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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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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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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유명 음악가 시리즈(VI)-'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4)

 


'샤넬 No.5'를 탄생시킨 재봉사와 전위적 
'봄의 제전' 작곡가의 불륜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가족은 9월 둘째 주에 이사 와서 다음해인 1921년 5월까지 머문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건너 이사하는 모습을 잡은 크레인 샷이 훌륭하다. 샤넬은 늘 검정옷을 즐겨 입고, 단순하면서도 극과 극의 대비를 이루는 흑과 백의 디자인을 좋아했기 때문에 새로운 저택의 바깥 창들도 모두 검정색이다. 


 샤넬이 직접 방을 안내하며 두 사내애들은 중국 양식의 방, 두 여자애들은 무어 스타일의 방을 배정한다. 이고르 부부가 거처할 방은 원색이 없는 흑과 백의 기하학적 모자이크 무늬의 벽지와 모노크롬의 직물로 장식되어 있다. 이를테면 인정미와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없고 오직 논리와 이성(理性)만 존재하는 차가운 느낌을 주는 묘한 공간이다. 


 어느 날 건강이 좋지 않다는 카테리나의 방에 문안을 온 샤넬이 "그 분 말로는 사모님이 최고의 비평가시라면서요."하자 "가장 솔직할 따름이죠."라고 겸손히 대답하는 카테리나. 샤넬이 탁자 위의 결혼 사진을 보면서 "어린 시절부터 연인 사이인가요?"고 묻자 카테리나는 "아름다웠죠. 하지만 결혼하고 애가 생기면 모든 게 바뀌게 되죠."라고 대답한다. 결혼해서 애를 낳아보지 않은 펨므 파탈이었던 샤넬이 이 말을 이해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카테리나의 고전적인 화장기 없는 통통한 얼굴과 샤넬의 현대적인 갸름한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다만 샤넬의 허스키 목소리가 실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거북스럽게 들린다.


 방을 나가려던 샤넬이 옷장 문의 단조롭고 차가운 느낌의 흑백 장식에 변화를 주기 위해 걸쳐놓은 색깔있는 러시아 직물을 보고 옷장을 열어본다. 첫눈에 '루바슈카'라는 러시아 전통 의상이 마음에 든다고 하자 선뜻 가지라고 말하는 카테리나. [註: 1922년에 샤넬은 슬라브 전통의상인 러시아 농민들(muzhiks)이 입는 네모진 목 선과 긴 벨트가 달린 블라우스인 루바슈카(rubashka)와 자수를 놓은 머릿수건인 바부슈카(babushka)를 융합한 이브닝 드레스를 디자인하여 선보인다.] 

 

 

 

 


 아침에 가게로 출근한 샤넬이 종업원들의 옷매무시와 향수 뿌리는 것 등을 일일이 점검한다. 종업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지만 당당하게 거절하고 일을 시키는 사업가의 면모를 보이는 샤넬. 어렸을 때부터 고아로 자라 자수성가한 샤넬은 어쩌면 동정심보다는 복수심으로 차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피아노를 치며 작곡에 열중하다가 무료함을 달래려 샤넬의 방에 몰래 들어가보는 이고르. 침대와 의자에 걸린 그녀의 사틴 잠옷을 만져보고 욕실에도 들어가 보며 그녀를 느끼는 듯하다. 


 어느 날 샤넬이 이고르의 조끼 단추를 달아주면서 "작곡은 악보에 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일단 피아노로 먼저 쳐보고 그것을 느낀 후에 작곡한다고 대답한다. 이에 샤넬도 천의 질감을 먼저 느껴야 하기 때문에 "스케치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음악이나 패션이나 예술은 먼저 '느낌'이라며 동질감을 느끼는 두 사람! 

 

 

 

 


 작업할 때도 머리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말끔히 넥타이를 매고 조끼를 입는 빈틈없고 깐깐한 인상의 스트라빈스키는 매혹적이고 당찬 샤넬의 매력에 이끌려 드디어 그녀 앞에서 서둘러 안경과 옷을 벗어 던지고,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작업실에서 치고있던 피아노 소리가 멈추는 순간, 둘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여자의 감성으로 일찌감치 파악한 카테리나는 남편 그리고 샤넬과의 관계도 소원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둘은 천상의 사랑 유희를 하지만, 샤넬 핸드백, 향수 하나 사기도 힘든 대다수의 관객이 공감하고 동정할 인물은, 이 놀이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지상의 가여운 카테리나, 스트라빈스키 부인이다. 

 

 

 

 


 샤넬이 그라스(Grasse)로 출장을 간다. 향수 프로젝트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칸(Cannes)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라스는 18세기 말부터 향수산업이 번창한 도시로 '세계 향수의 수도'로 불린다. 프랑스 자연향(향수 및 음식향료제)의 3분의 2를 생산하여 관광수익보다 많은 연간 6억 유로를 벌어들이며 많은 조향사를 훈련시켜 2천 가지가 넘는 향을 식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샤넬은 거기서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 프랑스인 조향사(調香師•perfumer)인 에르네스트 보(니콜라스 바우데)를 만나 "장미가 아닌 여자가 느껴지는 향을 원한다."며 닦달한다. 보는 향수의 문제점은 대부분의 향이 빨리 날아갈 뿐만 아니라 오래 지속되면 악취로 변하게 된다는 것, 하지만 '샤넬의 정수'는 향이 사라지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가 만든 샘플을 보여준다. [註: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 1881~1961)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향수 '샤넬 No.5'를 창조한 장본인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조향사 훈련을 받은 탁월한 인재로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육군으로 복무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19년 제대하자 프랑스로 이주하여 당시 망명객이었던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의 도움으로 1920년 늦여름 코코 샤넬을 그라스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의 장례식 때 교회 전체를 완전 장미꽃으로 장식한 것은 유명한 얘기다.] 


 샤넬이 여러 샘플을 꼼꼼히 테스트 한 후 5번째 샘플을 선택함으로써 세기의 향수 '샤넬 No.5'가 탄생하게 된다. [註: 처음에 '샤넬 No.5'는 1921년 크리스마스 때 최고의 단골고객에게 줄 선물용으로 100병만 생산했는데 곧 소문이 퍼져 수요가 넘치자 1922년에 샤넬 매장에서 공식적으로 판매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긴 출장에서 돌아온 샤넬은 이고르의 가족을 피해 그와 헛간에서 사랑을 나눈 후, 루드밀라(소피 하손)에게 직접 디자인한 세일러복을 선물하고 카테리나에게는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고급향수 '샤넬 No.5'를 선물한다. 하지만 병약한 그녀에게 그런 향수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오히려 그녀는 샤넬에게 그이의 음악에 간섭하지 말라며 "너무 하시네요. 죄책감 안 드세요?"하고 묻는다. [註: 루드밀라(Ludmila Stravinsky, 1908~1938)는 어머니에게서 옮은 결핵으로 파리에서 1938년 11월 30세로 요절했고, 카테리나는 4개월 뒤인 1939년 3월에 59세로 사망했다. 이때 스트라빈스키도 감염되어 5개월 입원했다. 한편 막내딸 마리아 밀레나는 미국 LA에서 100살까지 살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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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6
유명 음악가 시리즈(VI)-'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3)

 


'샤넬 No.5'를 탄생시킨 재봉사와 전위적 
'봄의 제전' 작곡가의 불륜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그런데 이 사교모임에서 흥미있는 세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미샤 세르트(나타샤 린딩거), 드미트리 대공(라샤 뷔크빅)과 배론 딩클라게(미셸 루울)이다. 영화에는 잠깐 나오지만 실제로 샤넬에게 준 그들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좀 살펴보고 가는 게 좋겠다.

 

 

 


 미샤 세르트(Misia Sert, 1872~1950)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왕립예술학교의 교수이자 조각가인 폴란드 출신 아버지 시프리안 고뎁스키와 벨지움의 유명 첼리스트 아드리앙 프랑수와 세르베의 딸인 어머니 소피아 세르베 사이에서 마리아 고뎁스카(Maria Zofia Olga Godebska)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리아를 낳자마자 사망하여 외갓집이 있는 브뤼셀에서 양육되면서 마리아의 애칭인 '미샤'로 바뀌었다. '세르트'라는 성은 스페인 화가인 호셉 마리아 세르트와 세 번째 결혼하여 얻었다. 


 제자와 재혼한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온 미샤는 모리스 라벨의 스승인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 1845~1924)에게서 일주일에 하루씩 피아노 레슨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포레의 학생들의 피아노 알바로 연명해 가다 21살 때 조카 타데 나탄송(Thadee Natanson, 1868~1951)과 결혼한다. 


