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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TOPIC
Hwanghyunsoo
ywlee
2021-05-13
사랑은 오래 참는 것-빌 게이츠의 이혼을 보며

  ▲빌 & 멀린다 게이츠의 다정했던 모습    똑똑한 괴짜 빌 게이츠(65)와 멀린다(56)는 사내(社內) 커플로 만났다. 1975년 게이츠가 세운 마이크로소프트(MS)에 멀린다가 입사한 것은 1987년. 게이츠는 하버드대를 2년 다니다 중퇴하고 회사를 창업한 천재였고, 멀린다 역시 학창시절부터 컴퓨터 게임과 프로그램에 몰두했다. 그녀는 미 중부 명문 듀크대에서 MBA를 취득하고 MS에 입사했다. 그녀의 첫 직장이었다.    아홉 살 차이인 게이츠와 멀린다는 MS의 공식석상에서 처음 만났다. MS 직원 만찬에서 멀린다와 마주친 게이츠가 데이트를 신청해 인연이 이어졌다. 둘이 가정을 꾸린 건 1994년. 게이츠 38세, 멀린다 29세였다. 결혼식은 하와이에서 열렸고 당시에도 게이츠는 이미 억만장자였다.    0…이후 두 사람은 함께 재단을 설립, 운영하며 빈곤과 불평등 퇴치, 교육확대 등을 위해 노력하며 27년간 부부이자 동지로서 함께 성장했다. 2000년 설립한 빌 & 멀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은 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되는 민간재단 중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재단이다.    ‘게이츠 가(家)의 선한 열정’에 의해 운영되는 것으로 유명한 이 재단은 막대한 재정 규모와 적절한 기부처를 찾는 경영기법으로 전 세계 자선재단 중에도 가장 선도적이고 모범적인 단체로 인정받고 있고 재단을 설립한 게이츠 부부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자선가 중 하나로 존경받아 왔다.    말라리아 퇴치 등 제3세계의 빈곤문제와 질병 퇴치에 꾸준한 관심을 쏟고 있는 두 사람은 특히 코로나 사태 이후 백신개발 지원에 전념하는 등 억만장자 모범 부부의 모습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0…천문학적 부(富)를 일구고 세 자녀를 잘 키우며 범지구적 프로젝트로 자선을 베푸는 등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던 모범 커플. 세계인의 부러움과 존경을 한몸에 받던 이들의 결별소식에 지구촌이 깜짝 놀랐다.    평소 안정적인 모범부부 이미지가 강했던 만큼 이들의 이혼뉴스는 세인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이들의 결별은 부부의 개인차원을 넘어 차후 초래될 파장과 의미가 크다. 세계 최대의 모범 자선단체 앞날은 어떻게 될지, 재단이 추진하던 질병과 가난, 코로나 퇴치, 기후변화 등 글로벌 프로젝트들엔 어떤 변화가 올지.    1,400억 달러가 넘는 게이츠의 재산이 어떻게 분할될지도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무엇보다 관심이 쏠리는 것은 그들의 이혼 사유다. 왜, 무엇이 부족해서, 이제 와 헤어지는가. 이들은 각자 트위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노력을 한 뒤 우리는 결혼생활을 끝내기로 했다. 지난 27년 동안 세 아이를 길렀고 세계 모든 이들이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도록 재단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 사명에 대한 믿음을 계속 공유하고 재단 일을 함께 해나갈 것이지만 삶의 다음 단계에서 우리가 커플로서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0…이혼사유가 모호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가운데 언론에는 흥미를 돋우는 기사들이 등장하고 있다. 빌이 멀린다를 만나기 전 연인사이였던 한 여성 소프트웨어 사업가와 결혼 후에도 계속 관계를 맺었다는 둥, 빌이 미성년자 성범죄자인 억만장자 금융인(제프리 엡스타인)과 친하게 지내는 데 대해 멀린다가 분노했다는 둥…    앞서 두 사람의 결혼 25주년이었던 2019년 멀린다는 “결혼 생활이 몹시 힘들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남편이 하루 16시간씩 일을 하느라 가족을 위한 시간을 내기 어렵다면서 한 얘기다. 빌이 호색한(好色漢)이었으며 게이츠 부부는 오래 전에 사실상 이혼을 결정한 상태였다는 보도도 있다.    하지만 부부 사이의 일은 부부만이 아는 것. 모든 기사는 추측일 뿐이다. 부러움을 받던 부부가 어느날 갑자기 헤어지는 사례가 어찌 이들 뿐이랴. 지금 이 시간에도 가정법원엔 숱한 부부들이 파경도장을 찍고 있다. 세인이 부러워하는 커플인 듯 하지만 말 못할 비밀은 있게 마련이다.   0…결혼생활이 마냥 평탄하다면 헤어지는 부부가 왜 나오겠나. 인생을 살다보면 숱한 굴곡이 있기 마련이며 그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해나가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따라서 결혼은 인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미셸 여사가 지난해 결혼 28주년을 앞두고 한  인터뷰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결혼생활과 관련해 "남편을 창밖으로 밀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 참기 어려운 시기가 있을 수 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고, 이게 몇 년 동안 지속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게 이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는 끝났어' 라고 포기하면 안된다. 그렇게 해서 끝날 것이라면 내 남편과 나는 몇번이고 헤어졌을 것이다. 그때마다 뛰쳐나가고 포기했다면 결혼생활의 아름다움을 놓쳤을 것이다.”   0…아무리 금슬좋은 부부라도 가끔은 틈이 벌어질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인내다. ‘님’ 글자에 점 하나만 잘못 찍으면 바로 ‘남’이 되어버리는 것이 부부관계다. 그러니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사랑과 인내는 동의어다. 성경에도 일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고린도전서 13:4-8)     (사장)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Hwanghyunsoo
2021-05-13
아내의 말을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다

