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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를 팔아먹은 집단의 원흉으로 알려진 일당(一堂) 이완용이 국전(國展)의 전신 조선미술전람회(鮮展)가 태어난 1922년 첫 전시회에서 서예부문 심사위원이었다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이 된다. 매국노가 서예가라니! 그러나 사실이다. 열 살때 대 부호요 세력가 집으로 양자를 간 이완용은 16살 되던 해부터 한말의 서예가 이용희(李容熙)에게 서예를 배웠다.


 어려서 신동 소리를 듣던 이완용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니 글씨도 그 중 하나였다. 그의 서예 실력이 알려져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임금 고종으로부터 사액(賜額 : 임금이 서원, 누각 등에 이름을 지어 줌) 현판을 쓰라는 명을 받은 적도 있다. 그의 글씨는 바다 밖으로도 알려져 다이쇼 일본 천황은 이완용의 글씨를 보고 싶다며 그에게 휘호를 부탁했다. 이완용은 천황이 보낸 비단에 14자로 "未離海底千山暗/乃到天中萬里國"(바다 속을 벗어나지 못해 온 세상이 캄캄했는데 하늘 가운데 이르러 온 세상이 밝아졌네)이라는 내용의 천황 통치로 온 세상이 밝아졌다 찬양하는 자작시를 써서 보냈다.


 나는 이완용의 친필 글씨를 밴쿠버에서 유학 시절에 본 적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의사 K씨 댁에서 화선지 반폭에 행서로 쓴 이완용의 자작 한시(漢詩)였다. 글씨에 대한 사람들의 말이 많을까봐 1층 응접실이 아니고 2층방 한 구석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에 숨어있듯이 걸려 있는 족자. 그의 글씨는 필력(筆力)이 무척 기운차고 고고하며 마치 대원군 난초를 보는 것 같았다.


 옛날에 붓글씨는 점잖은 사람들이 여가에 즐기는 풍류,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고위직에 있던 관리들 중에는 붓글씨를 남긴 사람들이 여럿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어려서 서당을 다녔기 때문에 운필에 능하고 필세(筆勢)는 견고하다 하겠으나 글씨에 시골티가 난다. 내가 안동, 대구 등 시골에서 배운 글씨의 시골티를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박정희 대통령은 사범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서예를 배웠을 것이다. 운필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보다 더 견고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예술성에 있어서는 그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정치가들 중에서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꼽으라면 서슴지않고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종필을 꼽는다. 그의 글씨는 놀라운 운필법에 필체는 단아 방정하다. 뒤이은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은 권력으로는 큰소리 칠 수 있을지 몰라도 붓글씨는 이 정도라면 차라리 내놓지 않는 게 더 낫지 싶다.


 그림, 특히 구상은 미술에 문외한들에게도 ‘잘 그렸다’와 ‘잘 그리지 못했다’는 느낌이 비교적 빨리 온다. 그러나 서예는 다르다. 서예는 작품을 대하는 순간 구성, 자형(字形), 점획(點?), 필세(筆勢) 등에 의한 조형미를 시각적으로 느끼는 예술. 그러니 작품에서 풍기는 서권기(書卷氣)나 격(格)을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서법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이 좋다.


 조각이나 무용, 음악이나 시(詩), 서예 같은 예술 분야에서 높은 경지에 오르자면 사람부터 바로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예술적 재능과 사람은 별개로 생각한다. 주위를 살펴보면 예술 분야에서 발군의 업적을 나타낸 사람들 중에는 사람이 되기는커녕 인간적으로도 망나니요 개차반들이 수없이 널려있지 않은가. 매국노로 불리던 이완용도 당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서예가였다. 연산군 때 희대의 간신이라 불리던 임사홍도 그의 아들 숭재와 더불어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서예가. 이 두 사람 말고도 뛰어난 예술인의 일생을 적은 책을 보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의 궤도에서 벗어난 기인, 부도덕한 사람들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김윤희가 쓴 <이완용 평전>을 보면 이완용은 매사에 신중하고 철두철미 현실주의자였으며 그의 많은 재산에 걸맞지 않게 비교적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다른 귀족들처럼 여자를 탐하지도 않았고 여가에는 서예에 열중, 뛰어난 서예 작품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찾아가서 작품을 구경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한다.


 김윤희를 따르면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게 된 것은 재물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인정한 가운데 나름대로 ‘합리적인 실리’를 추구한 결과라는 것이다.


덮어놓고 분개하거나 실속없는 의리만을 내세우는 옹고집을 버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는 것이다.


 어쨌든지 우리나라를 일본에 합방시키는데 앞장선 사람이 이완용임은 부인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책에는 한일합방을 앞장서서 적극 지지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벼슬(후, 잭, 자, 남작)과 막대한 재물을 받은 조선의 지도자급 인사들의 76명 명단이 있다. 진짜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은 이완용을 포함한 바로 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중에 조선왕 순종의 장인 윤택영도 끼어있는 것을 보니 “세상에 믿을 것도 없고, 안 믿을 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76명 중 작위와 상금을 거절한 사람은 8명뿐이다.) 임금의 장인이 나라 팔아먹은 76명 인사 명단에 올랐다고 해서 이완용의 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신라말의 대문호 고운(孤雲) 최치원이 하늘도 놀랄 패륜행위를 저질렀다 해서 후세 사람들이 그의 유려한 문장을 외면한다면 손해는 누가 보는 것일까? 예술과 사람을 떼어놓고 보질 못한다면 별로 뛰어나지도 못한 예술가가 그이 인격이 고매하다는 이유 하나로 필요 이상의 대접을 받을 것이고, 천추만대에 예술의 향기를 뿜을 걸작도 그 작가가 인간이 고약하다는 이유로 외면한다면 예술의 큰 부분이 유실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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