 이때부터 파리의 예술가, 문학가, 음악가 등 지식인 서클을 만들어 그들의 뮤즈가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마르셀 프루스트,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그리고 194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앙드레 지드 등 당시 내로라 하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과 교류했다. 


 30년 이상을 '문화적 중재자'로 이름을 떨친 보헤미안 엘리트인 미샤는 상류사회 그룹 살롱을 운영하면서 '천재 수집가'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미샤를 알고 싶으면 먼저 스스로 천재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미샤가 코코 샤넬을 만난 것은 1917년 프랑스 여배우 세실 소렐(Cecile Sorel, 1873~1966)의 집에서였다. 특히 아서 카펠의 사망 이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던 샤넬의 영혼을 위로해준 진정한 친구였다. 한편 샤넬이 미샤에게 끌린 매력은 그녀가 광적인 파괴성을 보이는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위트와 풍자로 모든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때론 소름 끼치도록 만드는 그녀의 천재성에 있었다. 

 

 

 

 


 세르트는 포용력이 있고 관대하여 샤넬과의 우정뿐만 아니라 어려운 친구들을 많이 도왔다. 1911년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초연이 있던 날, 의상제작사로부터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빌린 무대의상의 반환 요청을 갑자기 받았을 때 그녀가 현금 4천 프랑을 선뜻 내줘 위기를 넘겼다.


 또 디아길레프가 1929년 8월 베니스에서 운명하기 직전에 달려가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켜주었으며, 그가 죽자 발레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를 기리기 위해 상 미셸 섬에 안장하는 등 장례비 일체를 부담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파리 점령기 동안, 그녀는 예전처럼 살롱을 운영하면서 나치를 상대로 충성하여 돈을 벌었다 하여 조사를 받았으나 그녀의 소문난 관대한 기질과 성품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비난, 처벌 받지 않고 풀려났다.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Grand Duke Dmitri Pavlovich of Russia, 1891~1942)은 1916년 12월 라스푸틴의 암살사건에 연루되자 도망쳐 페르시아를 거쳐 1918년 영국으로 망명한, 제정러시아 말기 로마노프 왕조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2년 뒤인 1920년에 파리로 옮겨와 샴페인 판매원으로 일했다. 한편 그의 누이동생 마리는 '키트미르(Kitmir)'를 설립하여 슬라브 전통 유리구슬과 수공예자수 사업을 하면서 코코 샤넬과 인연을 맺었다. 

 

 

 

 


 드미트리 대공은 1921년 봄, 몬테 카를로에서부터 샤넬과 약 1년 간 연인관계를 맺었다. 1926년 미국에서 오드리 에머리(Audrey Emery, 1904~1972)와 결혼하여 1937년 이혼할 때까지 슬하에 외아들 파울 일린스키(Paul Romanovsky-Ilyinsky, 1928~2004)를 두었다. 일린스키는 한국전쟁 때 미해병 소속 종군사진사로 참전하였으며, 플로리다 팜 비치 시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였다. 1991년에 러시아 왕정주의자들이 생존하는 로마노프 왕정의 유일한 혈육이므로 '차르(Tsar)' 칭호를 제의하며 러시아 복귀를 제안했으나 거절했다.


 드미트리 대공은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나 만성 결핵 진단을 받고 1939년 9월 2일 스위스 다보스 샤츠알프(Schatzalp) 요양소에 입원하여 2년여 뒤 51세로 사망했다. 일설에는 요독증(uremia)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한편 부인 에머리는 아들 파울이 있는 팜 비치에서 1972년 68세로 세상을 떴다. 


 배론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Baron Hans Gunther von Dincklage, 1896~1974)는 독일 귀족 가문 출신으로 'Freiherr' 즉 'Baron'이란 칭호가 붙었다. 당시 그는 독일 외교관으로 파리에 주재하며 테니스 선수, 플레이보이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2011년 8월, 파리 주재 미국 저널리스트였던 할 본(Hall Vaughan, 1928~2013)이 "적과의 동침: 코코 샤넬의 은밀한 전쟁"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딩클라게는 환지중해에서 첩보 활동을 하여 요제프 괴벨스에게 직접 보고한 나치 선전 장교였으며, 스파이 번호 'F-7124'인 샤넬은 '적과의 동침'을 하며 독일의 첩보활동에 협력했음을 폭로했다. 


 그 하나의 예가 1943년 후반기 무렵 나치 SS고위층에게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별도의 '평화 서곡 협상안'을 만들어 작전코드명 'Modelhut (Model Hat)'로 극비리에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에게 전달하도록 제안했다는 것이다. 


 전후 샤넬은 조사를 받았으나 영국의 왕실을 포함한 상류사회 인맥과도 깊은 교류를 했던 그녀인지라 처칠 수상의 외교적 중재로 풀려났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따위의 일을 귀찮아하고 대수롭잖게 여기는 프랑스인들의 기질 때문에 흐지부지 넘어갔다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1920년 여름 샤넬은 스위스에 있는 이고르 가족이 파리에 기거할 집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그들을 파리 교외에 있는 그녀의 새저택 '벨 레스피로(Bel Respiro)'에서 지내도록 제의한다. 자존심 강한 이고르는 샤넬의 제안을 일단 거절해보지만, 아내와 네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망명객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 알림: 7월 4일(수) 12~16시 갤러리아 문화센터에서 과학 및 인문 강좌가 있습니다. 강사: 문종명, 손영호(주제: 역사 속 서태후), 천하성, 한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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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유명 음악가 시리즈(VI)-'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2)

 


'샤넬 No.5'를 탄생시킨 재봉사와 전위적 
'봄의 제전' 작곡가의 불륜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혹평을 받은 원인을 놓고 디아길레프, 니진스키, 스트라빈스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니진스키는 지나치게 전위적인 음악 때문이었지 안무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강변하는 한편 스트라빈스키는 "춤이 바보 같았고 리듬조차 느끼지 못했다."며 안무를 탓한다. 

 

 

 

 


 이에 디아길레프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신 겁니다. 다만 음악 취향 따윈 없는 관객들이 너무 생소해서 아직 걸작을 이해 못할 뿐이죠."하고 이고르를 위로한다. 이어서 "괴물과 맞서려면 싸우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고 격려하는 디아길레프. [註: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 1890~1950)는 ‘무용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창작품과 고도의 발레 테크닉을 완성시키며 전설적 명성을 떨친 폴란드 출신 러시아 남성무용수였다. 디아길레프는 공공연한 호모였는데 그의 연인이었던 니진스키가 발레리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1913년 이 일을 빌미로 해고했다는데… 아무튼 니진스키는 그 후로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스트라빈스키 가족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스위스에서 망명객이 되어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이어간다. [註: 러시아 제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린 서민들이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빵을 요구하며 일으킨 1917년 2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세운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어 제정 러시아는 종지부를 찍는다. 
 같은 해 10월 좌파 볼셰비키에 의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의 지도하에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난다. 이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한 20세기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이 러시아 혁명에 뒤이어 레닌과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가 주도하던 혁명파 '적군(赤軍, 좌파)'과 서방국가들이 지원하던 반혁명파 '백군(白軍, 우파)'이 싸우던, 이른바 '적백내전'이 일어나, 결국 1922년 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蘇聯)이 탄생했다. 이 격변의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의 존재와 삶과 사랑 이야기를 담은 대서사극이 유명한 '닥터 지바고(1965)'이다.]

 

 

 

 


 1920년 봄 파리. 어느 사교모임에서 디아길레프의 소개로 7년 만에 '재봉사'와 '작곡가'의 만남이 다시 이루어진다. 코코는 연락하라며 이고르에게 명함을 건넨다. 이때 패션 디자이너로 상류사회의 유명인사가 된 가브리엘 '코코' 샤넬(Gabrielle 'Coco' Chanel, 1883~1971)은 그의 연인 아서 '보이' 카펠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져있을 때였다. [註: 샤넬의 연인인 아서 '보이' 카펠(Captain Arthur Edward 'Boy' Capel, 1881~1919)은 영국 출신의 선박사업가, 폴로 선수로, 샤넬의 창업자금을 대주고, 그의 멋있는 캐주얼 스타일은 '샤넬 룩' 창조의 영감을 주었다. 그들의 관계는 그가 죽기까지 9년 간 계속되었는데 카펠이 1918년 결혼한 후에도 지속되었다. 1919년 12월 22일 샤넬과 크리스마스 랑데뷰를 하기 위해 롤스 로이스로 파리에서 칸으로 가던 도중 교통사고로 38세에 사망했다. 운전기사는 중상을 입었으나 살았다.] 


