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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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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9
페이지 터너(page-turner)

-겸손한 세계적 피아니스트 서이삭 씨
 

 “이 후배님, 좀 도와주세요. 사정이 급합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꽤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일이신데요?” 나는 긴장해서 물었다. “내일 저녁이 공연인데, 피아노 연주자를 도와줄 ‘페이지 터너’를 급히 구해야겠습니다…”


 지난 12일 저녁 토론토 아트센터에서 열린 라메르에릴(La Mer et L'Ile 바다와 섬)의 토론토 공연을 앞두고 이함준 이사장이 걸어온 전화였다. 사정인 즉, 공연시 피아노 연주자를 위해 악보를 넘겨줄 사람을 구해달라고 지인을 통해 연락했더니 한 학생을 소개했는데, 막상 리허설을 해보니 도저히 연주자를 도와줄 만한 실력이나 경험이 부족해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주변에 피아노를 잘 하는 사람 좀 없느냐고 애타게 찾는 것이었다.


 외교관 출신인 이 이사장은 나의 대학 선배라 이미 교신을 통해 알고 있던 터였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이번 피아노 5중주는 무척 난해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40여분) 곡이라 피아노 실력이 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통화를 하면서 순간적으로 그를 떠올렸다. 그라면 어떤 곡도 소화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가 남의 연주회에서 악보나 넘겨주는 일을 수락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우선 시도는 해보자는 생각에 일단 이사장과 통화를 마쳤다.


 그러고나서 밤 늦은 시간이지만 사정이 급한만큼 즉각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후사정을 설명한 후 반신반의 하며 “혹시 그런 일 좀 맡아 줄 수 있겠어요?” 했더니 그는 의외로 선선히 대답했다. “아, 그럼요. 사정이 그러신데 제가 도움이 된다면 해야죠.”… 일이 이렇게 순탄하게 풀리다니!                             


 페이지터너(page-turner)는 음악회에서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할 때 흐름이 끊어지는 것을 막고 연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대신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악보를 넘겨주기만 하는게 아니라, 곡(曲) 자체를 잘 이해하고 읽으면서 연주자와 호흡을 맞춰야 하므로 중요한 음악회일수록 초보자나 비전문인은 할 수가 없는 일이다.


 페이지 터너의 역할이 이처럼 중요하긴 하지만 주연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조연이다. 그래서 그같은 음악의 대가(大家)에게 그런 조연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실례는 아닌지 무척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흔쾌히 보조역할을 수락했다. 그가 바로 세계적 피아니스트 서이삭 씨이다.  


 서이삭(Isaac, Yisak Seo.35)이 누구인가. 토론토한인사회에도 잘 알려져 있는 그는 눈부신 프로필과 수상경력만 보아도 금방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로열컨서버토리 출신인 그는 몬트리올 맥길대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프랑스 파리와 벨기에, 이탈리아 등에서 활동했다. 특히 음악의 메카 줄리어드 음대에서 학부 및 석사 과정을 마쳤다.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화려한 수상 경력을 지닌 그는 연간 국제연주 일정이 빡빡하다. 다시 말해 남의 연주에서 악보나 넘겨줄 기수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그 역할을 수락했다.


 공연 당일, 우리 가족은 2부 순서에서 바르토크의 피아노 5중주가 연주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다른 연주자들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분들께는 미안하지만 모든 시선이 오로지 서이삭 씨에게만 집중됐다. 1시간 일찍 와서 악보를 훑어보긴 했다지만 과연 실수없이 잘해내야 할텐데… 마치 우리가 페이지를 넘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매우 침착하고 진지한 자세로 의자에서 앉았다 일어서기를 수십차례 반복하며 악보를 빈틈없이 넘겼다. 나는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곡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하면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40여분에 걸친 긴 연주가 끝나고 객석의 박수소리가 터져나오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특히 서이삭 씨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가 주인공인 것처럼. 그런데 아쉽게도 모든 출연자들이 나와 인사를 하는데 서씨는 조용히 무대 뒷편으로 사라져갔다. 그럴 때 누가 좀 함께 그의 손을 잡고 인사를 하게 하면 좋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출연자 중에서 비록 조연이긴 하지만 유일한 토론토 한인이 아닌가.        


 나는 이날 서이삭씨를 다시 보았다.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직접 곡을 연주하는 것과 남을 위해 악보를 넘겨주는 것은 다른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뒷일을 기꺼이 맡았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수년 전 그의 부모와 함께 한 성인장애인공동체 행사장에서였다. 그의 어머니 역시 피아니스트인데 다리가 불편해 목발에 의지하고 있다. 나는 그때 서씨가 뛰어난 음악인임에도 매우 겸손하고 상냥해 금방 친해졌고, 그후 종종 그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최근에는 토론토의 어느 의사 댁으로 음악 애호가들을 초청해 피아노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기품이 묻어나는 고풍스런 저택에서 진지한 모습으로 연주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한 감동과 인간미를 느꼈다.     


 서이삭씨의 인생 모토(motto)는 ‘My life is a Music’이다. 즉, 음악 자체가 그의 인생이다. 이같은 음악 거장을 알고 지낸다는 사실이 나는 그저 행복할 뿐이다.


0…한편, 이번 라메르에릴의 토론토 공연은 아쉬운 점도 많았다. 우선 외형적인 면에서, 홍보가 절대 부족했고 토론토총영사관의 비협조, 티켓 발매 및 배분, 한국의 자연과 문화 역사를 알린다는 주최측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독도에 대한 음악은 단 한곡에 불과했고, 독도에 관한 영상이나 배너 등도 전무해서 단순한 음악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또한 티켓에 좌석번호를 써놓고선 막판에 아무 자리에나 앉도록(general admission) 바꾸어 혼선을 빚고 공연의 품격도 떨어트리고 말았다. 특히 한국의 문화를 알린다면서 정작 외국인의 모습은 안보여 한인들만의 잔치가 되고 말았다. 세련되지 못한 이런 처사들은 앞으로 개선이 돼야 할 것이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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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6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신영복 교수의 ‘처음처럼’) 

 

 

 


 ‘처음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다. 한국에서 같은 이름의 소주가 출시된 게 2006년 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 교수(2016년 1월 작고)의 시 제목과 글씨가 로고로 사용됐다. 한국사회의 대표적 지성 중 한분이신 신 교수가 어떻게 소주 이름에 자신의 글씨를 쓰도록 허용했는지 처음엔 의아했다. 당시 소주회사 관계자도 "신 교수님이 존경받는 학자이신데, 과연 술 이름에 자신의 글을 사용하도록 허용할지 확신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런 제의를 들은 신 교수는 의외로 흔쾌히 '처음처럼'의 문구와 글씨체 사용을 허락했다. 그는 "서민들이 즐기는 대중적 술인 소주에 내 글이 들어간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허락한 것이다. 이에 따라 마침내 신 교수가 쓴 '처음처럼'이 그의 저서 '감옥으로부터…' 속 새 그림과 함께 소주병에 찍혀 세상에 나왔다.


