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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이유식의 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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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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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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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0
아! 또 가을인가-이유식(시인.민초해외문학상 제정자)

 
 

 

 가을은 추억의 계절입니다. 살며시 웃음짓는 무지갯빛 단풍잎들이 당신의 향내로 세상을 덮어 내 슬픔 알알이 적셔내는 오솔길입니다. 


 가을은 이별의 계절입니다. 억겁을 쌓아온 인연들, 은하수 길 검은 밤에 묻고 당신을 위한 기도로 눈물 흘려보는 낙엽 굴러가는 소리입니다.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입니다. 투명한 밤하늘 별을 헤는 당신의 숨소리 그리움 가득히 내 가슴을 저며오는 코스모스 만개한 들판길입니다. 


가을은 황혼 길에서 만나는 기화요초의 아름다움보다 채색되어가는 단풍잎을 보는 눈물의 계절 입니다.

 

아-아-- 이 가을에 불타버린 나의 심장은 당신이 남기고 간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헤아리는 나의 슬픔입니다. 


다운타운에서 "Do you have a Change?”하며 손을 내미는 인디언을 볼 때, 라이솔에 취하고 취해 썩어가는 인디언의 얼굴을 볼 때 애타는 나의 심정은 착하게 감사하며 베풀며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곱씹어 봅니다.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과 낙엽이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슬프고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났던 그 많은 사람들은 이 가을 어느 하늘 아래에서 무엇을 할까? 소식 없는 많은 사람들의 안부가 찡하게 코끝을 찔러옵니다. 


아름다웠던 그리고 슬펐던 인연의 고리에서 추억을 남겼던 못잊을 사람들을 더듬으니 가을 바람이 나를 찾아옵니다. 권력이 있다고, 얄팍한 지식이 있다고, 돈이 많다고 뻣뻣하게 어깨에 힘을 주던 사람들. 나에게 아름다움만 과시하던 어느 여인. 내가 좋아했던 그 여인도 이 가을 멀리 떠나는 기적 소리에 적막이 앗아간 밤의 고독을 인식할 것입니다. 


 또한 미워하고 시기하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연줄의 꼬리로 서로가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는 인과응보의 진리를 한번쯤 생각할 수 있다면 가을이 주는 문턱에서 잠을 자야 하는 생존의 진미를 달관하리라는 생각입니다. 


 들녘에는 헤이(Hay) 덩굴이 구르고 이삭이 익은 광야에 황홀한 모자이크 젖줄 같은 눈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보우강변 로키 산맥을 넘은 헐벗은 구름 한점 안스럽게 나를 어루만집니다. 


 생존의 터널로 이어지는 함성들, 태초에 아담과 이브를 원망하던 생존의 첫발, 그 후손들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습니다. 걸어가는 걸음걸음 낯선 고장의 눈물을 맛보고 얄궂은 길목에서 희로애락의 인생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막걸리 한 병들고 장미꽃 한 다발 안고 못 잊을 사람을 찾아갈 수 있는 가을 하늘이 있기에 사람과 사람들은 만나면서 살아가며 웃고 울고 있나 봅니다. 


그 길이 증오의 길이든 저주의 길이든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설사 나와 뜻이 같지않다고 해도 미움을 털어버리면 아름다움만 있을 것입니다. 
생존이 어렵다 해도 생각이 다르다 해도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을 수양을 쌓을 수 있다면 서로가 의지해 살아 왔던 태고적 그 옛날 서로를 아끼는 이웃들이 되어 살아 가고 싶습니다. 


인간이 살아 간다는 것, 살아있다 함이 무엇일까? 선뜻 정의를 내릴 수 있을 듯 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에 나는 답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쌍한 것은 태어났기에 한번은 꼭 죽는다는 운명입니다. 


생자필멸, 회자정리, 공수래공수거… 그런 결론은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항시 서운하게 애타는 심정으로 오늘과 내일의 아비규환 속에 하루를 넘겨야 합니다 


순간을 생각하면 내가 떠날 날, 내가 왔다가 가는 현실과 미래를 생각하면 1분1초라도 헛되게 보내고 싶지 않고 무엇이든 사회를 위하고 남을 위하여 기여하며 살고 싶지만 뜻과 같지 않음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길가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따뜻한 마음으로 따뜻한 사랑을 베풀고 한 사람 한 사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를 심어주고 나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내 가슴에 담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불교의 윤회 교리에 의하면 다음 세상에서 태어나 아무도 모르는 길목에서 우연히 만남이 있을 것을 상상하며 정답고 친절한 마음가짐으로 사람들의 손을 잡고 싶습니다. 