 여기서 주인공인 코코 샤넬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하자.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 중 유일한 패션 디자이너로 뽑혔던 '더블 C'로 대표되는 코코 샤넬. 제1차 세계대전 후 여자들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샤넬 No.5' 시그너처 향수, 핸드백, 보석 등과 어울리는 고급 맞춤 여성복을 디자인하여 그녀는 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 상류사회의 주류명사가 되었다. 


 어머니는 자선병원 세탁부였고, 아버지 알베르 샤넬은 떠돌이 노점상이었는데 1884년 결혼하기 일 년 전에 가브리엘 샤넬이 태어났다. 어머니는 모두 2남3녀를 낳고 결핵으로 32살에 사망하여 12살의 가브리엘은 오바진(Aubazine) 고아원에서 양육되면서 나중에 그녀의 미래가 될 재봉기술을 배웠다. 


 18살이 되면서 더 이상 고아원에 있을 수 없어 물랑(Moulins)에 있는 '라 로톤드(La Rotonde)' 카페에서 노래를 불러 팁으로 연명했다. '코코'라는 별명은 이때 붙여졌다. 그녀가 즐겨 부른 노래의 가사에서 따왔다는 설과 프랑스어 '코코트(cocotte)'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당시 카페의 주고객은 군인들이었는데 젊은 매력이 넘치는 샤넬을 보고 '품고 싶은 여자'라는 뜻의 '코코트'로 부른 것이 '코코'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카페에서 전직 기병대 장교 출신이며 직물제조업체 '발상'의 상속자로 거부인 에티엔 발상(Etienne Balsan, 1878~1953)을 만나 그녀의 인생이 180도 바뀌는 행운을 얻는 코코 샤넬. 그녀의 나이 23살 때인 1906년이었다. 


 그의 정부(情婦)가 되어 콩피에뉴(Compiegne)에 있는 로얄유 성(Chateau de Royallieu,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음)에서 동거하는 3년 동안 승마, 사냥, 폴로 경기 등 스포츠를 배우고, 사교계의 문화를 접하게 된다. 발상을 통해 상류사회의 미학과 취향 등을 이해하게 되어 인맥을 만들면서 패션 디자이너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방종의 삶을 배우면서 그녀는 평생 마약을 달고 다녔으며 항상 최상품을 사용했다고 한다. 

 

 

 

 


 1909년에 샤넬이 파리에 정착했을 때 그의 아파트를 빌려주었고, 1913년 부티크 가게를 도빌(Deauville)에 열었을 때도 도와주었다. 그리고 발상의 친구인 아서 '보이' 카펠을 그녀에게 소개해 주어 그때부터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다. 샤넬은 나중에 "두 신사는 나의 뜨거운 육체에 비싼 값을 매겼다."고 술회했다.


 2010년 영국의 자서전 작가인 저스틴 피카디(Justine Picardie•57)가 쓴 'Coco Chanel: The Legend and the Life (Harper Collins)'에 의하면, 자살한 언니 줄리아 베르트(Julia Berthe Chanel, 1882~1910)의 외아들로 샤넬이 양자로 삼았다던 앙드레 팔라스(Andre Palasse)는 샤넬과 발상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밝혀졌다. 


 코코 샤넬은 1971년 1월 10일 일요일, 30년 이상 살았던 파리의 리츠 호텔(Hotel Ritz)에서 87세로 사망했고, 스위스 로잔에 있는 부와 드 보(Bois de Vaux) 묘지에 안장됐다. 그녀의 대부분의 유산은 스위스에 있던 조카(아들) 앙드레 팔라스와 파리에 살고 있던 그의 두 딸에게 돌아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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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1
유명 음악가 시리즈(VI)-'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 (1)

 


'샤넬 No.5'를 탄생시킨 재봉사와 전위적 
'봄의 제전' 작곡가의 불륜의 사랑을 그린 작품


 

 

 

 

 2015년도 영화 '유스(Youth)'의 마지막에 지휘자인 주인공 프레드 벨린저(마이클 케인)가 꽃다발을 들고 베니스의 상 미셸 섬에 있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의 무덤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그 옆에 이고르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베라 스트라빈스키의 무덤도 같이 등장한다. 

 

 

 

 


 베라 드 보세 스트라빈스키(Vera de Bosset Stravinsky, 1889~1982)는 러시아 태생의 무용수였는데, 그녀의 첫 남편은 화가이며 무대 디자이너인 세르게이 수데이킨(Sergey Sudeikin, 1882~1946)으로, '발레 뤼스'와 관련하여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의 무대 디자인을 간접적으로 도운 인물이기도 하다. 


 스트라빈스키는 1921년 2월 파리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후 가족이 있는 프랑스 앙글레와 파리를 오가며 이중 관계를 유지하다가 1939년 3월에 첫 부인인 카테리나 노센코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9월에 하버드대 찰스 엘리엇 노튼 강의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 다음 해인 1940년 초에 베라가 미국으로 건너오자 매사추세츠 주 베드포드에서 정식 결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민 온 예술가•지식인들이 몰려 사는 LA 베벌리 힐즈로 옮겨 살다가 1945년 미국 시민권을 얻는다. 


 스트라빈스키는 1962년 러시아의 연주 초청으로 45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고, 1969년 LA에서 뉴욕으로 돌아와 2년 뒤인 1971년 심장마비로 88세로 사망한다. 베라는 93세로 죽자 전 남편이 아닌 스트라빈스키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그런데 2009년 와일드 번치사 배급으로 '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가 뜬금없이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온 순간, 세상은 매혹의 향기와 영원한 멜로디를 얻었다!"는 카피를 달고 개봉되었다. 


 감독 얀 쿠넹. 출연 아나 무글라리스, 매즈 미켈슨, 엘레나 모로조바, 나타샤 린딩거 등. 음악감독은 '잉글리쉬 페이션트(1996)'로 아카데미 및 그래미 상을 수상하고 '콜드 마운틴(2003)'으로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올랐던 가브리엘 야레. 러닝타임 118분.

 

 

 

 


 영화의 시작은 1913년 파리. 아파트 방에서 코코 샤넬(아나 무글라리스)이 몸에 꽉 낀 코르셋을 벗지 못해 가위로 단추를 잘라내며 쩔쩔맨다. 아서 '보이' 카펠(아나톨 토브만)이 거들어 겨우 벗겨낸다. 


 처음부터 샤넬이 당시 거추장스런 코르셋으로부터 여성들을 해방시킨 패션 디자이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내지는 공적을 부각시키는 듯하다. 

 

 

 

 


 장면은 바뀌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이 초연되는 샹젤리제 극장. 만석이라 극장입구엔 입장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로 붐비는데, 샤넬이 도착하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이자 후원자인 미샤 세르트(나타샤 린딩거)가 안내하여 데리고 들어간다. 


 대기실에서 배가 부른 카테리나(엘레나 모로조바)가 초조해 하는 남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매즈 미켈슨)를 격려한다. [註: '봄의 제전' 초연은 1913년 5월 29일 파리에서였다. 1906년 초에 결혼한 외사촌이자 첫 부인인 카테리나 노센코(Katerina Nossenko, 1880~1939)는 이때 2남1녀를 기르며, 뱃속의 아기가 딸 마리아 밀레나(Maria Milena Stravinsky, 1914~2013)로 다음해 스위스 로잔에서 낳았다. 그러나 밀레나 출산 후 결핵 진단을 받았다.]


 공연 지휘자 피에르 몽퇴(제롬 필레망)는 “멜로디는 잊고 리듬을 타. 차이코프스키, 바그너, 슈트라우스는 잊어. 전에 들은 음악은 다 지워버려. 무슨 일이 있던 날 따라와.”라며 악단을 독려한다. 