 신 교수는 저작권료도 받지 않았다. 소주회사가 여러 차례 지불을 시도했으나 "나는 돈이 필요치 않다"며 사양했고, 결국 회사는 저작권료 대신 신 교수가 몸 담고 있는 대학교에 1억 원을 장학금 형식으로 기부했다. 


 갓 출시된 소주 '처음처럼'의 인기는 큰 돌풍을 일으켰고 그 덕분에 이 소주는 시장점유율이 껑충 뛰었다. 회사 관계자는 "’처음처럼’이 이처럼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것은  '처음처럼'에 담긴 교수님의 깊은 가르침과 친근한 이미지 등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0…‘처음처럼’ 소주가 내 눈에 띈 것은 수년 전 토론토의 어느 한식당에서였다. 벽에 예쁜 여자탤런트 사진과 함께 붙어있는 글귀를 보니 무척 반가웠다. 나는 그 후로 소주를 시킬 때면 으레 ‘처음처럼’만 찾곤 했다. 지금도 이 글씨를 볼 때마다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한때 이 글씨가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 한번은 어느 경찰서장이 신 교수의 서예작품 ‘처음처럼’을 서각(書刻, 글씨를 나무에 새기는 것)으로 제작해 관할 파출소 등에 내걸 계획이었으나 돌연 취소됐다. 이 작품이 과거 시국사건에 관련된 인사의 것이라는 이유때문이었다. 당초 그 서장은 "초심을 잃지 말고 경찰의 본분을 지키자"는 의미로 신 교수의 허락을 받아 작업을 추진했다. ‘처음처럼’ 제목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으로 시작되는 시 구절이 새겨졌으며 미술에 조예 있는 한 경찰간부가 제작을 맡았다. 


 그러나 경찰은 내부검토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의 작품을 경찰관서에 게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 계획을 취소했다. 신 교수는 이른바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형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한 뒤 출소한 경력이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은 “과거 간첩사건 연루자가 썼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체성이 훼손된다”는 보수단체의 민원을 이유로 신 교수가 쓴 정문 현판을 교체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정부의 편협한 사고를 질타하는 비판여론이 이어졌다. 


 ‘처음처럼’은 문장과 서예가 뛰어난 신 교수가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민체’ 또는 ‘유배체’로 불리는 개성 강한 서체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격조높은 서예작품마저 순수하게 받아들일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0…’처음처럼’은 곧 초심(初心)을 유지하자는 다짐이다. 매사를 처음의 자세로 대하고 겸허하게 살아간다면 이 세상엔 욕심을 내거나 사람 간에 서로 다투고 미워할 일이 없을 것이다. 부부가 처음 만나 맺은 사랑의 맹약을 잊지 않는다면 평생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을 터이다. 첫 직장에 출근할 때의 철석같은 다짐과 각오만 끝까지 간직한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와의 우정도 처음 만났을 때의 굳은 결의만 유지된다면 도중에 갈라서는 일이 없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모든 게 생각과 같지 않게 뒤틀려 보이는 것은 처음의 다짐과 각오를 잊어버린 채 너무 큰 기대치에 목을 매기 때문이다. 이민생활에서도 가장 중요한 마음자세가 바로 이 ‘처음처럼’이 아닌가 한다. 아무리 험한 일이 닥치더라도 꿋꿋하게 견뎌 낼 것이라며 이민봇짐을 쌀 때의 각오만 끝까지 간직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하거나 낙담할 일이 없을 터이다. 


 그런데 ‘처음처럼’의 자세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나만 해도 이민 초기의 소박했던 다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든 것이 성에 안차고 불만투성이다. 이만하면 그런대로 만족하며 살아갈 법도 하건만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고 마음이 늘 허기져 있다.    


 ‘처음처럼’ 의 참뜻만 간직하며 산다면 세상은 축복으로 가득할 것이다. 현실이 고달프다고 생각되면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딜 때의 결심으로 돌아가 이 말을 되새기자. 세상이 훨씬 여유있게 보이지 않을까. 신영복 교수 말대로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0…아침저녁으로 가을 바람이 스산하다. 인간사 아무리 분망해도 때가 되면 찾아오는 대자연의 섭리는 거스를 수가 없다. 그러니 범사에 순응하며 겸허한 자세로 살자. 처음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매사에 감사하며 살아갈 일이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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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대한민국 특권층-그나마 조국(曺國)은 낫다

 

 

 

 과거 지방출신 청년(대학생) 중에는 한두번쯤 고시(考試)를 시도해본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한 계층이 한국사회에서 출세하는 가장 빠른 길은 바로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나도 한때 고시준비를 한답시고 충남 예산의 수덕사에 들어가 여름 한철을 지낸 적이 있다. 그땐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절간을 찾는 것이 무슨 유행 같았다. 


 그러나 70년대 말 당시는 유신정권이 막바지를 향해 치달을 때라 도서관이나 절간에 틀어박혀 고시공부나 하면 최루탄에 눈물 흘리는 친구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그래서 본인도 책을 내던지고 거리로 나서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나의 인생길이 뒤틀리긴 했으나 젊은 시절 그런 방황을 후회한 적은 없다.  


고교나 대학 동창생 중 고시를 패스한 친구들은 한창 잘 나가고 있었다. 일반 기업체에서 직장생활 하는 친구들이 언제 잘릴지 몰라 불안해하는 반면, 공직에 있는 친구들은 특별한 잘못만 저지르지 않으면 평생 자리가 보장되니 얼마나 안정된 직장인가. 이들이야말로 ‘개천에서 난 용(龍)’들로 불리웠다.   


 고시 합격생들에겐 혼담(婚談)도 줄을 이었다. 고시출신 사위를 얻으려면 아파트와 자동차, (법률)사무실 등 열쇠 3개가 필요하다는 말까지 돌았다. 그러나 이런 마력(魔力)때문에 고시에 매달려 아까운 청춘을 허비하고, 실패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사례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오로지 고시에만 매달려 시험에 패스한 공직자들이 사회적 모순과 소외계층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하고 엘리트 의식만 충천하다보니 국가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도 많았다. 


 개중엔 보신(保身)주의에 빠져 스스로의 틀 안에 안주하고 끼리끼리 파벌을 만들어 주요 직책을 돌아가며 장악하는 병폐마저 생겨났다. 사회 특권층으로 부상한 이들은 어렵게 걸어온 시절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서민들 애환은 외면한 채 권력과 치부(致富)에 맛을 들여 부패한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0…고시 출신과 더불어 한국의 특권층으로 불리는 계층이 바로 대학교수의 세계다. 각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배경으로 한국사회를 장악한 이들은 탄탄한 이론과 정.관계 진출을 통해 나라의 요소요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조국(曺國.54)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경우를 보더라도 대학교수의 위세가 어느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그것이 선망의 대상인 일류대학일 때는 더욱 그렇다. 서울 법대 교수 정도라면 한국의 특권층으로 불리워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조 후보자가 사방에서 공격 당하고 사퇴여론이 비등하는 것은 바로 특권층 신분을 이용해 딸의 특혜.부정입학을 돕고, 재산도 불렸다는 의혹 때문이다. 수많은 흙수저들이 분기탱천(憤氣?天) 하는 것은 비뚤어진 특권층에 대한 분노와 반발인 셈이다.      