 언제나 왔다가 떠나간 계절이었고 사람들도 왔다가 갔는데 이 가을에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 싶고 조국과 내가 속해있는 사회에 무엇이던 능력껏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죽어야 될 날이 가까워 왔음일까? 단 한 사람이라도 내 주변의 사람들께 섭섭한 감정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아 또 가을인가? 


이방의 들녘 헤이 덩굴을 감싸고 도는 노랑색의 단풍만 보며 뒷뜰에 아름답게 하늘하늘 연약한 몸짓으로 나를 부르던 코스모스가 지난 밤 무서리에 시들어 갑니다. 


 어쩐지 나도 모를 눈물이 흐릅니다. 황혼 길이 겨울을 맞이할 운명의 순간을 그리며 무작정 눈물을 흘려봅니다. 아- 아-- 또 가을이 왔고 떠나가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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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7
톨스토이와 땅과 나(하)

 

 

 

 

(지난 호에 이어)
 그 시절 일류 직장을 팽개치고 미화 200 불 들고 공부 좀더 하겠다고 떠나온 조국, 그 혹독한 고난과 역경과 싸우면서 캐나다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결과는 무엇인가 내 놓을 것 하나 없는 생애다. 머지않아 한 평 남짓한 땅에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이 아닐까 싶다. 


 다시 돌아가서 땅을 보았으니 땅에 대한 투자분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내가 본 이 땅은 산림자원뿐만 아니라 약 10만 평에는 건축용 자재로 필요한 자갈이 수백만 톤 매장되어 있고, 100만 평에는 소 먹이 사료(Hay)를 재배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울창한 산림자원이다. 


쉽게 생각해서 산림자원은 원목으로 채벌하여 팔고, 자갈은 채취하여 밴쿠버나 다른 도시에 건축용 원자재로 팔고, 자작나무는 유럽에서 구하기 어렵다니 유럽에 가구용으로 수출하고, 조국의 가난한 사람들 50여 가구를 모셔와 원예든 채소든 목장이든 맡기면 이 황무지 같은 기름진 땅은 빛을 보리라. 


뿐만 아니라 좁은 땅덩이인 조국의 현실을 본다면 이 200여 만 평이 대한민국의 땅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종착역은 ‘톨스토이’ 같이 한 평 남짓한 땅에 묻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모든 의욕과 욕망은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부서지고 만다.


또한 해놓은 일 하나 없는 나의 삶이 초라해 몸서리를 친다. 내 나이가 50대라면 인생을 걸고 한번 도전하련만 세월의 뒤안길에서 한숨만 나온다. 여기 누가 있어 좀 더 야심 찬 꿈을 꾸는 사람은 없을까. 이 캐나다는 아직도 무한한 기회가 주어진 땅이다.


우리네 인생의 갈 길은 어디일까. 사의 찬미를 부르며 현해탄에 “돈도 사랑도 명예도 다 싫다”며 생을 마친 윤심덕이 떠오른다. 한 평 정도에 묻히는 육신인 것을 알면서 오늘도 어제도 허덕이고 있는 나 자신이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허욕의 야심 때문에 죽어간 ‘바흠’의 생애와 자기의 생애를 참회하고 죽을 것을 예감하며 한 평짜리 땅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종말을 예언한 소설을 세상에 남기고 떠난 톨스토이의 생애를 한번쯤 재조명해 보고 싶다. 


행복이란 구하고 찾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욕망과 야심과 불만을 없애고 겸허한 마음으로 참회하며 절제하는 삶에서 얻어지는 것이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끝으로 톨스토이는 그가 떠날 때까지 참회의 길을 걸으며 살아왔다. 그의 세계 인류를 향한 사랑과 헌신의 빛이 항상 번민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톨스토이는 대문호로 그치지 않고 생애를 통해 반성하고 참회하고 인류를 사랑하며 항시 겸허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음에 머리가 숙여진다. 절제된 삶을 영위하면서도 어느 누구를 탓하지도, 원망치도 않으며 일생을 마친 그의 인격을 흠모하지 않을 자 이세상에 있으랴.


톨스토이의 명복을 빌고 있는 이 나그네 시인이 있음은 톨스토이의 행복이라는 생각을 하며 결론을 맺는다.


 톨스토이는 1910년 10월 31일 가출하여 몇 년을 유랑하다가 ‘야스타포프역’에 하차 역장의 집에서 임종을 했고, 당시 나이는 82세 였다. 2014년 필자가 대문호의 생가를 찾았을 때 ‘야스타포프역’이란 이름은 ‘톨스토이역’으로 개명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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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톨스토이와 땅과 나(중)

 

▲톨스토이

 

 

(지난 호에 이어)
오랜 세월이 지났기에 그 소설 내용을 다 기억하기는 어려우나 내용의 개요는 주인공 ‘바흠’이란 자가 ‘바스카라라’라는 곳에 찾아갔다. 그곳 촌장은 '바흠'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1천 루불만 지불한다면 해가 뜰 때 출발하여 해가 질 때까지 밟고 오는 모든 러시아의 땅을 당신에게 주겠다”는 제의를 한다.