 

 

 

 


한편 안무를 담당하는 바슬라프 니진스키(마렉 코사코프스키)는 막이 올라갈 무렵인데도 생동감이 더 필요하다며 무용수들을 달달 볶는데 사뭇 긴장감이 돈다. '발레 뤼스'의 총감독 디아길레프(그리고리 마누코프)는 초조해 하며 무대 뒤에 찾아온 이고르에게 극장이 만석이라며 안심시키는데…. [註: 발레 뤼스(Ballets Russes)는 1909년 예술기획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 1872~1929)가 러시아의 무용가, 예술가를 모아 창단하여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러시아 발레단'을 뜻한다. 같은 해 5월 19일 밤 파리, 나이 어린 무용수들인 안나 파블로바, 바슬라프 니진스키, 타마라 카르사비나, 베라 카랄리 등으로 구성된 첫 공연에서 고전주의의 전통적인 틀을 깨고 무용을 중심으로 문학, 음악, 미술, 패션,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가 총체성을 띠는 종합예술적 성향의 현대 발레의 새로운 장을 열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디아길레프는 림스키 코르사코프 등 러시아 작곡가 중 특히 스트라빈스키와 긴밀히 협력하여 그의 발레곡 중 '불새(The Firebird)'를 1910년에, 그 다음해에 '페트루슈카(Petrushka)'를 발표하여 성공을 거둔데 이어 1913년에 '봄의 제전'을 공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연 시작 얼마 후 광폭한 전위적 불협화음과 기이한 춤사위에 놀란 '점잖은' 관객들은 "터무니 없다. 음악에 대한 모독이다" "러시아로 돌아가라"는 등 야유를 보내며 객석은 난장판이 된다. 급기야 경찰까지 출동한다. 예술계 최대의 스캔들 내지 혁명이 일어난 순간이다. 아니 신화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은 스트라빈스키와 그의 파격적인 음악에 깊은 인상을 받고 흥미를 가지는데…. 패션 천재는 음악 천재를 알아본 것일까. 

 

 

 

 


 초반 20분 간 재연된 '봄의 제전' 초연 장면은 타임머신을 타고 100여 년 전의 현장에 있는 듯한 돋보이는 연출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상적인 장면은 지휘자 피에르 몽퇴(Pierre Benjamin Monteux, 1875~1964)가 그런 소요 따위에 아랑곳 않고 무신경한 악어처럼 오케스트라를 끝까지 침착하게 지휘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일어났던 전설적인 얘기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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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9
유명 음악가 시리즈 (V)-'쇼팽의 연인’ (Impromptu) (5)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여걸 문학가 조르주 상드와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1848년 11월16일 런던 길드홀(Guildhall) 연주회를 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이때 체중이 99파운드(45kg)도 안 되었고 무일푼이었다. 당시 혁명과 콜레라 때문에 모두들 파리를 떠나고 프랑숌과 들라크로와 등 친구들이 가끔 아파트로 찾아 왔을 뿐이었다. 


 1849년 여름까지 밀린 월 400프랑의 하숙비는 러시아의 부호 친구인 오브레스코프 공주가 은밀히 정산해 주었을 정도였다. 그 해 6월에는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가 방문하기도 했지만 조르주 상드는 코빼기도 안 비쳤다. 

 

 

 

 


 죽음을 예상한 쇼팽이 가족을 보고 싶어하자 1849년 8월8일 누나 루드비카(Ludwika Chopin Jedrzejewicz, 1807~1855)가 바르샤바에서 파리로 와서 그가 죽을 때까지 보살핀다. 한편 죽기 이틀 전에 쇼팽의 요청에 의해 그의 제자였던 델피나 포토카(Delfina Potocka, 1807~1877) 공작부인이 헨델 작곡의 '데팅겐 찬가(Dettingen Te Deum•1743)'를 노래하고 프랑숌이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첼로로 연주했다. 


 10월17일 새벽 2시경 쇼팽의 영혼은 그의 육체를 떠났다. 누이 루드비카, 쇼팽의 제자 피아니스트인 차르토리스카 공주, 절친한 친구 그르자이말라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註: 마르셀리나 차르토리스카 공주(Princess Marcelina Czartoryska, 1817~1894)는 폴란드 귀족 출신으로 비엔나에서 카를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에게서, 파리에서 쇼팽으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유럽을 순회하며 연주회를 열었고 프란츠 리스트, 프랑스 유명 인기 메조소프라노 가수였던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 1821~1910) 등과 협연하기도 했던 저명한 피아니스트다.] 

 

 

 

 


 다음날 솔랑쥐의 남편인 클레신저가 쇼팽의 데드 마스크와 그의 왼손을 석고로 본을 떴다. 그리고 다음해인 1850년 쇼팽의 무덤 묘비석 위에, 부러진 라이어(악보꽂이) 때문에 울고있는 음악의 여신 '에우테르페' 조각상을 흰 대리석으로 제작했다.


 10월30일에서야 파리 마들레느 교회에서 치러진 쇼팽의 장례식에는 외젠 들라크로와, 프란츠 리스트, 빅토르 위고, 까뮤 프레옐 등 유럽 전역에서 3천 명 이상의 유명인사가 참석했으나 정작 조르주 상드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날 장례식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유명성악가들에 의해 불려졌고, 쇼팽 작곡의 'Prelude' 제4번(E단조)과 제6번(B단조)이 연주되었으며, 발인식 때는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제2번 3악장 '장송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20세 때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19년 동안 외로움을 느끼며 살다 요절한 에트랑제 쇼팽.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을 가지 못한 채 파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묻혔다. 쇼팽의 사후 1주기에 루드비카가 가져온 폴란드의 흙이 제인 스털링에 의해 그의 무덤 위에 뿌려졌다.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누이 루드비카가 폴란드로 가져가서 바르샤바 성십자가 교회에 안치했다. [註: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 SS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Erich von dem Bach-Zelewski, 1899~1972)가 안전을 위해 은밀한 곳에 보관하였다가 쇼팽의 사후 96주년인 1945년 10월17일에 성십자가 교회에 반환하였다.] 


 쇼팽의 사인(死因)은 결핵으로 알려져 있으나 2017년에 그의 보존된 심장을 검시한 결과, 만성 결핵에 의한 합병증인 심낭염(心囊炎)이라는 치명적인 유전병이 원인이었다고 밝혀졌다. 


 한편 쇼팽이 사망한 후 '쇼팽의 과부'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제인 스털링을 두고 한 얘기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상드와 동갑내기였던 그녀는 쇼팽의 장례비는 물론 클레신저의 데드 마스크 및 조각상 건립 비용 5,000프랑을 지급했을 뿐만 아니라 쇼팽의 심장 보존용 특수항아리 제작 비용, 루드비카의 파리-폴란드 간 체제비 및 여행경비 일체를 부담했다. 

 

 

 

 


 게다가 쇼팽의 그랜드 피아노 구입 및 바르샤바로 운반하는 비용을 모두 부담했으며 상드가 쇼팽에게 보낸 200여 통의 편지를 수집하여 1851년 상드에게 되돌려주었다. 또 1849년 쇼팽의 사망 직전에 폴란드 화가인 테오필 크비아트코프스키(Teofil Kwiatkowski, 1809~1891)에게 의뢰하여 '쇼팽의 임종(Chopin on His Deathbed)'이라는 유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쇼팽이 사용하던 가구 등도 구입하여 일부는 에든버러의 캘더 하우스로 운반하여 '쇼팽 박물관'을 열었다. 그밖에 미공개 악보, 스케치, 친필 편지 등을 수집하여 일부는 루드비카를 통해 바르샤바 쇼팽 박물관에 기증했다. 


 살아있을 때 쇼팽을 유명하게 한 이는 조르주 상드였지만 죽은 후에는 제인 스털링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이러한 재정지원은 스웨덴 소프라노 가수였던 제니 린드가 익명으로 도왔다는 설이 있다. 


 쇼팽을 기리기 위해 바르샤바에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1927년 제1회를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중단되었지만 1955년 이후 5년마다 한 번씩 열리고 있다. 쇼팽의 기일인 10월17일 전후 3주에 걸쳐 개최되며 연주 곡목은 쇼팽의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 연령 제한은 17~28세이다. 

 

 

 

 


 2005년의 제15회 콩쿠르에서는 폴란드인 20명, 일본인 20명을 포함한 80명의 본선 진출자 중에서 한국의 임동혁(당시 21세)과 형 임동민(25세)이 2등이 없는 상태에서 공동 3위에 입상하였다. 임동혁은 본선에서 연주 도중 피아노 안에 조율 도구가 그대로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1악장을 끝낸 후 일단 연주를 멈추고, 점검 후에 다시 연주를 재개했다. 


 2015년 제17회 콩쿠르에서 한국의 조성진(趙成珍, 당시 21세)이 1위로 우승하였다. 이때 제9회 콩쿠르 우승자인 폴란드 출신 크리스티안 치메르만(Krystian Zimerman•62)은 그의 연주를 듣고 다른 참가자들의 연주를 듣기도 전에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게 조성진이 우승할 것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인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필리프 앙트르몽(Philippe Entremont•84)이 우승자 조성진에게 결선에서 10점 만점에 1점을 준 것은 '옥의 티'였다. 