   방문 판매원을 하고 있는 학교 동문이 “90일 동안 책을 가지고 돌아다녔지만 결국 한 세트도 팔지 못했다”는 말에 책을 샀다. 1980년대에는 이렇게 책을 직접 판매하러 다니는 영업 사원들이 많았는데, ‘눈물로 호소해’ 거의 강제로 산 책이 <경미문화사>의 ‘김영기’와 ‘김충현’ 서집과 ‘한국 민화’, ‘김은호’와 ‘김기창’의 화보집 등 모두 5권으로 한 세트다. 타블로이드 판형으로 올 칼라 인쇄에 권당 300여 페이지여서 책 무게도 만만찮은데, 정가가 권당 7만 5천 원으로 찍혀 있으니, 아마 한 세트에 30만 원은 넘게 준 것 같다. 당시 신입사원 월급이 20만 원 정도였으니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아마 36개월 할부로 나눠 냈을 것이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그 무거운 책을 싸고 다시 책장에 꽂고 하면서, ‘보지도 않는 이 책들을 왜 샀을까’하는 후회도 했지만 이제는 그 책을 판 사람의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난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아끼는 책이 ‘운보(雲甫) 김기창의 화집이다.    김기창(1914~2001)은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겨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화가다. 김기창이 그림을 그리게 된 데는 어머니 한윤명의 자식 사랑에서 시작한다. 김기창은 8세에 앓은 장티푸스로 청신경 마비가 와서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승동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청각장애로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공책에 그림을 그렸다. 아들이 그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그림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그의 집은 창덕궁 앞 운니동에 있었는데 마침 근처에 이당(以堂) 김은호가 살고 있었다. 김은호는 이미 임금의 어진을 그려 '어진 화가'로 불리던 유명한 화가였다. 어머니는 김기창을 데리고 김은호의 집을 찾아가 지도를 부탁한다. 이때가 1930년, 김기창의 나이 17세 때였다. 김기창은 그림에 관해선 타고난 재주가 있어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다. 화실에 나가 그림을 배운 지 반년 만에 당시 미술계 등용문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처음으로 입선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 몸으로 입선을 한 것이 화제가 되어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승승장구하여 김은호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된다. 여러 전람회에서 상을 타자, 일본 유명 화가의 눈에 들어 초청을 받는다. 이후 여러 번 일본 미술계를 방문하며 한국화의 미술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그림을 그릴 것을 결심한다. 그동안 스승의 영향을 받아 단정한 필치로 얌전한 그림을 그렸는데, 자신의 장점인 강한 필선을 살려 빠른 획을 중심으로 생동감 있는 화면을 나타내고자 많은 노력한다.    일본을 오가며 미술 공부를 하던 김기창은 촉망받는 여류 화가 우향(雨鄕) 박래현(1920~1976)을 만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43년이었다. 당시 박래현은 24세로 동경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재원이었다. 그는 당시 화가로 유명하던 김기창을 만나려 운니동 김기창의 집으로 찾아갔다.    김기창은 1943년 봄, 박래현을 처음 만난 운명의 그 날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볼 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느지막이 집에 돌아왔다. 중문을 들어서는 내 눈앞에 마당 한복판이 환해 보였다. 가까이 가니까 ‘이거 꿈이 아닌가?’ 싶도록 아주 멋쟁이에 젊고 예쁜 여인이 산뜻한 흰 양장에 역시 흰 하이힐을 신고 단발한 모습으로 내 눈을 부시게 했다. 마당 가득히 환했다.”      김기창을 만났던 박래현 역시 그에게 받았던 강렬한 인상을 후일 이렇게 말했다. “내 앞에는 거대한 검은 바위 덩어리 마냥 시꺼먼 체구가 버티고 있어 순간 그것에 부딪히게 되었다. 엉겁결에 뒤로 물러서면서 그 시꺼먼 바위 덩어리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여기를 찾아오기 전 까지만 해도 김 선생은 하도 유명한 분이어서 적어도 칠십 노대가로 알고 찾아 뵙고 인사 올리러 왔던 것인데, 이제 내 눈앞에 태산 마냥 버티고 선 우람한 체구, 얼굴은 젊고 패기가 가득 차 보이는 미남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정신이 아찔했다.”라고 운보의 책에 회고한다.    첫눈에 반한 김기창은 박래현이 동경으로 돌아가자 계속 편지를 보내 그녀의 환심을 산다. 김기창의 끊임없는 열정으로 두 사람은 4년 뒤 결혼을 한다. 촉망받는 화가였으나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귀가 들리지 않는 청년과 일본에서 유학한 신여성 화가 박래현의 사랑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로맨틱하였다.    결혼한 두 사람은 부부 이전에 예술적 동반자였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미술 세계를 넓혀갔다. 같은 공간에서 살며 작업하다 보니 두 사람의 예술세계는 서로 다른 듯 닮아갔다. 아내 박래현은 네 자녀를 키우면서도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며 여러 차례 유럽, 이집트, 인도 등으로 여행을 하며 작품의 다양성을 꾀했다. 1966년 성신여대에서 교수로 있다가 1969년엔 혼자 미국에서 판화를 연구하여 1974년 귀국 판화전을 열기도 했다. 12회의 부부 전시회도 함께 가졌다.      김기창은 평생 아내의 말을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려 했다. 1976년 아내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실의에 빠져 있던 김기창은 아내의 뜻이 예술에 정진하라는 것임을 깨닫고 '바보 산수'라는 새로운 화풍의 그림 시리즈를 내놓는다.    한국의 전통적인 회화 양식인 민화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의 ‘바보 산수’는 도식적인 민화와 달리 해학과 익살을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마치 미술이 인간의 삶에서 어떤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가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김기창은 모든 것이 서구화되는 어려운 시대에 현대 한국화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알려 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김기창과 박래현은 미술 세계를 떠나 부부관계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았다. 요즘 황혼 부부들은 ‘60대는 살갗만 닿으면 이혼, 70대는 존재 자체가 이혼 사유’라고 하는 농담이 유행할 정도로 부부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린 김기창의 ‘바보 산수’는 더욱 값져 보이고 아름답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budongsancanada
2021-05-13
최등용씨(워털루 사업가), 캐나다한인사회 기부역사를 새로 쓰다