 그런데! 조후보자를 둘러싼 전쟁판 같은 현실을 보면서 한가지 궁금한 것은 현역 검.판사나 유력 정치인도 아닌 학자의 위세가 과연 실제로 그렇게 센 것인가 하는 점이다.

특히 조후보자의 딸이 외고와 대학 특혜.부정입학 의혹을 받고 있는 시점은 조후보자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들어오기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학자가 무슨 압력을 어떻게 행사해서 자격미달인 딸을 부정으로 합격시켰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간다. 


 이와 관련해 온갖 악의적인 소문이 돌고 있으나 실제 드러나는 검증 결과는 대부분 허위임이 밝혀지고 있다. 즉, 외고와 대학의 전반적인 입학 과정에 불법이라고 단정지을만한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조후보자와 딸이 금수저라는 이유만으로 사정없이 몰아가 마녀사냥 식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여기엔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이 합작해 무조건 조국 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전혀 근거가 없는 일도 몰아부치면 사실이 되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0…우종학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조후보자 사퇴를 요구하는 서울대 총학생회 입장문을 언급하며 "이 입장문은 C+(학점)이다. 사퇴를 주장하지만, 사퇴해야 하는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가장 큰 논리적 약점은 (조후보자) 의혹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사퇴를 요구했다는 점이다. 의혹이 많으면 진상을 밝히라고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부모가 인맥과 정보력, 재력을 동원해 수년간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하나하나 파헤쳐진다면 각종 의혹에서 벗어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서울대학생들이라면 자기 실력으로 서울대에 왔다는 떳떳함보다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기회를 내가 대신 받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겸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당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위기에 처했던 후보자 청문회가 겨우 열리긴 했다. 그러나 제기된 문제 중 후보자가 심각한 도덕적 비난을 받거나 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없다. 청문회 과정에서 후보자가 책임져야 할 일이 드러나면 자진사퇴 하면 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뒷전이고 20대 딸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희한한 청문회가 되고 말았다.  


 야당의 주장은 문 대통령을 잡기 위해 조국을 때리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보수언론들은 연일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내며 조국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검증과정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사실처럼 굳어지고 가족들 신상이 공개되어 여론재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말 왜들 이러는가. 조국(曺國)을 쓰러트려 조국(祖國)을 망하게 하자는 건가. 조국 때리기에 앞장서는 야당과 언론은 냉정히 돌아보라. 너희들은 얼마나 떳떳한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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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결대위’를 아십니까-이민자녀들 결혼대책을

  

 



 두 달 전, 큰딸이 결혼할 때 일이다. 부모측 하객 초청자는 우리 아이를 잘 아는 분들만 모셨는데, 당시 참석해주신 분들 중 절반 정도는 결혼 적령기(適齡期)를 훌쩍 넘긴 자녀를 둔 부모들이셨다. 그 분들은 우리 딸의 결혼식을 지켜보면서 아마 속으로 꽤 부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 40이 가깝거나 이미 넘어선 자식을 둔 부모로서 속이 많이 타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들께는 괜히 미안하고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다. 자식들이 나이가 차면 어서 빨리 제 짝을 찾아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주는 것이 효도일 터인데, 요즘 세대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자녀 나이가 서른을 넘어 마흔이 가까워도, 또는 그 이상이 돼도 도무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녀들이 학력이 모자라거나 직장이 없어서, 또는 인물이 못 나서도 아니다. 번듯한 외모에, 직장에, 스펙에… 모자랄 게 별로 없는데 짝 맺는 일은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때 결혼을 해준 큰딸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0…1980년대 한국에서는 장가 못간 농촌총각들이 잇따라 자살하면서 농촌총각 결혼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심지어 여의도에서 ‘총각귀신 위로제’를 지낼 정도였다. 이처럼 농촌총각 결혼대책이 절박한 상황에서 1989년 이른바 ‘농촌총각 결혼대책위원회’(결대위)라는 단체가 결성됐다. 위원장은 그 역시 39살의 노총각이었던 강기갑씨가 맡았다. 그는 첫 쌍의 결혼이 성사되기 전에는 수염과 머리도 깎지 않겠다는 각오로 동분서주했고, 그 덕에 전국의 120쌍이 결혼에 성공했다. 


 강기갑씨 역시 ‘결대위’에서 만난 열세 살 아래의 여성과 결혼하게 됐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들 부부는 피임과 낙태를 반대해 자녀를 4명이나 갖게 된다. 농민운동을 이끌었던 강씨는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자녀들의 결혼을 억지로 시킬 수도 없지만, 선남선녀 결혼대책운동이 예전의 에피소드만은 아닌 듯하다. 한인이민사회에서 자녀들의 결혼문제가 주요 관심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다 보면 과년(過年)한 자식을 둔 부모들의 걱정이 태산이다. 자식이 어쩌다 혼기(婚期)를 훌쩍 넘겨 며느리나 사윗감 구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고 하소연들을 하신다. 그러면서 누구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시켜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이민 와서 갖은 고생 끝에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니 이번엔 자식 혼사가 큰 걱정거리로 등장한 것이다. 특히 딸자식을 둔 부모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 부부는 그런 하소연들을 많이 듣다 보니 어느땐 아예 수첩에다 처녀총각 신상명세를 적어 갖고 다니며 혼사를 주선해보려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잘 나가는 사업가 노총각과 똑똑하고 예쁜 변호사 여성을 맺어주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사 직전에 무산돼 기대했던 양복 한벌도 날아간 적이 있다.         


0…자녀의 결혼은 타국생활이라는 긴 고행에서 부모로서의 의무를 마감하는 중요한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서양 부모들은 자녀가 성인(18세)이 될 때까지만 보살펴주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한국 부모들은 다르다. 자식이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잡는 것은 물론, 결혼해서 가정까지 꾸리는 것을 눈으로 보아야 비로소 의무감에서 해방된다. 결혼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막중한 대사인데 모든 일이 다 잘 풀린들 행복한 가정 만들기에 실패하면 무슨 소용인가.


 한편, 좁은 이민사회에서 같은 민족끼리 짝을 맺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광역토론토라고 해봤자 인구가 7만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4인 가족으로 2만여 가구에 불과하다. 여기서 같은 민족의 배우자감을 고르는 것이 쉽겠는가. 그나마 교회에도 안 나가고 한인사회와 교류를 않고 지내는 가정의 자녀는 마땅한 배필(配匹) 찾기가 더 어렵다.


