면이 구겨지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래도 그의 신앙심을 믿었기 때문이었는진 몰라도 비발디는 끝까지 파면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비발디는 1718~1720년 약 3년 동안 만토바에 있는 헤세 다름슈타트 영주 필립공의 악장을 지냈는데, 이때 마르첼로(Benedetto Marcello, 1686~1739)와 알비노니(Tomaso Giovanni Albinoni, 1671~1751)의 영향을 받아 "티토 만리오(Tito Manlio, RV 738)" 등 여러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이 만토바 기간은 비발디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전성기로 볼 수 있다. 유명한 "사계(Les Quattro Stagioni)", 즉 4계절을 묘사한 "4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8"은 이 때 작곡되었다. 나머지 3개는 독창적이지만, 첫 번째 '봄'은 그가 작곡한 3막 오페라 "주스티노"의 제1막에 나오는 '신포니아(Sinfonia)'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註: 1724년에 작곡된 일명 '아나스타시오(Anastasio)'로 불리는 오페라 "주스티노(Il Giustino), RV 717"는 로마의 카니발 기간 중 카프라니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특히 아리아 "나의 사랑하는 님과 만나리(Vedro con mio diletto)"는 지금도 사랑받는 곡이다. 니콜로 베레간 백작(1627~1713)이 대본을 쓴 '주스티노'는 비발디의 전후로 1683년 조반니 레그렌치(1626~1690), 1737년 헨델(1685~1759)이 작곡한 버전이 더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알림)
8월 1일(수) 갤러리아 쏜힐점에서 문화 강의가 있습니다. 강사: 문종명, 손영호(주제: 중국 서안 둘러보기), 천하성, 한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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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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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8
2018-07-05
유명 음악가 시리즈(VII)-'비발디’ (Antonio Vivaldi, a Prince of Venice)' (1)

 
비발디는 과연 성자인가, 죄인인가? 

 

 

 

 

 유명음악가 시리즈 중 일곱 번째로 '사계(四季, The Four Seasons)'로 유명한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이며 바흐, 헨델과 더불어 '바로크 삼총사'로 불리는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에 관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할까 한다.


 2006년 개봉한 '안토니오 비발디, 베니스의 왕자(Antonio Vivaldi, a Prince of Venice)'이다. 한국에는 '비발디'라는 축약된 제목으로 2009년 1월8일에 개봉. 감독은 프랑스 파리 출신 장 루이 길예르모. 출연 스테파노 디오니시, 미셸 세로, 아네트 슈라이버 등. 러닝타임 95분. 


 아마도 한국 개봉이 늦었던 이유는 흥행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OST는 최고이지만 영화는 대사, 영상, 편집, 연기 어느 하나 예쁜 게 없는 최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리넬리(1994)'로 쌓은 스테파노 디오니시의 명성을 형편없이 무너뜨린 작품이지 싶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서야 비발디에 관한 음반이 나오면서 21세기에 이런 영화도 제작되기에 이르러 그에 관한 편린을 접하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된다.

 

 

 

 

 


 영화의 오프닝 씬, 1708년 9월29일 철창문 안에서 피에타 양육원의 고아소녀들이 합주를 하고, 오직 비발디(스테파노 디오니시)만 철창문 바깥 홀에 앉아있는 귀족들 앞에서 바이올린 협연을 하며 지휘한다. 베네치아로 놀러 온 덴마크의 국왕 프레데리크 4세(바스티엥 이후장)를 위한 콘서트였다. [註: 예술애호가로 이름 높았던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4세(Frederik IV, 1671~1730)에게 비발디는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집 Op. 2"를 헌정했다. 프레데리크 왕은 덴마크의 예술, 건축 등 문화 및 무역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1722년 코펜하겐에 덴마크 최초의 공중 가극장인 리유 그로네게이트 대극장(Lille Gronnegade Theatre)을 설립하였다. 또한 루터교 선교사인 한스 에게데(Hans Egede, 1686~1758)를 후원하여 지금은 덴마크의 자치령인 그린란드(Greenland)와 수도 누크(Nuuk)를 처음 개척했던 인물이다.]


 이때 나오는 음악이 "조화(또는 화성)의 영감(L'Estro Armonico), 작품 3, 바이올린 협주곡 6번 A단조, RV356" 중 '1악장 알레그로'이다. [註: 작품 1과 2가 '바이올린 소나타'였던데 반해 작품 3은 '바이올린 협주곡'의 첫 작품으로 1711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하여, 베네치아를 방문한 플로렌스 투스카니의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대공(1663~1713)에게 헌정되었다. 자신도 훌륭한 음악가였던 페르디난도 대공은 스카를라티(1660~1725), 헨델(1685~1759) 등 음악가들의 후원자로 유명하지만, 특히 하프시코드 제작자인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Cristofori, 1655~1731)를 적극 후원하여 피아노를 발명하게 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첫 장면부터 철창문을 사이에 두고 연주하는 괴이하고 우스꽝스런 모습이 연출되는데, 당시 고아원이라는 특수상황 때문이기도 하고 또 여학생들이어서 '일반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학원의 학생들의 오케스트라는 당시 유럽에서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비발디는 양육원을 방문하는 고위직 귀족들과 친교를 맺을 기회가 많았다. 