  무궁화요양원 인수 위해 100만 달러 쾌척…애타던 프로젝트 성사 눈앞   ▲최등용 대표     ▲최등용 대표 부부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 겸손 더해    캐나다한인사회의 기부역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주인공은 바로 최등용(영어명 Donald Choi, 82세) 사장.    토론토 서쪽 워털루에서 가구무역사업을 하고 있는 최등용 대표는 한인사회의 숙원사업인 무궁화요양원 재인수 프로젝트에 100만 달러라는 거액을 기부했다. 이는 반세기가 넘는 한인이민사에서 개인이 낸 가장 큰 액수이다.        최 대표의 기부로 인해 무궁화재인수 범동포 모금운동은 450만 달러 목표달성을 눈앞에 두게 됐다. 5월말 모금마감을 앞둔 12일 현재 모금액은 400여만 달러를 넘겨, 목표액에 거의 다가선 상황. 이달 초만 해도 목표액에서 170만 달러가 모자라 모금실패 우려가 제기됐고 일부에선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최 대표는 "요즘 모두가 어려울 때 한인사회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준다는 생각으로 기부를 결정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그는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앞으로 젊은세대를 포함해 한인사회에 나눔문화가 활성화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이번 거액기부 외에도 지난 40년간 한인장학재단, 스코필드장학재단, 불교인회 등 여러 한인단체에 해마다 수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총 액수는 수백만 달러로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는 한국에까지 장학사업을 확대했다.    최씨와 가깝게 지내는 김영배 전 스코필드박사기념장학회장은 "그는 필요한 곳이 있으면 서슴없이 지갑을 여는 통큰 사람"이라며 "코로나로 사업이 어려운데도 거액을 낸다고 했을 때 무척 놀랐고 더욱 존경스러웠다."고 말했다.   <동포사회 큰손 최등용씨는 누구>   이민 1세대, 자수성가형 사업가. 필요한 곳에 아낌없는 기부로 유명    1939년생으로 올해 82세인 최등용 대표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59학번)를 졸업하고  스웨덴에서 잠시 텍스타일 공부를 하다 1969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왔다.    처음엔 가발사업 등 여러 무역일에 손을 대다 홈하드웨어 회사에 근무하면서 사업 경험을 쌓게 된다. 그러다 1975년 키치너·워털루에 하드웨어&가구사업체인 'DONALD CHOI CANADA LIMITED' 회사를 창립하고 하드웨어와 가구 등을 취급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현재 워털루 산업단지에 위치한 회사 사무실, 창고, 공장 등에는 현지직원100여명 근무하고 있다. 지금은 유통업에 치중하고 있고 중국 등에서 수입되는 하드웨어와 가구는 캐나다의 주요 백화점에 납품되고 있다.    특히 장학사업에 애정을 쏟은 최 대표는 캐나다한인장학재단에 수십만달러를 기부하는가 하면, 스코필드장학재단, 워털루대 장학재단, 워털루대에 유학 오는 포항공대생에 장학금 지급, 워털루대 멀티미디어룸 설립금 기부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도움을 주고 있다.      최 대표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토론토에 한인불교인회관도 구입해 기증했고 조선족 어린이들 돕기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는 겸손하기로도 유명해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다시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선친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최 대표는 “최근 이민자들은 쉽고 편하게 자리를 잡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는데 밑바닥부터 몸소 체험하는 자세가 따르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며 “남의 나라에서 돈버는게 쉽겠습니까. 성실히 땀 흘리면 언젠가는 돌아옵니다. 모든 것이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주위를 돌아본다면 행복한 이민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포항공대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찍은 기념사진   ▲동포언론과의 인터뷰 장면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youngho2017
2021-05-13
WWI 배경 영화 (VII)-'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2)

  (지난 호에 이어)  홀어머니마저 죽자 고아가 된 8살의 유리 지바고(오마 샤리프의 외아들 타렉 샤리프가 실제 8살 때 출연했다)는 어머니가 즐겨 연주하던 발랄라이카를 물려받고, 부모님의 절친한 친구인 알렉산데르(랄프 리차드슨)와 안나 그로메코(시옵한 맥켄나) 부부에게 입양되어 그로메코가(家)의 7살 고명딸 토냐(메르시데스 루이즈)와 사이좋게 지내며 모스크바에서 양육된다.    한편 1912년 어느 겨울 밤, 라라 안티포바(줄리 크리스티)는 의상실을 경영하고 있는 어머니의 사업을 도와주는, 죽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어머니의 정부(情夫)인 나이 많은 저명인사 빅토르 코마로프스키(로드 스타이거)와 함께 사교계 연회장에 어머니가 독감에 걸려 대신 참석한다. 연회장 바깥 광장에는 라라의 애인인 이상주의적 혁명가 파벨(파샤) 안티포프(톰 코티네이)가 이끄는 시위대가 붉은 깃발을 흔들며 요란하게 '마르크스주의 찬가'를 합창한다.    무도회가 끝나고 눈썰매 마차를 타고 귀가하는 중에 빅토르는 라라에게 강제로 키스를 한다.    한편 이 무렵 코사크 기병대가 나타나 평화적인 시위를 하던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잔인하게 살육하는 현장을 발코니에서 지켜보던 닥터 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오마 샤리프)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본능적으로 밖으로 뛰쳐나가 부상자들을 치료하려고 하지만 기병대의 제지와 알렉산데르의 만류로 발길을 돌린다.    이즈음 집으로 돌아온 라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다음 날, 파리에 긴 여행을 갔던 토냐(제랄딘 채플린)가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프랑스에 소개된 젊은 러시아 시인들 중 유리가 첫 번째로 난 신문을 보여주는 토냐는 예쁜 분홍색 털모자와 코트를 걸치고 엄청 세련된 숙녀가 되어 나타난다. 어머니 안나는 여성의 직감으로 둘의 사랑의 감정을 남편보다 먼저 감지한다.    한편 그날 밤 파샤가 라라의 집으로 도망쳐 들어온다. 라라가 그의 얼굴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그는 시위 때 주웠던 총을 감춰달라고 부탁한다.    빅토르와 라라의 밀회가 계속된다. 빅토르가 사준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호텔방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리던 라라는, 뒤늦게 나타나 강제로 술을 먹이려는 그의 빰을 때리지만 17세의 처녀성을 잃은 육체의 기억은 강하다….    