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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거지 깡통’ 같은 추억 조각
Hwanghyunsoo

1980년 중반에 품바를 주제로 한 연극이 있었다. 코믹 정치 풍자극이었는데, 연출가가 무대 컨셉을 자문 받고자 평소 잘 아는 실험 작가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이런 아이디어를 준다.


“소품으로 진짜 거지 깡통을 구해 무대에 올리면 좋을 것 같다”. 연출가는 무릎을 치며, “그래! 바로 이거야”하며 깡통도 구하고 현장 체험도 할 겸 거지들을 찾아 다녔다. 그런데 거지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는 88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에서 취재를 많이 오던 시절이라, 단속이 많았다.


어렵게 거지를 찾더라도 거지에겐 ‘전재산이다’ 싶은 깡통을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천 원짜리 몇 장 주면 되리라고 쉽게 생각한 연출가는 첫 번째 딜에 실패하고 욕만 얻어먹는다.


다음 거지부터는 전략적 접근을 하는데, 1주일 동안 구걸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제시했지만, 두 번째도 실패했다. 어찌어찌하여 드디어 거지 깡통을 구해 왔다. “어떻게 구했냐?”고 스테프들이 물었다. 그는 “그렇게 어렵게 구한 깡통의 ‘노우 하우’를 쉽게 가르쳐 줄 수 없다” 며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거지가 실제 사용한 깡통을 구해 품바 관련 연극의 소품을 사용한 연출가가 있었다. ‘거지 깡통’의 가치는 평가 할 수 없는 근거에 따라 변 할 수 있다.

 

덕분에 공연도 잘 끝나고 이번엔 ‘거지 깡통’의 아이디어를 준 실험 작가가 “감독님! 제가 이번에 전시회를 하는데 그, 깡통 좀 빌려주세요. 설치미술을 한번 해보려고요”


연출가는 “내 깡통은 좀 비싼데…”하며 깡통 값을 요구했다고 한다. 거지 깡통의 가치가 연극을 통해 한껏 올라갔고, 전시를 한다고 하니 예술적 가치를 더해 셈한 것이다. 그 연출가는 지금 고인이 되었고 ‘거지 깡통’의 존재는 알 길이 없다.


지난해 한국을 가며 그동안 수집한 우표를 가지고 갔다. 아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모은 우표와 내가 직장 신입 시절에 수집한 것이다. 그러니까, 60년대 초부터 80년대 말 사이의 것들인데 책장 정리를 할 때마다 처리할 궁리를 했었다.


아내의 60년대 우표는 주로 외국에서 지인이 보내온 편지에서 수집한 것들로 약 1천여 점이나 됐고, 내가 모은 우표는 우체국에 아는 분이 있어 미리 돈을 맡겨 놓으면 소장 가치가 있는 기념 우표를 사서 보내 준 것으로 1백여 점이 됐다.


사실 한국으로 가기 전에 리치먼드 힐(Richmond Hill)에 있는 주화 매매상(Canadian Coin & Currency)에 들려 가치를 알아 봤는데 별 호기심이 없었고 그 가치를 잘 모르는 듯해서다. 그래서 한국에 가서 알아보면 가치를 정확히 알 수도 있고, 혹시, 재수가 좋아 쌈지 돈이 생긴다면 딸, 사위, 손녀들과 ‘회식의 꿈’도 있
었다.
 


▲요즘은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소통하다 보니, 편지가 없어졌고 자연히 우표의 활용도 적어져 수집우표의 가치 또한 떨어졌다. 우표 수집 같은 추억 조각이 점점 사라져 갈 것 같아 아쉽다.


막상 한국에 가 보니 이걸 어떻게 알아봐야 할 지? 난감했다. 신세계백화점 밑의 회현지하상가에 옛날 동전 우표 수집상들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조건 뭘 팔러 가는 게 쑥스러웠다. 용기를 내 그곳을 찾아갔다.