 

 

 

 


 비발디는 1678년 3월4일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Giovanni Battista Vivaldi, 1655~1736)와 카밀리아 비발디(Camilia Vivaldi, 1653~1728) 사이에서 칠삭둥이로 태어났다. 살면 얼마나 살까 싶어 세례도 미루다 용케 목숨이 붙어 있기에 2개월 뒤인 5월6일에야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비발디는 4남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산 마르코 성당은 아주 풍부한 전통을 지닌 음악학교였고 동시에 새로운 경향의 음악 탄생지이기도 했다. 비발디는 어린 시절부터 진취적인 아버지에게서 근대적인 교육과 음악의 기초 및 바이올린 지도를 충분히 받았고, 이것이 나중에 그가 바이올린의 대가 및 작곡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비발디는 15세 때인 1693년 9월18일 산 마르코에서 가까운 올레오에 있는 산 지오반니 수도원에 입회하여 25세 때인 1703년 3월23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몸이 섬약했던 그는 집에서 출퇴근하는 배려를 받았는데 그의 유전적인 빨강머리 때문에 '붉은 사제(Il Prete Rosso)'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발디를 스페인의 투우장에 보내면 힘들게 붉은 헝겊을 휘두를 필요없이 머리털만 들이대면 소하고 좋은 대결이 되겠다." "붉은색 머리는 악마의 머리다." 등 온갖 조롱과 멸시의 대명사가 되었다. 


 1703년 9월,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여자 고아원 겸 음악학교인 피에타 양육원(Pio Ospedale della Pieta)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1740년까지 합주장(合奏長)•합창장을 역임하면서 학교 관현악단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 시대에는 기악 연주 등 음악 교육 과정이 여성들에게는 개방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피에타 양육원의 여학생들은 한편으로는 비발디를 통해 수준 높은 음악 교육을 받고, 또 한편으로는 여가 선용, 결혼 가능한 기회를 충족시키거나 수녀원 생활을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만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일반 대중' 앞에서 연주하지 않겠다는 동의가 절대로 필요한 과정이었다. 당시에는 여성이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목회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할 수 없었으므로 자선 음악회나 교회 현악부에서 연주 활동을 하며 기부금을 벌어오는 등의 역할에 한정되었다. 


 장면은 바뀌어 보조신부인 안젤로(스테파니 코디롤리)와 함께 베네치아의 곤돌라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발디. 배경음악은 '사계' 중 겨울. 부모님과 두 누이동생이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덴마크 국왕의 무도회에 초대받았다고 말하자 지극정성으로 비발디를 위하는 어머니(클라라 보라스)와 아버지(장 클로드 르카)는 기뻐하는데, 여동생 마가리타 가브리엘라(1680~1750; 멜리사 메르탕)와 자네타 안나(1687~1762; 델피느 드파르디외)는 오빠에 대한 부모님의 편애 때문에 불만이 많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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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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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9
유명 음악가 시리즈(VI)-'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 (5)

 


'샤넬 No.5'를 탄생시킨 재봉사와 전위적 
'봄의 제전' 작곡가의 불륜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샤넬이 친절하고 관대한 여자였는지는 몰라도 관습, 전통, 타인의 시선 등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샤넬인지라 한집에 사는 스트라빈스키 부인에 대한 죄책감은 전혀 없는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그라스에서 세기의 향수를 만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카테리나는 남편 이고르에게 매일 아침 일어나면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걸 보면 삶은 결코 공평•공정하지 않다는 아이러니를 보는 듯하다. 

 

 

 

 


 스트라빈스키와 샤넬은 서로의 창작에 영감을 주었다고 하는데 다음의 대화를 보면 샤넬은 분명 스트라빈스키의 창작에 영향을 미쳤지만 반대로 이고르가 '샤넬 No.5'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싶다. 


 샤넬은 "난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남자 한 명이 여자 두 명의 가치일까요. 부인이 수정해 주지 않으면 당신은 작곡도 할 수 없어요. 나도 당신만큼이나 힘이 있죠. 게다가 더 성공했고요.… 당신의 정부(情婦)가 되진 않겠어요." 


이에 이고르가 "당신은 예술가가 아니라 가게 주인일 뿐이야."라고 대꾸한다. 결국 천재가 가는 길은 서로 달랐고 둘의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카테리나는 남편을 잘 알고 있다. 특히 그의 음악에 대해선 남편이 스스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하고 멘트를 할 수 있었다는 건 맞다. 한편 코코 샤넬이 그의 음악을 이해했다는 증거는 없다. 한 집안에서 일어나는 삼각관계에서 두 사람의 이기적인 사랑 유희는 아내인 카테리나를 수동적인 위치로 전락하게 만들고, 네 아이에게는 샤넬이 엄마보다 생물학적 우위에 있는 것으로 믿게 만들 뿐이었다. 

 

 

 

 


 드디어 이 참기 어려운 사실 앞에 절망한 카테리나는 아이들과 함께 스스로 저택을 떠난다. 샤넬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그 편지는 그 동안 가족을 지내게 해준 호의에 감사를 표시하고 "다음 주제는 꽤 힘들 거예요. 언급하기 힘들 정도겠죠. 아마 알고 계시겠지만 두 분의 친밀함 때문에 제가 더 병들고 말라가고 있어요. 독립적인 여성으로 강인한 성격 때문에 사모님을 존경하긴 했지만 도덕성까지 흠모하긴 어렵겠어요. 간청 드리건대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아이들에겐 아버지가 필요해요. 아마 사모님보다 우리가 그를 더 필요로 할 거에요."로 끝을 맺는다.