 이민자녀들의 결혼이 늦어지는 것은 자라온 환경과 사고방식의 차이에서도 기인한다. 한국에서는 결혼이 늦어지면 이상하다는 눈총을 받기 쉽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염려가 없으니 자녀들은 결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혼자 살아도 불편한 것이 없으니 결혼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부모 입장에서 피부색이 다른 타인종을 새 식구로 맞아들일 준비가 돼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요즘은 그래도 중국인 등 타인종과 결혼하는 사례가 많긴 하지만 부모 세대는 여전히 자기 민족을 선호한다. 백번 양보해 백인까지도 봐줄만 하지만 만약 흑인이라도 데려오면 어쩌냐고 걱정하는 부모들이 적잖다. 


0…자녀 결혼문제는 이웃 미국도 마찬가지다. 결혼 적령기를 넘긴 ‘싱글족’이 한인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이들을 연결시켜주기 위한 모임들이 잇따라 생겨나고 있다. 부모들이 직접 ‘미혼자녀 부모모임’을 결성하고 나서는 사례도 늘고 있다. 부모모임에는 원거리에서도 불원천리 모여든다고 한다. 한인교회들도 결혼적령기 선남선녀의 짝을 찾아주기 위한 모임을 갖고 있고, 각 학교 동문회도 미혼남녀를 위한 볼룸댄스교실 등을 개설하고 있다.


 이제 캐나다한인사회도 자녀결혼문제를 개인적 고민거리로 덮어둘 것이 아니라 과감히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부모들이 적극적인 모임을 갖는 등 대책이 마련돼야 할 시점이다.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이 짝 없이 시들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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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1
함께 걷는 길-장애인 재활캠프에 다녀와서

 

 


 
 성인장애인공동체와 밀알선교단이 주최하고 부동산캐나다가 후원한 제12회 장애인 연합재활캠프가 지난 12일~15일까지 3박4일간 토론토 북쪽 심코 호수변에 위치한 라마다 잭슨스포인트 리조트에서 열렸다. 


 올해 재활캠프는 광역토론토지역 장애인과 가족, 자원봉사자 등 160여 명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됐으며, 장애인들은 이 캠프를 통해 재활의 용기와 연대의식을 북돋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특히 재활캠프가 장소를 옮겨 이곳 리조트에서 개최된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는데 리조트 측의 적극적인 협조와 후원으로 예년과 비슷한 비용으로도 훨씬 나아진 숙박시설(쾌적한 공간 및 에어컨 시설 등)과 질이 높아진 식사를 제공받아 대부분의 장애인 참가자와 가족 및 봉사자들이 큰 만족도를 보였다.


 나는 오픈하우스 성격의 셋째날 ‘축제의 밤’에 시간을 내어 아내와 함께 캠프에 들렀다. 우리는 전에도 몇번 간접적으로나마 캠프에 참여했는데 올해 행사는 한층 더 화려하고 내용이 충실해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날 행사는 그야말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어쩌면 그리도 준비가 완벽한지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졌다. ‘오픈데이’ 답게 많은 외부인사들이 함께 하는 가운데 열광적인 시간을 가졌다. 남녀노소 모두 한데 얼려 노래하고 춤추고 박수치는 모습에서 장애인 모임이라는 어두운 구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영락시니어 하모니카팀, TMS남성중창단, 전통북 공연, 공동체의 난타, 서상수 색소폰, 혼성 하모니카, 뮤지컬, 밴드와 독창 공연, 밀알선교단의 찬양과 춤이 이어지며 무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에 앞서 캠프는 개막 첫날부터 알찬 프로그램이 쉴새없이 진행됐다. 참가자 전원의 입장 퍼포먼스, 장기자랑, 댄스 배틀, 응원전 등등. 행사를 위해 회원들은 캠프 며칠 전부터 팀별 퍼포먼스와 의상, 메이크업 등을 논의했다. 집단 군무(群舞) 퍼포먼스와 뮤지컬 ‘라이온 킹’은 참여자들의 열광 속에 앵콜 무대를 갖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단 한명의 이탈자도 없이 모든 참가자들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점과, 평소 부끄러움을 타서 나서지 않던 모든 장애우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마음껏 웃는 무대가 되었다는 점, 특히 외부의 도움 없이 자체 기획과 준비만으로 신나는 무대가 만들어졌다는 점에 모두들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대화식 특강 “건강한 죄책감, 병든 죄책감”은 숨겨진 자기를 발견해가는 시간이 되었고 봉사자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콘서트 순서에서는 한재범 공동체 회장의 부인 이정례씨가 기성가수 못지 않은 뛰어난 리사이틀을 펼쳐 큰 환호를 받았다. 어릴적 가수가 꿈이었으나 시각장애인 남편의 아내이자 세 딸의 엄마가 되어버린 한 여인의 꿈이 소박하게나마 이뤄지는 시간이었기에 모든 참가자들이 아낌없는 박수로 응원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했다.


 장애인공동체 vs. 밀알선교단의 보체(Bocce) 정기전은 마치 한국의 고연전처럼 캠프 주축인 두 단체가 대항전을 펼치며 치열한 응원전도 벌어졌다. 비록 손발이 자유롭지 않으나 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공을 던지는 모습은 행사의 백미가 되었다. 지체장애그룹과 발달장애그룹이 함께 하는 프로그램 구성이 쉽지 않은 가운데 보체 정기전은 양 그룹 교류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발달장애그룹과 봉사자가 함께 하는 캠프 올림픽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단순한 운동이겠지만 장애인들에게는 나름의 큰 도전이 되는 올림픽의 무게가 실린 대회였다. 한편 캠프 내내 호수에서 수영과 물놀이 등을 즐길 수 있었고, 장애인 한명에 봉사자 2명을 캠프메이트(Camp Mate)로 지정해 이동과 식사제공 및 여러 활동에 같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전보다 훨씬 나아진 주변 환경과 숙박시설 및 음식 등, 올해 캠프는 질적으로 한단계 성장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따라 증가할 수밖에 없는 비용을 감안해 올봄에 두 단체가 캠프기금을 위한 바자회를 진행했고 많은 분들이 후원해주신 덕분에 증가한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한인사회의 일부 대형교회와 은행 및 지상사 등이 거듭된 후원 요청에도 동참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지속적인 후원자들과 후원을 대폭 늘려준 실협(회장 신재균) 및 협동조합, 한국식품 미시사가점(이광형), 피커링도요타(정창헌) 등에 감사한다.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후원해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올해 캠프를 풍성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이에 많은 장애우들은 벌써부터 내년 캠프를 기다리고 있다. 


