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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섭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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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supyoon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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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4
가짜 교인 증명서

 

모두가 코로나19로 갇혀있다. 자기 지능에 도취되어 하늘마저 뚫을 듯 교만한 인류라는 동물이 아직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바이러스에 의해 결박되어 있는 셈인데, 매일 좋은 날씨로만 이어지는 기후는 결국 대지를 사막화 시키고 말듯이, 인간들이 문명이라는 도구로 생태계를 파괴하면서까지 자기들에게만 유용하고 편리한 것으로 채워가는 인간세계(생활공간)를 자연이 시간의 끝인 종말 쪽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는 설(說)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지나친 인구과잉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말도 나돈다. 지구라는 별이 품을 수 있는 인간의 수효는 대략 40억 정도일 터인데 이미 74억에 육박하니 그 수효를 고르려는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좀 섬뜩한 이야기다.

 

인간이라는 동물의 자연수명은 35세 정도라고 한다. 2천년 전 인간의 평균수명은 20세였고, 그 후 2천여 년이 지난 19세기엔 40세였다고 하는데, 오늘날 인류의 평균연령은 60세에 이르고 있고, 소위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70세에 육박하고 있다.

 

그런데도 영양과 의료의 기술을 계속 연구하는가 하면, 심지어 종교까지 동원해서 영원히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질치는 것이 인간이란 동물이다. 그러니 감당하기 어려운 전염병이 등장하는 것은 제 밥벌이도 못할 나이를 훌쩍 너머까지 살아가면서 그리고도 더 오래오래 살겠다는 인간들의 수명탐욕에 대한 자연의 징벌적 정화작용일 게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제목과 무관한 얘기가 너무 길어졌는데, 그런 자승자박 속에서도 모국에서 선거가 지나가는 동안에는 그 귀추를 기다리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 지나가버렸지만, 그러나 내겐 또 하나 눈 여겨 보는 관심거리가 있다. 검찰측과 피고인측의 공방이 재판정을 뜨겁게 달구는 조국 전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자기 딸에게 만들어 주었다는 '허위 표창장' 건이 그것이다.

 

 그 얘기에 관심을 갖는 까닭은 내 자신이 가짜 서류를 사용했던 경험이 있어서다. 그것은 이민오기 전 내가 마지막 5년 동안 근무했던 직장에 들어갈 때 사용했던 가짜 교인증명서다.

 

 ㅅ여자고등학교에 자리가 비어있다기에 직장을 옮겨볼 생각으로 서류를 준비하던 중에 기독교계 학교라며 교인증명서를 첨부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나로선 그런 걸 정상적으로 마련할 수 없었는데, 그러나 장모님이 출석하셨던 교회의 목사에게 의뢰해서 아주 간단하게 가짜 교인증을 만들었고, 그 가짜 서류로 그 학교에 취업했다.

 

그런데 그 학교에 취업하고 나서 금방 안 사실은 그 학교 교사들의 절반 정도는 교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구태여 묻지 않았으니 자세히 알 순 없었지만, 그들도 어쩌면 나처럼 가짜 교인증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되었다.

 

당시는 누구나 그런 가짜 문서를 쉽게 마련할 수 있었는데, 그런 가짜 문서는 말할 나위 없이 결과적으로는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고 농락하는 것이지만, 그런 줄 알면서도 만드는 까닭은 일종의 절실한 소망 때문이다.

 

 그 후 나는 그 경험을 두 세 번 털어놨던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어떤 분들은 좀 싸늘한 눈길로 날 바라보는 경험도 했었다. 부끄러워 숨기고 싶었으면 구태여 발설하려 하지도 않았으련만, 별로 개의치 않고 내가 그런 일을 폭로하듯이 말했던 것은 죄과를 참회하자는 뜻도 아니고 남을 교묘히 속여먹은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가짜 문서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고 그런 것을 통행시키는 사회구조의 부조리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꺼냈던 얘기였다. 그러나 기독교계 기관이라는 명목으로 취업희망자에게 교인증을 요구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헌법을 위배하는 일이란 점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만일 정경심 교수가 검찰의 기소내용처럼 자녀들과 합작해서 허위서류를 만들어 딸로 하여금 사용하게 했다면 범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녀 자신에게 그런 문서를 만들 권한이 있었고 딸이 스팩 일을 얼마간 했기에 다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냥 관행 따라 대수롭지 않은 생각으로 만들었다면, 도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야 없다 하겠지만 국가가 나서서 법적 책임까지 지라는 것은 지나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에게 잘못된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문제의 핵심은 그런 가짜 서류를 만들고 싶게 하는 사회구조이고, 그래서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는 이들은 마치 특권자들처럼 만들고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은 만들지 못하는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상이라 하겠다.