회현지하상가에는 옛 우표, 동전 수집상이 3십여 군데가 있었다. 첫째 집은 가지고 간 우표책을 보더니 “관심 없다”고 해서 채 3분도 안돼 나왔다. 상가를 둘러보니 우표 수집상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가게를 연 곳도 대부분 연로한 분들이 소일 삼아 문을 열어 놓은 것 같고, 경기가 안 좋으니 손님이 들어가도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렇게 서너 곳을 돌고 맥이 빠져 속으로 “이제 한 곳만 더 알아보고 가야지”하며 가게에 들어섰다. 50대 초반의 주인이 “요즘 우표 수집 경기가 다 죽었어요”하며 그나마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처럼 해외에서 우표책을 들고 오는 사람이 제법 있다며 “우표는 일단 사용한 것은 가치가 없다고 보면 됩니다. 50~60년대 우표 중에서는 간혹 가치 있는 것이 있지만… 그리고 80년대 수집한 우표는 우체국 소인이 없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인데, 문제는 전두환대통령 때 발행한 것이라 별 가치가 없다”고 한다.


그 시대 대통령의 인기가 우표에 미치는 영향이랄까? 다소 아리송한 말이었지만, 예의상 이해하는듯 끄떡였다. “요즘 이메일이나 카톡이 발달하다 보니 편지가 없어졌고, 자연히 우표가 발행 안되니 경기 자체가 줄어든 것이죠. 저기 보이시죠. 제가 지난 몇 달간 사논 우표책이에요”


수 백 권의 우표책들이 쌓여 있었다. “이 우표들을 제가 다 정리를 해야 해요. 대부분 가치가 없는 것들이죠”하며 “어르신, 무거운 것 이렇게 가지고 오셨으니 우표책 하나에 만원씩 쳐서 세 권에 삼만 원을 주겠다”고 한다. 그렇게 ‘회식의 꿈’은 사라졌고, 집에 돌아와 딸에게 “이거 정 서방 보고, 시간 있을 때 인터넷에 올려서 팔아 써라”며 던져 주었다. 시세가 삼만 원이라는 말은 창피해서 못했다.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는 예술의 수도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키 작은 스페인 출신 화가 한 명이 파리에 온다. `파블로 디에고 도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로 후안…`으로 시작하는 긴 이름을 가진 열아홉 살 청년이었다. 사람들은 맨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만을 뽑아 `파블로 피카소`라고 불렀다.


파리에 온 피카소는 다른 화가의 작업실과 방을 전전하면서 살았다. 훗날 그림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던 피카소도 이 시절 비참한 가난에 허덕였다.
 

▲스페인화가 피카소는 열아홉인 1901년에 파리로 가 그림을 그린다. 그때를 피카소의 청색 시대로 말하는데, 주로 검푸른 색의 그림을 그렸고 너무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어느 날 한 화상이 피카소를 찾아와 그림을 700프랑에 사고 싶다고 말했다. 너무나 싼값을 부르자 피카소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저녁 피카소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고 고집을 부린 걸 후회한다. 다음날 피카소는 자기 발로 장사꾼을 찾아간다. 그러나 장사꾼은 700프랑이 아닌 500프랑에 사겠다고 다시 값을 깎는다. 화가 난 피카소는 상점을 나왔다.


하지만 그 다음날 배가 고팠던 피카소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상점을 찾아갔다. 그 사이 그림 값은 300프랑으로 내려가 있었다. 결국 피카소는 눈물을 머금고 300프랑에 그림을 팔았다. 하지만 피카소는 얼마 후 이름 있는 화가가 됐고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뛴다.


우표, 그림, 거지 깡통 같은 것의 가치는 평가할 수 없는 것에 근거를 둔 가격인 것 같다. 주식 투자만 해도 회사의 실적과 재무구조, 실물 경제의 추이 등 비교적 예측 가능한 지표들이 존재하지만 소장품의 경우 그 같은 지표들이 없다고 봐야 한다.


내가 좋아한다고, 내게 필요하다고, 나만 가지고 있다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거지 깡통’처럼 연극이 끝나면 쓸데없는 것도 있고, 피카소의 그림처럼 가치 있는 추억 조각도 있을 게다.


<코로나19>로 모처럼 시간 있을 때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추억 조각을 정리하는 것도 좋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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