 샤넬이 디아길레프 사무실을 찾는다. '봄의 제전' 재공연 건 때문이었다. 봉투를 하나 건네는 샤넬. [註: 자료에 의하면 샤넬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재공연을 위해 발레 뤼스의 디아길레프에게 익명으로 30만 프랑을 개런티 해줌으로써 1920년 12월에 재공연이 성공리에 이뤄진다. 샤넬이 이런 식으로 '고급 예술가'를 후원한 것은 미샤 세르트와는 달리 빈약한 출신성분을 커버하려 했던 것이라는 비판적인 설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봄의 제전'의 수정된 새로운 발레를 성공적으로 직접 지휘한 스트라빈스키가 로열석에 있는 샤넬에게 감사의 눈인사 목례를 하고 이를 감격으로 화답하는 그녀와 디아길레프, 미샤 세르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예술적 승리와 걸작으로 자리매김하는 끝마무리를 한다. [註: 사실은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직접 지휘한 것은 1926년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공연이 처음이었다. 공교롭게도 스트라빈스키와 샤넬은 1971년 같은 해에 사망했다.]

 

 

 

 


 실제 상당한 시차가 있지만 그의 아내 카테리나가 죽는 장면과 늙은 스트라빈스키가 피아노 멜로디를 치며 옛날 샤넬을 추억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영화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잠깐 사실적으로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자. 1920년 봄은 샤넬의 연인 아서 보이 카펠이 죽은지 몇달도 안 되어 아직 눈물이 마르지도 않았을 때였고, 스트라빈스키보다 한 살 아래인 샤넬이 30대 후반 무렵쯤이다. 스트라빈스키 가족은 1920년 9월 중순경부터 1921년 5월까지 약 8개월을 샤넬의 저택에서 머물고, 파리에서 약 800㎞ 떨어진 앙글레(Anglet)로 이사한다. 


 1921년 2월에 베라 드 보세를 파리에서 만난 스트라빈스키는 어쩌면 그때부터 코코 샤넬에게서 흥미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샤넬도 이 무렵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과 관계를 맺는다. 스트라빈스키는 가족이 보금자리를 튼 이후에도 카테리나가 죽기까지 거의 20년 가까이 앙글레와 파리를 오가며 베라 드 보세와 애정행각을 벌였다. 


 그렇다면 일 년도 안 되는 이고르와 코코의 불륜 관계는 사실일까. 스트라빈스키의 둘째 부인 베라와 이고르의 친구이자 지휘자였던 로버트 크래프트(Robert Craft, 1923~2015)는 이를 강력하게 부인했으며, 이고르 자신도 이에 대해 언급한 일이 결코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샤넬 패션 하우스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입증할 자료가 전혀 없다고 했다. 


 다만 샤넬의 친구이자 자서전 작가인 폴 모랑(Paul Morand, 1888~1976)이 1946년 펴낸 '샤넬의 매력(L'Allure de Chanel)'에서 샤넬이 이고르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한 것이 침소봉대(針小棒大)되어 소문으로 전해졌을 뿐 불륜관계는 허구이다. 


 '샤넬과 스트라빈스키'는 이 영화의 각색을 맡았던 크리스 그린할(Chris Greenhalgh•55)의 2002년 픽션 소설 'Coco and Igor'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샤넬' 측은 제작에 적극 협조하여 회사의 문서보관소 및 코코 샤넬의 아파트(31, rue Cambon, Paris)를 공개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같은 해인 2009년 오드리 토투(2006년 영화 '다 빈치 코드'에서 주인공 소피 느뵈 역) 주연의 프랑스 영화 '코코 샤넬(Coco avant Chanel)' 개봉 직후에 칸 영화제의 종영작으로 상영되었다. 참고로 샤넬 관련 첫 번째 영화는 1981년 헝가리 출신 캐나다 감독 조지 카센더(1933~2016)의 '샤넬(Chanel Solitaire)'이었다. 


 어찌 보면 통속적이기 짝이 없는 예술과 불륜의 경계를 네덜란드 출신 얀 쿠넹 감독은 잡스러운 원색 없이 흑과 백으로만 꾸며진 샤넬의 드레스처럼 건조하고 간결하게 그려냈다. 이 영화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스트라빈스키가 직접 발명해 사용했다는 오선지 그리는 롤러스탬프가 등장하는 것이다. 


 아무튼 스트라빈스키의 애정행각은 첫 부인의 병 때문에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위대한 작곡을 위해서는 영감을 주는 뮤즈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카테리나가 정작 비난해야 했던 인물은 코코 샤넬이 아닌 둘째 부인이 된 베라 드 보세가 아니었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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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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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8
2018-06-23
유명 음악가 시리즈(VI)-'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4)

 


'샤넬 No.5'를 탄생시킨 재봉사와 전위적 
'봄의 제전' 작곡가의 불륜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가족은 9월 둘째 주에 이사 와서 다음해인 1921년 5월까지 머문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건너 이사하는 모습을 잡은 크레인 샷이 훌륭하다. 샤넬은 늘 검정옷을 즐겨 입고, 단순하면서도 극과 극의 대비를 이루는 흑과 백의 디자인을 좋아했기 때문에 새로운 저택의 바깥 창들도 모두 검정색이다. 


