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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유명 음악가 시리즈 (V)-'쇼팽의 연인’ (Impromptu) (5)
youngho2017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여걸 문학가 조르주 상드와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1848년 11월16일 런던 길드홀(Guildhall) 연주회를 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이때 체중이 99파운드(45kg)도 안 되었고 무일푼이었다. 당시 혁명과 콜레라 때문에 모두들 파리를 떠나고 프랑숌과 들라크로와 등 친구들이 가끔 아파트로 찾아 왔을 뿐이었다. 


 1849년 여름까지 밀린 월 400프랑의 하숙비는 러시아의 부호 친구인 오브레스코프 공주가 은밀히 정산해 주었을 정도였다. 그 해 6월에는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가 방문하기도 했지만 조르주 상드는 코빼기도 안 비쳤다. 

 

 

 

 


 죽음을 예상한 쇼팽이 가족을 보고 싶어하자 1849년 8월8일 누나 루드비카(Ludwika Chopin Jedrzejewicz, 1807~1855)가 바르샤바에서 파리로 와서 그가 죽을 때까지 보살핀다. 한편 죽기 이틀 전에 쇼팽의 요청에 의해 그의 제자였던 델피나 포토카(Delfina Potocka, 1807~1877) 공작부인이 헨델 작곡의 '데팅겐 찬가(Dettingen Te Deum•1743)'를 노래하고 프랑숌이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첼로로 연주했다. 


 10월17일 새벽 2시경 쇼팽의 영혼은 그의 육체를 떠났다. 누이 루드비카, 쇼팽의 제자 피아니스트인 차르토리스카 공주, 절친한 친구 그르자이말라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註: 마르셀리나 차르토리스카 공주(Princess Marcelina Czartoryska, 1817~1894)는 폴란드 귀족 출신으로 비엔나에서 카를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에게서, 파리에서 쇼팽으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유럽을 순회하며 연주회를 열었고 프란츠 리스트, 프랑스 유명 인기 메조소프라노 가수였던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 1821~1910) 등과 협연하기도 했던 저명한 피아니스트다.] 

 

 

 

 


 다음날 솔랑쥐의 남편인 클레신저가 쇼팽의 데드 마스크와 그의 왼손을 석고로 본을 떴다. 그리고 다음해인 1850년 쇼팽의 무덤 묘비석 위에, 부러진 라이어(악보꽂이) 때문에 울고있는 음악의 여신 '에우테르페' 조각상을 흰 대리석으로 제작했다.


 10월30일에서야 파리 마들레느 교회에서 치러진 쇼팽의 장례식에는 외젠 들라크로와, 프란츠 리스트, 빅토르 위고, 까뮤 프레옐 등 유럽 전역에서 3천 명 이상의 유명인사가 참석했으나 정작 조르주 상드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날 장례식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유명성악가들에 의해 불려졌고, 쇼팽 작곡의 'Prelude' 제4번(E단조)과 제6번(B단조)이 연주되었으며, 발인식 때는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제2번 3악장 '장송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20세 때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19년 동안 외로움을 느끼며 살다 요절한 에트랑제 쇼팽.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을 가지 못한 채 파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묻혔다. 쇼팽의 사후 1주기에 루드비카가 가져온 폴란드의 흙이 제인 스털링에 의해 그의 무덤 위에 뿌려졌다.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누이 루드비카가 폴란드로 가져가서 바르샤바 성십자가 교회에 안치했다. [註: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 SS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Erich von dem Bach-Zelewski, 1899~1972)가 안전을 위해 은밀한 곳에 보관하였다가 쇼팽의 사후 96주년인 1945년 10월17일에 성십자가 교회에 반환하였다.] 


 쇼팽의 사인(死因)은 결핵으로 알려져 있으나 2017년에 그의 보존된 심장을 검시한 결과, 만성 결핵에 의한 합병증인 심낭염(心囊炎)이라는 치명적인 유전병이 원인이었다고 밝혀졌다. 


 한편 쇼팽이 사망한 후 '쇼팽의 과부'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제인 스털링을 두고 한 얘기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상드와 동갑내기였던 그녀는 쇼팽의 장례비는 물론 클레신저의 데드 마스크 및 조각상 건립 비용 5,000프랑을 지급했을 뿐만 아니라 쇼팽의 심장 보존용 특수항아리 제작 비용, 루드비카의 파리-폴란드 간 체제비 및 여행경비 일체를 부담했다. 

 

 

 

 


 게다가 쇼팽의 그랜드 피아노 구입 및 바르샤바로 운반하는 비용을 모두 부담했으며 상드가 쇼팽에게 보낸 200여 통의 편지를 수집하여 1851년 상드에게 되돌려주었다. 또 1849년 쇼팽의 사망 직전에 폴란드 화가인 테오필 크비아트코프스키(Teofil Kwiatkowski, 1809~1891)에게 의뢰하여 '쇼팽의 임종(Chopin on His Deathbed)'이라는 유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쇼팽이 사용하던 가구 등도 구입하여 일부는 에든버러의 캘더 하우스로 운반하여 '쇼팽 박물관'을 열었다. 그밖에 미공개 악보, 스케치, 친필 편지 등을 수집하여 일부는 루드비카를 통해 바르샤바 쇼팽 박물관에 기증했다. 


 살아있을 때 쇼팽을 유명하게 한 이는 조르주 상드였지만 죽은 후에는 제인 스털링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이러한 재정지원은 스웨덴 소프라노 가수였던 제니 린드가 익명으로 도왔다는 설이 있다. 


 쇼팽을 기리기 위해 바르샤바에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1927년 제1회를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중단되었지만 1955년 이후 5년마다 한 번씩 열리고 있다. 쇼팽의 기일인 10월17일 전후 3주에 걸쳐 개최되며 연주 곡목은 쇼팽의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 연령 제한은 17~28세이다. 

 

 

 

 


 2005년의 제15회 콩쿠르에서는 폴란드인 20명, 일본인 20명을 포함한 80명의 본선 진출자 중에서 한국의 임동혁(당시 21세)과 형 임동민(25세)이 2등이 없는 상태에서 공동 3위에 입상하였다. 임동혁은 본선에서 연주 도중 피아노 안에 조율 도구가 그대로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1악장을 끝낸 후 일단 연주를 멈추고, 점검 후에 다시 연주를 재개했다. 


 2015년 제17회 콩쿠르에서 한국의 조성진(趙成珍, 당시 21세)이 1위로 우승하였다. 이때 제9회 콩쿠르 우승자인 폴란드 출신 크리스티안 치메르만(Krystian Zimerman•62)은 그의 연주를 듣고 다른 참가자들의 연주를 듣기도 전에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게 조성진이 우승할 것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인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필리프 앙트르몽(Philippe Entremont•84)이 우승자 조성진에게 결선에서 10점 만점에 1점을 준 것은 '옥의 티'였다. 


 2등은 캐나다 퀘벡 출신의 찰스 리차드 하멜린(29)이 차지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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