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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일중 김충현 [예(藝)에 살다]를 읽고
leed2017

 

 전나무나 은행나무, 소나무는 나이가 5,600년을 넘는 것도 있다. 또한 나이가 많은 것일수록 웅장하고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을 견디어낸 이유로 뭇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꽃이나 사람은 다르다. 꽃이나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윤기가 빠져 볼품이 줄어들고 흉해진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모습을 되도록 젊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많은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나무와 사람 사이에서 나무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예술품은 은행나무나 소나무같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빛과 윤기를 더한다.


 이번에 범우사 도움으로 [예(藝)에 살다]가 출간되었다. 이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그야말로 밤이 늦도록 읽었다. 정완영 님의 [백수산고(白水散稿)]에 이어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정서적 갈증을 축여주는 시원함이었다. [예(藝)에 살다]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이다. 우선 독자 중에 일중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글을 읽을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선언한다.


 이 [예(藝)에 살다]가 무슨 내용을 담았으며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면을 더 보강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에는 나는 너무 작은 사람이다. 그러기에는 일중이 너무나 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뿐 아니라 이 땅에서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예술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에는 그는 너무 큰배다. 그래서 나는 대신 내가 어떻게 해서 일중 선생을 알게 된 데 대해서 말할까 한다.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대구에서 서울로 온 것은 1958년 이른봄이었다. 그 당시 나는 고등학교 때 읽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의 영향으로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 낸 세조에 맞서서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노들강변에 피 뿌리고 돌아가신 성삼문, 박팽년 등 여섯 명 충신(忠臣)의 절개를 드높이 존경하던 피 뜨거운 청년이었다. 어느 늦은 오후, 혼자서 버스를 타고 노량진에 있던 사육신묘에 참배를 간적이 있었다. 그 때 일중 선생이 한글로 쓴 시비를 보고 막연하게 "이런 사람한테 글씨를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는 3년 후에 그 꿈이 실현되었다. 지금은 나의 아내가 된 미석(美石) 정옥자의 소개로 관철동에 있던 동방연서회 문을 두드리고 지정(芝汀) 이규숙의 안내로 회원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맺은 인연이 1966년 내가 유학을 떠난 후에도 가끔 한국에 들를 때면 일중 선생님을 찾아뵙곤 했으니 오늘날까지 40년에 이른 셈이다.


 [예(藝)에 살다]의 43쪽에 나오는 '동방연서회' 다섯 글자는 지난 2년전 신계 김준섭, 현암 정상옥 등 여러분의 주선으로 결성된 동방연서회에서 붓글씨를 배운 사람들의 모임인 '일중묵연' 회원 여러분들에게도 그들 예술혼의 엄숙한 도장(道場)임과 동시에 안식처임에 틀림없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글씨에 대한 재주는 없지만 그것에 대한 흥취랄까 정서는 나름대로 즐기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동방연서회에서 백석, 석창, 신계, 중관, 현암 등 오늘날 서예계의 대가들과 함께 배웠다는 사실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하물며 일중 선생 밑에서 가로, 세로줄 긋기, 파임, 길 영(永)자부터 배운 영광이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내 비록 뛰어난 제자는 못되었다 하더라도 40년 동안 변함없는 내 인생 자랑거리의 하나인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 때 일중 선생이 나를 옆에서 지도하는 사진 하나라도 찍어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때늦은 후회를 해본다.


 [예에 살다]에 등장되는 인물들, 다시 말하면 일중 선생과 가깝게 지내던 어른들은 당시 이 나라 예술계를 주름잡던 큰 별들이었다. 그것은 한국 근세 서예사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한국 종합 예술의 한마당 축제가 펼쳐지는 것을 보는 것 같은 화려함과 웅장함을 준다.


 [예에 살다]를 보면 일중 선생은 영어로 말하면 그야말로 꽉 찬 삶(full life)을 산 어른이시다. 본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산악같이 우뚝한 세 자녀에 쌍둥이 손자까지 두셨으니 말이다.


[예(藝)에 살다] 132쪽의 [서예개관: 1970년 서단회고]라는 제목을 단 글을 보면 노(老)대가로서의 선생이 후학들에게 만세에 교훈이 될 수 있는 따끔한 말 한마디를 인용하며 이 글의 매듭을 지으려 한다.


 ". 모든 공부도 다 그렇겠지만 잘못 배우면 안 배우니만 같지 못하다. 한 번 잘못 든 버릇은 고칠래야 고쳐지지 않고 누습만 몸에 배이게 되는 것이니 얼마나 딱한 일이겠는가. 그리고 현대 감각이니 현대 의식이니 하여 별로 기초지식도 없는데다가 엉뚱한 멋을 부리려 하여 우스운 꼴을 연출하려 든다. 이것도 큰 걱정거리다. 서투른 멋은 금물인 줄 안다. 그뿐 아니라 어떤 작가의 창의성만 알고 그의 공정(工程)을 모른 채 그 창의를 닮으려 한다면 이는 수박 겉핥기라는 옛말도 있듯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니 아예 그런 생각조차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즈음 그러한 징후를 보았기에 한마다 붙여둔다."


 일중, 그는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다.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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