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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현이 쓴 ‘매천야록’은 고종 재위 동안의 일기를 썼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고종 치세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적었습니다. 그의 책 ‘매천야록’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의 띄었습니다.

 …서수붕이 처음 임금을 뵜을 때 조선의 기수(氣數: 저절로 오고가는 길흉화복의 운수)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임금이 그 연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우리나라(청)는 벼슬을 팔아먹은 지가 십년도 안되었는데 세상이 어지러워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국(조선)은 벼슬을 팔아먹은지 삼십년이나 되었는데도 임금 자리가 아직 편안합니다. 지수가 왕성하거나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이 크게 웃으며 부끄러움을 모르자 서수붕이 나가면서 말했다. “슬프구나 조선의 백성이여”

 일개 공사가 한 나라 임금의 매관매직을 비웃었으나 임금은 그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위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 제26대 임금 고종입니다. 고종은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헌종의 어머니 조대비(妃)와 밀약을 하여 자기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김씨의 놀이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난국에서 빠져 나오는 수단으로 대원군의 아들을 임금 자리에 앉히는데 조비가 동의를 한 것이지요. 그러니 고종은 제왕수업이 없이 임금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혼인을 하기로 한 안동김씨 김병학의 따님과 약속을 파기하고 여주 민치록의 외동딸과 운현궁에서 결혼하였습니다.

 고종은 성인이 되어서도 현명한 군주는 못되었다는게 사가들의 일반적인 평인 것  같습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12살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 맨처음 내린 명령이 “재동에 있는 군밤장수를 사형에 처하라”는 전교(傳敎)였다고 합니다. 아무리 어리고 철이 덜든 임금이라 하더라도 군밤 하나 달라는 것을 거절했다고 사형시키라니 이 어린 군주의 장래 치정(治政)을 예고하는 징조같이 보여 찜찜한 기분이 듭니다. 민치록의 딸 민비는 신랑보다 더 영리하고 재바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총명함과 기지는 모두 친정과 친정 족속들의  이권을 불리기 위한 것이었다는게 사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입니다.

 고종 부부는 임금으로서의 체통(體統)에 맞지 않게 행동할 때가 자주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로 ‘매천야록’에 보면 임금께 생일 선물을 올리는데 민영환이 올린 비단 50필과 황저포 50필을 받고 임금의 낯빛이 변하더니 용상 아래로 집어던졌다 합니다. 다음에 민영소가 올리는 춘주 500필과 갑초 500필, 백동 5합, 바리 50개에 다른 물건을 보자 임금 얼굴이 기쁜 색으로 바뀌었다 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안할 짓을 마구 하니 이래서야 임금 체통이 설 수 있겠습니까? 임금 부부는 노래를 좋아해서 매일밤 평복을 입고 앉아서 왕후는 넙적다리를 치면서 “좋지 좋아” 하며 섬돌 아래서 잡가를 부르는 사람들에 박수를 보내고 놀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가끔이 아니라 거의 매일 이러니 상품과 막대한 상금을 어이 하겠습니까?. 그때 시국이 노래 부르고 춤 출 시국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민비는 성질이 사악한 데가 있어 의화군 이강을 낳은 상궁을 잡아서 음부의 양쪽 살을 도려낸 뒤 대권 밖으로 쫓아냈다고 합니다. 또한 고종은 부인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지 닷새만에 예전에 상궁으로 있던 엄씨를 다시 궁궐에 불러 들었습니다. 십여년 전에 고종이 엄씨를 총애한 적이 있는데 민비가 크게 화를 내어 민비가 엄씨를 죽이려 했답니다. 임금의 간곡한 만류로 엄씨는 죽음을 면해 대궐 밖으로 쫓겨 났는데 이제 민비가 죽가 겨우 닷새도 되지 않아 다시 불러들이니 백성들은 임금이 양심이 없다며 모두 한탄했답니다.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에 자기 어머니의 성급한 재혼을 빗대어 “상여를 따라가는 눈물도 마르기 전에…”라 했다더니 임금 고정이 그 꼴이 되고 말았네요.

 민비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난가는 길에 지나가는 마을의 촌할미가 민비에게(중전인 줄 모르고) “중전인가 뭔가 때문에 이렇게 피난을 가는구려” 하는 말을 듣고 나중에 그 마을을 싹 없애버리라고 했답니다.

 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고종 내외는 마음 한구석이 덜 채워졌는지 무당이나 풍수, 점쟁이, 사기꾼들의 말을 잘 믿을 뿐만 아니라 가끔 나라의 일도 이들의 말대로 처리할 때가 있었다 하니 놀랍고도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이들 부부는 확고한 외교방침이 없었던지 여러나라 세력들이 제나라 이익을 찾아서 한양 바닥에서 활동하는 동안 일본 세력에 붙었다가 러시아측에 붙었다가 별다른 계책도 없이 강자의 편에 붙으려고만 했습니다. 임금이 잠을 자는 곳이 안전한 곳이 못된다고 생각해서 잠은 러시아 공관에 가서 잤다니 이것이 한 나라의 임금이 할 짓이겠습니까?

 고종은 자신을 사색당파의 노론에 속하는 사람으로 보고 노론을 만나면 ‘친구’고 소론은 ‘저쪽’, 남인과 북인은 ‘그놈’ 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임금도 사람인지라 좋고 싫어하는 당색이 있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노골화하고 이것이 인선(人選)에도 반영된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덕일에 의하면 망국 후 일제는 76명의 조선인에게 귀족의 작위와 돈을 주었는데 순종의 장인 윤택영도 있었답니다. 한나라 임금의 장인이 이꼴이니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당 소속을 쉽게 알 수 있는 64명 중 북인이 2명, 소론이 6명, 노론이 56명이었다고 합니다. 고종이 자처한 노론이 나라를 팔아먹는데 참여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고종은 아버지 이하응과 조대비와 밀약에서 왕좌에 앉혀진 임금입니다. 결혼은 민비 대신에 애당초 안동김씨 김병학의 딸을 왕후로 간택하기로 약속했는데 그 약속이 지켜지질 않았습니다. 애당초 약속대로 김병학의 따님이 왕후가 되었으면 고종의 생애가 달라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겠습까.

 고종이 임금으로 있던 44년은 조선이 천천히 망해가기 시작할 때의 혼돈과 무질서가 시작된 뒤였습니다. 파도같이 밀려오는 외세에 노둔으로 먼죽번죽 하는 고종같은 임금이 제격이었는지 모릅니다. 44년간 임금자리에 있었던 고종은 망국군주가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다름 3가지인 것 같습니다.

 첫째, 자질부족과 함량미달. 고종 내외가 매관매직을 상습으로 했습니다. 전국 수령의 3분의 2는 돈으로 산 것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둘째, 고종은 시대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죽였고 아관파천으로 온건 개화파를 죽였습니다. 또한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동학농민군을 죽였습니다. 천고의 말마따나 입에 달면 삼키고 입에 쓰면 뱉어내는 정치의 반복이었습니다. 셋째, 편의적 정치형태를 반복했습니다. 대세에 순응하는 척하다가 뒤집는 것이 고종 정치의 특색이었다 합니다.

 이덕일에 따르면 고종이 독립운동가 이회영 등과 몰래 접촉하여 망명을 준비한 것이 마지막 승부수였다고 합니다. 1919년 1월20일 고종의 병이 깊어졌는데 그날 밤 숙직한 인물이 이완용과 이기용이었다지요. 고종은 그날 밤 이 두 매국노만 지켜보는 가운데 덕수궁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사바세상을 하직하는 눈을 감았다 합니다. 그때 그의 나의 만 67세였습니다.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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