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문부성은 내년 새 학기부터 사용하는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내용을 싣도록 했다. 5년이 훨씬 넘었고 이제 2, 3년 뒤면 초•중•고 모든 교과서에 싣겠다고 하는데, 독자들도 예측한 일이라 굳이 얼굴 붉힐 필요는 느끼지 않지만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인데 한국이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목석이 아닌 다음엔 일본 문부성 막말에 치를 안 떨 국민이 없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가? 언제까지 ‘남.북.일’로 갈려 이전투구 싸워야 하는가? 왜 같은 한 집안에서도 이를 갈고 싸우는가? 왜, 동족상잔의 피를 흘려야 했고 왜, 녹슨 이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는가?
두 말할 나위 없이 일본 아베 부채질 때문이고, 여기에 동조하여 나라의 기강을 흐려놓은 친일 잔재들 때문이다. 그들은 나라가 붕괴가 되던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른바 좌파만 무너지면 고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초가삼간이 다 타도, 빈대 타는 것만 좋아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
오죽하면 김구, 안중근, 윤봉길을 ‘테러리스트’라 불러도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 그 무언은 ‘토착왜구’ 일본 앞잡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한반도 비운의 질곡을 제대로 알려면 대한 백년사로 다시 돌아가 재조명해야 그 답이 나온다. 첫째, 우리의 선조들의 무능함이요, 둘째, 젊은이들의 시대 무감각 불성실 상태가 국가 기강을 해이하게 만들었고, 셋째, 오직 나만의 보편적 국수주의적 무사안일 때문이다.
즉, 젊은이들의 안일한 일상으로 4.19 정신과 5.18 정신에 부합(附合)하지 못한 것이 국가를 더 혼돈의 길로 몰았던 것이다. 물론 촛불 대혁명도 있었지만 그때도 젊은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지 학생들은 많은 인파 속에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올해 초부터 5.18 망언이 온 나라를 술렁이게 하더니, 이어 반민특위로 점화되다 급기야 4월에 들어서서는 제주 4.3 사건이 도마에 올랐다.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하루가 다르게 사건이 터져, 계속 무슨 사건이 터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국민이 있는데, 그들은 대다수 친일파 들이다.
제주 4.3 사건은 내가 태어나고 4년 만에 생긴 일이라서 역사적 기록만 가지고 얘기한다. 내가 쓰는 역사적 사실은 거의가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서 따온 것이다. 그 분의 해박한 통찰력과 가식이나 허구 없는 진필은 온화하면서도 어느 때 이르러서는 칼날 같은 촌철살인의 기승전결은 마치 광야를 누비는 야생마 같았다.
그렇다. 역사만큼은 소설이 아닌 진실 그대로 기록해야 하는데, 신채호 선생의 해박한 역사관은 나로 하여금 그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월 총선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준동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공포가 합해져 양측의 대립은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이 제주 4•3 사건은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 사망자만 1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에 달한다.
당시 군경은 무장대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제주도민 1만여 명을 학살하거나 마을 수십 곳을 불태운 것으로 진상조사를 통해 확인됐다(신채호 선생 저서에서).
대한민국 수립 이후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승만이 출현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이데올로기, 이념 싸움이 난무했다. 당시 이승만이 반민특위 친일 척결을 반대한 것 또한 잘못된 것을 누구도 부인 못한다. 그로 인해 삼팔선이 갈리고, 동족상잔의 피를 불렀던 6.25의 전초전이 된 것도 이승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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