 

그러니 국가(권력)가 해야 할 일은 도덕적 과오를 저지른 몇 명 소수인들을 꼭 집어내서 징벌하기보다 그런 잘못된 사회구조와 세상을 고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관점 때문에 나는 이젠 재판관의 판결에 관심을 갖고 있다. (2020.5.12)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ongsupyoon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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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5
10년 만의 모국 방문

 

지난 10월 3주간 모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만 10년 만의 고국방문으로 몇 가지 느낀 점이 있어 적어보려 한다.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다만 그런 것들이 보는 관점에 따라 이렇게도 보이더라고 말해 보려는 것이다.


머무는 동안 교통은 주로 지하철을 이용했다. 지하철에 타면 교통안내를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한다. 그 중 한국어로 할 경우 예를 들면 “다음 정거장은 공덕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같이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공덕역’이라든가 ‘오른쪽’이라는 낱말은 슬쩍 지나가 듯 들리고 ‘입니다’ 소리만 명료하게 들린다. “다음 정거장은 고옹 더억 역. 내리실 문은 오오르은 쪽 문”이라고만 안내한다면 귀가 어두운 사람도 잘 들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광판이 있으니 내릴 역에서 못 내리지는 않는다.


 한국사회에선 오늘도 필요 이상의 경어와 격식과 위계질서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피곤하게 하고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내용의 충실성과 마음의 진정성인데 그런 내용과 마음이 필요이상의 겉치레에 밀려나 그 가치가 왜소해지거나 심지어 소멸되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경복궁과 창경궁은 전에 여러 차례 구경했던 바 이번엔 종묘엘 찾아갔다. 젊은 여성 안내원이 아주 잘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나만 아니고 대부분 관광객들도 마찬가지일 터인데,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을 들어도 구경을 끝내고 나올 땐 들은 얘긴 거의 다 까먹고 눈으로 본 것들에 대한 인상만 뇌리에 남게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대부분 고궁이나 고적 건물의 문 앞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그냥 겉만 보고 가라는 명령 같은 경고문이다. 그러니 구경을 하긴 했는데 머리에 남는 인상은 건물의 겉모양, 그것도 웅장한 지붕이 전부가 되고 만다. 그 건물 내부에 뭣이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겉만 보여주는 관광, 그래서 내부는 볼 수 없는 관광은 관광객들, 특히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속을 가리고 숨기는 투명성이 부족한 나라, 권위가 겉으로 특히 겉의 상층부 쪽으로 쏠려있는 사회로 인식시키기에 안성마춤일 듯싶다. 그리고 한 국가사회의 구조와 풍토가 겉으로 드러내는 권위는 대단한데 속은 감추는 쪽으로 발전한다면, 그러고도 내부에 적폐가 쌓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싶은 의문도 들게 한다.


평화시장에 가서 전태일 동상도 보고 겨울 내복도 쌌다. 을지로 중부시장에 들려 건어물도 샀다. 시장에 가기 전에 값을 흥정하라는 조언을 듣고 갔다. 상품에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준가격일 뿐 확정가격이 아니다. 진짜 값은 흥정으로 결정된다. 흥정이 가격으로 되지 않을 경우엔 양(量)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물론 캐나다에서도 주택매매의 경우처럼 흥정이 값을 조율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생활용품들은 붙어있는 가격표가 곧 매매가격이다. 그에 비해 한국에선 지금도 시장골목에서 흥정이 가격을 만드는 경우가 흔하다.


한국사회에서는 21세기인 오늘도 시민들의 삶이 돌아가는 사회현장, 특히 힘과 돈이 집중되어 있는 곳일수록 기준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제2 범칙, 곧 ‘흥정’이 통행한다. 심지어 힘의 칼자루를 쥔 자의 마음먹기 따라 농락되기도 하고, 널뛰기도 하고, 속도완급도 된다.