 2등은 캐나다 퀘벡 출신의 찰스 리차드 하멜린(29)이 차지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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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8
유명 음악가 시리즈(V)-'쇼팽의 연인’ (Impromptu)(4)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여걸 문학가 조르쥬 상드와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서로 격렬하게 다투는 리스트 부부를 뒤로 하고, 쇼팽은 상드와 두 아이들과 함께 질투심과 경쟁심으로 얼룩진 파리를 떠나 스페인 마요르카(Majorca) 섬으로 여행길에 오르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평론가들의 평점은 대체로 높은 편이었지만, 상황 설명에 지극히 인색하여 등장인물의 배경과 상황을 모르면 도대체 뭐하는 건지 모를 따분한 영화가 되지 싶다. 게다가 특별한 시각적인 볼거리도 없으니 심심풀이 땅콩에 다름 아니게 보일 수도 있다. 

 

 

 

 


 이야기의 중심은 쇼팽이 아니라 상드이다. 그녀를 둘러싼 다른 연인들이 벌이는 해프닝이 그렇고, 리스트의 연인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벌이는 사랑의 곡예도 그렇다. 그래서 등장 인물에 대한 설명을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늘어놓았음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진작 쇼팽의 창작적 전성기는 마요르카에서부터 그가 죽기까지의 약 10년의 시기이었기에 영화 밖 이야기로 쇼팽의 일생과 상드에 대해 좀 더 오롯이 언급하는 게 좋겠다.


 1838~1839년 사이 마요르카 발데모사 수도원에서 보낸 상드와 그의 아이들 및 쇼팽의 이야기는 1841년 상드의 소설 'Un Hiver a Majorque (A Winter in Majorca)'에서 자세히 묘사되었다. 이 때의 쇼팽과 상드 얘기는 '쇼팽의 푸른 노트(The Blue Note•1991)' '쇼팽: 사랑에의 욕망(Chopin: Desire For Love•2002)' 등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마요르카 섬의 겨울은 한랭한 우기(雨期)로 몸이 약한 쇼팽은 건강을 크게 상했고 결핵으로 각혈을 많이 했다고 한다. 주거 여건이 좋지 않은 벽지인데다 쇼팽과 상드의 관계를 의심한 동네 사람들의 구박까지 겹쳐 상드의 지극한 간호도 별수 없어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결국 마요르카 섬을 떠나 마르세유에서 잠시 요양을 한 후 상드의 고향인 프랑스 중부의 노앙(Nohant)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1846년까지 쇼팽과 상드는 노앙과 파리를 오가며 지낸다. 이 시절은 쇼팽의 삶에서 매우 행복한 시기였다. 

 

 

 

 


 귀족적 취향에 까탈스럽고 병약한 데다 때로는 상드의 남자관계를 의심하기까지 했지만 그는 그의 곁에 9년 간이나 머물며 헌신적인 모성애적 사랑을 쏟은 상드에게서 큰 위로를 받았지 싶다. 상드는 쇼팽에게 때로는 친구, 때로는 어머니 같은 연인이었고 행복과 영감을 준 예술의 뮤즈였다. 


 마요르카에 머물던 시기에 쇼팽은 24곡의 전주곡을 완성했고, 노앙 시절에도 많은 곡을 썼지만 그 중에서도 '피아노 소나타 제2번 B플랫단조, 작품 35'와 '피아노 소나타 제3번 B단조, 작품 58'을 빼놓을 수 없다. 전자는 노앙에 당도한 직후였던 1839년 여름에, 후자는 노앙 시절의 막바지였던 1844년 여름에 작곡했다. [註: 특히 피아노 소나타 제2번의 3악장인 아주 여리고 슬프고 우울한 단조로 된 '장송 행진곡'은 자신의 장례식뿐만 아니라 존 F. 케네디 미국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및 마거릿 대처 수상 그리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 등의 국장(國葬) 때 연주되기도 한 유명한 곡이다.]


 그러나 쇼팽이 죽기 2년 전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상드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들, 집에서 부리는 일꾼들 같은 문제들이 둘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결국 파국이 오고 만 것이다. 

 

 

 

 


 상드의 딸 솔랑쥐(Solange Dudevant-Clesinger, 1828~1899)는 1847년 19세 때 프랑스의 유명한 조각가 오귀스트 클레신저(Auguste Clesinger, 1814~1883)와 결혼하였으나 돈 문제 때문에 어머니 상드와 관계가 험악해졌는데, 이러한 솔랑쥐를 '사랑하고 두둔했던' 쇼팽의 태도는 상드로 하여금 노골적인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한편 외젠 들라크로와에게 사사를 받은 예술가이자 곤충연구가였던 아들 모리스(Maurice Dudevant, 1823~1889)는 쇼팽을 엄청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역시 돈 문제였다. 즉 쇼팽이 재산상속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오로지 자신이 '유일한 상속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상드는 남성 편력이 많은데다 과시욕이 넘치는 여자이었기에 '악의 꽃(1857)'으로 유명한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는 그녀를 '남성 전용 화장실'이라 혹평했고, 니체 등 다른 비평가들은 '오물을 세척하는 배수구'라고 대놓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는 "사람들이 상드에 대해 비난할수록 그녀를 더더욱 명예롭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으며, 플로베르, 스탕달, 에밀 졸라, 도스토예프스키 등 수많은 인사들은 그녀를 칭송하였다. 


 쇼팽은 1848년 2월 그가 작곡한 '첼로 소나타 작품 65'를 첼리스트 오귀스트 프랑숌(Auguste Franchomme, 1808~1884)과 협연한 것이 그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연주였다. 이때부터 거장으로서의 인기는 시들기 시작한다. 따라서 재정적으로 궁핍해졌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쇼팽은 그의 문하생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제인 스털링(Jane Stirling, 1804~1859)의 후원으로 런던에서 5월15일 첫 연주회를 가진다. 영국의 유명한 피아노 제작사인 브로드우드가 그랜드 피아노를 제공했다. 청중 중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왕자를 비롯하여 '허영의 시장(Vanity Fair)'으로 유명한 소설가 윌리엄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 1811~1863)와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 불리운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Jenny Lind, 1820~1887)도 있었다.


 그 해 늦여름에는 스코틀랜드에서도 연주회를 열었다. 물론 일체의 여행비용은 제인 스털링이 부담했다. 꺼져가던 인기가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다시 불을 지핀 것이다.

 

 

 

 


 원래 남녀관계는 소문을 낳는 법. 그러나 쇼팽은 그의 폴란드 친구로 파리에서 은행가로 재직하고 있던 워지쳬크 그르자이말라(Wojciech Grzymala, 1793~1871)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스코틀랜드 여자는 친절하고 헌신적이지만 나는 결혼 침대보다는 무덤에 더 가까이 가고 있다."며 소문에 대해 일축했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 알림: 6월 6일(수) 갤러리아 쏜힐 문화센터에서 낮12~오후3시 과학 및 인문 강좌가 있습니다. 강사: 문종명, 손영호(주제: 역사 속 서태후), 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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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2
유명 음악가 시리즈 (V)-‘쇼팽의 연인’ (Impromptu)(3)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여걸 문학가 조르쥬 상드와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들라크로와의 화실에 들른 상드. 그는 마리 다구 부인이 상드를 질투하여 벌써 쇼팽에게 진을 치고 있다고 귀띔을 해주며, 앙제에 있을 때 그녀가 쇼팽에게 보낸 연애편지를 보았다고 말한다. 마침내 마리의 교활한 기만술책을 알아차린 상드는 자신이 직접 쇼팽을 만나리라 마음 먹는다. 


 쇼팽을 찾아간 상드. 그녀가 파리를 떠나겠다고 말하는데도 쇼팽은 무관심한 듯 피아노를 치며 딱 1분만 시간을 주겠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알아요. 당신은 훌륭해요. 악기 하나로 신의 언어를 구사했어요. 원하는 것은 당신의 입술로부터 배우고 싶은 거예요. 날 원하지 않으니 물론 복잡하겠죠. 아까운 일이에요.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었는데…."라고 말하는 상드.


 그러나 쇼팽은 상드가 내기를 걸고 있다는 마리 다구의 얘기를 떠올린 듯 돈을 건네며 그녀를 모독한다. "내게는 미덕이나 고귀함은 없어도 사랑은 합니다. 강하게, 전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사랑합니다."라고 내뱉곤 돈을 집어던지며 나가는 상드. 얼핏 그 말이 마리의 편지에서 본 내용과 같다는 의문을 품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드를 냉랭하게 대하는 쇼팽. [註: 쇼팽과 리스트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리스트는 그의 부인 마리 다구와 쇼팽 사이를 의심했던 반면 쇼팽은 리스트와 조르주 상드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등 서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설이 있다.] 