 샤넬이 직접 방을 안내하며 두 사내애들은 중국 양식의 방, 두 여자애들은 무어 스타일의 방을 배정한다. 이고르 부부가 거처할 방은 원색이 없는 흑과 백의 기하학적 모자이크 무늬의 벽지와 모노크롬의 직물로 장식되어 있다. 이를테면 인정미와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없고 오직 논리와 이성(理性)만 존재하는 차가운 느낌을 주는 묘한 공간이다. 


 어느 날 건강이 좋지 않다는 카테리나의 방에 문안을 온 샤넬이 "그 분 말로는 사모님이 최고의 비평가시라면서요."하자 "가장 솔직할 따름이죠."라고 겸손히 대답하는 카테리나. 샤넬이 탁자 위의 결혼 사진을 보면서 "어린 시절부터 연인 사이인가요?"고 묻자 카테리나는 "아름다웠죠. 하지만 결혼하고 애가 생기면 모든 게 바뀌게 되죠."라고 대답한다. 결혼해서 애를 낳아보지 않은 펨므 파탈이었던 샤넬이 이 말을 이해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카테리나의 고전적인 화장기 없는 통통한 얼굴과 샤넬의 현대적인 갸름한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다만 샤넬의 허스키 목소리가 실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거북스럽게 들린다.


 방을 나가려던 샤넬이 옷장 문의 단조롭고 차가운 느낌의 흑백 장식에 변화를 주기 위해 걸쳐놓은 색깔있는 러시아 직물을 보고 옷장을 열어본다. 첫눈에 '루바슈카'라는 러시아 전통 의상이 마음에 든다고 하자 선뜻 가지라고 말하는 카테리나. [註: 1922년에 샤넬은 슬라브 전통의상인 러시아 농민들(muzhiks)이 입는 네모진 목 선과 긴 벨트가 달린 블라우스인 루바슈카(rubashka)와 자수를 놓은 머릿수건인 바부슈카(babushka)를 융합한 이브닝 드레스를 디자인하여 선보인다.] 

 

 

 

 


 아침에 가게로 출근한 샤넬이 종업원들의 옷매무시와 향수 뿌리는 것 등을 일일이 점검한다. 종업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지만 당당하게 거절하고 일을 시키는 사업가의 면모를 보이는 샤넬. 어렸을 때부터 고아로 자라 자수성가한 샤넬은 어쩌면 동정심보다는 복수심으로 차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피아노를 치며 작곡에 열중하다가 무료함을 달래려 샤넬의 방에 몰래 들어가보는 이고르. 침대와 의자에 걸린 그녀의 사틴 잠옷을 만져보고 욕실에도 들어가 보며 그녀를 느끼는 듯하다. 


 어느 날 샤넬이 이고르의 조끼 단추를 달아주면서 "작곡은 악보에 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일단 피아노로 먼저 쳐보고 그것을 느낀 후에 작곡한다고 대답한다. 이에 샤넬도 천의 질감을 먼저 느껴야 하기 때문에 "스케치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음악이나 패션이나 예술은 먼저 '느낌'이라며 동질감을 느끼는 두 사람! 

 

 

 

 


 작업할 때도 머리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말끔히 넥타이를 매고 조끼를 입는 빈틈없고 깐깐한 인상의 스트라빈스키는 매혹적이고 당찬 샤넬의 매력에 이끌려 드디어 그녀 앞에서 서둘러 안경과 옷을 벗어 던지고,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작업실에서 치고있던 피아노 소리가 멈추는 순간, 둘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여자의 감성으로 일찌감치 파악한 카테리나는 남편 그리고 샤넬과의 관계도 소원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둘은 천상의 사랑 유희를 하지만, 샤넬 핸드백, 향수 하나 사기도 힘든 대다수의 관객이 공감하고 동정할 인물은, 이 놀이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지상의 가여운 카테리나, 스트라빈스키 부인이다. 

 

 

 

 


 샤넬이 그라스(Grasse)로 출장을 간다. 향수 프로젝트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칸(Cannes)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라스는 18세기 말부터 향수산업이 번창한 도시로 '세계 향수의 수도'로 불린다. 프랑스 자연향(향수 및 음식향료제)의 3분의 2를 생산하여 관광수익보다 많은 연간 6억 유로를 벌어들이며 많은 조향사를 훈련시켜 2천 가지가 넘는 향을 식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샤넬은 거기서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 프랑스인 조향사(調香師•perfumer)인 에르네스트 보(니콜라스 바우데)를 만나 "장미가 아닌 여자가 느껴지는 향을 원한다."며 닦달한다. 보는 향수의 문제점은 대부분의 향이 빨리 날아갈 뿐만 아니라 오래 지속되면 악취로 변하게 된다는 것, 하지만 '샤넬의 정수'는 향이 사라지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가 만든 샘플을 보여준다. [註: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 1881~1961)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향수 '샤넬 No.5'를 창조한 장본인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조향사 훈련을 받은 탁월한 인재로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육군으로 복무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19년 제대하자 프랑스로 이주하여 당시 망명객이었던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의 도움으로 1920년 늦여름 코코 샤넬을 그라스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의 장례식 때 교회 전체를 완전 장미꽃으로 장식한 것은 유명한 얘기다.] 