이에 ‘바흠’은 한치의 땅 이라도 더 많이 자기 소유로 만들고자 걷고 또 걸어서 자기가 걸은 땅에 표시를 하고 해가 질 무렵 출발지점에 도착 하지만 지쳐서 피를 토하고 죽게 된다. 이에 촌장의 하인이 ‘바흠’의 머리에서 발끝까지를 정확히 자로 재어서 무덤을 만들어 준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허욕 때문에 제명에 죽지 못한 ‘바흠’이 묻힌 땅의 면적은 불과 한 평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 바흠의 죽음과 그의 생애를 한번쯤 음미함도 뜻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대문호 ‘톨스토이’의 생애를 보면 그는 아내와 60여 년을 호화저택에서 부유하게 살던 것을 청산하고 인생 무상과 허무 속에 자기의 아내에게 간단한 메모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나간다. 


그 메모의 내용은 “우리는 한평생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내가 이렇게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아 오는 동안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고난적인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사치스럽고 호사한 삶을 사죄하기 위한 마음에서 방랑의 길을 떠나련다. 이는 내 생애를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방편으로 생각한다. 나를 이해 해달라”며 집을 나가게 된다. 


그의 아내는 백방으로 남편을 찾았으나 허사였다. 그러나 천신만고의 끈질긴 노력으로 ‘톨스토이’를 찾게 된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그의 아내를 만나게 되자 다시 멀고 먼 길을 향해 떠난다. 결국 톨스토이는 모스코바에서 300 Km 떨어진 그의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생가 뒤뜰 정원에 봉분도 뚜렷하지 않은 무덤에 잠들어 있다.


필자는 2014년 모스코바에 갈 일이 있어 그의 비석도 없는 무덤에 장미꽃 한 송이를 놓고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린 기억이 있다. 이렇게 톨스토이의 생애를 더듬어 보며 인간들의 욕심과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를 생각해 본다.


 결국 종말은 한 평 남짓한 땅에 묻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데 어이 그렇게 많은 것을 갖고자 투쟁을 해야 하나 하는 번뇌가 가슴을 친다.


 여기에 우리 이민사회의 형태는 어떤가. 이 척박한 땅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네 삶이지만 서로 아끼고, 격려하고, 성원하고, 지도하는 사회로 거듭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만 그렇지도 못한 면도 있어 항시 안타까움을 느낀다. 


잘나고 못나고, 가진 것이 많거나 적어도 한 평짜리 땅으로 돌아가는 우리네 운명을 어찌하랴. 2일간 5 스타 호텔 특실에서 VIP 대접을 해주는 친구나 VIP 대접을 받는 나 자신이나 초라하게만 여겨졌다. 


창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값이 비싸다는 중국요리를 이 촌놈에게 대접하는 중국인 친구가 그저 안쓰럽고 마음이 편치 않다. 썰렁한 호텔방에 혼자 누우니 살아온 내 인생 여정을 반추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 적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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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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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1
톨스토이와 땅과 나(상)

 
이 글은 15여 년 전에 쓴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이 글을 공지함은 나름대로 조국의 현실이 암담하다는 생각에서다. 다시 한번 이 글을 많은 분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지정학적인 면에서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나의 조국, 땅 덩이는 좁고 민족의 DNA는 살기 위한 투쟁과 경쟁,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파오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속담의 진실, 끊임 없는 질시와 모함으로 이어져 왔던 생존의 역사, 벼슬아치 들의 끊임 없는 파렴치한 권력욕으로 민초 들은 갈 길을 잃고 살아 왔지 않는가. 나 일찍이 넓은 땅에서 깊은 숨을 토해 내고 살아가고 싶어 먼 나라 이방의 민초로 살아오면서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정의와 진실 정직한 사회가 되기를 기원해 보며 나의 생존의 일 부분을 나열해 본다. 한 마디 더 첨언을 한다면 200불 들고 떠난 조국 그 피눈물 나는 고난과 살아가기 위한 투쟁 속에서도 나 진실로 조국을 원망해 본 적이 없고 우리 민족을 항시 사랑하며 내 능력껏 조국과 동포들에게 바친 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음을 나의 양심을 두고 부끄러움 없이 말을 해 본다. 원망을 했다면 조물 주는 어이하여 우리의 조국은 이 캐나다가 가진 모든 것의 10분의 1 만이라도 더 주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필자 주>

 

 

밴쿠버에 살고 있는 부동산 개발업을 경영하는 중국인 친구에게 전화가 왔었다. 내용인 즉 여의도 땅의 6 배라 할까 200여 만평의 땅을 좋은 가격에 매입할 수 있으니 와서 구경이나 하라는 제안이었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고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2 박 3 일의 일정 계획을 잡고 밴쿠버에 나간 적이 있었다. 