이윽고 딸과의 관계를 눈치 챈 라라의 어머니가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한다. 한 남자에게 모녀가 한꺼번에 농락 당한 사실에 분노와 수치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당황한 코마로프스키는 사람을 보내 그의 주치의 보리스 쿠르트 교수(죠프리 킨)를 급히 부른다.    그때 토냐와 함께 유리의 집에서 개최한 살롱 콘서트에 참석하여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던 쿠르트 교수는 급히 제자 유리를 데리고 라라의 집으로 간다. [註: 유대인 중산층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화가였던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당시 라흐마니노프와 톨스토이와도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두 의사는 위세척을 하여 그녀를 살려내는데 그녀는 무의식 중에 라라를 찾는다. 빅토르가 어머니가 살았다고 라라에게 알리러 가려고 하자 교수는 단호히 유리더러 가서 전하라고 명한다.    유리가 라라를 찾으러 집안을 두리 번 거리는 데 처음으로 '라라의 주제곡'이 은은하게 흐른다. 의상실의 희뿌연 창을 통해 방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운명의 여인 라라를 어렴풋이나마 보게 되는데, 마침 촛불을 들고 라라의 방에 들어온 코마로프스키와 눈이 마주친다….    돌아가는 마차에서 유리와 교수의 대화를 통해 빅토르는 유리 아버지의 친구로서 부친의 유언을 집행하면서 얼마 안 남은 유산을 가로챈 사기꾼이었지만, 한편으로 수단 좋은 사업가로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유쾌한 친구로 묘사된다.    장면은 허술한 노동자 식당. 빅토르와 라라가 앉아있는데 파샤가 들어온다. 파샤는 대뜸 "혁명은 라라보다 더 중요하다"며, "황량하지만 조용한 우랄 산맥에 있는 그라도프에 교사직도 구했다"고 말한다.    코마로프스키가 나이가 어려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라고 조심스럽게 얘기하자 "나이가 들면 나아지느냐?"고 되묻는 파샤. "인내심과 경험이 늘어난다."고 대답하는 빅토르. 파샤는 "인내심이 늘어난다고 늙어서 결혼을 해야 하느냐?"며 자기는 26살, 라라는 17살, 둘은 내년에 결혼할 거라고 용감하게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식당문이 '꽝'하고 닫히자 등 뒤에 대고 "젊은 십자군이군. 훌륭한 젊은이야."라고 말하는 코마로프스키.    그리고 라라에게 할 말이 있다며 가게로 돌아온 빅토르는, 세상엔 두 종류의 남자가 있는데 첫째는 고매하고 순결하여 세상의 존경을 받는 듯 하지만 사실은 멸시를 받는 부류로 특히 여자에게 불행을 잉태하는 남자로, 파샤가 이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자도 두 종류가 있는데 라라는 이 첫 번째가 아니라며 '매춘부'로 폄하하면서 따라서 이 결혼은 재난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이 말에 그의 빰을 때리는 라라! [註: 여담이지만 이때 로드 스타이거가 같이 그녀의 빰을 때리는데 이것은 대본에 없던 즉흥연기였고, 놀라는 줄리 크리스티도 연기가 아닌 자연적 반응이었다고 한다.]    이윽고 빅토르 코마로프스키는 그녀를 강제로 겁탈하고는 "강간이라고 생각지 마시오. 둘 다 즐긴거니까!"라고 내뱉고 떠난다.    복수심에 불타던 라라는 파샤를 위해 감추어둔 총을 갖고 스벤티츠키 저택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장으로 간다. 걸어 가는 중에 파샤를 만나지만 편지를 보냈으니 그걸 보면 다 알 거라며 한사코 뿌리치고 혼자 가는 라라.    한편 파티장에는 토냐와 유리도 참석하여 코마로프스키를 만난다. 불이 꺼지고 모두 크리스마스 트리에 촛불을 밝힌 후 화려한 무도회가 벌어진다. 유리와 토냐도 행복한 춤을 즐기는데 토냐가 "(라라를 처음으로 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봤다"고 하자 "그 여자가 바로 코 앞에 있잖아!"라고 말하는 유리.    이때 호스트인 스벤티츠키 부인(루아나 알카니즈)이 중요한 발표가 있다며 유리와 토냐를 무대에 세우고 "모스크바 굴지의 명문가 닥터 유리 지바고와 결혼할…"이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방의 총소리가 들린다. (다음 호에 계속)   ▲ 파리에 긴 여행을 갔던 토냐(제랄딘 채플린)가 예쁜 분홍색 털모자와 코트를 걸치고 엄청 세련된 숙녀가 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 뒤늦게 나타난 빅토르 코마로프스키(로드 스타이거)가 강제로 술을 먹이자 라라(줄리 크리스티)는 그의 빰을 때리지만….   ▲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파샤(톰 코티네이)가 빅토르를 만나, 혁명은 라라보다 더 중요하다며 자기는 26살, 라라는 17살, 둘은 내년에 결혼할 거라고 말한다.   ▲ 크리스마스 이브날 파티에서 토냐가 "(라라를 처음으로 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봤다"고 하자 "그 여자가 바로 코 앞에 있잖아!"라고 말하는 유리(오마 샤리프).   ▲ 무도회장에서 코마로프스키에게 총을 쏘는 라라. 그러나 왼손에 가벼운 총상을 입은 그는 라라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chungheesoo
2021-05-13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14)

  (지난 호에 이어) 4.16 1930년대 대공황 및 퀘벡독립 운동 1920년대는 북미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경제적 호황기였다. 그리고 북미 주민들은 이러한 호황이 영원히 갈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과소비와 비합리적 투기적 투자를 했다. 그래서 이러한 환상은 결국 1929년 10월 24일(목요일)에 New York 증시가 무너지면서 사라졌다. 그래서 이날을 암흑의 목요일(Black Thursday)라 한다. 그 후 북미 경제는 10년간의 대공황(Great Depression)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933년의 퀘벡 실직자율은 31% 이었고 주가는 폭락했다. 예를 들자면 Dupont de Nemours 의 주가는 $231에서 $22로 급락했다. 실직자들은 이민자와 여성이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항의도 했다. 퀘벡 정부는 무직자를 Montreal 북쪽에 있는 Abitibi 지역으로 보내 농사를 짓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Abitibi 국회 의원인 Hector Authier 는 이런 말을 했다. “ Faites donc savoir aux gens de Montreal que l’Abitibi n’est ni un hopital, ni un refuge et qu’il y a pas de Societe Saint-Vincent- de-Paul chez nous. Les gens sont charitables, mais actuellement nous avons assez de votre.’’ (Lacoursiere,p.148) (Montreal 주민에게 알린다. Abitibi는 병원도 아니고 피난처도 자선사업소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사람들 (Montreal 에서 보낸 사람들)은 친절하지만 실제로 그분들은 오지 않으면 좋겠다.) Abitibi 주민들은 지역개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Montreal 에서 오는 사람들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퀘벡 독립 운동가는 물론 이 기회를 이용하며 독립의 필요성을 내세웠다. 당시 퀘벡 지성인의 단체인 Les Jeune Canada 의 지도자 Paul Simard는 1935년 8월 4일 다음의 독립 선언을 했다. “Il nous faut conquerir a tout prix notre independance intellectuelle, politique, economique…Quebec doit devenir au plu tot un Etat libre dans lequel la nation canadienne-francaise sera absolument maitresse de ses destinees. Dans le domaine economique, il faut vaincre tous les spoliateurs etrangers par le ralliement de tous sous une meme banniere : celle d’un meme chef.’’ (Lacoursiere, p.148-149).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성적, 정치적 및 경제적 독립을 해야 한다. 퀘벡은 자유 국가가 되어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경제분야에서는 우리가 모시는 우리의 깃발 밑에 모여 강탈하는 외국인을 쫓아 내야 한다.) 1936년에 Duplessis 및 Villeneuve 추기경은 변화 없이는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캐나다는 깨지고 말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한편 또 하나의 퀘벡 국가주의자의 정신적 지도자인 Lionel Groulx 신부의 말을 들어 보자. “ Qu’on veuille ou pas, notre Etat francais, nous l’aurons : nous l’aurons jeune, fort, rayonnant et beau foyer spirituel, pole dynamique pour tout Amerique francaise. Nous aurons aussi un pays francais, un pays qui portera son ame dans son visage’’(Lacoursiere, p.149) (우리가 원하건 안 하건 우리는 프랑스계 나라를 세운다. 이 나라는 젊고, 강하고 사방에 빛나는 나라다. 또한 우리나라는 아메리카 프랑스 전역의 정신적 아궁이다. 우리나라 얼굴 속에서 우리의 혼을 볼 수 있다.) Groulx 신부는 차후에 자기의 입장을 바꾸었다. 그는 독립주의자는 아니고 연방주의자라고 해명 했다. 한편 젊은 정치인들은 l’Action liberale nationale 이라는 보수적 정당을 발족시켜 1936년 총선 때 Duplessis의 극 보수당과 합쳤다. 한편 정부의 무능을 극복 하기 위해 Jesuite 종교 단체에서는 시민복지학파 (Ecole sociale populaire)를 세워 사회 개혁을 호소하여 농사융자, 빈곤 모성 수당, 최소 노임, 모성의 직장포기 그리고 할부판매 금지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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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2021-05-13
임금 고종

   황현이 쓴 ‘매천야록’은 고종 재위 동안의 일기를 썼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고종 치세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적었습니다. 그의 책 ‘매천야록’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의 띄었습니다.  …서수붕이 처음 임금을 뵜을 때 조선의 기수(氣數: 저절로 오고가는 길흉화복의 운수)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임금이 그 연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우리나라(청)는 벼슬을 팔아먹은 지가 십년도 안되었는데 세상이 어지러워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국(조선)은 벼슬을 팔아먹은지 삼십년이나 되었는데도 임금 자리가 아직 편안합니다. 지수가 왕성하거나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이 크게 웃으며 부끄러움을 모르자 서수붕이 나가면서 말했다. “슬프구나 조선의 백성이여”  일개 공사가 한 나라 임금의 매관매직을 비웃었으나 임금은 그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위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 제26대 임금 고종입니다. 고종은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헌종의 어머니 조대비(妃)와 밀약을 하여 자기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김씨의 놀이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난국에서 빠져 나오는 수단으로 대원군의 아들을 임금 자리에 앉히는데 조비가 동의를 한 것이지요. 그러니 고종은 제왕수업이 없이 임금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혼인을 하기로 한 안동김씨 김병학의 따님과 약속을 파기하고 여주 민치록의 외동딸과 운현궁에서 결혼하였습니다.  고종은 성인이 되어서도 현명한 군주는 못되었다는게 사가들의 일반적인 평인 것  같습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12살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 맨처음 내린 명령이 “재동에 있는 군밤장수를 사형에 처하라”는 전교(傳敎)였다고 합니다. 아무리 어리고 철이 덜든 임금이라 하더라도 군밤 하나 달라는 것을 거절했다고 사형시키라니 이 어린 군주의 장래 치정(治政)을 예고하는 징조같이 보여 찜찜한 기분이 듭니다. 민치록의 딸 민비는 신랑보다 더 영리하고 재바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총명함과 기지는 모두 친정과 친정 족속들의  이권을 불리기 위한 것이었다는게 사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입니다.  고종 부부는 임금으로서의 체통(體統)에 맞지 않게 행동할 때가 자주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로 ‘매천야록’에 보면 임금께 생일 선물을 올리는데 민영환이 올린 비단 50필과 황저포 50필을 받고 임금의 낯빛이 변하더니 용상 아래로 집어던졌다 합니다. 다음에 민영소가 올리는 춘주 500필과 갑초 500필, 백동 5합, 바리 50개에 다른 물건을 보자 임금 얼굴이 기쁜 색으로 바뀌었다 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안할 짓을 마구 하니 이래서야 임금 체통이 설 수 있겠습니까? 임금 부부는 노래를 좋아해서 매일밤 평복을 입고 앉아서 왕후는 넙적다리를 치면서 “좋지 좋아” 하며 섬돌 아래서 잡가를 부르는 사람들에 박수를 보내고 놀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가끔이 아니라 거의 매일 이러니 상품과 막대한 상금을 어이 하겠습니까?. 