 샤넬이 여러 샘플을 꼼꼼히 테스트 한 후 5번째 샘플을 선택함으로써 세기의 향수 '샤넬 No.5'가 탄생하게 된다. [註: 처음에 '샤넬 No.5'는 1921년 크리스마스 때 최고의 단골고객에게 줄 선물용으로 100병만 생산했는데 곧 소문이 퍼져 수요가 넘치자 1922년에 샤넬 매장에서 공식적으로 판매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긴 출장에서 돌아온 샤넬은 이고르의 가족을 피해 그와 헛간에서 사랑을 나눈 후, 루드밀라(소피 하손)에게 직접 디자인한 세일러복을 선물하고 카테리나에게는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고급향수 '샤넬 No.5'를 선물한다. 하지만 병약한 그녀에게 그런 향수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오히려 그녀는 샤넬에게 그이의 음악에 간섭하지 말라며 "너무 하시네요. 죄책감 안 드세요?"하고 묻는다. [註: 루드밀라(Ludmila Stravinsky, 1908~1938)는 어머니에게서 옮은 결핵으로 파리에서 1938년 11월 30세로 요절했고, 카테리나는 4개월 뒤인 1939년 3월에 59세로 사망했다. 이때 스트라빈스키도 감염되어 5개월 입원했다. 한편 막내딸 마리아 밀레나는 미국 LA에서 100살까지 살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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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6
유명 음악가 시리즈(VI)-'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3)

 


'샤넬 No.5'를 탄생시킨 재봉사와 전위적 
'봄의 제전' 작곡가의 불륜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그런데 이 사교모임에서 흥미있는 세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미샤 세르트(나타샤 린딩거), 드미트리 대공(라샤 뷔크빅)과 배론 딩클라게(미셸 루울)이다. 영화에는 잠깐 나오지만 실제로 샤넬에게 준 그들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좀 살펴보고 가는 게 좋겠다.

 

 

 


 미샤 세르트(Misia Sert, 1872~1950)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왕립예술학교의 교수이자 조각가인 폴란드 출신 아버지 시프리안 고뎁스키와 벨지움의 유명 첼리스트 아드리앙 프랑수와 세르베의 딸인 어머니 소피아 세르베 사이에서 마리아 고뎁스카(Maria Zofia Olga Godebska)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리아를 낳자마자 사망하여 외갓집이 있는 브뤼셀에서 양육되면서 마리아의 애칭인 '미샤'로 바뀌었다. '세르트'라는 성은 스페인 화가인 호셉 마리아 세르트와 세 번째 결혼하여 얻었다. 


 제자와 재혼한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온 미샤는 모리스 라벨의 스승인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 1845~1924)에게서 일주일에 하루씩 피아노 레슨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포레의 학생들의 피아노 알바로 연명해 가다 21살 때 조카 타데 나탄송(Thadee Natanson, 1868~1951)과 결혼한다. 


 이때부터 파리의 예술가, 문학가, 음악가 등 지식인 서클을 만들어 그들의 뮤즈가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마르셀 프루스트,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그리고 194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앙드레 지드 등 당시 내로라 하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과 교류했다. 


 30년 이상을 '문화적 중재자'로 이름을 떨친 보헤미안 엘리트인 미샤는 상류사회 그룹 살롱을 운영하면서 '천재 수집가'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미샤를 알고 싶으면 먼저 스스로 천재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미샤가 코코 샤넬을 만난 것은 1917년 프랑스 여배우 세실 소렐(Cecile Sorel, 1873~1966)의 집에서였다. 특히 아서 카펠의 사망 이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던 샤넬의 영혼을 위로해준 진정한 친구였다. 한편 샤넬이 미샤에게 끌린 매력은 그녀가 광적인 파괴성을 보이는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위트와 풍자로 모든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때론 소름 끼치도록 만드는 그녀의 천재성에 있었다. 

 

 

 

 


 세르트는 포용력이 있고 관대하여 샤넬과의 우정뿐만 아니라 어려운 친구들을 많이 도왔다. 1911년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초연이 있던 날, 의상제작사로부터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빌린 무대의상의 반환 요청을 갑자기 받았을 때 그녀가 현금 4천 프랑을 선뜻 내줘 위기를 넘겼다.


 또 디아길레프가 1929년 8월 베니스에서 운명하기 직전에 달려가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켜주었으며, 그가 죽자 발레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를 기리기 위해 상 미셸 섬에 안장하는 등 장례비 일체를 부담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파리 점령기 동안, 그녀는 예전처럼 살롱을 운영하면서 나치를 상대로 충성하여 돈을 벌었다 하여 조사를 받았으나 그녀의 소문난 관대한 기질과 성품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비난, 처벌 받지 않고 풀려났다.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Grand Duke Dmitri Pavlovich of Russia, 1891~1942)은 1916년 12월 라스푸틴의 암살사건에 연루되자 도망쳐 페르시아를 거쳐 1918년 영국으로 망명한, 제정러시아 말기 로마노프 왕조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2년 뒤인 1920년에 파리로 옮겨와 샴페인 판매원으로 일했다. 한편 그의 누이동생 마리는 '키트미르(Kitmir)'를 설립하여 슬라브 전통 유리구슬과 수공예자수 사업을 하면서 코코 샤넬과 인연을 맺었다. 