넓고 광활한 이 캐나다 땅 옛날에는 100 만평 이상의 땅을 판매코자 시장에 광고 기사가 나오면 일본 교포들이 무조건 사들였다는 중국인 친구의 말을 들으며 차에 몸을 싣고 밴쿠버에서 장장 6시간을 달려가 땅 구경을 한 적이 있었다.


200여 만평을 14개 필지로 분할을 해놓고 BC주의 젖줄인 FRASER RIVER 에 붙어 있는 무척 기름진 땅이라는 생각을 하며 친구의 SUV에 몸을 싣고 1 시간을 소요하며 땅 구경을 했었다. 


현재 이 땅에는 자작나무와 북극의 소나무를 비롯 울창한 산림이 우거져있어 제지회사에서 1천만 불을 지불하겠다는 오퍼가(Offer)가 있었으나 이 중국인 친구는 1천만 불에는 한이 안 차 1,500만불 이하로는 팔지 않겠다는 욕심 때문에 매매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숨을 쉰다.


하기는 2, 3년 전의 캐나다의 경기는 정말 이러다가 어쩌려나 하는 무서움 마 져 안기며 걷잡을 수 없는 성장을 했기에 부르는 것이 값이었고 Seller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으니 누군들 오늘과 같은 세계 경기의 침체를 예측할 수 있었으랴. 


그 때 제지회사의 오퍼를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지만 이미 기회는 가버렸고 다시 그런 기회를 잡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특히 제지업이 사양길에 있어 어느 누구도 이 산림자원을 사겠다는 오퍼가 없어 땅 주인은 땅을 팔지 못해 숱한 노력을 하다가 나와 같은 민초에게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음을 알았다. 


얼마나 답답하면 나 같은 빈털터리에게 손을 뻗치나 하는 생각을 하니 이 친구의 입장이 안타깝다. 하지만 이 땅은 산업용, 주택용, 상업용, 농업용지 등 다양한 방면으로 활용이 가능하고 필지가 분할되어 나누어서 판매를 하면 좋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실지로 이 땅 곁에는 18홀의 골프 코스가 성업을 하고, 골프 코스 주변에는 한창 주택을 건설하고 있어 시장도 그런대로 좋은 듯 했다.


일본에서 외국에 부동산 투자를 할 때는 땅덩이가 큰 것이 시장에 나오면 일본 정부에서 일본 교포들의 이름으로 무조건 땅을 매입 했었다는 데 지금은 일본도 불황이라 땅을 사들이지 않고 있다는 설명은 이해가 간다.


 땅 구경을 한 그날 저녁 온갖 번뇌 속에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땅을 소유하면 만족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인류의 역사는 땅을 차지 하기 위한 투쟁으로 국가 간에도 끊임없는 영토 전쟁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그 옛날 감동 속에 읽은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 한가”라는 소설 내용이 머리를 스쳐간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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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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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4
제11회 민초해외문학상 심사평

 

 

 

 

민초(民草)는 재캐나다 한인 시인 이유식씨의 아호입니다. 민초는 캐나다에 40년 이상 살면서 두 가지 큰 일을 했습니다. 첫째가 사업가로서의 자리를 잡았고, 두 번째가 자신의 아호를 딴 '민초 해외동포문학상'을 제정하셔서 올해 11번째 시상을 하는 일입니다. 아울러 민초 선생은 시인으로서 7권의 시집과 칼럼집 등 다수의 저서를 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 상의 시상에 있어서 큰 난점은 수상 대상자가 전세계에 퍼져있다는 사실입니다. 작품의 수집과 시상에 세계가 대상입니다. 민초는 이를 위해 묵묵히 현장으로 날아갑니다. 러시아, 유럽, 중국, 몽고를 직접 방문하시고 수상자를 만나고 시상식을 뜻있게 갖기에 방문국 동포님들에게 민족의 정체성 고양과 지속 발전에 기여코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남다른 한국문학 사랑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예선을 거쳐 넘어온 다섯 분의 글을 읽었습니다. 심사의 난점은, 장르가 다른 작품들 중에서 한 작품을 고르는 것이었습니다. 즉 소설, 시, 수필 중에서 당선작 한편을 뽑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니 자연 작품들을 비교하여 선정할 수는 없고,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가지고 비교 우위를 따지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문학작품으로서 완성도를 따질 때 테리사 리씨의 작품이 가장 곰삭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분이 투고한 세 편의 단편소설들은 한결같이 주제와 소재 면에서 심사 숙고한 흔적이 있으며,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로 작품을 이끌고 있습니다.


