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QC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samkang39
‘설마’의 역사 500년(8)-인조와 병자호란(1)
samkang39

 

 15대 광해군의 북인(北人) 당파정치 15년이 끝나고, 인조반정에 의하여 제 16대 인조가 1623년에 등극하였다.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으니 중립적이던 청나라에 대한 태도가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확 바뀌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1627년 청태종 홍타이치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때에 청나라는 10년간 볼모로 잡혀가 있던 강홍립 장군을 앞장 세우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광해군 시절, 명-청이 한참 싸우고 있었을 때에 명나라의 강요에 의하여 명나라 전선으로 원군을 이끌고 갔다가 참전 3일만에 9천여 명을 다 잃었다. 


광해군의 밀지에 따라, 잔병들을 이끌고 청군에게 투항을 한 장군이 강홍립이다. 그는 광해군의 밀지(임금이 신하에게 주는 영구 비밀의 약속)에 따라 농부출신들인 우리 병사들의 목숨을 아끼기 위하여 투항을 하였다. 그 농부출신 병사들을 다 귀향시키고 강홍립을 비롯한 몇몇 장군들만 심양에 남아서 10년간 볼모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청나라 홍타이치는 조선조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형제의 약속인 정묘화약을 맺고 일단은 물러갔다. 하지만 인조 조정의 신하들은 친명사상을 바꾸지 않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비난이나 하고 있었기에 다시금 홍타이치의 노여움을 사서 9년 후에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것이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오만하기 그지없던, 설마 설마나 떠들던 조선 조정의 선비들이었다. 


 1636년 12월, 청태종 홍타이치는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조선에게 많은 병선과 군사물자와 조공을 요구하며 형제의 맹약에서 군신의 맹약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력한 제의를 하며 시비를 걸어왔다. 


 친명파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조선에서 이를 거부하자 그는 명나라를 치기 전에 조선부터 없애겠다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청의 태도에 격분한 척화파의 배척소리가 드높아 있었으므로, 인조는 최명길의 주화론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사신의 인견도 불허하고 국서도 받지 아니 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나 실로 그 불화의 깊이는 명나라와의 관계였다. 


청나라를 배척할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무조건 오랑캐라고 하여 오만을 부렸던 인조의 배청정책은 너무도 큰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 나라가 망할 것이 명약관화인데도, 명나라와 전쟁 중에 있는 청태종이 설마 쳐들어 올라고? 또 설마의 DNA가 발동을 한 것이다. 아무런 대응력도 없이, 수염이나 쓰다듬고 앉아서 큰 소리를 쳤으니 참으로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1936년, 인조 14년, 12월 14일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창황망조하여 우선 왕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더불어 궁인들의 일파를 강화도로 피란케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인조 자신도 그곳으로 향하려는데, 이미 청나라의 군사들이 숨어들어와 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니, 그는 황급히 길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산 속으로 들어갔지만 청나라의 대군이 뒤를 따라와서 남한산성 포위작전을 벌이니 조선군은 손을 쓸 여지가 없었다. 


 이 때에 인조의 군병은 13,000명, 식량은 47일분이었다.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한 청태종의 군대는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포위를 당한 속에서도 조신들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누어 40일간이나 옥신각신을 하고 당파싸움만 하고 있었다. 왕자들이 피난을 가있는 강화도가 함락되고, 왕자와 비빈 궁녀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이리하여 산성 안에서는 더욱 당황하여 마침내 주화파 최명길 등의 의견을 쫓아, 포위 40일만에 인조는 성문을 열고 송파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였다. 그래서 이른바 성하지맹(城下之盟)의 군신맹약을 맺게 되었다.


 이는 반만년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겪은 최악의 수치요 비극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청태종 홍타이찌는 이 자리에서 명과의 관계를 일체 끊게 하였고, 이전에 명나라에 행하여 오던 모든 사대주의의 예를 청나라에게 이행케 하였다. 또 두 왕자를 볼모로 심양에 데려가고 척화 강경파의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를 끌고 가서 처형하였다.
 그 뒤 척화파의 열렬한 신하 김상헌도 심양으로 잡혀가서 6년의 포로생활을 하다가 돌아왔다.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서울을 떠나면서 지은 비통한 시 한 수를 소개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

 

 

 삼전도에서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잔을 높이 받들어 항복의 예를 지켜야 했던 임금 인조의 가슴속은 마치 칼로 살점을 저미는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갔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척화의 죄목으로 잡혀 갔으니, 그 비통함을 어찌 글로서 표현하랴!


 인조는 친히 모화관까지 나아가 두 아들과 신하들을 전별할 때, 굴욕의 슬픔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껴 스스로 가슴을 치며 흐느껴 울었다. 장차 그 운명이 어찌 될지를 모르는 두 아들과 어쩌면 조선 땅을 떠나가서 찬서리 북녘 땅, 외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모르는 사랑하는 신하들… 모두는 서로 한없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정말로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느껴야 했다. 유혁연(柳赫然)이 이 아픔의 장면을 짧은 시 두 줄로 남겼다.

 

 

 서교에 가는 비는 군신의 눈물이요
 북궐에 엉킨 구름, 부자의 정이로다.

 

 

 볼모로 심양에 잡혀간 오달제, 윤집, 홍익한 등 3학사는 청태종을 보고도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고 태종을 오랑캐라고 호령을 하였다. 그러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고 낯선 오랑캐 땅에서 고혼(孤魂)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김상용은 강화도 성이 함락되던 날, 화약을 물고 성루에 올라가 자폭하였고, 척화의 화신 홍방언은 남한산성이 열리던 날 지자강 물에 투신자살하였다. 


그리고 강화도 방어사 김경징과 부장 이민구는 인조가 환궁한 뒤 목을 매달아 죽었다. 누구를 위하여 이들은 충절을 하였는가? 그 비참한 수모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명나라, 명나라 하며 염불 외우던 죄값은 이렇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남겼다. 


모두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설마, 설마의 역사를 믿어 온 우리 민족의 비운인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운명을 대비하며 점쳐봐야 할 대목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WWW.AHAIDEA.COM
4065 CHESSWOOD DR. NORTH YORK, ONTARIO,M3J 2R8, Canada
[email protected] | [email protected]
Ahaidea
캐나다 daum.ca와 대한민국 daum.net은 관련성이 없습니다.
Copyright © 2024 AHAIDEA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