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이 심한 것이 치매라 보면 나는 그 초기증상 임이 분명하다. 유명한 19세기 독일 음악가 바그너(Wagner)의 건망증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외출할 때는 문에다 “지금 바그너 외출 중, 몇 시에 돌아옴”이라는 팻말을 달아놓는데,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와 자기집 문에 달린 그 팻말을 보고는 “허! 이 친구 또 외출했군” 했다니 아무래도 한 수 위인 건 확실하다. 


약간의 건망증이야 삶의 양념으로 애교일 수 있지만 잦게 되면 삶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도가 지나치면 일단은 병이 아닌가 의심해 보게 된다. 시시콜콜 모조리 기억하는 총기 좋은 사람이나 기차시간표처럼 정확한 사람보다는 약간의 건망증과 좀은 어눌한 푼수 끼가 삶의 여유일 수 있다고 봐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겐 심각한 고민거리일 수 있다.


“안녕하세요?” 한국식품점에서 만난 어여쁜 젊은 여인으로부터 받은 인사였는데,


“네! 그런데 누구시더라” 이쯤 되면 나의 실수는 엎질러진 물이다. 


“저 모르세요? 미세스 H예요”


“와이고! 오늘따라 너무 젊어 보여 처년 줄 알고 그만!!” 묘하게 둘러대긴 했지만 나의 건망증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자주 만나는 친구 부인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사람을 몰라보는 실수도 실수지만, 이름 외우기는 정말로 난감한 지경이다. 10년 지기 친구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곤혹스러울 때가 어디 한두 번이더냐. 


서양 사람들은 남 이름 외우기 천재들이다. 우리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과 통성명을 하면 서양인 백 명이면 백 명이 내 이름을 기억해 주는데 나는 백 명 중 한 명의 이름도 거짓말처럼 기억해내 지지가 않는다.


한번은 문우인 시인 J씨의 성을 다른 성으로 잘못 불렀다가 “여형, 아직도 내 성을 모르오?” 아! 그때의 난감함, 무안함, 미안함, 당혹감을 무어라 변명할까? 조상 탓으로 돌릴 것인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10리길 학교를 걸어가서 첫 시간 책을 펴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책이 없다. 책보를 안 갖고 온 것이다. 총 없이 전투장으로 뛰어간 병사 격이다.


나는 초등하교서부터 대학까지 선생님 중 단 한 분의 이름도 지금 진실로 기억해 내지 못한다. 군대 입대해서 제대할 때까지 만난 훈련소장서부터 소대장까지 그 많은 상관 중에서 기억해 낼 수 있는 이름이 솔직히 단 한 명도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전화번호는 먹고 살기 위해서인지 우리가게 것 단 하나밖에 없다. 집 전화번호도 깜박깜박 잊어버려 안다고 못한다. 한번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갔는데 경찰의 신원조사 중 대답한 가게와 집 전화번호가 나중에 알고 보니 엉터리였다. 


지도자의 첫째 조건이 사람이름을 많이 외우는 일이라 하는데, 만약 내가 목사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저 장로 이름이 뭐더라” 하기 십상인데다 매주 새로 들어오는 교인 이름 외우기는 동해 물이 마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터이니 몇 개월 지탱하다 쫓겨날 것이고, 학교 교사가 되어 60명 학생이름 외우기보다는 고시 시험치는 편이 쉬울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행히도(?) 나는 일생 단 한 명의 부하를 거느려본 일이 없다. 나는 소설책을 읽으면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주인공의 이름을 하얗게 잊어버린다. 


그러면 나는 완전 고장 난 컴퓨터 두뇌의 소유자인가? 성급하게 그렇다고 단정하지는 않고 있다. 실오라기 같은 이유는 그래도 어떤 면에서는 남이 기억 못하는 것을 희한하게도 기억해 낼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운 공부 중에서, 이름까지 잊어버린 책 내용 중에서, 성경 구절 중에서, 그리고 그 많이 읽은 글 중에서, 살아오면서 격은 그 숱한 사건들 중에서, 이 망각의 창고에 숨어버린 재료들 중에서 글을 쓰는 도중 나도 모르게 생생히 불거져 나와 적절히 인용할 수 있을 때의 나의 즐거움은 필설로는 표현 못한다. 마치 고장 난 컴퓨터의 기억장치가 외부의 어떤 충격에 의해 어쩌다 작동이 될 때의 신기함이라 할까? 


물론 내 두뇌의 기억장치는 이처럼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실수가 잦고, 그 실수로 인해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하여 사교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것이 속상할 일이긴 해도, 이는 나의 노력과는 무관한 순 생리적 결함이니 조상 탓, 아니 하늘 탓으로나 돌릴까?


아니다. 어쩌면 하늘이 준 은총일 수도 있다. 그 많은 이름, 그 많은 사건, 그 많은 이야기, 그 아프고 괴로운 기억들, 그 잡다한 것들 하나하나를 내 작은 두뇌 속에다 모조리 기억 저장했다간 폭발하거나 미치고 말 것 같으니 말이다.


들어오는 대로 쪽쪽 잊어버리면서도 그 중 중요한 것들이 나도 모르게 두뇌 한쪽에 담겨 있다가 필요 시 써먹을 수 있는 좀은 약삭빠른 묘미, 이 어찌 신의 은총이라 아니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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