세 편의 소설 다 주제와 소재 선택에 있어서 좀더 문학적인 구성과 분위기의 효과로 노력 고뇌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끝없이 달리는 기차간, 황량하게 버려진 옛 감옥의 이미지, 대양 속에 버려진 섬의 이미지 등입니다


다만 선자의 요구가 있다면, 작품전체 분위기가 시적, 서정적으로 흘러 소설이 가져야 하는 서술성이 약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소설은 서사문학입니다. 사건 전개의 시적인 묘사로 치중하기보다도 사건 자체의 심화와 절제된 서사문장으로 표현해야지 계속 시적인 영상에 사로잡히다 보면 소설적인 구성과 주제가 흐려지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소설적인 전개를 억제된 시적인 이미지로 풀어가는 필자의 자세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란 시인의 시적 영혼 속에 영근 이미지를 새로운 어떤 시적 공간에 운율적인 문장으로 그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란 결국 시인의 영혼 속에 영근 시적인 이미지와 음률적인 시적 언어의 내밀한 대화입니다.


강 애나씨의 열편의 시는 작품 하나 하나 강렬한 시적인 이미지를 던져줍니다. 그러나 조금 덜 다듬어진 듯한 거침이 느껴집니다. 이런 견지에서 강 애나씨의 시는 서정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더욱 압축되고 이미지화 되었으면 더욱 감동적인 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서정성은 원래 투고된 시 자체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라서 양해할만합니다. 


시인의 영혼 속의 시 세계와 채택된 시어들 사이에는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필연적으로 인간의 감정의 개입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고 시와 소설의 영원하고 근원적인 재료는 상상력으로 요리되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문학이 철학이나 심리학 수기와 다른 가장 근원적인 이유가 바로 감정의 문제 때문이 아닐까요. 상당한 시적인 구축의 노련미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의 물결이 약한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소설과 시가 인간만이 가지는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라면 수필은 인간의 관찰과 연상으로 이어지는 문학장르 입니다. 본심으로 넘어온 세 분의 근 서른 편 가까운 수필들은 단 한편도 특수작이 없는 수준작이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세 분 중에서 관찰의 시야가 가장 넓고 깊은 한나 안씨의 경우, 안타깝게도 컴퓨터의 오작동인지 띄어쓰기가 엉망이라 선자의 의구심을 자아냈습니다. 출품작끼리 경쟁하므로 작은 하자가 결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유금란씨의 능란한 필치는 어떤 기성의 수필가들을 능가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찰도 예리하고 표현도 능숙합니다.


장석재씨의 수필들은 수필의 본령인 관찰과 연상에만 치우치지 않고 상당히 철학성이 가미되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수필을 읽는 것이 아니라 철학에세이를 읽는 기분입니다.


수필가 세 분의 작품들이 이렇게 우수한 문학적 수준을 보여주었다고 하더라도 소설과 시와 맞붙어 우월을 가린다면 수필이 불리할 수 있습니다. 시와 소설은 인간만이 가지는 문학적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훨씬 더 고차원적인 문학적 미학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 작품을 통독한 우리들은 올해 유난히도 투고 작품들의 문학적인 수준이 높은데 놀랐습니다. 다들 상당한 문학적인 수련을 쌓은 분들입니다. 소설 분야에서 테리사 리씨를 수상자로 선정하는데 심사위원들의 상당한 진통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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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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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3
제 11회 민초해외문학상 수상 소감-테리사 리(호주 뉴캐슬)

테리사 리

 

 


분주하고 화려한 세상에서 생각해 본다면, 글을 쓰며 산다는 것은 조금 억울한 일입니다. 특히 소설을 쓴다는 것은 한참 억울한 일입니다. 


 뉴캐슬에는 낭만이 넘치는 해변도 있고 하얀 모래사장과 광활한 바다도 있습니다. 이따금 나는 바다로 달려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인생의 고독을 느낍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고독하게 글을 씁니다. 


 고독해서 글을 쓰고 글을 쓰면 더욱 고독해집니다. 삶을 충만하게 만들고 내 영혼을 매혹시키는 고독한 글쓰기! 호주의 뉴캐슬엔 고독이 있습니다. 


 나는 종종 뉴캐슬의 하늘과 가장 가까운 대지에 올라갑니다. 그곳에서 낯선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저 멀리서 가물거리는 몽상을 빌어서 글을 씁니다. 글쓰기란 일종의 영혼과의 거래가 아닐까요? 고독한 영혼은 내가 살아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고독의 씨앗을 깨고 무수히 많은 말이 태어납니다. 내가 쓴 글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의 탄생입니다. 말의 생명이 소란스러워질 때 저는 행복해집니다. 