한국이 캐나다보다 잘 되어 있는 점도 많다. 모든 공공건물만이 아니고 지하철 안에서도 스마트폰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어디나 와이파이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다. 그리고 시골 어느 두메산골에도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도로와 교량시설이 잘 되어 있다. 


언론의 표현 자유도 무한정 허용되어 있고 시위의 자유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한국은 그처럼 외양만은 아주 선진적이다. 그러나 그 포장 속에 담겨있는 내용 역시 겉포장만큼 잘 정비되어서 누구나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우받고, 사회전반에 신용과 신뢰가 편만해지려면 아직은 넘어야 할 고비가 제법 남아 있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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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supyoon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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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일본제품을 안 산 까닭

 

 

 

 “일본인은 내부적으로는 부러울 정도로 친절하고 근면하며, 또한 결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처럼 안으로는 이상하리만큼 단결력을 보여 자석처럼 달라붙은 일본인의 단결력이 외부 것에 대해서는 배타의식으로 작용하는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 붙고 따라 잡아라!』 기업과 정부와 국민이 일체가 되어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는 ‘일본주식회사’ 경제대국, 팽창주의에 대해 무언가 불길한 소름이 끼친다고 하면 저의 과잉반응이라고 하겠습니까.”

 

 “일본인 피폭자 위령비는 공원 안에 있습니다. 한국인 위령비는 공원 밖에 있습니다. 일본인의 안과 밖에 대한 구별은 죽은 자의 영혼까지도 차별하는 것입니다. ‘노 모어 히로시마 No more Hiroshima’라 함도 좋으나 왜 ‘노 모어 밀리타리즘 No more militarism’이라 외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사이 일본인은 가해자임을 망각하고 피해자가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일본인은 자신의 죄악을 인정함에 있어 매우 인색한 것입니다. 죄악의식이 없으므로 해서 문부성 검정 교과서에 여전히 거짓을 기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본인의 몰역사성과 이웃부재감각에 대해서는 다만 비애를 느낄 따름입니다.”

 

 위 인용문은 박훈주 목사의 설교집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에 실린 ‘내가 표현한 일본인’이란 글의 한 부분이다. 그가 작고한 후 제자들이 출판했다는 59편의 설교로 엮여있는 책에서 이 글만 설교문이 아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시대 일본에서 일본문학과 신학을 전공했는데, 광복 후 귀국하여 목회자로서 그리고 대학교수로서 일했다. 


위 제목의 글은 그가 학술회의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의 신학대학시절의 동교생들 앞에서 들려준 그의 일본인관이다. 그는 내 둘째 며느리의 부친이지만 며느리가 결혼해오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이므로 그 분과 나는 상면한 일이 없다.


 꽤 여러 해 전에 어느 지면에서 했던 말이라서 반복하는 말이 되겠는데, 나도 아내도 ‘최근까지’ 일제상품을 사본 일이 없다. 일종의 대일혐오감에서 출발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더 주된 까닭은 대일경계심, 즉 일본의 소아병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다. 


나는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이 어떤 역사환경에서 그들 나름의 민족의식과 민족주의를 키워왔고 간직하고 있는지 아는 게 없다. 그러나 일본은 역사상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상호선린관계를 추구했다기보다 항상 도둑행위나 침략행위를 일삼았다는 점과 그리고 일제강점기 시대에 한국어와 한국인의 성씨 등을 말살하려 했다는 점 등에서 일본의 민족주의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폐쇄적임이 분명하다.