그때 시국이 노래 부르고 춤 출 시국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민비는 성질이 사악한 데가 있어 의화군 이강을 낳은 상궁을 잡아서 음부의 양쪽 살을 도려낸 뒤 대권 밖으로 쫓아냈다고 합니다. 또한 고종은 부인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지 닷새만에 예전에 상궁으로 있던 엄씨를 다시 궁궐에 불러 들었습니다. 십여년 전에 고종이 엄씨를 총애한 적이 있는데 민비가 크게 화를 내어 민비가 엄씨를 죽이려 했답니다. 임금의 간곡한 만류로 엄씨는 죽음을 면해 대궐 밖으로 쫓겨 났는데 이제 민비가 죽가 겨우 닷새도 되지 않아 다시 불러들이니 백성들은 임금이 양심이 없다며 모두 한탄했답니다.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에 자기 어머니의 성급한 재혼을 빗대어 “상여를 따라가는 눈물도 마르기 전에…”라 했다더니 임금 고정이 그 꼴이 되고 말았네요.  민비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난가는 길에 지나가는 마을의 촌할미가 민비에게(중전인 줄 모르고) “중전인가 뭔가 때문에 이렇게 피난을 가는구려” 하는 말을 듣고 나중에 그 마을을 싹 없애버리라고 했답니다.  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고종 내외는 마음 한구석이 덜 채워졌는지 무당이나 풍수, 점쟁이, 사기꾼들의 말을 잘 믿을 뿐만 아니라 가끔 나라의 일도 이들의 말대로 처리할 때가 있었다 하니 놀랍고도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이들 부부는 확고한 외교방침이 없었던지 여러나라 세력들이 제나라 이익을 찾아서 한양 바닥에서 활동하는 동안 일본 세력에 붙었다가 러시아측에 붙었다가 별다른 계책도 없이 강자의 편에 붙으려고만 했습니다. 임금이 잠을 자는 곳이 안전한 곳이 못된다고 생각해서 잠은 러시아 공관에 가서 잤다니 이것이 한 나라의 임금이 할 짓이겠습니까?  고종은 자신을 사색당파의 노론에 속하는 사람으로 보고 노론을 만나면 ‘친구’고 소론은 ‘저쪽’, 남인과 북인은 ‘그놈’ 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임금도 사람인지라 좋고 싫어하는 당색이 있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노골화하고 이것이 인선(人選)에도 반영된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덕일에 의하면 망국 후 일제는 76명의 조선인에게 귀족의 작위와 돈을 주었는데 순종의 장인 윤택영도 있었답니다. 한나라 임금의 장인이 이꼴이니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당 소속을 쉽게 알 수 있는 64명 중 북인이 2명, 소론이 6명, 노론이 56명이었다고 합니다. 고종이 자처한 노론이 나라를 팔아먹는데 참여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고종은 아버지 이하응과 조대비와 밀약에서 왕좌에 앉혀진 임금입니다. 결혼은 민비 대신에 애당초 안동김씨 김병학의 딸을 왕후로 간택하기로 약속했는데 그 약속이 지켜지질 않았습니다. 애당초 약속대로 김병학의 따님이 왕후가 되었으면 고종의 생애가 달라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겠습까.  고종이 임금으로 있던 44년은 조선이 천천히 망해가기 시작할 때의 혼돈과 무질서가 시작된 뒤였습니다. 파도같이 밀려오는 외세에 노둔으로 먼죽번죽 하는 고종같은 임금이 제격이었는지 모릅니다. 44년간 임금자리에 있었던 고종은 망국군주가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다름 3가지인 것 같습니다.  첫째, 자질부족과 함량미달. 고종 내외가 매관매직을 상습으로 했습니다. 전국 수령의 3분의 2는 돈으로 산 것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둘째, 고종은 시대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죽였고 아관파천으로 온건 개화파를 죽였습니다. 또한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동학농민군을 죽였습니다. 천고의 말마따나 입에 달면 삼키고 입에 쓰면 뱉어내는 정치의 반복이었습니다. 셋째, 편의적 정치형태를 반복했습니다. 대세에 순응하는 척하다가 뒤집는 것이 고종 정치의 특색이었다 합니다.  이덕일에 따르면 고종이 독립운동가 이회영 등과 몰래 접촉하여 망명을 준비한 것이 마지막 승부수였다고 합니다. 1919년 1월20일 고종의 병이 깊어졌는데 그날 밤 숙직한 인물이 이완용과 이기용이었다지요. 고종은 그날 밤 이 두 매국노만 지켜보는 가운데 덕수궁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사바세상을 하직하는 눈을 감았다 합니다. 그때 그의 나의 만 67세였습니다. (2020. 12)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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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특별기고)티끌 모아 태산이다

  원옥재(문협회원)      며칠 전 신문 광고를 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이상 남의 일로만 생각하고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절실하게 한인요양원의 필요성을 깨달았던 경험은 어디로 사라지고, 벌써 그 일을 잊고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의 노년은 요양원과 관계가 없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나 싶어서다. 이미 수 년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께서는 생의 마지막 일년을 요양원에서 지내셨다. 심장마비를 겪으신 후라 일반 가정에서는 돌봐드리는 일에 한계가 있어 결국 요양원으로 모셔야 했었다.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송함에 영어로만 소통이 되는 곳이었기에 자식들의 마음고생이 어머니 못지 않게 많았다. 당시엔 한인요양원이 없었기에 캐슬뷰 요양원을 택했다. 비록 외국인 시설이라 해도 3층은 한인 노인 70여 명이 수용되어 있어 한인이 전혀 없는 곳보다는 나았다. 24시간 한국어 TV 방송을 시청할 수도 있고, 가끔 한국음식도 접할 수 있고, 주말마다 예배도 보고, 머리와 손톱 발톱을 깔끔하게 손질해주는 한인 자원봉사자들의 따뜻한 손길이 있어서 가족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비록 그렇다 해도 내 집을 떠나 사는 외로움과 불안, 그리고 불편함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언어와 음식문화가 달라서다. 누구나 몸이 아프고 외로울 때 찾게 되는 음식은 가족이 사랑과 정성으로 만든 따뜻한 한국음식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육신의 고통을 간호사들과 소통할 수가 없었으니 매사에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또한 서양인 큰 체구에 맞춰진 화장실은 우리 동양인에겐 불편하여 볼 때마다 불안스러웠다. 몇 년이 더 흘러 한인 전용의 무궁화요양원이 문을 활짝 열었다. 