 장애우들의 가슴 아린 사연은 구구절절 다양하다. 공통된 것은 현실적 여건상 어느 장애우도 자기 주머니로는 1년에 한 번도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동포사회의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잠재적 장애인이다. 육신은 멀쩡해도 정신적으로 성하지 못한 사람도 많다. 남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 자기만 챙기는 사람, 부족한 것 없이 누리고 살면서도 항상 무언가에 허기져 찾아 헤매는 사람… 모두가 장애인이다. 결코 남이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이다.      


 장애우들에게 절실한 것 중 하나는 자기들을 이해해주면서 함께 놀아줄 친구일 것이다. 함께 가는 길은 사막을 걸어도 외롭지 않다. 측은지심(惻隱之心)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후원 문의: 416-457-6824(장애인공동체), 647-531-7003(밀알선교단)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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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8
민족의 자존심-한스런 일제잔재 청산

 

 

 

 1945년 8월15일 해방 직후, 미군정청(美軍政廳)의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으로 부임하면서 한국엔 군정(軍政)이 실시됐다. 이때 아놀드는 한국의 경찰 조직은 일제시대의 모습으로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로써 일제시대 잔재는 척결되지 않았고, 일제에 협력했던 세력은 오히려 한국의 권력 요직에 두루 포진하게 됐다. 


 친일 악질 경찰 노덕술. 그는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 수백명을 잡아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한 반민족 행위자로, 1948년 반민특위가 만들어졌을 때 반드시 처벌해야 할 1순위였다. 하지만 그가 잡히자 대통령 이승만은 그를 풀어줄 것을 지시했다.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투사이자 치안기술자로 정부가 보증해서라도 풀려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노덕술을 반민특위 사무실에 가뒀다는 보고를 받자 "불법 조사관과 지휘자를 체포해 법에 따라 처리하라"고까지 한다. 


 일제 고등계 형사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은 일본경찰보다도 더 악랄하게 동족의 독립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고 고문질 했으나 이승만의 보호 덕에 해방 후에도 한국의 주요 경찰 보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한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시작부터 "민심을 흩어놓고 손해만 생길 뿐"이라며 부정적이었다. 자신을 적극 돕던 친일파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친일파와 이승만의 총공세에 반민특위 활동은 급속하게 힘을 잃었다.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설치됐던 반민특위가 좌절되면서 한국사회는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게 됐다. 이는 나치협력자를 처벌한 유럽 국가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프랑스는 사형선고를 6,000건 이상 내렸고 이중 700건 넘게 집행했다. 강제노동과 징역형 3만 5,000건, 부역죄도 4만 6,000건 선고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사람은 1명도 없다. 


0…지금도 진행형인 한국 내부의 좌우 이념갈등은 일제잔재와 수구냉전 세력의 동거에서 비롯됐다.  식민체제와 분단체제의 역사적 기원이 1차적으로는 일제라는 외부적 요인이겠지만, 친일이라는  내부적 요인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조선은 통일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을 맞고, 전전긍긍하며 해방정국의 추이를 엿보던 남한의 친일세력은 미군정에 재빨리 편승했다. 미군정은 효율적인 남한 통치를 위해 숙달된 관료와 경찰 등이 필요했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하거나 일본으로부터 수혜를 받은 자들과의 이해관계 일치는 이 땅에 일제잔재 청산을 원천적으로 막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분단에서 비롯된 냉전은 남한에 반공국가의 수립을 가져왔고, 친일파는 반공의 우산 아래 신분을 세탁 및 유지하며 오히려 국가의 요직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친일과 반공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수구세력의 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 쓰였던 것이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다.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외적(外敵)인 일제에 빌붙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자들이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조상들의 친일행위로 인해 벌어들인 재산으로 잘 먹고 잘 살고 교육도 잘 받아 사회 각 층에서 상류층이 되어 있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가족들을 버리고 해외로 나가 온갖 험난한 길을 걸으며 소중한 목숨까지 버리면서 일제와 싸웠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이 땅에서 아비 없는 자식이 되어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생계마저 잇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삶을 살고 있다.


0…8.15 광복절 기념식 날, 한쪽에서 정권퇴진 집회를 갖는 씁쓸한 풍경을 어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아무리 현 대통령이 밉더라도 적과 싸우는 전장에서 총부리를 안으로 돌리는 행동을 해서야 되겠는가. 지금은 어차피 전쟁 중이다. 저들이 걸어온 싸움이다. 그렇다면 일단 적과의 전투에서 이기고 나서 정권퇴진을 요구해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반일 시위가 좌파들의 행동으로 치부되는가. 거국적 행동대열에 도움은 주지 못할 망정 이를 ‘좌빨’로 몰아부치는 언행은 삼가야 할 것이다. 이런 행동은 대통령이 시켜서 하는 짓이 아니다. 특히 자발적인 젊은층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이 언제 나라가 하라고 해서 나서던가? 


 지금은 일치단결해야 할 시점이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내부 분열은 있을 수 없다. 일본이 바라는 바가 바로 내부 분열일 터이다. 감정적인 대응은 자제해야 하지만 지금은 전쟁중이다. 이겨놓고 봐야 한다. 굴복하고 마느냐, 저들의 항복을 이끌어내느냐. 한국이 또다시 굴복한다면 민족적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다. 전쟁통에 점잖고 고상한 미사여구로 진실을 호도할 것이 아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는 약 21만명에 이른다. 지금 법원에 계류 중인 강제 징용 피해자만 해도 900여명이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대부분 90대 중반인데 상당수 생존자는 언제 생명이 다할지 모른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규명 없이 일제 잔재 청산은 요원하다. 한국 내부의 일제 잔재 청산이 전제되지 않으면 일본의 침략적 근성에 대해 정파와 계급을 초월한 대응은 기대할 수 없다. 한국 내부의 일제잔재와 냉전의식을 걷어내지 못하면 극일(克日)은 불가능하다. 


 일본은 조선을 강압적으로 병탈한 침략국가다.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비극은 일본으로 인해 비롯됐다. 이런 나라와는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없다. 정권퇴진 운동은 그 후에 해도 된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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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1
나의 가정교사 시절

 

 


  
 지금은 한국의 대학생활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만 해도 지방출신 학생들이 서울로 상경해 대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소위 ‘아르바이트’를 통해 학비를 조달하는 일이 흔했다. 그 중 대부분은 초.중.고교생의 과외를 지도해주고 학비와 용돈을 버는 가정교사가 많았다.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는 시골 출신 대학생들의 중요한 학비 조달 수단이었다.


 충청도 시골 출신인 나도 70년대 중반 2월 어느날,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괴나리 봇짐을 꾸려 서울로 상경했고 처음 몇 달 간은 학교 앞에서 하숙을 했는데, 홀어머니가 시골에서 부쳐주시는 알량한 쌈짓돈으로는 하숙비와 용돈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누구나 그렇듯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러 나섰다. D 일보사를 찾아가 ‘입주 아르바이트 원함. 특히 영어 자신’이라는 줄광고를 냈더니 몇군데서 연락이 왔으며, 그 중 학교에서 가까운 성북구 미아리 지역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됐다.


