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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설마’의 역사 500년(3)-일본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
samkang39

 

 설마,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던 세 번째 이야기는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 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이야기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그러니까 1583년에 병조판서 율곡선생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다가 동인들의 세력에 밀려 좌절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져가며 계속해서 흉흉하게 나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풍신수길이 한국에 많은 첩자를 내보내어 조선의 민심이나 군사문제 파악, 당파싸움을 하는 조정의 양상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마도에서 부산포를 왔다 갔다 하던 밀무역 꾼들로 특채가 되어 첩자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그 첩자들은 승복을 입거나 거지행각을 하면서 팔도강산을 다 헤매고 다녔다. 중(僧)의 행세를 하고 방방곡곡을 헤매 돌고 있는 이 첩자들과의 이야기로 인하여 전쟁설 이야기가 은은히 퍼져나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들이 일본의 풍신수길이 풀어놓은 첩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정에서는 당파싸움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하물며 풍신수길이가 첩자를 보내서 조선의 내막을 샅샅이 염탐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였던 것이다.


 1589년, 풍신수길이 처음으로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확고한 실권자의 자리에 오르니 조선 침략의 소문은 점차 짙어져 가고 있었다. 14대 선조대왕은 이러한 불안한 소문을 어찌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일본에 통신사(문화사절)를 파견하여 그들의 동태를 살펴보고자 했던 것이다.


 한 일년쯤 일본을 두루 돌아다니며 문화사절 행세를 하면서 일본의 전쟁준비 현황을 살펴보고 오도록 한 것이다. 비밀리에 첩자 임무를 수행토록 밀지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속을 다 꿰뚫어 보듯이 선조의 그 통신사 파견의 계략을 알고 있었다. 참으로 엉성한 임금의 생각이었다. 


 1590년 3월, 당시 세력을 잡고 있던 서인 중에서 황윤길을 정사로 하고, 동인의 김성일을 부사로 하며, 서장관에는 동인의 허성을 임명하여, 그 해 3월에 일본의 사신이었던 종의지 등과 함께 출발을 하였다. 4월에 대마도를 거처 일본의 오사카에 도착을 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사신들은 바로 풍신수길을 만나지 못하고 3개월간이나 대기상태로 허송세월을 하게 하는 맥 빠진 일이 생겼다. 사건의 내막인즉, 일본이 벌써 우리 사절단의 진의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풍신수길이 이렇게 저렇게 이유를 만들어 우리의 사절들이 전국 순회를 제대로 할 수 없도록 선수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3개월의 대기상태 후에 겨우 만나 주었는데 그 푸대접이야말로 말할 것이 없었다. 


 조선왕조 실록에 기재되어 있는, 우리 사절단과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면담 상황은 다음과 같다. 


 “풍신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으틱틱하고, 주름이 져있어서, 마치 원숭이의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눈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 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하여 모시고 있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 준비를 전혀 해 놓지 않았고, 앞에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 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냈는데 수작(酬酌)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도요토미 히데 요시가 안으로 들어 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아니 하였다. 잠시 후에 편복(便服) 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다가, 조선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였다. 음악을 듣다가 어린 아이가 옷에다가 오줌을 누었다. 히데요시가 웃으면서 시녀를 불러 아이를 건네 주고, 다른 옷으로 갈아 입었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傍若無人)한 행동이었다.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1591년 3월, 일본을 일년간 돌아 다니다 돌아온 통신사 일행은 서울에 돌아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를 하였다. 그런데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보고내용은 정반대였다. 


 정사 황윤길, “전하! 일본을 돌아보고 온 저의 견문의 결과를 아뢰옵니다. 반드시 병화가 있을 듯 하옵니다. 항구마다 배들이 많이 정박하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것들이 모두 어선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히데요시의 눈은 광채가 있고, 담략이 남달라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전쟁을 대비하여야 할 줄로 아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부사 김성일, “히데요시의 관상을 보니 원숭이 같았고, 눈을 뜨는 모습이 마치 쥐와 같았으며, 생김새도 변변치 못하여 큰 일을 치를만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키니 사리에 어긋나는 줄로 아옵니다. 전쟁을 일으킬 만한 증거가 없었으며, 설마 전쟁을 일으킨다 하여도 그 먼 뱃길에 쉬운 일이겠습니까?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선조께서 이 두 사람의 제각기 다른 보고를 받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어정쩡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장관 허성을 불러 보고 느낀 대로 이야기 하라고 하였다. 


“제가 보고 느낀 바는 정사 황윤길의 의견과 같사옵니다.” 허성이 동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솔직하게 자기의 의사를 고하였다. 임금은 또 다시 미궁에 빠졌다. 왜냐? 당시 조정에서는 세자 책봉 문제를 놓고 서인과 동인이 한참 기싸움을 하였는데 선조 대왕의 의견이 동인 편으로 기울어짐에 정철 등 서인의 세력은 약화되어 갔다. 


새로 세력을 잡아가는 동인들은 패거리를 이루어 맨날 조정에 들어가 임금에게 김성일의 의견이 옳다고 간하니 임금은 차츰 그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기미가 없다고 강력히 주장을 하면서, 설마 일본 놈들이 쳐들어 온다 하여도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우겨대는 동인들의 간청에 선조는 또 다시 설마를 믿게 된 것이다. 


 동인에 속하면서도, 서인 황윤길의 편에 서서 정직하게 여행 보고를 한 허성은 동인들의 등살에 못 이겨 아주 피나는 고초를 겪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 통신사 사건은 오히려 분당의 빌미만 커졌을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1592년 4월, 이 통신사들이 일본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풍신수길이는 700척 13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당파싸움에 눈이 어둡고, 설마 설마 외면한 채, 안이한 길만을 찾아가려는 우리 민족의 속마음은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지금도 서울에 가보면 국민들의 안이한 안보의식을 외면하려는 모습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이 고질병을 고치지 못하는 한 우리 민족의 미래는 또 그렇게 비극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국가의 안보는 어떤 이념보다도, 자유와 인권보다도,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보다도 더 앞서있다는 것을 온 국민이 절실하게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임진왜란의 전철을 또 밟게 될 것이다. ‘설마’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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