 

 

 

 


 드미트리 대공은 1921년 봄, 몬테 카를로에서부터 샤넬과 약 1년 간 연인관계를 맺었다. 1926년 미국에서 오드리 에머리(Audrey Emery, 1904~1972)와 결혼하여 1937년 이혼할 때까지 슬하에 외아들 파울 일린스키(Paul Romanovsky-Ilyinsky, 1928~2004)를 두었다. 일린스키는 한국전쟁 때 미해병 소속 종군사진사로 참전하였으며, 플로리다 팜 비치 시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였다. 1991년에 러시아 왕정주의자들이 생존하는 로마노프 왕정의 유일한 혈육이므로 '차르(Tsar)' 칭호를 제의하며 러시아 복귀를 제안했으나 거절했다.


 드미트리 대공은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나 만성 결핵 진단을 받고 1939년 9월 2일 스위스 다보스 샤츠알프(Schatzalp) 요양소에 입원하여 2년여 뒤 51세로 사망했다. 일설에는 요독증(uremia)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한편 부인 에머리는 아들 파울이 있는 팜 비치에서 1972년 68세로 세상을 떴다. 


 배론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Baron Hans Gunther von Dincklage, 1896~1974)는 독일 귀족 가문 출신으로 'Freiherr' 즉 'Baron'이란 칭호가 붙었다. 당시 그는 독일 외교관으로 파리에 주재하며 테니스 선수, 플레이보이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2011년 8월, 파리 주재 미국 저널리스트였던 할 본(Hall Vaughan, 1928~2013)이 "적과의 동침: 코코 샤넬의 은밀한 전쟁"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딩클라게는 환지중해에서 첩보 활동을 하여 요제프 괴벨스에게 직접 보고한 나치 선전 장교였으며, 스파이 번호 'F-7124'인 샤넬은 '적과의 동침'을 하며 독일의 첩보활동에 협력했음을 폭로했다. 


 그 하나의 예가 1943년 후반기 무렵 나치 SS고위층에게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별도의 '평화 서곡 협상안'을 만들어 작전코드명 'Modelhut (Model Hat)'로 극비리에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에게 전달하도록 제안했다는 것이다. 


 전후 샤넬은 조사를 받았으나 영국의 왕실을 포함한 상류사회 인맥과도 깊은 교류를 했던 그녀인지라 처칠 수상의 외교적 중재로 풀려났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따위의 일을 귀찮아하고 대수롭잖게 여기는 프랑스인들의 기질 때문에 흐지부지 넘어갔다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1920년 여름 샤넬은 스위스에 있는 이고르 가족이 파리에 기거할 집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그들을 파리 교외에 있는 그녀의 새저택 '벨 레스피로(Bel Respiro)'에서 지내도록 제의한다. 자존심 강한 이고르는 샤넬의 제안을 일단 거절해보지만, 아내와 네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망명객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 알림: 7월 4일(수) 12~16시 갤러리아 문화센터에서 과학 및 인문 강좌가 있습니다. 강사: 문종명, 손영호(주제: 역사 속 서태후), 천하성, 한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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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음악가 시리즈(VI)-'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2)

 


'샤넬 No.5'를 탄생시킨 재봉사와 전위적 
'봄의 제전' 작곡가의 불륜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혹평을 받은 원인을 놓고 디아길레프, 니진스키, 스트라빈스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니진스키는 지나치게 전위적인 음악 때문이었지 안무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강변하는 한편 스트라빈스키는 "춤이 바보 같았고 리듬조차 느끼지 못했다."며 안무를 탓한다. 

 

 

 

 


 이에 디아길레프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신 겁니다. 다만 음악 취향 따윈 없는 관객들이 너무 생소해서 아직 걸작을 이해 못할 뿐이죠."하고 이고르를 위로한다. 이어서 "괴물과 맞서려면 싸우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고 격려하는 디아길레프. [註: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 1890~1950)는 ‘무용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창작품과 고도의 발레 테크닉을 완성시키며 전설적 명성을 떨친 폴란드 출신 러시아 남성무용수였다. 디아길레프는 공공연한 호모였는데 그의 연인이었던 니진스키가 발레리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1913년 이 일을 빌미로 해고했다는데… 아무튼 니진스키는 그 후로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스트라빈스키 가족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스위스에서 망명객이 되어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이어간다. [註: 러시아 제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린 서민들이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빵을 요구하며 일으킨 1917년 2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세운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어 제정 러시아는 종지부를 찍는다. 
 같은 해 10월 좌파 볼셰비키에 의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의 지도하에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난다. 이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한 20세기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이 러시아 혁명에 뒤이어 레닌과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가 주도하던 혁명파 '적군(赤軍, 좌파)'과 서방국가들이 지원하던 반혁명파 '백군(白軍, 우파)'이 싸우던, 이른바 '적백내전'이 일어나, 결국 1922년 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蘇聯)이 탄생했다. 이 격변의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의 존재와 삶과 사랑 이야기를 담은 대서사극이 유명한 '닥터 지바고(1965)'이다.]

 

 

 

 


 1920년 봄 파리. 어느 사교모임에서 디아길레프의 소개로 7년 만에 '재봉사'와 '작곡가'의 만남이 다시 이루어진다. 코코는 연락하라며 이고르에게 명함을 건넨다. 이때 패션 디자이너로 상류사회의 유명인사가 된 가브리엘 '코코' 샤넬(Gabrielle 'Coco' Chanel, 1883~1971)은 그의 연인 아서 '보이' 카펠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져있을 때였다. [註: 샤넬의 연인인 아서 '보이' 카펠(Captain Arthur Edward 'Boy' Capel, 1881~1919)은 영국 출신의 선박사업가, 폴로 선수로, 샤넬의 창업자금을 대주고, 그의 멋있는 캐주얼 스타일은 '샤넬 룩' 창조의 영감을 주었다. 그들의 관계는 그가 죽기까지 9년 간 계속되었는데 카펠이 1918년 결혼한 후에도 지속되었다. 1919년 12월 22일 샤넬과 크리스마스 랑데뷰를 하기 위해 롤스 로이스로 파리에서 칸으로 가던 도중 교통사고로 38세에 사망했다. 운전기사는 중상을 입었으나 살았다.] 


