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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wlee
칼을 찬 시인 박용만-이상묵 장편소설 '칼의 길'을 읽고
ywlee

 
 

‘보던 책 덮어놓고 칼 빼어 높이 들고/닫는 말에 뛰어 올라 앞으로 나아가니/어 좋다 견양 총소리 사나이 몸을’(- 1911년 6월 7일자 <신한민보>에 실린 박용만 시조 '상무혼(尙武魂)'’

 

 

 

 


 토론토의 실력파 문인 이상묵 시인(전 문협회장)이 쓴 장편소설 '칼의 길(부제: 독립지사 박용만과 그의 시대)'을 흥미있게 읽고 있다. 이 작품은 이승만, 안창호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제시대 해외독립운동가들에 비해 그늘에 가려져 있던 박용만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팩션(Faction, 실화소설)으로, 그가 걸었던 사려 깊고 위대한 독립투쟁의 발자취를 실감나게 그려냈다.    


 당시 해외(미국)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노선은 크세 세 갈래로 나뉘었다. 이승만은 외교, 안창호는 교육을 중시했던 반면, 탁월한 언론인이요 정치학도였던 박용만은 조국 독립을 위해선 공허한 탁상공론보다 한 자루의 총과 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설파하고 무장투쟁을 실천하는데 헌신했다.


 미주 3대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박용만 선생은 본래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낸 뛰어난 저널리스트였으며,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시종일관 무력투쟁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해외 최초의 사관학교인 군사학교를 창설해 미주 동포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0…저자의 말마따나 박용만 선생의 매력은 그가 '칼을 찬 시인'이었다는 것이다. 네브래스카의 소년병 학교에서나 하와이의 대조선 독립군단을 훈련 지휘할 때 군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허리에 긴 훈련도를 찬 모습은 늠름한 무인(武人)의 기상이 넘친다. 그러나 그의 능력이나 소양은 그에 한정되거나 쏠려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상식을 어쩌면 그처럼 뒤집을 수 있는지, 그의 글 솜씨 역시 찬탄을 자아낸다.”고 저자는 탄복했다. 


 박용만 선생은 군사학과 함께 정치학을 전공했기에 해외동포들의 독립투쟁 방향을 제시하고 활동역량을 조직해내는 데 기관차 역할을 했다. 특히 언론인으로서 동포들을 계몽하는 데도 공적이 지대했다. 


 그런 굵직한 자취 말고도 산골물처럼 투명한 문학적 정서와 조선말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주고 있으니 경탄스러울 뿐이다. ‘야영에 칼을 잡고 홀로 순찰하니/달은 기울고 별은 듬성하니 한밤중이네/한 걸음 내딛고 세 걸음에 멈춰 서니/곳곳의 봉화연기는 모두 구름인 듯 하고나’(野營杖劍獨巡軍/殘月疎星夜己分  /一步徘徊三步立/烽烟處處盡疑雲). 네브래스카주립대에서 ROTC 훈련을 받으며 지었다는 이 한시는 중국의 여느 유명 시인 못잖은 기품과 기상이 이글거린다. 


 선생은 저널리스트로서 명문의 정치논설을 썼을 뿐 아니라 마음속 느낌이나 생각을 아름답고 선명하게 표현할 줄 알았다. 그는 이처럼 선비로서 탁월한 문학적 소양을 타고 났으나 당시 시대가 한가한 문향(文香)에 빠지게 놓아주질 않았다. 일제치하에서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군사적 대응이었기에 그의 집념은 점차 문(文) 보다 무(武)에 더 기울어갈 수밖에 없었다. 


 決志修兵學(병학을 공부하기로 뜻을 정하다)는 시는 그의 결심을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壯志平生好讀兵/蒼磨一劍捧秋聲/互千萬古丈夫業/文武兼全然後成’(장한 뜻으로 평생 병서 읽기를 좋아하며/칼날을 푸르게 가니 가을에 나는 소리 같고/천만년 예부터 장부의 사업이란/문무를 아울러 갖춰야 이뤄지는 것이니라). '칼날을 푸르게 가니 가을에 나는 소리 같고'라는 구절은 마치 서릿발 같다.  


0…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기 무려 8년 반 전에 망명정부 성격을 지닌 ’무형국가’ 설립의 필요성을 주창한 위대한 선각자는 그러나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열단원 이해명)의 손에 암살 당한다. 이 장면은 독립운동단체 내부에서조차 동족간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저자는 잉걸불 같은 박용만 선생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이 평전을 엮는다고 밝혔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아직도 일각에서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이승만의 저열한 행태가 가감없이 드러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필요성까지 제기한다. 한때 박용만과 의형제를 맺기도 한 이승만이지만 그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해외 한인단체를 주도하기 위해 사익(私益)을 앞세웠다. 


 “이번에 이승만이 일으킨 풍파(1915년 하와이 국민회 전복)는 그 시비의 곡직이 분명한데 아직도 그 불의(不義)를 맹종하는 동포들이 있다. 해외단체의 작은 시비 같으나 민족사업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며 만일 조국이 광복된 후에 이와 같은 인도자와 민기(民氣)가 있으면 국가와 민족의 비운을 초래할 것이다.” –‘이승만의 다른 얼굴’ 중.  
 저자가 설파하듯, 국가와 민족의 비운에 대해서는 주관에 따라 평가가 다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현재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해방 후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에서 역부족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승만은 분단 고착화를 온몸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웠다고 하지만 헌법을 유린하고 3선 개헌을 시도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대신 스스로 짓밟으려다 국민의 저항에 의해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박용만은 약 30년 후에 일어날 일을 정확히 예언한 셈이다.      

      
 자칫 묻힐 뻔한 위대한 독립사상가를 발굴해 세상에 널리 알린 이상묵 시인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저자의 탄탄한 글 실력이야 정평이 나 있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이런 문인과 함께 이민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행복감을 느낀다. 우리 같은 해외동포, 특히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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