 낙심한 상드는 겨울 동안 자신의 집에서 칩거하며 보낸다. 이듬해 여름, 상드의 새 소설을 구입한 쇼팽은 그 책에서 마리의 연애편지와 똑같은 글을 발견하고는 마리에게 가서 그녀가 준 연애편지를 상기시키며 따진다. 다급해진 그녀는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어 상드의 소설에서 그 글을 인용했다고 둘러댄다. 그러나 그 편지가 씌어진 때에 그 책은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거짓임이 탄로난다. 이제 상드가 그 편지를 쓴 주인공임이 증명되자 친구에 대한 마리의 배신에 분노하는 쇼팽! 


 한편 상드가 출판사에 자서전 마지막 원고를 전달하는데 사장이 쇼팽이 찾아와서 그녀의 행방을 물었다고 알려준다. 기뻐하며 바로 쇼팽을 방문하는 상드. 그녀가 그의 가족사진을 보자 쇼팽은 약혼녀의 사진이라며 그 가족의 반대로 이젠 파혼됐다고 설명한다. 영화는 사진도 보여주지 않고 이 말이 전부다. [註: 이 영화는 인물에 대한 설명에 지극히 인색하다. 그래서 필자는 이해를 돕기 위한 부연 해설의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쇼팽이 설명한 약혼녀는 폴란드 백작 가문의 딸 마리아 보드칭스카(Maria Wodzinska, 1819~1896)이다. 그녀는 나중에 나폴레옹 3세가 된 루이 나폴레옹 왕자도 흠모할 정도로 미인이었으며 음악, 그림 등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쇼팽은 1834년에 "월츠 제1번 작품 18 '화려한 대월츠'"와 1835년에 "월츠 작품 69 제1번 '고별'"을 그녀에게 헌정했다. 


 한편 그녀가 1835년에 그린 쇼팽의 25살 때의 초상화는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의 평화롭고 사색에 잠겨있는 모습은 들라크로와의 쇼팽 초상화와 더불어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1836년 드디어 마리아는 어머니 테레사 백작부인의 동의를 얻어 쇼팽과 약혼을 하지만 아버지 빈센티 백작이 쇼팽의 건강 문제 그리고 상드와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의 염문 때문에 반대하는 바람에 그 다음해에 파혼되었다. 그녀는 두 번 결혼하고 1896년 77세로 폴란드의 쿠프카에서 사망했다.


 1837년 쇼팽의 연인이 된 상드는 집 안에서 완벽하기 위해 싸우지 말고 우선 빛과 공기가 있는 곳에서 숨 쉬는 법을 배우라며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간다. 또한 쇼팽은 아픈 게 아니라 다만 기운이 필요할 뿐이므로 자기의 넘쳐흐르는 에너지를 뺏어가면 된다며 강하게 그를 원하는데…. 이때 쇼팽은 이미 결핵을 앓고 있었다.

 

 

 


 시내를 함께 걷고 있던 어느 날, 계속 상드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말피와 맞닥뜨린다. 그는 다짜고짜 쇼팽의 뺨을 때리며 내 연인을 빼앗았으니 도전장을 낸다며 내일 새벽에 권총 결투를 신청한다. 좋다고 응수하지만 '상금'은 줄 수 없다는 쇼팽! 아무리 섬약(纖弱)하지만 그래도 남잔데 사랑하는 연인을 상금이랍시고 쉽게 내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승부를 가리는 도중 심약한 쇼팽이 힘없이 쓰러진다. 상드가 얼른 그의 총을 주워 말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쏜다. 오른팔에 부상을 입는 말피. 입회인으로 나온 의사와 들라크로와가 쇼팽을 인근 시골집으로 옮긴다.


 의식을 회복한 쇼팽은 결투에서 자신이 살아남은 것이 상드 때문이었음을 알고 자신이 얼마나 상드를 사모하는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 

 

 

 

 


 수개월 후 리스트와 마리 부부가 쇼팽의 아파트를 방문한다. 때마침 여행 떠날 준비에 여념이 없는 쇼팽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최근작인 소품곡을 마리에게 헌정한다. 리스트가 그 악보를 받아 피아노로 연주해 보며 무척 아름다운 곡이라고 평한다. 이때 쇼팽이 마리에게 상드 부인을 만나러 간다고 말하자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상드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충고하는데 그 순간 상드가 나타난다. 

 

 

 

 


 리스트가 도대체 마리가 뭘 했기에 이런 굉장한 영광을 얻게 되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데 쇼팽은 '마리는 천사 같은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부인 단속 잘하라는 뜻으로 쇼팽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상드가 리스트에게 "파리에 더 자주 놀러오라"며 "당신이 없어서 이런 곤란도 겪는 거니까."라고 말하곤 쇼팽과 팔장을 끼고 떠난다. 사실 쇼팽이 마리에게 곡을 헌정하도록 계략을 제안한 것은 바로 상드였다.

 

 

 


 이제 프란츠 리스트가 "여태까지 나는 당신의 불행을 내 탓으로 여겨왔소. 그런 정신으로는 작곡도 할 수 없었지. 여태까지 내 생명력을 다 앗아가 버린거야. 쇼팽은 당신의 좋은 점을 보고 있는 것 같군."하고 말하자, 마리는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설마 나와 그가 연인이라는 생각은 안 하겠지?"하고 넋을 잃고 말하곤 창밖을 내다보며 "둘이 도망 가고 있어. 이건 파국이야!"라며 발악을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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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4
유명 음악가 시리즈(V)-‘쇼팽의 연인’ (Impromptu) (2)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여걸 문학가 조르쥬 상드와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드디어 상드를 비롯하여 초대받은 사람들이 앙제에 도착하지만 쇼팽은 보이지 않는다. 하루 늦게 온다는 소식에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산책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상드. 그러나 상드의 쇼팽을 향한 로맨틱한 계략은 아이들의 선생이자 질투심 많은 옛 연인 말피(조르주 코라파스)가 나타나면서 틀어지기 시작한다. 

 

 

 


 상드를 끈질기게 쫓아다녔던 말피(Jean Pierre Felicien Mallefille, 1813~1868)는 아프리카 동부 섬나라인 모리셔스(Mauritius) 출신 소설가•극작가로 그가 쓴 소극(笑劇) '두 과부(Les Deux Veuves)'는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rich Smetana, 1824~1884)의 오페라 '두 과부(The Two Widows)'의 대본이 되었다. 


 또 이런 일화가 있다. 프란츠 리스트가 오페라 '사르다나팔루스(Sardanapale)'를 작곡하기 위하여 말피에게 대본을 요청했으나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열 받은 리스트는 결국 오페라 작곡을 포기했다고 한다. 

 

 

 

 


 다짜고짜 자신의 침실에 들어온 말피를 피해 창문 밖으로 도망친 상드가 불쑥 피아노를 치고 있는 쇼팽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어 느닷없는 둘의 첫 대면이 이루어진다. 당황한 쇼팽이 퇴실을 요구하자 "그래도 당신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당신은 남자로서가 아니라 천사로 느껴져요. 그 손들, 후광, 날개, 모두가 말이죠. 그럼 안녕, 나의 꿈이시여."라고 말하곤 떠나는 그녀. 비록 말피를 피해 하인의 방에서 잤지만 그날 밤은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에 행복해 하는 상드. 

 

 

 

 


 "당신의 따뜻한 말에 살고 잔혹한 말에 죽소. 죽음은 두렵지 않으니 상관 없어요. 당신의 음악 속에서 이미 초월했으니까요." 상드는 좋은 첫인상을 주지 못한 쇼팽에게 자기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이와 같은 격렬한 연애 편지를 써서 다음날 마리 다구 백작부인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마리 역시 쇼팽을 사모하고 있던 터라 상드의 서명 부분을 떼내고 대신 자신의 서명으로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를 받아본 쇼팽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친구 들라크로와에게 상의한다. 편지 말미에는 "난 미덕이나 고귀함은 갖추지 못했어도 사랑은 하지요. 강하게, 전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사랑합니다."라고 쓰여있다. 


 쇼팽은 마치 그 끔찍한 여자, 즉 상드의 소설에 나오는 스타일과 같다고 언급하자 들라크로와는 "그 여자는 삶은 뒤범벅으로 살지만 인간성은 좋은 여자"라며 "그래서 남자들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거지. 사랑을 아는 여자야."라고 변호한다. 그러고는 "(마리 다구) 백작부인도 대단해. 그 냉정함 밑에 뜨거운 화산이 있을 줄이야."하고 말하는 들라크로와.

 

 

 

 


 장면은 만찬장. 당땅 백작부인이 바지에 남장을 하고 나타나고, 이어서 상드가 적과 백의 마치 폴란드 국기를 연상시키는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다. 파격적이다.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찰싹 달라붙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파트너가 되는 쇼팽. 그러나 그의 눈길은 자꾸만 만찬석 맞은 편에 앉아있는 상드에게 가는데…. 


