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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길 산책
 

 


사람

 

사람들 앞에 섰다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고자 했더니
멀리서 보였다

 

내 자신을 모르는 페르소나
모든 것 잊으려 했다 
나를
너를

 

인생사를 하늘 위에 올려 보았다
연꽃처럼 피어난 뭉게구름이다
카멜리온 꽃의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진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지열이 시원하다고 미소 짓는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 어딘가에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간다

 

가변의 진리의 별빛 속
사람 사람
아 아 사람들이여


(*페르소나: 진실한 자아를 대신하는 사회적 심리적 자아발견)

 

 


 제가 좋아하는 이곳 대학의 젊은 교수에게 시 한편을 읽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인생에는 후배이지만 학문에는 나보다 선배입니다. 상기 시에 대한 이 교수의 감상입니다. 시평이 좋아 같이 음미코자 전제합니다.

 


김창한 박사


 민초 선생님의 시적 은유와 깊이를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의 제목은 ‘사람’이지만, 사실 내용은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냥 무시간적 무공간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있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시공을 사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의 개별적 존재는 그가 그동안 산 삶의 연륜과 궤적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또는 대화를 통해 ‘내’가 형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타자 없이 나를 말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 1연에서 “사람들 앞에 섰다”라고 시의 시작을 알립니다. 이런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면 ‘사람’이라는 추상적 제목 아래 시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할 수 없었겠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라는 것이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사람으로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예상을 깨고 다르게 다가오는 그 낯섦에 시적 화자는 당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깝다고 생각했더니 사실 멀고 멀다고 생각한 사람이 사실은 예기치 않게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바로 그러한 물음을 묻는 것이 제 2연입니다.


 ‘페르소나’라는 말은 배우의 역할이나 가면을 뜻하는데 깊은 자아의식 또는 무의식으로의 ‘나’(I)가 아니라 타자에게 드러난 ‘나’(me)입니다. 영어 식으로 보면, 나의 페르소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며, 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대상으로서의 나(me 나를, 나에게), 즉 내 스스로 생각하는 ‘나’와 타자가 나를 보는 ‘나’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엇박자가 일어나 소통이 안되거나 오해되거나 과소 되거나 과대되는 것입니다.


결국 아직 사회에 표현되지 않은 깊은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me)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내가 타자를 보는 ‘너’ 역시 타자의 자아의식이나 무의식이 아니라 타자의 페르소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타자에게 드러난 페르소나로서의 나는 이미 타자에게 각인된 나이기 때문에 잊을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습니다. 


이는 마치 나에게 드러난 타자의 페르소나와 그 이미지가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타자가 자기의 페르소나를 나에게서 지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페르소나로 형성된 타자와의 관계는 가면과 가면이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두 가면끼리의 만남은 뭉게구름처럼 모였다가도 흩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이고, 왜곡되어 멀리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카멜리온 꽃의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진다”라고 제 3연에서 허무함을 내뱉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꼭 허무한 것은 아닙니다. 은유란 다름이 만나 텅 빈 다름 속에서도 묘한 같음을 일으키듯이 우리의 인생도 은유적으로 새로운 관계로 다시 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결과적으로 뭉친 뭉게구름은 영원할 수 없고 흩어졌다가 또 흩어지고 또 모이는 관계입니다. 


내 인생의 벗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원수 같은 존재가 벗이 되듯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새로운 은유형성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유에 절대성을 부여하면 그것은 은유로서의 기능을 상실해서 상투어가 되듯이 우리의 관계는 불변이 아니라 뭉쳤다고 흩어지고 또 새롭게 뭉쳐집니다. 


그래서 내 마음은 호수며, 산이며, 구름이며, 바람이며, 바다입니다. 내 마음이 호수일 때와 내 마음이 바다일 때가 다르듯이 사람들의 관계도 절대적으로 고정된 신뢰와 배신이 아니라 일시적인 흩어짐과 모임의 반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유는 현세의 문제이지 내세나 영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제 4연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지열이 시원하다고 미소 짓는다”를 저는 이런 맥락에서 해석합니다. 결국 그 뭉게구름 허망하게 산란한 뭉게구름의 열정, 즉 사랑과 배반의 열기도 식어 다시 빗방울로 떨어지고 다시 지열을 받아 하늘로 올라 뭉게구름이 될 것입니다. 이런 윤회적 반복의 노래가 이 4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시적 화자는 그러한 사랑과 배반의 장미를 넘어 새로움을 꿈꾸는 것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은유가 만들어 내는 예상치 않은 결과에 연연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관조의 단계에 들어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은유는 열정을 주지만 안식을 주지는 못합니다. 은유가 확장되어 이야기로 발전되면 우리는 그러한 은유가 만들어 놓는 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초월의 염원은 유한을 넘는 저편, 차안이 아니라 피안을 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연은 그런 초월을 향한 염원 속에서도 여전히 시적 화자는 현실적 존재이며 그런 자각 속에서 다시 관계라는 은유를 되새기는 아픔을 노래합니다. 지적 은유가 수많은 단어들의 조합 속에서 언어와 언어 사이가 필연적인 조합이 되듯이, 사람들의 관계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사람”의 반복은 아직도 은유적 성립과 해체가 연속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즉 유한한 존재, 다시 말해 문화적으로, 시공으로 조건 지어진 인간이 갖는 한계, 거기에서 오는 좌절 그리고 혹시 모를 예기치 않은 필연적 조우에 미련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초월, 피안, 영원을 꿈꾸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 땅 위에 발을 내딛고 사는 아주 인간적인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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