 민초해외문학상에 참여하고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사실 민초해외문학상은 반 수면상태에 잠겨 있었던 제 영혼을 아침처럼 깨어 일어나게 했습니다. 영혼이 깨어난 것은 상을 받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은 못 받아도 괜찮아! 그 대신 작품을 완성하고 또 새로운 글을 더 많이 쓸 수 있는 동기가 됐잖아. 감사할 일이지!” 혼자 소리 내어 말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민초해외문학상에 자각을 받고 감사했습니다. 그 계기로 꾸준하게 글을 쓰고 고치며 소설집 발간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눈곱을 떼어 가며 마지막 퇴고를 마치던 날이었습니다. 해뜨기 전에 글을 출판사에 보내려고 서둘러 인터넷을 켰을 때 수상 소식이 와 있었다면 얼마나 태곳적이며 신화적인 일일까요? 그것은 「놀람 교향곡」과 같았습니다. 카를 융의 심리언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동시성(Synchronicity)이 발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손에 한 마리씩, 두 마리 토끼의 귀를 움켜잡고 춤을 추었습니다. 황홀했습니다. 


 열심히 소설을 써야겠다고 각오를 하던 차에 상을 받게 되어서 앞으로 좋은 소설을 쓰게 되리라 예감합니다. 민초해외문학상의 지향이 저에게는 크게 작용한 셈입니다. 


 어떤 시인은 술과 시가 동의어라고 말을 합니다. 나에게 문학과 시드니는 동의어 입니다. 시드니 문우들과 불콰하게 정이 들었습니다. 뉴캐슬에서 기차를 타고 한 달에 한번씩 7개의 터널을 통과해서 가게 되는 시드니행과 기쁨은 나에게 동의어입니다. 


올해로 만 6년, 문학을 통해 만난 문우들이 일깨워준 무수한 깨우침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문학이 좋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좋습니다. 2013년 재외동포문학 소설 대상을 받았고, 또 소설집 『비단밴 쿠니야의 비밀』 을 발간했고, 이번엔 민초해외문학상을 받게 되어 기쁘지만 한 편 사랑하는 시드니 문우들께 송구할 뿐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상을 받게 되어서 부끄럽습니다. 


 이제 굉장히 중요한 인사를 드려야 할 차례입니다. 민초 이유식선생님의 문학사랑에 존경을 표합니다. 한민족 문학의 진흥을 위해 큰마음을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귀한 상을 받게 되어서 큰 영광입니다. 민초선생님의 뜻이 우리 해외동포들에게 자신감을 일깨워주고, 우리 고유의 언어로 문화 활동을 해서 앞으로 2세와, 3세들에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겨주게 되리라 믿습니다. 


심사위원장 정소성 박사님, 조성국 시인님, 배용파 시인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작품을 넘치는 격려와 평을 해주시고 또 선정해 주심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창작을 해서 상에 부응하기로 약속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드니에서 열리게 될 수상식이 벌써 가슴 설레며 기다려집니다. 시드니 문우님과 더불어 아름답고 뜻 깊은 잔치자리가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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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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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6
이슬꽃 낙원

 
이슬꽃 낙원 
 

 

 

떠나왔던 생존은 다시 찾을 수 없다
흘러간 연륜의 쳇바퀴 속
지금도 살아온 날의 뒤안길은 가슴을 저미고
언제나 태양은 떴다가 사라지지만
그리움을 주면 상처만 남아 아롱지고
시를 쓰려하면 나의 뇌리는 파도로 출렁인다

 

떠나는 날까지 쉼 없이 팔닥이는 맥박
사랑하는 사람도 때로는 잊음이 좋다

 

밤이 낮보다 좋은 것은 혼자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슬꽃 솟아나는 폴잎도
바람같이 사라져가는 저 언덕
그리움도 사랑도 이슬꽃 사라지면 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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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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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한강

 

한강 

 

 


오! 恨에 강 恨江이여

비무장 지대의 철조망이여 나의 눈물이여

어느 누가 나 같이 너를 사랑했더냐

삼천리 금수강산이 적막 속에 잠들고

여명이 밝아 새벽종이 울릴 때

흘러 흘러가는 인파를 바라보며

나는 홀로 내 가슴에 너의 흐름을 담아내었다

행상을 떠나는 봇짐에도

북녘동포들의 배고픔의 절규를 보며

생존에 빛 바랜 길 떠나왔다

영원히 너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서

나는 너의 곁을 떠나왔다

 


오! 한강이여

나의 그리움을 너는 알고 있느냐

내 심장의 피를 강물에 뿌리며

이방의 뒷골목에서 한숨으로 지샌 밤들을

이방길에 뿌려지는 내 민족의 아픔을

인내의 한계는 끝 없는 강물이었고

파도처럼 울어주던 여명의 찬바람을

내 고난의 슬픔도

나보다 더 아픈 고난의 사람들을 보며

나는 울고 울었노라

저녁 황혼의 한강변

그 조국의 강변에서 너를 그리며

 


