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설마’의 역사 500년(2)-율곡의 10만 대군 양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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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아주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이 말이 거저 생긴 것이 아니다. 속담은 반복되는 역사와 환경 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진실이다. 우리의 역사는 ‘설마’라는 단어와 아주 친숙해 왔다. 그래서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 나온 진실이다. 


우리 민족이 어떻게 ‘설마’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왔는지 지난 일을 되돌아 본다. 그리고 지금도 ‘설마’의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를 꼬집어 본다.


 1583년,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의 일이다. 오늘날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벼슬자리, 병조판서에 오른 이이 율곡이 선조 임금에게 진언을 하였다. “우리나라는 10만 병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국가대란이 일어날 징후가 예상됩니다.” 갑자기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는 율곡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임금은 그 이유가 궁금하였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일본의 움직이는 징후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나라의 백년대계를 내다 보는 혜안과 철학이 밝기로 이름난 율곡의 말에 임금은 한참 동안 생각을 하면서 걱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선조는 만조백관들을 모아 놓고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검토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왜 10만 명인가? 우리나라는 8도인데, 각 도마다 1만 명의 정예병역을 갖추게 하고, 수도인 한양을 방어하기 위하여는 최소한 2만의 정예군이 필요할 것이니까 10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율곡은 풀이를 하였다.  


조선이 10만의 강군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도 넘보는 자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일본이나 중국이나 오랑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넘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일본을 지적하였다. 


 당시 일본은 한참 동안 국내평정에 어지러웠으나 풍신수길의 세력이 일사천리로 진압해 나가고 있는 판인지라, 그 국지전이 다 끝나면 야심이 가득한 풍신수길이 조선을 넘보게 될 것이라고 예견을 한 것이 율곡의 혜안이었다. 그래서 10만 병력을 양성해 놓으면 풍신수길의 야욕을 예방할 수가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 때부터 우리 나라의 조정은 동인과 서인간에 당파싸움이 점차 격화되어 국내정세는 물론 세계를 보는 눈도 어두워지기 시작 하였다. 서인의 주류인 율곡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동인들이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의 당파싸움이 나날이 심화되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율곡의 말에는 많은 하자가 있사옵니다. 지금 나라의 양곡이 부족하여 백성들이 굶주리는 일이 다분한데 10만 명을 양병한다 함은 극히 불가하다고 사료됩니다. 또한 일본이 지금 내전에 온 힘을 쏟고 있는데 설마하니 그들이 조선에까지 여세를 미칠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요원한 상상이라고 사료됩니다. 바야흐로 식량이 부족하여 백성들이 기근을 면치 못하고 있는 판인데 전쟁 설까지 나돌면 민심이 흉흉해져서 불안감이 가세할 것이니 지나친 염려를 접으시옵소서.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우려는, 땅이 꺼질까를 염려하는 것과 같사옵니다”


 밤새워 염려를 하던 선조의 귀에는 동인들의 말이 가깝게 들려왔다. 그래서 10만 양병설은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는데, 10년 후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700척 13만 병력이 부산포 앞으로 들이닥쳤다.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다. 


설마 하던 우리나라는 7년간의 전쟁과 굶주림에 시달리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설마를 믿던 우리민족의 운명과 한반도는 참담한 비극의 현장으로 전락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일을 잘 알고 있지만 지금도 ‘설마 그럴라고?’하는 안이한 생각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우리 민족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설마의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북한의 공갈을 믿는 이가 없다. 그러나 미친개가 사람을 무는 일이 생긴다면 어이하겠는가?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한지 2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서울을 향한 일본군의 진격이 얼마나 빨랐는지 전쟁을 알리는 우리의 파발마보다도 빨랐다. 


그 때에 비가 얼마나 지독하게 계속 쏟아졌는지 부산포에서 왜구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가 서울에 전달될 수가 없었다. 왜구들이 수원에 도착했을 무렵에서야 선조는 일본군이 쳐들어 와서 전쟁이 발발한 것을 확실하게 알 수가 있었다. 


다급해진 선조는, 한밤중 어둠 속에서 부랴부랴 몽진 길에 올랐다. 임진강 나루터에 다다르니 사방천지가 칠흑으로 컴컴하여 몽진의 일행은 어떻게 강을 건너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한 이야기가 있다. 10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율곡은 임진강 나루턱 위에 정자를 지어 화석정(火釋停)이라 이름하였다. 이 정자를 지을 때에, 율곡 선생은 진두지휘를 하며, 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의 마루와 기둥을 닦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임종을 하면서는 이 정자와 관련하여 어려운 일이 닥치면 열어 보라고 봉투 하나를 남겼다고 한다. . 


 선조의 어가가 이 화석정 앞 나루에서 칠흑의 어둠에 휩싸여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에, 도승지 이항복이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율곡이 남긴 그 봉서를 열어 보았다.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쓰여 있었다. 말씀대로 불을 지르니 기름 묻은 그 정자가 대낮같이 밝게 주위를 밝혔다. 그리하여 선조의 어가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바로 그곳이 화석정(火釋停)이다. 


 무지한 설마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음은 이율곡 같은 훌륭한 예지의 석학이 있었기 때문이요, 이후에 임진왜란을 대승으로 이끈 이순신 같은 충절의 의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우리 한반도에서 설마 하다가 일어난 가장 큰 대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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