 한편, 상드와 리스트의 사이를 오해한 말피가 리스트에게 싸움을 거는데, 마침 알프레드 드 뮈쎄(맨디 패틴킨)가 예고없이 나타나 그의 머리에 물을 끼얹는다. 질투에 눈이 먼 말피는 이젠 상드가 뮈쎄와도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 의심하고는 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알프레드 드 뮈쎄(Alfred de Musset, 1810~1857)는 프랑스 극작가•시인•소설가로 1836년 발표한 'La Confession d'un Enfant du Siecle (The Confession of a Child of the Century)'는 1833~1835년에 걸친 조르주 상드와의 사랑을 그린 자전적 실화 소설로 유명하다. 이는 1999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키스(Children of the Century)'로, 2012년에는 소설과 동명으로 영화화 되었다. 


 또 조르주 상드와 프랑스 여배우 마리 도발과의 레스비언 사랑을 다룬 1833년 에로틱 소설 'Gamiani, or Two Nights of Excess'는 당시 유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절망으로 시작하여 체념으로 끝날 때까지의 상드와의 사랑에 대한 그의 감정적 기복 변화를 서술한 소설 'Nuits'(Night•1835~1837)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뒤질세라 상드도 그녀의 관점에서 드 뮈쎄와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Elle et Luit'를 1859년에 발표했다.


 다음날 새벽, 말피와의 권총 결투가 벌어지지만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갈 지(之)자로 걸어간 뮈쎄가 엉뚱한 사람을 쏘는 바람에 무위로 끝난다. 


 뮈쎄가 쓴 '노아와 홍수'라는 단막극이 공연된다. 그것은 당땅 공작 등 귀족사회를 비판하고 오히려 '예술이 세계를 구한다'며 예술가를 찬미하는 내용이었다. 음악효과를 맡은 쇼팽이 그러한 대사를 문제삼아 호스트에 대한 모욕이라며 더 이상 연극에 참여할 수 없다고 화를 낸다. 뮈쎄가 "쇼팽, 당신은 당신의 음악같이 먼지가 낀 달콤한 것만을 원하지? 예술은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는 걸 아시오."하며 싸움이 벌어질 찰나, 벽난로에서 상드와 당땅 부인의 애들이 장난삼아 화약을 넣었던 장작이 폭발하는 바람에 말싸움은 싱겁게 끝난다.


 어느덧 2주가 지나 모두들 앙제를 떠난다. 이래 저래 상드는 쇼팽에게 좋지 못한 인상으로 남게 되고…. 


 파리로 돌아온 상드는 8개월이나 지났는데도 쇼팽에 대한 연정을 삭힐 수가 없어 친구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에게 자문을 구하러 간다. 이때 리스트가 헝가리의 홍수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한 6주간의 공연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마리는 6주가 6년이 될 수 있다며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작곡의 영감을 불어 넣었는데, 꿈은커녕 기껏 연주하는 곰일 뿐이라고 악담을 하며 한사코 연주여행을 반대하자 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


 상드의 방문으로 싸움은 중단된다. 상드가 솔직히 앙제에서 처음으로 드레스를 입기도 했지만 쇼팽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며 자문을 구한다. 그녀와 라이벌이었던 마리는 그 정도로는 안 된다며 "마치 넝쿨이 담 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여자는 때가 되면 자신을 포기해 버리지. 한 번의 밀어 부치기면 족하다."고 구슬린다. 

 

 

 


말하자면 쇼팽은 여성처럼 감수성이 예민하고 방어할 수 있는 힘도 매우 약하기 때문에 그를 여자라 생각하고 상드가 먼저 청혼하라고 부추긴 것이다. 이에 상드는 "내 진정한 친구!"라며 고마워하는데…. 


 한편 마리는 쇼팽에게 "상드가 쇼팽이 자신의 다음 번 애인이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면서 내기까지 걸고 있다."라며 이간질을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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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7
유명 음악가 시리즈(V)-'쇼팽의 연인’ (Impromptu)(1)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여걸 문학가 
조르쥬 상드와의 사랑을 그린 작품

 

 

 

 

 

 무릇 예술가를 다룬 영화의 소재는 예외없이 연애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야 얘기거리가 될 수 있고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리라. 하기야 인간사에서 남녀의 사랑을 빼고 나면 무슨 할 말이 따로 있을까. 더욱이 예술가들의 절대적인 뮤즈로 그들에게 열정과 영감을 불어넣어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게 한 여성들은 위대하기까지 하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음악가 중에서 가장 많이 영화의 소재로 다룬 작곡가가 바로 쇼팽이었다. 37편이나 된다. 참고로 그 다음이 프란츠 슈베르트로 27편, 프란츠 리스트가 25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 각각 16편이었다.

 

 

 

 


 따라서 유명 음악가 시리즈 다섯 번째 이야기로 1991년 코미디•로맨스 영화 '쇼팽의 연인'을 소개할까 한다. 원제는 '즉흥곡(Impromptu)'이나 주제가 뚜렷하지 않아 의역한 것인데 바로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Frederic Francois Chopin, 1810~1849)과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를 소재로 한 영화이다. 아무튼 제목만 보면 주인공이 상드인 것처럼 보이는데 영화의 내용을 보면 사실 그렇기도 하다. 


 인디펜던트 스피리트 어워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 감독 제임스 라핀. 출연 쥬디 데이비스, 휴 그랜트, 줄리안 샌즈, 버나데트 피터스 등. 러닝타임 91분. 


 배경은 1836년 프랑스. 첫 장면에 어린 소녀가 '아놀라'를 부르며 숲속에 들어가 어느 나무 밑에서 "코람베, 이 세상 남녀의 신이여, 들으소서!"하면서 완벽하고도 완벽한 사랑을 갈구하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다고 빈다. 


 이렇게 조르주 상드(쥬디 데이비스)가 어린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숲속에서의 내 작은 의식은 늘 제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절대로 좌절하지 않고 답을 구했다.'며 자서전을 쓰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상드의 두 아이 남매가 놀면서 어머니와 말피 선생과의 관계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말하는 장면을 통해 둘은 한때 연인 사이였지만 상드는 이제 말피를 싫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영화에서는 조르주 상드와 관련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정작 그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 주인공인 쇼팽도 그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조르주 상드는 1822년 18살 때 남작 두드방(Francois Casimir Dudevant, 1795~1871)과 결혼하여 아들 모리스(Maurice, 1823~1889)와 딸 솔랑쥐(Solange, 1828~1899) 둘을 낳았으나 1831년 파리로 이주하여 4~5년간 남편과 이른바 '사랑의 복수전'을 펼치다가 1835년에 법적 이혼을 하고 남매를 양육하고 있는 이혼녀였다.


 본명은 아망틴 뤼실 오로르 뒤팽(Amantine Lucile Aurore Dupin). 작은 키(152㎝)에 검고 큰 눈매, 입에는 여송연을 물고 남장을 하고 다니며 자유분방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던 작가 상드. 당대의 남성우월적 사회규범을 부정하고 애정과 결혼에서 남녀가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실천에 옮긴 여성으로 당시 유명세와 동시에 악평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1832년 첫 소설 '앵디아나(Indiana)'가 대박이 나면서 단박에 유명작가로 부상했다. '조르주 상드'라는 이름은 이 소설을 발표하면서 사용한 필명이었는데 이후 계속 같은 이름으로 활동했다. '조르주'는 남자 이름이라 본인은 '오로르(오로라)'로 불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어느 날, 상드는 마리 다구 백작부인(버나데트 피터스)과 동거하고 있는 프란츠 리스트(줄리안 샌즈)의 집을 방문했는데, 때마침 폴란드 태생의 작곡가 쇼팽(휴 그랜트)이 와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볼 기회는 얻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서 그의 음악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다.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피아노의 왕'으로 불리는 헝가리 출신 작곡가•피아니스트로 1835년 6살 연상의 이혼녀 마리 다구 백작부인(Comte Marie d'Agoult, 1790~1875)을 만나 1839년까지 동거하면서 1남2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 둘째 딸 코시마(Cosima Liszt, 1837~1930)는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와 재혼함으로서 그는 리스트의 사위가 되었다.

 

 

 


 쇼팽은 20세 때인 1830년 11월에 폴란드를 떠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체류하다가 그 다음해 9월에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그 여정 중에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을 때, 조국 폴란드의 독립운동 봉기가 러시아 군대에게 진압됐다는 소식을 듣고 연습곡 12번 ‘혁명’을 작곡했다는 '설'이 있다. 