꼭 가보고 싶었던 그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은 비록 작은 규모일지라도 한국어로 간호사와 소통하고, 한식이 삼식 제공되며, 각종 예능 프로그램이 모두 한국어로 진행되는 걸 보니, 가족 같은 분위기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고향에 온듯 평안했다.  모든 시설이 우리에게 딱 맞춤이었다. 그제서야 외국인 요양원에서 한인 노인 한 분이 겨우 3개월 만에 한국어를 모두 잊어버렸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오타와에 사는 손주들의 수영 레슨을 같이 간 적이 있다. 그 수영장은 웅장한 시설에 보안까지 철저했는데 외형으로만 보아도 규모가 대단했다. 아들에 의하면 유대인 커뮤니티 소속 건물이라고 하는데 근처에는 그들만의 학교, 은행, 요양원, 도서관 등 모든 공공시설이 함께 모여 있다고 한다.  가슴이 멍할 정도로 감동에 젖어, 과연 우리는 언제 이런 커뮤니티 시설을 모두 갖출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본 적이 있다. 물론 그들이 이 땅에서 축적한 부와 명예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겠다. 헌데 우린 천심만고 끝에 세운 기존의 작은 한인요양원을 지켜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상태였으니 부끄럽지 않았겠는가. 사실 노년기에 들어선 한인 수에 비한다면 한인요양원이 더 필요한 실정인데 말이다.  한인요양원 건립은 일찍이(1993년) 동포들의 노력과 성금으로 시작하였으나, 어려움에 봉착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려 어렵게 우리에게 다가온 곳이 무궁화 요양원이다.  겨우 60침상의 작은 규모로 개원하자마자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 후 무궁화요양원의 소유권을 찾기 위해 법원명령에 의한 공개입찰에 대비하여 1차 모금(2017년)을 했었으나 기회를 놓치며 사설 요양원을 운영하는 리카케어에 매각되고 만다. 하지만 작년에 시작된 코로나19 부실 대응과 운영상의 실책으로 그 리카케어가 운영하는 사설 요양원들로부터 집단 사망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무궁화요양원의 입찰권이 다시 우리한테로 양도(2021년)되는 행운을 잡게 된 것이다. 거의 잃었다가 되찾은 무궁화요양원은 원래 온주 정부가 소수민족 복지정책의 하나로 한인사회에 제공되었던 것이니, 우리가 끝까지 우리 힘으로 지켜내야 할 명분 하나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이제 우리 부모님 세대는 거의 떠나시고 이민 1세들이 서서히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이곳에서 30-40년을 살았어도 아직도 한국말, 한국음식을 먹으며 작은 한국을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무궁화요양원이야말로 바로 백세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 미래의 마지막 거주지인 것이다.  다행히 1.5세와 2세 전문인 중심으로 인수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대대적으로 2차 모금을 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이미 동포들 중 큰 뜻으로 앞장을 선 분들이 많아 약 260만 불은 모금되었다 한다. 그러나 아직도 성공적인 매입에  필요한 다운페이먼트 450만 불에 이르려면 갈 길이 멀다. 본격적으로 범 동포모금운동이 5월말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 ‘티끌 모아 태산이다’라 하지 않던가. 비록 팬데믹으로 우울하고 막막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긴 하지만, 각 가정마다 작은 정성으로나마 기꺼이 동참해주길 바란다. 이는 우리의 프라이드를 지키는 일이며, 부모님 사랑을 위해서 아니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실천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생각된다. 결코 불구경하듯 남의 일로만 여기지 말자. 동포들의 동참을 진심으로 호소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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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과열된 주택시장, 코로나 집단면역으로 2023년까지 완만할 것” 전망

  CMHC, 올해 강세 이어지나 내년부터 이자율 상승과 높은 집값에 수요 억제돼      캐나다 주택시장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과열됐으나 백신 접종에 따른 집단면역으로 오는 2023년까지 완만해질 것으로 전망됐다.    캐나다모기지주택공사(CMHC) 연례전망에 따르면 광범위한 면역이 곧 달성되면서 전국 주택가격은 올해 연말까지 최소 62만8,400달러(11%↑)에서 최고 64만9,400달러(14%↑)로 예측됐다.    2022년에는 최소 65만1,600달러(3.7%↑)에서 최고 67만6,500달러(5%↑), 2023년에는 최소 66만9,500달러(2.7%↑)에서 최고 70만4,900달러(4%↑)를 내다봤다.    CMHC는 “팬데믹으로 촉발된 열기가 식으면서 향후 2년 동안 거래와 가격 모두 완만해질 것이다. 물론 정부에서 올해 코로나를 잘 통제해 경제 상황이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회귀를 감안했다”고 밝혔다.    거래에 대해서는 2021년 최저 58만4,000채에서 최고 60만2,300채에 달할 수 있다. 그러나 2022년은 둔화돼 최저 52만9,000채에서 최고 54만7,100채, 2023년은 최저 53만9,600채에서 최고 56만1,100채로 예상했다. 지난해의 경우 거래는 55만1,392채, 평균가격은 56만7,699달러였다.    CMHC는 “낮은 모기지율, 증가된 저축률, 고소득 가구의 구매 증가로 2021년 거래는 계속 강할 것이다. 그러나 내년과 2023년에는 상승하는 모기지율과 이미 높은 가격으로 인해 수요가 억제되면서 기존주택 거래가 점차 둔화된다"고 전망했다.  팬데믹으로 교외의 넓은 주택이나 카티지로 몰리는 현상이 앞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CMHC에 따르면 특히 과열됐던 광역토론토(GTA)의 경우 올해 주택가격이 최저 96만2,500달러에서 최고 108만7,600달러에 도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2022년은 최저 99만8,700달러에서 최고 115만1,400달러, 2023년은 최저 102만4,700달러에서 최고 120만5,400달러로 예측했다.    GTA의 기존주택 거래는 올해 계속 강세를 유지해 계절적 요인을 반영할 때 최저 9만8,600채에서 최고 11만3,500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2022년에는 상승하는 모기지 이자율로 둔화돼 최저 9만5,500채에서 최고 11만4,000채, 2023년에는 세계경제가 완전히 회복됨에 따라 이민과 고용이 증가해 최저 10만2,400채에서 최고 12만3,800채를 예상했다.  작년의 거래는 9만5,577채, 평균가격은 92만9,673달러였다.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임대 수요도 반등할 것이지만 공실률은 계속 높을 것으로 봤다.    한편, CMHC는 “코로나 상황과 주요 시장의 경제회복이 ?여전히 불확실하다. 예상보다 느린 백신접종으로 팬데믹이 길어질 수도 있고, 고용주들의 재택근무에 대한 대응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효태 부장 | [email protected])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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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집값 상승으로 내집 장만 위한 다운페이 마련 더욱 오래 걸려