 그런데 그 집은 가정교사를 둘 정도로 부유한 형편은 아니었다. 남편을 여의고 홀로된 50대 초반의 주인 아주머니 슬하에  3녀1남을 둔 평범한 가정이었는데, 나는 그 집 막내인 중학교2학년 짜리 외아들과 함께 기거하며 숙식을 해결하고 공부를 가르치게 됐다. 막내에 외아들이니 얼마나 애틋한 자식이겠는가. 그러나 인텔리 여성이었던 주인 아주머니는 바로 그 점을 걱정하면서 “공부보다도 먼저 아들의 정신상태부터 고쳐달라”고 당부했다. 즉, 막내인 탓에 버릇이 없으니 엄격한 형으로서 친동생처럼 대하며 생활태도부터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가정교사 월급까지 지출해 가면서 생활할 형편은 아니었는데 굳이 그랬던 것도 집에 여자들만 있다보니 외아들이 나약하고 버릇없이 자라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그리했던 것이다. 


 나 자신이 집안의 막내로 버릇 없이 자랐는데(?), 주의산만한 사춘기 소년 훈육하랴 공부도 시키랴  하려니 처음엔 다소 힘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고삐 풀린 망아지 같던 그 녀석은 그런대로 말도 잘 듣고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져갔으며 성적도 조금씩 나아지면서 차츰 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 후 약 6개월이 지나니 나를 “선생님”보다는 “형, 형” 하면서 따랐고, 가족 모두가 한식구처럼 지내며 생활하게 됐다. 


 세 명의 딸 중에는 나보다 세 살 위인 큰 딸(직장생활)과 한살 아래인 둘째 딸(재수생), 두 살 아래인 셋째 딸(여고 2학년)이 있었는데, 혈기왕성한 청년 대학생이 한 집에서 4명의 여자들과 함께 살다보니 처음엔 무척 어색하고 어찌 처신해야 할 지 몸둘 바를 몰랐다. 특히 요즘같은 여름철엔 노출이 심한 옷들을 입고 있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주인 아주머니는 이런 점을 알아채고는 나를 “큰 아들”이라 부르며 스스럼 없이 대해주려 노력하셨다. 집에 누가 오면 “우리 큰아들”이라 소개했고 그러면 손님들은 농담으로 “언제 이렇게 큰아들을 두었어?”라고 화답하곤 했다. 막내 딸은 나를 “오빠”라 불렀고, 나는 주인아주머니를 “어머니”, 큰 딸은 “누나”라 불렀고, 나머지는 그냥 이름을 불렀다. 학교 축제 땐 둘째 딸을 파트너로 데려 가기도 했다. 


 여름엔 가족들이 모두 함께 수유리로, 인천 송도로 물놀이를 다녀오고, 밤이면 마당에 불판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맥주도 마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나는 더 이상 과외 선생님이 아닌, 한가족 구성원이 되었다. 그중에도 나와 나이가 비슷한 둘째 딸은 장래 진로문제 등을 놓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흔히 이런 상황이면 자연스레 세 명의 딸 중 누군가와는 ‘인연’이라는 것이 맺어질 법도 했을 터인데, 하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나 보았다. 그 후 그 집이 이사를 할 사정이 생겨 2년에 걸친 입주 아르바이트도 그만두어야 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서도 나는 수시로 그 집 가족들과 편지연락을 주고 받았으며,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강남에 있는 그 집을 방문해 놀다오곤 했다.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자면 , 나는 성격도 명랑하고 외모도 그중 나은 셋째 딸을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고, 술에 취하면 가끔 친한 친구에게 그런 말을 횡설수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연은 따로 있었는지,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그쪽의 기억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지금 생각해도 대학생활의 기억 중에 미아리에서 아르바이트로 생활했던 2년 여의 기간은 아주 또렷하고 달콤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것의 원래 목적은 학비 마련이었지만 주인아주머니를 잘 만난 덕에, 또한 가족 구성원들이 너무 좋았던 덕에 ‘남의 집 살이’에서 겪었을 고달픔이나 어려움보다는 아름다운 추억들만 아련히 남아 있다.  


 이런 추억은 단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시골 출신 대다수가 당시 가정교사를 했고 그때 과외교사와 제자로 만난 동창들 중에는 나중에 부부 사이로 발전한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따라서 대학시절의 아르바이트, 그 중 대부분을 차지했던 가정교사 일은 캠퍼스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때론 학비조달이라는 각박함도 있었지만 이를 단순히 고생으로만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때 함께 지냈던 아주머니와 세 딸들, 막내녀석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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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9
언론과 국익-뭉쳐도 모자랄 판에

 

 

 


 악화일로로 치닫는 한-일 갈등의 근본원인은 일본이 과거 자행한 한국에 대한 불법적 식민지배를 인정치 않고 끝까지 부정하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은 배상과 직결된 문제로 일본은 한국 강점기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이를 부인하고 있다. 


 한편으론 한국의 실책도 부인할 수 없다. 1965년 일본과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은 1910년까지 이르는 모든 조약은 무효라는 것을 확인했으나 그 해석을 놓고 한국은 한일합방도 무효라고 본 반면 일본은 합방은 유효하게 지속됐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무효가 됐다는 식으로 맞섰다. 이같은 기본조약의 틀 안에서 맺어진 한일청구권협정도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한일청구권협정 1항은 '유무상 5억 달러를 한국에 제공한다', 2항은 '이로써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청구권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일본은 후에 5억 달러의 성격을 '독립축하금'으로 표현했고, 한국이 요구해온 청구권 문제는 없던 일이 됐다는 주장을 펴왔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도 청구권 협정으로 최종 해결됐다는 일본의 주장은 이에 근거한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배상문제는 40년 동안 덮어져왔지만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한국 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요구로 한일협정문서를 공개하면서다. 이에 정부는 민관공동위원회와 논의 끝에 강제징용에 대해 추가 보상을 결정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보았다. 


 한일 갈등의 기폭제가 된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해 민관공동위는 한일협상 당시 일본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보상을 인정치 않음에 따라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사실’에 근거해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했던 것이다. 2012년 한국 대법원은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그에 따른 배상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청구권 협상 과정에서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한 개인손해배상 청구권이 한일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힌 것이다.


 그후 마침내 지난해 10월 30일 대법원으로부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그대로 인정한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개인청구권이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소멸됐다는 아베의 주장은 과거 일본 정부는 물론 일본 사법부의 판단과도 배치된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2007년 4월 중국인 징용피해자의 소송을 기각하면서도 '개인 청구권 자체는 소멸하지 않았다'고 명시한 바 있다.  