패전 이후 그것을 고쳐 유니버셜리즘(보편주의)적이 되려 하기보다 오히려 교육까지 동원해서 그 폐쇄적 민족주의를 계속 유지하려 하는 국가행위는 공존공영을 추구해야 마땅한 현대의 지구촌 사회에서 대단히 위험한 이념주의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그런 위험성은 그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강해지면 해질수록 더 증대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대학시절 이후 나는 일제상품을 단 한 가지도 사지 않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그런 생각이나 행동양식을 내 자식들에게까지도 딱 한 번 이야기 했을 뿐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아 왔다. 누구나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살 권리가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아는 분들이 선물로 준 일제 물건을 마다하지도 않았다. 그 분들의 성의와 사랑을 내 고집보다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헌데 우리 부부는 그 보이지 않는 ‘일본상품 사지 않기’ 룰을 딱 한 달 전에 중단했는데, 공교롭게도 요즘 일본이 한국에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소재 세 가지를 수출하는데 규제를 가한다는 뉴스가 전해오고 있어서 우리의 결정이 참 난감한 것이 되어버렸다. 60년 이상 지켜온 나름의 법칙을 바꾸자마자 변을 당한 꼴이 되어서다. 해서 우리 내외는 지금 아베 신조의 최근 행위를 대단히 신중히 겨눠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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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supyoon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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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8
종교에 대한 비전문인의 노닥거림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들은 정치인과 종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치인이야 말로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세상의 방향을 잡아 틀기도 하는 무지무지하게 힘센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힘으로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이들이건만 정치인들은 대부분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아닌 비정치학 출신들이다. 


그래선지 그들 중에는 권력을 사적인 소지품처럼 써먹으면서 도무지 상식 밖의 이해 불가한 부정부패행위를 저지르는 이들이 예상외로 많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민주정치체제의 나라에선 정치인에겐 임기란 것이 있고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 부적격자들은 퇴출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아주 흥미 있는 점은 부적격정치인을 걸러내는 사람들이야말로 일반국민들, 곧 정치학에 대해 전혀 비전문인들이란 점이다.


 그에 비해 종교인은 전문교육을 받고 전문적 지식으로 전문분야에서 일하면서 그 전문성과 부여 받은 권한으로 인간의 정신생활을 관리 관할하고 길잡이 역할을 하는데 어떤 경우를 보면 실로 인생 자체를 통째로 들었다 놨다 하기도 한다. 


실로 막강한 힘을 가진 직업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들 중에도 도무지 상식마저 건너뛰는 이상한 논리를 펴거나 이상한 행태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무런 재검과정 없이 그 직업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종교인이야말로 정치인보다 더 힘센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뭔가 모순된 현상을 보노라면 그런 모순이나 악폐를 제어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 하나가, 그게 종교에 대해서 전혀 비전문적인 사람들이 종교에 관해서 또는 경전의 내용에 대해서 과감하게 노닥거려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와는 거리가 먼 과학자나 역사가나 언론인 같은 사람들이 순전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종교를 말해보고 경전을 논해보고 신을 이야기 해본다면 그러는 가운데서 보다 보편적인 어떤 종교관 경전관 신관 같은 것이 만들어져 나올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런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관조들에 의해 종교인들이 말하거나 보여주는 도무지 이상한 논리나 행태들이 점검되고 걸러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내 생각엔, 인간이란 존재는 유종교인이든 무종교인이든 유신론자든 무신론자든 마음의 저 밑바닥에 내려가 보면 그 어떤 원초적인 것과 관계 지워져 있지 않겠나 싶다. 단지 삶과 죽음이란 존재적 한계상항 때문만 아니라, 삶 그 자체가 실존적으로 거처하는 사회의 현장에서 소위 선과 악이라는 것, 의와 불의라는 것, 사랑과 미움이라는 것, 이롭고 해롭다는 것 등등과 잠시도 빗겨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인간의 존재적 한계성과 실존적 불가피성에 대한 자각과 그리고 그런 것들과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이 좋겠는가 하는 유익관계성을 언어화 한 것이 경전이고 행태화한 것이 종교의례가 아닐까 싶다. 그런 생각 때문에 거기까지는 좋은 것이라고 본다. 


한데 문제는 종교의 그 아리송한 면을 인간의 이해력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것으로 희화화시키거나 편파화시켜서 심지어 그걸 사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데 심각한 폐단이 있다고 보아 진다. 바로 그런 잘못된 편집성을 막는 방법의 하나가 위에서 말한 종교에 대한 비전문인들의 노닥거림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가령 나는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내가 죽은 후에 갈 나라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인간의 두뇌로선 어느 누구도 경험해본 일이 없는 어떤 공간적 ‘나라’를 실재하는 나라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종교가 종교라는 이름을 빌려서 인간이 결코 경험할 수 없고 또 인간의 두뇌가 표현시킬 수 없는 그 어떤 나라를 언급하고 강조하는 것은 내 견해로는 종교로서의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 참 벗어난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종교란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마땅한 것이고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연습하고 필요하면 토론도 하고 그래서 그것을 생활로 나타내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는 행위다. 해서 필요하면 기도도 하고 경전도 읽고 예배도 드리고 찬송도 부르고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종교란 인간생활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인간의 두뇌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전혀 불가해한 영역으로 유혹하거나 빠져들게 하는 것은 종교라고 보지 않는다. 이것은 이 크리스마스 계절에 우연히 TV에서 요즘 가짜뉴스가 엄청나게 횡행한다는 뉴스를 보다가 떠오른 생각을 적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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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sup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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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7
‘나그네가 되십시오’