 여기서 주인공인 코코 샤넬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하자.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 중 유일한 패션 디자이너로 뽑혔던 '더블 C'로 대표되는 코코 샤넬. 제1차 세계대전 후 여자들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샤넬 No.5' 시그너처 향수, 핸드백, 보석 등과 어울리는 고급 맞춤 여성복을 디자인하여 그녀는 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 상류사회의 주류명사가 되었다. 


 어머니는 자선병원 세탁부였고, 아버지 알베르 샤넬은 떠돌이 노점상이었는데 1884년 결혼하기 일 년 전에 가브리엘 샤넬이 태어났다. 어머니는 모두 2남3녀를 낳고 결핵으로 32살에 사망하여 12살의 가브리엘은 오바진(Aubazine) 고아원에서 양육되면서 나중에 그녀의 미래가 될 재봉기술을 배웠다. 


 18살이 되면서 더 이상 고아원에 있을 수 없어 물랑(Moulins)에 있는 '라 로톤드(La Rotonde)' 카페에서 노래를 불러 팁으로 연명했다. '코코'라는 별명은 이때 붙여졌다. 그녀가 즐겨 부른 노래의 가사에서 따왔다는 설과 프랑스어 '코코트(cocotte)'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당시 카페의 주고객은 군인들이었는데 젊은 매력이 넘치는 샤넬을 보고 '품고 싶은 여자'라는 뜻의 '코코트'로 부른 것이 '코코'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카페에서 전직 기병대 장교 출신이며 직물제조업체 '발상'의 상속자로 거부인 에티엔 발상(Etienne Balsan, 1878~1953)을 만나 그녀의 인생이 180도 바뀌는 행운을 얻는 코코 샤넬. 그녀의 나이 23살 때인 1906년이었다. 


 그의 정부(情婦)가 되어 콩피에뉴(Compiegne)에 있는 로얄유 성(Chateau de Royallieu,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음)에서 동거하는 3년 동안 승마, 사냥, 폴로 경기 등 스포츠를 배우고, 사교계의 문화를 접하게 된다. 발상을 통해 상류사회의 미학과 취향 등을 이해하게 되어 인맥을 만들면서 패션 디자이너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방종의 삶을 배우면서 그녀는 평생 마약을 달고 다녔으며 항상 최상품을 사용했다고 한다. 

 

 

 

 


 1909년에 샤넬이 파리에 정착했을 때 그의 아파트를 빌려주었고, 1913년 부티크 가게를 도빌(Deauville)에 열었을 때도 도와주었다. 그리고 발상의 친구인 아서 '보이' 카펠을 그녀에게 소개해 주어 그때부터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다. 샤넬은 나중에 "두 신사는 나의 뜨거운 육체에 비싼 값을 매겼다."고 술회했다.


 2010년 영국의 자서전 작가인 저스틴 피카디(Justine Picardie•57)가 쓴 'Coco Chanel: The Legend and the Life (Harper Collins)'에 의하면, 자살한 언니 줄리아 베르트(Julia Berthe Chanel, 1882~1910)의 외아들로 샤넬이 양자로 삼았다던 앙드레 팔라스(Andre Palasse)는 샤넬과 발상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밝혀졌다. 


 코코 샤넬은 1971년 1월 10일 일요일, 30년 이상 살았던 파리의 리츠 호텔(Hotel Ritz)에서 87세로 사망했고, 스위스 로잔에 있는 부와 드 보(Bois de Vaux) 묘지에 안장됐다. 그녀의 대부분의 유산은 스위스에 있던 조카(아들) 앙드레 팔라스와 파리에 살고 있던 그의 두 딸에게 돌아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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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음악가 시리즈(VI)-'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 (1)

 


'샤넬 No.5'를 탄생시킨 재봉사와 전위적 
'봄의 제전' 작곡가의 불륜의 사랑을 그린 작품


 

 

 

 

 2015년도 영화 '유스(Youth)'의 마지막에 지휘자인 주인공 프레드 벨린저(마이클 케인)가 꽃다발을 들고 베니스의 상 미셸 섬에 있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의 무덤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그 옆에 이고르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베라 스트라빈스키의 무덤도 같이 등장한다. 

 

 

 

 


 베라 드 보세 스트라빈스키(Vera de Bosset Stravinsky, 1889~1982)는 러시아 태생의 무용수였는데, 그녀의 첫 남편은 화가이며 무대 디자이너인 세르게이 수데이킨(Sergey Sudeikin, 1882~1946)으로, '발레 뤼스'와 관련하여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의 무대 디자인을 간접적으로 도운 인물이기도 하다. 