 파리에서 처음 6개월간 꽤 고생을 했던 쇼팽은 1832년 2월26일에 파리의 유명한 프레옐 피아노 회사의 살 프레옐(Salle Pleyel) 콘서트홀에서 가졌던 데뷔 연주회가 큰 성공을 거둔다. 바로 조르주 상드가 일약 유명작가 대열에 올라섰던 그 해이다.


 그 무렵 귀족 문화생활에 결핍되어 있던 샤를 당땅 공작(Duke d'Antan, 안톤 로저스)과 클로데트 당땅 공작부인(엠마 톰슨)이 프란츠 리스트 부부, 쇼팽, 화가인 들라크로와(랄프 브라운) 등 파리의 유명인사들을 그들의 앙제(Angers) 성으로 2주간 초대한다. 

 

 

 


 외젠 들라크로와(Eugene Delacroix, 1798~1863)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프랑스 낭만주의 예술의 최고 대표자인 화가이다. 쇼팽이 28세, 조르주 상드가 34세 때인 1838년에 그린 두 사람의 초상화가 그의 사후에 화실에서 미완성인 채로 발견되었는데, 쇼팽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고 그 옆에 상드가 시가를 피며 선율에 취한 표정으로 감상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어느 소유주가 값을 더 받기 위해 둘로 잘라 팔아 현재 쇼팽의 초상화는 루브르 박물관에, 상드의 것은 코펜하겐 오르드룹가르트 국립박물관에 각각 소장돼 있다.


 아무튼 이 소식을 들은 상드는 쇼팽의 연주를 듣고 또 그를 만나보기 위해, 즉흥적으로 스스로 참석하겠다고 당땅 공작부인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자기의 옛 연인들, 이를테면 드 뮈쎄, 말피 등도 초대한 사실을 모르고 앙제에 오는 상드. 백작부인은 상드를 환영하지만 한편으로 문제의 남자들을 초대한 것에 대해 은근히 후회하는데….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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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2
유명 음악가 시리즈(IV)-'클라라’ (Beloved Clara)(하)

 


슈만의 아내, 브람스의 연인 -
두 거장을 떠받친 명피아니스트

 

 

(지난 호에 이어)
 [註: '랄라 룩(Lalla Rookh)'은 17세기 인도 무갈 제국 황제 아우랑제브(Aurangzeb, 1618~1707)의 용감한 딸의 이름이다. 그녀는 부카라 왕국의 젊은 왕과 약혼하기 위하여 그를 만나러 가는 도중, 시인 페라모르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여기서부터 흥미진진한 네 가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천국과 페리'는 그 중 두 번째 얘기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신랑의 궁에 도착한 랄라 룩은 졸도하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 황홀경 속에서 깨어나 보니 자기가 사랑했던 그 시인은 바로 약혼자인 왕이었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여기서 '페리'는 파라다이스에서 쫓겨났으나 어린 아이의 기도를 보고 회개한 늙은 죄인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하늘에 선물로 바쳐 다시 천국에 들어갔다는 페르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슈만은 귀에서 단조로운 'A' 음표의 이명(耳鳴•tinnitus) 증세가 또 나타나면서 가수들이 부르는 목소리가 천사의 속삭임처럼 들리는 환청에 빠진다. 또 어느 날 밤에는 혼령이 부른다며 몽유병 환자처럼 갑자기 침대를 떠나기도 했다. 그 혼령은 프란츠 슈베르트 또는 펠릭스 멘델스존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1854년 2월 17일(또는 18일)에 슈만은 천사들의 속삭임을 쫓아 "피아노를 위한 주제와 변주곡, E플랫장조", 이른바 "유령 변주곡(Ghost Variations)"을 작곡한다. 그리고 열흘 후인 2월 27일 카니발 행렬을 따라 라인강으로 가서 몸을 던졌다. [註: 슈만의 누나 에밀리에도 1825년 물에 빠져 자살했다.] 


 다행히 지나가던 어부에 의해 구출돼 목숨은 건졌지만 집으로 돌아온 슈만은 그날로 본(Bonn)의 엔데니히(Endenich)에 있는 리하르츠 정신병 요양소에 입원한다. 집을 떠나면서 슈만은 자신을 배웅하는 클라라에게 "브람스를 오게 하라"는 말을 남긴다. [註: 리하르츠 개인 정신병요양소는 2009년에 '슈만의 집(Schumannhaus)'으로 지정되었다.] 


 슈만이 요양소에 입원해 있는 동안 클라라는 혼자 아기를 낳는다. 그때 브람스가 클라라를 찾아온다. 그리고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낳은 클라라와 아빠를 보내고 쓸쓸해 하는 아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註: 1850년 뒤셀도르프로 이사할 당시 2남3녀였는데(한 명이 더 있었으나 한 살 때 죽었다) 아들 루드비히는 한 살배기였고, 연년생인 페르디난트는 갓난애였다. 이사한 다음해에 딸 유지니(1851~1938)를 낳고 3년 뒤 7번째 아들 펠릭스가 바로 영화 장면에 나오는 아기이다. 
 장녀인 마리(1841~1929)는 어머니를 도와 요리 등 가사일을 도맡아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클라라가 브람스 사이에 오갔던 편지들을 불태워버리려 하자 극구 말린 지극한 효녀였다. 막내딸 유지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나중에 슈만 가와 브람스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지금의 이야기가 전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브람스의 마음 속에 클라라에 대한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1854년 당시 브람스는 21살, 클라라는 35살이었다. 그 후 슈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년 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사랑이 오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로 미루어볼 때 브람스의 사랑이 상당히 깊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마지막 장면에서 그 점을 암시한다. [註: 클라라와 브람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모티브로 쓴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 1935~2004)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Aimez-vous Brahms•1959)'를 원작으로 1961년 아나톨 리트박(Anatole Litvak, 1902~1974)이 제작•감독한 영화 '이수(離愁•Goodbye Again)'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슈만의 정신병동에 브람스는 방문이 자유로웠지만 클라라는 허락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생계유지를 위해 함께 연주여행을 하던 중 본의 정신병동에 들렀는데 비로소 방문이 허용된다. 슈만이 죽기 이틀 전이었고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당시 엉뚱한 뇌수술을 받아 초췌한 모습의 슈만은 그녀를 알아보았으나 말은 거의 할 수 없었다.


 1856년 7월 29일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슈만은 향년 46세로 운명했다. 검시 결과에 의하면 그의 사인(死因)은 성병인 매독(梅毒•Syphilis)으로 알려졌다. 학창시절에 감염되어 페니실린이 발명되기 전 당시 일반적인 치료제였던 수은을 계속 투약함으로써 수은중독증에 걸렸고, 완치되지 않은 잠재매독균이 뇌종양의 일종인 수막종(髓膜腫, meningiomas)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수막종은 바로 슈만이 겪었던 '음악적 환청'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註: 최근에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도 똑같은 병인(病因)으로 투병하다 죽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보면 미친 것은 아니고 다만 이명 현상을 경험하기 훨씬 이전부터 심한 우울증을 동반한 정신적 질환에 시달린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슈만 사후, 브람스와 클라라는 그들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스승의 죽음이라는 준엄한 사실은 브람스의 사랑의 불에 강한 자제를 가하게 만들었지 싶다. 한편 클라라는 당시의 사회관습상 이루어질 수 없는 연상의 여인이었고 그러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일곱 자녀들을 부양해야 하는 현실적 모성애적 의무감이 그녀를 숙명적인 '고독한 존재'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두 사람은 사랑 대신 가장 신뢰하는 평생 친구가 된다. 그래서였는지 브람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註: 클라라는 1896년 5월 20일,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일 년이 채 안 된 1897년 4월 3일, 만 63세의 브람스 역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클라라의 죽음으로 음악가로서 브람스의 삶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장면에 클라라가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www.youtube.com/watch?v=OOlc2PAiWUU)을 연주하는 동안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브람스의 얼굴과 그윽한 미소로 가끔씩 눈을 맞추는 클라라의 얼굴을 오버랩 시키면서 둘의 깊은 사랑과 우정을 암시하며 영화는 조용히 끝을 맺는다. 슈만의 곡으로 시작하여 브람스의 곡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헬마 잔더스 브람스 감독은 단순히 과거를 재구성하는 차원을 넘어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또 연인으로서 두 거장을 떠받치며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간 위대한 여인 클라라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현대적이면서도 클래식한 우아한 영화를 탄생시켰다.

 

 

 

 


 내년이 클라라 슈만 탄생 200주년이 된다. 아름다운 '로망스'를 들으며 그녀의 발자취를 쫓아 라이프치히, 뒤셀도르프로 가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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