 일본은 1993년 이후 서서히나마 한국 식민지배에 대한 인식을 확대해오다 2010년 처음으로 강제성을 인정했다. 당시 민주당 소속 나오토 총리는 식민지배가 한국민들의 의사에 반해 강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아베는 2015년 종전 70주년 담화에서 "전쟁에 아무 관계 없는 우리의 자녀나 손자, 그 뒤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이를 정면으로 뒤집고 나섰다. 


0…“지금은 기업들도 대통령을 도와야할 때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한일 갈등에 대해 피력한 입장이다. 박 회장은 최근 ‘대한상의 제주포럼' 언론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최선을 다해 대처할 수 있도록 기업들도 돕는 것이 난관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글로벌 갈등 여파로 기업들이 감내해야 하는 부담도 커지는데 우리 내부에서는 서로 힘 겨루고, 편 가르고 싸우는 일만 많다. 밥을 짓는 데 집중해야 하는데 밥솥을 가지고 밥그릇만 갖고 싸우는 모양”이라고 지적했다.


 박 회장의 말대로 지금은 보수-진보, 여야-정파를 떠나 전 국민이 똘똘 뭉쳐야 할 때다. 국민들은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한마음으로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참에 실질적인 경제주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국민들 사이에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대한 시기에 일부 야당과 보수언론이 적전분열(敵前分裂)을 조장하는 듯한 한심한 행태를 벌이고 있어 입맛이 씁쓸하다. 보수야당이야 원래가 그런 집단이니 그렇다 치고, 명색이 언론사라는 곳에서 한국혐오(혐한: 嫌韓)를 부추기는 선동적인 기사를, 그것도 일본어판으로  찍어냈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한 신문은 최근 일본어판 기사에서 ‘한국은 무슨 낯짝으로 일본의 투자를 기대하나’라는 제목을 달았다. 또 어떤 칼럼 제목은 ‘반일(反日)로 한국을 망쳐 일본을 돕는 매국 문재인 정권’으로 올렸고, 이렇게 악의적으로 제목을 고친 기사들은 일본 포털의 화면에 그대로 노출됐다.


 이게 도대체 어느나라 신문인가. 이는 일본 극우집단이 크게 환영할만한 표현으로 도저히 한국 언론이라고 할 수가 없다. 더욱이 악화일로의 한-일 관계에 기름을 퍼붓는 행위로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나라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처해 있는데 거들지는 못하더라도 배를 흔들어대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아무리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는 정권이라 해도 과연 국익이 무엇인지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전 국민이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적 앞에서 분열조장에 앞장서는 일은 없어야겠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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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7
나의 명함-타이틀이 뭐길래

 

 

 

 

 최근 토론토주재 한국 지상사 임직원들과 골프대회를 치르면서 사전준비를 위해 주재원들과 몇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인사차 명함을 주고 받다가 다소 생소한 직함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군가의 명함에 ‘책임’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는데 나같이 20여 년 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타이틀이어서 이런 직책이 언제부터 생겼느냐고 물으니 2년 정도 됐다고 한다. 알고보니 이전의 중간직책(과장, 차장, 부장)을 ‘책임’이라는 직함으로 단순화하고 호칭도 통일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책임’이란 직책은 이전의 부장급 정도 되는 위치인 것이다.   


 이같은 호칭 변화는 복잡했던 직급체계를 단순화하고 업무 효율성 위주로 조직을 개편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에 대해 두가지 느낌이 들었다. 권위의식과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직책을 줄인 것은 잘한 반면, 업무에 관한한 ‘절대책임’을 지라는 말같아 직원들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지겠다는 느낌이다. 


 0…내가 기업체 생활을 할 때만 해도 일반적인 조직은 평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에 이어 임원인 이사, 상무, 전무, 부사장, 사장 등 타이틀이 첩첩산중이었다. 그래서 평사원이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면 까마득하기만 했다. 그러니 대부분의 흙수저들은 평사원에서 출발해 임원까지  오르려면 노예처럼 일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승진에서 누락되면 퇴사할 수밖에 없고. 그 스트레스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군대도 마찬가지. 사관학교 동기들보다 승진이 느리면 중간에 옷을 벗을 수밖에 없다. 타이틀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주요 기업체마다 타이틀 변화 바람이 일고 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복잡한 호칭이 사라지고 업무 전문성을 중심으로 인사제도를 개편, 수평적•자율적 문화를 확산하는 추세다. 이는 세계 시장의 환경 변화로 과거 같은 위계와 연공서열주의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기업들의 고민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LG전자의 경우 2년 전부터 당시 5단계였던 사무직 직급을 3단계로 단순화했다. 사원 직급만 기존과 같고 대리•과장은 '선임'으로, 차장•부장은 '책임'으로 통합했다. 삼성전자는 기존 7단계 직급을 4단계로 줄였다. 임직원 간의 호칭은 '님', '프로' 등으로 바꿨다. 존칭 없이 영어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SK텔레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직위를 팀장과 매니저로 단순화했다.


 CJ그룹은 20여 년 전부터 '님' 호칭 제도를 도입했다. 공식자리에서도 회장을 부를 때 '이재현 님'이라고 부른다. 다른 기업들도 잇달아 호칭파괴 흐름에 합류하고 있다. 복잡한 직함을 다 치우고 그냥 ‘매니저’라고 부르는 곳도 많다.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도입하기 위해서다. 직급에 따른 보고체계를 간소화해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격의없는 소통으로 창의적 아이디어를 발굴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전에는 먼저 입사한 선배가 승진도 먼저하는 게 관례였으나 이제는 그런 ‘연한’ 개념도 사라지고 능력있는 사원이 과장, 부장보다 더 높은 직급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위계질서가 강하고 직급을 중시하는 한국이 호칭 변화를 통해 조직문화도 바뀌고 상대방과의 소통도 좀더 원만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0…나는 한국에서 기자생활을 하기 전에 2년여간 대기업 생활을 했는데, 당시 우리 부서에는 나같은 평사원 위에 (과장)대리, 그 위에 과장, 차장, 부장에 이어 소위 ‘기업체의 별’로 불리는 임원인 이사, 상무, 전무, 부사장, 이어 오너 일가로 짜여진 사장과 부회장, 최고 정점에 회장이 존재했다. 나는 평사원으로 근무하다 획일적이고 위압적인 회사 분위기가 맞질 않아 나와서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한 사람의 타이틀을 열거해보면 그 이력을 알 수 있다. 내가 처음 타이틀을 가져본 것은 군 장교로  임관해서부터다. 이 소위(소대장), 진급해서 이 중위, 보직이 부관이니 이 부관, 기업에서는 평사원이니 그냥 이씨(또는 미스터 리), 출판사에서는 이 과장, 그후 언론계 들어와서는 이 기자, 진급해서 이 차장, 이 부장, 그러다 이민와서 계속 언론생활을 하면서 이 편집국장, 이 부사장(편집인), 이 사장 등으로 이어져 왔다. 언뜻 보아서는 대단한 출세가도를 달려온 듯 하지만 알고보면 그만큼 인생살이가 고달프고 피곤했다는 의미다.           


