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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그런 의미로 본다 해도 이따금씩 난 남편의 절친이었던 그 친구를 생각하면 안부를 묻고 싶고, 술을 워낙 좋아하던 친구여서 건강하게 잘 살아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기도, 애잔한 그리움에 젖기도 한다. 그때 그 친구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하면 고마워 다시 한 번 코끝이 찡해 온다. 


 그리고 그때 친구가 이민을 결정한 데에는 친구의 형님이 미국에 살았던 이유도 있지만, 그 즈음 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게다가 작은 시누이가 아이들 셋을 데리고 우리 집엘 자주 오곤 해서 그런 점에서도 무척 지쳐 있을 때였다. 그래서 앞뒤 생각지 못하고 아이들을 두고 친정엘 가는 것에 크게 고민 하지 않았던 것은 어머님이 캐나다에서 나와 계시기도 했기에 딸들을 두고 친정에 가서 있었을 때였다.


 그러니 내겐 남편이요, 그 친구에겐 아끼던 친구가 어서 자리를 잡아야 되겠다 싶은 사려 깊은 우정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지금까지도 난 알지 못한다. 그때 시어머니가 어떻게 우리 친정 집을 찾아 오셨는지. 그 결과 난 시집으로 다시 돌아갔고 두 번도 친정 행은 하지 않았다.


 많은 부부들이 살다가 헤어지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봐야 할 것 같다. 첫째는 남자가 온전하게 식구들을 경제적으로 책임을 질 수 없을 때, 둘째는 남편이 외도를 한 경우에 자식이 있기에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갈등을 겪다가 막다른 결정을 하기도 한다.


 남편은 막내였건만 우린 결혼을 하면서부터 어머니와 조카와 살게 되었었다. 두 분 아주버님이 캐나다에 계셨기에 신혼살림을 그렇게 시작을 했었다. 머지않아 어머니와 조카는 두 분 아주버님이 계셨던 캐나다로 들어오셨지만 작은 시누이가 애 셋을 데리고 이틀이 멀다 하고 우리 집으로 오니 심적인 부담이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생활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니 집을 팔아 전세로 나앉으면서 뭘 해봐야 하는가 고심하던 차에 남편 친구와 대리점을 시작하긴 했으나, 그 동안 피폐해진 내 심신이 뭘 어찌해 보겠다는 깊은 사고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마침 어머님이 서울에 나와 계시니 남편이나 아이들 걱정도 접어 둘 수 있을 것 같아 친정으로 갔었던 거다. 


그런 상황을 친구가 알고 있었고, 우리의 불안해 보이던 결혼생활이 친구가 이민을 결정하는데 촉매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으니 미안하고 또 고맙기도 했었다. 결국 친구는 이민을 떠났고, 우린 이민을 오기 전까지 대리점을 운영하며 살았다. 


 또한 우리 부부를 끝까지 이어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딸들이다. 딸들은 우리 부부 사이를 견고하게, 튼실하게 이어주면서도 ‘가교역할’을 분명히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식을 낳고 갈라섰다는 부부가 있기도 하건만 난 딸자식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남편과 나, 우리가족이 있구나, 참으로 고마울 때가 많다. 


 역이민을 하려 한국에 나가 있을 때였다. 그때의 상황이라면 옴치고 뛰지도 못하고 있었기에 캐나다에 남겨 놓고 온 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이들도 염두에 둘 수 없는 그런 수렁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큰딸이 전화를 해서 “엄마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며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진정 엄마가 걱정이 되어 울먹이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 후 캐나다에 다시 들어와 이민 온지 10년이 넘는 그때까지도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니 아이들이 보기엔 엄마 아빠의 사이가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었나 보다. 어느 날 큰딸이 다부진 목소리로 비장한 각오까지 했는지 만약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딸들은 “엄마, 아빠 둘 다 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난 내심 딸아이가 고맙기도, 엄마인 나를 몰라도 잘 몰랐네 싶기도 했다. 난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질 것이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었다. 그것은 둘이 살아도 우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데, 게다가 따로따로 산다면 그건 더 어려울 것 같았으니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해보지 않았었다. 난 이혼하는 사람들을 보면 비난하기 보다는 용기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네 싶었다. 그러니 난 혼자서는 더더욱 힘들 것 같았으니 그래서도 갈라선다는 것은 생각조차도 해보지 않았다. 


 어쨌거나 우리 가정이 그만큼이라도 유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딸들의 역할이 너무나 컸음에 새삼 고맙고 미덥기도 하다. 딸들 역시도 그토록 가정을 지켜 내고 싶었기에 엄마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빠가 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간파를 해서 그런 부분을 보완해주려는 딸들이 있어 이만큼 명실상부한 가족을 꾸릴 수 있었지 않나, ‘자식’이란 확실한 끈이 있어 참으로 감사한다. 


 이민을 오기 전에는 친구의 배려덕분에 생활할 수 있었고, 이민지에서의 삶은 바르게, 성실하게 커준 딸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네 싶으니 새삼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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