 

올해는 마르틴 루터가 개신교를 개혁한지 5백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해이다. 정확히 말하면, 루터는 종교를 개혁(revolution)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를 개혁(reformation)한 인물이다. 그는 강력한 성경주의자로서 당시의 교회(가톨릭)가 면죄부를 파는 등 잘못된 관행에 젖어있는 것에 반기를 들고 성경의 본래의 정신과 노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폈던 것이다. 


 그가 외골수 성경주의자임을 입증하는 한 예로, 그는 당시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것은 성경의 내용을 파괴한다고 해서 코페르니쿠스를 강력히 비판했다. 물론 당시 지동설을 반대한 것은 단지 루터만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면에서 볼 때, 루터는 종교적으로는 순수하다고 할 수 있어도 사상적으로는 개방적이라고 평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는 희랍사상 같은 것은 거부했거나 무시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글의 제목 ‘나그네가 되십시오’는 도마복음에 나오는 말이다. 모두 114절로 되어있는 도마복음서는 예수의 제자 중 하나인 도마(Thomas)가 전한 복음서라고 하는데, 그 중 제42절은 고작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가 되십시오’”란 짧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기적, 재림, 종말, 부활, 심판, 대속 등의 어휘가 거의 나오지 않는 도마복음서를 읽어가다 보면 마치 노자의 도덕경을 읽는 느낌을 갖게 한다. 


 예수의 행적이나 말씀을 기록한 문서는 원래 네 개의 복음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훨씬 많은 종류의 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랬던 것이 로마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의 신조와 경전내용을 통치이념으로 사용할 마음을 먹고 성서의 통일을 요청함에 따라, 교회가 공의회(니케아 공의회 325년)를 열어 여러 다양한 복음서들 중 네 개만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모두 폐기처분했다고 한다. 


 도마복음서도 그렇게 폐기처분당한 책인데, 일부 교도들이 다른 여러 복음서들과 함께 항아리에 담아 땅 속에 묻었던 것을 1945년 어느 날 이집트의 한 농부가 밭갈이를 하다가 항아리를 발견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도마복음을 ‘또 다른 예수’란 책으로 풀이한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는 위 “나그네가 되시오”를 “집착에서 해방되라”는 말로 볼 수 있다면서 “우리의 인습적이고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생활방식이나 사유방식을 뒤로하고 새로운 차원의 삶, 해방과 자유의 삶을 향해 출발함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설해 놓았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자신도 알게 모르게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위에서 루터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냉정하게 보면 그가 성경만이 절대진리라는 절대편견에 얽매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당시 루터의 자리에 예수가 있었더라면 어쨌을까 생각해보면서, 요즘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도, 만일 예수가 오늘을 살아간다면 그도 동성애자를 거부할까 생각해보게 된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동성애는 타고나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훈계나 교육적 훈련으로 바꿔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섹스와 관련된 것이라서 도덕적 관념 면에서 수치스러운 바가 없진 않지만, 그러나 마치 빨간 머리카락이나 파란 눈처럼 그가 태어날 때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차원에서 만이 아니고 교회차원에서마저 그들을 죄인으로 취급한다. 


 세상은 쉬지 않고 변하고 발전한다.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 밝혀지고 새로운 이론들이 끊임없이 산출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새로운 사실과 이론에 힘입어 더 풍요롭고 더 자유롭게 살아간다. 창조의 세계에 절대진리가 없지 않겠지만, 그러나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삶은 상대적 리얼리티 가운데서 영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이런 저런 편견이나 아집에서 되도록 벗어날 때 우리는 그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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