  가계소득 10% 저축시, 토론토 일반주택 구입하려면 평균 25년, 콘도는 4.3년      광역토론토(GTA)의 주택가격 상승으로 내 집 장만을 위한 다운페이 마련에 더욱 오래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내셔날은행(NBC)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분기에 일반주택(콘도 제외) 구입을 위한 다운페이먼트 자금을 모으는데 평균 25년 걸렸다. 이는 지난 2월의 집계보다 1년 가까이 늘어난 것이며, 2018년 이후 가장 장기간으로 집계됐다.    토론토에서 연간 가계소득 18만3,594 달러인 가구가 소득의 10%를 저축할 때 297개월이 걸려야 평균 106만9,111 달러 주택의 다운페이를 할 수 있다.    내셔날은행은 “주택가격 상승이 소득 증가를 앞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대 최저였던 모기지 이자율이 오르기 시작했다. 몇 달 전에는 고객들이 약 1.5%의 고정금리를 사용했지만 이제 2%를 넘고 있다”고 밝혔다.      콘도의 경우는 1분기에 연간소득 12만5,202달러인 가구가 10%의 저축률로 평균 62만291 달러인 주택을 51개월(4.3년) 만에 다운페이 할 수 있었다. 이는 일반주택이 25년 걸리는 것에 비해 훨씬 빠른 기간이다.    전반적으로 GTA 주택가격이 오르고 있어 내 집 마련을 더욱 어렵게 하는 가운데 지난달에는 긍정적인 신호도 나타났다.    토론토부동산위원회(TRREB)에 따르면 최근 코로나 팬데믹 봉쇄조치로 거래 및 가격이 안정되는 경향을 보인 것. 지난 4월 GTA에서 거래는 전달보다 13%, 가격은 1% 각각 하락했다.    이 기간 단독주택 가격의 경우 416지역에서 전달에 비해 631달러 올랐지만 905지역에선 3,414달러 떨어졌다. 반단독, 타운하우스도 안정되는 모습였다.  단, 팬데믹 기간에 부진했던 콘도 가격은 상승으로 돌아섰다. (김효태 부장 | [email protected])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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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부디 평안히 잠드시라” 이진수 전 한인회장 동포들 애도 속에 영면

  ▲고 이진수 한인회장      이진수 전 토론토한인회장이 지난 6일(목) 갑작스레 별세했다. 향년 75세.    이 전 회장은 이날 오전 몸에 기운이 없는 등 이상을 느껴 가족들에 의해 리치몬드힐 메이저매켄지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잠시 후 세상을 떠났다. 공식 사인은 심장마비.    고인은 육군사관학교(27기) 출신으로 1971년 소위로 임관, 전방에서 근무하던 중 지뢰사고로 다리를 다쳐 중위로 예편했다. 93년 토론토로 이민 온 고인은 IBM캐나다에서 주식정보관리시스템 전문가로 99년부터 2009년까지 근무했다.    고인은 생전에 활발하게 단체활동을 하며 재향군인회 동부지회장, 한인회 이사, 평통자문위원(간사), 토론토한인회장(3회) 등을 역임했다.    특히 한인회장으로 6년간 재직하면서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한인회를 시스템화시켜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적자에 허덕이던 한인회 재정상태도 재정비한 점이 가장 높게 평가됐다. 2014년엔 한인이민 50년 역사를 정리한 '캐나다 한인사'를 출간했고, 지난해부터는 코로나로 힘든 시기에 '안녕캠페인'을 펼쳐 어려운 한인들을 도왔다.    수많은 한인동포들은 이회장이 평소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정직하고 올곧은 삶을 살았다며 갑작스럽게 떠난 고인을 추모, 애도했다.       생전에 토론토 성김안드레아천주교회에 출석한 고인은 지난 11일(화) 간소한 장례식을 거쳐 본인의 유언대로 화장됐으며 유해는 모국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지난 11일(화) 고 이진수 회장의 장례식 후 영구차가 마지막으로 한인회관에 들른 모습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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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캐나다 전역 임대료 하락세에도 일부 지역 반등 신호 나타나

  4월 토론토시 1베드룸 1,816달러, 2베드룸 2,407달러…전달보다 소폭 올라    전국 임대료가 하락세를 보였지만 일부 지역에선 반등 신호도 나타났다.    Rentals.ca와 Bullpen Research의 임대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달 월세는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구 토론토시를 포함한 일부 지역과 형태별로 전달보다 상승하기도 했다.    지난 4월에 Rentals.ca에 등재된 국내 임대 유닛의 평균 월세는 1,675달러로 작년 4월의 1,842달러에서 9%(167달러), 전월 대비로는 1% 하락했다. 이는 지난 2019년 8월의 1,954달러 최고치 이후 꾸준히 하락해 현재까지 279달러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온타리오와 B.C주 등 일부 주요 시장의 평균 월세가 고개를 들었다. 이에 업계는 세입자들의 수요 증가로 하락세가 멈춘 신호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코로나 3차 확산 속에서 임대시장으로 돌아오거나 월세가 오르기 전에 선점하는 수요가 나타난 것으로 여겼다.    이 기간 구 토론토시의 월세는 1베드룸이 1,816 달러, 2베드룸은 2,407 달러로 전달에 비해 각각 0.3%, 1.4% 올랐다. 물론 전년 대비로는 각각 14.7%, 10.4% 하락이지만 지난해 4월은 팬데믹의 시작으로 월세가 급락했기 때문에 상대적인 비교에 부적절한 면이 있다.      콘도 및 임대아파트 월세의 경우 토론토시가 2,004달러로 전달보다 0.9% 오르며 밴쿠버(2,200 달러, 1.6%↑)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비쌌다. 한인 밀집지역인 노스욕은 1,919달러로 월간 0.7% 하락했다.    단독주택 임대는 이 기간 2,502달러로 전달(2,385달러)보다 4.9% 오르면서 월간 가장 높은 상승폭을 보였다.    이 기간 전반적으로 베드룸이 많거나 유닛 규모가 클수록 월세 상승이 두드러진 현상도 나타났다.    지난 1~4월 600평방피트의 소형 유닛 평균 월세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20% 떨어졌고, 1,600 평방피트 이상 대형은 4% 올랐다.    이와 관련 보고서는 “세입자가 재택근무를 할 공간과 자녀를 위한 온라인 학습을 위해 더 넓은 공간을 찾았다. 따라서 팬데믹 기간에는 클수록 인기였다”고 설명했다. (김효태 부장 | [email protected])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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