(주: 한강의 漢字는 한수 한자가 아니고 恨할 한자임에 이 詩에 메타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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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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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0
인생길 산책

인생길 산책
 

 


사람

 

사람들 앞에 섰다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고자 했더니
멀리서 보였다

 

내 자신을 모르는 페르소나
모든 것 잊으려 했다 
나를
너를

 

인생사를 하늘 위에 올려 보았다
연꽃처럼 피어난 뭉게구름이다
카멜리온 꽃의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진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지열이 시원하다고 미소 짓는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 어딘가에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간다

 

가변의 진리의 별빛 속
사람 사람
아 아 사람들이여


(*페르소나: 진실한 자아를 대신하는 사회적 심리적 자아발견)

 

 


 제가 좋아하는 이곳 대학의 젊은 교수에게 시 한편을 읽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인생에는 후배이지만 학문에는 나보다 선배입니다. 상기 시에 대한 이 교수의 감상입니다. 시평이 좋아 같이 음미코자 전제합니다.

 


김창한 박사


 민초 선생님의 시적 은유와 깊이를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의 제목은 ‘사람’이지만, 사실 내용은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냥 무시간적 무공간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있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시공을 사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의 개별적 존재는 그가 그동안 산 삶의 연륜과 궤적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또는 대화를 통해 ‘내’가 형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타자 없이 나를 말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 1연에서 “사람들 앞에 섰다”라고 시의 시작을 알립니다. 이런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면 ‘사람’이라는 추상적 제목 아래 시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할 수 없었겠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라는 것이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사람으로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예상을 깨고 다르게 다가오는 그 낯섦에 시적 화자는 당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깝다고 생각했더니 사실 멀고 멀다고 생각한 사람이 사실은 예기치 않게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바로 그러한 물음을 묻는 것이 제 2연입니다.


 ‘페르소나’라는 말은 배우의 역할이나 가면을 뜻하는데 깊은 자아의식 또는 무의식으로의 ‘나’(I)가 아니라 타자에게 드러난 ‘나’(me)입니다. 영어 식으로 보면, 나의 페르소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며, 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대상으로서의 나(me 나를, 나에게), 즉 내 스스로 생각하는 ‘나’와 타자가 나를 보는 ‘나’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엇박자가 일어나 소통이 안되거나 오해되거나 과소 되거나 과대되는 것입니다.


결국 아직 사회에 표현되지 않은 깊은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me)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내가 타자를 보는 ‘너’ 역시 타자의 자아의식이나 무의식이 아니라 타자의 페르소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타자에게 드러난 페르소나로서의 나는 이미 타자에게 각인된 나이기 때문에 잊을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습니다. 


이는 마치 나에게 드러난 타자의 페르소나와 그 이미지가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타자가 자기의 페르소나를 나에게서 지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페르소나로 형성된 타자와의 관계는 가면과 가면이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두 가면끼리의 만남은 뭉게구름처럼 모였다가도 흩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이고, 왜곡되어 멀리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카멜리온 꽃의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진다”라고 제 3연에서 허무함을 내뱉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꼭 허무한 것은 아닙니다. 은유란 다름이 만나 텅 빈 다름 속에서도 묘한 같음을 일으키듯이 우리의 인생도 은유적으로 새로운 관계로 다시 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결과적으로 뭉친 뭉게구름은 영원할 수 없고 흩어졌다가 또 흩어지고 또 모이는 관계입니다. 


내 인생의 벗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원수 같은 존재가 벗이 되듯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새로운 은유형성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유에 절대성을 부여하면 그것은 은유로서의 기능을 상실해서 상투어가 되듯이 우리의 관계는 불변이 아니라 뭉쳤다고 흩어지고 또 새롭게 뭉쳐집니다. 


