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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평전(윤덕한 지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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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6) 워싱턴 부임

이완용은 전권공사로 임명된 박정양과 함께 고종에 부임 인사를 한다(1887.8.7). 초대 공사 관원은 이들 2명 외에 서기관, 수행원, 하인 각 2명, 번역관, 무관 각1명 등 모두 10명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개신교 선교사 알렌이 관원의 미국 안내를 맡았다.

 그런데 우려했던 대로 원세개가 이를 막았다. 조선이 서방국가에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것은 청의 속국으로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당시 고종은 미국에 다녀온 보빙사의 보고도 있고, 또 공사나 선교사, 교사들의 친절한 태도로 미국에 더 할 수 없는 호감을 갖고 있어 공사의 파견을 서두르고 있었다.

더욱이 미국과의 수호조약 제 1조에 "만약 제 3국이 체결한 일방 국가에 대해 모욕적인 행동을 하게 되면 반드시 서로 도와 대응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조선이 침략을 당할 경우 이를 도와줄 의무가 있음을 명문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사연으로 조선왕실의 미국에 대한 기대는 거의 절대적이었으나, 이는 정말로 외교를 모르는 은둔의 나라, 초보생의 짝사랑이었다. 미 국무장관 토마스가 서울주재 대리공사에게 이미 1885년에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조선은, 여러 나라의 이해와 갈등이 얽힌 곳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이 모든 일에 초연하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어느 나라와 한편이 되거나, 음모에 끼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당시 대외정책은 확고하게 불간섭, 불개입 입장이었다. 당시 고종은 물론 조선 조정 안에서 이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여간 미국으로 가기 위해 남대문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관원들은 우여곡절 끝에 48일 만에 다시 떠나게 됐다.

제물포에서 미 군함 오마하(Omaha)호에 오르니, 미 측은 태극기를 높이 달고, 군악을 연주하며, 예포 15발을 쏘아 일행을 환영했다.

 

 7)서양문화(서양인 남녀 승객의 망측한 무도회)

알렌을 포함한 일행 11명은 영국기선 Oceanic호를 타고 요고하마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도중 하와이를 거치는데, 이렇게 작은 섬나라가 군주를 황제라 칭하며 독립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에 놀라기도 한다.

하와이를 지나 태평양을 횡단하는데 선상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하여 서양남녀 승객들이 서로 껴안고 춤추는 망측한 광경을 보기도하며, 지루한 항해 끝에 19일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여기서 팔레스 호텔에 투숙하는데, 8층 높이여서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일행이 객실로 가기 위해 승강기를 탓을 때 승강기가 움직이자 "지진이 일어났다"고 놀라 모두 알렌을 붙들고 소리를 질렀다. 그 뒤 그들은 계단만 사용했다. 다시 기차를 타고 5일 만에 워싱턴에 도착한다.

다음날 알렌과 함께 미 국무성에 부임사실을 알리고 대통령에 신임장을 제정할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그날 또 청 공사가 트집을 잡았다. 미 국무성에 들리기 전에 먼저 청 공사관을 들려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국무성도, 대통령에게도 "자신들이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유약한 공사 박정양이 청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자, 알렌이 청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내가 사퇴하겠다"고 협박하여, 알렌의 말에 따르기로 한다. 신임장을 제정하는 1월 17일, 아침부터 눈발이 날렸다. 모두들 사모관대에 갓을 쓰고 두루마리 입고 마차를 타고 갔다.

백악관에 도착, 응접실에서 기다리는데,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나타났으나 조선 양반들은 대통령은 화려하고 위엄있는 제복을 입고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주위 수행원과 같은 옷을 입은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했다.

뒤늦게 대통령이라는 것을 알고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는 큰절을 올리려 했으나 도중 허락되지 않아 조선 양반들은 더욱 당황하였다. 하여간 식은 10분만에 끝났다.

각국 공사관과 미 각부 장관 관저를 방문해 문 밖에 명함을 두고 오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다음날 시내 3층짜리 집을 내어 태극기를 게양하고 공사관을 개설했다. 공사관원 10명이 함께 생활했다.

공관원이 부임했던 시기는 마침 연초여서, 미 정부주관이나 타국 정부 주최 연회가 자주 열렸다. 조선 양반들은 그들이 어깨와 목을 드러낸 옷을 입은 여인들을 볼 때마다 ‘기생’ 들이라 불렀다.

그때마다 알렌이 그녀들이 유력한 집안의 부인과 딸이라 설명해 주었다. 그래도 조선양반에게는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공사관 생활은 여러 가지로 고달팠다. 말도 통하지 않고, 흑인 하인을 두 명 고용했으나 음식과 세탁도 문제였다.

이완용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부임 5개월 만에 귀국한다. 그는 원래 건강한 사람이어서 70세에도 안경 없이 신문을 읽고, 소화불량이란 모르고 살았는데, 미국생활에 스트레스 때문인가?

이씨는 3개월 휴식을 가진 후 정3품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 받는다. 그러나 곧이어 전보국 회판으로, 다시 사흘 만에 교섭통상 사수참으로 전보된다. 또 며칠 지나지 않아 미 공사관에 부임하라는 명을 받는다.

귀국해서 3개월 쉬고 두 달 만에 4곳을 전출 다니는데, 당시 조선 인사라는 것이 이런 식이었다. 이번에는 1890년 10월 귀국할 때까지 만 2년 동안 공사관 책임자로 근무한다.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듣던 공사 박정양은 청의 종주권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끝내 청의 압력에 소환된 상태였다. 그래서 이씨가 급작스레 대리공사로 임명됐던 것이다. 사실 조선 외교관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교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호해야 할 조선 여행객도 없으며, 두 나라 사이에 통상 업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할 일이 없다. 그러나 2년의 미국생활은 이씨에게는 세계에 눈을 뜨게 하고, 그가 후일 친미파가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실로 여러 곳을 여행, 방문, 견학하며 느끼고 배웠다. 특히 의무교육제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미국의 번영이 이에 있음을 알았다. 그가 후일 "실력을 기르자" 주창하고, 또 이토의 동양평화론에 동조, 끝내 매국하게 되는 정신적 실마리도 이때 심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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