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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설마’의 역사 500년(32)- 4.19 학생혁명
samkang39

 


 

 역사는 원인이 중요하지만 결과는 더 중요하다. 결과가 없는 역사는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일이라도 그 시작의 의도가 끝내 빛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아쉬움으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역사의 가치는 결과만이 말하는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부패정권을 뒤엎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세웠지만, 애당초 품었던 웅지를 실현하지 못하고, 1년만인 1962년 5.16군사혁명을 다시 맞아야 했던 일은 4.19의 의미를 많이 퇴색시켰다. 


하지만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처음으로 국민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민(학생)의 힘으로 부패를 척결하고, 민주주의 정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 발전사에 큰 획을 그은 일이라고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 중심제의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뒤엎고, 내각책임제의 새로운 장면정부가 들어섰지만, 처음부터 혁명의 주체세력이 기성 세력이 아니고,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정치의 인맥이 변화된 것이 없었다. 새로운 정부라고 하였지만, 실질적 세력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기에 획기적인 변화를 이룩하지 못하고 기존 정파 싸움에 휘말리고 있었다. 


주체세력이 기성정권세력이 아닌 학생들이었기에 이를 혁명이라 하지 아니하고 의거라고 해석을 하는 분들도 있다. 아무튼 4.19혁명은 국민들이 민주주의 의식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시금석이 된 것이다. 


 4.19혁명의 개요 


1960년 4월, 대한민국의 재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에 반발하여, 선거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3.15 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시위 도중 3월 18일에 실종된 김주열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르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승만 대통령은 책임을 지고 하야를 하였으며,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의 일가족은 맏아들 이강석에 의하여 모두 권총으로 동반자살을 하는 비운으로 끝을 맺었다. 


4.19혁명의 배경


1960년 1월말,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조병옥, 그리고 부통령 후보는 장면이었다. 자유당은 정부통령 후보에 이승만과 이기붕이었다. 


선거운동 도중에 조병옥이 신병에 의하여 하와이로 치료 차 건너가게 되었고, 2월 25일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대통령 단독후보가 되었지만, 부통령으로는 이기붕과 장면의 대결이 더욱 격화 되었다. 집권당인 자유당은 이기붕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부정선거 활동에 열을 올렸다. 


 정부의 공무원들을 통해 선거운동 망을 조직하고, 경찰이 선거운동에 가담을 하였으며, 금품을 살포하는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3.15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내무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을 함으로써 마산시민들의 분노 감을 달아 오르게 하였다. 결국 3월 18일, 내무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강학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그렇게 일단락을 짖는 듯 하였지만 4월 11일, 마산시위 때에 행방불명이었던 마산상고 김주열군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결과가 발표되지 아니 하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머리 뒤통수까지 최루탄이 박혀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드디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8일 오후 4시경, 서울 고려대학교 학생 3,000명이 데모 도중에 유진오 총장의 만류로 데모를 중단하고 귀가를 하는 중에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폭력배들이 종로 4가 천일백화점 앞에 나타나서 취재기자와 학생들을 습격하였다. 


 4월 19일 시위와 계엄령 선포


 서울지역 총학생회간에 물밑 논의를 통하여 19일 오전 9시, 일제히 경무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행동지침을 정하였다. 경무대 앞에는 대학생만 2만여 명을 헤아릴 만큼 엄청난 군중이 몰려 들었다. 여기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삽시간에 사망 21명, 부상 172명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수많은 대학생들의 궐기에 고무되어 자극을 받던 중고등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리는 이기붕 자택으로 몰려갔다. 학생들은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 와중에 곳곳에서 경찰의 발포가 자행돼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제 1공화국의 세력 3인자, 경무대 경찰서장(지금의 경호실장) 곽영주는 곡사포를 동원하여 학생들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경무대 정문을 부수고 학생들이 쳐들어오니, 갑자기 군인들이 나타나서 덮쳤다. 여기에서 또 많은 학생들이 희생되었다. 경무대 앞에서의 희생자는 모두 183명이었다. 


 한편 시내의 시위대는 경찰차를 전복시키고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제1공화국 정부는 오후 3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한편 부통령 후보자 이기붕은 이미 자택을 빠져나와 경기도 양주의 모 육군 부대로 피신을 하였다.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은 시위를 강경 진압하지 않고 아주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여기에서 당시 데모에 참여하였다가 희생된 한성여자중학교 학생 진숙영(16세)양이 어머니에게 드린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소개한다. 그 당시에 필자도 대학생으로 시위대에 끼어 있었기에 진숙영양의 그 유서는 필자의 가슴을 울렸다.

 


 
어머님께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뻐해 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 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남기고 진숙영은 마지막 길을 갔다.


 4.19 이후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다. 4월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을 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미대사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할 것을 권유하였다. 법무장관 권승렬, 신임 외무장관 허정 등도 이승만의 하야를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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