 한국 남자들 중에는 특히 타이틀(title-직함)에 집착하는 분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작은 이민사회인데도 유난히 단체도 많고 ‘회장’이란 타이틀이 넘쳐나는 느낌이다. 개중에는 회원도 없는 단체를 만들어 혼자서 회장이란 직함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작은 이민사회에서 회장 타이틀이 이렇게 많은 커뮤니티도 드물 것이다.      

                                
 이곳 캐나다 사회에서는 단체나 조직에서 대개 이름을 부르거나 조금 경어를 붙여 미스터, 미즈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조금 더 직급이 높아지면 매니저, 혹은 수퍼바이저로 부른다. 과장님, 부장님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0…한국 남자들은 타이틀을 잃어버리면 힘이 풀리는 경향이 뚜렷하다. 한국에서 한때 부장님, 국장님, 사장님 소리를 듣다가 이민와서 갑자기 ‘아무개씨’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기서부터 맥이 탁 풀린다. 그래서 툭하면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다고 자랑하며 현실을 덮으려 위안 삼는다. 


 아무 타이틀도 없는 사람은 대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 분이 많다. 하늘의 뜬구름 같은 타이틀이란 게 무언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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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나 집에 갈래요”-돈과 스포츠의 세계

 

 

 


 세계에서 돈을 가장 잘 버는 스포츠 스타는 누구일까.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지난해 1위에 오른 선수는 복싱의 플로이드 메이웨더(42)였다. 메이웨더는 이종격투기(UFC) 스타인 코너 맥그리거와의 경기에서 50전 전승을 기록하며 받은 출연료 등을 포함해 모두 2억 8,5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메이웨더는 지난 7년간 해당 부문 1위에 네 번이나 등극했다. 특히 지난해 맥그리거와의 경기에선 단 36분을 링 위에 올라 2억 7,500만 달러를 파이트머니로 받았다. 이로써 메이웨더는 통산 총수익 금액이 10억 달러를 넘었다. 이전에 10억 달러를 넘긴 선수는 농구의 마이클 조던과 골프의 타이거 우즈뿐이었다. 


 한편, 총수입 2위는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32)로 수익 금액은 1억 1,100만 달러. 메시는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와 종신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안정된 수입을 갖게 됐다. 3위는 크리스티아노 호날두(34)로 수익금액 1억 800만 달러. 그는 레알 마드리드와 연봉 5천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 


 이어 4위는 종합격투기의 코너 맥그리거(9,900만 달러), 5위는 축구의 네이마르(9천만 달러), 6위는 농구의 르브론 제임스(8,550만 달러), 7위는 테니스의 로저 페더러(7,720만 달러), 8위는 농구의 스테픈 커리(7,690만 달러), 9위는 미식축구의 맷 라이언(6,730만 달러), 10위는 역시 미식축구의 매튜 스태포드(5,950만 달러) 순이었다. 


0… 스포츠 세계는 영웅을 갈망한다. 어느 세계나 마찬가지이지만 스포츠는 스타가 있어야 흥행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간 나락으로 떨어졌던 타이거 우즈가 최근 좀 뜨자 그동안 침체기를 겪던 세계 프로골프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하키 외에 다른 스포츠는 팬들의 열광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던 캐나다에 갑자기 농구 광풍(狂風)이 일었다. 토론토 랩터스가 미국프로농구(NBA) 챔피언에 오르는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고 그 중심에 바로 수퍼스타 카와이 레너드(28)가 있었던 것이다. 레너드는 토론토가 NBA 챔피언에 오르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했고, 랩터스가 창단 24년 만에 처음으로 챔피언 트로피를 거머쥐면서 레너드는 토론토는 물론, 캐나다 전역의 최고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모든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시가지를 누볐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가 뉴스거리였다. 


 사실 토론토가 스포츠를 통해 시민들의 단합과 연대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그는 엄청난 공헌을 했다. 하키 밖에 모르던 토론토가 농구 열기에 휩싸였고 시민들의 일체감을 이끌어냈다. 우리 가족도 농구가 열리는 날은 모두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스포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단적으로 보여준 예다. 월드컵 때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과 같았다. 민족을 초월해 한목소리로 ‘We The North’ 를 외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레너드는 토론토에서 뛰면서 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고 파이널 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도 선정됐다. 레너드는 우승 후 곧바로 자유계약선수(FA-Free Agency) 자격을 얻었고 그 행선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과연 토론토에 잔류할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 시민들은 숨을 죽이며 협상과정을 지켜보았다. 일주일여 기간 동안 언론과 토론토 시민들의 신경은 온통 레너드의 거취에 모아졌다. 


0…“나 집으로 돌아갈래요.”(I’m going home). 카와이 레너드가 랩터스 감독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2018-19 시즌 랩터스가 사상 처음 NBA 챔피언에 등극하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한 레너드는 결국 토론토를 떠나 고향인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게 됐다. 그는 홈팀인 LA클러퍼스(Clippers)와 4년간 1억4,200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닉 너스 감독의 말대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데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레너드는 우승 ‘청부사’였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동부 플레이오프에서 번번히 클리블랜드의 벽에 막혔던 랩터스는 2017-18 시즌이 끝난 뒤 팀의 에이스이던 더마 드로잔을 샌안토니오에 내주고 레너드를 데려왔다. 당시 레너드는 1년 후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릴 예정이었지만 랩터스는 우승을 위해 모험을 걸었다. 


 레너드는 랩터스의 기대에 부응해 팀에 우승을 안겼지만 그는 1년만 뛰고 고향 팀을 찾아 떠나게 됐다. 그는 랩터스에서 60경기에 나서 경기당 34분을 소화하며 26.6점, 7.3리바운드, 3.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 24경기에서는 평균 39.1분을 뛰며 30.5점, 9.1리바운드, 3.9어시스트로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토론토는 팀의 핵심 전력인 레너드를 잡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혀왔지만, 레너드는 고향행을 택했다. 레너드의 성적이 빼어났던 만큼 랩터스의 공백은 뼈아프다. NBA 역사상 처음 챔피언십 MVP를 차지하고 팀을 옮긴 레너드의 빈자리를 어떻게 메울지 주목된다. 


0…돈과 명예를 한번에 거머쥔 스포츠 스타들, 그들도 인간이기에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데 말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잠을 설쳐가며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한 토론토 팬들을 생각할 때 인간적인 의리를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또한 골프나 복싱 등 1인 경기를 제외한 구기종목은 다른 선수들의 도움이 있어야 스타도 빛을 발할 수 있다. 스타 뒤에서 묵묵히 팀의 승리에 헌신한 다른 선수들에게도 박수를 보내줘야 할 것이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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