그래서 내 마음은 호수며, 산이며, 구름이며, 바람이며, 바다입니다. 내 마음이 호수일 때와 내 마음이 바다일 때가 다르듯이 사람들의 관계도 절대적으로 고정된 신뢰와 배신이 아니라 일시적인 흩어짐과 모임의 반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유는 현세의 문제이지 내세나 영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제 4연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지열이 시원하다고 미소 짓는다”를 저는 이런 맥락에서 해석합니다. 결국 그 뭉게구름 허망하게 산란한 뭉게구름의 열정, 즉 사랑과 배반의 열기도 식어 다시 빗방울로 떨어지고 다시 지열을 받아 하늘로 올라 뭉게구름이 될 것입니다. 이런 윤회적 반복의 노래가 이 4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시적 화자는 그러한 사랑과 배반의 장미를 넘어 새로움을 꿈꾸는 것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은유가 만들어 내는 예상치 않은 결과에 연연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관조의 단계에 들어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은유는 열정을 주지만 안식을 주지는 못합니다. 은유가 확장되어 이야기로 발전되면 우리는 그러한 은유가 만들어 놓는 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초월의 염원은 유한을 넘는 저편, 차안이 아니라 피안을 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연은 그런 초월을 향한 염원 속에서도 여전히 시적 화자는 현실적 존재이며 그런 자각 속에서 다시 관계라는 은유를 되새기는 아픔을 노래합니다. 지적 은유가 수많은 단어들의 조합 속에서 언어와 언어 사이가 필연적인 조합이 되듯이, 사람들의 관계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사람”의 반복은 아직도 은유적 성립과 해체가 연속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즉 유한한 존재, 다시 말해 문화적으로, 시공으로 조건 지어진 인간이 갖는 한계, 거기에서 오는 좌절 그리고 혹시 모를 예기치 않은 필연적 조우에 미련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초월, 피안, 영원을 꿈꾸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 땅 위에 발을 내딛고 사는 아주 인간적인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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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lee
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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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6
여로

 

여로 

 

 

아득한 먼 곳에서
휘파람 불며 오는 사나이
끝없는 캐나다 허허벌판
여명은 쭉지 빠진 날개를 펴고
생존이란 짐짝들이
물구나무를 선 로키산 정상
동굴속에서 잠든 곰들의 꿈들이 
자맥질하는 기러기 떼
북으로 날았다가 
남으로 날았다가
인생행로를
바꾸어 버린 저 번뇌
마음은 대망으로 불타고
길은 방랑과 허무의 터널
갈대밭의 환호
"안드리아 보찰리"의
눈없는 눈으로
밝아오는 아득한 미로의 여로
허수아비들의 노랫소리 들린다

 


Journey

 

A man whistling is coming from distance
Over the vast empty Canadian Plains
The daybreak spreads its disjointed wings.
And upside- down atop the Rocky Mountains is the baggage
Called "Existence"
The bears hibernating in the cave
Dream of a flock of geese diving
As they fly north and south
With evil passion the course of my life has changed
And with ambition my heart burns
The way leads through the tunnel of death
To the field of reeds and joy
With Andrea Bocelli's eye that has no joy
The journey of my heart is dawning
And the bell of wandering is tolling

 

 

 

 

*시작의 산실: 지난 7월 24일부터 27일까지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국제시인협회 22회 컨벤션이 개최되었습니다. 이번 컨벤션에서 제가 만난 각국의 시인들은 나이지리아, 카메룬, 콩코, 사우스 아프리카, 호주, 인도, 레바논, 아르헨티나, 자메이카, 브라질, 칠레 등 세계 1,200여명의 시인들이 모여 작품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저는 2006년 이곳 시인 ‘Roger Rakman’ 님의 추천으로 작품을 보냈으며, 2006년에는 우수시인으로 선정되어 명시 합편 집의 첫 페이지에 출간된 바 있고, 2007년에는 편집인 선정 상을 수상한 바 있어 이번 행사에는 VIP로 초대받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시 낭송 경연대회에서는 5명의 수상자를 뽑았고, 일등 상금은 3만 불이었으며 전부 미국 작가들이 수상을 했습니다. 작품도 좋았지만 성조기 깃발이 돋보이는 듯했습니다.


미국에서 많은 작가들이 참여했지만 50여년 작품활동을 하며 각종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한 쟁쟁한 작가들이 수없이 많았고, 노부부가 휠체어를 타고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 청중 앞에서 자기의 작품을 발표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자기들만의 삶에 얼마나 충실하며 즐거움을 찾고 있는지 존경스러웠습니다


 그 많은 세계의 쟁쟁한 작가들 중 한국인은 저 하나뿐이었기에 우리가 세계화를 한다며 풍악을 친지도 오래이건만 왜 우리 민족은 당당히 이런 문화행사에 참여치 못하나 하는 안타까움도 있었습니다. 섭씨 43도의 더위에 한국인의 긍지를 드높이고자 모시적삼과 바지를 입고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시 낭송 경쟁에 임했으나 작품이 좋지 않음도 통감했고, 엉터리 영어로 청중 앞에선 제가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그러나 우수 시인이란 트로피를 받을 때는 미화 200불 들고 공부 좀 더 하겠다고 태평양을 건널 때의 심정. 이민초기의 피눈물나는 이방인의 생활,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며 살아와 오늘 이 자리에 선 자신의 분수를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이번 행사에는 캐나다의 작가들이 겨우 4명 정도 참여했으니 이 나라도 문화 예술은 황무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자님들의 격려와 지도를 갈망하며 아직 이 작품을 지상에 발표하지 않았기에 퇴고의 작품을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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