 스트라빈스키는 1921년 2월 파리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후 가족이 있는 프랑스 앙글레와 파리를 오가며 이중 관계를 유지하다가 1939년 3월에 첫 부인인 카테리나 노센코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9월에 하버드대 찰스 엘리엇 노튼 강의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 다음 해인 1940년 초에 베라가 미국으로 건너오자 매사추세츠 주 베드포드에서 정식 결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민 온 예술가•지식인들이 몰려 사는 LA 베벌리 힐즈로 옮겨 살다가 1945년 미국 시민권을 얻는다. 


 스트라빈스키는 1962년 러시아의 연주 초청으로 45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고, 1969년 LA에서 뉴욕으로 돌아와 2년 뒤인 1971년 심장마비로 88세로 사망한다. 베라는 93세로 죽자 전 남편이 아닌 스트라빈스키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그런데 2009년 와일드 번치사 배급으로 '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가 뜬금없이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온 순간, 세상은 매혹의 향기와 영원한 멜로디를 얻었다!"는 카피를 달고 개봉되었다. 


 감독 얀 쿠넹. 출연 아나 무글라리스, 매즈 미켈슨, 엘레나 모로조바, 나타샤 린딩거 등. 음악감독은 '잉글리쉬 페이션트(1996)'로 아카데미 및 그래미 상을 수상하고 '콜드 마운틴(2003)'으로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올랐던 가브리엘 야레. 러닝타임 118분.

 

 

 

 


 영화의 시작은 1913년 파리. 아파트 방에서 코코 샤넬(아나 무글라리스)이 몸에 꽉 낀 코르셋을 벗지 못해 가위로 단추를 잘라내며 쩔쩔맨다. 아서 '보이' 카펠(아나톨 토브만)이 거들어 겨우 벗겨낸다. 


 처음부터 샤넬이 당시 거추장스런 코르셋으로부터 여성들을 해방시킨 패션 디자이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내지는 공적을 부각시키는 듯하다. 

 

 

 

 


 장면은 바뀌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이 초연되는 샹젤리제 극장. 만석이라 극장입구엔 입장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로 붐비는데, 샤넬이 도착하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이자 후원자인 미샤 세르트(나타샤 린딩거)가 안내하여 데리고 들어간다. 


 대기실에서 배가 부른 카테리나(엘레나 모로조바)가 초조해 하는 남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매즈 미켈슨)를 격려한다. [註: '봄의 제전' 초연은 1913년 5월 29일 파리에서였다. 1906년 초에 결혼한 외사촌이자 첫 부인인 카테리나 노센코(Katerina Nossenko, 1880~1939)는 이때 2남1녀를 기르며, 뱃속의 아기가 딸 마리아 밀레나(Maria Milena Stravinsky, 1914~2013)로 다음해 스위스 로잔에서 낳았다. 그러나 밀레나 출산 후 결핵 진단을 받았다.]


 공연 지휘자 피에르 몽퇴(제롬 필레망)는 “멜로디는 잊고 리듬을 타. 차이코프스키, 바그너, 슈트라우스는 잊어. 전에 들은 음악은 다 지워버려. 무슨 일이 있던 날 따라와.”라며 악단을 독려한다. 

 

 

 

 


한편 안무를 담당하는 바슬라프 니진스키(마렉 코사코프스키)는 막이 올라갈 무렵인데도 생동감이 더 필요하다며 무용수들을 달달 볶는데 사뭇 긴장감이 돈다. '발레 뤼스'의 총감독 디아길레프(그리고리 마누코프)는 초조해 하며 무대 뒤에 찾아온 이고르에게 극장이 만석이라며 안심시키는데…. [註: 발레 뤼스(Ballets Russes)는 1909년 예술기획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 1872~1929)가 러시아의 무용가, 예술가를 모아 창단하여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러시아 발레단'을 뜻한다. 같은 해 5월 19일 밤 파리, 나이 어린 무용수들인 안나 파블로바, 바슬라프 니진스키, 타마라 카르사비나, 베라 카랄리 등으로 구성된 첫 공연에서 고전주의의 전통적인 틀을 깨고 무용을 중심으로 문학, 음악, 미술, 패션,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가 총체성을 띠는 종합예술적 성향의 현대 발레의 새로운 장을 열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디아길레프는 림스키 코르사코프 등 러시아 작곡가 중 특히 스트라빈스키와 긴밀히 협력하여 그의 발레곡 중 '불새(The Firebird)'를 1910년에, 그 다음해에 '페트루슈카(Petrushka)'를 발표하여 성공을 거둔데 이어 1913년에 '봄의 제전'을 공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연 시작 얼마 후 광폭한 전위적 불협화음과 기이한 춤사위에 놀란 '점잖은' 관객들은 "터무니 없다. 음악에 대한 모독이다" "러시아로 돌아가라"는 등 야유를 보내며 객석은 난장판이 된다. 급기야 경찰까지 출동한다. 예술계 최대의 스캔들 내지 혁명이 일어난 순간이다. 아니 신화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은 스트라빈스키와 그의 파격적인 음악에 깊은 인상을 받고 흥미를 가지는데…. 패션 천재는 음악 천재를 알아본 것일까. 

 

 

 

 


 초반 20분 간 재연된 '봄의 제전' 초연 장면은 타임머신을 타고 100여 년 전의 현장에 있는 듯한 돋보이는 연출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상적인 장면은 지휘자 피에르 몽퇴(Pierre Benjamin Monteux, 1875~1964)가 그런 소요 따위에 아랑곳 않고 무신경한 악어처럼 오케스트라를 끝까지 침착하게 지휘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일어났던 전설적인 얘기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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